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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축귀) 그러나 고난(3월 30일 주일 오후 예배)
성 경 : 사도행전 16:16-24(신약 215)
바울 선교팀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아시아가 아닌 유럽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고 마게도냐에서 빌립보에 도착해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빌립보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어서 기도처인 강변에서 기도하러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곳에서 말씀을 전할 때 루디아라는 여인의 마음을 주님께서 열어주셔서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고 루디아와 가족 모두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고 루디아의 집에 바울 선교팀이 머물게 되었습니다. 루디아의 집은 빌립보 교회의 시작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머무는 동안 일어났던 이야기를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지는데 오늘은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게 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치유(축귀) 그러나 고난”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선한 일을 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모든 사람들이 그 일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하고도 고난을 받거나 박해를 받거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마 24: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1.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방송에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여기저기에 나와서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예능 프로에 점쟁이들이 안 나오는 곳이 없을 정도이고, 드라마에도 점이나 무속과 관련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등장을 해서 점치는 것이나 무속이 맞는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한국일보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기사를 쓴 것이 있는데 이런 현상은 당연한 현상이라는 식으로 보도를 하면서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샤머니즘의 예능 침투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종교에 의지하지 않는 인구가 점점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2023 한국인 종교 현황'에 의하면 무종교인의 비율은 2004년 43%에서 2023년 62.9%까지 가파르게 증가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성해영 교수는 "샤머니즘이 젊은 층 사이에서까지 인기가 있고,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과거에 비해 줄어 들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사주, 타로 등에 대한 프로그램이 큰 반발 없이 많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라고 짚었다.
경계할 점은 샤머니즘 관련 프로그램의 파급력을 고려하는 것이다. 예능 속 스타가 사주, 타로, 점술 등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시청자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제작진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출연자로 나선 샤먼에 대한 광고 효과 또한 생길 수 있다. 샤머니즘을 예능에 슬기롭게 녹여내기 위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HI★초점] 샤머니즘은 어떻게 TV 속에 침투했을까
기독교인의 감소가 샤머니즘의 증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방송에 샤머니즘이 등장하게 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신뢰하게 만들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귀신과 사주와 운명 같은 것을 따르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친숙하게 다가오는 사탄의 계략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사탄이 사람들에게 아주 친숙하게 그리고 거부감 없이 다가오는 것이 점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주, 궁합, 같은 점술을 인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부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귀신 들린 여종이 점으로 주인들에게 이익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여기서 점치는 귀신이란 말의 헬라어는‘퓌돈’이란 단어를 쓰는데 퓌돈이란 고린도만 북부 파르나소스산 남쪽 언덕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지키는 신화 속의 뱀 또는 용을 가리키는데 퓌돈은 결국 아폴로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퓌돈은 나중에 복화술사 까지도 의미하게 되었는데, 복화술사 내부에는 퓌돈의 영이 들어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헬라어에서 퓌돈이라고 쓰여지는 단어가 영어로는 Python인데 이 단어 파이썬이 현대에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라고 알려져 있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컴퓨터에서 사용되고 있을 겁니다.
아마도 이 마크는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어제 말씀을 준비하며 이 단어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여기에 나오는 로고를 다시 보니까 뱀의 형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회사는 샤머니즘과 관련 있는 회사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단어에 대한 유래가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점치는 귀신이 들린 여종은 점을 쳐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점을 쳐서 번 돈을 자신이 가진 것이 아니라 여종의 주인들이 가져갔고 주인들은 여종이 점을 쳐서 벌어들인 돈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점을 치러 가면 복채라는 것을 내고 점을 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액수가 결코 적지 않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복채가 어느 정도인가를 물어보는 사람들에 대한 답변을 보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했는데 적게는 5-10 만원 정도이고 그보다 훨씬 많을 수 있다고 답변한 걸 볼 수 있습니다.
점을 보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복채를 내야 하는 것은 고대나 현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여종은 상당히 잘 맞춘다고 소문이 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점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얻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과 바울 선교팀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 여종은 바울 일행을 향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외쳐댔습니다. 17절을 보면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귀신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정확하게 알아봅니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도 바울을 볼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알아보았습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함께 다니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외쳤습니다.
점치는 사람이나 무당 중에서 진짜 신내림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알아봅니다. 신내림을 받지 않은 점쟁이나 무당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못 알아봅니다. 그 안에 신이 없기 때문에 분별을 못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에 잠실에서 신문 배달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남묘호랑갱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냥 믿는 정도가 아니라 아마도 그 종교에서 지도자인 것 같았습니다. 저를 길에서 몇 번 마추 진 적은 있고 말을 걸어 본 적은 없는데 저에게 학생을 보니까 예수 믿는 사람 같다고 말을 하면서 웬지 모를 특별한 어떤 것을 느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진짜 신내림을 한 사람들이나 귀신 들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확실하게 알아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과 그의 일행을 만난 점치는 여종은 이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인데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점치는 여종은 계속해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외쳤습니다. 17절을 다시 보면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점치는 여종은 바울을 향해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사람이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구원이란 단어는 ‘소테리아’ 인데 이 단어는 유대인들에게는 죄로부터 구원을 의미했으나 이방인들에게는 사람과 물질 세계를 다스리고 있는 권세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신 들린 여종의 이 외침은 바울과 실라의 사역을 명쾌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데, 오늘날 복음의 사명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영혼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육체와 삶에 있어서도 사탄의 영역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매주 외치는 금 년의 말씀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과 실라와 선교팀은 이일을 위해서 즉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바울은 귀신 들린 여종을 보고 그 여종을 고쳐 주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냈습니다.
