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에페 4,7-16
복 음 : 루카 13,1-9
1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동남아시아에 주로 분포하는 ‘네펜데스’라는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
이 꽃은 조롱박처럼 생긴 특이한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꽃과 완전히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주로 곤충을 잡아먹는 식충식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꽃이 움직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다른 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움직이지 못하는 꽃이 어떻게 움직이는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을까요?
꽃 입구에는 꿀 비슷한 액체가 묻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달콤한 냄새가 나기에 많은 벌레가 스스로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꿀 비슷한 액체를 먹는 순간, 여기에 들어있는 마취 성분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꽃 안쪽으로 미끄러지게 됩니다.
꽃은 이때 꽃 문을 닫고 독한 소화액을 내뿜어 곤충을 녹여서 소화한다고 하네요.
또 꽃 안에는 촘촘한 가시가 돋아있어 한 번 빠지면 절대로 빠져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꽃의 달콤한 유혹이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는
많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유혹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유혹은 왜 이렇게 달콤한지 모르겠습니다.
행복할 것 같고, 많은 이득을 얻을 것 같고,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받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보다는 순간의 만족에 그치고 말지요.
오히려 죄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해서 더 힘든 시간을 겪게 됩니다.
사람들이 총독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고 있는 갈릴래아 사람을 학살해서
제단에 그들의 피가 낭자했던 끔찍한 사건을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런데 끔찍한 변을 당한 갈릴래아 사람이 안 됐다는 동정보다도
그들의 사람들은 죄 때문에 이런 불행을 당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 죄의 값으로 받는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같은 죄를 지은 같은 동네 다른 갈릴래아 사람들이 무사했던 점을 들어서,
그리고 실로암 탑 공사로 죽은 사람 역시 도시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사람보다
악해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러면서 강조하시는 것은 회개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정의의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따라서 남의 죄를 탓하기보다는 자기 죄에 대한 참회의 기회로 삼고
회개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어서 전해주시는 쓸모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우리에게도 회개의 시간적 여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서둘러 회개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진정으로 주님께 향하는 회개의 삶을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으면 마지막 순간에 크게 후회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공동체 생활의 은혜
-감사, 회개, 사랑, 찬미-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모든 일이 잘되고 심신이 홀가분하니 꼭 부활한 느낌에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찬미와 감사의 시편 공동 전례기도가 더욱 고맙고 절실해집니다.
요즘 하루하루 삶이 좀 더 간절해지고 절실해지고 절박해지는 느낌입니다.
요즘 병원 치료를 통해 정성을 다하는 의료진의 모습이 깊이 마음에 감동으로 와닿습니다.
어제 저녁 시편 공동 전례기도 때 순간적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 찬미를 통해 살아있음을 실감했습니다. 살았을 때 찬미이지 죽으면 찬미도 못합니다.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찬미”임을 깨닫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촉발된 이런 깨달음은 그대로 회개로 직결됨을 봅니다.
찬미하라 연장되는 날입니다. 찬미와 더불어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날이 계속됨이 기뻤습니다. 찬미의 기쁨, 사랑의 기쁨, 사랑의 찬미입니다.
감사하라, 회개하라, 사랑하라, 찬미하라고 선사되는, 연장되는 하루하루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는 이들의 삶의 전부이고 보람이자 행복입니다.
살아있을 때, 감사와 회개, 사랑과 찬미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감사, 회개, 사랑, 찬미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얼마나 비본질적이고 헛된 데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지요.
이렇게 살아서 찬미하고 사랑할 수 있음이 참 기뻤습니다.
남은 세월 더욱 주님을 찬미하고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깊은 평화를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우리 마음 깊이에는 인과응보, 상선벌악 생각이 애초부터 잠재해 있음을 봅니다.
무슨 시련이나 불행한 일이 있을 때 순간 “왜?”라는 질문과 더불어
원인을 죄에서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의 잘못으로 벌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 미사 신청 시 주고받은 메시지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신부님, 아들의 친구 부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살, 세 살, 다섯 살, 세 아이를 남기고 갔습니다. 넘 맘이 아파 미사 열대 청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어떻게 사망했습니까?”
“자세한 것은 모르고 둘이 자살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보아오던 아이인데 지금은 눈물만 나네요.”
“그래도 그렇지, 어린아이 셋을 남겨 두고 자살이라니!”
“올해 자살한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원하는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체의 판단은 유보해야 합니다. 단지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표징으로 읽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라는 굵은 글자의 제목이 마음에 충격으로 와닿습니다.
