친구야, 확인한 기록을 바탕으로 말씀드리면, 1894년 9월 27일 예천 싸움에 일본군이 직접 참전했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튿날인 9월 28일에는 일본군이 예천에 도착하여 반동학 세력에 협력을 제안하고, 붙잡힌 사람들을 죽이라고 요구한 기록이 분명히 있습니다. 석문 전투도 바로 그날 벌어졌습니다. 다만 두 곳의 일본군이 같은 부대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db.history.go.kr)
먼저 자료의 성격과 날짜를 짚고, 주요 내용을 시간순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갑오척사록』을 읽을 때 알아둘 점
갑오척사록(甲午斥邪錄)은 ‘갑오년에 사악하다고 여긴 것을 물리친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척(斥)은 ‘물리칠 척’, 사(邪)는 ‘사악할 사’, 록(錄)은 ‘기록할 록’입니다. 여기에서 저자가 ‘사악하다’고 규정한 대상은 동학입니다.
이 책은 예천의 반동학 세력 쪽에서 작성한 기록입니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을 도적이나 역적으로 묘사하는 말, 병력과 전과에 관한 숫자는 그대로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누가 언제 무엇을 했다고 기록했는지와, 저자가 그것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나누어 읽어야 합니다. 반재원(潘在元)이 쓴 서문은 1895년 봄에 작성되어 있으므로, 정확히는 1894년의 활동을 기록하고 이듬해 정리한 자료입니다. (db.history.go.kr)
집강소(執綱所)는 글자 그대로 ‘기강을 잡는 곳’입니다. 집(執)은 ‘잡을 집’, 강(綱)은 ‘벼리 강’, 소(所)는 ‘곳 소’입니다. 예천 집강소는 동학농민군의 자치기구와 달리, 군수의 지휘를 받으며 동학농민군에 맞선 조직이었습니다. (db.history.go.kr)
아래의 날짜는 모두 양력입니다. 원문 날짜는 대조할 수 있도록 괄호에 음력으로 덧붙였습니다. 반복되는 병력 점검과 긴 공문·제문은 줄이고, 사건의 흐름을 바꾼 주요 내용을 골랐습니다.
① 예천 집강소가 만들어지는 과정
다음은 『집강소일기』 음력 7월 기록입니다. 폭행·약탈에 관한 서술은 반동학 측의 기록이라는 점을 전제로 읽어야 합니다. (db.history.go.kr)
양력 연월일주요 내용
| 1894.08.05.〔음 7.5.〕 | 동학 무리가 전 영장 이유태의 집에 들어가 그를 때리고 재물을 가져갔다고 기록했다. |
| 1894.08.07.〔음 7.7.〕 | 아전 황준대의 동생 무덤을 파헤쳤다고 기록했다. |
| 1894.08.09.〔음 7.9.〕 | 아전 김병운을 때리고 그의 아버지 무덤을 파헤쳤다고 기록했다. |
| 1894.08.15.〔음 7.15.〕 | 우음동 접주 박래헌의 무리가 안동부사의 짐과 물품을 빼앗았다고 기록했다. |
| 1894.08.24.〔음 7.24.〕 | 예천의 아전과 주민들이 객관에 모여 대응 방법을 의논했다. |
| 1894.08.25.〔음 7.25.〕 | 집강소 설치와 무기 지급을 요청했고, 군수가 허락했다. |
| 1894.08.26.〔음 7.26.〕 | 임원 70여 명을 정하고 예천 집강소가 업무를 시작했다. 동학에 들어간 사람의 집을 헐고 처벌한다는 규칙도 만들었다. |
| 1894.08.28.〔음 7.28.〕 | 집강소의 깃발을 만들었다. |
| 1894.08.29.〔음 7.29.〕 | 군수가 집강소를 격려하고, 다섯 집씩 묶어 책임자를 두며 집마다 창을 지급하도록 했다. |
② 대립이 격해지고, 9월 27일 예천 싸움으로 이어지는 과정
다음은 음력 8월 기록입니다. 특히 11명을 산 채로 묻어 죽인 사건이 이후 대립의 중요한 쟁점이 됩니다. (db.history.go.kr)
양력 연월일주요 내용
| 1894.08.31.〔음 8.1.〕 | 집강소가 안팎의 병력을 점검했다. 기록상 약 1,500명이었다. |
| 1894.09.01.〔음 8.2.〕 | 동학 측이 길을 막아 상인들의 통행과 장터가 위축되었다고 기록했다. |
| 1894.09.02.〔음 8.3.〕 | 관청의 조총·화약·탄환을 집강소 병력에 지급하고 훈련했다. |
| 1894.09.07.〔음 8.8.〕 | 금곡 동학 측이 지역 인사들의 인도를 요구했다. 박현성은 구금된 동학인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
| 1894.09.08.〔음 8.9.〕 | 지역 인사들이 집강소에 돈과 곡식을 보탰다. 집강소는 동학에 들어간 주민들의 집을 헐고 이들을 가두었다. |
