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모든 죄는 고칠 방법이 있는데 단 하나의 죄 곧 교만은 고치기 참으로 어려운 죄다. 교만의 죄를 치료하는 방법은 고난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는 도적질이나 살인이 아니라 교만이다. 교만이 모든 죄의 중심에 있다. 루시퍼의 죄는 자신을 한없이 높이는 교만의 죄다.
우리는 사무엘하 24장을 읽어 나가다가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데 “도대체 다윗이 무슨 큰 죄를 지었단 말인가?”라는 생각에 이른다. 그가 요압에게 내린 명령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라는 그의 명령은 정부를 책임진 행정부의 수반으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었는가? 그리고 출애굽 때도 두 번이나 인구 조사가 있지 않았는가? 인구 조사는 하나님이 하라고 시켜놓고는 그 죄를 다윗에게 묻는 까닭은 무엇인가?
(삼하 24:3)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요압까지 나서서 막으려고 한 것을 보니 다윗의 명령이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타나지 않은 인구 조사에 담긴 죄란 무엇일까? 그것은 교만의 죄였다. 교만의 죄가 치료가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게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쁜 짓을 한 행위적인 죄들은 그것은 단죄하기가 쉽다. 법은 이런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하기란 식은 죽 먹기다. 그런데 사람을 교만하다고 정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죄이기 때문이다. 교만은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숨에서 온갖 악행을 조장하고 정죄 받지 않은 채 그 당사자를 지옥으로 데리고 간다. 이게 루시퍼의 문제였고 바리새인들의 문제였으며 본 장에서 다윗의 문제였다,
다윗은 인구 조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치적을 드높이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눈에도 나라는 안정되었고 그의 군대는 근동지역에서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맹위를 떨치고 있어 주변 나라들이 기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인구 조사를 시켰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온 다윗에게 이런 그의 교만한 마음은 위험하고 아주 큰 죄였다. 문제는 이런 마음이 다윗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백성들의 영적 상태이기도 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진노하셨다고 한 것이다.
(삼하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아니나 다를까 9개월 이십일만에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요압의 보고는 가슴 뿌듯할 만큼 이스라엘은 부국이요 강병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삼하 24:9)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출애굽 때 육십만 대군이었던 나라가 이제 백삼십만 대군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인구 조사가 채 끝나기 전에 다윗은 죄책감을 느꼈다. 다행히 자신의 영적 상태를 돌아본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께서 그에게 주신 마음이었다.
(삼하 24:10)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의 교만과 백성들의 교만을 치료하기 위해 고난과 재앙은 필수적이었다. 세 가지 옵션을 줬고 다윗은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길을 선택했다. 전염병이 백성들을 강타했고 7만의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의 수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사람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새겨지는 사건이었다.
교만, 이 무서운 죄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숨어있다. 나의 공적, 나의 능력, 나의 업적을 내세운다. 부질없는 짓이다. 최선을 다하고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할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하나님 아버지! 교만한 마음을 치사 한없이 낮아지게 하소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교만한 마음을 제어해 주시고 고난을 자초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