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의 어느 날 아침, 전국 모든 SK 텔레콤 대리점 및 판매점 출입구 앞에 한 여자 연예인의 뒤태 사진이 일제히 내걸렸다. 일찌감치 출근길에 오른 수많은 남정네들은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에 심쿵의 해일이 일어났다. 그 한 장의 사진은 무명의 한 여자 아이돌 가수를 각중에 최고 스타 반열에 올려놓았다. 오래지 않아 사진이 속속 사라지는 사태가 일어났고, 본사에서 추가 배포를 거부하자 점주들은 부득이 사진을 점포 안으로 모시기에 이르렀다. 아마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연예인 사진 대량 절도사건이 아니었다 싶다.
우리 아파트 건너편에도 SK 텔레콤 판매점이 있는데, 길을 건너다 말고 웬 여자아이의 뒤태 사진을 보는 순간 이 늙은이의 가슴에서도 ‘두둥!’ 하고 동계(動悸)가 일었다. 어릴 때부터 수많은 여자 연예인을 보아왔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아이 사진 한 장에 훅 가기는 처음이라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나는 펄 시스터즈 이후 걸 그룹이라면 소녀시대밖에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사진의 주인공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누구한테 물어보기도 머슥하여 길을 건널 때마다 흘끔흘끔 곁눈질을 하는 게 가지였다.
때마침 작은애가 우리 두 내외의 손전화를 스마트폰으로 바꿔주겠다며 우장산역에 있는 SK 텔레콤 대리점으로 딜고 갔다. 나는 그때까지 2G 폴더폰을 쓰고 있었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아 새 전화로 바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얼마나 더 살거라고… 내 방의 컴퓨터와 TV를 얇은 것으로 바꿔줄 때도 그랬지만, 작은애는 내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그냥 웃으며 우리 내외를 마을버스에 태웠다. 버스에서 내려 SK 텔레콤 대리점 앞으로 가니, 거기도 예외 없이 그 여자애의 매혹적인 뒤태 사진이 내걸려 있었다.
“저 사진의 주인공이 누군가요?”
나는 아내와 작은애가 한참 전화기를 고르는 틈을 타서 대리점 직원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작은애나 아내가 들으면 쪽팔리니까.
“설현이라는 아이돌 가숩니다.”
설현? 궁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지만 더 물어보기도 민망한 일이라 꾹 눌러 참았다. 그때부터 설현이란 이름은 내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설현, 설현, 설현, 설현… 나는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속으로 백 번은 외웠다. 집에 돌아오는 즉시 인터넷을 뒤져보니 설현의 기사와 사진으로 온통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예 오락 프로를 즐겨 보는 편이 아닌지라 내가 TV에서 설현을 처음 보게 된 것은 한참 세월이 지난 뒤 우연히 김병만 족장이 이끄는 《정글의 법칙》에서였다. 막 TV를 켰을 때 마침 그 채널에서 《정글의 법칙》이 방영 중이었는데, 즐겨 보는 프로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돌리려던 참에 설현의 얼굴이 보이는 게 아닌가. 탐험대는 막 박쥐를 굽는 중이라고 했다.
설현은 입맛을 다시며 지글지글 익어가는 박쥐고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보통의 여자 아이돌이라면 ‘저런 걸 어떻게 먹어요!’ 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줄행랑을 치는 게 순리였다. 그러나 설현은 전혀 다른 사피엔스였다.
“언제 먹을 수 있어요?”
이윽고 병만 족장이 다 익은 박쥐고기를 나눠주자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몹시 시장했던 모양이었다. 설현에게서는 시종일관 내숭이나 겉치레는 약에 쓰려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설현은 현재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인기모델로서, 혼자서 연간 100억 원 이상의 광고수입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소속사는 처음 계약을 맺을 때 멤버들이 벌어들인 모든 수익은 전 멤버에게 똑같이 N분의 1씩 나눠주기로 했다. 언젠가 한 TV 오락 프로에서 사회자가 그 점에 대해, ‘혼자 번 돈인데 다른 멤버와 똑같이 나누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며 다분히 자극적인 질문을 던졌다. (TV 연예 오락 프로를 자주 보지 않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신문기사에서 읽었음. 이하 같음)
“그게 왜 억울해요? 제가 AOA가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광고에 나가지도 못했을텐데.”
