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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5 주일낮설교 / 청주, 충만교회 민창근 목사
살전 5:18, 감사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오늘 말씀
창세기 처음부터 하나님께 감사가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에게서부터 나오는 것이 추수감사입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감사하였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한 배경에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이 똑같이 감사의 제사를 드렸어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있는 삶입니다.
믿음의 감사 제사는 정성이 들어있으며, 삶이 녹아져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있는 제사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페이스북에서 감동받은 글로 올려진 두 개의 글을 소개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는 삶, 감사하는 삶을 살자는 뜻을 전하려 합니다.
감사는 스스로도 깨닫고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보며 배울 수도 있고,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울었습니다.
이들과 비교해보며 감사가 저절로 나왔고, 저의 삶의 이야기와 꿈(비전)과 관계가 되어 펑펑 울었습니다. 들어보세요.
(예1) 외로운 천사
어제는 어느 선배님을 만나 사람의 등급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그 선배님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설악산 지게꾼인 임기종씨인데, TV에도 몇 차례 나왔다고 했습니다.
TV를 잘 보지 않는 저는 “그 분이 누구인데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40년이 넘도록 설악산에서 지게질만 한 지게꾼이고, 키가 160cm도 되지 않고, 몸무게는 60kg도 나가지 않고, 머리숱은 듬성듬성하고, 이빨은 거의 빠지거나 삭아서 발음까지 어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지게질을 시작한 이후 40년간 오직 설악산에서 짐을 져 나르고 있고, 그 삯을 받아서 정신지체 2급의 아내와 그 아내보다 더 심각한 정신장애를 가진 아들을 부양하고 사는 산 사나이라 했습니다.
맨 몸으로 걸어도 힘든 산길을 40kg이 넘는 짐을 지고 날마다 산을 오르는 임기종씨. 하루에 적게는 4번, 많게는 12번이나 설악산을 오르는 사람입니다.
설악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상인들과 사찰에 필요한 생필품을 져다주고 그가 받는 삯이 한 달에 150만 원 남짓이라고 했습니다.
한 달에 150만원. 누구에게는 이 돈이 별 것 아닌 돈일지 몰라도 그는 충분한 돈이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장애인이라 정부로부터 생활 보조비를 받기 때문에 부족한 가운데서도 생활이 가능하고, 술 담배를 안 하고 허튼 곳에 돈을 쓰지 않으니 먹고 사는데 불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낱 지게꾼에 불과한 그를 많은 사람들이 작은 거인이라고 칭송하는 까닭은 그가 그렇게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십년이 넘도록 장애인 학교와 장애인 요양시설에 생필품을 지원하고, 독거노인들을 보살피고,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자신이 번 돈 모두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임기종씨가 그렇게 사용한 돈만 수천 만 원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힘들게 일을 하지만 적어도 땀 흘려서 번 돈, 돈 만큼은 내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임기종씨의 이 말에 저는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던지요.
연봉이 수억이네 수십억이네 하는 사람들도 하기 힘든 것이 남을 돕는 일인데 날마다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을 오롯이 남을 위해 사용하는 그의 선한 마음이 한없이 존경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마다 산을 오릅니다. 자신이 지게를 짊어지지 않으면 휴게소 상인들이 장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날은 가스통을 4개나 짊어지고 산을 오르기도 하고, 어떤 날은 100kg이 넘는 대형 냉장고를 통째로 짊어지고 산을 오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지게를 지는 요령을 몰라 작대기를 짚고 일어서다가 넘어지기 일쑤였습니다. 너무 힘들어 몇 번이나 그만둘 생각도 했죠. 하지만 배운 게 없고 다른 재주가 없으니 육체일 밖에 할 것이 없었어요. 그때는 내 몸뚱이 하나 살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거든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설악산을 오르니 이 세상에 나보다 설악산을 더 많이 오른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매일 오르지만 지겹다는 마음은 전혀 없어요.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철마다 설악산의 풍경은 바뀌니까요. 그러니 고맙지요.”
그는 조실부모했습니다. 열 살이 갓 넘었을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원체 가난한 집안이었기에 남겨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6남매의 셋째였습니다. 그렇게 남겨진 6남매는 제각기 자기 입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도 못 마친 그는 남의 집 머슴살이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돌고 돌아 설악산 지게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한 지게꾼 선배로부터 정신지체 2급에다 걸음걸이도 불편한 여성을 소개받았습니다.
