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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일(산상변모주일, 성청주일)
요한복음 15:1~8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김규태 목사
어떤 남자가 아내와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는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진 것을 알고는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렀습니다. 이 남자는 기름을 넣고 나서 다시 차를 몰아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무려 다섯 시간이 지나서야 이 남자는 옆자리에 타고 있던 아내가 없어진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있는 사이, 아내가 화장실에 갔는데 이 남자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차를 몰아 다섯 시간을 달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혼자만 질주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출처: 도원욱, 「예수 예수 믿는 것은」(두란노, 2017);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10월호), 223쪽에서 재인용.
유기성 목사님이 지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 것 같습니까? 대부분 이렇게 인사할 것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비극적인 이야기입니까? 일평생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가 예수님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그런데도 막상 우리가 천국에 가면 “예수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넬 정도로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 신앙생활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동안 한국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머리로는 예수님을 많이 알고 있는데, 실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일정 부분 성도들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더 많은 부분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지식을 가르쳐 주는 일에는 열심을 냈지만, 실제로 삶 속에서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기쁨을 누리는지에 대해서 더 열심히 가르쳐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족함을 목회자들에게만 탓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인 저 자신조차도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의 사역을 배우는 과정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구체적인 훈련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이 부족하고, 또 실제 그런 훈련에 대해 충분히 도전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도들에게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충분히 도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 삶 속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고, 그분과 더 깊은 교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 안에 거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 주님의 명령과 약속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때, 주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여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더 구체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 구절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회개하라”(계 3:19)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가 차지도 않았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행위를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의 모양새를 갖춘 것 같은데, 막상 우리의 내면에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신앙이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과 깊이 교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한쪽에는 예수님과 보이지 않는 담을 쳐 놓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재차 그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저와 여러분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미 믿고 있는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들어오셔서 나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풍성한 교제를 나누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하실 때, 주님의 살은 우리의 양식이 되고, 주님의 피는 우리의 음료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하실 때, 주의 말씀은 우리 발의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하실 때, 우리 삶에 풍성한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죄의 유혹을 이겨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거룩한 삶입니까? 거룩은 혼자 있을 때 주님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거룩은 다른 그 누구도 나를 바라보지 않을 때조차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심을 믿는 자가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첫째는 말씀의 증거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방법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또한, 고린도후서 13장 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우리가 확증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버림받은 자입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죄의 유혹에 넘어가고, 신앙생활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옛날,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일했던 요셉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보디발의 아내는 젊고 준수했던 요셉을 유혹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책에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어느 날 친구들을 초청하여 식사하고는 과일을 깎게 했다고 합니다. 그때 요셉을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방에 들어오자, 부인들이 요셉을 쳐다보다가 그만 과일 깎던 칼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보디발의 아내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요셉을 날마다 보는 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겠어요?” 그러나 젊은 요셉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이 모든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청하였으나, 요셉은 듣지 아니하며,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39:10). 요셉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막연한 이론이 아니라 분명한 실체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과 함께 계신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을 알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주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정이나 체험에 흔들리지 말고,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신실한 약속의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심을 알 수 있는 두 번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증거입니다.
성령의 증거야말로 예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심을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과 관련하여 두 가지 진리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기에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지혜와 총명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의지와 결단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또한,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기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과 16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종의 영을 받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만, 양자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십니다. 존 웨슬리는 이 구절을 가리켜 ‘성령의 삼중증거’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첫째는 성령의 증거요, 둘째는 우리 영의 증거이며, 셋째는 성령과 우리 영의 공동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증거의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부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나요? 또 여러분은 언제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나요? 여러분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된 일은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성령님을 통해 여러분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고(14:18),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마 28:20).
저는 세브란스 재활병원 김복남 전도사의 간증을 여러분과 나누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남편이 떠나고 서재를 정리하다가 그의 강의 노트를 발견했다. 한 여백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내가 태어날 때 나는 울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웃었다. 내가 죽을 때 주위 사람들은 울겠지만, 나는 웃으면서 그분께 갈 것이다.”
자기 죽음을 예감한 낙서였다. 그 고백을 한 지 사흘 후에 그는 숨이 차오른다면서 목사님에게도 연락해달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화장실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그날도 화장실 변기에 남편을 앉혀놓고 쓰러지지 않게 붙잡고 서 있는데, 그 순간 ‘이제 둘만의 시간이 마지막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에게 용서를 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우리가 부부로 산 세월이 12년인데, 내가 그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줘서 당신이 병에 걸린 것 같아. 그동안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당신의 부모와 형제들에게 잘못했던 것 모두 미안해요. 여보, 나를 용서해줘요.”
