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문학사(제1권) 小說
Ⅲ|| 小說
過去의 우리 小說은 普通으로 傳·錄·記·談·話 等의 名目을 띠고서 그 思想을 表現하였다. 그래서 漢字 그대로는 傳記冊이라고 하면서도 閭巷間에서는 흔히 「이야기책」이라 하나니, 그것이 이야기로 된 것은 漢人의 記錄에서 보게 된다.
「小說은 街談巷語·塗聽途說者의 所爲라」하였다. [班孟堅(반맹견)]
「元의 以前에는 小說이 極히 적었다. 그 있었다는 것도 거의 다 神仙變易에 지나지 못하였다. 小說家는 周의 稗官者流에서 나왔는데, 宋世의 『四庫總目』에는 그것을 一派로 하여 雜事의 敍述, 異聞의 記錄, 瑣談의 綴輯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元代에 降하여는 新思想이 外種人과 함께 中國本部에 들어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好奇心을 興起하게 하여 그 새로운 奇事異聞을 때때로 記錄하되 마침내 俗語로써 그 事物을 演繹하는 거기에까지 이르게 하였나니, 그 中에 가장 著名한 作品은 施耐菴(시내암)의 『水滸傳』이다. 그 結構가 雄渾하고 文字가 巧妙하여 千古奇書의 好評을 얻으면서 明代의 『西遊記』·『後水滸傳』·『三國衍義』의 先河로 되었다.」[顧康伯(고강백)의 『中國文化史』]
이렇게 說話를 文章으로써 表現하였다 하여 그 이름을 小說이라 하였는데, 그것이 奇書로 되고 못되는 것은 作家의 才能에 달리었다. 그러나 文章으로서는 제 아무리 名著傑作이라도 現在 또는 將來의 社會生活에 어떤 好影響을 주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 價値도 없는 廢物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天君衍義』의 作家 鄭泰齊(정태제)가
「近來에 小說雜家가 많이 流行하나 鬼神怪誕의 이야기가 아니면 男女期會의 이야기뿐이라.」고 一歎을 發한 것도 그럴듯한 일이요;
『星湖僿說』의 作家 李瀷(이익)이
「『水滸傳』의 作者는 반드시 陰賊의 마음이 있다.」고 冷評을 加한 것도 그럴듯한 일이요;
『申金夫婦傳』의 作家 李德懋(이덕무)가
「演義小說은 奸譎과 淫亂을 가르치는 것이니 눈에 닿지도 못할 것이라, 누구든지 子弟로 하여금 보지 않도록 단단히 嚴禁하라.」고 痛論을 下한 것도 그럴듯한 일이다.
그래 그런지, 우리의 小說은 그 大部分이 儒家의 倫理道德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佛敎를 極히 崇奉하던 高麗時代에도 國治에 있어는 儒敎로써 根本을 삼았는데, 하물며 儒敎의 尊尙으로써 惟一의 國是로 한 李朝朝鮮의 時代에는 勿論, 그리되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小說이란 名稱을 줄 만한 作品은 壬辰亂(임진왜란, 1905) 後에 비로소 많이 있게 되었나니, 그것들을 儒家의 倫理道德觀으로써 大旨를 든다면 이러할 것이다.
『沈淸傳』은 孝.
『興夫傳』은 悌.
『林慶業傳』은 忠.
『玉丹春傳』은 信.
『天君衍義』는 仁.
『玉娘子傳』은 義.
『春香傳』은 節.
花史는 政治的 得失을 批評한 것이오.
『洪吉童傳』은 『嫡庶差別』의 不合理를 檢討한 것이오.
『九雲夢』은 富貴는 一場春夢에 지나지 못하다는 것을 暗示한 것이오.
『南征記』는 아시아式인 一夫多妻制의 弊害를 戒한 것이오.
『薔花紅蓮傳』과 『콩쥐팥쥐』는 繼母의 惡을 懲한 것이오.
『鼠同知傳』은 背恩忘德을 罵한 것이오.
『장끼傳』은 貪慾을 戒한 것이오.
『두껍傳』은 鄕黨에서는 年齒의 尊尙을 明示하였다.