사회자나 다른 출연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청자들의 치기 어린 호기심을 깨끗하게 불식시켜준 우문현답이었다. 마음에 없는 얘기가 아니라 진정성이 배어있는 반어법이었던 것이다.
나는 신문이든 TV든 광고를 좋아하지 않지만, 설현이 나오는 광고는 자세하게 읽어보거나 시청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요즘 TV에 나오는 클라우드 맥주 광고다. 맥주를 전혀 마시지 않으면서도 그 광고를 끝까지 지켜보는 이유는 설현의 매혹적인 미소와 환상적인 몸매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굿 바디’ 하는 그녀의 단 한 마디 멘트를 듣기 위해서다. 발음이 어눌하여 영어께나 하는 사람은 웃을 일이지만, 그 짧은 한 마디에는 꾸밈없는 순박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얼마나 매혹적으로 들리는지 다들 한 번 지켜보라. ‘굿 바디!’
설현은 TV에서 두 번 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는 리허설 도중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열심히 연습을 해서 자기보다 다 잘하는데, 춤도 노래도 실력이 달려 멤버들에게 누를 끼친다는 이유였다. TV 광고다 연예 프로 출연이다 해서, 설현은 다른 멤버들의 활동량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활동량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수입은 고스란히 N분의 1로 배분된다. 멤버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설현이 춤과 노래에서 다소 뒤처지더라도 다 이해해준다. (내가 볼 때는 춤도 노래도 최고 같기만 하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설현이야말로 진정한 광대정신의 소유자 아닌가!
두 번째는 역사의식 논란이 일면서였다. 한 케이블 TV 오락 프로에서 역사적 인물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알아맞히도록 한 문제를 출제했는데, 설현이 안중근 의사가 누군지 못 맞췄다는 것이다. 그걸 두고 인터넷에서 온갖 욕설이 난무한 모양이다. 설상가상으로 각 종편 채널에서도 그 문제를 제기하며 연예계에 문외한인 비전문가들이 패널로 등장하여 장시간 입방아를 찧어댔다. 설현은 즉시 자신의 SNS에 사과의 글을 올린 데 이어, 컴백 공연 얘기를 하러 TV에 나와서도 역사지식이 부족한 데 대해 눈물을 흘리며 사과부터 했다.
“앞으로 더 신중한 모습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 깃털처럼 가벼운 사회다. 안중근 의사 사진을 보고 누군지 못 맞힌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물론 바쁜 틈틈이 역사 공부를 하여 퀴즈 프로에 나올 때마다 막힘없이 맞춘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아이돌 그룹의 가장 큰 존재가치는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일이지 퀴즈프로 장원이 아니잖은가. 미국 고등학생의 60%가 초대 대통령이 누군지 몰라도 그 일로 욕을 먹는 일은 없다. 설현에게 그런 욕을 퍼부어댄 자들은 자신이 전공하지 않은 분야에까지 완벽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가? 전후 사정이야 어떠했든 설현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사과한 사실은 더없이 겸손하고 아름다운 자세다. 참으로 순수한 인간미가 넘치는, 좋아하지 않고는 도저히 배길 수 없는 아이다.
첫댓글 안중근의사를 모르는것은 전교조때문에 역사를 안배워 그럴걸세
직장생활할때 신입사원채용시 김구선생사진을 보여주고 누구냐 물으니 모른다하네
젊은이들 30세 이전시대는 우리와는 생각도 틀리고 사고방식이 전혀 틀리다네
나는 설현이가 누군지 모른다.
아~~
나도 울 일 생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