| 1894.09.09.〔음 8.10.〕 | 집강소 병력이 붙잡은 11명을 모래사장에 묻어 죽였다. 기록은 신원과 이름을 조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
| 1894.09.10.〔음 8.11.〕 | 금곡 측이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요구했지만, 집강소는 조사하지 않아 알려줄 수 없다고 답했다. |
| 1894.09.11.〔음 8.12.〕 | 생매장 사건 뒤 동학 측과 관청의 대립, 길과 물자 차단이 더욱 심해졌다고 기록했다. |
| 1894.09.12.〔음 8.13.〕 | 유천 접주 조성길과 구금된 동학인 7명을 풀어주었다. |
| 1894.09.14.〔음 8.15.〕 | 소야 측이 무분별한 살해를 항의하고, 생매장을 주도한 사람의 책임을 요구했다. |
| 1894.09.20.〔음 8.21.〕 | 여러 지역의 동학 지도자들이 공동으로 항의했다. 집강소는 안동에 협조를 요청했다. |
| 1894.09.22.~24.〔음 8.23.~25.〕 | 봉쇄와 충돌이 격해졌다. 예천 군수와 집강소가 감영·안동에 구원을 요청했다. |
| 1894.09.25.〔음 8.26.〕 | 용궁의 무기가 전날 동학 측에 탈취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읍내 식량난도 심각했다. |
| 1894.09.26.〔음 8.27.〕 | 집강소가 총수 100여 명을 현산 부근에 미리 숨겨 공격에 대비했다. |
| 1894.09.27.〔음 8.28.〕 | 박현성·김노연의 방문과 구금 뒤, 서정자들·유정 및 광천 일대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이 패했다. |
| 1894.09.28.〔음 8.29.〕 | 안동 지원군과 일본군이 도착했다. 집강소 측은 금곡의 동학 접소와 접주 거처를 불태웠다. |
③ 패전 뒤 체포·처형과 재집결
다음은 음력 9월 기록입니다. ‘소식이 들렸다’거나 ‘정찰병이 보고했다’는 내용은 그날 예천에서 소식을 받은 것이며, 사건이 모두 그날 일어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db.history.go.kr)
양력 연월일주요 내용
| 1894.09.29.〔음 9.1.〕 | 예천에 있던 일본군이 안동으로 떠났다. 화지·퇴치의 동학 접소를 불태웠다. 일본군이 상주 이정의 동학군을 격파했다는 소식도 기록했다. |
| 1894.09.30.〔음 9.2.〕 | 안동 지원군 등을 돌려보냈다. 길과 장터가 다시 열렸다. 선무사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거나 관련 없는 집을 태우지 말라고 경고했다. |
| 1894.10.01.〔음 9.3.〕 | 군수가 돌아온 주민을 추궁하지 말고, 관청을 사칭한 약탈도 단속하라고 알렸다. |
| 1894.10.02.〔음 9.4.〕 | 남영의 지휘관이 병정 250명을 이끌고 예천에 왔다. |
| 1894.10.04.〔음 9.6.〕 | 소야 부접주 고상무 삼형제가 용궁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
| 1894.10.08.〔음 9.10.〕 | 이종해를 붙잡아 집강소 병력이 때려 죽였다. |
| 1894.10.11.〔음 9.13.〕 | 금곡에서 붙잡은 32명 중 31명을 풀어주고, 정명언과 화지의 윤상명을 처형했다. |
| 1894.10.17.〔음 9.19.〕 | 감영이 이종해 살해를 질책하며, 사사로이 죽이지 말고 법에 따라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
| 1894.10.18.〔음 9.20.〕 | 단양·제천에 동학군이 모인다는 소문에 고개와 길목의 경계를 강화했다. |
| 1894.10.20.〔음 9.22.〕 | 동학군이 상주에서 다시 모여 예천·안동·의성을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받았다. |
| 1894.10.25.〔음 9.27.〕 | 정찰병이 상주에 박현성·김노연·권순문 등이 모여 있다고 보고했다. |
| 1894.10.26.〔음 9.28.〕 | 봉란부와 남산에서 제사를 지내고, 상주 방향으로 총을 쏘았다. |
| 1894.10.27.〔음 9.29.〕 | 의성·풍기·영천 등에 위급할 때 도와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
| 1894.10.28.〔음 9.30.〕 | 일본군이 이틀 전 상주에 들어가 동학군을 공격했다는 정찰 보고를 받았다. |
여기서 날짜를 꼭 구별해야 합니다. 『갑오척사록』의 음력 ‘9월 27일’은 양력 10월 25일이며, 친구야가 물으신 양력 9월 27일 예천 싸움은 원문의 ‘8월 28일’입니다.