그 선배는 “이런 여자는 자네와 살림을 살아도 결코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며 그에게 소개를 했습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의 아내는 일곱 살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여자를 소개해준 것은 내가 별 볼일 없어서 그랬겠지만, 어쨌든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에 어찌나 애처롭던지요. 저런 몸이니 그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구박을 받았을까 싶어서 따지지 않고 내가 돌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와 정상적인 대화가 되지 않으니 많이 답답하기는 하지만 그것조차도 자신의 팔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돌보지 않으면 그의 아내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끝까지 그녀를 돌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말을 못했고 아내보다 더 심각한 정신장애 증세를 보였습니다. 아내가 정신장애를 겪고 있으니 그 아이의 뒤치다꺼리를 하려면 자신이 일을 그만둬야 했는데 그럴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결국 아이를 강릉에 있는 어느 시설에 맡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이를 데려다 주고 떠나오는데 그는 ‘나만 편하려고 그랬다’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용달차에 과자 20만원어치를 싣고서 다시 발길을 돌려 시설로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과자를 먹으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니 자신이 훨씬 더 기뻤답니다.
그때 처음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그 사람만 기쁜 것이 아니라 자신도 기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임기종씨는 지게일로 번 돈 모두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40년 동안 설악산을 오르락내리락 하였지만, 설악산 말고 다른 산에는 여태껏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임기종씨.
옛날 어느 전설에 하늘에서 천사가 설악산에 목욕하러 내려왔다가
미처 올라가지 못한 천사 한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임기종씨가 아닌가 싶습니다.
있는 것이 부족하다며 늘 더 가지려고 바동거리며 사는 우리.
남의 입에 있는 것도 뺏어 먹으려고 하는 우리.
배 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우리.
이고지고 갈 것도 아닌데 우리는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놀고, 너무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2) 이조참판(吏曹參判) '고유' '高裕'와 정부인박씨 (貞夫人朴氏)
조선 19대 왕인 숙종 대왕 때의 일입니다.
아직 나이가 스물이 되지 않고 허름한 옷차림을 한 젊은 청년이 경상도 밀양 땅에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高裕(고유)'입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고경명'의 현손(손자의 손자 / 후손)이었지만 부모를 어린 나이에 여의고, 친족들의 도움도 받지 못해 외롭게 떠도는 입장이었습니다.
밀양 땅에 이르러서는 생계를 위해서 남의 집 머슴을 살게 되었습니다.
비록 머슴살이를 살고 있고, 학문이 짧아서 무식하였지만 사람됨이 신실(信實) 하였고, 언변에 신중(愼重) 하고, 인격이 고매(높고 뛰어남)하였으므로 대하는 사람마다 그를 존중하여 주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고도령" 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박 좌수'라 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박 좌수'는 관청을 돕는 아전들의 우두머리였지만 박봉이었고, 중년 나이에 상처를 한 후에 가세가 매우 구차하였는데 효성스런 딸 하나가 있어 정성껏 아버님을 모셨으므로 가난한 가운데도 따뜻한 밥을 먹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고유'는 그 마을에서 달을 넘기고 해를 보내는 가운데 어느덧 그 처녀의 효성과 현숙한 소문을 듣게 되고 먼발치로 보고 그 처녀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처녀에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내 처지가 이러하거늘 그 처녀가 나를 생각해 줄까? 그 처녀와 일생을 더불어 산다면 참 행복할 텐데! 벌써 많은 혼사가 오간다고 하는데, 한 번 뜻이나 전해보자. 그래, 부딪혀 보자고!'
그러던 노을이 곱게 밀려드는 어느 날에 '고유'는 하루의 일을 마치고 '박 좌수'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본래 '박 좌수'는 장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장기판부터 벌려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실없는 말처럼 그러나 젊은 가슴을 긴장시키며 품었던 말을 꺼냈습니다.
“좌수 어른, 장기를 그냥 두는 것보다는 무슨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자네가 그 웬 말인가? 듣던 중 반갑구먼. 그래 무엇을 내기하려나?”
좌수는 이웃집에서 빚어 파는 막걸리나 파전을 내기라도 하자는 건가 생각하며 웃어 넘겼습니다.
