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송금선(宋今璇)
1) 군국의 어머니 -반도여성 책무도 크다
복택영자(福澤玲子, 후쿠자와 레이코)79) 여사
“정말이에요? 이렇게 반가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면서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실에서 후쿠자와(福澤玲子)씨는 기쁨에 못이기는 얼굴로 징병제도 실시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감격이 가슴에 벅차서 말이 잘 안 나옵니다.
오늘이야말로 반도역사를 장식하는 가장 엄숙하고도 광영에 빛나는 날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바라고 바랐던 감격이 이제야 우리들에게 찾아왔으니 그저 힘껏 외쳐서 이 기쁨과 감격을 2천4백만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제는 어디를 가든지 정말로 황국신민(皇國臣民)이 완전히 되었다는 자랑과 의무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반도민중의 시국에 대한 태도는 더욱 철저해져서 내 아들, 내 동생을 나라에 바쳤다는 절실한 애국심이 북돋아질 것임에 따라 일천만 반도여성들로 군국의 여성으로서 그 책임의 중대함을 더욱 굳세게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앞으로는 반도 지식여성들은 제일선에 서서 훌륭한 군국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더욱 힘써야 하며 여학교의 생도들도 어디까지 군국의 어머니로서 교육하여야 될 것입니다.”
<출전 : 宋今璇, 「軍國 어머니-半島女性 責務도 크다」, '매일신보', 1942년 5월 10일>
2) 징병과 어머니의 길 -국어·자녀·봉사·신앙
덕성여자실업학교장(德成女子實業學校長) 복택영자(福澤玲子)
결전 제3년 제1주에 들어서 반도출신으로선 최초의 학병에 대한 전형검사(詮衡檢査)가 시작되어 그
79) 송금선(宋今璇)의 창씨명.
합격을 기하는 씩씩한 젊은이의 기상은 충심(衷心)으로 믿음직스럽고 장도(壯途) 또한 기대되는바 지극히 크다고 봅니다.
바야흐로 이러한 때 오늘 아침 새해를 맞이하고 생각드는 바 제일 큰 것은 장래할 군국의 어머님들의 자태입니다.
더구나 매일마다 장래 군국의 모성이 될 생도들을 상대로 연성(鍊成)의 길에 정진하고 있는 저로서는 한층 더 중대한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태평양전쟁이 개전되는 날 이후 제가 취하여 온 군국의 어머니의 양성 방도를 돌아보건대.
제1. 국어상용의 순치(馴致)80)
무엇보다도 국어사용입니다. 우리가 국어를 사용함으로써 황국의 국심이 길러질 것이니 이와 같이 국어를 통하여 도의(道義)를 근본으로 하는 일본정신도 체득하게 될 것입니다. 군국의 모성이 국심을 갖지 못한다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이겠습니까 아름답고 명랑하며 그리고 순정한 국어상용의 순치의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제2. 뚜렷한 자녀관의 수립
군국의 어머니는 전날 가졌던 자녀에 대한 묵은 관념을 타파하여야 될 것입니다.
흔히 자기가 낳은 자녀라 ‘내 것’ 이라는 애착심이 생기기 쉬우나 징병제도 실시를 앞두고 이미 지원병제도가 시행되는 금일에는 이러한 자녀관은 일체 말소시켜야 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황공하옵게도 위로 ‘천황폐하’의 고굉(股肱)81)이 되고 국가의 간성(干城)82)이 되면 그들의 원호(援護)의 요직에 설 자녀임으로 촌호(寸毫)도 ‘내 것’이라는 관념을 개신(改新)하여 어디까지든지 폐하의 적자(赤子), 국가의 큰 보물임을 깊이 느끼고 우리는 맡아서 양육해 드리는 데 불과하다는 신념을 굳게 가져야 될 것입니다.
제3. 정성스럽게 받들어 모시는 마음의 연성(鍊成), 군국의 어머니는 어디까지든지 받들어 모시는 마음을 항상 가져야 될 것이니 본시 일본정신의 핵심도 이어 받들어 모시는 마음이라고 믿는 까닭입니다.
정성스럽게 섬기고 이바지하는 마음을 일본의 모성은 자나 깨나 잊어서는 아니한 가치를 위하여 자기의 한 몸은 물론이오 자기가 지닌 모든 것을 송두리째 이바지할 것입니다. 천황폐하께 귀일(歸一)시키는 마음을 고이고이 길러가야 될 것입니다.
제4. 신앙심의 배양
군국의 어머니는 견고하고 용감하며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갖게 하는 신앙심의 배양이 또한 귀중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진호국가(鎭護國家)83)의 종교신앙이 또한 절대로 필요한 줄을 깨달아야 될 것이니 종교는 우리를 본연의 상에 돌아가게 하는 ‘달마(達摩)’가 되게 하는 것이니, 오온개공(五蘊皆空)의
80) 짐승을 길들임. 점차 어떠한 목표(目標)의 상태(狀態)에 이르게 함.
81) 다리와 팔, 다리와 팔 같이 중요한 신하라는 뜻으로,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를 이르는 말.
82) 방패와 성이라는 뜻으로, 나라를 지키는 믿음직한 군대나 인물을 이르는 말.
83) 진호(鎭護) : 난리를 진압하고 나라를 지킴.
진리확호한 사생관(死生觀)의 수립이 따라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인연상합(因緣相合)의 교리의 참뜻을 오득(悟得)하여 애착과 집념을 떠나 망상을 물리쳐나가는데 모성이 즉 군국의 어머니가 될 것을 알려야겠습니다.
저는 군국의 어머니를 양성하는 문제에 관하여 이상 몇 가지 방도를 적었사온데 요약하여 다시 말씀드리오면 군국의 어머님은 국어에 능통하여 국심을 체득하고 묵은 자녀관을 타파하여 삼가히 받들어 이바지하는 마음을 실천에 옮길 때 굳은 신앙심으로 망상된 애착과 집념을 떠나 오온개공의 교리로 큰각오를 갖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출전 : 福澤玲子, 「徵兵과 어머니의 길-國語·子女·奉仕·信仰」, '春秋' 第5卷 1號,1944년 1월, 70~71쪽>
17. 신봉조(辛鳳祚)
1) 조선에도 징용령
이화여고 교장 신도순(辛島純) 씨84) 담(談)
태평양전쟁은 금년이야말로 이기느냐 지느냐의 승패를 결정짓는 결전의 해라고 생각합니다.
제일선장병들은 정말로 총후국민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치열한 혈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이 충용무쌍한 우리황군에게 많은 비행기와 병기와 군함을 보내준다면 곧, 저 전쟁은 우리나라의 승리로 끝났을 것입니다.
제일선에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요구하듯이 요구하는 것은 탄환과 비행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응해서 우리 반도에서도 금년부터는 징병령이 실시되어 반도청년들도 황군의 일익으로 활약하게 되고 벌써 대학, 전문, 고등학교 학도들도 일선에 출진하고 있습니다.
총후국민으로서 태평양전쟁을 완수하기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임무는 오로지 생산량 증산하여 전력을 증강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반도에는 전력증강을 위한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 아는 바입니다.
반도뿐 아니라 남양의 여러 섬에는 무진장으로 개발되지 않은 철이라든지, 금속물이라든지, 석유가 땅속에 매장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원을 하루라도 빨리 개발해서 전력증강에 이바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여기서 반도에서도 이번에 인적, 물적 자원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태평양전쟁에 이바지하고자 내지와 같이 국민징용령이 발표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일본국민은 다같이 징용되어서 국운을 걸고 싸우는 결전을 위하여 생산확충의 전사가 되자는 것입니다.
다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총후국민은 누구 한 사람 늙고 유한한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염치없고 부끄러워서 어떻게 비실비실 늙고 전쟁을 비관할 수 있겠습니까. 대지에서는 벌써 다른 내지인 청장년들이 군무에 소집되고 한편으로는 징용에 의하여 도시나, 농촌이나, 공자으로 진출하여 긴급생산에 종
84) 신봉조(辛鳳祚)의 창씨명.
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도에서는 내지의 청장년과 같이 전력증강에 이바지하게 된 것은 일본국민으로서 영광된 일이며, 앞으로의 책임이 중대한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국민동원에 의해 너도나도 징용되거니 생각하고 기계적으로 긴급생산방면에 종사하는 사람은 물론 한사람도 없을 줄 압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비겁한 오명을 입을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는 바입니다.
제일선장병들이 부르짖는 ‘비행기를…… 한 대라도 더 보내달라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면 한사람도 빨리 국민동원에 협력하여 전력증강에 정진하기 바라는 바입니다.
여성들은 남성과 같이 아직 징용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성이 일선으로 생산확충방면으로 진출한 뒷일을 남성에게 지지 않는 마음으로 해나갈 각오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남성이 하던 일 가운데 무슨 일이던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지에서는 벌써 여성들이 우편배달도 하고, 역(驛)개찰구에서 차표를 적는 일까지 아직 남성들이 하고 있는 각 부군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반도여성들도 다같이 응소된 각오아래 국가에 정신하여 봉공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금년에는 미영에게 지지않는 비행기와 군함을 만들어내서 원수를 무찔러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줄 압니다.
<출전 : 辛島純 氏 談, 「조선에도 징용령」, '매일신보', 1944년 1월 9일>
18. 유각경(兪珏卿)
1) 시국과 여성의 각성
조선여자청년회 총무 유각경
현 사회에서는 일반 여성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 이유는 예로부터 여성에 대한 관념이나 비평이 일정치 못하야 여자는 남자의 종속물이니 “약자여. 네 일홈은 여자”이니 하는 불명예스러운 말을 항다반 듯고 있으나 기(其) 반면에 “동차(童車)를 끄으는 여자의 손이 세계를 움즉인다”는 말도 없지 않으며 일(一)국가의 강약은 그 나라의 어머니를 보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말들을 함니다. 본인이 여긔서 말하고저 하는 것은 여자는 약하너 강하니 종속물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성도 일개의 인격이오 여성도 일개의 인격이나 그 두 인격은 그 본분이 각각 다름을 말하고저 함니다.
이 두 인격의 본분이 다름에 비로소 두 인격의 고귀한 점이 있으며 각자가 충분히 그 본분을 직힘으로써 서로 도음이 되고 이 도음이 합할 때에 비로소 국가사회는 유지되고 국가 발전의 기초는 이루어지는 것임니다.
현하 비상시국에 있어 대체 여성은 무엇을 하여야 하겠읍니까.
이것은 우리 여성으로서 신중히 생각해 볼 문제임니다.
급한 대로 직접 총을 메고 전지(戰地)에 나가서 장병과 보조를 같이 하는 것이 훌융한 여걸이나 되는 것처렴 생각하기 쉽슴니다. 그러나 본인의 생각에는 우에 말한 바와 같이 역시 여자에게는 여자의 본분이 있다고 봄니다.
총을 메고 전지에 나가 적을 물리치는 것은 남자에게 맛기여 남자다운 의기로 충용을 다- 하게 하고 여자는 안에서 후고(後顧)에 근심이 없도록 총후(銃後)를 굿게 직히는 것이 여성으로 국가에 대한 충의라는 것을 깊히 깨닷어서 기(其) 방면에 진력하는 것이 여성의 본분이라고 생각함니다.
그러면 총후는 어떻게 직히겠느냐는 것이 다음 계단이겠읍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일시엣 것이오 늘- 있는 것이 아님니다. 금번 사변으로 말하여도 출정(出征)한 장병의 의기와 정예한 무기로서 조만간에 황군의 대승리를 보리라고 밋음니다. 그러니까 전쟁하는 것은 남자에게 맛기고 총후 여성의 할 바로 말하면 첫재로 제일 중요한 것은 가정을 잘 직히여 가산을 보관하고 제2세 국민을 고상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의 소유자로 길너 놋는 것이 여성의 각오할 바 중에 가장중요한 일인줄 압니다.
더욱이 오날에 있어 지고병이 실시되여 국가의 장래의 성쇠가 오로지 제2세 국민의 심신 건강 여하에 좌우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사명이 중대하며 따라서 우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차(童車)를 미는 손이 세계를 좌우할 특권이 잇음을 자랑할 만한 일인 줄 압니다.
둘재로는 근검절약적 정신에 대해서 말하고저 함니다. 평소에도 절약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마는 특히 전시에 있어서는 일층 주의할 것인 줄 압니다.
구주대전에 불란서 여성들은 ‘단고(短袴)’회(會)를 조직하여 치마의 길이를 짤게 하여 곤란을 구하였다는 말이었는데 금일 우리가 비상시를 당하고 보니 비로소 불란서 여자들의 근검한 정신을 깨다른 것 같음니다.
치마 길이를 1~2촌(寸) 짤게 한다고 이것을 막대한 군비와 희생에 비교한다면 실로 구우(九牛)의 일모(一毛)와 같은 것임니다.
나는 이런 말을 들었음니다. 우리 조선 가정에서 쓰는 이불(침구)로 말하면 엇재서 동정이 잇고 깃이있고 푸르며 붉은 것으로 만들어 쓰는 줄 아심니까.
그것은 예전에 만일 전쟁이 나면 그 이불을 뜨어서 병정들이 옷을 하여 입으며 그 동정을 끈어서 홍띄 모양으로 억개에 걸치고서 나가서 싸웟기 때문이었다 함니다.
또 우리 일반 가정에서 쓰는 유기(鍮器)로 말하면 전쟁이 날 적에 그것으로 총도 만들고 군수품으로도 쓰기 위해서 그리함이라고 함니다. 예전에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오늘 우리네 주부의 각오이리까.
앗가도 말한 바와 가치 불란서 여자들이 치마를 짤게 하여 국난 구조의 한 도음이라도 주겠다
는 여긔에 여자 독특하고 정밀한 정신이 숨어 었다고 나는 생각함니다. 여자의 진정에서 울어난 이 치마기리 한 치가 당시 불란서의 비상(非常) 전(前), 경제에 얼마나한 반향이 있는지 알냐고도 아니하나 만일 이 ‘단고회’ 회원의 적성(赤誠)이 불란서의 곤란을 구하는 원동력이 되여 가지고서 총후의 가정을 직켜 나갑시다.
그래서 금일 총후에 반도 여성도 사치한 의복을 질박한 것으로 곳치며 색의(色衣)를 장려하며 금전과 시간을 동시 절약하야 저- 불란서 여성과 같은 업적을 남긴다는 적성으로 행하여야겠읍니다.
조선속어에 집이 가난하면 어진 어머니를 생각하고 국가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고 한 것을 보면 고금을 물론하고 곤란을 당하면 총동원이 없이는 성사가 어려운 것을 깨닷겠읍니다.
그런 고로 금일 같은 비상시기를 당한 총후 여성의 책임이 더욱 중대한 것을 각오하고 내선일체화하야 가정으로 국가
방침하에 충실히 실행하는 것이 총후 국민된 의무요 따라서 시난(時難) 극복에 어진 저 어미가 되고 장병에 자모(慈母)될 수 있을 줄 압니다.
<출전 : 兪珏卿, 「時局과 女性의 覺醒」, '三千里' 第10卷 第8號, 1938년 8월, 194~196쪽>
2) 어머니 자신부터 가질 야마토 다마시
여자기독청년회 유각경
조선에도 징병제도가 실시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보다 감격하기는 처음입니다.
어머니된 사람으로서 두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낍니다.
조선의 어머님들로서 일본의 어머님들을 근본적으로 본받을 때가 이때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 개인의 아이가 아닙니다. 나라의 아이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 길러서 국가에 바칠까 우리 어머님들은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다. 그리고 빛나는 무훈을 세울 수 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우리는 이런 영광스런 의무를 차지하게 된 것만 좋아 날뛴 것이 아닙니다.
군인의 어머니로서 갖출 점을 마음속 깊이 마련해 놓아야 할 것입니다.
어머님 자신들이 우리나라의 ‘야마토 다마시(大和魂)’ 를 몸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될 줄 압니다. 그 다음 이 정신을 직접 장래군인이 될 어린 아이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게 교육시켜야 될 줄 압니다.
<출전 : 兪珏卿, 「어머니 자신부터 가질 야마토 다마시」, '매일신보', 1942년 5월 12일>
3) 당신들도 우리도
8월 1일로서 반도에 징병제도를 실시하고 반도 청년도 황군의 일억이 되어 명예스런 제국군인으로서 봉공하게 된 것은 실로 광영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징병제실시에 있어서 어머니로서 나도 아들 하나를나라를 위하여 바치게 된 것을 더욱 광영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군인의 가격을 얻은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된 우리로서도 지성으로 아들의 장래와 국가를 위하여 건강히 길러서 국가에 내놓을 굳은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나는 가정의 어머니뿐 아니라 유치원의 원장일을하고 있기 때문에 백여 명이나 되는 아이를 기르고 있습니다.
늘 징병제가 실시된 것을 가르치며 앞으로 훌륭한 군인이 되자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국 군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군인이 되기를 늘 기원하는 우리어머니들의 정신을 받아 반도의 장정들은 참말 황군
을 위해 생명을 내놓을 각오를 할 것입니다.
(말씀한 분은 안국유치원장(安國幼稚園長))
<출전 : 兪珏卿, 「당신들도 우리도」, '매일신보', 1943년 8월 7일>
19. 유광렬(柳光烈)
1) 징병제 실시와 조선인의 각오
1.
조선동포에게도 1944년부터 징병제를 실시키로 5월 8일 중앙정부 각의(閣議)에서 결정되어 9일에 중앙의 정보국과 조선총독부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이 발표를 보자 반도민중은 한결같이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은하에 국방의 중임(重任)을 나눠 지게 된 광영에 감격하고 역대의 통치당국과 군당국이 잘 반도동포를 지도계발시키어 금일의 광영에 균점케 된 데 대하여 감사하게 되었다. 실시 징집되기까지 2년의 준비기간이 있음으로 총독부에서는 준비위원회를 두어 만반(萬般)의 준비를 유감(遺憾)없기를 기하게 되었거니와 민간에서도 국민일치로 이 중임에 대하여 준비와 각오가 있어야 할 바인데 이제 징병제의 유래와 기타준비에 대하여 잠깐 고찰하여 보려 한다.
2.
일본에서 징병제가 실시되기는 1873년 1월 16일이었으니 그때까지는 각 번(藩)의 병사는 전국을 통하여 40만이었으나 중앙의 근위병은 겨우 4백에 불과하였다. 그때는 군사는 무사계급의 특권이었으니 일반농민이나 상인은 군사로써 국가에 봉공하려고 그 길이 열리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때에 특히 조슈번(長州藩, 현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제일 먼저 족경(足輕, 졸병)출신이나 일반농민과 상민도 단체훈련을 시키어 병단을 조직하여 기병대(奇兵隊)라 칭하고 이를 주재하던 이는 후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지사가 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이요. 이 뜻을 받아 활약하던 이가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으로서 교토(京都)에 병학교(兵學校, 현 육군사관학교 전신), 요코하마(橫濱)에 어학소(語學所), 오
사카(大阪)에 조병창(造兵廠), 우지(宇治)에 화약제조소, 야와타(八幡)에 병기화약고를 세우게 되었고 졸병출신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은 사이고 쓰쿠미치(西鄕從道)와 함께 구주(歐洲)를 순력(巡歷)하여 보불전쟁(普佛戰爭)85) 직전 병제를 상세히 시찰하고 귀조(歸朝)하여 사민평등(四民平等)의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주장 실시케 되었다.
지금은 사민평등의 국민개병이란 말이 당연이상의 당연이요.
그 말을 말하는 것부터가 연문(捐文)인 듯 하지만은 당시에는 국방은 무사계급의 특권으로 전국민에게 개방되지 아니하였던 터이요, 더욱 같은 병대중에도 사족(士族)의 자손인 사족병과 평민의 자손인 졸족병의 구별이 있었으므로 세인들은 야마가타(山縣)가 사민평등의 국민개병을 주장함은 그가 족경(졸병)출신이기 때문이라는 개인공격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마가타는 일체의 세평(世評)을 개의치 아니하고 1872년하에 징병제제정의견서를 기초하여 반세(半歲) 후에 구체화하게 한 바이다.
이리하여 1872년 1월 28일에 대혁신의 징조칙(徵詔勅)이 강하(降下)되고 동일에 국민개병의 필요를 역설한 태정관고유(太政官告諭)가 발포되었는데 그중에 ‘범천지간(凡天地間)에 일사일물(一事一物)이라도 세
85) 프로이센-프랑스전쟁(Franco-Prussian War)
(稅) 아니됨은 없어서 국용(國用)에 충당하는데 (중략) 서인(西人)은 이를 칭하여 혈세(血稅)라 하니 그 생혈(生血)로써 나라에 갚음을 말함이라’ 하여 혈세라는 말이 이때부터 시작하였다.
미나미(南) 총독 이야기 중에 ‘일본국민의 병역관념은 의무라기보다 차라리 특권이라는 범주(範疇)에 속할 것으로 이것은 국체의 본의를 앎으로써 명료하다’ 한 말은 물론 일본군인은 대원수폐하의 고굉(股肱)이 되는 광영을 입는 데에 그 대의가 있을 것이나 메이지유신이래 국민개병이 되기까지 서상(叙上)의 경로를 볼 때에 다른 일면의 함축도 엿볼수 있는 바이다.
3.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무사를 인간최고의 영예로 알아서 ‘사람은 무사이요.
꽃은 요하(楆花)’라는 말까지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특히 이조(李朝)에서는 무인은 문인의 앞에 수종(隨從)되는 지위에 있었으니 상신(上臣, 문관대신) 앞에서는 지위가 대장에 이른 사람이라도 자기를 부름에 ‘소인’ 이라 하고 군무를 총괄하는 병조판서는 문관이 주로 그 지위를 맡았으며 이에 따라 문신은 무신을 전통적으로 경멸하는 풍습이 있었다.
필자가 들은바 한 삽화에 의하면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총애하시는 시측인(侍側人)을 발탁하려하나 당시에는 과거(현재 고문시험 : 高文試驗)의 길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의치 못함으로 정조께서는 그에게 ‘네가 과수(科數, 운명)가 없는 모양이니 무과를 보는 것이 어떠냐’ 하였다.
이말을 들은 그는 ‘황송하오나 신의 집에는 무□(武□)이 없사옵니다.’하여 자신의 가계가 문신의 계통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아뢰었다는 말이 있다. 고위의 무신에 대하여도 이렇게 일반으로 문신보다 부족하게 알았거늘 하물며 일반병졸에 대한 관념은 더욱 낮은 것으로 알았었다. 일례로 문록역(文祿役)86)때에 병조에서 선병안을 보니 ‘개려각시정백도(皆閭閣市井白徒) 서리유생거반(胥吏儒生居半) 임시점열(臨時點閱), 유생구관복지시권(儒生具 冠服持試券), 이재평정건(吏裁平頂巾), 자소구면(自愬求免)’ 운운한 것은 당시 상신이던 유성룡(柳成龍)의 저(著)인 '징비록(懲毖錄)'에 있는 바이니 이것은 유생(儒生)이나 서리 등도 병졸은 되지 않을 만큼 인(認)하였던 것이며 그 후 기다(幾多)한 변동이 있었으나 병합
전, 군대해산 때까지 징병제이었고 이 병졸들은 왕십리(往十里), 청엽정(靑葉町) 등지에 하나의 특별부락을 이루어 군□촌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이것을 일본의 무사로써 인간최고의 영예지위로 알던 관념과 비교하면 심히 거리(距離)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메이지유신 이래 국민개병이 된 후 1882년에 메이지 천황께옵서, 군인에게 내리옵신 칙유(勅諭)에는 ‘짐(朕)은 여등(汝等)을 고굉(股肱)으로 믿고 여등은 짐을 두수(頭首)로 앙(仰)함에 이르러 그 친함은 특히 깊을 것이다.’ 하옵신 성지(聖旨)를 배
(拜)하건대 군인은 모두 폐하께 봉임(奉任)하는 고굉이 되는 바이며 더욱 헌법 제11조에는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統帥)함’ 이라고 소시(昭示)되어 있음으로 명백한 바이요. 일단 대외전쟁에 출전하여 전사를하면 장(將)이 병(兵)이나 똑같이 그 이름은 반드시 호국의 신으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향사(享祀)되어 황송하옵게도 지존께옵서 어친배(御親拜) 베푸시는 영광을 입게 되는 바이다.
이것은 제 외국의 병이 전사하면 무명의 일병으로 장거(葬去)되는 바와도 다르고 일본의 번병(藩屛)이나 이조의 용병
86) 임진왜란을 뜻함.
(傭兵)과는 소양(霄壤)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4.
이렇게 광영있는 중대한 임무를 위해서는 수많은 준비와 각오가 필요한데 특히 다카하시(高橋) 조선군참모장은 ‘군으로서는 이때에 특히 학교교련, 청년훈련, 지원병 훈련 기타 일반청년의 수양 및 훈련에 관하여 획기적 개선을 기대한다.