빌라도가 죽인 사람들,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일체의 판단을 유보하고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촉구입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실로암 탑이 무너져 내린 경우도 예수님의 똑같은 말씀이 반복됩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후렴처럼 반복되는 말씀이 그대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죄가 없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은혜로 살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바로 회개의 절박성을 가르쳐 줍니다.
주인이 하느님이라면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이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회개가 절박한 우리들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내겠다는 주인에게 포도 재배인의 간청입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회개하라 연장되는 나날임을 깨닫습니다.
살았을 때 회개이지 죽으면 회개도, 사랑도, 찬미도, 감사도 없습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끊임없는 회개로 마음의 땅을 갈아엎고
기도와 말씀 실천을 통해 신망애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분발,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고립단절의 절망이 지옥입니다. 이래서 혼자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의 삶입니다.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혼자 고립단절의 절망이 자살에로 이끕니다.
혼자의 성장이 아니라 더불어의 성장이요, 혼자의 회개와 동시에 더불어의 회개도 절실합니다.
회개는 혼자의 외로움에서 더불어 풍요로움과 충만함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혼자의 고립단절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형제들은 고립단절 되어 홀로 있는 이들을 공동체에 합류시켜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치’에 대한 귀한 가르침을 줍니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생활을 통해 완성되는 회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주님께 깊이 결속함은 그대로 공동체에 결속됨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은총으로 각자의 직무를 수행할 때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도 성장합니다.
점차 직무에 충실하면서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 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진행되는 사랑의 성장입니다.
형제들의 끊임없는 회개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참으로 정교한 사랑의 유기체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회개는 이처럼 공동체에 깊이 합류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와 깊어지는 일치 중에 완성됩니다.
죄로부터 떠나는 회개만 있고,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와 합류의 일치가 없으면 회개는 반쪽입니다.
결코 외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와 당신과의 일치를 날로 깊이 해 주십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미국은 운전면허증으로 국내선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습니다.
운전면허증이 신분증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여권을 지니고 다니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번거로움이 없습니다.
내년 3월부터는 새로운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은 사람만이 비행기 탑승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새로운 운전면허증의 명칭은 ‘리얼 아이디(Real ID)’입니다.
성격이 급한 저는 새로운 운전면허증 발급을 위해서
3번이나 발급처를 방문하였지만 쉽게 발급받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기존의 면허증의 유효기간이 많이 남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서류가 미진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예약한 장소로 가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간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4번째 방문 만에 저도 새로운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신앙인의 범주는 다양합니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아직 복음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선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비자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결혼 성소를 가진 신앙인이 있습니다.
수도 성소를 가진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사제성소를 받는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이 말에만 머무는 사람이 있고, 믿음이 삶으로 드러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숙한 신앙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사람들의 속임수나 간교한 계략에서 나온 가르침의
온갖 풍랑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직분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그 소유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회개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바라보는 형은 아버지에게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비를 베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죄를 지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못해서 구원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금연을 한다고 말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 진정한 금연이 아닙니다.
회개는 인식의 전환이고, 인식의 전환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 이야기는 ‘자캐오’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났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가진 것의 절반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겠습니다.
제가 빌린 것이 있으면 4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본인의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성인 성녀들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욕심 때문에, 체면 때문에, 시기와 질투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비우는 사람이, 나누는 사람이, 먼 곳을 보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이라 할지라도 죽기를 바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악인이라고 해도 돌아서서 살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당신이 사랑하시는 신자들과 사제들을 위해서는 더욱 기다려 주시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더욱 바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기준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죄, 악,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의 중심이 ‘돈, 명예, 권력, 욕심’이었다면
내 삶의 중심을 ‘믿음, 사랑,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러니 넘어진 채 넘어진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넘어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반성이 아니며,
또한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죄를 용서받았기에 뉘우치는 것이요,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옴임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단순히 죄의 어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감이요,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옴'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르 1,15; 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입니다.
비유 속의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오,
또한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 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시고 돌보시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조욱현 토마스 신부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하였는데,
그 죽은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지 못하면 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항상 회개하여 그에 맞갖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신다.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포도원 안에 심었다.
그리고는 열매를 맺었는지 해마다 살펴보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자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한다.
3년이면 무화과나무가 성숙한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을 만한 시간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잘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땅만 차지하고 영양분만 없애며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하는 나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받는 것보다는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정 무엇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체험이 생활 속에 어느 정도 되고 있는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더 그냥 두시지요.”(8절).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 재배인은 아드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1요한 2,1)이시며, 우리를 가꾸시는 정원사시다.