여종의 이런 외침을 며칠 째 듣던 바울은 그 여종에게서 역사하는 귀신을 쫓아내고 여종을 자유하게 했습니다.
바울이 귀신을 쫓아내는 과정을 보면 여종으로 인해서 바울이 심히 괴로워 했습니다. 18절을 보면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바울은 점치는 여인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즉시 귀신을 쫓아내지는 않았습니다. 여종이 외치는 소리가 틀린 말도 아니고 큰 소리로 외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바울 선교팀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계속됨으로 인해서 바울이 심히 괴로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바울이 왜 괴로워했을까요? 아마도 거룩한 복음이 부정한 영에 의해 증거되는 것이 불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룩한 복음이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의 입에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귀신 들려 점치는 그 여종의 딱한 처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컸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도 다른 면에서 점치는 여종의 외침으로 인해 전도자들은 외관상으로는 뜻하지 않았던 유명세를 받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복음 선포보다 귀신의 말에 더 관심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마음이 심히 괴롭게 느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보면서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에게 나오라고 명령했습니다. 18절을 다시 보면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바울은 여종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여종에게서 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 귀신이 물러가고 질병이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해서 물리쳐야 합니다. 귀신을 향해서 어둠의 세력들을 향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상황들에 대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해서 물리치는 능력 있는 성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그러나 고난
바울은 귀신 들려서 점치는 여종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여종에게 있는 귀신을 쫓아 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바울과 실라를 고난을 겪게 됐습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이 때론 환난과 핍박과 고난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귀신이 나감으로 인해서 주인들이 수익의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19절을 보면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여종 한 명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이 힘들여 일하지 않고 살만큼의 수익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점을 쳐서 돈을 벌어다 주는 여종이 있어서 힘들이지 않고 살았는데 귀신이 나감으로 인해서 점을 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나간 점쟁이는 점을 제대로 칠 수 없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결국은 수익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여종은 불행하게도 자신이 돈을 벌지만 주인들에게 다 갖다 바침으로 실제로 자기 수익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여종은 자신이 그 일을 더 이상 안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종은 착취를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점치는 일을 그만 두고 싶었을 것이고 그런 마음이 바울과 실라를 향해서 외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주인들이 이익의 소망이 끊어지니까 한 행동을 볼 때 여종에게도 무자비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관리들에게 끌고 갔습니다. 19절을 다시 보면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주인들은 돈을 벌지 못하게 된 것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여종에게서 귀신이 나가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들은 여종이 어떻게 되는 관심이 없고 오직 돈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여종이 정상이 되어서 점을 못 보게 되니까 화가 났습니다.
눈에 뵈는게 없어서 바울과 실라를 잡아서 끌고 장터에 있는 관리들에게 먼저 끌고 갔습니다. 장터는 문제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는 법정과 감옥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주인들은 장터에 있는 관리들에게 끌고 갔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수익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장터에 있는 관리들에게 끌고 갔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상관들에게 아마도 재판을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끌고 가서는 바울과 실라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20-21절을 보면
16: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16: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주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가면서 이 사람들이 유대인으로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고 로마 사람들이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이상한 풍속을 전하다고 고발을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냈을 뿐인데 성을 소란하게 만들었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로마 사람들을 미혹한다는 의미로 고발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바울과 실라의 죄명이라고 할 수 없는 억지 주장하고 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주인들은 빌립보에서 나름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고발을 하자 상관들은 정식 재판 절차도 없이 때리고 감옥에 가두라고 지시했습니다. 22-23절을 보면
16: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당시에 로마 시민을 형이 확정되기 전에 때리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만일 로마 시민을 정당한 절차 없이 가두거나 때렸을 경우에 그 관리는 파면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시민인 바울과 실라가 많이 맞고 깊은 옥에 갇히고 중죄인 취급을 당한 것은 주인들이 평소에 관리와 상관들에게 뇌물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의 시민권에 대한 확인도 없이 유대인이라는 말만 듣고 로마 법을 어긴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많이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24절을 보면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바울과 실라는 귀신을 쫓아내주었지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선을 행한 것과 고난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전개되는 것을 보면 결국 하나님은 고난을 당한 바울과 실라를 통해서 가정을 구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아내고 승리하는 복된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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