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정치와 맞물려 19세기 전반기 정치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이데올로기는 기조의 '이성의 주권론'이다.(홍태영 2002a) 이성의 주권은 절대왕정의 신성주권과 인민주권에 대한 거부 속에서 채택된 개념이다. 1830년 체제는 구체제의 절대왕정과 기조가 묘사하기를 "정부체제에 대한 인민적 환상"이라고 한 것 모두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입헌군주제로 확립되었다.(F. Chatelet etal. 1986, 412) 나폴레옹 몰락 이후 복고된 왕정(1814)은 1789년 혁명을 백지화하고 다시 구체제로의 회귀를 드러낸 체제였다.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그리고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보날(Bonald), 메스트르(J. de Maistre)가 근거하였던 것은 절대주의 시대의 신성주권론이었다. 그들에게 종교는 모든 사회적 상태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헌법과 같은 것이었다. "군주정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을 고려한다면, 공화정은 사회와 무관한 인간을 고려하기 때문에 사회에도 인간에게도 적합하지 않는 것"이었다.(S. Rials 1987, 17) 이들의 논의는 왕정복고라는 정세 속에서 사실상 수구 반혁명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인간은 단지 신의 도구일 뿐이고 개인은 권리가 아닌 의무만을 갖는다라는 사고에서 드러나듯이 철저한 반개인주의적 입장과 카톨릭에 기반한 유기적 사회의 구성이라는 신정정치를 주장하면서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보날과 메스트르의 사상, 특히 사회에 대한 유기체적 개념은 콩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프랑스 보수주의의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1855년 콩트는 "보수주의자에 대한 호소(Appel aux conservateurs)"라는 글에서 '질서의 원칙'과 '진보의 원칙'을 종합한 보수주의를 제시한다. 콩트에게 진보는 질서의 실현일 뿐이었다(R. A. Nisbet 1993, 80). 보날 및 메스트르와 달리 콩트와 기조의 보수주의는 1789년 혁명에 대한 원칙적 수용과 그것이 가져온 '문명' 혹은 진보의 역할을 인정한다. 그러한 수용 속에서 질서 혹은 도덕을 통한 공동체의 유지를 사고한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왕정복고 시기는 백색테러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철저한 억압으로 특징지워진다. 따라서 1830년 7월 혁명은 그러한 억압에 대한 폭발로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체제는 유지하되 국왕만을 바꾸자"라는 것이 1830년 7월 봉기한 시민들에 대한 티에르(A. Thiers)의 대답이었다. 이제 영국식의 입헌군주제를 확립하려는 것이 당시의 합의였다. 인민주권이라는 환상에 대해 기조는 이성의 주권을 대립시켰고, 극도로 제한된 선거권을 통해 체제를 유지하였다. 토크빌은 1830년의 체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830년 중간계급의 승리는 결정적이었고, 그것은 너무나 완벽하여, 그들의 아래의 모든 이들과 한 때 그들 위에 있었던 모든 이들에게서 권리를 박탈한 채, 모든 정치권력과 모든 특권은 극도로 제한된 이 계급에만 한정되어 있었다."(A. de Tocqueville 1978) 맑스가 이 체제를 "은행가들의 지배"라고 묘사하고 있듯이 극단적인 제한선거권을 통해 이 체제에서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의 권력은 특정한 소수에 한정되고 중첩되어 작용되었다.
기조의 이념과 그것을 실현한 1830년 7월 혁명 이후의 왕정은 보수주의와 결합한 자유주의의 전형이었다. 오를레앙주의(Orléanisme)라고 일컬어지는 7월 왕정의 보수적 자유주의는 1848년 혁명 이후 '질서당'으로 조직화되고 현재까지도 그 흐름을 지속하고 있다. 왕정복고 시기 왕당파들이 1789년 혁명 자체를 부정하였다면, 오를레앙주의자들은 1789년과 1793년의 분리를 통해 전자를 수용하고 후자를 일탈로서 거부한다. 기조는 '이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능력있는 시민'이라고 판단될 수 있으며 그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한정하여 부여한다. 기조는 그들을 '중간계급(classe moyenne)'이라 칭하였고, 그것은 당시 '부르조아지'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면서 이중의 배제-귀족과 인민의 배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물론 기조는 이성적 능력을 확대하기 위해 국가가 공적 교육을 통해 국민에게 정신(esprit)을 부여하는 작업을 진행해야 함을 강조한다. 기조 시대는 분명 자유와 이성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배제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차이일뿐 혁명의 시작에서 자유주의 부르조아들은 아래로부터의 민중들의 압력과 그들에 의한 직접적인 정치적 권리의 행사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19세기 전반기의 프랑스의 역사는 왕정복고를 통해 재등장한 구체제 세력에 대항하여 두가지 대안 즉, 영국적 입헌군주제를 실현하려 했던 1830년의 7월 왕정의 자유주의 세력과 공화국을 확립하고자 하는 애국적 공화주의자들 간의 대결로 이루어진다. 공화주의자들은 영국적 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프랑스적인 사고를 대립시켰다. 이기주의에 대항하여 혁명적 형제애를, 제한선거권에 기반한 입헌주의에 대항하여 공화국을, 부르조아에 대항하여 인민을 대립시키면서 공화주의적 사고를 형성시켜 나갔다.(P. Darriulat 2001, 59). 1838년 국민방위대에 의해 선거법 개정을 위한 청원이 제기되면서 공화주의 운동은 본격화된다. 우선 곤건공화파들은 [국민 Le National]지를 통해 결집하였고, 급진공화파들은 [개혁 La Réforme]지를 통해 결집하면서 혁명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보통선거권, 즉 모든 시민에 의한 정치적 권리의 실현은 곧바로 '인민주권'의 실현으로 이해되었다(A. Verjus 2002, 122). 공화파들은 보통선거의 실현의 일반의지를 통한 조화로운 세계를 이룰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동일한 전망 속에서 공화파들의 분열은 아직까지 눈에 띠지 않는다.