그중에도 최중시하는 것은 어칙유에 시(示)하옵신 군인정신, 취중(就中) 충절의 정신의 단련이다. 즉 신명을 군국에 봉하여 일의봉공(一意奉公)의 지성에 철저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가장 소중한 바로 이 정신에 조금이라도 결(缺)하는 바 있으면 유사의 때 하등 소용이 없는것이다.
더욱 이것은 부단의 수련에 의하여 비로소 그 완벽을 기(期)할 수 있는 것으로 청소년 된 자는 지금부터 그 결의를 굳게 하여 자진하여 수양연찬(修養硏鑽)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가정, 학교,회사, 공장, 광산 등에서는 징병제시행준비를 위하여 청소년 훈련의 중요함을 잘 이해하고 총독부 및 군의 제 □책에 충분협력하기를 요망하는 바이다.’ 한 것으로 보아 준비는 청소년 자신의 것과 부형(父兄), 장상(長上)된 이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청소년 자신으로서 일본정신을 잘 체득할 일, 강건한 신체를 연성할 일, 상당한 훈련을 받을 것은 물론 일본인과 함께 병영생활, 전지생활을 하기 위하여 일본의 전통습관, 예의작법 등도 배워야 하며 기타 일반문화 수준도 일본인과 같은 레벨에 오르는것이 필요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조선에 아직도 국민교육이 보급되지 못하였던 것은 참으로 유감이라하지 않을 수 없다.
학무국에서는 교육확충을 위하여 한층 힘쓰리라하니 그 성과에 기대한다.
다시 부형과 장상된 이는 대개 4, 50내지 5, 60세로 과거 이조의 용병제도, 또는 군인을 영예로 알지않던 시대의 구관(舊慣) 사념(思念)이 남아있지 않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는 금일의 황군의 본질을 잘 이해시키고 특히 모친된 이의 성인교육에 대하여 강연, 강화, 좌담 등으로 군인과 국가의 관계를 잘 이해시키어 일단 유사시에 국민적 엄숙과 성의를 보이도록 할 바이니 만일 사사로운 정에 구속되어 미흡한 점이 있다면 이것은 인정상 자연 봉공하는 젊은 군인의 사기에 관하는 바 클 것이라.
그러므로 당국자는 청소년의 교양훈련과 병행하여 부모된 이의 이해교양에 힘쓸 바이라 한다.
5.
반도인이 군무에 복무함에 그 대의는 물론 보국의 성의에 있을 것이나 부산(副産)으로는 병마의 퇴치, 강건한 신체, 질서있는 생활, 책임관념의 증장(增長), 복종의 미덕 향상 등 인격완성에 큰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1. 조선의 청소년은 위생관념의 부족으로 흔히 기생충, 위장병, 기타가 있는데 병영생활중에 이것이 일률적으로 퇴치될 것이요.
2. 일정한 규율하에 단련을 받는 중에 체질이 다소 허약하던 사람도 점차 별인(別人)과 같이 강건한사람이 되었다 함은 과거의 지원병 예에서도 많이 본 바이다.
3. 질서있는 생활도 군대와 같이 규율적 생활을 하는 데는 없으니 생래(生來)의 무질서하던 사람도 이 관문을 통함으로 인하여 극히 질서를 존중하게 될 것이다.
4. 책임관념의 증장, 군인정신은 책임있는 자리에서 신명을 군국에 바치기를 맹세하고 또 행하는 바이니 종래 흔히 있던 반도인의 책임관념의 결핍 운운도 개정되리라고 본다.
5. 복종의 미덕, 군문에서는 장관의 명령에는 절대로 복종하나니 종래의 서구 개인주의 또는 자유주의에서 파생한 바 비판반대 등의 폐(弊)도 광정(匡正)되고 복종의 미덕이 양성되리라 본다.
필자는 일찍이 모장교에게 ‘어떤 자질을 제일 좋은 군인이라 할까요?’ 하는 말을 물었더니 그는 언하(言下)에 ‘제일 좋은 사람, 완성된 인격자가 제일 좋은 군인이지요.’ 하는 대답을 들었다.
위에 서술한 미덕이 양성되어 일률로 인격이 향상된다면 반도인이 자질이 향상되어 일반사회에도 한 거대한 추진력이 될 것이다.
전쟁 중에는 평시보다도 약진하는 제현상이 허다하다. 그런데 반도인의 자질향상으로만 보아도 확실히 약진이 있을 것이다. 징병제 아니고는 무슨 방법으로 이렇게 대량적으로 구습교정과 도덕향상을 시킬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종합하여 말하면 가장 절제가 엄한 일대국민학교에 또한 번 들어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
6.
이에 의한 영향은 측량할 수 없다. 그중 하나, 둘을 들어보면 반도청년이 국방을 일본인과 같이 나누어 짐에 의하여 어떠한 신념이 생길 것이다. 신념은 희망을 낳고 희망은 모든 활력의 원소(元素)가 되는 것이다.
세(世)에 희망을 잃은 사람같이 비참한 것은 없다. 그런데 신념이 없으면 희망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또 구체적 일례를 들면 황군이 연전연승(連戰連勝)한 데 대하여 세인은(주로 일본인 측) 흔히 ‘반도인의 감격표현이 일본인에 비하여 차등이 있다.’ 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국가의 흥륭에 대하여당연히 동일하여야 할 감격에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반도인 즉 자신이 자질형제(子侄兄弟)가 직접 그 제일선에 참가치 못하였다는 점으로 겸퇴(謙退)도 있으려니와 사람은 아무래도 제일 친근한
데서부터 친애감(親愛感)이 더 깊고 또는 이에 따른 감격의 정서도 강도(强度), 약도(弱度)의 차이가 생기지 않는가 할 때에 금후 반도인이 자제를 전선에 보낸 후로는 그 표현의 도가 금일의 비(比)가 아닐것이라고 믿는다.
<출전 : 柳光烈, 「徵兵制實施와 朝鮮人의 覺悟」, '朝光' 第8卷 第6號, 1942년 6월, 28~33쪽>
2) 해군지원병제 실시와 반도 청년의 영예
1.
5월 11일 각의에서 조선에도 ‘해군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여 그 예비훈련을 1943년 중에 개시할 것이결정하였다.
내년의 징병제를 앞두고 또다시 해군지원병제의 실시를 보게 된 것은 반도 동포의 광영으로 일시동인(一視同人)의 성지(聖旨)에 감격하여 오직 봉답에 지성을 다할 바이다.
역사에 징(徵)하여 보건데 해양을 제압하는 자는 비약적 흥륭(興隆)을 이루고 그렇지 못한 자는 쇠약해졌다.
경성(京城)해군무관부(海軍武官府) 무시(武時) 소좌(少佐)의 이야기 일절(一節)에 “영화(榮華)를 자랑하던 카르타코는 로마(羅馬) 해군에게 패하는 날부터 쇠망의 빛을 나타내었고 스페인(西班牙)은 그 무적함대가 패퇴할 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전쟁의 천재 나폴레옹으로도 그 함대가 넬슨의 일거(一擧)를 받은 후로는 끝까지 재기치 못하였다.
하와이(布哇), 말레이(馬來) 근해(近海) 해전을 위시하여 남태평 수차례의 모든 해전이 미영(米英)의 쇠멸(衰滅)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단언할 것인가”라고 한 것과 같이 국가의 진취(進取)와 흥륭은 항상 해양의 제패로 시작하는 것이다. 로마제국은 지중해를 제패함으로 흥하였고 그 후로 무대는 대서양으로 옮기어 일시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보이었으나 영국에게 무적함대가 깨어진 후에 쇠퇴의 일로를 밟았고, 이후 100여 년을 영국이 세계 제패의 야망을 꿈꾸고 전 지구에 그 족적을 도장 찍은 것도 전혀 알레프드 황제 이래 천 이백년의 역사를 가진 해군력의 소산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제 무대는 태평양으로 옮기었다. 노후하였으나 오히려 전통의 여력을 가진 영국과 렉싱턴 이래160여년의 역사 밖에 가지지 못하였으나 그 풍부한 자원으로 해군을 건설하여 세계 제패를 꿈꾸는 미국과는 전후하여 태평양상에 그 독아(毒牙)를 이(肄)한 이래 인도(印度), 말레이(馬來), 동인도(東印度),필리핀(比律賓)이 모두 그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던 것을 이번 태평양 전쟁으로 점차 탈환하여 동아 제민족이 각득기소(各得其所)하는 도의(道義)의 세계를 건설하는 중에 있다. 저 미영은 말하기를 ‘열대(熱帶)’를 지배하는 자는 세계를 지배한다고 하여 동아침략의 마수가 200년 동안 집요히 쉬지 아니하였으니 그것은 세계의 가장 요긴한 부원(富源)이 열대에 있기 때문이요. 특히 태평양에 산재한 제 도서(島嶼)에 있기 때문이다. 이 태평양을 지배함에 의하여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은 저들의 순시(瞬時)87)도 잊지 못하는 야망이다. 황국 해군은 서전(緖戰)이래 연전연승으로 적 미영을 쫓고 태평양 위에 불패의 지위를 굳게 하였으나 적 미영은 오히려 반공(反攻)의 계속을 쉬이지 아니하니 그것은 작년 8월 7일에 시작한 남태평양의 해전을 위시하여 크고 작은 무수한 해전과 금년 3월 27일의 북양(北洋) 최초의 해상회전(海上會戰), 동 28일의 뉴기니아섬 오로만(灣) 공세 등 쉬지 않는 해전에 의하여 보아 태평양은 금후 상당한 장기간에 걸쳐 대소 무수한 결전이 계속되리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2.
아시아의 동방에 묘망(渺茫)88)하게 열린 태평양은 그 면적이 1억 8천21만 평방 킬로미터로 세계해양의 반분을 점한 바이다.
태평양을 최초로 횡단한 이는 포르투칼(葡萄牙)인 페르디난드 마젤란으로 그는 1512년에 필리핀(比律)에 상륙하였다. 선시(先時)하여 포르투칼인은 인도양 방면으로 태평양에 출하여 인도의 ‘고아’를 얻고 이를 근거지로 하여 자바, 말라카를 정복하고 광동에 도착하여 중국과 통상을 연것이 1517년이요, 그 후 1543년에는 아국 종자도(種子島)에 왔었고 스페인는 남미의 대부와 중미를 판도(版圖)로 한 후 동으로부터 태평양에 진출하여 필리핀 제도를 점령하고 마닐라를 근거지로 보르네오,뉴기니아, 라드론 제도, 카로린 제도, 솔로몬 제도를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자 1571년, 17세기에 들어
87) 극히 짧은 시간. 삽시간.
88) 강이나 바다가 끝없이 넓어 아득함.
네덜란드(和蘭)은 포르투칼, 스페인 양국의 식민정책이 원주민의 마음을 잃은데 힘입어 점차 양국의 영토와 상권을 탈취하고 1607년에는 아국과도 통상을 열며 자바(현재 우리 점령지의 동인도의 일부)에 ‘빠타비아’ 부(府)를 세워 이를 근거지로 전 남양군도를 점탈하고 일시는 대만까지 그 영토로 넣은 일이 있었다.
한편 영국은 1600년에 동인도회사를 열어서 태평양에 진출하고 1609년에는 아국과도 통상을 열었다.
아국인도 서태평양에 위세를 떨치던 왜구선(倭寇船)이든지 태합(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인허(認許)한 어주인선(御朱印船)이든지 해외에 도항(渡航) 발전이 허다하였으나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는 천초(天草)의 난(亂) 후 국인(國人)의 도항을 금하며 네덜란드인, 중국인 외에는 외국무역을 금지하였음으로 아국인의 태평양 상의 세력이 전혀 쇠미(衰微)하였었다.
18세기에 들어오자 영국은 인도경영에 전심하고 일시 태평양방면에 손을 넣었으나 그것을 평정한 후에는 호주(濠洲) 척식(拓殖)을 개시하였다. 러시아(露西亞)는 17세기말 시베리아(西伯利亞)방면으로부터 태평양으로 나와서 ‘가사린’ 2세 시대에 치시마(千島) 근해를 심검(深檢)하여 그 대부분을 점령하고 1806년에는 아국에도 통상을 구하였다.
19세기가 되자 영국의 호주개척은 크게 발전하는 한편으로 1824년에는 싱가포르(新嘉坡), 1842년에는 홍콩(香港)을 얻고 위해위(威海衛)를 조차(租借)하여 태평양 상에 최대세력을 확립하고 1900년에는 호주연방에 자치를 허하였다.
러시아의 아시아경영은 19세기에 더욱 그 걸음을 나아가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를 건설하고 일청전쟁(日淸戰爭) 후는 만주(滿洲)에 세력을 부식(扶植)하여 여순(旅順), 대련(大連)을 조차하고 태평양에 세력을 신장하려 하였다.
프랑스(佛蘭西)는 19세기의 중엽으로부터 인도차이나의 경영에 노력하여 1959년에는 사이공(西貢)을 얻고 이어서 캄
보디아 베트남(安南)을 보호국으로 하여 동경(東京)을 획득하고 또 □ 나현(羅現) 태국(泰國)으로부터 메콩강 이남의 땅을 얻어 태평양의 일각에 그 세력을 확립하였다.
독일(獨逸)은 19세기 말부터 태평양 방면에 착목(着目)하여 영국, 네덜란드과 함께 뉴기니아를 분할하고 이어서 비스마르크 제도, 마샬 제도를 점령하고 교주만(膠洲灣)을 조차하여 마리아나, 바라오 양 제도를 스페인로부터 구입하고 사모아제도를 합중국(合衆國)으로부터 나눠서 태평양에 일세력을 이루었다. 미국은 오래 먼로주의를 보지(保持)하였으나 19세기말부터 제국주의를 채택하여 1898년에 하와이(布哇)를 병합하고 미서(米西)전쟁89)으로 쿠바 섬과 필리핀 제도를 얻고 태평양 상에 세력을 신장하였다. 아국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급격히 발전하여 일청전쟁으로 대만(臺灣)을 획득하고 일러전쟁으로 노국(露國)의 태평양진출을 방지하며 사할린(樺太) 남반(南半)을 얻어 북태평양에 세력을 확립하였다.
1914년 세계대전 뒤에 아국은 적도이북의 구독일령의 위임통치를 맡게 되니 제1차대전 후 태평양은 이를 둘러싸고 있는 일로미영(日露米英)의 관계가 중대한 정치적 의의를 가지게 되어 드디어 태평양전쟁에 까지 이른 것이다.
원래 미국의 국책은 19세기 말에 해장(海將) ‘마한’의 지론에서 그 원(源)을 발(發)한 자이니 그는 ‘국책이란 무엇이냐’라는 제하(題下)에 “국책이라는 것은 그 국가가 요구할 때에는 무력으로써 이 지지관철을 기하는 바의 정책을 말하는 것으로 미국의 경우에는 먼로주의와 중국의 문호개방문제인데 먼로주의에는 무력발동의 필요를 인정치 않으나 극동경영을 위하여는 웅대한 해군력을 필요로 한다.” 하고 당시의 대통령은 이 말에 감분(感奮)하여 미서전쟁당시에 필리핀 제도(比島)점령을 결행하고 중국문제에
89) 쿠바섬을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
대한 발언권의 확보와 중국 시장에 진출을 하기 위한 거점이 되게 하기 위하여 ‘비도 영유는 태평양에 다리를 놓게 된 것이라’ 고 갈파(喝破)하였다.
이 태평양의 가교야말로 중국에 진출하고 태평양제패를 목표로 한 것이니 이를 위하여 대해군 건조를 계획한 것이 소위 ‘스타크 안’으로 총액 127억 달러로써 1946년 말까지 5만5천 톤급을 포함한 전함 35척을 위시하여 항공모함 20척, 순양함(巡洋艦) 88척, 구축함(驅逐艦) 378척, 잠수함 180척, 계 701척, 총톤수 350만 톤이라는 사상(史上) 공전(空前)의 대군비확장에 착수한 것이다. 그 후 태평양전 발발에 의하여 항공모함의 급증 등 다소의 변경은 보았으나 익익다액(益益多額)에 건함비를 지출하는 중이다.
그런데 필리핀 제도에서는 개전 후 수개월에 이미 구축되어 서태펴양의 거점은 전혀 상실하여 버린 것이다.
원래 미국은 먼로주의 이래 전통에 의하여 서반구의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하고 이 방위와 관계있는 아프리카(亞弗利加)와 호주에는 항상 일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에 영국이 유럽에서 대독전쟁상 도저히 호주에 손이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영국의 속령인 호주를 그 수중에 넣어 그 유산을 상속하려하므로 이 방위를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다하며 솔로몬제도를 손에 넣으려고 서술한 바와 같이 작년8월 이래 태평양전쟁이 계속되는 것이다.
3.
아국의 해군은 막부시대로부터 힘썼으나 메이지유신 후에 일대비약을 이루었다. 1868년에 해육군무과(海陸軍務課) 설치, 다음 해 3월에는 해군병학교 개신(改新), 1872년 해군성 신설, 1873년에 요코스카(橫須賀) 조선소(造船所)에서 아국인의 손으로 처음 군함, 청휘(淸輝), 신경(迅鯨) 양함(兩艦)의 건조를 착수하고, 1875년에는 후소(扶桑), 금강(金剛), 비학(比㕡) 삼함(三艦)의 건조를 주문하였다.
말기에 영국이 조선의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하여 동양의 풍운이 험악하였으나 영국은 이것을 중국과의 티베트(西藏)문제해결에 대하여 유리하게 해결하는데 이용하는데 그치었다.
1882년에 해군군비확장에 관한 군유(軍諭)가 내리고 1886년에는 해군조례의 발포와 함께 군정, 훈령의 별이 분명하게 되고 1887년에 건함 계획안이 의회와 정부 간에 상지(相支)되자 황송하옵게도 메이지천황께옵서는 제함장려비로 향후 6년간 어내탕금(御內帑金)을 하사하옵신다는 분부와 함께 조칙을 하사하옵시니 관민은 모두 성려에 공구감격(恐懼感激)하였다.
1894년 일청전쟁이 일어나자 우리 함대는 풍도충(豊島沖), 황해, 및 위해위해전(威海衛海戰)에서 대승을 박(博)하여 청국함정 17척을 획득하여 우리 해군력은 더욱 증대하였고 1896년부터 1897년 일러전쟁 중에 순양함과 전함을 우리 해군 공톤(工噸)에서 기공(起工)하여 대함건조에 일신기축(一新機軸)을 열고 1911년 전함 금강(金剛)을 외국에 주문한 것을 최후로 이후부터의 군함은 전혀 국내에서 만들게 되었다.
우리 국민은 일러전쟁에 일본해에서 위공을 세운 도고(東鄕) 원수에 감사하는 동시에 군정가(軍政家)로서 야마모토 곤베(山本權兵衛) 대장과 조선(造船) 기술의 독립으로서 히라카(平賀) 박사에 감사치 않을 수 없는 바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우리 나라가 참가한 후의 활약전은 열강을 당목(瞠目)90)케한 바이있고 1920년 88함대의 완성은 미영으로 하여금 더욱 경계와 시기의 눈을 뜨게 되어 1921년의 워싱턴
90) 당시(瞠視). 놀라거나 괴이쩍게 여기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끄러미 쳐다봄
(華盛頓)회담에서는 미영 각 오에 대한 아국 3, 소위 5, 5, 3 비율로 아국 해군을 영원히 그들의 배하(配下)에 두려하였다.
1927년의 제네바에서 열린 군축회담은 순양함 보유문제로 미영 간에 의견이 불일치되었으나 1930년에 런던(倫敦)에서 열린 군축회담에서는 일, 영, 미 삼국 간에 보조함 병력량의 결정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1936년까지의 잠정적의 것인데 1934년에 아국은 워싱턴(華府)회담의 5, 5,3 비율로는 국방의 안고(安固)를 기치 못하겠으므로 이 폐기 통고를 하고 1935년에 런던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우리나라가 영미와 균등한 원칙하에 공정한 축군(縮軍)을 제안하였으나 미영은 이를 거부하여 1936년에 일영미불이 5국 군축회담 탈퇴, 자주적 해군완성에 매진하는 중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고 1941년 12월 8일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서 태평양 상에 일대 결전이 전개하게 된 것이다.
적 미영은 19세기를 대서양의 시대라고 하고 20세기를 태평양의 시대라 하여 아시아인 10억이 생존을 위하여 활약할 아시아의 전정(前庭)에 놓인 태평양을 감히 아시아 정복의 무대를 삼으려하여 금차의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4.
이러한 세기적 아시아 10억의 대미영전쟁이 진행하는 한가운데-태평양을 중심으로 치열한 결전이 계속 되는 중에-반도에 해군지원병제가 실시된 것은 그 의의가 중대한 바이다.
반도는 동서남 3면이 바다로 둘러싸였으므로 옛날부터 상당히 해양과 친하였었고 삼국시대의 장보고(張保皐), 정년(鄭年)은 이 모두 해양을 중심으로 한 호걸(豪傑)이요, 이조(李朝)에 이르러서도 통제사, 수군절도사, 수사, 방어사 등이 있었으나 대개 연안 방비의 보수적이요 하나도 해양을 정복하여 크게 위세를 4해에 떨치겠다
는 것은 없었는데 이제 반도인도 황국 해군의 일원으로 동아 10억 인을 대표하여 태평양의 수호자가 된다는 것은 지대한 감격에 잠기는 바이다. 이 공포를 보자 반도의 청소년이 다투어 혈서지원을 함도 격정의 소치로 당연하다 할 것이나 그 보다도 책임의 중대함에 숙연히 자계치 않을 수 없는 바이다.
해군무관부의 마츠모토(松本) 대좌(大佐) 담(談)에는 해군의 자질로서
1) 견확(堅確)한 정신의 함양(檻羊)
2) 과학성을 다분(多分)으로 요하는 것
3) 언제든지 긴장을 요구하는 것
4) 완건(頑健)한 체위를 요구하는 것
5) 기민한 판단과 치열한 감투정신이 요구되는 것
등을 들어 경계한 바이 있고 또 특히 책임 관념에 투철함이 그 제일요건인 것을 말하였다.
대개 해상에서는 일인의 임무가 전군에 영향되는 바가 크고 결전승패의 기(機)를 최초 5분간에 포착하는 여부에 달렸다는 특수성에 기인하는 바이다.
생을 이 세기적 결전시대에 타고나서 동아인의 천년운명을 결정하는 태평양전에 나선다는 것은 남아의 본회(本懐)라 한 것이다.
이번 황국을 위하여 위대한 순절을 한 연합함대사령장관 야마모토(山本) 56원수는 일러전쟁 때에 일본해전에 출전하여 팔에 적탄을 맞았었는데 치료 중에 군의가 팔을 자르자고 하니까 그는 숙연(肅然)정금(正襟)하고 ‘이팔은 폐하께 봉공할 팔인데 자르면 어찌하겠느냐’ 하여 자르지 않았었다.
그 후 손가락 둘만 자른 그 철완(鐵腕)으로 연합함대를 이끌고 태평양 상에 불멸의 위훈을 세웠다.
야마모토 원수는 일찍이 대사관부(大使舘附) 무관(武官)으로서 미국 아나포리스 병학교를 참관할 때에 말이 우연히
말래(末來) 일미전(日米戰)에 미치자 교관은 도도히 미국해군과 일본해군과의 비교를 말하였다.
가만히 종시를 듣고 있던 원수는 고요히 미소하며 하여간 그 해답은 전장에서 보여 드리오리다 하였다.
과연 그 해답은 하와이해전으로 거오(倨傲)91)한 그들의 심장을 서늘하게 하였다.
동경 가스미가세키(霞關)에 당당하게 우뚝 솟은 해군성의 대신실(大臣室)에는 17~8인의 역대 해상의 초상사진이 걸리이고 일단 높은 벽간에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원수의 정장한 유화가 걸리어 무궁히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이 나라를 지키는 해군의 수호신이 되어 있다. 반도의 청소년은 이 벽간에 어떻게 걸리려는 결의가 있는가.
<출전 : 柳光烈, 「海軍志願兵制 實施와 半島 靑年의 榮譽」, '朝光' 第9卷 第6號, 1943년 6월, 20~25쪽>
20. 윤덕영(尹德榮)
1) 반도의 지원병에 바란다
고문 자작 윤덕영
일시동인(一視同仁)·내선융화(內鮮融和)를 소리 높여 외친 지 이미 오래다.
