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용서의 대명사인 한국의 손양원 목사님의 동상을 세우는 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여수노회와 손양원기념사업회와의 논란이 계속되어 왔었습니다. 여수노회는 총회의 결의에 의해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 순교유적지 공원에 동상 건립을 추진하려 했고 기념사업회는 동상 건립은 신사참배와 우상숭배를 순교적 각오로 반대한 손양원 목사의 신앙과 생애에 결코 부합하지 않은 일이며 그 분의 신앙과 순교 정신을 계승하고 널리 알리되 동상과 같은 상징물 건립은 삼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손양원 목사의 딸인 손동희 권사도 동상 건립을 반대했습니다.
예장통합 총회는 지난 해 96회 총회에서 여수세계박람회를 겨냥해 순교 기념탑 건립 계획을 발표했으나 일부 목회자들이 반대하면서 백지화 되었다가 올 해 97회 총회에서 손양원 기념탑 사업을 또 다시 연장하고 동상 건립의 경우 유적지 공원이 위치한 여수노회에 맡기기로 결의했었습니다. 여수노회에서는 손양원 목사의 동상 건립은 그 분을 기념하려는 의도이며 또 동상 건립이 우상화 의도가 있거나 실제 우상으로 섬겨야 우상이 아니냐며 동상을 세우는 일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목회자의 반대와 또 기념사업회의 반발에 여수노회는 지난 11월 6일 임시노회를 열어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동상 건립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누구입니까? 사랑의 원자탄, 사랑의 성자라 불리는 손양원목사님은 1902년 경남에서 태어나 장로였던 부친을 따라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애양원교회에서 한센병자들과 함께 기거하며 순교할 때까지 평생을 사랑의 사도로 살아갔습니다.
어린 나이인 공립보통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동방요배를 강요하자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며 단호히 거절하다 퇴학 처분을 받게 됩니다. 그의 이런 신앙의 절개는 어른이 되고 목사가 된 후에도 신사참배가 우상 숭배라며 단호히 참배를 거부하다 옥에 갇히며 온갖 고문과 핍박과 함께 회유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킵니다. 이것이 기념사업회가 동상을 세우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해방이 되고 6년여 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애양원교회로 돌아와 목회를 하던 중 1948년에 여수 순천 사건이 터집니다. 이 사건으로 순천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첫 아들 동인과 둘째 아들 동신이 공산당을 추종하던 급우 안재선을 비롯한 동료에게 총살을 당하고 맙니다. 이후 반란이 진압되고 자신의 아들들을 죽였던 안재선이 총살을 받게 되자 계엄사령관을 찾아가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용서하며 심지어 양아들로 입양하여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과 용서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1950년 6.25사변이 터져 여수 애양원에까지 공산군들이 쳐들어 왔을 때 피난을 가자는 재직들의 손을 뿌리치고 교회를 지키다 9월 28일 공산당의 손에 의해 생을 마감하며 순교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손양원목사님은 평생을 한센병 환자들과 더불어 살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했으며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셨습니다.다.
한 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됩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대답을 하시기도 전에 아주 자랑스럽게 그리고 예수님께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 일곱 번까지 하면 됩니까? 하고 자문자답했습니다. 율법에서는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세 번의 곱절하고도 한 번 더인 일곱 번까지 용서하냐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일곱 번은 완전 수입니다. 베드로 생각에 일곱 번 정도면 완전하게 용서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일곱 번 용서해 주게 되면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에서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일곱 번씩 서로 용서한다면 벌써 이 세상은 싸움과 전쟁이 없는 지상의 낙원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일곱 번은 고사하고 한 번도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했으면 옛 어른들은 참을 인(忍)자가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겠습니까? 세 번 용서하면 살인까지 안 하게 되는데 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면 이 세상에 싸우고 다투는 일들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칭찬하시기는 커녕 오히려 용서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완전한 용서에 대해 바르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인간은 완전한 용서를 할 수가 없다. 완전한 용서란 오직 신이신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70 곱하기 7, 즉 490번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무한한 용서를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서는 완전한 용서가 아니라 무한한 용서입니다.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계속 용서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용서입니다.
그렇다면 무한한 용서는 과연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무한한 용서는 인간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무한한 용서는 커녕 단 한 번의 용서도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용서하시고 또한 무한하신 사랑으로 우리들의 죄들을 지금도 용서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그 참혹한 십자가 위에서도 우리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지금도 무한한 용서를 행하신다는 사실을 내 자신이 체험할 때만이 우리들도 이웃을 향하여 그러한 무한한 용서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손양원 목사님께서 하신 용서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행하여 주신 완전한 용서와 사랑을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나 자신 스스로 체험하면서, 손양원목사님이 행하신 무한한 용서와 사랑을 단순히 동상을 만들어 입으로만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느끼면서, 이제 우리들도 우리 주변에 아직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을 베풀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한한 용서와 사랑을 입으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써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