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훤당과 매계의 혼백이 깃든 느티나무

전라도 최최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인 옥천서원

퇴계 친필의 임청대 비와 비각 (전남 유형문화재 제77호)
김굉필과 조위 선생의 유배 생활을 지켜본 순천 임청대 느티나무
대한민국 생태수도를 지향하는 남도 순천은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순천만과 우리나라 국가 정원 제1호, 삼보사찰 송광사, 낙안읍성 등 명소가 많은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고장이지만, 일찍부터 영남과도 무관하지 않은 도시다.
만고 충신으로 추앙받는 사육신 중에서 유일하게 혈손을 보전한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선생의 본관지가 순천인 점이 그렇다. 대과에 급제한 엘리트 관리로 억울하게 왕좌에서 물러난 단종(端宗)복위를 도모하다가 대역죄인이 되어 아버지–본인-아들 등 3대가 멸하는 형벌을 받았음에도 둘째 아들 박순(朴珣)의 처 성주이씨의 친정 대구 달성군 묘골에서 친정집 하녀에 의해 기적적으로 손자 박일산(朴壹珊)이 살아남으로 대를 이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인연은 대구 출신의 문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과 김천의 매계(梅溪) 조위(曺偉) 선생의 혼령이 깃든 곳이다. 두 선생이 희생된 무오사화는 조선의 첫 사화(士禍)이자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으려고 해서 일어난 화(禍)라 하여 사화(史禍)로도 불리는 1498년(연산 4)의 화이다.
이때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한훤당은 곤장 80대를 맞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이 시절, 한 젊은 선비가 대봉(大峯) 양희지(楊熙止)의 소개장을 들고 찾아가서 배우기를 청하니 이가 훗날 조선 최고의 개혁정치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이다. 2년여를 지난 1500년(연산 6) 순천으로 이배(移配)되어 북문 밖에 살았다.
반면 매계는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오는 도중에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의주로 유배되어 같은 2여 년 후 한훤당과 같은 해 5월 순천으로 이배되어 서문 밖에 살았다. 혈기왕성한 젊은 날 스승 점필재 밑에서 동문수학하고 조정에 나아가 국정을 논하던 장래가 촉망되던 동갑내기이기도 한 그들이 하루아침에 죄인의 몸이 되어 낯설고 물선 순천에서 만났으니 만감이 교차하였을 것이다. 옥천(서천이라고도 함) 변 언덕에 돌을 쌓아 임청대(臨淸臺)라 하고 소요하며 울분을 달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연유로 한훤당은 젊은 시절을 보낸 대구에서는 이렇다 할 제자를 두지 못했는 데 비해 호남에서 유학을 크게 일으켰으니 최산두, 유계린, 윤신, 최충성, 유맹권 등이 제자들이고 김인후, 유성춘, 유희춘 등은 제자의 제자들이다. 특히, 하서(河西, 김인후의 아호)는 훗날 호남에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고 공을 기리는 필암서원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한훤당의 제자 최산두는 공의 스승 중 한 분이다.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를 자처한 한훤당은 경학(經學)을 중시했다. 반면에 매개는 사장(詞章)에 능했다. 이러한 학문적 취향은 성격에도 나타나 한훤당은 피화(被禍)를 담대하게 여겨 사자(使者)가 가져온 사약을 태연히 마시며 죽음을 맞이한 데 비해 매계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감내하지 못해서 그런지 현지에서 이승을 마감하며 유배문학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만분가(萬憤歌)”를 남긴 데서도 알 수 있다. 매게의 초상(初喪)은 한훤당 몫이었다.
그러나 한훤당 역시 1년 후 1504년(연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로 참형을 당하니 불과 4년여 순천 생활을 마감했다.
두 선생이 노닐며 학문을 논하고 울분(鬱憤)을 달래던 그곳에 1564년(명종 19) 부사 이정(李楨)이 한훤당을 기리는 경현당(景賢堂)을 건립하고, 4년 후인 1568년(선조 1)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사액 받으니 전라도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라는 두 가지 타이틀을 가진다. 서원 앞에는 1565년(명종 20) 세운 퇴계 친필의 임청대 빗돌과 이를 보호하는 비각이 있다. 또 임청대에는 수령 550여 년의 느티나무 보호수가 있는데 이 나무야말로 두 선생의 유배지에서의 일상을 지켜본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순천의 또 다른 경상도인으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매곡(梅谷) 배숙(裵璹)이다. 성산 즉 오늘날 성주가 본관이다. 퇴계의 추천으로 순천 교수로 임용된 그는 임기를 마치고도 둘째와 셋째 아들은 고향으로 보내고 본인과 맏아들은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여 문풍 진작에 크게 이바지해 이른바 정소(정철의 둘째 형), 허엄, 정사익과 더불어 순천의 옛 이름에서 따온 승평의 숨은 선비 즉 “승평사은(昇平四隱)”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매곡초당을 지어 심경과 근사록을 강론하고 “성정수제(誠正修齊)” 네 자를 걸어놓고,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를 학문의 기본으로 삼았다. 저서로 『매곡집(梅谷集)』이 있으며 해룡면의 미강서원(美岡書院)에 배향되었다. 순천의 매곡동의 이름은 그의 아호에서 비롯되었으며 매년 개최되는 매화 축제 역시 그가 초당에 심은 매화로부터 연유된다.
순천에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속담은 잘 생긴 사람이 많다는 뜻보다 인재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는데 한훤당을 비롯한 영남 사람도 일조했다. 호남과 영남의 연고가 어느 고을인들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순천은 좀 더 특별하다 하겠다.
첫댓글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다같은 나라땅인데 누가 편을 갈라는지.....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