위에 列擧한 小說에서 革命性의 流露된 作品을 찾는다면 첫째로 『洪吉童傳』을 指摘하여야 되겠다. 作者 許筠(허균)은 洪吉童(홍길동)으로써 登庸의 길을 잃어버린, 심지어 家庭에서까지 容納을 받지 못한 庶子들의 代表的 人物로 하여 活貧黨을 組織하고 特權階級을 敵對하다가 乃終에는 嫡庶의 差別이 없는 硉島國을 創建하는데에까지 論及하였다. 그런 高大한 理想이 비록 事實化는 못되었을 망정 그 가운데에 革命의 暗流가 含有되었던 것은 숨기지 못할 일이었다. 말할 것 같으면
朴應犀(박응서)[思菴(사암 박순)의 庶子], 徐羊甲(서양갑)[牧使 徐益(서익)의 庶子], 沈友英(심우영)[沈銓(심전)의 庶子], 李耕俊(이경준)[兵使 李濟臣(이제신)의 庶子], 朴致義(박치의)[朴忠侃(박충간)의 庶子], 金慶孫(김경손)[金沙溪(사계 김장생)의 庶弟] 等이 仕路의 通함을 聯名疏請하였으나 許하지 않음을 憤慨하여 驪江上을 根據地로 하고 一室에 同居하면서 或은 竹林七賢으로 自處하며, 或은 桃園結義를 擬仿하며, 一方面으로는 海州에 가서 鹽商도 經營하며, 富豪 李承崇(이승숭)의 집도 剽掠하며, 嶺南에 가서 銀商을 쳐서 죽이고 銀 六七百兩을 빼앗기도 하고, 다른 方面으로는 兵糧을 準備하며, 賄賂로써 朝廷에 있는 文武官을 買收하여 장차 임금을 들어 내리려고 하였다. [『光海日記』, 『燃藜室記述』을 引證한 金台俊(김태준)氏의 『朝鮮小說史』에서]
이것이 곧 『洪吉童傳』의 內容이니, 許筠(허균)은 그들의 同情者로만 된 것이 아니요, 事實上 主謀者로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對하여는
『松泉筆譚』, 「許筠(허균)이 『洪吉童傳』을 지어서 『水滸傳』에 擬하고 그 徒로 더불어 몸소 그 行을 蹈하다가 一村이 虀粉이라」하고;
『靑野謾輯』. 「許筠(허균)이 金悌男(김제남)으로 더불어 通謀하고 遷都의 議를 主張하여 讖書本文에 없는 말을 添入하였나니, 一漢·二河·三江·四海가 곧 그것이라. 어쨌든 一國의 사람으로 하여금 騷擾하여 亂을 想하게 하고서 그것을 따라 自己의 뜻하는 바를 試圖하려 하였다」는 이 두 個의 記錄을 보아도 알 수 있으며 이보다도 그가 光海 十年 八月 二十四日에 反逆의 罪名을 쓰고서 四人의 同志와 함께 磔刑을 當하였다는 그것이 더 明白히 말하여 준다.
둘째로는 『春香傳』을 指摘할 터인데, 이것이 『洪吉童傳』과 같이 革命性으로써 一貫된 作品은 아니라 할지라도, 다만 春香(성춘향)에게 同情을 表하는 附帶條件에 지나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全羅道 五十三州의 머슴들이 南原府使를 膺懲하려고 사발通文을 돌렸다는 것만은 階級으로 보아 그 全篇에서의 特色이 아니라고 못하겠다. 그 多面多樣한 事實의 가운데에서, 마치 沈沈漆夜에 번득거린 一點螢火에 지나지 못한 것이로되, 다른 小說에서는 그만한 것도 얻을 수 없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春香傳』의 光彩로 보게 된다.
ㄱ, 對立的 小說.
위에서도 말하였거니와 壬辰倭亂(임진왜란, 1592)의 後에 小說作家가 漸次로 興起하여 肅宗 - 正祖까지의 時代를 軟文藝의 黃金時代로 이루게 한 것은 明末淸初에 輩出한 小說雜家의 影響을 充分히 받은 까닭이라 하노니, 그래서 우리에게 模擬作으로 볼만한, 그런 作品도 勿論 있으리라고 推斷하겠지마는, 차라리 對立으로 보는 것이 妥當하며 그 實은 對立할 만한 價値가 있다.