“이왕 할 바에는 좀 큼직한 내기를 합시다. 이러면 어떨까요? 제가 지거든 좌수댁의 머슴살이를 삼년 살기로 하고, 좌수님이 지거든 내가 좌수님 사위가 되기로요!”
'박 좌수'는 그제서야 '고유'의 말이 뼈가 있는 말임을 알았습니다.
“에끼 사람아! 금옥 같은 딸을 자네 같은 머슴꾼에게 주겠는가? 어찌 자네 따위나 주려고 빗발치는 청혼을 물리치고 스무 해를 키웠다던가?”
'고유'는 '박 좌수'에게 무안을 당하고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고유'가 돌아간 뒤에 '박 좌수'와 '고유'가 말다툼하는 것을 방에서 듣게 된 딸이 물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뭣 때문에 고도령을 그렇게 나무라셨습니까?”
“그 군정(강제로 병역이나 노역 따위의 부역에 종사하는 장정)이 글쎄 나더러 자기를 사위로 삼으라는구나. 그래서 내가 무안을 줘서 보냈다.”
‘박 좌수'는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하면서 딸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버님, 그이가 어때서 그래요? 지금은 비록 빈천하나, 본래는 명문 사족이었고 또 사람이 듬직하고 그렇게 성실한 걸요.”
오히려 '박 좌수'의 딸은 처녀의 수줍음 탓에 얼굴은 불그레해졌지만 얼굴 두 눈에 가득히 좌수를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와서 좌수에게 혼인을 지내도록 하라고 권하여 마지않았습니다. 마치 자신들 집안의 일인 양 우겨대자 좌수도 반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물 한사발 떠 놓고 젊은 청년과 처녀의 혼례가 이루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모은 돈으로 술동이를 받아 놓고 고기와 과일을 먹고 마시며 그들 한 쌍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화촉동방의 밤은 깊어지고 '고유'와 신부는 촛불 아래서 부부의 연인 초야를 치루었습니다.
'고유'는 가난하였으나 행복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색시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꿈같은 말이 아니었다.
“서방님! 글을 아시나요?”
“부끄러우나 배우지 못했소.”
“글을 모르시면 어떻하시나요? 대장부가 글을 알지 못하면 삼한 갑족이라도 공명을 얻을 길이 없는 법입니다.”
색시는 고유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앞으로 십년 작정을 해서 서로 이별하여 당신은 글을 배워서 과거에 오르기로 하고 첩은 길삼을 하여 세간을 모으도록 해요. 그렇게 한 뒤에도 우리들의 나이가 삼십이 되지 않으므로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닙니다. 우리 부부가 헤어지는 것은 쓰라리지만 훗날을 위해 고생하기로 해요.”
색시는 '고유'의 품에 안기어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습니다. '고유'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색시의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긴 세월 접어두었던 학문의 길을 깨우쳐 주는 색시가 어찌 그리도 사랑스러운지!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입니다.
아직도 동이 트지 않은 새벽녘에 '고유'는. 짧은 첫날밤이 새자 아내가 싸준 다섯 필 베를 짊어지고 입지 출관향(立志出關鄕)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떠나서 어느 시장에서 베를 팔아 돈으로 바꾸고 스승을 찾았다.
돈을 아끼려고 남의 집 처마 밑에서도 자고, 빈 사당 아래서도 밤을 새워가면서 스승을 찾아 발길은 합천 땅에 이르렀습니다.
고유는 인품과 학문이 높아 보이는 듯한 사람에게 예를 올리고 글을 가르쳐 주십사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린 학동들과 함께 천자문을 처음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 시작 했으나, 오륙 년이 지난 후에는 놀라움 속에서 '고유'의 글은 실로 대성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스승도 탄복하면서 칭찬을 하였습니다.
“네 뜻이 강철처럼 굳더니 이제는 학문이 일취월장하였구나! 너의 글이 그만 하면 족히 과장에서 독보할만하다. 나로서는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올라가서 과거나 보도록 하여라.”
'고유'는 그동안의 신세를 깊이 감사하며 그곳을 물러나서는 해인사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방 한 칸을 빌린 다음 사정을 말하여 밥을 얻어먹으면서 상투를 매어 달고 다리를 찌르며 글을 익혔습니다.