④ 경계 강화와 최맹순 부자 등의 처형
음력 10월과 11월에는 경계·훈련을 이어가다가 동학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합니다. (db.history.go.kr)
양력 연월일주요 내용
| 1894.10.29.〔음 10.1.〕 | 집강소 병력을 점검하고, 읍내 병력에게 검은 옷을 입혀 구별했다. |
| 1894.11.03.〔음 10.6.〕 | 동학 측에 빼앗긴 역의 말들을 조사하여 되찾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
| 1894.11.05.〔음 10.8.〕 | 군수가 활쏘기·총쏘기 대회를 열고 성적에 따라 상을 주었다. |
| 1894.11.06.〔음 10.9.〕 | 예천에서 동학군을 격퇴한 공로자들을 조사하라는 중앙의 지시가 도착했다. |
| 1894.11.09.〔음 10.12.〕 | 충주 등지에 동학군이 다시 모인다는 소식을 기록했다. |
| 1894.11.15.〔음 10.18.〕 | 최맹순의 무리가 적성동에 들어왔다는 급보에 병력 100여 명을 보냈으나, 도착했을 때는 떠난 뒤였다. |
| 1894.11.19.〔음 10.22.〕 | 상주에서 집강소 운영 규칙을 문의했다. |
| 1894.11.28.〔음 11.2.〕 | 동학인을 잡는다며 주민을 괴롭히는 이웃 고을의 군졸들을 단속하도록 했다. |
| 1894.11.29.〔음 11.3.〕 | 관리·토호·아전의 수탈을 지적하면서 동학인의 해산을 요구하는 대원군의 글이 도착했다. |
| 1894.12.03.〔음 11.7.〕 | 죄가 명백하고 무거운 사람은 먼저 처형한 뒤 보고하라는 감영의 지시를 받았다. |
| 1894.12.11.〔음 11.15.〕 | 동학 지도자 체포와 귀순자 해산을 지시하는 토포사의 공문이 도착했다. |
| 1894.12.17.〔음 11.21.〕 | 최맹순의 소재 보고를 받고 추격대를 보냈다. 벌천까지 추격하여 최맹순·최한걸·장복극을 붙잡았다고 기록했다. |
| 1894.12.18.〔음 11.22.〕 | 최맹순은 목을 베어 내걸고, 아들 최한걸과 장복극은 총으로 죽여 모래사장에 묻었다. |
| 1894.12.19.〔음 11.23.〕 | 세 사람의 처형을 감영 등 여러 기관에 보고했다. |
| 1894.12.20.〔음 11.24.〕 | 적성 일대의 경계를 강화하는 규칙을 보냈다. |
세 사람의 처형 날짜가 양력 1894년 12월 18일이라는 것은 국사편찬위원회의 『동학농민혁명사일지』에서도 확인됩니다. (db.history.go.kr)
⑤ 기록은 양력 1895년 1월까지 이어집니다
원문의 음력 12월 기록을 양력으로 바꾸면 일부가 1895년으로 넘어갑니다. (db.history.go.kr)
양력 연월일주요 내용
| 1894.12.27.〔음 12.1.〕 | 집강소 병력을 점검했다. |
| 1895.01.03.〔음 12.8.〕 | 안동에서 동학인 3명을 죽였다는 통문을 받았다. 현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
| 1895.01.04.〔음 12.9.〕 | 최맹순 등의 처형에 대한 답장이 도착했다. 감영은 부자를 같은 날 처형한 처리를 지적했다. |
| 1895.01.07.〔음 12.12.〕 | 상주 소모사가 동학군 진압을 위해 예천 병력 600명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
| 1895.01.08.〔음 12.13.〕 | 예천에서는 병력·식량 부족과 읍내 방어 문제 때문에 파견이 어렵다고 논의했다. |
| 1895.01.09.〔음 12.14.〕 | 파견할 사람을 고르기 위해 병력과 주민을 모으도록 했다. |
| 1895.01.10.〔음 12.15.〕 | 거듭된 독촉 끝에 지휘부와 병력 600명의 파견을 결정했다. |
| 1895.01.11.〔음 12.16.〕 | 예천을 출발하여 연화리에서 묵었다. |
| 1895.01.12.〔음 12.17.〕 | 함창에서 묵었다. 가족 등 100여 명이 뒤따라왔다. |