끊임없이 해로운 것들을 잘라내시고 거룩한 씨앗들로 우리를 채우시어
당신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 하느님께 이렇게 기다려 주시기를 청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가 나에게 계속 허락될 것이라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제 진정 주님과 이웃을 위해, 그리고 나의 구원의 결실을 위해
보람 있는 많은 결실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가 심어진 자리에는 아마 다른 나무로 교체될 수도 있다.
아주 열매를 잘 맺는 나무가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주실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거기서 맺는 열매로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 이다.’, ‘마음이 흔들비쭉이다.’,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이라거나 ‘똥누러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
‘마음처럼 간사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본마음과는 다르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돌려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2).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루카13,5).하고 말씀하십니다.
에제키엘서에는
“주 하느님의 말이다. 너희는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에제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3,9).라고 말씀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야고4,8)하고 말씀하십니다.
묵시록은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묵시2,5).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쳐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루카13,6-9)를 보면
포도원지기는 3년이나 기다렸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내려는 주인에게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하고 사정합니다.
마지막 가능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무화과나무가 베어질 운명입니다.
이제 ‘올 한 해’ 동안에 결말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죽음이 유보된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올 한 해’가 소중합니다.
아니 유보된 지금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멸망과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를 잘 써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매를 맺어도
그것이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 주님의 마음에 드는 변화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주인의 마음에 드는 열매가 중요합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요,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시고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포도원지기인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아직 참아 달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유되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수고요, 땀입니다.
그의 노력을 헛되이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믿으십시오! 약속하십시오! 치유 받으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지난 10월 9일 바티칸 광장에서는
저희 살레시오회 아르테미테 자티 수사님(1880~1951)의 시성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저희 수도회로서는 너무나 큰 기쁨이고 영광인 행사였습니다.
저희 수도회 안에서 평수사로서는 첫 번째 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너무나 기쁘고 감격하신 저희 살레시오회 앙헬 페르난데스 총장 신부님께서는
전 세계 총 1500여 명의 살레시오회 수사들에게 모든 체류비며 항공료까지 제공하며
시성식에 초대하셨는데, 총 600명의 살레시오 수사들이 바티칸에 도착했습니다.
자티 수사님의 성소 여정을 참으로 특별합니다.
19살 되던 해 청년 자티는 살레시오회 양성소에 입회합니다.
사제 지망 수련자로 양성을 받고 있던 어느 날,
당시로서는 치명적이던 결핵에 걸린 살레시오 사제 한 명이
공동체에 치료차 오게 되었습니다.
원장 신부는 자티 수련자에게 그의 치료를 돕도록 제안했습니다.
제대로 된 방역 조치도 없이 간호하던 중 자티마저 감염되고 말았습니다.
자티가 간호하던 젊은 사제는 1902년 1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티는 치료를 위해 비에드마의 살레시오 공동체로 옮겨와
치료와 수도 생활을 병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비에드마 공동체는 병원과 약국을 갖춘 유일한 공동체였습니다.
자티 수련자가 비에드마 살레시오 공동체에 도착했을 때,
의사였던 가로네 신부는 그를 공동체 성당 내 도움이신
마리아 제단으로 안내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으십시오! 약속하십시오! 치유 받으십시오!”
“자티 수련자 형제, 형제가 건강을 회복한다면
환자들을 돌보는 데 여생을 바치겠다고 약속하십시오.
그러면 도움이신 성모님과 돈보스코의 축복으로
건강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한 달 후면 건강이 좋아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가로네 신부의 예언대로 자티 수련자는
2년간의 치료 끝에 극심했던 기침과 각혈이 멈췄습니다.
마침내 1908년 8월 1일 자티 수련자는 무려 8년간의 기다림 끝에
살레시오 회원으로 첫 서원을 하게 됩니다.
가로네 신부와의 약속에 따라 자티 수사는 사제 지망의 꿈을 접습니다.
신학공부를 그만두고 병원장 신부를 돕기 시작합니다.
1911년 병원장 신부가 세상을 떠나자 자티 수사는
성 프란치스코 약국과 성 주세페 병원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자티 수사의 증언입니다.
“제가 병에서 회복되어 이웃들에게 조금이라도 선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가로네 신부님 덕분입니다,
그분의 도움이신 성모님에 대한 신심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마리아께서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그분을 도왔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저는 마리아를 믿었습니다.
저는 약속했습니다.
항상 이웃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던 것이
저의 열망이었기 때문에 저는 서약했습니다.
저는 치유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종의 말을 들어주셨기에 저는 치유되었습니다.”
(유명일 신부, ‘믿었습니다, 약속했습니다. 치유받았습니다!’ 살레시오 가족 2022년 11월호 참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