어느 해,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숙종대왕이 정시를 보이라는 영을 내렸습니다. 뜻은 헛되는 법이 없었습니다.
'고유'는 처음 치루는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였습니다.
그 후에 '고유'는 조정에서 왕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왕을 가까이 모시던 어느 날, 소나기가 쏟아져서 처마에 그 소리가 요란하였기에 왕은 대신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숙종은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신료들 소리가 빗방울 소리에 방해되어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그것을 고유는 초지에 받아쓰기를, '처마에서 나는 빗방울의 소리가 귓가에 어지러우니 의당 상감께 아뢰는 말은 크게 높여라.' 하니 주서들이 모두 글 잘 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왕은 쓴 글을 가져오라 하여 본 다음에 크게 기뻐하여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의 자손이냐?”
“신은 제봉 고경명의 현손이옵니다.”
“허! 충성된 제봉이 손자도 잘 두었군. 그래 고향 부모께서는 강령 하시더냐?”
“일찍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그럼, 처자가 있겠구나.”
“예, 있사옵니다.”
그날 밤, 숙종대왕은 '고유'를 따로 불러서 그의 사연을 사적으로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고유'는 감히 기망할 수가 없어서 떠돌아다니다 밀양 어느 마을 에서 머슴을 살게 된 이야기며, 거기서 장가를 들었고, 첫날밤에 아내와 약속을 하고 집을 떠나서 10년 동안 공부를 한 그의 이력을 모두 아룄습니다.
“허허! 그러면 10년 한정이 다 되었으니 너의 아내도 알겠구나.”
“모를 줄 믿사옵니다. 과거에 오른 지가 며칠이 안되어 아직 통지를 못했습니다.”
“음, 그래?”
왕은 그 자리에서 이조판서를 불러들여 현 밀양부사를 다른 고을로 옮기고 '고유'로 밀양부사를 임명하라고 분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유를 바라보면서, “이제 내가 너를 밀양 땅으로 보내니 옛날 살던 마을에 가서 아내를 만나되 과객처럼 차리고 가서 아내의 마음을 떠 봐라. 과연 수절하며 기다리고 있는지, 변심을 했는지 그 뒷이야기가 나도 궁금하구나!”
'고유'는 부복 사은하고 물러나왔습니다.
그는 왕이 명한대로 하인들은 도중에 떼어놓고 홀몸으로 허술하게 차린 다음에 옛 마을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집터에는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고 사람의 그림자도 없이 버려진지 수년의 세월이 지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고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못 믿을 것이 여심이 라던가? 첫날밤에 맺은 굳은 언약이 가슴속에 사무치건만.”
마침 가까이 소를 끌고 가는 노인을 보고 '박 좌수' 집 형편을 물으니 그가 '고유'인 줄은 못 알아보고는 늙은이는 아는 대로 일러 주었습니다.
“박 좌수 어른이요? 그러니까 그것이 3년 전이었군요. 병으로 죽었지요. 그에겐 딸이 하나 있지요. 벌써 10년 전에 이 마을에서 머슴을 살았던 고도령에게 시집을 갔는데 첫날밤에 신랑이 자취를 감추어 버려 혼자되었지만, 신기하게도 첫날 초야에 아들이 하나 생겼어요. 참 똑똑하지요. 그 여자는 현숙하고도 어찌나 부지런했던지, 남편이 없었는데도 크게 가산을 일으키더니 땅과 살림이 무수하고 건너편 산 밑에 백여 호가 넘는 대촌을 이루어 놓았어요.”
'고유'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가산을 이뤄놓은 사실이 아니라, 사랑의 언약을 지키면서 자신을 기다려줬다는 사실 때문에!
'고유'는 노인에게 사례하고 자신을 따른 군속들에게는 주막에서 대기하도록 했습니다.
어슥어슥 어둠이 마을을 감싸올 무렵에,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제일 큰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구걸하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얻어먹는 인생이 한 그릇 밥을 바라고 왔소이다.”
사랑방에서 늙은 스승한테 글을 배우고 있던 소년이 그 소리를 듣고 나왔습니다.
“들어오세요. 손님.”
'고유'는 그가 아들인줄 알면서도 짐짓 '아니 처마밑에서라도 좋네.' 라고 하였습니다.
