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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시편 68(67),8-9 참조
하느님, 당신 백성에 앞장서 나아가실 제, 그들 가운데 사시며 길을 열어 주실 제, 땅은 흔들리고 하늘은 물이 되어 쏟아졌나이다. 알렐루야.
본기도
하느님,
저희를 구원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시니
저희가 주님의 부활을 전하며
영원히 기뻐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고, 회당에서 토론을 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8,1-8
그 무렵 1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2 거기에서 그는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라는 어떤 유다인을 만났다.
아퀼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자기 아내 프리스킬라와 함께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는데,
3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4 바오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5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다.
6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7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 티티우스 유스투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다. 그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8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다.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다른 많은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시편 98(97),1.2-3ㄱㄴ.3ㄷㄹ-4(◎ 2 참조)
◎ 주님은 당신 구원을 민족들의 눈앞에 드러내셨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복음 환호송요한 14,18; 16,22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라.
◎ 알렐루야.
복음<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6-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이 제물과 함께 바치는 저희 기도를 받아들이시고
저희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저희를 구원하신 이 큰 사랑의 성사에
언제나 맞갖은 삶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마태 28,20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찾아 주시니
구원을 이루는 이 양식의 힘으로
파스카 신비의 은혜를 저희 안에 가득 채워 주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는 “조금 있으면”(그리스 말 ‘미크론’)이라는 낱말이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심판(호세 1,4; 이사 10,25; 예레 51,33 참조)이나 구원(이사 29,17 참조)의 때가 가까웠음을 예고할 때 쓰던 고유한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도 이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때가 가까웠음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두 번의 “조금”의 시간은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지내는 하루 남짓한 시간과, 죽음부터 부활까지 그분을 볼 수 없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 “조금”의 시간에 제자들은 엄청난 일을 겪습니다. 바로 주님과의 이별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붙잡히신 주님을 배신하고 외면한 일, 주님의 수난과 죽음, 슬픔과 후회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조금”의 시간 동안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마주할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을 아셨기에, 앞으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며 누리게 될 큰 기쁨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의 한평생은 그날의 제자들이 살았던 그 “조금”의 시간과도 같습니다. 슬픔과 기쁨, 불확신과 굳은 믿음 사이를 쉼 없이 오가는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바오로의 코린토 선교 여정이 말하여 주듯, 실패한 듯 보이는 일에서도 승리와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신뢰하면서(제1독서 참조) 희망 속에서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제게는 유학 시절에 만난 폴란드인 친구 신부가 있습니다. 방학이 되면 가끔 그 친구 신부의 고향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다 주일이 되면 그곳 본당에 가서 신자들과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 신부가 미사를 주례하기만 하면 신기하게도 미사가 생기가 넘치고 즐거운 잔치가 되었습니다.
비결은 간단하였습니다. 미사 시작 때 한 번, 강론에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견에서 다시 한번 신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폴란드 말이어서 무슨 이야기로 신자들을 그렇게 웃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미사에 참석한 모든 신자가 그 신부의 이야기에 큰 소리로 웃는 장면은 낯설면서도 참 보기 좋았습니다.
오늘은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입니다. 필립보 네리 사제는 청소년들을 위한 활동과 고해 사제로 명성이 대단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뛰어난 유머 감각의 소유자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쾌활한 성격과 유머로 사람들을 웃게 하고, 그 웃음을 통하여 하느님 말씀을 전한 분이었습니다. 가끔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신앙생활을 경건하고 엄숙한 것으로만 여기는 신자들을 만납니다.
특별히 미사 때 누군가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고, 실수한 사람은 신부님과 수녀님을 찾아가 죄송하다고 하며 고개를 숙이기까지 합니다. 정성을 다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이미 일어난 실수라면 너그럽게 웃고 넘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실수를 엄한 얼굴이 아니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계시지 않을까요?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 주던 필립보 네리 사제를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생활도 아주 작은 일 하나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웃음이 가득하도록, 밝게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성모님께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하느님을 알고 체험할 수 있도록 언제나 우리를 이끄십니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믿음을 고백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오늘은 1917년 5월 13일 포르투갈의 작은 마을 파티마에서 세 명의 어린 목동에게 발현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세 명의 어린 목동에게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충만하기를 바라셨고, 우리가 평화의 주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성인들보다 성모님을 신앙의 모범으로 더 깊이 공경하고 사랑을 드리는 것은 바로 성모님께서 오롯이 당신의 생애를 주님께 바치셨고 우리를 특별히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목동 프란치스코는 “제가 무엇보다 좋아한 것은 성모님께서 우리 마음에 밝혀 주신 그 빛을 통하여 우리 주님을 뵙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너무도 사랑합니다.”(『루치아 수녀의 회고록』)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고백은 하느님의 빛이 우리 안에 머물고 우리를 보호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느님을 소홀히하고, 그분의 창조물을 훼손하며 점점 사랑에 무감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님의 현존을 알리시며 그분을 사랑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남을 위하여 기도하며 도울 수 있도록 우리의 차가운 마음을 뜨거운 열정과 사랑으로 채우게 이끌어 주십니다. 아름다운 계절 5월 성모 성월에 다른 이들, 특히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조금 있으면 …….”이라고 표현된 시간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지상 삶이 끝나 간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군가 함께 있다 떠나가면 허한 마음에 울먹일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도 떠나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슬퍼할 수 밖에 없겠지요.