金時習(김시습)의 『金鰲新話』는 瞿佑(구우)의 『剪燈新話』를 對立한 것이요;
許筠(허균)의 『洪吉童傳』은 施耐菴(시내암)의 『水滸傳』을 對立한 것이요;
愼後聃(신후담)의 『續搜神記』는 晋 干寶(간보)의 『搜神記』를 對立한 것이요;
玉蓮子의 『玉樓夢』은 曺雪芹(조설근)의 『紅樓夢』을 對立한 것이요;
『春香傳』·『沈淸傳』은 淸代의 戱曲 즉, 洪昉思(홍방사)의 『長生殿傳奇』와 孔尙任(공상임)의 『桃花扇傳奇』를 對立한 것이요;
朴泰錫(박태석)의 『後唐遺事』는 羅貫中(나관중)氏의 『三國衍義』를 對立한 것이다.
ㄴ, 儒佛思想의 混合體.
『金犢傳』·『王郞返魂傳』·『白雲居士傳』 等은 純全히 佛系에 屬한 것이나, 儒系의 作品으로 보게 되는 『九雲夢』·『沈淸傳』·『翟成義傳』 等은 佛敎의 影響을 무던히 感受한 듯하다.
ㄷ, 小說의 叢書.
『金鰲新話』는 『萬福寺樗蒲記』·『李生窺墻傳』·『醉遊浮碧樓記』·『南炎部州志』·『龍宮赴宴錄』 等의 五種小說을 收入한 叢書요;
『熱河日記』는 『許生傳』·『虎叱文』·『兩班傳』·『閔翁傳』·『馬馹傳』·『穢德傳』·『金神仙傳』·『廣文傳』·『虞裳傳』 等의 九種小說을 收入한 叢書요;
『三說記』는 「三士誤入黃泉記」·「五虎大將記」·「西楚覇王記」·「三子遠征記」·「黃州牧使戒」·「老處女歌」 等의 六種小說을 收入한 叢書이다.
이 밖에 紀傳體로 되어진 『三國史記』·『三國遺事』·『高麗史』와 같은 것도 小說의 叢書로 볼 수 있으며, 李齊賢(이제현)의 『孝行錄』과 世宗朝의 『三綱行實』로부터 『名臣錄』 十二卷, 『名臣言行錄』 五十卷, 『俎豆錄』 二卷, 『嶺南人物考』 十卷 또는 『東國名賢錄』·『東國名將傳』·『國朝人物志』와 같은 것도 小說의 叢書로 보게 된다.
ㄹ, 諺文小說과 漢文小說.
나는 正音字가 出世하기 前의 小說은 말하려고 아니한다. 그 當時에는 邦語를 그대로 적을 만한 우리의 表音字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正音字가 頒布되면서 三綱行實로부터 至於 兵書·佛經·杜詩까지 諺譯한 그 後의 漢文小說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보다도 먼저 論及할 것은 諺文이란 그것이니, 왜 正音字란 그 名稱을 그대로 使用하지 아니하고 구태여 諺文이라고 하였을까? 自立性과 自尊心이 薄弱한 朝鮮사람에게, 이웃집 팥죽이 더 맛있다는 어린 애의 모양으로 남의 것이라면 盲目的으로 欽慕하는 朝鮮사람에게,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一定한 方向도 없이, 한 개가 짖으면 그 소리를 짖는 뭇 개와 같이, 無條件으로 왁 떠들기를 좋아하는 朝鮮사람에게, 그 中에도 더욱 漢人의 것은 그 汚穢物까지도 향기롭게 여길 만큼 慕華主義에 中毒되었던 朝鮮사람에게 무슨 論責할 바가 있으리오마는, 나의 文字는 諺文이라 하고, 漢人의 文字는 眞書라 한 거기에 對하여는 大喝一聲으로 痛棒을 加하면서 論罪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國粹主義者도 같고, 外國文化를 排斥하는 것도 같으나 實狀 그런 것은 아니다. 朝鮮사람은 朝鮮사람답게 남의 것을 消化하지 못하고, 통째로 먹었다가 통째로 게우면서 나의 것은 大體로 蔑視하였다는 말이다.