그렇지만 반도 민중은 국민의 최대 의무인 병역에 참가하지 못하고, 이를 유일한 유감으로 생각했는데, 작년 반도 땅에도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현되기에 이르러 이제 이로써 내선일여(內鮮一如)는 백척간두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 느낌이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군대는 황송하게도 천황폐하가 친히 통솔하시는 것으로, 그 장병의 충용무비(忠勇無比)함은 물론 폐하를 위해, 조국을 위해 죽음으로 봉공하는 것은 세계에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황국의 자랑으로 삼는 바인데, 이제 우리 반도인(半島人)92)도 이 황군(皇軍)에 들어가 동아신질서 건설에 함께 공헌할 수 있게 된 것은 반도를 위해 또 우리나라(邦家)를 위해 참으로 경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 본 제도가 실현되는 이상 반도청년은 앞으로 꼭 지원병에 지원함으로써 본 제도의 취지에 따르고 나아가 더욱 더 이를 확충·진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작년 훈련소에 입소해 훈련을 수료하고 제1차 입영하는 지원병들의 그 이후의 상황은 매우 양호하다는 정평이 있다. 그 일부는 이미 우리 대륙작전에 참가해 혁혁한 무훈을 올렸고, 나아가 호국의 꽃이 된 용사도 있으니, 다행히 반도청년을 위해
91) 거만(倨慢)스럽고 남을 낮추어 보는 교만(驕慢)한 태도(態度).
92) 조선인.
만장의 기개를 펼치고 있는 것은 매우 유쾌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바라건대 거기다가 반도 지원병은 자신의 사명이 특히 중요함을 인식하고, 나아가 수양과 단련을 쌓아 그 정신력에서, 그 체력에서 모두일본 내지인의 그것에 비래 전혀 손색이 없고 훌륭한 황국의 군인정신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반도 지원병의 성적이 양호하다는 정평은 올해 이미 수용 정원을 400명에서 600명으로 증원하고, 지원자 수는 작년의 1,900여 명에서 일약 1만 3,000여 명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지원자 수가 급증한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는 딱히 본 제도의 만족할 말한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진정 황군병사로서의 요건들을 구비한 자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지원병이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야유적(揶楡的) 기분에 응모하는 자가 있어서는 그 지원자 숫자의 급증도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
특히 작년도 실적에 비추어보면 이런 경향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크게 마음에 새겨둘 사항이다.
또 중류 이상 가정에서의 지원도 아직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한데, 앞으로는 일반 지식인의 지도와 함께 이를 크게 종용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제 세계의 대세는 유럽의 신 정세를 둘러싸고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상태이고, 반도청년의 분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기 때문에 앞으로 청년은 반드시 지원병이 됨으로써 반도인에게 기대되고 가중된 중대 의무를 완전히 수행하여 국토의 방어에, 공성야전(攻城野戰)에, 반도청년의 의기를 충분히 발휘하기를 바란다.
반도인이 진정 폐하의 적자(赤子)로서 충성을 보여주는 것은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 그저 책상 위에수백, 수천 권의 책을 쌓아두고 일본정신을 운운하는 것보다 제군들이 실지(實地)에 배낭과 총을 어깨에 걸치고 이향(異鄕)의 진흙땅을 묵묵히 진군하는 모습을 볼 때, 진정 우리를 감격케 하고 거기에서 약동하는 살아 있는 일본정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강국 일본의 모습은 이로써 한층 더 배가된다.
바라건대 그 체력에, 그 정신력에 한층 더 향상을 도모하고, 조국 일본을 위해, 반도청년의 의기를 중외에 드러내어 인류의 행복·세계의 평화에 공헌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출전 : 尹德榮, 「半島の志願兵に望む」, '總動員' 1卷 5號, 1939년 10월, 34~35쪽>
21. 윤치호(尹致昊)
1) 징병제 실시와 조선청년
이동치호(伊東致昊, 이토 치카우)93)
조선인은 이조(李朝) 500년래 병대(兵隊)가 되는 것을 비천시하는 풍습이 전통적 오히려 제2천성이 되어 있었음으로 과연 지원병에 응모하는 자가 있을까, 가령 있다고 하더라도 이론의 군인으로서 그
93) 윤치호(尹致昊)의 창씨명.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만약 이 제1회의 지원병에서 차질(蹉跌)하는 일이 있다고 하면 뒤를 따르는 청년의 전도에 위구(危懼)94)하는 바가 있다는 걱정이 나는 물론 당시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었는데 그 결과는 예정과는 판이하여 매우 양호하였었다. 그 후는 매년 정원에 수십 배가 되는 지원자가 앞을 다투어 응모할 뿐만 아니라 이를 졸업하고 나간 병사 중에는 신(神)으로 제사(祭祀) 받아 수훈갑의 은명(恩命)에 빛나는 자까지 나게 되는 정도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반도의 지원병을 다시 인식하였다.
철의 체구에다가 일본정신을 넣는다면 일본병대만 못지않은 장병을 만들기에 곤란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반도청년은 체위에 있어서는 물론 소질에 있어서도 일본의 청년에게 과히 떨어진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오랫동안 생활환경과 교육의 밀도의 차이에 의하여 뒤떨어진 바가 있지만 그러나 연성(練成)과 교육에 의하여 일본 청년의 수준에까지 높일 수가 있다고 믿는다. 이제야말로 반도청년의 가슴속에 울연(鬱然)95)히 끓어오르는 미영격멸(米英擊滅)의 투혼을 결집하여 훌륭한 신병(神兵)으로서 생명을 바칠 절호의 때이다.
<출전 : 伊東致昊, 「徵兵制 實施와 朝鮮靑年」, '春秋' 第4卷 8號, 1943년 9월, 42쪽>
22. 이각종(李覺鍾)
1) 황민의 본령을 발휘할 날은 오다
국민총력조선연맹 □□ 청산각종(靑山覺鍾)96)
징병제가 반도에 실시하게 된 것은 국가 전체로 보아서 또는 조선 사람의 처지로 보아서 경하할 일이다.
첫째로는 우리 조선 사람도 그만큼 폐하의 어신임(御信任)을 받든 것이니 우리도 폐하의 애육(愛育)하옵시는 적자(赤子)로 국가의 유용한 간성(干城)으로 황은(皇恩)을 □□ 광영이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병합 이래 30여 년에 조선 시정 당국의 노력한 결과이라 하겠으며 또는 사변 이래로반도 사람의 애국열성이 비상히 앙양되어 이 성의가 천청(天聽)에 상달된 결과일 것이며 또는 근년 지원병 제도가 실적이 양호하여 내지인 병원(兵員)과 거의 차이가 없을 만큼 우수한 성적을 보인 결과일것이다.
이렇게 위로 성상(聖上)의 어신임을 받은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는 광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둘째 차별대우가 철폐되는 제일보이다. 종래에 병역은 내지인에게만 한하고 반도인에게는 허치 아니하던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이 차별을 철폐한 것이니 여기에 따라서 모든 대우문제는 점차로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인의 국민으로서의 지위가 향상되는 제일보라 할 것이다.
94) 염려하고 두려워 함.
95)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짐. 크게 성하다.
96) 이각종(李覺鍾)의 창씨명.
셋째로는 반도 사람이 황국신민으로서 완전 연성(鍊成)되는 최상의 기관이라 하겠다.
국민연성의 기관으로는 학교교육, 기타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좋은 방법으로는 군대교육이다.
병영이라는 활감과(活坩鍋)에 넣고 도야(陶冶)하면 생활과 성격과 체격이 완전한 일본인으로 연성될 것이니 내선일체를 촉진하는 데는 다시 없는 좋은 방법이다. 군대라 하기보다 학교라 할 것이며 복무라 하기보다 양성이라 할 것이니 입영하는 그 사람 개인으로서도 다시없는 좋은 기회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제도의 실시를 충심(衷心)으로 환영하며 개인의 사정으로는 어떠한 곤란이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억제하고 그야말로 멸사봉공 글자 그대로 봉공할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은 우리도 참으로 일본정신의 참 된 뜻을 알아야하겠다.
원래 일본국민은 일군만민(一君萬民)의 원칙으로 모든 것을 들어 천황께 바치는 것이다. 천황을 떠나서는 자기라는 것은 없다.
원래가 바친 몸이니 부르시면 나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생명까지 바쳐진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의미로 가정에서부터 자제를 교육하여 일본국민으로서의 본령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하겠다.
<출전 : 靑山覺鍾, 「皇民의 本領을 發揮할 날은 오다」, '半島の光' 鮮文版 56號, 1942년 7월, 13쪽>
2) 적전(敵前)에 새해를 맞이하여
청산각종(靑山覺鍾)
필승불패의 신념이 재아(在我)하니 모름지기 침용(沈勇)97)을 요할 것이다.
이제는 정신력과 정신력, 물질력과 물질력이 전부가 대치(對峙)하였으니 최후까지 버티는 힘 -완장력(頑長力)이 승리의 요체가 될 듯.
<출전 : 靑山覺鍾, 「敵前에 새해를 맞이하여」, '半島の光' 鮮文版 72號, 1944년 1월, 10쪽>
23. 이성환(李晟煥)
1) 지원병사 제군에게
-대동아 건설의 젊은 용사여, 오늘과 내일은 너의 것이니라
대동광업회사(大同鑛業會社) 중역 이성환
현하 제(諸)정세를 감(鑑)하건대, 명일(明日)의 싸움은 동양인끼리 서로 민족적 관념 밑에서 싸울 투
97) 침착하고 용감함.
쟁이 아니라 동양 대 서양의 싸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환언하면 황인종 대 백인종의 전쟁일 것이외다.
그렇다면 동양인으로서의 우리는 일본이라 조선이라 만주라 지나(支那)라 하는 그러한 편협한 민족투쟁을 집어치우고, 동양인 전체가 동일체가 되어서 대동아의 국방에 임해야 될 것입니다. 일본 한 나라의 국방이 아니고, 지나 한 나라의 국방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해서 동양전체의 국방이외다.
이러한 대동아의 국방에 조선인이 참가하여 분투 노력 못한다는 것은 조선인이 죽었느냐 살았느냐 하는 문제일 줄로 생각하는 바이외다. 다시 말하면 대동아의 국방에 조선인이 참가 못한다는 것은 조선인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외다.
그런데 조선인 속에서 동아의 국방을 위해서 지원병이 생겼다는 것은 실로 경하할 일인 것입니다.
만일 조선인 청소년에게 징병령이 내린다면 100만의 병정을 내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시행되고있는 지원병은 징병이 아니고 문자 그대로 지원병이외다.
하구 싶어서 자기가 자진해서 지망하는 지원병이 제2기 모집에 8만 6,000이라는 근 10만을 돌파한 것은 실로 대서특기(大書特記)할 일이오, 이 기세를 국가는 배양하고 조장해서 최후에는 징병에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외다.
과거, 수십 년간의 조선이 걸어온 역사를 보면 다양다채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재의 조선사회 안에는 한말시대의 정객도 있고, 그 이후의 민족주의운동을 하던 인물도 있고, 또 그 이후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운동을 하던 인물도 있습니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조선에 와서 수십 년간 살아온 내지인과, 내지에 있은 내지인도 역시 과거에는 조선을 식민지로 생각하고 경제적으로나 또는 정신으로 좋지 못한 현상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聖旨) 밑에서 양자간에 피차 이 모든 좋지 못한 관념을 버리게 되는 현상은 참으로 기쁜 일이나, 그러나 이러한 사상에 젖었던 사람들로서는 아무래도 그 근성의 적은 한 끝으머리라도 머릿속 어느 구석에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하매, 진정한 내선일체는 역시 과거인 보다 순수한 정신을 가진 내선인(內鮮人) 청소년 제군에게 있다고 봅니다.
고로 과거는 과거로 매장하고, 금일과 명일은 청소년에게 있다고 절규하고 싶십니다.
그러므로 청소년제군은 “과거인은 물러나라. 금일과 내일은 우리의 것이다.” 하고, 부르짖으며, 대동아 신질서건설에
용약매진(勇躍邁進)해야 할 것이오, 동양평화를 위해서 배전(倍前)의 분투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출전 : 李晟煥, 「志願兵士諸君에게-大東亞建設의 젊은 勇士여 今日과 明日은 너의 것이니라!」,'三千里' 第12卷 7號, 1940년 7월, 68~69쪽>
24. 이영근(李泳根)
1) 징병제와 조선 어머니에게
상전용남(上田龍男)98)
조선의 청춘남녀는 물론하고 어버이 된 이들에게 커다란 감격을 준 징병제 실시는 조선 사람들의 굳은 결심과 빈틈없는 애국적 정신을 요구하는 역사적 국사입니다.
이때 귀여운 아들을 전선에 내어보낼 어머니 되시는 분들의 인생관이며 생활태도가 특히 커다란 변화를 해야겠으며 어머니들의 힘이 이 나라의 국역을 북돋우는 데 근본적요소가 되는 것을 알아서 조선의 여성계발운동을 맹렬히 일으켜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국민총력 조선연맹에서도 이 운동의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금년도의 새로운 사업으로 특히 부인계발운동에 힘을 쓰기로 하고 부인지도위원회를 조직해서 여러 가지로 의견을 참조할뿐더러 전선적(全鮮的)으로 일으켜야 할 운동이니만큼 각 지방연맹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하 몇 가지 조목의 설명은연맹에서 제정하고 총재의 훈사하신 뜻을 본떠 특히 징병제하에 처할 부인도(婦人道)임을 먼저 말해 둡니다.
자세한 세목은 차차 제정될 줄로 압니다만은 먼저 정신적 방면을 들어 해설할까 합니다.
(가) 부덕의 함양
어머니 된 사람 자신이 자녀의 모범할 만한 부덕을 가져서 일일이 말로 타이르지 않아도 스스로 본뜰 인격을 길러야 하겠으니 이 수양을 위해서 특히 이하의 기록한 정신을 기르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1. 국체(國體)의 존중함을 깨달을 것
황군의 어머니 될 사람의 근본적 마음씨는 이 한 가지 일이 결정되면 다시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대일본에 대한 신앙입니다.
나라를 믿고 믿음입니다. 모든 일에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내종에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이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가는 나라임을 믿고 자랑하고 소중히 아는 마음입니다.
2. 신명을 섬길 것
천지신명의 힘을 빌어 아이를 기르고 남편을 섬기고 살림을 해 나가는 여성이라야 앞으로 쓸 여성이되는 것입니다.
무당, 판수, 뭇꾸리, 점쟁이, 사주쟁이 같은 것을 찾아 다니면서 쓸데없는 팔자타령을하지 말고 우리나라의 온 국민이 다 같이 섬기는 신사(神社)를 참배하고 집에는 ‘가미다나(神棚)’를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가미다나’를 통해서 온 나라의 영(靈)을 맡은 신사를 참배하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신사에 참배할 때는 나 하나를 행복되게 하여 달라든지 우리 집 식구의 병을 고쳐 주시라든지, 돈을
98) 이영근(李泳根)의 창씨명.
모으게 하여 달라든지 이러한 소원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나라의 영세무궁한 발전을 빌고 국민전체의 진충보국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내 집이야 아무리 되던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던, 이 나라만 번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비는 것입니다.
3. 내선일체의 정신을 잃지 말 것
내선일체는 국책의 방향이요, 조선통치의 이상입니다. 일본에 사는 사람이나 조선에 사는 사람이나 모두 다 한 맘 한 뜻이 되어서 서로 서로 형제의 화목과 국민의 직분을 다하는 것을 힘써야 합니다.
조선 사람은 자기의 교만심을 버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순진한 맘으로 일본정신을 받아들여 이것을 내 정신을 삼아 충실한 국민의 신념을 굳게 할 것입니다. 특히 어머니 된 여성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일본 여성들의 생활을 본떠서 친절하고 얌전한 일본부인을 벗으로 사귀어 이들과 재미있게 사귈뿐더러 실제적인 가정생활을 통해서 생활의 일본화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특히 앞으로 우리 아들들이 일본 청년들과 같이 황군의 전장에서 활약할 때 서로 생활형식이 다르면 여간 불편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을 잘 생각하셔서 일본 부인들에게 여러 가지 일을 솔직하게 배워가서야 하겠습니다.
생활의 내선일체야 말로 진정한 내선일체입니다. 이 귀한 사업은 부인들이 능히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4. 지식의 향상을 도모할 것
앞으로 새질서를 건설하고 새 생활을 발견할 조선의 영성이니, 우리들에게 무엇보다도 급한 문제는여성의 지식향상이라 하겠습니다. 그중에도 가장 급한 것은 국사에 대한 지식과 국어습득과 생활의 과학화라 하겠습니다.
국사에 대한 지식을 부지런히 공부해서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나라의 존중함을 가르치고 어머니 자신이 국어를 상용하여서 가정의 생활을 국어로 할 수 있게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국책에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배우는 데 자리를 가리지 말고 부지런히 배워나가면 자녀들에게 뒤떨어지지 아니하고 자녀들의 생활을 지도하고 그들에게 숭배를 받는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생활의 과학화는 조선가정의 긴급한 일이올시다. 나라를 위해서 부지런하려 하니 가정생황이 단순하고 질서있고 과학적이여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아들들은 무력전에만 용사가 될 뿐 아니라 건설전에도 용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인문이 발전되지 못한 대동아공영권은 우리 국민의 과학적 두뇌를 요구합니다.
자녀가 과학적이기 위해서 어머니가 먼저 과학적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나) 자녀의 양육
1. 자녀는 국가의 보배
우리의 자녀는 국가의 보배요, 나라를 지키는 방패요, 국민생명의 영구한 발전을 위한 핏줄기라 하겠습니다.
우리 자녀를 이렇게 생각할 때 소중하기 짝이 없습니다.
고래로 충신열사의 뒤에는 반드시 위대한 어머니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키워서 나라를 위해 바치고 온 세상인류의 행복을 위해 바치고 불의와 편벽된 세상을 고쳐 바르고 질서있는 세상을 만드는 사업에 내놓고 어머니는 뒤에서 슬그
머니 고요히 즐기면 어머니의 덕은 이에서 더할 데 없다 하겠습니다.
2. 자녀는 바르고 굳세고 사랑스럽게 기르자.
귀여운 아기이나 약한 의지를 가지고 황군에 가담할 용사가 될 수 없고 강한 체력이나 바른 인생관을 갖지 못하면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바른 일에는 칼을 써 물러서지 않고 불쌍한 자를 볼 때 사랑스럽고 자비스러운 마음을 잊지 말도록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대일본무사도의 정신은 곧 이것입
니다.
3. 자녀의 표본이 되어야 하겠다.
말이 없는 중에도 저절로 본을 받아 그 영향으로 감화를 얻도록 어머니 자신이 자기를 닦아야 하겠습니다.
4. 학교교육과의 연락.
앞으로 학교교육도 징병체제에 순응하여 교육내용에 많은 변혁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중등교육은 철두철미 훈련체제를 가할 것입니다.
이때 부모는 학교 당국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서 학교교육과 가정교육과의 연관을 맺어 교육을 받는 아이들로 하여금 이중적 정신 부담이 없도록 노력하실 것이며, 교사와 부모사이에 어색함이 없는 친분과 사랑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학교교육에서 가정을 찾고 가정교육에서 학교를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다) 생활의 혁신은 급하다.
지금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가정생활의 근본적 혁신입니다. 청년들이 새로운 인생관으로 이 비상시에 처해 나가려 할 때 어머니들도 생활혁신의 전사가 되어 주소서.
장차 조선 여성 중에도 전사 상사의 아내, 미망인, 호국충령의 어머니와 누이가 자꾸 생길 것입니다.
일본의 여성들이 남편을 전지에 보내고 혹은 ‘야스쿠니신사’의 신으로 모시고, 그가 갈던 논밭을 여전히 갈고 그가 보던 장사를 여전히 해서 국민 총후 생활을 끄떡없이 유지해 놓은 것은 일본의 강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조선 여성들도 앞날의 비상시를 위해서 지금부터 생활 그 자체를 아주 뿌리부터 뜯어 고쳐야 하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마는 지면관계로 중요한 것의 제목만 걸어 둡니다.
1. 시국에 대한 바른 인식, 유언비어에 속지 말고 늘 당국의 지시를 순직하게 믿을 것.
2. 경제지식을 길러 돈셈에 규모 있게 예산생활을 하고 빚을 지지 말고 분에 넘는 생활을 금하고 허영과 사치를 버릴 것.
3. 의식주의 개선에 노력해서 깨끗하고 위생적인 집을 유지하고 적게 먹고 영양식을 먹도록 배우고 연구하고 검소한 의복을 즐기며 일 안하고 먹고 살 수 있던 예전의 의복을 지금도 입지 않도록할 것입니다.
4. 물자의 애호활용에 힘쓸 것
5. 저축의 여행
6. 전가 근로, 온 집안에 그대로 놀고 먹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할 것입니다.
7. 국방훈련에 부지런히 해서 방공연습에 주부된 이가 솔선해서 나가야 할 것입니다.
8. 군사후원에 노력할 것.
<출전 : 上田龍男, 「징병제와 조선어머니에게」, '朝光' 第8卷 6號, 1942년 6월, 34~37쪽>
25. 이원영(李元榮)
1) 전국(戰局)의 긴박과 청년에게 요망
매일신보 정경부장 이원영
학병의 출진에 이은 징병의 실시로 반도의 청년들이 황군(皇軍)의 일원으로서 직접적으로 국방의 중책을 짊어지게 된 이후 반도청년에 대한 내외의 주목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반도에 학도지원병제도가 발포된 날부터 입영하는 날까지, 학도의 동향에 대하여 뜻있는 사람은 조선이 오랜 동안 무(武)에 친숙하지 않았던 역사적 인습을 지적하거나, 혹은 일단 이제 제도가 지원인 이상 이것이 학도들에게 미칠 심리적 영향을 동정해 그 행동의 필연성을 지적하기도 하고, 혹은 오히려 그 용감성을 칭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순수 이론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 중에는 국가존망이 걸린 때에 국가가 필요해서 요구하는 청년의 힘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잠시라도 주저허가나 망설이는 기색이 있다면 황국청년으로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라며 분개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징용령이 발포된 이래 도회지의 일부 청년들 중에는 대체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판독불가)…… 걸어 다니며 마치 징용을 피하기 위해 초조해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경향도 없지는 않다.
물론 모든 청년들이 그런 것은 아니고, 극히 일부분의 청년들이긴 하지만 그런 나약한 태도를 지닌 어정쩡한 청년들이 없지는 않다.
그렇게 정세가 긴박하기 않은 시대였다면 일부 청년들의 그런 나약함이 때로는 개인의 성격이나 아니면 수양의 문제로 이해되기도 했고 또 용납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황(戰況)과 눈앞의 정세가 이렇게까지 긴박한 상태이기 때문에 설령 그것이 단 한 명의 청년의 나약함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문제되고 비판받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반도청년들 중에는 전황의 긴박·국가의 위급을 몸으로 느끼고 불구덩이 속에라도 뛰어들려는 정열이나 애국심의 기백은 아직 부족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청년들의 이러한 어정쩡한 태도를 일부 사람들처럼 왜곡되고 시의심을 지닌 시각으로 보고 싶지는 않다.
아니, 그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반도청년들의 명예를 위해서도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부 청년들은 공평하게 보건대 불령한 생각이나 혹은 이해 타산적 생각으로 하고 그런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징병제도 시행되면서 내년쯤부터 친족혈족이 전쟁터에 서게되는데, 아직 피가 섞인 친족이 적의 총알 앞에 서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 전쟁을 몸으로 체감할수 없을 것이다.
느낀다 해도 느낌의 정도가 약하다. 육친의 형이 전사하거나 동생이 적의 총알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분기한 청년들과 같이는, 아무래도 그 적개심과 복수심이 불타오르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히 그 시국에 협력하는 태도에서도 철저하지 못한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이유만으로 나약한 청년들의 그런 태도가 용납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우리 반도청년들은 현재 어떠한 국면에 직면하고 현재 우리 행동이 장래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지에 대하여 진진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전황은 그야말로 긴박하다. 일본은 물론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지만, 적 아메리카도 필사적으로 반격을 가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죽든가 죽이든가 하는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필사적인 것은 지극히 명료하다. 만에 하나 이 싸움에 패한다면 일본은 그 빛나는 역사를 더럽힐 뿐만 아니라 일본 민족은 영원히 멸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필사적인 것은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절대 일본에게 질 수 없다는 민족적 우월감과 오랫동안 품어온 동양제패의 야망 때문이다.
미개발 동양시장을 독점하고 동양인 노예처럼 혹사시켜 호사로운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오랜 야망이다. 이 야망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성취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동아의 방어자 일본의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방해물 일본을 깨기 위해 나선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였고, 또 그것은 계획적으로 이어졌다.