예수님의 죽음이 세상에는 기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어둠의 세상은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빛을 어둠이라 여겼고, 없애야 할 악으로 여긴 것이 세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고 당신을 내어 주실 만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과 늘 함께 살아간다고 믿는 우리 신앙인들이 누릴 기쁨은, 세상의 대립과 반감을 끝까지 사랑하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반목과 대립의 자리에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고, 슬픔과 좌절의 자리를 위로와 자비로 채우는 것이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세상이 악하여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로는 세상이 너무 나약하였기 때문입니다. 경쟁과 다툼에 담대히 나서 사랑을 선포할 힘이 없어서, 폭력과 차별에 용맹히 맞설 결기가 없어서입니다. 나약함이 악이 될 수 있음을 알고, 그 나약함을 이겨 내어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은 ‘시야의 범위’에서 차이가 납니다. 오래 산 이들은 지금 힘들고 어려운 이들에게 “조금만 참아.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해 줍니다. 그만큼 오래 살아 보았으니, 지금 기뻐도 조금 지나면 슬퍼지고, 지금 슬프더라도 조금 지나면 기뻐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야가 좁은 사람은 작은 일에도 하늘이 무너진 듯, 금방 지나갈 것도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절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라며 수군거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이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이고 사흘 뒤면 다시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잠시 뒤면 세상은 기뻐하고 제자들은 슬퍼할 것이며, 또 잠시 뒤면 제자들은 기뻐하고 세상은 두려움에 떨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세상이 끝나는 줄 알고 다 도망쳐 버립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만은 그 순간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골고타 언덕 위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시야의 범위가 넓은 사람은 어떠한 역경도 이겨 냅니다.
우리가 성숙한다는 것은 바로 “조금만 있으면”이란 의미를 알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 의미를 알면 어려운 일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고, 기쁜 일이 있어도 들뜨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영원의 관점으로 보게 되어 이 세상 작은 변화에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앞날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신 것이지요. 이어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세상의 가치관과 예수님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뜻이지요.
이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머지않아 세상은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를 역전시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악함과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선과 생명으로 가득 차게 만드셨습니다. 미움과 파괴의 문화를 사랑의 문화로 바꾸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일들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가치를 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생각의 틀을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밖에 모르고, 자신만을 모든 기준으로 삼다가 어느 날 하느님을 뜨겁게 체험하고 삶의 모든 기준이 바뀐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악과 불신에 가득 찬 나머지 세상을 미움과 증오로만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눈이 열려 선과 사랑을 지닌 존재로 바뀌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를 바로 ‘나’부터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나 자신’이 변화되면 가정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직장과 사회마저 서서히 변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는 가끔 당혹스럽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뜻 모를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면서 혼란스러워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이심을 알기에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만, 제자들에게는 뜻 모를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이란 표현을 쓰셨을 때, 제자들은 그 ‘조금’의 시간을, 기다리는 다급함 속에서 맞는 불안감으로 체험하겠지만, 예수님의 ‘조금’은 하느님께서 당신께 바라시는 순명의 시간이자 섭리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스 말로 세월의 무상함을 체험하는 인간의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부르고, 시간 속에 충만함과 영원함을 체험하게 해 주는 하느님의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매여 사는 사람은 시간 속에서 허망함과 불안감을 느끼지만, 하느님께 의탁하고 사는 사람은 시간에 매이지 않고 매 순간을 기쁨과 평화 속에 사는 충만함으로 체험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유다인의 반대를 받아도 미련 없이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간이 인간의 욕심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맡겨진 시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매 순간을 과거에 대한 죄책감이나 후회, 상처와 미움에 빠져 살면, 시간은 우리에게 불행의 덫이 되지만,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도하고, 기쁘게 살면, 시간은 세상에서 영원을 미리 맛보는 충만한 은총이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우리는 질문합니다. “이 시대가 어디로 갈까? 세속주의와 물질주의가 팽배한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느님과 교회의 가르침이 젊은이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고,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현상들이 늘어나는 이 시대가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서도, “왜 하느님께서는 나의 어려움과 아픔을 모르고 침묵하시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도 이와 비슷한 혼란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부활의 영광을 아직 체험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이 어두울 때, 예수님의 수난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삶의 수난과 십자가를 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 마음은 기뻐 뛰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어지러운 이 시대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존재지만, 바로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이웃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은 하느님의 ‘때’를 알아보고, 그분의 인류 구원 계획에 동참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은 ‘조금 있으면’과 ‘조금 더 있으면’입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나 ‘조금 더 있으면’ 예수님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이 표현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두 번이나 나오고, 제자들의 입에서도 한 번 나옵니다.