남편이 있는 힘을 다해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용서를 빌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나야.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고생만 했는데 내가 죽고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얼마나 힘들겠어. 이렇게 가는 나를 용서해줘.” 우리는 그렇게 서로 용서를 주고받았다. 남편이 말했다. “이다음에 부활할 때 다시 만나자.”
그러고 나자 담임목사님이 오시고, 구급차도 왔다. 우리는 서둘러 예배를 드리고 차에 탔다. 그런데 차가 막 마당을 나서려는 순간, 남편이 숨을 크게 한 번 몰아쉬더니 눈을 뜬 채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나는 그런 그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여보, 안 돼! 이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주님, 살려내세요. 죽은 나사로도, 나인 성 과부의 아들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으니, 제 남편도 살리실 수 있잖아요. 남편을 살려내세요!”
아빠를 안고 우는 엄마를 보고 딸도 아빠를 끌어안고 울다가 아빠 눈을 감기며 내게 말했다.
“엄마, 아빠는 죽은 게 아니고 잠자는 거야. 부활할 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러면서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내게 말했다. “아빠는 죽었지만, 엄마는 아빠처럼 병든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나와 약속해.”
장례를 치른 후에 내가 딸에게 물었다. “아빠가 죽었을 때, 엄마한테 왜 그런 약속을 하자고 했어?” 딸이 말했다. “아빠가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전도하는 걸 우리가 다 봤잖아요.”
정말 남편은 병든 몸으로 전도했다. 남편이 말했다. “이대로 죽을 수 없어. 한 영혼이라도 전도하고 죽어야 해.”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 모습으로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전도하겠다는 거예요? 거울을 봐요. 예수를 믿고 싶다가도 당신을 보면 도망갈 거예요. 병이 다 나으면 전국에 다니며 간증하고 전도합시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병이 다 나은 사람만 간증하고 전도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아. 성경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잖아. 병든 사람도 전도할 수 있어.”
하루는 남편이 병원 전도를 가는데 같이 가주면 안 되겠냐고 내게 부탁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남편이 전도하는 걸 봤는데, 그가 다인실로 들어가 환자들 앞에 서서 말했다.
“여러분, 저를 보세요. 저는 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직장암 말기 환자입니다. 여러분들은 입원이라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입니까? 전 지금 기저귀를 차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을 믿기에 죽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어 감사하고, 또 살아도 감사합니다. 아프면 누구를 의지하십니까? 제가 믿는 예수를 여러분들도 믿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봤다. 혀를 끌끌 차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남편을 병원의 복도 끝으로 데려가 말했다.
“당신, 지금까지 전도를 이런 식으로 한 거예요? 당신은 전도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돌아다니는 거라고요. 예수를 믿고 암에 걸린 게 자랑이에요? 전도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다 낫거든 해요.”
남편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진실함이야. 진심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거야. 그러니 다시 한번 가보자. 죽어가는 사람의 소원이다.”
그래서 나는 마지못해 병원 전도에 끌려다녔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갈현동에 있는 한 병원에 우리가 세 번째로 방문했을 때, 어떤 아저씨가 남편에게 말했다.
“선생님, 또 오셨어요? 이제 그만 오십시오. 지금까지 예수를 믿으라고 많은 사람이 얘기했지만 전 절대 안 믿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병이 나았다고 해도, 부자가 됐다고 해도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처럼 아프다고 말하면서 전도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렇게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전하는 그 예수는 진짜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제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지 가르쳐주십시오.”
남편의 말이 맞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진실함이었다. 영혼을 구원하고 싶은 간절함만 있다면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그 이후부터 나는 아무 말 없이 남편을 따라다녔다. 아이들도 전도지를 만들어 함께 다녔다.
1988년, 우리 교회의 총동원 전도 주일에 남편은 기저귀를 차고 비틀거리면서 새신자 46명을 데리고 왔다. 남편은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한 영혼이라도 더 전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떠났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귀히 여기셔서 그가 떠난 지 26년 넘게 내가 전 세계를 다니면서 그의 믿음을 자랑하게끔 갚아 주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분의 간증을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우리가 꼭 건강하고 세상에서 성공해야만 전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사실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아파도 전도할 수 있고, 사업에 실패해도 전도할 수 있고, 사람에게 상처받아도 전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을 신뢰함으로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그분과 동행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