저 유명한 1852년 페리99)의 침범은 그렇다 치더라도, 워싱턴회의나 런던회의에서 해군력을 10대 6으로 강제당한 일이나, 만주사변과 ‘지나사변(支那事變)’100)에서의 방해공작은 일본을 몰락시키려는 연속적 음모이고, 대동아전쟁 직전의 대일 수출금지나 이른바 ABCD포위망은 마침내 그들의 음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일본은 자존자위와 동아보전을 위해 결연히 일어나 대동아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만약 일본이 패하기라도 한다면 어떤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미국의 한 장관이 “일본인은 원숭이이기 때문에 인류에 칼을 들고 달려드는 유인원을 전부 죽여야 한다”는 말을 내뱉은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평소 그 문화와 문명에 있어서 경외심을 품고 있기까지 했던 일본인을 감히 원숭이라고 공언하는 그들이다.
만약 패하게 된다면 일본인은 원숭이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하물며 문화와 문명에 있어서 아직 일본인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중국인이나 기타 동양의 민족들은 어떤 대우를 받게 되겠는가. 흑인처럼 농담을 했다는 이유로 신체에 코르타르를 바르고 학살하거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흑인을 사적으로 제재를 가하여 금고에 넣어 폭살시키거나, 살아 있는 채로 자동차뒤에 묶어 끌고 다니면서 죽이는 예를 상기하고는 경악을 감치 못하는 바이다. 먼 흑인의 예를 들지
99)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1858) : 미국 해군의 동인도함대 사령관으로, 함대를 이끌고 1852년 11월
아시아로 향하여 싱가폴·홍콩·상하이 등을 거쳐 1853년 7월 8일 군함 4척을 이끌고 일본에 도착.
100) 중일전쟁.
않더라도 지난 해 평남의 어느 시골에서 한 미국인 선교사가 사과 하나를 훔쳤다는 이유로 아직 분별력이 없는 아이를 옷을 벗겨 등에 인두질을 했다는 사건만 보더라도 충분히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을것이다.
카이로회담 등에서의 그들의 상투수단인 사기적 약속에 놀아난 우리 동아민족 중에서도 장제스(蔣介石) 일파처럼, 여전히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 아메리카 해군은 대승을 거두었지만, 육군은 아직 도착하지 못해서 내륙으로 진격할 수 없었던 아메리카는 당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희망하며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아귀날도 장군을 당수로 한 필리핀 독립당에 전후 곧바로 독립을 부여할 것을 약속하고 이를 이용했지만, 미국·스페인 평화조약에는 필리핀 독립이라는 글자는 어디에도 없었고 아귀날도 이하 독립당 사람들은 아메리카와 협력해서 싸우다가 피를 흘렸을 뿐, 보기 좋게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다.
이것이 아메리카의 정체이다.
만약 이 싸움에서도 일본이 진다면 동아에는 멸망이 있을 뿐이다. 노예화가 기다릴 뿐이다.
청년들은 지금이야말로 동아의 모든 민족들의 생존을 위해 분기해야 할 때이다.
아직 반도의 일부 청년들 중에 나약함으로 인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현재의 자신을 망치고 장래의 조선을 망하게 하는 죄를 져야 할 것이다. 국가를 지키고 동아를 구한다는 정의감에 불타는 마음으로 지금 당장 분기해야 한다.
특히 전 총독 미나미(南) 대장은 동아에서의 반도인(半島人)101)의 지위는 지도민족으로서의 중핵체임을 공약했다.
고이소(小磯) 현 총독도 이와 비슷한 의미의 말을 재확인했다.
반도의 장래는 밝게 빛나고 있다.
그러나 밝게 빛나는 이러한 장래는 청년제군들의 노력과 힘에 의해서만 가져올 수 있음을 명기해야 할 것이다.
<출전 : 李元榮, 「戰局の緊迫と靑年への要望」, '東洋之光' 1944년 4월, 7~10쪽>
26. 이창수(李昌洙)
1) 징병제 실시와 반도인의 각오
1.
조선에 징병제도(徵兵制度)를 실시한다는 것은 이미 작년 5월 9일 발표한 바이거니와 이에 관한 법률안인 병역법(兵役法)중 개정법률안이 드디어 8월 1일부터 시행되어 대망의 조선징병제는 완전히 실시되었다. 이제 징집의 내용을 보면 내년 1944년도에 최초의 병역법 적용을 받을 자는 1923년 12월 2일부터 1924년 12월 1일까지에 출생한 자, 즉 만20세에 해당하는 자인데 금년 11월중에 각 호주는 자기
101) 조선인.
집에 있는 적령자를 본적지의 부윤(府尹), 읍면장에게 계출(屆出)102)하여야 한다. 부윤, 읍면장은 계출된 바에 따라서 징병검사의 일시와 장소를 통지하고 1944년 4월부터 7월까지에 검사를 행하여 합격자는 1944년 12월 이후 수차(遂次)로 군문(軍門)에 들어가 광영 있는 국가의 간성(干城)으로 봉공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이유는 일찍이 징병제실시 결정 발표가 있었을 때, 당국자 담화에도 있었던 바 같이
1) 반도동포가 내선일체의 실천에 철저한 것,
2) 육군특별지원병제도의 실적이 양호한 것,
3) 반도동포의 열망에 응하기 위한 것 등,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즉 시정(施政) 이래 30여년간 반도의 상업, 경제, 교육이 세계의 경이적이 될 만치 진전 발달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주사변(滿洲事變) 이래 반도 민중의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자각은 한층 앙양되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도 민중의 황국신민으로서의 수양과 노력이 동아의 맹주인 대일본제국의 광영있는 신민으로서 국방제일선의 중책을 짊어질 만한 자질을 가지게 된것이 이번 징병제도가 실시된 이유의 하나다.
또 1938년 3월 시행된 육군특별지원병제도는 창설 이래 지원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할 뿐만 아니라 지원병출신 동포 중에는 제일선에서 빛나는 전과를 거두고 금치(金鵄) 훈장의 은영(恩榮)을 입은 자까지 나오게 되었으며, 또한 병영 내에 있어서의 성적이 극히 양호한 것도 이번 징병제실시 이유의 하나이다.
그 뿐만 아니라 징병제 시행에 관한 정보국 총재 담화의 서두에도 있는 바와 같이 반도동포가 병역제도의 실시를 바라는 요망은 의회에 대한 청원, 기타의 진정운동으로 대단 열렬한 바 있었으므로 당국에서는 이 요망에 부응(副應)하기 위해서도 징병제를 실시한 것이다.
그러면 징병제 실시의 의의는 어디 있는가하면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다.
즉 첫째는 징병제가 실시됨으로 말미암아 반도청년은 일시동인(一視同人)의 성지(聖旨)에 기(基)하여 대동아공영권확립을 위한 추진력으로 그 제일선에 참가하는 광영을 입게 되었으며 둘째는 지금까지 시행되어온 육군특별지원병제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지원병출신자 뿐만 아니라 반도의 전 청년이 일제히 국방의 중책을 맞는 광영을 입게 된 것이다.
2.
우리 제국에 징병제가 실시되기는 70년 전의 옛날이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대정봉환(大政奉還)은 동시에 무력봉환(武力奉還)이다. 징병의 대조(大詔)에 ‘짐(朕)이 생각건대 고석(古昔 군현(郡縣)의 제(制), 전국의 정장(丁壯)을 모집(募)하고 군국(軍國)을 세워서 국가를 보호하였다. 오로지 병농(兵農)의나눔(分)이 없었다.
중세 이후, 병권(兵權)이 무문(武門)에 귀(歸)하여 병농이 비로소 나뉘어 드디어 봉건(封建)의 치(治)를 성(成)하였다. 성진(成辰)의 일신(一新)은 실로 천유여년(千有餘年)의 일대변화이다.
이런 때에 즈음하여 해육병(海陸兵) 제도도 또한 시기에 따라 마땅히 제도화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나라 고석(古昔)의 제도에 기초하여 해외 각국의 식(式)을 짐작(斟酌)하여 전국 모병(募兵)의 법을 만들고 국가보호의 기초를 세우라고 한다.’ 고 말씀하시었음과 같이 징병제의 실시는 천황께옵서 만기(萬機)를 총람(總攬)하옵시고 문무병마의 대권을 친재(親裁)하옵시는 조국(肇國) 이래의 고제(古制)에 복귀하는 것이다.
우리 제국의 군대는 세세(世世) 천황께옵서 통솔하옵시는 어제(御制)로 병권을 신하
102) 신고(申告). 어떤 규정에 의하여 어떤 사실을 상사(上司)나 또는 해당 기관에 문서로 냄.
에게 위임하옵신 일이 없다. 중세에 이르러서 조정의 정무가 잠시 문약(文弱)에 흘러져서 병(兵)과 농(農)이 스스로 양분된 결과 옛날의 징병은 자연 장병의 자태로 변하여지고 결국은 무사가 나오게 되었으며 병마의 권은 전연 그 무사들의 손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메이지유신에 의하여 막부(幕府)가 도양(倒壤)되고 왕정이 복고됨에 따라 번(藩)을 폐하여 현(縣)을 치(置)하고 모든 번의 병권을 조정에 취하고 새로이 사민평등(四民平等)으로 병을 징(徵)하게 된 것이 즉 징병제도다.
그러므로 우리 제국의 국민개병제는 우리 제국의 국체와 고제에 즉(則)한 황국 독자의 제도다. 세계열강의 군대를 보면 지원병, 용병 등 여러 제도도 있었으나 대전 후에는 민주지상주의의 미국에서까지 징병제를 채용하게 된것을 보더라도 국민개병제가 얼마나 국방의 본질에 적합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래(爾來) 70년 동안 기다(幾多)의 개혁과 변천을 거쳐 드디어 금일과 같은 세계무비(世界無比)의 병역제도를 완성함에 이르렀다.
황군은 그동안 수다의 전역에서 빛나는 무훈을 나타내어 국위를 선양하여왔고 쇼와(昭和)의 성대(聖代)에 이으러 국운은 더욱 융창하여 만주사변으로부터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세계혁신의 봉화를 들었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함에 이르러 드디어 팔굉위우(八紘爲宇)의 거국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대동아건설 내지 세계 신질서 건설에 매진하게 되었다. 일찍이 맹방(盟邦) 독일의 국방군총참모장 카이텔 원수가 황군의 무훈을 상찬(賞讚)하여 ‘일본 육해군의 혁혁한 전과는 오로지 천황폐하를 중심으로 하여 굳게 결속된 일본 국체와 희생을 돌아보지 않는 일본정신에 의한 것이지만 세계병사에 유례가 없는 거국개병의 일본병제에 부(負)함이 지대하다’ 고 말한 것은 정곡(正鵠)을 잃지 않은 평이라고 하겠다.
3.
국민으로서 국방의 중대책임을 분담하는 것은 그것이 의무인 동시에 또한 최대의 명예며 광영이다.
단순히 권리와 의무관념으로만 본다면 외국의 병역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아국의 징병제는 외국과 같이 단지 의무라는 관념뿐만 아니라 우리 국체의 정화(精華)에 기한 독특하고 숭고한 신념으로부터 출발한 우리들의 신념인고로 열국이 아무리 기구(冀求)103)하여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일러전쟁(日露戰爭)때에 일본해 해전에서 도고(東鄕) 사령장관이 ‘황국의 흥폐, 이 전쟁에 있다. 각 원(員) 한층 분려
(奮勵)104) 노력하라’고 명명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영국의 사령장관 넬슨이 ‘트랄팔가’ 해전에서 ‘영국은 각 원이 그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한다’ 고 말한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넬슨의 말은 단지 의무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도고 대장의 명령이 존엄한 국체와 숭미한 전통에 기한 견고한 신념에서 우러나온 것과는 소양(霄壤)105)의 차이가 있다. 외국병의 국방의식은 다만 의무관념에 지나지 않기때문에 그들은 패전의 쓰라림을 맛볼 때에는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국방의 의무를 다하였다.
싸울대로다 싸웠다.
이 이상 더 싸우는 것은 인도상 용인할 수 없는 일이므로 항복한다’고 말하고 소위 ‘명예의 포로(俘虜)’가 된다.
금차의 태평양전쟁에서 말레이(馬來), 필리핀(比律賓), 동인도(東印度), 미얀마(緬甸) 등지의 전장에서 미(米), 영(英), 호주(濠), 네덜란드인(蘭人) 등의 포로가 보여준 태도는 이것을 실
103) 강하게 바라고 구함. 희구(希求).
104) 기운을 내어 힘씀.
105) 하늘과 땅
증하고 남음이 있다.
그러나 우리 제국의 국방에 관한한 저들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의 외국병의 관념과는 서로 용납되지 못한다.
우리는 국방에 관한 한 의무니 권리를 찾고 있지 못한다.
최후까지 일신일명을 바쳐서 국가를 수호하겠다는 일념에 불타고 있다. 자기가 하지 못하면 자손으로 하여 하여금
자기의 신념을 계승케 한다. 이것이 소위 ‘칠생보국(七生報國)하므로써 군은(君恩)에 갚으련다.’라고 하는 신념이다.
이것은 우리 국체로부터 발로한 정화(精華)로 천양(天壤)과 함께 무궁한 우리 국운을 부익(扶翼)106)하여 받들겠다는 이 순충지성(純忠至誠)의 마음이 곧 우리 제국 병역의 근본이다.
이 정신 이 충혼이 있고서 비로소 육탄(肉彈) 삼용사(三勇士)도 나왔고 구군신(九軍神)도 나온 것이다.
4.
다음으로 황군의 본의(本義)와 군인정신에 대하여 일언하면 황군은 신병(神兵)이라 한다.
메이지 천황께옵서 제국 군인에게 하사하신 칙유(勅諭) 중에 ‘짐은 너희 군인의 대원수다’ 하옵신 말씀과 ‘제국헌법 제
11조에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함’ 이란 규정을 보더라도 명백한 바와 같이 황군은 현어신(現御神)이옵신 천황의 어친솔하옵시는 군대이니 황군을 일컬어 신병이라 하는 것이다.
더구나 황군은 멀리 신대(神代)의 사적(事蹟)으로부터 가까이는 일청일로(日淸日露)의 양대 전역과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항상 피아(彼我) 현정(顯正)107)의 신검을 들고 대의를 현시하며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서만 정의의 사(師)를 일으킨 건군이래의 엄숙한 사적을 보더라도 신병, 혹은 신무(神武)의 군이란 칭호가 적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황군이 세계 어느 나라의 군대보다도 정강(精强)한 원인을 탐구하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황군은 메이지 천황께옵서 육해군인에게 내리옵신 칙유를 평시나 전시에 있어 일상생활의 이념으로 하고 행동의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충절(忠節), 예의(禮儀), 무용(武勇), 신의(信義), 질소(質素)의 칙유 5개조는 모두 군인도덕의 정수이지만 그중에도 근본이 되는것은 충절이다.
충절의 염(念)이 박(薄)하고 보국의 마음이 견고치 못하면 아무리 학술 기예에 능(能)하다하더라도 결국 오합지졸에 지나지 못한다.
예의는 대의명분을 결정하는 표준이다. 군대의 명맥인 군기는 복종을 요소로 하는 이상, 예의를 존중해야할 것은 자명하다. 무용은 아국에서 옛날부터 존숭(尊崇)하여 오던 것으로 아국의 신민된 자 무용이 없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군인은 전쟁에 나아가 적을 물리치는 것이 본직이므로 편시(片時)라도 무용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의는 일반국민도 이것을 지키는 것이 상도지만 군인은 신의가 없이는 하루라도 대오 중에서 생활하여 나아갈 수 없는 것이므로 자기가한 말을 실천하며 자기의 분을 다할 것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질소는 무용과 상응하는 것으로 불굴불요(不屈不撓) 곤고결핍(困苦缺乏)을 정복하는 기백이 실로 여기에 연원한다.
이 5개조는 군인된 자 잠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황군장병이 천황폐하의 대어능위(大御稜威)에 의하여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또 천황폐하만세를 부르면서 기꺼이 사지에 나가는 것은 실로 이 5개조의 칙유를 성심으로 준수(遵守)하는 때문이다.
106) 남을 거들어서 도와줌.
107) 올바른 법리를 나타내어 보임.
5.
끝으로 말할 것은 이 징병제실시라는 획기적 성사에 대하여 반도인은 오늘날의 감격을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한층 더 황민화의 결실을 거두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완전히 황국신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황국신민이 되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은 일본정신의 진로를 파악하는 점이다.
국가를 위하여는 일신일명을 홍모(鴻毛)108)와 같이 가볍게 여기고 지성순충(至誠純忠)을 다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 이것이 곧 일본정신의 진수며 황국신민의 본분이다.
원래 일본국민은 폐하의적자로서 일신일가의 이해라든가 국민전체의 휴척(休戚)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국민은 다만 상어일인(上御一人)을 위하여 그 전신(全身) 전령(全靈)을 바쳐서 봉공하는 것만이 신자(臣子)의 도리다.
일로전(日露戰) 후 때의 히로세(廣瀨) 중좌(中佐), 상해사변(上海事變) 때의 육탄 삼용사, 중일전쟁에 있어서의 니시주미(西住) 전차대장, 금차 태평양전쟁에 있어서의 진주만특별공격대 9용사 등은 그 전형적 실례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일본국민 본연의 자태다.
반도동포는 이 중임을 지는 오늘날 더욱더욱 심신을 연마하여 국가의 간성으로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적성(赤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1) 내선일체에 철저하여 정신적 자질의 향상에 힘쓰며,
2) 단결강화, 불요불굴의 정신 및 책임관념 강화에 힘쓰며,
3) 징병제 실시의 기초적 사항인 호적정비 기류계(寄留屆)109) 여행(勵行)에 힘쓰며,
4) 국어를 모르고서 입영하면 여러 가지 불편이 있을 것이므로 평시 국어해득에 노력할 것이며
5)지원병제 실시에 의하여 그동안 병역에 대한 인식은 깊어졌으나 아직도 부인층의 인식이 부족한 느낌이 있으므로 특히 부인층의 인식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이상 열거한 다섯 가지 항목이 어느 것이나 필요치 않은 것이 없으나 그 가운데서도 국어의 습숙(習熟)과 부인층의 각성문제 같은 것은 징병제가 실시된 오늘날 무엇보다도 더욱 긴급한 문제다.
첫째로 국어습숙(習熟)문제는 우리가 황국신민으로서 국어를 모른다는 것이 크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국어는 일본국민이 그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쓰는 수단이다.
일본인의 사상 일본인의 감정은 국어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것이많다.
즉 국어로는 표현할 수 있어도 외국어라든가, 조선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참다운 황국신민이 되려면 먼저 그 사상과 감정을 표현 할 수 있는 국어를 배워서 이론적인 사상과 감정을 감득(感得)해야 한다. 그리고 반도동포가 국어를 습숙해야만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자로서 웅비할 수 있을 것이며 징병제도의 시행과 관련해서도 국어를 습숙해야 한다. 물론 징병제도는 국민개병의 제도니까, 국어를 알고 모르는 것은 불구하고 징병검사에 합격만하면 나라의 부르심에 달려가 참여할 수 있는 것이지만 국어를 알지 못하고 군대에 입대한다면 일상의 근무와 훈련에 불편이 많을것은 물론 동료들과 교제하는 데도 수치스러운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징병 적령 이전의 반도청년은 특별히 국어를 익히 배워야 한다. 다음으로 부인의 각성문제에 대해서는 다만 징병문제에만 한한 것이 아니요, 기타 모든 문제에 대해서 먼저 가정의 강화, 사회의 견실화가 실현되어야 만 유위(有爲)한 인재가 배출하는 것이므로 가정 어머니의 각성은 오늘날 제일먼저 요구되는 문제다.
어머니의 교육과 감화의 힘이 그 아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영웅호걸은 천품(天稟)으로 될 수
108) 기러기의 털이라는 뜻으로, 매우 가벼운 사물을 이르는 말.
109) 기류(寄留)한다는 뜻을 그 관할 관청에 신고하던 서류.
있어도 군신은 어머니의 힘으로 된다. 황국의 어머니 없이는 황국의 건병은 있을 수 없다.
이번의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하와이 진주만 특별공격대 아홉용사가 모두 20세 전후의 약관(弱冠)으로 저와 같이
청사(靑史)에 빛나는 수훈을 세운 것도 어머니의 교육과 감화력이 컸으며 도고(東鄕) 대장이 저와 같이 세계의 영걸성장이 된 것도, 그 이면에는 그 모당(母堂)의 훈도(薰陶)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교육, 여성의 연성(鍊成)은 건민강병(健民强兵)의 원천이 된다. 지금이야말로 반도부인이 지(知),
덕(德), 체(體) 모든 방면으로 굳센 군국의 모성이 되고자 수양 연찬(鍊鑽)해야 할 때다. 이상으로 징병제 실시와 반도인의 각오할 점에 대해서 대략 말하였으나 국민개병의 본의는 다만 병역복무자에게만 호국의 대임(大任)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노약남녀 적어도 황국의 신민된 자는 모두 순충(殉忠)의 대의에 철저하여 자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쳐가며 나라를 수호해야만 하는 숭고한 책무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방공(防空)의 전사로서 전 국민이 국토방위에 당해야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국가총력전인 금일 경제전에, 사상전에, 직장에서의 생산전에, 일상의 생활전에 멸사봉공 상재전장(常在戰場)의 정신이 요청되어 있는 것이라든지 모두 국민개병의 본의에 틀림없는 것이다.
<출전 : 李昌洙, 「徵兵制實施와 半島人의 覺悟」, '新時代' 第3卷 第8號, 1943년 8월, 16~21쪽>
2) 국민징용과 전력증강
1.
조선에도 일본과 동양(同樣)으로 국민징용령을 발동하여 유위(有爲)110)한 청장년들로 하여금 국가가 요청하는 업무에 봉사(奉仕)하기로 되었다. 현대의 전쟁은 저 태평양에 벌어진 처참가열한 대격투와 독소(獨蘇)의 전투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소모전이다. 대병(大兵)을 끌어안고, 광대한 지역에서 대작전을 계속함에는 막대한 수량의 군수자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대소모전의 이면에는 대보급전이 있으며 대보급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생산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현대의 전쟁은 결국 대생산전이다.
우리 육해군의 공격정신과 작전기술이 미영(米英)과 비교가 안 되는 것은 이미 과거의 위대한 전과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군수자재의 증강보충만 확실하면 태평양전쟁이 아무리 장기화하더라도 최후의 승리가 우리에게 있을 것은 의심없다. 그러면 생산확충의 근저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자본, 자원, 기술, 노력의 네 가지 요소를 들 수 있으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보다도 자원보다도,노력이다.
물자보다도 사람이다. 남방권을 획득한 이후, 군수자재 중 필요한 것으로 생산치 않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하면 신속, 또 대량으로 개발생산하느냐가 문제다.
따라서 국민의 근로문제(勤勞問題)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다. 전시하에 있어서 노무동원은 병력증원과 아울러 승패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전선의 장병이 참말로 그 가진 전력을 발휘하려면 그 무기 즉 군함, 비행기, 군차,대포, 탄환을 대어주는 총후의 생산력이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한 가지 예를 들면 전번의 구주
110) 능력이 있어 쓸모가 있음.
대전 때에는 전선의 병사 한 사람에 대하여 총후 노무자 2.55내지 2.88인이었으나 그 뒤로 병기가 발달된 결과, 오늘날에 와서는 2인승 전차 1대를 전선에 내보내서 활동시킴에는 46인의 총후 노무자가 필요하고 비행기 1대를 활동시키려면 60인의 노무자가 필요하다. 병사 한 사람을 전선으로 내보내는 데는 총후에 열 사람의 노무자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근대전을 완수하려면 많은 노무자가 군수생산에 동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중일전쟁 이래 노무동원체제를 세우고자 여러 가지 방도를 강구해 왔다.
혹은 청소년층 고용 제한령, 종업자이동방지령을 발포하고, 혹은 국민직업능력신고령 국민노무수첩법 등을 발포하였으며, 혹은 노무조정령을 실시하여 중요산업부문에 가장 필요한 기능자와 노무자의 공급을 확보하는 동시에 그 이동을 방지하였고, 혹은 근로동원체제를 발포하여 국민의 근로총력을 적절히 배치해서 최고도의 능률을 발휘하도록 힘써왔다. 그런데 전국(戰局)은 바야흐로 결전단계로 돌입하여 전력의 급속증강이 현하(現下)의 긴급한 현안으로 되었으므로 조선의 특유한 인적자원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여 태평양전쟁완수에 기여하고자 이제 조선에도 일본과 동양으로 국민징용령을 발동하게 된 것이다.
조선의 물적자원으로 말하면 그 종류에 있어서 부지기수며 그 양에 있어서도 무진장이며 그 질에 있어서도 우수한 것이 많다.
현재 조사된 지하자원의 종류만 보더라도 이백수십종의 다수이며, 그 가운데는 전쟁수행상 긴요한 중요광물이 양적으로 상당히 풍부하다.