‘조금 있으면’과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든든하고 행복하며 은혜롭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잠깐입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든든함 대신에 불안을, 행복 대신에 불행을, 은혜 대신에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불안과 불행, 고통도 역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있으면’ 예수님을 다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불안과 불행, 고통은 사라지고 든든함이, 행복이, 은혜가 이어질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운데 지금 행복한 삶을 누린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반대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 또한 그것이 조금 더 있으면 사라지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조금 있으면’ 사라지게 될 것을 두고 행복감에 젖을 필요도 없고, ‘조금 더 있으면’ 사라지게 될 것을 두고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일이라고 항상 좋은 것으로 남지 않고, 나쁜 일이라고 항상 나쁘게만 남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체험을 통하여 결국에는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부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와타나베 가즈코 수녀가 쓴 『미소만 지어도 마음에 꽃이 피어납니다』에 따르면, 인도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1910-1997년)는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 자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수프를 나누어 줄 때는 미소를 지을 것, 손을 살짝 잡고 따뜻함을 전할 것, 그리고 짧은 말이라도 건네는 것을 잊지 말 것." 이러한 사람들과 사는 세상에는 늘 작은 기쁨이 들꽃처럼 피어나겠지요. 세상이, 인생이 살맛 나려면 사실 거창하고 대단한 것들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를테면 세상 물정도 잘 알고, 경험도 풍부하며, 또 자리도 잡을 만큼 잡은 '중년의 인생'이 뜻밖에도 그 내면에서부터 우울과 불만족으로 가라앉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년의 시기를 축복의 시기로 바꿀 줄 아는 사람들의 능력은 그들이 성취한 것이 많거나 입지가 강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비우는 기쁨을 배웠고, 심각하고 거창한 일의 중요함만이 아니라 소소한 재미와 기쁨이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지독한 우울과 허무에 빠졌던 철학자 크리스토퍼 해밀턴은 그 어려운 시기를 이겨 내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면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외적인 성취 또는 사회적으로 승인된 성취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 중년의 귀한 특성 중 하나가 다른 사람들의 성취에 대한 두려움이 예전보다 훨씬 줄어든다는 점이다. 인생의 소소한 즐거움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잊힌다. 하지만 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 역시 인생의 소소한 재미이다. 그리고 중년이란 삶에 자그마한 즐거움을 안겨 주는 일들을 더 잘 인식하게 되는 시간인 듯하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묵상할 수 있듯이, 우리 신앙인은 슬픔과 상실의 시간을 이겨 내고 기쁨을 되찾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부터 커다란 기쁨만을 바란다면, 기쁨을 알아볼 감수성마저 잃을지도 모릅니다. 일상의 작은 기쁨과 즐거움을 무시하지도 않고 또한 거기에 매달리지도 않는 대신에 순간순간 감사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가장 큰 기쁨을 담을 그릇으로 조금씩 바뀌어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탓입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떠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적으로 그분께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헤어짐은 일상사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체험하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결국은 ‘혼자’ 가는 길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불안해했습니다. 그러기에 세례를 받은 후 신자들이 ‘신앙생활의 실망’을 체험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불과 몇 개월만 교육받은 교리 지식이 앞날을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그야말로 ‘입교 예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스스로의 노력과 구도의 자세가 절실합니다. 그러기에 공동체의 체험을 권하고 있습니다. 흔히 만날 수 있는 단체가 ‘레지오 마리애’입니다.
신앙과 재미는 별개의 사항입니다. 믿음의 기쁨은 언제나 은총의 이끄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총의 체험을 늘 우선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이면 성령께서는 반드시 함께하십니다. 그렇게 해야 신앙의 ‘홀로서기’가 가능해집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수난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에게는 ‘낯선 말씀’이었습니다. 지나고 보면 평범한 가르침인데, 당시는 너무 몰랐습니다. 영적 공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나고 보면 축복이 담긴 고통이건만, 대부분은 너무 불평합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스승님께서는 비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함께 계실 분으로만 믿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그들은 이렇게 서로 수군거릴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직은 현실이 아닙니다.
의지했던 사람이 떠나가면 누구나 허우적거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방황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렇지만 ‘홀로서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야 당신의 참제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모든 것’이 깨달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이도 없습니다. 알아서 해야 합니다. 고해성사도 봐야 하고, 묵주 기도도 알아서 바쳐야 합니다. 힘든 것을 스스로 해야만 ‘홀로서기’가 가능해집니다. 그 사람은 머지않아 은총의 이끄심을 만나게 됩니다.
신앙심은 저절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부딪치고 어울려야 자라납니다. 지식 위주의 교리는 언제나 안내자일 뿐입니다.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실천하는 믿음’이라야 신앙생활이 공허해지지 않습니다. 사막을 걷지 않으면 오아시스를 만날 수 없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