“아니, 올라 오세오. 우리집에서는 과객을 절대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굳이 올라오라 하므로 못이기는 체 올라가 웃목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저 그런데 손님의 성씨는 무엇인지요?”
“허, 비렁뱅이에게 무슨 성이 있나, 남들은 고가라 하지만.”
그러자 소년의 눈이 더욱 빛났습니다.
“저, 그럼 손님 처가의 성씨는요?”
“10년 전에 장가들어 첫날밤을 지내고는 헤어졌으니, 무슨 처가랄 것이 있을까? 그 댁호야 박 좌수댁 이었지만...”
그때 박씨 부인이 사랑에 과객이 들었는데 성이 고씨라고 하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아들이 나왔습니다.
아들의 눈은 기쁨과 설렘으로 어머니의 눈빛을 확인하였습니다. 박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들 손을 잡고 사랑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비록 10년을 떠나 살았지만 한 눈에 알 수 있는 남편이라 기쁜 나머지 반가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래 그리던 회포에 쌓인 이야기를 꺼내 놓으며 열 살 먹은 아들을 인사시켰습니다. '고유'는 그 아들 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전히 힘없는 소리로 그의 그간 지난 일을 꾸며댔습니다.
“그렇게 집을 떠나서는 뜻을 이루어보려 하였으나, 운수가 사나워서 베를 판돈은 도적을 만나 빼앗겨 버리고, 이리저리 유랑 걸식하여 다니자니 글을 배울 힘도 나지 않았거니와, 서당이 있어 글을 배우려 해도 돈이 없으니 가르쳐 주려는 사람도 없었소. 세월만 허비하고는 글은 한 자도 배우지 못하고 이렇게 비렁뱅이가 되었소.”
그러나 부인은 조금도 원망하거나 민망해 하는 빛이 없이 사람의 궁달(가난함과 부귀함)은 모두 운수에 있다고 하면서 그가 벼로도 수천 석 추수를 장만해 놓았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좋은 의복과 음식을 들여 놓으면서 도리어 남편을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고유'는 음식상을 앞에 두고 부인이 주는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의 눈길에 남편의 겉옷이 거렁뱅이 옷차림이지만 속옷은 새하얗고 께끗하였으며, 허리춤에는 관리들이 차는 명패가 흔들거리고 있었으니 놀랐습니다.
“서방님! 사실대로 말씀 해 주십시오.”
“나와 동행하던 사람이 있으니, 그들도 불러들여 함께 먹어야 하겠소.”
부인이 하인을 시켜 그 사람을 사랑방으로 모셔들이라 하였습니다.
하인이 나가서 문 밖에 서있는 과객을 보고 들어가시자고 하자, 그는 들은 척도 않고 대로에 나가더니 품에서 호적(신호로 부는 피리)을 꺼내어서 높이 불었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십 명의 관속들이 달려와 안으로 들어가서는 도열하였습니다. 그리고 박씨 부인을 향해 문안 인사를 아뢰고 야단이었다. 문밖에 서있던 과객은 '고유'의 지시를 받은 군관이었습니다.
'고유'는 그제서야 박씨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의 사연을 들은 상감마마께서 지시한 것이라오. 당신의 마음을 떠보려고 한 것이 결코 고의가 아니었소.”
군속이 관복을 가져오니 갈아입고 박씨 부인 앞에 당당하게 선 남편을 본 부인의 기쁨은 어떠하였으랴!
그 이튿날부터 3일간 크게 잔치를 베풀어 동리의 남녀노소를 청하여 실컷 먹였습니다.
박씨 부인은 그동안 모아놓은 전답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글을 깨우쳐 주신 서당의 스승과 해인사 스님들에게도 많은 보은의 폐백을 보냈음은 물론입니다.
'고유'는 얼마 안 있어 벼슬이 경상감사에 올랐다가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니, 숙종과 영조, 정조 등 3대를 모시면서 영화로움이 말할 것도 없고, 부인도 나라에서 지정한 '정부인'이 되어 늦도록 복록을 누렸다고 합니다.
⇒ 이런 삶이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누는 삶의 자세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꾸준히, 평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동을 드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정성이 들어있고, 삶이 아름답게 녹아져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감사의 제사가 됩니다.
아름다운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삶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