결전 하, 전력증강을 위하여 반도광물자원에 기대되는 중요도는 오히려 일본이나 대륙보다 더 크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써 볼 때 성전완수상, 조선이 짊어지고 있는 책무가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는 동시에 이런 지하자원을 파내서 전력을 증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능력있는 청장년을 동원하는 것이 적절한 대책인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종류가 많고 양이 많고, 질이 좋은 광물이 지하에 있더라도 그것을 파내지 않고서는 그것이 병기가 되고 탄환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적 미영과 싸워 최후의 승리를 얻는 길은 오직 조선의 청장년이 총 대신 삽을 들고, 칼 대신 망치를 들고 산업전선으로 나서야 한다.
일본에서는 이미 다수한 일본인 청장년이 군무(軍務)에 소집되고 일면 또한 징용 등 국민동원에 의하여 도시나 농촌이나 할 것 없이 많은 장년이 총후의 긴급생산에 종사하고 있다. 일본과 달리 지금까지 비교적 전국을 직접체험함이 적었던 조선으로서는 당연한 봉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에서도 이미 궐기한 학도는 총을 메고 전선에 나서서 적 미영격멸에 용전분투하고 있지 않은가. 제일선장병으로 하여금 후회의 염려가 없이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생산전에 정신(挺身)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이제 교전 각국의 국민동원체제를 보면 각국의 국민동원은 모두 우리나라보다 그 한도가 높고 시기가 일렀다.
1일 2억 불의 전비를 지출하여 방대한 군수생산력을 자랑하는 적 미국도 인적자원의 고갈만은 어떻게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인구 1억 3천만 인 중에서 노동력은 남녀 합하여 5,430만 인으로 동원병력 1,040만 인과 대조해 보면 병사 한사람에 노무자는 겨우 다섯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
동원병력이 1,040만 인이면 총후의 노동력은 그 10배인 1억 4백만 인은 있어야 할 터인데 겨우 5,430만 인이니 약반수가 부족된 형편이다.
그러므로 지금 미국에서는 15세 이상 60세까지의 남자는 모두 무슨 직업이든지 직업에 종사하고 여자까지도 여자총인구의 약 25.3퍼센트나 동원하고 있다. 특히 직업에 있어서는 농산물증산계획실시에 의하여 1942년도에 780만 인을 동원했어도 아직도 약 300만 명이 부족하다 한다.
자원의 풍부와 생산력의 강대를 자랑하고 있는 미영이라도 결국은 인적자원의 부족으로 전쟁을 계속하지는 못할 날이 올 것은 필지(必至)의 사실이다.
영국의 예를 보면 영국은 비교적 인구가 적은 나라인 만큼 인적자원의 동원은 거의 최고한도에 달하였다.
14세 이상 60세까지의 남녀 3,300만 인 중에서 2,275만 인이 국방관계 기타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70만의 부인이 제한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100만 이상의 부인이 무급으로 지원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14세 이상 60세까지의 남자, 1,590만 인 중에서 벌써 1,500만 인이 동원되었고 남은 90만 인은 병인 노쇠자 혹은 취학중의 학도라 하니 영국의 남자동원은 벌써 완전히 포화점에 달하였다.
영국의 여자도 14세 이상 60세까지의 인구 1,720만인 중 800만인 이상이 동원되었다.
16세의 소년이 탄갱부(炭坑夫)로서 징용되는 것이 제의된 것을 보더라도 영국의 인적자원 부족이 얼마나 심각하며 국민징용이 얼마나 최고한도에 달하여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영국도 전쟁수행 상의 가장 큰 애로가 노동력의 부족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소연방의 예를 보면, 소련은 종래부터 국민총동원체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소개전으로 특별한 변화를 본 것은 없다.
그러나 민수공업으로부터 군수공업으로 노동력을 전환시키는 것은 개전 후 급속 또 철저히 실현되었다.
그리고 경공업 기타의 부문에 종사라고 있던 노동자를 중공업방면으로 전환시킨 후에는 부인노동자로서 보충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공업 기타 각종 병기공장에도 부인노동자를 많이 징용하고 있고 제일선에도 여자병사까지 출현하여 전선의 용사로서 훈장을 받은 부인병이 273명에 달한다. 그 밖에도 하물(荷物)자동차의 운전수, 탄갱부, 선로공부 등으로 진출하여 현재 소련 국내의 노동력은 그 70%가 부인노동자에 의하여 보충되어있다. 남자의 징용문제는 소련에서는 벌써 옛날이야기이고 지금은 여자들까지 모두 활약하고 있다.
최후로 맹방 독일의 국민동원체제는 어떠한가. 독일은 작년 1월 28일에 강제노무령을 공포하여 16세 이상 60세까지의 독일인 남자, 17세 이상 45세까지의 독일인 여자를, 다음과 같은 경우에 있는 자를 제하고는 모두 즉시 소집할 수 있는 조치 완료하였다. 즉 1) 주 48시간 이상의 노역에 종사하고 있는 남녀 2) 본업으로 농업, 공공사업에 종사라고 있는 남녀 3) 5인 이상의 고용인을 요하는 독립경영구 4) 공인된 학교통학중의 남녀 5) 외국인 및 성직자 6) 임산부, 5세 이하의 유아 1인 혹은 7세 이상14세까지의 소아와 동거 부양하고 있는 모친 등 여섯 가지 경우를 제하고는 모두 즉시 소집하였다. 그리고 불급산업의 정리 폐합으로 노동력의 잉여를 중점산업으로 전환고자 상당히 광범위 또 철저적인 기업정비를 단행하여 소매업자는 약 10퍼센트, 금융기관은 약 40퍼센트를 정리하고 호텔, 오락장, 뿌로카 등도 정리되었다.
또 꾀링은 작년 3월 17일에 포고를 발하여 관공리 기타공공사업종업원의 취업시간을 1주 최저 56시간으로 연장하고 전 독일 산업 단체의 이사 중역도 1주 48시간 이상 근무할 것을 명령하였다.
독일의 노동력은 프랑스,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각국으로부터 노동자를 이입하여 각 산업별로 합리적으로 배치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교전 각국과 같이 부족을 느끼는 형편은 아니라도 독일은 만전의 대책을 강구하여 가장 고도의 노무동원체제를 확립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교전 각국이 각각 그 국내정세에 따라서 산업전선으로 국민의 노무를 동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국은 오히려 만시지탄이 불무한 것이다.
3.
그러나 근로문제는 정부의 대답이 결정되었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산업부문으로 징용되는 국민이 황국의 근로관에 철저하여 보국의 열성에 불타지 않으면 안된다.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근로에 대한 근본관념은 오랫동안 그릇된 점이 많았다.
근로자는 근로를 일종의 생활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기업가는 근로를 경영의 수단으로 알고 있었다.
노동시장에서는 근로를 일종의 상품과 같이 거래하여 왔기 때문에 근래에 이르러 임금과 노동배치에 관하여 국가에서 통제하게 된 후에도 비밀거래가 끊이지 않았고 사업장 공장 같은 데서는 역시 근로가 물품과 같이 취급되어 왔다.
이것은 자유주의 개인주의시대의 관념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의 노동자와 같이 근로를 일종의 생활수단으로 알고 자기가정이나 자기 일개인의 행복만을 위해서 재화를 얻기 위하여 공장사업장 같은데로 가서 임금이나 월급을 받는 것이라면 될 수 있는 대로 임금이나 월급을 많이 주는 데로 가서 일을하고자 할 것이요, 조금만 수입이 많아서 생활에 여유가 있게 되어도 놀고 먹으려 할 것이다.
이러한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정부에서 아무리 근로동원에 대한 체제를 세워놓는다고 해도 아무 효과를 얻을 수 없다.
근로는 황국신민으로서의 봉사활동이다. 황국에 대한 황국신민의 책임인 동시에 영예다.
오늘날 우리의 근로는 국가의 요청에 따라 모든 것을 국가에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근로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다. 그리고 임금은 근로에 대한 국가의 보상이다.
자기 근로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임금을 낭비해서도 안 될 것이며 임금의 다소를 가지고 불평을 말한다거나 혹은 임금의 고저를 따라서 직장을 이동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물론 근로자뿐만 아니라 사업주에게도 요구된다.
지도자로서의 사업주야말로 근로와 임금에 대한 영리적 상품적인 관념을 청산해야 한다. 임금은 근로자의 생활의 안전을 보증하여 근로자가 아무 후고(後顧)의 염려가 없이 생산 전에 봉공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윤 본위의 임금과 근로자를 쟁탈하기 위한 고임금은 근로자의 능률을 저하하고 국가의 통제를 문란케 하는 것이며 일본적 근로관의 확립을 저해하고 노자대립의 사상을 조장하여 생산증강에 장애가 된다.
우리나라는 고래로 결코 노력을 물품으로 간주하여 상품시한 적은 없다. 더구나 현재와 같이 전력증강을 위하여 지위직분의 여하를 불구하고 다같이 생산전의 전사로 근로에 헌신봉공하는 때에 한 사람의 근로자도 근로를 생활의 수단으로 생각한다던지, 한사람의 사업주라도 근로를 일종의 영리수단으로 안다든지 하면 그것은 곧 생산 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으로 전쟁의 최후 승리를 얻는 데 지장이 된다.
이제 황군장병은 일선에 나서서 신명을 걸어가며 분전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황군은 적군과 싸워 큰 전과를 올리고 있다.
이 전과를 살리는 길은 총후 1억 국민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궐기하여 전투배치에 서는 데 있다.
즉 1억 국민이 필승의 신념하에서 전력을 전력증강에 의결하여 전선의 황군장병으로 하여금 후고의 염려 없이 반공미군을 격멸하도록 하여야 한다. 결전이 있을 때마다 적을 쳐부수어 승리를 얻는 것은 제일선장병의 임무로되 병기, 탄약, 소모가 있을 때마다 필요한 수량을 전선에 보급하는 것은 총후 국민의 책무다.
전선장병으로 하여금 종횡자재(縱橫自在)하게 활약케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로지 총후 국민의 두 어깨에 달려있다.
우리 1억 국민의 책무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전선을 전선에만 국한하던 시대는 벌써 지나갔다.
1억 국민의 1인 1인이 각각 그 공장에서 사업장에서 잡은 일퇴일초(一槌一鍬)111)가 전선의 전력에 영향하는 것이 오늘과 같은 때는 없었다.
이것을 생각하면 국민 중 한사람이라도 놀고먹는 사람이 있어도 안 될 것이며 불급 불요한 사업에도 안한(安閑)히 종사하고 있을 때도 아니다. 반도의 청장년이 총궐기하여 국가의 요청에 응해야 한다.
징용을 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자진협력해야 한다. (1월 7일 기)
<출전 : 李昌洙, 「國民徵用과 戰力增强」, '新時代' 第4卷 第2號, 1944년 2월, 22~26쪽>
3) 국민징용과 성업익찬(聖業翼贊)
1.
지난 2월 8일을 기하여 조선이 현원징용(現員徵用)이 실시된 이래 최근에는 수시로 일반 징용이 실시되고 있어 조선의 청장년들도 영예있는 응징사(應徵士)로서 국가 총동원업무(總動員業務)에 종사하게 되었다.
국민징용령(國民徵用令)이 제정되기는 1939년의 일로 동령 제2조를 보면 “징용은 국가의 요청에 기하여 제국신민으로 하여금 긴요한 총동원업무에 종사케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 이것을 행함”이라 하였다.
총동원 업무라는 것은 즉 병기(兵器), 함정(艦艇), 탄약(彈藥) 기타의 군용물자, 전쟁에 필요한 피복(被服), 식량(食糧), 음료(飮料), 의약품(醫藥品), 선박(船舶), 차륜(車輪) 등 수송자재(輸送資材),통신용 물자, 토목건축, 연료, 전력, 조명용(照明用) 물자 등의 생산 및 수리(修理)에 관한 업무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 나라의 운명을 내걸고 싸우는 이 마당에 있어서 적을 쳐부술 비행기, 군함, 전차, 대포 같은 전쟁에 싸우는 군기(軍器)를 많이 만들어 내자면 사람이 얼마든지 있어야 하므로 이에 필요한 인원을 동원하는 것이 징용제도다.
따라서 피징용자는 사업주에게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 대하여 종사의 의무를 가지고 직접 성업익찬(聖業翼贊)에 정신(挺身)하는 것이다. 국민징용령에 “피징용자는 충성을 주지(主旨)로 하여 총동원 업무에 정려(精勵)할 것”이라고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응징사는 비록 군복을 입지 않고 총과 칼을 들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직장을 전장으로 삼아 일의 군국에 대한 충성심에 투철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비행기 기타 병기를 만드는 공장이 각지에 많이 세워졌으니 지금까지 공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던 사람도 회사에서 사무를 보고 있던 사람도 전차나 기차를 운전하고 있던 사람도 모두 전장에 나아가서 싸우고 있으므로 사람이 많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도 어른도 부녀자도 모두 공장이나 광산으로 가서 적을 쳐부술 병기를 만들고 있다.
국민징용령을 벌써 오래전부터 실시하여 일정한 연령의 국민이 공장, 광산 같은 데로 동원되고 있다.
그러면 조선에는 아직까지 징용이 실시되지 않았던가 하면 조선에서는 징용을 안 하더라도 대개는 소요 인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 조선에도 중요한 산업 방면에는 사람이 부족하게 되었다. 사람이 부족하게 된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그 원인은 여하튼 지금 전쟁을 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만드는 것을 등한시 할 수는 없으므로 조선에도 드디어 징용제도를 실시케 된 것이다.
111) 한 개의 망치와 한 개의 삽
2.
국민징용의 의의라든가 징용의 국가성(國家性) 같은데 대해서 말하면 대략 이상과 같으나 징용과 결전증산(決戰增産)과의 관계를 보면 국민을 동원하였다고 곧 증산의 실적을 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최근 응징사의 능률문제가 논의되고 있는데 만약 징용을 실시하여 국민개로(國民皆勞)를 힘차게 주장하여도 증산이 뜻과 같이 되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잠재하여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의 한 가지로 응징사의 근로에 대한 관념이 아직도 자기중심이 아니었는가 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다시 말하면 근로개념이 근본적으로 시국에 합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근로개념은 대개로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근로라는 것은 자기를 위한 근로였다.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취직을 하더라도 봉급을 많이 받는다든가 명예를 얻는다든가 출세를 빨리할 수 있다든가 하는것을 위주로 한 구미(歐美) 개인주의사상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에 징용이 되어 나라를 위하여 일을하게 되면서도 항상 자기를 중심으로 이해타산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징용이 되면 수입이 많지 못할 터이니까 또는 출세와 관계가 없으니까 하는 그릇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징용을 될 수 있으면 기피하여 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징용이 되어 공장, 광산 등지로 가더라도 능률이 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국가생활을 함에 있어서는 자기를 중심으로 이해를 타산하여 이(利)가 있으면 행(行)하고 해가 있으면 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국가생활이란 적게 말하면 가족생활과 마찬가지나 가족생활을 함에 있어서 만약 가족 한 사람의 이해만 타산하고 가족 전체의 행복이라든가 향상 발전 같은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가정의 평화, 행복을 기대할 수 없고 따라서 결국은 자기 일개인의 행복조차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와 같이 나라를 위하여 징용에 응하면서 자기 일개인 혹은 일가정이 형평만 생각해서는 나라의 운명을 내걸고 싸우는 이 전쟁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근로는 개인의 것이 아니고 국가의 것이며 임금은 근로에 대한 대가가 아니고 국가가 주는 생활보장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나라를 위하여 근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것이다.
태평양전쟁하 전력을 증강하여 적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국민은 징용을 기다릴 것 없이 자진하여 정부에 협력해서 공장, 광산 등지로 나아가서는 기백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3.
응징사로 나간 후의 가정에 남아있는 가족들에 대하여는 응징사로 하여금 조금도 후고(後顧)의 염려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국민징용부조규칙(國民徵用扶助規則)이 제정, 공포되었다.
응징사의 급여에 대해서는 특별히 우우(優遇)112)하기로 되어 있고 숙사(宿舍)시설이라든가 의료시설, 후생복지시설 같은것이 정비되어 당국의 응징사에 대한 대우는 실로 만전의 대책이 강구되었지만 응징사의 가족에 대한 생활보장은 그것이 최소한도의 보장에 지나지 않는 만큼 일단 가족 가운데서 병자가 생긴다든지 혹은 기타 무슨 어려운 일이나 큰일이 있을 경우를 생각하면 응징사들이 마음에는 자연 불안한 점도 있을것이다.
그러므로 당국에서는 이런 점을 생각해서 응징사들이 아무 후고의 염려가 없이 오직 전력증강
112) 후하게 대접함. 또는 그런 대접.
에 매진할 수 있도록 응징사의 가족들이 필요한 때에 부조(扶助)를 받도록 한 것이다.
또 근로자 원호운동을 일으켜 가지고 응징사의 가족에게 원호의 손을 배치하기로 되었다.
즉 응징사에 대한 급여와 가족에 대한 부조가 결정될 때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든가 또는 응징사가 가정을 떠나 먼 지방으로 갔을 경우에 그 급여와 부조금(扶助金)이 가족들의 손에 들어가자면 어느 기간의 시일이 걸리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런 때에 여유없는 가족들의 고난을 생각해서 후원의 사업을 하자는 것이다.
이로써 응징사들이 아무 염려없이 나라를 위하여 그 근로를 바치게 되었다.
14세 이상 40세까지 징용을 받을 범위 내에 있는 사람으로서 징용영장이 내렸으면 곧 자기의 직장을 박차고 긴급하고도 중요한 산업전선으로 달려야한다.
징용은 문자 그대로 백지응소(白紙應召)로서 응징사의 영예는 부르심을 받들고 제1선에 달리는 장병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황국에 태어난 신민으로서 당연한 책무인 동시에 숭고한 영예다.
임금을 목적으로 하는 근로가 아니라 병역에 준한 봉공이다.
더욱이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치고서 국민징용을 실시 않는 나라는 없다. 우리의 맹방 독일이나 또는 소련은 물론 영국까지도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까지 징용되고 있다. 영국은 18세 이상 남자는 1천5백5십만 밖에 되지 않으니까 5백
10만을 목표로 하는 군대편성은 도저히 남자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벌써 군대에 45만 명의 여자가 들어가 있고
총리대신 처칠의 딸 메리도 남녀혼합고사포의 일군조(一軍曹)로 활약하고 있다. 군대만도 이렇거늘 하물며 여자로서 징용에 응하는 것쯤은 항다반(恒茶飯)113)의 일일 것이다.
미국도 지금 인적자원이 부족해서 미국에 억류된 적국인에게 까지 근로를 강요하고 심지어 피지 섬의 토인(土人)114)까지도 징용하고 있다.
이런 각국의 예를 생각하면 우리의 총후생활은 아직도 여유가 많다. 제1선 장병이 아무 후고의 미련이 없이 오직 나라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는 것과 같이 응징사도 가정생활 기타의 문제는 국가에 맡기고 조금도 염려없이 전력을 증강하기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출전 : 李昌洙, 「國民徵用과 聖業翼贊」, '朝光' 第10卷 第9號, 1944년 9월, 24~26쪽>
27. 장덕수(張德秀)
1) 출진하는 반도인 학도에게
보성전문학교 교수 장덕수
1.
동아일각에 빛으로써 입국(立國)한 제국은 지금 세계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태평양전쟁을
113) 항상 있는 차와 밥이라는 뜻으로, 항상 있어 이상하거나 신통할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
114) 어떤 지방에 대대로 붙박이로 사는 사람. 문명이 미치지 않는 곳에 토착하여 사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수행하는 최중(最中)에 있다. 전쟁은 날로 가열의 도를 더하여 바야흐로 결전단계에 돌입하고 있다.
이중대한 시국에 반도인 학도가 부르심을 받들어 출진하게 된 것은 그 의의가 심장하여 참으로 감격에 넘치는 바이다.
2.
반도인 학도여, 제군은 일찍이 일본제국은 고사(姑捨)하고 반도의 진퇴성쇠에 관하여 의논(議論)을 받은 일이 있으며 그 운명에 관하여 책임을 분담한 일이 있는가.
제군이 학창에 있어서 진리탐구에 몰두할 때 그것은 한갓 제군 일인일가의 의식을 위함이 아니요, 실로 천하국가의 경륜을 위함이거늘 사실은 제군의 지도자로서의 자부를 허사화(虛事化)하고 제군의 경륜을 공상화(空想化)하지 아니하였든가.
제군은 모든 일에 심각하고 최대한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 관심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군은 부르심을 받들어 출진하게 된 것이다.
폐하의 고굉(股肱)으로서 황군의 운명을 두 어깨에 걸머지게 된 것이다. 국사에 대한 종래의 방관자적 지위로부터 일약(一躍)하여 황국의 초석이 되고 간성(干城)이 될 것이다. 일본제국은 폐하를 원수로 받드는 제군의 제국이다.
이제야말로 우리나라라는 말은 명실이 상합하게 된 것이다.
제군은 폐하의 신민인 동시에 제국을 구성하는 요원이라는 의미에서 제국의 국민이다.
이 사실을 고요히 회상할 때 우리는 끝없는 감격을 새로이 하는바이다.
3.
태평양전쟁은 성전이다. 동양인의 동양의 건설전이다. 미영의 횡포를 배제하는 해방의 전쟁이요, 착취를 제거하는 공존의 전쟁이다.
정의와 자유가 인도(人道)라 할진대 그러고 인도가 인성에 입각하
역사의 구축이 될진대 태평야전쟁은 필승불패의 성전이다. 일본민족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영토전도 아니요 명예심을 위한 쟁패전도 아니요 참으로 팔굉위우(八紘爲宇)는 이 전쟁을 계기로 하여 신기원, 신출발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전쟁에 참열(參列)하는 제군이야말로 세계사 창조의 성된 역군이라 할지니 가위(可謂) 남아의 본쾌(本快)가 아니고 무엇인가.
제군은 성심성의, 일심전력하여 황군의 진면목을 발휘하라, 반도청년의 명예는 이를 요구한다.
그리고 돌진하라, 전 세계의 역사는 이를 요구한다. 무릇 정의의 죽음은 죽어야 사는 죽음이다.
동아공영권이 이 죽음 위에 혁혁한 성과를 맺게 될 것이오 동아공영권이 확립되는 날 제군의 전정에 광명이 비칠뿐 아니라 전세계역사가 신기원을 세우는 것이다.
4.
누가 생(生)을 버리고 사(死)를 원하리오만 인생은 필경 죽음을 면치 못하는 인생이니 생사를 관일(貫一)하는 대도(大道)에, 생사를 초월하여 사는 것만이 인생의 가치를 가장 깊이 또 크게 할 뿐 아니라 참으로 영원한 생명을 취하는 이유가 된다. 제군이 의(義)를 위하여 피를 흘릴진대 그 죽음은 한갓 청사(靑史)에 빛날 뿐 아니라 의로 더불어 사는 신의 전(殿)에 영원한 생명의 불이 될 것이다.
제군의 출진에 신의 가호를 믿고 또한 빌어마지아니한다.
<출전 : 張德洙, 「出陣하는 半島人學徒에게」, '半島の光' 鮮文版 第72號, 1944년 1월, 3쪽>
2) 빛나는 정도(征途)를 축복
학병의 입영을 목전에 당하고 보니 이때까지 학병제군의 손을 잡고 두근거리는 그 가슴에 그윽한 광명의 등불을 비춰 주려고 미력을 다해온 나로서 감회와 감격이 일층 더함을 금할 수 없다.
간단히 한말로 하면 반도의 우리 청년들도 지금이야말로 힘차게 일어서 적극적으로 선(善)을 행할수 있는 절호한 기회에 제회(際會)하였음을 통감하겠다.
적극적인 선이라고 함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 것이니 한편으로는 국민의 의무를 행하여 참된 국민이 된다는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세계의 역사를 개조(改造)하는 성전(聖戰)에 참여하여 성스러운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늘 하는 말이거니와 반도의 청년은 형식은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 되어있지만 참으로 제국의 운명을 쌍견(雙肩)에 걸머지고 제국의 진운(進運)에 기여함에 있어서는 오늘날까지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제군 앞에는 이러한 과거의 잔영(殘影)이 사라지고 제국의 운명을 일신에 걸머진 다음 팔굉일우115)(八紘一宇)의 조국(肇國)의 대이상을 현현(顯現)하기 위하야 당당히 진군을 할 수 있게 된 대도(大道)가 열려진 것이다. 제군의 그 늠름한 기개와 자태를 □도 (□到)함에 이르러 항상 반도의 젊은이에 크나큰 기대를 가지고 온 나로서는 뜨거운 눈물과 깊은 감격이 복받쳐 오름을 금할 수 없다.
팔굉일우, 이 조국정신(肇國精神)은 다만 관념에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역사의 진운을 계기로 아시아 대공영권을 건설하는 힘찬 실천적 과정에 있다. 대동아 전쟁은 곧 다름아닌 이 대이상 발현의 총진군인 것이다.