| 1895.01.13.〔음 12.18.〕 | 상주에 도착했다. 다른 지역까지 출전하라는 요구에는 반대했다. |
| 1895.01.14.〔음 12.19.〕 | 돌아오는 길에 용궁에서 묵었다. |
| 1895.01.15.〔음 12.20.〕 | 예천에 돌아와 병력을 해산했다. 감영은 이후 출동에 앞서 보고와 지시를 받도록 했다. |
9월 27일 예천 싸움에 일본군이 가담했는가
판단은 다음처럼 나누는 것이 정확합니다.
살펴볼 문제기록으로 확인되는 내용판단
| 9월 27일 일본군의 직접 참전 | 『갑오척사록』은 집강소 병력의 매복·사격·추격을 서술한다. 일본군 참전은 적지 않았다. | 직접 참전을 입증할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
| 일본군의 예천 도착 | 이튿날인 9월 28일 일본군 53명과 통역·화병 10명이 도착했다. | 도착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 집강소와의 협력 | 예천이 숙소와 물품을 제공했다. 일본군은 앞으로 자신들이 앞장서 공격하고 예천 병력은 뒤따르라고 제안했다. | 협력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
| 붙잡힌 사람에 대한 개입 | 집강소 병력이 잡아온 동학 잔당과 화약 운반자 2명을 일본군이 즉시 죽이라고 요구했다. | 살해 요구는 확인된다. 다만 그 문장만으로 실제 처형 완료까지 단정할 수는 없다. |
이 내용은 『갑오척사록』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설명에서 확인됩니다. 따라서 “일본군이 9월 27일 예천 전투에서 함께 싸웠다”는 표현은 근거가 부족하지만, “9월 28일 예천 반동학 세력과 접촉하여 군사적 협력을 제안하고 살해를 요구했다”는 표현은 근거가 있습니다. (db.history.go.kr)
9월 28일 석문 전투와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일본군 자료를 함께 놓으면 중요한 선후관계가 드러납니다.
양력 연월일일본군 기록의 내용
| 1894.09.24. 오후 7시 30분 | 부산의 중로병참감이 태봉 부근 동학군과 병참로의 위험을 이유로 지원을 명령했다. |
| 그 뒤 | 공병중대장은 충주에 있던 고토 소위와 문경에 있던 고스기 조장에게 각각 부하를 이끌고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
| 1894.09.28. 오전 9시 | 고토가 이끈 공병 25명과 일본인 인부 12명이 석문에서 동학군 약 600명과 싸웠다고 보고했다. |
| 1894.09.29. | 전투 보고가 전달되었다. |
출동 명령과 지휘관은 공병 제1대대 중대장의 보고, 전투 날짜·시간과 병력은 별도의 전과 통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경의 병력에도 지원 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은 확인되므로, “문경 병력은 동원하지 않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석문에서 직접 싸운 것으로 명시된 병력은 고토가 이끈 공병 25명입니다. (db.history.go.kr)
병참(兵站)은 병(兵), ‘군사 병’과 참(站), ‘머무를 참’으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속뜻은 군대가 움직이고 싸울 수 있도록 식량·탄약·운송·연락을 뒷받침하는 일입니다.
석문 전투 뒤 일본군은 가옥을 불태우고 총·칼·창·말·돈 등을 빼앗았다고 스스로 보고했습니다. 다만 두 일본군 보고의 총기와 가옥 숫자가 서로 달라, 하나의 확정된 숫자로 합쳐서는 안 됩니다. (db.history.go.kr)
두 싸움의 관계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