1848년 2월 혁명은 1830년 7월 혁명이 입헌군주제로 귀결되면서 성취하지 못한 것을 다시 확정하고 영국식 자유주의가 아니라 프랑스적 공화주의를 실현하려는 급박한 움직임으로 특징지어진다. 혁명 이후 19세기 전반의 역사에서 입헌군주제에 대한 실험은 1791년, 1814년, 1830년 세차례 존재한다. 대부부의 유럽 국가들이 입헌군주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반면에 프랑스의 경우 모두 실패한 것은 전통적으로 존재한 프랑스의 주권 개념, 즉 양분될 수 없고 절대적인 주권이라는 관념 때문이다(P. Rosanvallon 1994). 이미 1789년 혁명을 통하여 주권은 군주에게서 국민으로 이전되었던 것이고, 따라서 군주와 국민이 주권을 분할하는 입헌군주제라는 체제는 용인될 수 없었다. 이미 살해된 '부친'에 대한 형제들의 죄의식은 겨코 새로운 '양부'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형제애의 공화국을 고수하였다. 봉기와 함께 공화국은 곧바로 선언디고, 공화국과 공포정치의 등식이라는 기억을 단절시키기 위해 공화국의 임시정부는 정치적 사형을 금지시키다는 선언을 늦추지 않았다.
-홍태영, 「프랑스 혁명과 프랑스 민주주의의_형성(1789-1884)」『한국정치학회보』제 38집 3호 발췌
세줄요약
1.나폴레옹 전쟁 이후 들어선 복고왕정은 구시대의 신성주권설에 근거한 폭정을 행했고, 이는 입헌군주정으로 귀결된 7월 혁명을 초래했습니다.
2.7월 왕정을 주도한 엘리트층이 신봉한 오를레앙주의(Orléanisme)는 일종의 보수와 타협한 자유주의로, 신정정치와 대중정치를 모두 규탄하고 이성(을 가진 소수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옹호하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입헌군주정을 지향했습니다.
3.그러나 1789년의 혁명과 1793년의 처형으로 국민주권 의식을 싹틔운 프랑스의 공화주의자는 권력을 나눠가지는 군주의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고, 결국 이후 오랜 여정 끝에 프랑스에서는 공화정이 이상적인 모델로 자리잡게 됩니다.
첫댓글 글씨크기가 작아용.. ㅠ
프랑스 왕정복고.... 는 3공 초기 거의 왕정복고 직전까지 갔고 오를레앙파와 정통파가 투닥대다 결국 앙리로 정해진판에 앙리가 '공화파 꺼지셈 ㅗ 입헌군주 안함 ㅗ'시전하는 바람에...
우리에게는 프랑스가 혁명의 나라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어쩌면 현재 프랑스 공화정이 확립되게 된 것도 상당한 우여곡절 끝이죠.. 알리시아크리스틴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왕정복고가 거의 이뤄질 뻔한 경우도 있었고, 티에르 이후에 대통령이 된 마크마옹 역시 강력하게 왕정으로의 복귀를 추진했죠. 1889년 불랑제 사건처럼 거의 공화정이 무너질뻔 한 경우도 있었고요. 실질적으로 왕정으로의 복귀가 이뤄지지 못한 것은 왕당파들의 무능과 난맥이지, 공화주의자-자유주의 세력이 강고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후에도 드뢰퓌스 사건-악시옹 프랑세즈-크루아 드 퓌(Croix-de-Feu)처럼 강고한 보수주의 세력이 잔존했죠.
거의 항상 역사의 거대 사건들에 나오는 프랑스이지만... 내전 이후에는 웬지 ㅜ
좋은 글이네욤.
p.s 벌써 18세기말에 입헌군주가 가능할뻔 했긴 했죠. 역사의 가정이란 무의미하지만, 입헌군주를 루이16세가 수용하고 바렌 도주라는 패착을 두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루이16세가 처형당한건 반혁명적 자세 때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와의 내통이었으니.) 역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때까진 백성들이 일단 루이16세에 대해 "공화국을 지킨 군주에 대해 칭송" 했으니 말이죠.
그렇게 되면 역설사 유로파에서 혁명 프랑스도 없었을거고, 혁명 프랑스가 없었으면 DLC랑 혁명 타겟도 없었고, 나폴레옹이랑 신로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