이 엄숙하고도 장쾌한 역사적 무대에 반도의 우리 청년학병도 참가할 수 있게 되었음은 다만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게 되었을 뿐더러 세계역사를 양심의 요청에 응(應)하여 개조하는 전사(戰士)로서, 한 개 완성된 인간으로서도 그 본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금반 학도의 부르심이 내리자 제군을 앞에 두고 이 숭고한 의무에 대하여 제군의 결의를 촉(促)한 바 있었다.
과거 오랫동안 반도에서는 병역의 의무가 중단되어 무사(武士)정신을 몸으로써 발□(發□)하여 본 적이 없는 제군은 당초에는 확연히 그 태도를 결정치 못하고 약간의 주저하는 빛을 보였었다.
그러자 일반사회와 제군의 선배는 □□한 나머지 제군에게 너무도 유급(蹂急)한 권고와 격려를 퍼부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최초에 제군이 국가의 부르심에 대하여 일본학도처럼 선뜻 일어서지 못한 것은 결코 제군의 무능한 탓이 아니요, 제군이 선대(先代)와 제군의 역사의 소치(所致)일런지도 모른다.
날마다 제군과 면접해온 나는 제군의 용기와 총명을 굳게 믿고 있었다.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묵묵히 고민하는 제군의 손을 이끌고 그릇된 이 땅의 과거가 제군에게 남긴 그 암담한 심연(深淵)가운데서 한 줄기 광명의 길을 구하여 제군이 스스로 그 정도(正道)에 눈 뜨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렇다.
115) 온세계를 한 집안과 같이 만든다는 의미임
지금 생각하면 지난 몇 개월은 제군과 나에게 있어서 길고도 아득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가치있고 환희에 찬 광음(光陰)이었던가.
드디어 제군은 제군이 선대 반도의 과거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위대한 창조자가 되었다.
상무정신(尙武精神)을 망각해 온 낡은 사상을 걷어차고 주위와 제군자신의 일우(一隅)에 모질게 숨어있을 온갖 사념(邪念)을 물리치고 제군은 마침내 정도(正道)를 택하여 총궐기 한것이다.
이 순간 제군의 가슴속에는 아니 반도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조국(肇國)의 정신과 위대한 대동아의 이념이 열려제진 것이다.
이리하여 오늘날까지 제군은 일로매진(一路邁進) 영예로운 영문(營門)앞까지 달려오게 되었다.
제군. 반도청년 제군이여. 위대한 사업에 그 생명과 피를 홍모(鴻毛)와 같이 가볍게 여기고 전고(戰鼓)소리도 높게 총진군하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참으로 눈물없이는 이를 바라볼수 없는 것이다.
제군이 이같은 굳은 결의를 가지고 위대한 사업에 참가한 그 자체만으로도 반도의 광영은 이에 더할 이 없거니와 청년제군이 금차 성전에 승리를 획득하고 돌아오는 날 반도에는 얼마나 광채화려한 광명이 비칠 것인가.
나는 예상할 수도 없다.
바라건대 학병제군은 자신이 제국의 보배요, 반도의 보배임을 잊지 말고 끝끝내 건강과 훈련에 힘을 다하여 황군(皇軍)으로서의 참된 가치를 충분 발휘하여 주기기를 바라는 이다.
황군으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하는 군인은 폐하의 충량(忠良)한 군인이 될 뿐만 아니라 한 개의 인간으로서도 세계에 자랑할 완벽의 인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간절히 학병제군이 자중자애 제군의 쌍견에 지워진 성스러운 의무를 다하기를 비는 동시에 빛나는 군의 정도(征途)를 축하하려는 자(者)이다.
<출전 : 張德洙, 「빛나는 征途를 祝福」, '매일신보', 1944년 1월 17일>
28. 장응진(張膺震)
1) 부르심을 받자올 날을 앞두고
장원응진(張元膺震)116)
1. 징병제도란 어떤 것인가
오는 1944년도부터 우리 조선에도 징병제가 실시되게 되는 것은 누구나 다 이미 잘 아는 바이오, 2천4백만의 조선동포가 다 같이 기뻐하며 경하하는 바이올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깊은 이해와 철저한 준비와 굳은 각오를 가짐이 없이 다만 일시적 기분으로 떠들고 선전함에 지나지 못하다가 과연 실시되는 그날에 이르러서 훌륭한 성적을 나타내지 못하고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나서 조선 사람의 명예를 발양(發揚)하지 못한다면 이 어찌 큰 유감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청년된 자나부모된 자나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하여 다만 막연하게 그날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연
116) 장응진(張膺震)의 창씨명.
구를 하고 준비를 게으르지 않고 굳은 각오를 가지도록 힘쓰는 것이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첫째로 징병제도란 대체 어떠한 것인가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천황폐하께옵서 동시에 대원수(大元帥) 폐하로서 육해군을 통솔하옵시고 국민개병(國民皆兵)의 전통을 세워왔으므로 우리제국의 신민인 남자는 귀천상하를 물론하고 일정한 연령(年齡)에 달하면 누구나 다 국민 3대의무의 하나인 병역에 복(服)하여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정신을 발휘하는 것으로써 가장 큰 광영이요 특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라에 일이 있을 때에는 몸을 바쳐서 국방의 제1선의 큰 책임을 담당하고 일이 없을 때에는 지방과 향당의 중견(中堅)이 되어서 일반의 모범이 되며 지도자가 되어서 제 각기맡은 바 직분을 다함으로써 충량(忠良)한 신민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2. 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
1938년 이르러서 우리 반도통치 상에 일대 획기적 사실은 지원병제도의 실시였습니다. 역대의 시정30여년의 혜택은 반도의 민중이 정신상으로 또는 물질상으로 현저히 향상발전을 보이게 되어 동아의 맹주인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광영있는 책무를 담당하기에 넉넉한 자질을 갖추게 된 것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만주사변 이후로 우리 조선 사람들의 국민적 자각은 현저히 향상되고 다시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로 애국의 정신은 더욱 더욱 성(盛)하게 되니 이 추세를 본 정부에서는 1938년에 이르러서우리 조선에다가 드디어 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실시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즉 이것은 우리 조선 사람의 청년으로서 군인이 되기를 지원하는 자 중에서 검사를 하여서 채용하여 가지고 일정한 훈련을 마친후에 군대에 편입케 하는 것입니다.
이 제도가 좋아져가고 또 지원자의 수효와 채용자의 수효도 해마다 늘어가서 금년도에 와서는 채용자 수 4천 5백 명에 대하여 지원자 수가 25만 명을 초과하는 성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이후로는 우리 조선동포의 애국적 열정은 더 한층 높아져서 명실(名實)이 모두 황군의 신민으로서 봉공(奉公)의 지성(至誠)에 불타오르게 되며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기운은 한 걸음 충실하게 되어져서 이번에는 일본과 같은 식의 징병제도의 실시방침이 결정되고 오는 내년도부터 실시를 보게 된것은 우리 조선의 광영이요. 경축하여 마지않는 바이올시다.
3. 조선청년의 각오
장차 국방의 제일선에서 명예있는 제국군인으로서의 책임을 완전히 하자면 어떠한 준비를 하여야 하겠고, 어떠한 각오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우리는 먼저 메이지천황(明治天皇)께옵서 1882년에 육해군인에게 내리옵신 칙론(勅論)을 봉독(奉讀)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중에 ‘짐(朕)은 너희들 군인의 대원수로다. 그런즉 너희들을 고굉(股肱, 팔다리)으로 삼고 너희들은 짐을 두수(頭首)로 섬기어서 그 친함이 특별히 깊을 것이니라’하신 분분가 계시고 또 ‘우리나라에 능위(천황의 위광)가 떨치지못하는 일이 있으면 너희들은 짐과 그 근심을 같이하라. 내 무(武) 떨치어서 영광을 나타내면 짐이 너희들로부터 기쁨을 같이하리라. 너희들은 다 그 직분을 지켜서 짐과 한마음이 되어 힘을 국가의 보호에 다하면 우리나라의 창생(蒼生, 백성들)은 길이 태평의 복을 받고 우리나라의 위열(威烈)은 세계의 빛이되리라’ 분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다섯 가지 성훈(聖訓)을 내리셨으니,
하나, 군인은 충절(忠節)을 다함으로 본분을 삼으라
하나, 군인은 예의(禮儀)를 바르게 하라
하나, 군인은 무용(武勇)을 숭상하라
하나, 군인은 신의(信義)를 중히 하라
하나, 군인은 질소(質素)를 위주하라
이상 5가지는 우리 제국군인의 정신이올시다.
동시에 이 성훈은 천지의 공도(公道)요 인륜의 떳떳한 이치라, 그러므로 이 성훈은 다만 군인에게 한하여서 내리신 것이 아니라 일반 우리 민족에게 내리우신 훈계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하면 충절, 예의, 무용, 신의, 질소 이 다섯 가지의 성훈은 우리 일본정신의 정수(精髓)를 포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훈을 잘 봉체(奉體)하여 실천하는 것이 황군의 장병으로서 화전양시(和戰兩時)에 독특한 면목을 발휘하는 것이 되고 황국의 신민으로서 진충보국의 정성을 다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조선 사람은 오랫동안 문약의 폐에 빠져서 게으로고 약한 습성을 이루고 원기를 잃어버린 것이 과거의 사실이올시다.
금일이야말로 국민개병(國民皆兵)의 제도에 참여하게 되어 신체와 정신을 굳세게 단련해 가지고 폐하의 팔다리가 되며 국가의 간성(干城)이 되어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된 것은 이 무슨 광영이겠습니까.
다행히 생을 이 성대(聖代)에 받은 우리 반도의 청년들은 마땅히 먼저 이 군인정신을 깊이 깊이 간(肝)에 새겨 넣고 이제부터 문(文)을 수양(修)하며 무(武)를 연마(練)하여 국민적 자질을 향상시켜가지고 그날이 와서 부르심을 입는 때에 조금도 유감됨이 없이 이 숭고한 의무를 다하게 되면 이것이 우리 반도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 되고 그대들의 최대의 광영이 될 것이다.
4. 우리 부모의 책임
우리 조선에 지원병제도가 실시된 이래 지원병 되기를 자원하는 청년이 해마다 늘어서 금년에는 25만 명 이상에 달하고 그중에는 혈서로써 지원한 청년까지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쁜 현상이고 축하할만한 일이올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그 부모 중에서 아직까지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으로 그 자제가 지원병되기를 간절히 희망하나 그 부모의 반대로 인하여 그 뜻을 달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 무슨 슬픈 현상입니까. 이것은 재래 우리 조선사람들의 관습으로 그 자녀를 단지 자기의 사유물과 같이 생각하고 소유물과 같이 취급하여 다만 자기의 집이 있는 것만을 생각하고 더 큰 나라가 그 위에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데서 원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먹고 입고 쓰고 사는 식물이나 의복이나 가옥이나 토지나 기타 일체의 것이 모두다 천황폐하의 것으로 우리들은 일시의 보관자가 되어서 크신 은택하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 즉 어느 때에나 나라에 필요함이 있을때에는 이것을 그 필요에 응하여 바치는 것이 당연한 일이올시다.
이와 마치 한 가지로 우리의 자녀도 역시 폐하의 적자(赤子)로서 그것을 맡아 가지고 잘 길러내고 잘 교육시켜서 나라에 일이 있을 때에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나라에 바쳐서 성은에 보답하는 것이 부모된 자의 책임이오 국민된 자의 의무올
시다.
일본에서는 그 아들이 나라의 부르심을 입어서 군대에 입영을 하게 될 때에는 그 부모형제는 물론이고 일가친척까지라도 이것을 집안의 광영으로 알아 축하하며 일단 국방의 제일선에 나아가게 되면몸과 마음을 오로지 나라에 바쳐서 큰 공을 세우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오지 말 것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우리나라는 태평양전쟁이라는 전고(前古)에 없는 큰 전쟁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충용무쌍(忠勇無雙)한 우리 일선장병들의 덕택으로 인하여 우리들은 아직까지 안전한 생활을 하고 있게 되고 대동아공영권의 건설로 한 걸음 한 걸음 완성의 역(域)으로 나아가게 되는 금일이올시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우리 반도의 동포는 남자나 여자나 노소를 물론하고 자기의 자질(子姪)이나 형제가 머지않아 부르심을 받는 날에 일본인의 병사와 조금도 못함이 없어 그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교육하고 단련시키고 격려하고 지도하여 훌륭한 자격을 이루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한 일이올시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 2천 4백만 동포가 내선일체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필자 전(前) 광주욱(旭)고등여학교장)
<출전 : 張元膺震, 「부르심을 받자올 날을 앞두고」, '半島の光' 第60號, 1942년 11월, 14~15쪽>
29. 조동식(趙東植)
1) 군인의 아내를 육성할 여학교 교육의 새 정신
동덕고녀교장(同德高女校長) 임천동식(林川東植)117)
징병제도가 반도에 실시된 데 대해서는 전조선이 일제히 경사로 여기는 바일 겁입니다.
이와 같은 획기적 정치를 베푸신 대어심(大御心)의 발동을 다만 충심으로 감격해 마지않습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의무와 책임을 충분히 이행해서 일본과 조선이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의 맹주국 국민으로서의 권위를발휘할 각오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을 행하는 데는 물론 제도와 규정에도 복종하려니와 정신적인 이해와 혼합일체되는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건실한 보무(步武)를 걷는 동시에 일본과 동일한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은 오직 앞으로 결심여하에 있는 줄
아는 바입니다.
앞으로 여학교의 교육에 있어서도 나라를 위해서는 생명을 버릴 수 있는 군인을 길러내는 어머니를만들어내는 데 중점을 두어야 될 줄 압니다. 훌륭한 군인을 길러내려면 무엇보다도 뒤에 숨어있는 어머님의 힘이 크니까요.
어머님의 교육에 따라서 자녀가 성장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내
117) 조동식(趙東植)의 창씨명.
여기서 다시 말하지 않더라도 잘 아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출전 : 林川東植, 「군인의 아내를 육성할 여학교 교육의 새 정신」, '매일신보', 1942년 5월 12일>
30. 조병상(曺秉相)
1) 지원병의 부모로서
참사(參事)·중추원 참의 조병상
장남 태환(台煥)은 다행히 선택받아 목하 훈련소에서 훌륭한 황군(皇軍)의 일원이 되려는 목표를 향해 전진 중입니다. 지금 여기에 입소할 때까지의 경과 및 현재의 상황 및 장래에 대한 희망 등을 말씀드리자면,
입소에 이르기까지 저는 아주 이전부터 지원병제도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소망이 이루어져 작년부터 실시되었기
때문에 저 자신은 매우 만족하고 일찌감치 장남을 지원시키기 위해 먼저 가족과 상담한 뒤 결정하기까지 약 3개월이 필요했고, 나아가 본인에게 지원병의 취지를 설명해서 납득시켜 결심을 하기까지 또 2개월, 그리고 올해 3월 학교 졸업과 동시에 마침내 지원을 한 것입니다. 본인의 결심보다는 가족들의 동의를 얻는 일이 다소 어려웠습니다.
지원병제도의 취지를 일반에게 인식시킬 필요성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입소 후의 실상 입소를 결정하기까지는 다소 우여곡절도 있었습니다만, 일단 입소 후에는 완전히 바뀌어 가족들 모두 오로지 훌륭한 황군의 한 사람이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인도 각오를 하고 지원한 만큼 어려움을 이겨내고 왕성한 원기로 진지하게 하루하루 연마 수양에 정려(精勵)하고 있는 모습에서 진정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보고 진정 기뻐하고 있습니다.
한편 가정에서 입소자의 영향을 받아 유형무형으로 다소 긴장감이 일상생활에 구현화되고 있다는 점은 지원병 가족이 지닌 큰 부산물입니다.
몇 가지 점을 든다면,
하나, 아이들의 면학하는 자세가 좋아진 점
하나, 시국인식이 일상생활에 나타난 점
하나, 군사 사상이 보급된 점. 즉 신문기사 등도 군사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거나 동네의 출정군인 가정 위문을 자주 가거나 국방부인회 등에 열심히 참가하면서 군대 일을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종전보타 현저히 증가했습니다.
장래의 희망
장래의 희망은 지원하도록 할 때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장래도 변함은 없습니다만, 당초의 가족적 결의는,
하나, 완전한 황국군인이 되라.
하나, 지원병은 조선청년의 선구자이자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구체화한 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라.
<출전 : 曺秉相, 「志願兵の親として」, '總動員' 1卷 5號, 1939년 10월호, 41쪽>
31. 최남선(崔南善)
1) 보람 있게 죽자
거국취진(擧國就陣)의 선두로 청년학도의 정신(挺身)을 보게 되었다. 진실로 당연한 의무요, 두 번없을 번듯한 걸음이지마는 이것이 일사(一死)를 필정(必定)하는 일이오, 젊은이 특유의 생활의욕에 대한 구극(究極)적 제약인 만큼 한 번의 대오(大悟)에 이르기까지에는 말 못하는 고뇌를 치르는 것이 사실인양하다.
말하기 어려운 이 고뇌를 몰래 하소연하여오는 청년을 많이 만나보고서 한 가지 고개를 숙이고 어설프게나마 손목을 잡아끄는 것이 근래의 일 사무(事務)이다.
진심의 비오(秘奧)를 피력(披瀝)하는 말인 만큼 다만 형식적 관념적으로써 임할 수 없음은 물론이오,더욱 이론과 주의(主義)로부터 오는 심각한 갈등에는 우리의 둔도(鈍刀)로써 결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일찍이 신라(新羅) 옛일의 국민동원강행기에 당시의 청년심리를 대표하였다한 귀산(貴山), 추항(箒項) 양인이 일세(一世)의 고덕(高德)인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가서 이에 대한 필요를 물었을 때 법사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말하고 특히 ‘임전무퇴(臨戰無退)’ 일조를 강조함에 시대청년의 심□가 이 일침에 탁 터져서 아무 지의(遲疑)함 없이 제시국난(濟時匡難)의 대업으로 치진(馳進)하였었다. 뒤에 보면 ‘임전무퇴’라는 일구어(一句語)가 진실로 평범하여 기이한 것이 없지마는 당시 청년에 대한 ‘막망상(莫妄想)’ 의 통봉(痛棒)으로는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청년학도의 와서 문의하는 조목은 다종다양(多種多樣)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종합하여 보면 시국의 진상에 대한 의식분열에서 나오는 것이 거의 절반이다. 이것이 나의 죽을 때냐 죽을 일이이냐, 일체를 다바치고 선선히 눈을 감을 절대경(絶對境)이냐 아니냐, 에 대한 미혹이 그네들의 가슴을 혼란시키고 있음을 간취할 수 있다.
비교적 죽음에 대한 외포(畏怖)는 보이지 아니하지만은 죽음에는 양심적 만족을 가져야하겠다는 의념(意念)이 매우 강렬하다. 일사를 결정하는 마당에 ‘죽는 보람’을 요량해 봄은 생명의식의 엄숙한 표적으로서 그것을 제시(提撕)에는 이 점에 있어서 꽤 큰 소홀이 있지 아니하였는가를 생각하게 함이 있다.
나는 그네들에게 대하여 임시(臨時) 임시하여 다소의 광설(廣舌)을 허비하기는 하지마는 주로 그 행동의 양심성을 감발(感發)하자면 영혼의 어느 모를 어떻게 따라야 할까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계자(稧子)가 ‘성전(聖戰)’ 의식을 투철시킴에 있었음을 알았다. 성전이란 말은 유행어가 되다시피 상용되지마는 선전대상(宣傳對象)된 이들의 이에 대한 감수(感受)실적은 그리 명백치 못한 혐(嫌)이 있다.
‘성전’ 임을 용인하지 못함에서 온갖 미장(迷障)이 나는 것이니까 이 점을 일□맹괄(猛刮)함이 물론 최유효(最有効)한 대증제(對症劑)이었다.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부터 중일전쟁(支那事變) 내지 대동아전의 일련적(一連的) 전개는 진실로 당유불능무(當有不能無)의 역사적 귀추요, 바꿔 말하면 곧 절대한 천명이랄 밖에 없다. 고금래의 온갖 인연적 약속이 덮치고 쌓여서 마침내 이 막다른 골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이 계기를 가지고서 세계역사의 합리적 전환이 행하려하며 대동아의 해방이 실현되려 하며 인류의 생활이 도의(道義)의 위에 건설되려 하며 신황(新皇)의 대도(大道)가 팔굉(八紘)에 광피(光被)되려하나니 이러한 것을 ‘성전(聖戰)’ 이라 이르지 아니하면 다시 무엇이라 일컬으랴.
그야 순연(順緣)으로 이를 받는 이도 있고 역연(逆緣)으로 이를 당하는 이도 있어서 조제감촉(遭際感觸)이 각이(各異) 불상동함을 면할 수 없지마는 세계의 일물치고 이 성전의 대파(大波)에 진동되지 아니할 것이 없고 마침내 그 결과에 함욕(涵浴)하지 않을 자가 없을 줄을 깨달으면 누구든지 이를 순응하고 이를 협동하는 이외의 다른 일이 무엇이랴.
원래 천운(天運)과 공리(公理)와 대세(大勢)의 외에 따로 각 개의 자유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진실로 운(運)과 이(理)와 세(勢)일진대 이 앞에는 각 개적 이유로써 하는 반항이 절대로 허락되지 아니한다.
오늘날 대동아인으로서 이 성전에 참가함은 대운 중의 대운임이 다시 의심없다.
어떻게든지 참가하고야마는 최후명령을 받고 있다. 여기 논의를 시(試)하던지 또 사변(思辨)을 희롱하려는 이가 있다하
면 천하에 이 이상의 우망(愚妄)이 다시 없을 것이다.
이 흉모(胸茅)를 발거(拔去)함으로써 보람 있는 죽음으로의 일로(一路)를 성오(省悟)한 청년이 한 둘이아니었다.
‘성전이다’ 하는 일념과 함께 대장부의 의기를 나타낼 때가 지금이다 하는 결심을 그네의 미우(眉宇)에 볼 때에 눈에서 더운물이 솟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새삼스레 ‘성전막의(聖戰莫疑)’ 의 일구(一句)를 제시하면서 아울러 옛날 원광법사의 ‘임전무퇴’ 네 자까지를 진두의 청년학도에게 선물하고 싶다.
<출전 : 崔南善, 「보람있게 죽자」, '매일신보', 1943년 11월 5일>
2) 나가자 청년학도야 -학문의 진리를 행동으로 바치라
재동경(在京) 학도 격려 최남선 씨 열변
사랑하는 후배학도들이여. 결연히 일어서서 씩씩한 행진을 하자고 가슴으로부터 우러나는 지성의 외침으로써 일본에 있는 반도 학도들의 결의를 촉구하고 그들의 장행을 격려하고자 반도 선배들은 얼마전 ‘도쿄’를 비롯한 일본 각 중요 도시에 달려가서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고 있거니와 지난 11월 14일 ‘메이지대학 반도출신 출정학도궐기대회’에서 최남선 씨는 만당의 학도들을 아래 놓고 ‘가라! 청년학도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열렬한 웅변을 토하여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제군 때는 왔다
청년학도 제군! 역사 있슨 이래의 성전인 금번의 태평양 전쟁은 지금 바야흐로 결전단계에 들어가서 마침내 우리 청년학도들의 출정을 요망하게 될 것이다.
청년다운□□과 학도로서의 예지(銳智)를 또다시 우리들이 □□□ □□□ 이 세기적 성업에 이바지하게 됨은 실로 남자로서 태어난 보람이 있는 감격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경성을 출발할 때에 일본□□에서 출정지원병의 반응이 그다지 예민하지 못하다는 소문을 약간 들었으므로 속으로는 기우를 듣고서 일본에 온 바이나 직접 이 곳에 와서 학도제군의 열렬한 지원의 모양을 내 눈으로 살피고 또 이제 늠름한 자태의 제군과 자리를 함께하고 지금이라도 곧 ‘펜’ 대신에 총검을 잡고 대장부의 떳떳한 본분을 이루겠다는 결의가 제군의 미우에 역력히 나타나고 있음을 바라볼 때 감격에 눈자위가 뜨거워짐을 금할 수 없다.
제군! 옛 말에 춘추에 의전이 없다는 것이 있으나 진실로 정의의 싸움이라는 것은 중국의 춘추시대에만 아니라 동서와 고금을 통틀어 놓고 어떠한 전쟁역사에서라도 그다지 많이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써 대부분의 전쟁은 이욕(利慾)과
야심이 엉키어서 빚어지는 것이라 하여도 지나치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의 태평양 전쟁은 철두철미 대의를 세계에 베풀기 위한 진무천병(神武天兵)으로써 팔굉(八紘)을 구석구석까지 비추는 따뜻한 태양의 빛을 지금 중국에서 ‘버마’에 이르고 필리핀에서 인도에 이르러 만나라의 억조 민중이 모두 이 빛을 우러러보고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
세계에 있는 모든 복잡한 상태를 이치에 맞도록 인도하고 모든 압박자들에게 해방과 발전의 기회를 주어 함께 살고 함께 영화스럽게 살아나간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번 전쟁을 의전(義戰)-성전이라고 하지 않고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이 빛나는 성전은 멀리 떨어진 곳의 다른 일이 아니고 멀리 떨어진 곳의 다른 일이 아니고 실로 우리들의 집안일이며 더욱이 우리청년학도들의 출전으로 말미암아 일대 추진을 보이려는 단계에 이르렀다.