李朝(朝鮮)에 이르러는 學者는 勿論이려니와 詩人文士까지도 性理學의 旋渦中에 모두 捲入되어 그 以外의 것은 어떤 哲理와 學說이든지 다 異端이요, 邪說이라 하여, 그들의 尊重視하는 漢文이로되 小說의 이름을 가진 漢文에 있어는 보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도리어 切禁하는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小說에 對한 그들의 觀察을 말하건대
「疎齋集」에는 「明末 小說의 盛行은 또한 國變의 하나이니 … 足히 써 天下風俗을 어지럽게 할지라.」하였고;
「澤堂雜著」에는 「演史는 兒戱文字와 같으니 類書에 採入하면 文章의 士가 알지 못하고 混用할지라, 演史가 나서 正史를 汨亂하게 하며, 男女의 일도 淫媒한 것이 많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觀察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요, 西洋에도 또한 있었나니
古代文華의 淵叢이라고 할 만한 法國(프랑스) 翰林院에서 오히려 小說은 無智한 農民의 玩弄物이라 하여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러시아의 大作家 이반 투르게네프가 名作을 連出하여 盛名을 文壇에 擅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런 著作에는 絶筆하라고 數次 切願하였다고 한다.
아마 東西를 勿論하고 그 觀察은 時代風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도 한때요, 저것도 한때라, 明·淸兩代의 小說을 耽讀하는 人士가 漸漸 增加되면서 退溪(퇴계 이황)門人들의 손에 草穚되었던 『語錄解』가 南二星(남이성)의 增補를 거치어서 刊行되며, 『水滸傳』·『西遊記』·『西廂記』 等에 실린 語錄 그 他를 收集한 作者未詳의 『小說語錄解』와 「洛閩語錄」·「華漢語錄」·「傳奇語錄」 等을 編入한 李義鳳(이의봉)의 『古今譯林』이 世上에 나오게 되었다. 그런 事態에 依하여 士子 中에서 小說作家가 많이 나왔는데, 말하자면 위에서 列擧한 明·淸小說과의 對立的 名著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環境의 支配를 받지 않을 수 없는 士子들인지라, 小說家란 그 名稱을 羞恥로 하여 흔히는 匿名作을 내어놓았나니, 이것이 우리 小說에서 作者未詳이라는 歎息을 發하게 된 까닭이겠다.
漢文小說에 對한 그것은 이만치서 끊고, 다음으로는 諺文小說을 말할 터인데, 여기에 먼저 論擧할 것은 諺文을 內書라 한 그것이다. 內라는 것은 闕內에 있어는 宮女를 內人이라 하고, 家內에 있어는 婦人을 內子라고 稱하는 거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보니까, 諺文은 內人이나, 內子의 指稱을 받는 婦女들의 글이라 하여 漢學界의 人士들이 內書라는 特別名詞를 許與하였다는 것이 分明히 보이나니, 이보다 더 깊은 解釋은 아무나 要求하지 않을 것이다. 諺文은 이러한 賤待를 받았다. 여기에 對하여는 西浦(서포 김만중) 作의 諺文小說 『九雲夢』·『南征記』를 北軒(북헌 김춘택)이 일부러 漢譯한 그것으로만 證明하여도 넉넉할 것이다.
諺文小說은 女子의 愛讀品이었다. 그 밖에 또 愛讀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漢學에 素昧한 農民群衆과 市井人뿐이었다. 士族으로 自處하는 家庭에서는 女子에게 世宗朝의 諺解한 『三綱行實』이나 中宗朝의 諺譯한 劉向(유향) 「烈女傳」이나, 그렇지 않으면 班昭(반소)의 『女誡七篇』을 읽게 할 뿐이요, 小說은 許諾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女子들도 小說을 즐겨 하였다. 特히 空房에 獨守하는 內人, 內醫院·惠民署의 醫女, 工曹 尙衣院의 針線婢 等은 空然히 늙어가는 靑春의 愛情을 小說에 붙이고 기나긴 여름날, 겨울밤을 보내고 또 보내고 있었다. 諺文의 書法에 宮體란 것이 特히 생기게 된 것도 이런 形便에서 나왔나니, 그 當時에는 漢文小說의 讀者와 諺文小說의 讀者는 이러한 分野에 各히 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