중대(重大)의무(義務) 알라
제군! 오늘의 전쟁이 그 형식에 있어서나 또는 그 내용에 있어서 옛날의 전쟁과는 달라서 소위 국민개병에 의한 총력전, 전체전임은 새삼스럽게 말할 여지조차 없다.
물론 아래위로는 계급이 없고 옆으로는 아무 장벽이 없으며 전선과 총후의 구별조차 없다. 정말로 나라를 들어 한 덩어리의 불길이 되어있는 힘을 오로지 바치는 싸움이다.
이때에 청년학도들은 두 어깨에 짊어진 의무와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청년은 어떤 시대와 사회에 있어서도 그 중심이 곧 추진력이 되는 것이니 혹여 역사의 전환기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중에도 순정에 불타고 이상에 빛나며 그것을 실천에 옮길만한 꿋꾸산 힘을 가진 학도는 더욱이 중심중의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들 눈앞에 닥친 세계사의 일대 변화는 전 국민이 전 능력을 오로지 바쳐야 하며 족히 청년학도들에게 보내어지는 기대는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그것은 청년들의 힘찬□□ 때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메지 못할 무거운 책무이기 때문이다.
학도의 예리한 예지를 밝히지 않고서는 창조할 수 없는 도의문화(道義文化)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사적으로 보아 당연한 필연의 추진력을 자각할 때 피 끓는 듯한 용기가 가슴속으로부터 솟아오름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제군! 인생은 원래 가는 곳 마다 학교이며 가는 곳마다 전쟁이다.
학창에서 진리탐구에 매진하는 것도 일종의 전투일 것이며 전장에서 진리를 체험하는 것도 또 하나의 학문인 것이다.
대의에 산다는 점에서는 학교나 전선이나 다 같이 인생도장이다. 전선과 학교를 구별할 수 없는 오늘날 전장은 곧 진리
의 연장임은 당연하다.
□□□□□□ 청년의 세계보다도 더욱 철저하고 단적인 학문의 장소를 적진에서 비로소 우리는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생에 있어 학문은 요컨대 출발점에 지나지 않고 학문에서 얻은진리를 행동으로 나타내는 동시에 가치 있게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목표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행동이 곧 학문이라는 사실을 몸소 인식해야 할 때를 당하였다. 주저하여 회피할 것이 아니라 용감하게 나아가 이 관문을 돌파해야 할 것이다. 국난을 당하여 또는 역사의 전환기에 처하여 청년학도가 용감하게 출전하는 장렬한 자태는 역사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반드시 우리에게 한한 것만도 아니다. 신라시대의 화랑들이 강적을 앞에 두고서 통일의 대업을 위하여 매진한 경우라던가 보불전쟁 때에 ‘프로이센’의 청년학도들이 맨 먼저 일어서 숙적을 쳐부수려 돌진하는 광경 등 천재일우의 기회를 타고 출전하는 장렬한 의기는 대의에 사는 제군이 평소부터 찬탄 흠모하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신라나 프로이센의 청년들이 당한 그것보다도 더욱 광영 있는 일대기회가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용감 활발하게
옛날의 용사는 “인생은 모름지기 마혁(馬革)으로써 시체를 덮을 것이지 어찌 헛되이 아녀자의 손에서 죽을 것이냐”하고 말하였다.
유명한 학자나 또 시인 가운데는 중□□□□ 투필사융헌(投筆寫戎軒)이라고도 말하였다.
비상시대에 태어나 불꽃 날리는 의(義)와 진리(眞理)와의 싸움 한가운데 한 몸을 던져 끝까지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사나이로서의 본□ 이 위에 더 할 것이 있을 것인가. 야심가 때문에 싸움책략주의 때문에 나아가는 것조차 사나의의 자랑이라고 한 자에 비하여 대동아의 건설, 저 인류의 해방, 주의와 신념과 이상을 살리려는 거룩한 싸움에 나아가는 이 마당이야 이 얼마나 쾌심사이냐 아니 이 얼마나 큰 인생의 행복일 것이냐 이로써 적은 한몸을 가지고 천황폐하의 방패가 되고 세계재건의 기초가 되고 다시 돌이켜 생각하여보면 사람으로서 가장 의의롭게 죽을 때 그 죽는 장소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느 것이나 모두 운리들을 분기시킴에 족할 만치 사는 길이 아닐까보냐. 이러한 광영의 성대(聖代)에 태어난 것을 헛
되이 하지 않는 곳에 나에게 살고 먹을 권위가 있고 창조의 진화가 있을 것이다.
제군 우리들이 태평양전쟁의 진두에 서는 것은 일본국민의 충의성에 부합하기 위해서이지만 다시 우리 조선 사람의 입장으로서 본다면 또 하나의 간절한 기대가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을 발견하는 것이오 잠자는 동안 미처 우리들 본연의 자태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허약한 일에 더럽힌 남루를 벗어던지고 ‘의(義)’에 살고 ‘의’에 죽고 ‘용(勇)’에 일어서고 ‘용’에 넘어짐을 제1의 또한 우리들의 그 전 모습을 찾아내는 길이다. □창무사(□倉武士)들과 함께 세계역사상에 무사도의 장력이라고 일컬어온 바이고 고구려무사 신라무사의 무용성을 찾아내어 그 씩씩한 전통을 우리들의 생활원리로 하고 우리들의 정신적 부활을 꾀하는 것이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요망되어 오던 바 그 절호의 기회가 대동아의 전장에 그들 그 □□□ 일병으로서의 용맹한 출진에 의하여 발견되는 것을 나는 통감하는 바이다.
성전(聖戰) 진두(陳頭)에서
제군 신라무사의 여러 가지 무용담은 모두 사람들의 피를 끓게 하는 만족할 만한 것이지만 특히 지금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부과(夫果), 취도(驟徒), 핍실(逼實)이라는 삼형제의 출진이야기일 것이다.
이 삼형제는 진덕왕 시대에 귀족출신의 청년이었는데 셋째의 취도라는 사람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법명을 도옥(道玉)이라고 하였다.
신라와 백제와의 정파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태종왕 2년에 백제군이 침입을 시도, 조천성(助川城)118)이라는 곳에서 일대 결전이 일어났다.
이때 승려인 도옥이 생각건대 “나는 중이기는 하나 이렇다 할 만 한 도도 다지지 못하였으므로 도로 전장에 나아가 몸을 군국에 바쳐 순(殉)하는 것이 적으나마 선덕이 될 것이다” 하고 곧 법복을 군복으로 바꾸어 입고 이름을 취도로하고 명보에 청원하여 종군- 즉 요새 말로 특별지원병으로서 출전하였다.
그리하여 장렬하게 전장의 꽃으로 흩어졌다.
그 맏형인 부과는 문무왕 11년 백제와의 싸움에 출진하여 동생에 못지않은 무용을 나타내고 드디어 호국의 영령이 되었다. 그 다음의 신무왕 시대에는 신라에게 망한 고구려의 패잔병이 싸움을 일으켜 국경방면의 위급이 전하여지자 제일 끝 동생인 핍실이라는 사람이 결연히 일어서서 국난을 막을 결심을 한 후에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하려고 할 때 그의 아내에게 맹세하기를 “우리 두 형님은 벌써 나라에 목숨을 바쳐 광영의 격찬을 받고 있다.
나 혼자가 생명을 애써 살고 있다는 비겁한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 이 자리는 생이별인 동시에 죽음의 작별이라는 것을 알아주오” 한 후 출전하여 분투역전한 후 마침내 가장 장렬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귀족출신의 삼형제 더욱이 한번은 세상을 버리고 중이 되었던 그들이 귀속을 하여 결연히 국난에 목숨을 바쳤음은 대의에 대하여서는 사사로운 한 몸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가장 도드라진 면이고 아름다운 전통이었던 까닭이다.
이와 같은 정신은 여러 가지 외부의 사정으로 말미암아 점점 잠재적으로 되어 때때로 간혹 무슨 기회를 타서 나타나고 있을 뿐이나 이름이 전하고 전하여져서 우리들의 심장을 두드리고 그 피는 흘러서 우리들의 혈관에 물결치고 있다. 이것을 살려 대공아의 성전에 그 실증을 보이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면 안 된다.
황공하옵게도 폐하의 부르심을 받사옵고 황도의 선양 도의건설 그리고 대동아의 건설을 계기로 한 인류의 구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금 제군에게 요망되어 있다.
용약(勇躍) 출정(出征)하자
제군! 대동아의 성전은 이름은 비록 동아이지만 이는 신시대 신문화의 창조운동이며 세계역사의 개
118)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
조이다.
바라건대 일본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남아의 의기를 분발하여 부여된 이 기회에 분발용약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충은 즉 효이다, 병환 중 양친(兩親)두고 지원마감일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19일 특별지원병 지원에 숨은 미담하나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법학2년에 재학 중인 가나야(김□□□)군은 부모가 모두 중병으로 신음하고 있고 더구나 군은 독자로서 □□의 부모□□□□□□ 사람이나 우국의 지성을 억제할 길 없어 결연히 지원하여 관계 당국을 감격시키고 있다.
<출전 : 崔南善, 「나가자 靑年學徒야-학문의 진리를 행동으로 바치라」, '매일신보', 1943년 11월 20일>
3) 출진하는 청년 학도에게 고함 -‘성전(聖戰)’ 의식에의 투철
거국취진(擧國就陣)의 선두로 청년학도의 정신(挺身)을 보게 되었다. 진실로 당연한 의무요, 두 번 없을 번듯한 걸음이지마는 이것이 일사(一死)를 필정(必定)하는 일이오, 젊은이 특유의 생활의욕에 대한 구극(究極)적 제약인 만큼 한 번의 대오(大悟)에 이르기까지에는 말 못하는 고뇌를 치르는 것이 사실인양하다.
말하기 어려운 이 고뇌를 몰래 하소연하여오는 청년을 많이 만나보고서 한 가지 고개를 숙이고 어설프게나마 손목을 잡아끄는 것이 근래의 일 사무(事務)이다.
진심의 비오(秘奧)를 피력(披瀝)하는 말인 만큼 다만 형식적 관념적으로써 임할 수 없음은 물론이오,더욱 이론과 주의(主義)로부터 오는 심각한 갈등에는 우리의 둔도(鈍刀)로써 결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일찍이 신라(新羅) 옛일의 국민동원강행기에 당시의 청년심리를 대표하였다한 귀산(貴山), 추항(箒項) 양인이 일세(一世)의 고덕(高德)인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가서 이에 대한 필요를 물었을 때 법사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말하고 특히 ‘임전무퇴(臨戰無退)’ 일조를 강조함에 시대청년의 심□가 이 일침에 탁 터져서 아무 지의(遲疑)119)함 없이 제시국난(濟時匡難)의 대업으로 치진(馳進)하였었다.
뒤에 보면 ‘임전무퇴’라는 일구어(一句語)가 진실로 평범하여 기이한 것이 없지마는 당시 청년에 대한 ‘막망상(莫妄想)’ 의 통봉(痛棒)120)으로는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청년학도의 와서 문의하는 조목은 다종다양(多種多樣)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종합하여 보면 시국의 진상에 대한 의식분열에서 나오는 것이 거의 절반이다.
이것이 나의 죽을 때냐 죽을 일이이냐, 일체를 다바치고 선선히 눈을 감을 절대경(絶對境)이냐 아니냐, 에 대한 미혹이 그네들의 가슴을 혼란시키고 있음을 간취할 수 있다.
비교적 죽음에 대한 외포(畏怖)는 보이지 아니하지만은 죽음에는 양심적 만족을 가져야하겠다는 의념(意念)이 매우 강렬하다. 일사를 결정하는 마당에 ‘죽는 보람’을 요량해 봄은 생명의식의 엄숙한 표적으
119) 의심하고 주저함.
120) 좌선할 때 쓰는 방망이. 스승이 마음의 안정을 잡지 못하는 사람을 징벌하는 데 쓴다.
로서 그것을 제시(提撕)121)에는 이 점에 있어서 꽤 큰 소홀이 있지 아니하였는가를 생각하게 함이 있다.
나는 그네들에게 대하여 임시(臨時) 임시하여 다소의 광설(廣舌)을 허비하기는 하지마는 주로 그 행동의 양심성을 감발(感發)하자면 영혼의 어느 모를 어떻게 따라야 할까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계자(稧子)가 ‘성전(聖戰)’ 의식을 투철시킴에 있었음을 알았다.
성전이란 말은 유행어가 되다시피 상용되지마는 선전대상(宣傳對象)된 이들의 이에 대한 감수(感受)122)실적은 그리
명백치 못한 혐(嫌)이 있다.
‘성전’ 임을 용인하지 못함에서 온갖 미장(迷障)이 나는 것이니까 이 점을 일□ 맹괄(猛刮)함이 물론 최유효(最有効)한 대증제(對症劑)이었다.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부터 중일전쟁(支那事變) 내지 대동아전의 일련적(一連的) 전개는 진실로 당유불능무(當有不能無)의 역사적 귀추요, 바꿔 말하면 곧 절대한 천명이랄 밖에 없다.
고금래의 온갖 인연적 약속이 덮치고 쌓여서 마침내 이 막다른 골에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이 계기를 가지고서 세계역
사의 합리적 전환이 행하려하며 대동아의 해방이 실현되려 하며 인류의 생활이 도의(道義)의 위에 건설되려 하며 신황(新皇)의 대도(大道)가 팔굉(八紘)에 광피(光被)되려하나니 이러한 것을 ‘성전(聖戰)’ 이라 이르지 아니하면 다시 무엇이라 일컬으랴.
그야 순연(順緣)으로 이를 받는 이도 있고 역연(逆緣)으로 이를 당하는 이도 있어서 조제감촉(遭際感觸)이 각이(各異) 불상동함을 면할 수 없지마는 세계의 일물치고 이 성전의 대파(大波)에 진동되지 아니할 것이 없고 마침내 그 결과에 함욕(涵浴)하지 않을 자가 없을 줄을 깨달으면 누구든지 이를 순응하고 이를 협동하는 이외의 다른 일이 무엇이랴.
원래 천운(天運)과 공리(公理)와 대세(大勢)의 외에 따로 각 개의 자유란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운(運)과 이(理)와 세(勢)일진대 이 앞에는 각 개적 이유로써 하는 반항이 절대로 허락되지 아니한다.
오늘날 대동아인으로서 이 성전에 참가함은 대운 중의 대운임이 다시 의심없다.
어떻게든지 참가하고야마는 최후명령을 받고 있다.
여기 논의를 시(試)하던지 또 사변(思辨)을 희롱하려는 이가 있다하면 천하에 이 이상의 우망(愚妄)이 다시 없을 것이다.
이 흉모(胸茅)를 발거(拔去)함으로써 보람 있는 죽음으로의 일로(一路)를 성오(省悟)한 청년이 한 둘이 아니었다.
‘성전이다’ 하는 일념과 함께 대장부의 의기를 나타낼 때가 지금이다 하는 결심을 그네의 미우(眉宇)123)에 볼 때에 눈에서 더운물이 솟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새삼스레 ‘성전막의(聖戰莫疑)’ 의 일구(一句)를 제시하면서 아울러 옛날 원광법사의 ‘임전무퇴’ 네 자까지를 진두의 청년학도에게 선물하고 싶다.
<출전 : 崔南善, 「出陣하는 靑年學徒에 告함-「聖戰」意識에의 透徹」, '春秋' 第4卷 12號,1943년 12월, 19~20쪽>
121) 기운을 내어 떨쳐 일어남.
122) 외부의 영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임.
123) 이마의 눈썹 근처.
32. 한상룡(韓相龍)
1) 대망의 지원병제도 실현을 기뻐하며 -내선일심의 실(實)
참의 한상룡
조선인이 제국신민(帝國臣民)인 이상 병역의 의무를 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로, 수십 년 동안 이를 희망하고 있던 바, 이번 미나미(南) 총독의 노력으로 멀지 않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는 것은 크게 경하 해야 할 일이다.
요컨대 병역의 의무·교육의 의무·참정권 문제 등 하나씩 점차 실현되고 있는 것은 큰 영광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조선인이 국민으로서의 의무가 가중된 것으로 보인다. 즉 의무의 이행이 있은 뒤 권리를 운운해야 하는 것이지,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권리만을 요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런 때에 조선인은 국가에 대해 신민으로서의 의무를 완전히 이행해야 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 조선인은 더욱 자각하고 노력해서 국민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도록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기관, 즉 학교의 명칭 통일과 일본인과 조선인의 공학 문제는 우리가 수십년 동안 그 필요성을 주장해온 것으로, 이번 미나미 총독의 영단으로 이 또한 멀지 않아 실시된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위의 두 가지 문제가 미나미 총독의 대영단으로 일본인·조선인의 차별이 완전히 철폐되어 진정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결실에 완벽을 기할 수 있도록 조선인의 진로에 일대 광명을 주는 것이었다.
<출전 : 韓相龍, 「待望の志願兵制度 實現を喜하びて-內鮮一心の實」,'中樞院通信' 第113號, 1938년 2월, 2쪽>
2) 성은에 봉보(奉報) -징병제 실시와 조선청년
조선에도 옛날에는 훌륭한 무사정신이 있어 신라시대(新羅時代)에 화랑정신(花郞精神)은 일본의 무사도(武士道)에 필적(匹敵)하는 것으로 한 번 군에 나아간 자는 무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옴을 즐거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위에 없는 불명예로 생각하였던 것으로 일본의 군국정신은 저 옛날 신라에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 원래 유교를 국민의 규범으로 하여 조선에는 시경의 ‘왕우흥사 수아갑병 흥자해행(王于興師 修我甲兵 興子偕行)’124)의 존귀한 정신이 침투하여있지 않으면 아니되는데 중간에 마침내 이기적이 되고 국가사를 망각하여 징병제도는 남아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상층계급의 자제는 이를 회피하고 상민의 징병과 용병만으로 된 것으로서 이것이 반도 쇠미의 큰 원인이었다.
병합 이래 이에 30여년 그간 배양된 내선일여의 융합한 정수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대동아전을 계기
124) ‘왕이 군사를 일으키면 내 갑옷과 병기를 손질하여 그대와 함께 달려가리라’는 뜻.
로 하여 호국의 꽃으로 사라져 총후나 직장을 물론하고 감탄하였었다.
그리하여 이에 내선동일 징병제도가 시행되어 이제 조선청년도 과(戈)를 잡고 군문에 서서 세계에 일본의 지위를 확립하는 초석이 될수 있는 광영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일본국민으로서 대동아 맹주국의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명예를 부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의 감격과 기쁨이 금일보다 더 할 수 있으랴. 과거와 현재와를 아울러 보건대 감격 일층 깊은바였다.
오직 이 성은에 봉보하옴에 있어서는 반도민 전부가 병역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가지고 도의에 불타 어버이나 아들이나 상휴하여 훌륭한 군인이 되기를 염원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출전 : 韓相龍, 「聖恩에 奉報-徵兵制實施와 朝鮮靑年」, '春秋' 1943년 9월호, 44~45쪽>
33. 허하백(許河伯)
1) 총후여성의 힘
태평양전쟁(大東亞戰爭)이란 누구나 다 알다시피 대동아 각 지역에서 미영(米英)의 세력을 쫓아버리고 그야말로 동아민족이 동아를 재건설하여서 행복과 평화의 나라를 새로이 만들려는 가장 의의가 깊고 정의의 전쟁이므로, 하여서 대동아에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오로지 힘을 이 목적에 집중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나라는 남녀노소 부귀빈천(富貴貧賤)을 논할 것 없이 국민전부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힘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 여성들의 힘은 가장 엄숙한 의미에서 더욱 중대성을 띠었다고 봅니다.
왜 그러냐하면 본래 무력전에서는 우리 무적황군이 반드시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단기일에 끝나리라고는 믿지를 못할 것이니 앞으로 점점 장기전이 되고 보면 그야말로 총력전이니까 총후부인들이 경제전과 사상전에서도 적의 공격을 받아나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 까닭입니다.
여기서는 무엇보다는 먼저 여성들의 굳센 정신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의식주에 관한 문제에서부터 경제문제, 자녀교육문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것은 종래에 있어서도 많이 말하여 오던 일이지마는 물자가 부족하고 국가가 곤란하여진 오늘날 와서는 이러한 문제는 오로지 총후 여성들의 두 어깨에 짊어질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자가 쓰고도 남았으며 한 가정경제가 한 가정에서 고쳐졌을 때에는 자유대로 요리해 먹고 자유대로 쓰고 해도 살아왔지마는 오늘날 와서는 이러한 개인적이며 태만한 생활은 안 되는 것이다.
한 부인의 음식솜씨 여하는 곧 그 집 주인의 또는 자녀들 건강에 미치는 것이며 한 걸음 나아가서는 국가노동력의 다과에 영향이 있는 것이며 한 주부의 매류(買溜)는 곧 국가경제에 미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또는 한 주부의 국가관념의 부족은 곧 소국민125)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은 무두가 국가하고 관계되어 있으며 전부가 국가적 의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여서 총후의 힘이란 오로지 여성의 힘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래가 밖에 나가서 전쟁하는 것은 남자의 임무일 것이며 집에 있어서 그 뒤를 원조하는 것은 오로지 부인들의 임무일 것입니다.
옛날부터 내조의 공이란 동양여성의 가지고 있는 최대의 미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와서 이 말은 한 층 더 그 중요성을 띠었고 국가적 의의가 깊다고 봅니다.
그것은 곧 국가를 충분히 활동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주부로서는 매일 요리에 대한 걱정, 행주 하나, 걸레 한쪽에 대하여 검약하는 것, 식탁에 마주앉았을 때에 자녀들과의 대화에 이르기까지 평시에는 우리가 문제시도 하지 않던 사소한 점에도 진중한 태도를 갖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다시 구체적으로 한 예를 들어 말한다면 사람이란 누구를 물론하고 일전(一錢)이 모여서 일원이 된다는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일전이야 무얼하는 것인가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되박 쌀은 귀한 줄 알고 한 바가지의 물은 많은 줄 알지마는 한 알갱이 쌀, 한방울 물은 흘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관념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전시하 우리여성들은 이러한 세심한 주의가 더 필요한 것입니다.
보통 남성들은 생각지도 못한 세밀한 데까지 머리를 쓰는 여성을 요망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그것이 바로 국가흥망에 관계가 큰 까닭입니다.
물자가 부족하고 국가가 곤란한 금일시국에서는 따뜻하며 섬세한 여성의 힘이 전면적으로 발휘하여지기를 요망하여 마지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는 그러한 일이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런 일은 결코 없겠지만 만일에 5, 6일 동안 일본 내에 먹을 쌀이 없을 때 우리 부인들도 맨물을 마셔가면서라도 참아가면서 싸울만한 용기와 인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를 지르게 되면 두말없이 그것은 벌써 총후전에서 지고만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 총후여성들이 재인식 할 점은 공연히 구습관만 쫓을 것이 아니라 교육받은 사람은 그것을 활용시킬 것이고, 가정부인들은 우리들 생활을 이 이상 줄이고는 견딜 수 없으리라는 곳까지 줄여서 오로지 전시하 생활에 부합된 생활로 꾸며나가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따님이면 어머님을 도와서 고용인을 폐지할 것이며, 아무리 남루한 옷이라도 만족하고 입으며 반찬 없는 음식이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먹게 되면 자연히 ‘매류’를 하지 않게 되고 공부에 또한 일에 능률이 나고 가정은 평화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가정 사람들이 모두가 자기들 맡은 일에 열중하는 데서 가정경제도 풍부하게 되고 따라서 저
125) 어린이를 뜻함.
축도 될 것입니다.
나라에는 생산력이 불어가니 자연히 국책에 순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 말한 것은 오로지 총후여성들의 희생적 정신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정신의 근본은 자기를 사랑하는 데서 생겼고 한 걸음 나아가서는 나라를 사랑한다는 애정이라고 보는데 오로지 황국의 어머니로서의 굳센 사랑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전쟁을 이기는 데는 무엇보다도 우리 총후여성들 힘에 많이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 힘은 무슨 힘이냐 하면 앞서도 말한바와 같이 황국의 어머니로서의 굳센 사랑의 힘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면 전쟁하 우리 여성들은 한 덩어리 태양과 같은 단결이 되어가지고 한층 자중한 태도로 그칠새 없이 이 힘찬 사랑의 열을 발휘하기를 경의하는 바입니다.
<출전 : 許河伯, 「銃後女性의 힘」, '朝光' 第8卷 2號, 1942년 2월, 118~120쪽>
2) 총후부인의 각오
여러분은 누구나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아국(我國)은 과거 4년간 계속해온 중일전쟁(支那事變)이 아직 끝마치지 않은 때에 또 미영(米英) 양국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도 잘아시는 바와 같이 영미는 인구에 비하여 세계적으로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양에까지 손을 뻗지 않을지라도 좋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극단의 개인주의사상으로부터 출래(出來)한 사리사복(私利私腹)정책은 우리 황색인종에 대하여 심한 압박을 거듭하여 왔었습니다.
이에 우리 무적황군은 이리해서는 안 되겠다고 중대한 결심을 굳게 한 결과, 이야말로 실로 대동아동영권 건설의 성전(聖戰)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미영 양국에 대하여 포문을 연 것이 지난 12월 8일이었습니다.
그 이래 여러분도 신문에서 혹은 라디오의 뉴스를 통하여서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우리 황군은 이르는 곳에서 적군을 격멸시켜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이에 있어서 우리를 총후(銃後)의 부인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는 큰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여서 변변치 못한 저까지도 이 자리에 연사의 한 사람으로 서게 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과거에 있어서도 매우 총후의 노력을 하여왔었지만 이번은 그러한 미지근한 생각으로써가 아니고 가장 적극적이오 실천적인 결과를 나타내지 않아서는 안 될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하는 것을 이로부터 제가 간단하게 여러분께 말씀코자 합니다.
1. 건전한 사상
첫째, 건전한 사상을 사져야 할 터인데 이에 있어서 우선 우리는 경신존황(敬神存皇)의의 염(念)을 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신사참배는 물론 신사 앞을 지날 때에는 경례할 일과 애국일의 실행 등 이리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신을 발휘할 일입니다.
과거에 가졌던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나라를 위해서만이라는 국가주의의 사상을 파악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두세 가지 들면 우리들이 식사를 하는 것일지도 자기일개인의 생명지지(生命支持)를 위해서가 아니고, 이를 먹고 힘을 내어 국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 밑에서 식사도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데 있어서도 훌륭히 양육하여 나라를 위해 유용한 인물이 되도록 힘쓰는 헌신적 정신이야말로 일본정신입니다. 이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면 참된 황국신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국가 제일주의의 사상이야말로 건전한 사상이며 국민각자가 통일적으로 이 사상을 가져서 비로소 일심이 되어 이 전쟁을 훌륭히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2. 감사위문
제일선에서 생명을 내어던지고 싸워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은 그 고생을 감수하고만 있을 것입니까. 배급을 좀 적게 받는다고 불평을 말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들이 금일 이처럼 행복스럽게 생활하는 것은 제일선에서 생사를 상관하지 않고 싸워준 용감한 장병의 덕택이 아닙니까.
이것을 생각하는 때는 실로 눈물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평을 말할 것이 아니고 항상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태도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1) 출정군인에게 선물을 보내어 위로할 것.
2) 전쟁에서 명예의 부상을 받은 장병에게는 하루라도 속히 치료를 받게 하여 갱생의 길을 걷도록물질적으로 후원할 일.
3) 전사장병의 유가족에게는 물심양면으로 도와서 고락을 함께할 일.
3. 자원애호(소비절약)
소비절약은 우선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극히 손 가까운 것에서부터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무 한개나 감자 한 개라도 이를 소홀이 해서는 안 됩니다.
매우 적은 것이라도 이를 버리는 일이 없이 모든 물자를 소중히 해야 합니다.
현대의 전쟁은 경제전과 총력전에서 비로소 승리를 얻는다고 합니다.
이를 안다면 아무리 보잘 것없는 물건일지라도 반드시 그 용도를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니 만일 이러한 태도를 결(缺)했다고 하면 현대국가의 국민된 자격을 상실했다고 볼 것입니다.
특히 여기에서 역설하여 줄 것은 지난 해 사치품금지령이 발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태연하게 지환(指環)126)을 끼고 네거리로 활보하는 여성을 보게 될 때 실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청컨대 총후부인이라는 자각을 가졌다면 이 시기에 일체로 이와 같은 사치를 격멸하시기를 바랍니다.
126) 반지.
4. 폐물이용과 재생
이 점은 특히 우리 반도인 가정에 있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번의 문제와 관련시켜서 말한다고 하면 우선 폐품이라는 것 생기지 않도록 할 것, 군수 관계의 물품은 사용금지할 것, 물품을 많이 사들이려고 매점하지 말 것 등입니다.
매월 애국일에 각 정회(町會)에서 폐물을 회수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폐품이 생기게 되면 잘 모아두었다가 그 기회에 잘 이용시키도록 힘씁시다.
우리들은 이 전쟁이 아무리 오래 계속된다하더라도 우리국내에서 산출되는 물질로서 견디어 나아가야만 된다는 각오를 가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이는 우리들의 각오여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생활이 다소 사변전보다 불편이 있다고 해서 드디어 일본은 물자가 부족해서 곤란을 받고 있다고 혹 생각하실지 모르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생산이 증가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사변전까지는 물품을 귀중히 여기던 생각이 부족했었기 때문에 버려두었던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절약하여 두기 때문입니다.
못, 통조림의 빈 통, 종이 조각 등등을……
이것으로 보아도 일심단결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것이라는 것을 미루어 알 것입니다.
5. 근로봉사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때까지의 우리 반도부인은 고용인을 많이 두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왔었습니다.
이 뿌리 깊은 전통적인 생각은 소위 지식계급의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야말로 우리 제국은 전국적으로 사람의 힘과 물질의 힘을 모아서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고 하는 목표를 향해서 싸우고 있는 이때에 그러한 허영심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근로적 가풍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전혀 우리 부인의 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래부터 어찌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때는 별문제로 치겠으나 타인에게 부엌을 맡긴다고 하는 것은 첫째, 가족보건에 있어서 위험하며, 둘째로 경제적으로 많은 손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때에 주부된 자는 모름지기 부엌으로 혹은 시장으로 그뿐만 아니라 주부로 내직을 가질 것과 여자도 물품을 쓰는 자만 되지 말고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자진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에 있어서는 가정을 가지고는 일한다는 것은 한 수치와 같이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만 지금은 그러한 관념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각인이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일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총후의 부인으로서는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를 생각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조금이라도 노는 일 없이 일하는 것을 한 개의 자랑으로 삼읍시다.
6. 저축장려
이상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모든 낭비를 막고 매일 일전(一錢)이라도 모아서 저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티끌도 모으면 태산이 된다는 격언도 있으나 이것도 자기혼자만 실행하고 이웃이 실행하지 않는다면 별효과가 없습니다.
일례를 들어 말씀한다면 한 사람이 매일 십전씩 만 사람이면 천 원이 됩니다.
그러나 한 남자가 요리집에 가서 하룻밤에 이천 원을 낭비했다고 가정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들은 자기가 실행하고 그 다음에는 이웃이 함께 이리하여 전 국민이 모두 실행하지 않으면 국책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있어서 우리 학교의 예를 들어 말씀하면 지난 12월 8일 미영에 선전한 날에 이천 원을 육해군에 헌금한 일이 있습니다.
물론 직원과 생도들이 함께 내어놓은 돈일지라도 여학교로서는 거대한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아놓으니까 거액이 되었지만 각인대로 나누어 소용(所用)했다면 거금이 될 수 없습니다.
생도로부터는 매월 20전씩 직원으로부터는 월급에서 1원씩 떼어낸 것입니다.
우리 학교에서는 매년 이와 같이 하여 이 전쟁이 계속되기까지는 이천 원씩 헌금하기로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 예에서 불과합니다. 우리들은 각 가정에 있어서도 혹은 애국반에 있어서도 부인의 각오여하에 의해서 가장 많은 저금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청컨대 여러분 각자가 서로서로 실행했기를 빌어서 마지 않습니다.
<출전 : 許河伯, 「銃後婦人의 覺寤」, '大東亞' 第14卷 3號, 1942년 5월, 108~111쪽>
34. 현상윤(玄相允)
1)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사(士)는 국지원기(國之元氣), 멸사구원(滅私久遠)의 생을 찾자
내가 현재교편을 잡고 있는 중앙학교(中央學校)는 직접군인으로서 적령자가 없고 대부분이 14세 이상 17~8세 이하의 생도이나 이들은 모두 장차 적령기에 달할 것이므로 지금부터 철저한 군대식 조련과 결전정신을 양성하여 일단 무인으로 군문에 나설 때는 훌륭한 군인이 되어 곧 국가에 유용한 인재가 되도록 기하고 있다.
이같이 재학생에 대하여는 만전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터이나 이미 중학을 졸업한 다음 각 상급학교에 입학한 졸업자에 대하여서도 금번 임시특별지원병채용규칙(臨時特別支援兵採用規則)이 공포된 이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를 권고지도하고 있는데 지난 4일에는 특히 나의 명의로 우리 중앙중학교졸업자로서 현재대학고등전문 각 학교에 재학 중인 자에게는 궐기의 격문을 발하여 그들의 장도(壯途)를 축복하고 아울러 결의를 촉구하였던 것이다. 나로서 금번 특별지원병으로 나서는 대학전문 청년학도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상 격문 중에 대략 말하였으나 이 기회에 우리 중앙중학졸업자 이외의 각 대전문학교 청년학도에게도 몇 마디 나의 소신을 피력하고자 한다.
청년학도제군은 이미 각 재학교장으로부터 상세한 지도와 격동(激動)의 말을 들었을 것이며 제군의 결의도 이미 공고한 바 있을 것이나 만일 아직 가정사정과 기타로 지원의 장지(壯志)를 결정하지 못하고 숙려중인 자가 있다면 나는 교육자적 입장에서 제군에게 청년다운 대용단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에도 선비(士)는 나라의 원기(國之元氣)라는 명언이 있다. 국난을 당하여 솔선정신(率先挺身)하는 것이 선비된 자의 일대의무이며 또한 청년다운 기개일 것이다. 국가가 평시부터 교육을 존중하여 선비의 양성에 전력을 경도(傾倒)하는 이유도 일단 완급(緩急)이 있을 때 선비가 일명을 국가에 바쳐 구국제민(救國濟民)하는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정신에 불타고 있는 때문이다. 바야흐로 태평양전쟁은 적의 소위 총반공(反攻)으로 나날이 처창가열(悽愴苛烈)의 도(度)를 가하여 드디어 결전단계로 돌입하게 되었다.
시국의 추이는 실로 중대한 바 있다.
이때 국가가 평소부터 가장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 청년학도제군에게 이적(夷狄)의 침구(侵寇)를 물리쳐 대동아성역을 적의 독아(毒牙)로부터 방위하라는 위대한 사명을 내리시다.
제군은 분연히 일어서 총검을 잡고 곤란에 나아가야 할 때는 바로 이때이다.
일국의 선비로서 다른 일반국민보다 수문연무(修文鍊武)에 일층 더 힘써온 제군이 명철한 판단과 확호한 신념을 가지고 단연 국민을 이끌어 이 곤란을 타개할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군도 잘 아는 바와 같이 일본학도들은 전번 학도징집연기 정지로 오는 12월 1일을 기하여 전국 수십만 학도가 일제히 군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일본인학도와 한 책상에서 나란히 학문을 닦아오던 반도청년학도만이 결전하 그대로 무위도식하고 있게 되지나 않을까 우리교육계에 몸을 둔 자는 여간 마음을 졸인 것이 아니었다.
제군도 필시 우리 이상으로 절치액완(切齒扼腕)127) 결전장의 저 창공을 바라보고 격분을 참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금차 특별지원병규칙에 의하여 제군의 갈길을 활연(闊然)히 열어주었다.
제군도 일본인학도와 함께 대오를 같이하여 용약 결전장을 향하여 출진하게 되었음은 황국신민으로서 또는 국가의 원기인 □된 자의 한사람으로서 무상의 광영이 아닐 수 없다.
이 위대한 역사적 순간에 있어서 제군이 바치는 그 적성에 넘치는 충용은 성은에 봉보(奉報)하는 국민의 절대한 의무일뿐더러 일□□□청년학도의 약동(躍動)하는 생의 투철일 것이다.
반도는 제군들의 용맹과 과감한 투지를 통해서 황국의 위대한 일분자로 그 양양(洋洋)한 미래를 명시하게 될 것이다.
나는 서슴지 않고 이곳에 단언한다. 반도로 하여금 금후 대동아역사에 이름을 나타나게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열쇠는 오직 제군의 손에 있음을 제군은 깨달아야 한다.
반도청년이 황국의 일분자로 대동아 십억 동포를 이끌고 그 지도자로써 필경에 치참(馳參)하는 데 무슨 □□가 있을 것이며 □□ 것이 무엇이랴.
나는 제군의 □□를 털끝만큼이라도 의심치 않는 자이나 만일 제군 중에 혹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고의준순(孤疑浚巡)128) 아직 국가의 선비된 자신의 명예와 책임을 깨닫지 못하고 지원을 주저하는 자가 있다면 그러한 학도들에게 이 기회에 한마디 하고자 한다.
대체로 보아 현재 제군의 □도를 저지하는 조건을 살펴보면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제군자신의 생에 대한 애착심일 것이며, 둘째는 문약(文弱)과 투안(偸安)129)에 빠진 조선가정일 것이다.
나는 이미 출진의 결의를 굳게 한 대부분의 청년학도는 사소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였을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아직 누구나 다 명료히 깨달아야 할 이 두 가지 명제에 대하여 해답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학도가 있다면 나는 교육자된 입장에서 그 몽(蒙)을 계(啓)하는 친절을 사양치 않으려 한다. 첫째로
127) 액완 : 분격(憤激)하여 팔짓을 함.
128) 준순(浚巡) : 어떤 일을 단행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함. 또는 뒤로 멈칫멈칫 물러남.
129) 할 일을 미루어 두고 눈앞의 안일을 탐함.
생에 대한 애착에 대하여는 제군도 이미 태평양전쟁 이래 황군용사가 목숨을 홍모와 같이 여기는 가지가지 결사적 행동을 들었을 것이다. 우리의 목숨은 개인의 목숨이기 전에 국가의 것이다.
고어(古語)에도 목숨을 버리는 자는 영원이 목숨을 얻을 것이오, 목숨을 아끼는 자는 그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목숨을 일개인을 위하여 고집할 때는 그 개인의 육체적 일생인 끝마침으로써 이와 함께 그치고 만다.
그러나 적은 일개인의 목숨일지라도 영원한 역사적 대의를 위하여 이를 바칠 때는 대의와 함께 영생하는 것이다.
남정성(楠正成)의 목숨은 오늘날까지 대화민족의 혈맥 속에 끊임없이 뛰고 있다.
제군은 교정에서 늘 배워온 극히 자명한 이 이론을 현실에 있어서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다음 가정사정이다. 우리가정은 과거에 있어서 너무나 은둔(隱遁)고식(姑息)을 일삼고 개인의 안위만을 생각하여 왔다.
이 점은 지금 우리가 황국신민으로서 일대비약을 하려는 이 위대한 순간에 직면하여 적지 아니한 장애가 되어 잇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군과 같은 혈기방장한 청년이 이 폐풍을 일소(一掃)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이를 타파할 것인가 제군은 지금 황군의 일원으로서 단연 출진을 결의함으로써 반도의 황민화를 촉진하는 한편 종전과 같은 무를 등한히 하여온 가정을 개량하는 일석이조의 역할을 띠고 있다. 제군의 열정은 반드시 이러한 가정의 누습을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제군이 만일 가정사정을 운위(云爲)하고 그 결의를 천연(遷延)한다면 이는 청년다운 결단성을 결여(缺)한 자신의 무력함을 가정에 전가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제군은 그 같은 비굴한 청년이였던가.
반도는 이 같은 청년에게 황국신민으로서 일대비약을 하려는 중대한 책임을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의 노파심에 불과할 것을 나는 확신한다.
반도는 반드시 제군청년학도의 손으로 빛나는 황국신민의 광영을 완수할 것이다.
<출전 : 玄相允, 「學徒여 聖戰에 나서라-사(士)는 국지원기(國之元氣), 멸사구원(滅私久遠)의 생을 찾자」,'매일신보',
1943년 11월 11일>
35. 현영섭(玄永燮)
1) 역사창조의 날
천야도부(天野道夫)130)
북경(北京)의 영자지(英字誌) ‘북경크로니클’지는 최승희(崔承喜) 여사 래□시(來□時)에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일본인 무용가 최승희 운운’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최여사는 반도여성이지만 세계는 그녀를 일본인, 일본 부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예와 같이 우리 전 반도인은 황국신민이며 일본
130) 현영섭(玄永燮)의 창씨명.
국민이며, 일본인이다.
다시 일본민족의 일원이다. 고이소 총독은 최근 내선인은 함께 대화민족이라고 성명하였다.
현 시국에 있어서 우리 반도동포는 선배인 일본 동포에 지지 않게 국체의 본의에 □□하고, 신민의 직분을 지켜 황국을 수호하여 황도를 세계에 선양하고 천□을 □□하여 받들기 위하여 각별한 노력을 하여야 한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대어심을 봉대하고 황군의 일원이 되어 충□□무의 정신을 직접 □□에서 발휘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행히 이 길은 육군병지원제도에 의하여 열렸다. 이번의 징병제실시에 의하여 완전히 황민이 되었다.
또 황국병도 될 수 있다. 징병제도□□□□가 없기 때문에 동포는 오랫동안 면목이 없었는데, 이제 반도에서도 세계에 자랑할 일본의 신병(神兵)이 나오게 되었다.
실로 징병제실시는 조선통치사상 획기적인 일인데, 그 뿐만 아니라 반도의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는 것이므로 이에 의하여 조선은 신생되는 것이다.
내선동포가 함께 신무(神武)의 정신을 가지고 함께 □□에 서서 함께 조국을 위하여 피를 흘릴 때에 그 □□과 감격은 더욱 짙어가고, 내선일체□□ 즉 내선일민족의 □□이 □화되어 내선일체의 이상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조선사의 □□다. 조선사라고 하기보다는 새로운 일본의 역사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고 하니, 큐슈나 북해도의 역사는 일본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역사문제는 노력과 □□이 없이는 되지 않는다. 일체의 반도인이 자기들은 □□을□□하여 받드는 일억 일본 민족의 일원인 것을 참으로 자각하고, 다시 신분(身分) □위(□位) □□의 여하를 묻지 말고 일□하게 충의에 □하는 □□한 □□을 □□하고, 이후에 □□□ □력과 □수한 과학적 □□을 □분히 □□하여야만 반도인은 공영있는 황군의 일원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방 제일선에 정신하는 반도청년 뿐만 아니라 내선의 □□인 □가□ □□와 함께 □민□병의 □□□ 태평양전쟁의 □□□ □□□하고 □주의 생활□□에서 (4줄 판독불가) 이들 광영있는 □□일본의 신민으로 □□없는 생활□□을 □히 □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로 무엇보다도 먼저 진지한 국민연성이 요망된다.
<출전 : 天野道夫, 「歷史創造의 日」, '매일신보', 1943년 8월 2일>
36. 홍승원(洪承嫄)
1) 황은에 보답할 길
오늘 8월 1일 우리 반도에 징제가 실시됩니다. 이날은 우리 반도 남아들로서 황은에 직접 보답할 길이 새로 열린 감격의 날입니다.
우리 2천5백만 반도인은 이 징병제를 계기로 새로운 감격과 결실을 하였을 줄 압니다.
반도의 청소년 남아들은 직접 제일선에 서서 광휘있는 전투를 하게 되었으니까 명예의용사로서 끝까지 적을 격멸하고야마는 제국군인의 전통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 최대의 영광을 짊어진 이 시대의 반도 남아는 더욱 태어난 책무를 생각하고 실로 중대한 이 의무를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발휘하여 제국의 대동아공영권 확립에 불멸의 공을 세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 제국은 웅대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맹주로서 그 지도자로서 밤과 낮을 쉬지 않고 역사적인 백년대업을 완성하기에 진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반도의 남아들이 그 한나래가 되어 적 미영을 닥치는 대로 격멸하고 착착이 웅대한 대업을 진행시킨다는 것을 참으로 남아라고 하는 그 일□에 상부되는 바요.
성은에 꼭 보답하는 참 아름다운 모양이라고 생각됩니다. 한 번 부르심을 받은 반도 남아는 반드시 싸워 이기는 병성이라는 것을 세계에 알려 놓으십시다.
<출전 : 洪承嫄, 「皇恩에 보답할 길」, '매일신보', 1943년 7월 8일>
2) 목숨을 아끼지 말라 -세상에 나서 값있는 죽음을
특별지원병의 마감일자도 며칠 안 남았다.
너도 나도 다투어 지원하려는 열성에 마감이 되기 전에 거진 거진 지원하고 있는 장□는 마음 속 깊이 기□□□□아는 일이다.
11월 20일□□서는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일제히 지원하여 반도청년의 애국열을 표시하리라고 고생□□다. 재학 중의 학도들과 같이 금년 9월에 학교를 나온 청년들을 특별지원병의 길을 밟아 군문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쁜 일이다.
학교를 갓나온 청년이라고 해서 전쟁에 참가하여 싸우는 자격을 잊어버렸다고는 말릴 수 없다.
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더욱 나라를 위하여 앞서서 나가 싸울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학교를 한 몇 달 일찍 나온 선배나 재학 중인 모교의 후배가 서로다 돌아가며 지원하여 영예스런 군문으로 나가기 바란다.
아직도 지원하기를 주저하고 지원은 하였으나 마음이 명랑하지 못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죽음을 무서워하는 데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죽는 것, 사람은 나면서부터 죽기를 기약했다고 볼 수 있다.
언제 어느 시에 죽을 지는 모르지만 언제이고 죽을 것이다.
우리 여자의 생각으로도 전시에 있어서 일선에 나간다고 다 죽는 것도 아니고 총□에 나셨다고 다 지는 것은 아닐 줄 안다.
지금의 싸움은 비행기 싸움이기 때문에 전선이나 총후에 걸쳐 비행기가 날아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현상이다.
총후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우리 무적 황군의 은혜로 공습도 받지 않고 평안히 생활하고 있지만 언제든지 공습이 있
으리라는 각오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남자로 태어나서 나라를 위하여 용맹하게 싸우다가 목숨을 잃는 것은 값있는 일로 현명한 학도들은 잘 알고 있다.
대동아□□이 활발한 이후에 우리나라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있는데 다시 요즘 ‘부겐빌’도 근해의 대승점을 접하고 피끓는 청년은 ‘나도 한번 나가 싸우겠다’ 는 결의가 솟지 않느냐 말이다.
여자도 시집을 갈 때는 망하는 집으로 시집을 가지 말고 조금이라도 늘어나는 집에 시집을 가라고 했다.
태평양전쟁은 우리나라가 이기고 있는 전쟁이다.
설혹 우리나라가 불리하다 해도 청년은 조국을 위하여 더욱 □기 할 일이다.
그러나 반도의 남아는 행복하여서 대승리를 거듭하고 있는 전쟁에 참가할 영광을 이룬 것이다.
반도의 청년 학도가 일본의 황군을 □아에서 □□□때 미영을 쳐부수고 대동아에 여명이 되기를 바란다.
숱한 황군과 비하면 반도의 학도는 적은 수효지만 반드시 수가 많다고 강한 것은 아니다.
적은 수효지만 많은 수효 못지않게 용맹히 싸워주기 바란다. 황군과 같이만 싸워주기 바란다.
<출전 : 洪承嫄, 「목숨을 애껴말라-세상에 나서 값있는 죽음을」, '매일신보', 1943년 11월 17일>
37. 황신덕(黃信德)
1) 어머니의 책임 더 한층 중대
경성가정여숙(京城家庭女塾) 황신덕
경성가정여숙장 황신덕(黃信德)씨는 다음 같이 결의를 말한다.
우리 반도 여성들은 이번 태평양전쟁을 통하여 느끼고 배운 점이 많았지만 그중에도 중요한 무훈을 세우고 종용히 호국의 뜻으로 산화한 육군 장병이나 해군 장병의 그 과감 위대한 행동의 배후에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한 길마저 열린 해군특별지원병제 실시를 맞이한 우리는 이 제도가 가진 큰 뜻에 상부하도록 누구보다 먼저 어머니 중에서 이 제도와 취지를 잘인식하고 두고 두고 우리 기억에 새로워지는 아홉 군신(軍神)과 한번 나라를 위할진대 ‘죽음’을 생각지 않는 그러한 위인들을 길러내는 어머니가 되기에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출전 : 黃信德, 「어머니의 責任 더 한층 重大」, '매일신보', 1943년 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