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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을 포기하고 ‘행복’을 붙잡다
박 영 호
“야~ 할아버지 최고!” 양 손 엄지손가락을 번쩍 쳐들며 좋다고 난리들입니다.
제가 일하는 ‘가정어린이집’에서 가끔 있는 광경이지요. 꼬맹이들의 칭찬에 참 행복합니다.
제가 참여하고 있는 일은 송파시니어클럽의 노인일자리 사업 중에 ‘책드림지원’사업입니다. 가정어린이집을 찾아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대여하고 수거해오는 봉사활동이지요. 사실, 사업명칭이 좀 어색하고 잘 어울리는 명칭은 아닙니다. 얼핏 이해가 잘 되지도 않고요. 그러나 그게 뭐 문제가 되겠습니까, 내용만 좋으면 된 것이지요. 아주 보람 있고 실속 있는 사업임에 틀림없습니다.
정말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일을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지요.
제가 노인 일자리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작년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저만큼 오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꽤 오랫동안 방황했어요.
직장과 하던 사업을 다 접고 나니 백세시대라 하지 뭡니까? 마음의 준비도, 경제적인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장수시대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은 남아돌아가고 반면 씀씀이는 여전히 많은데 여건은 안 되고, 뭔가는 해야 하겠는데 할 일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지공파’가 되니 주변의 시선은 완전히 노인 취급입니다. 특히 일자리에 있어서는 더 그렇더군요. 그런가 하면 저는 월급 2백만 원, 3백만 원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큰소리치기만 했습니다. 그러니 마땅한 일을 찾기 어려울 수밖에요. 말하자면 일하기 쉽고 많이 받는 일거리, 혹시나 하고 행운(?)을 찾아다니다 세월 다 갔지요. 지금 생각하면 참 허황된 생각이었어요.
저는 복권도 상당기간동안 사 보았습니다. 로또복권과 연금복권이었습니다. 로또복권은 금액이 상당히 크지요. 정말 한 번만 당첨되면 인생이 바뀐다고들 합니다. 또 연금복권은 말 그대로 매월 5백만 원씩 꼬박꼬박 내준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매주 한 번씩 일찌감치 복권을 사놓고 추첨하는 날만 기다립니다. 기와집도 그려보고 외국 유명 해변 해수욕장에 누워있는 내 모습도 그려봅니다. 제법 가슴 뭉클뭉클하고 그 맛이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 허망한 꿈입니다. 다 신기루이지요. 추첨 날만 되면 그 꿈은 싹 사라집니다. 마약과도 같아서 또 삽니다. 끝까지 행운은 오지 않았습니다.
나이 70 넘어서야 겨우 행운을 쫓던 일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지쳤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지요. 경제적인 욕심, 재물 욕심을 내려놓고, 남아있는 여생 보람 있게 사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노인 일자리사업’을 알게 되었고, 흥미를 느껴 송파시니어클럽을 찾은 게 작년 2월 말쯤으로 기억됩니다.
아차~, 늦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신청접수가 마감되었다는 겁니다. 젊은 담당자가 그래도 친절히 “혹시 중간에라도 자리가 나면 연락드리겠노라” 하여 전화번호를 남겨 놓고 기다린 것이 1년을 지나 올 2월까지의 지루한 기다림이었지요.
금년 1월부터 2월 사이에는 송파구청 홈페이지와 송파시니어클럽 홈페이지를 ‘즐겨찾기’로 저장하고 노인일자리 신청접수 공고가 나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매일 컴퓨터를 열어 들여다보았습니다. 작년의 실수를 거듭하면 안 되겠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드디어 전철 9호선 석촌역 3번 출구에서 500미터 쯤 송파여성회관 4층에서 신청을 했습니다. 여성회관이라 해서 처음에는 쭈뼛쭈뼛 했지요. 남자들보다 여성 출입이 훨씬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날 그 장소에도 젊은 여성 직원들이 신청 접수하고 있었어요. 사실 저는 무슨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냥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상담을 하고 있었는데, 내 신청서를 살펴보던 직원이 이런 일도 있다면서 ‘책드림지원사업’을 권하더군요. 저는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사업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한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 책 읽기를 좋아해서 책 얘기가 나오니까 그냥 해 볼만 하다 이해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금년에 처음 시작하는 사업이라는 것도 흥미를 돋우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시작입니다. 지난 3월이었습니다. 우선 담당지역을 정하는 일과 두 명씩 짝을 지어 팀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한 팀은 부부팀으로 쉽게 결정되었지만 나머지가 문제입니다. 더구나 남자는 나 혼자고 다 할머니들인지라..... “지역을 먼저들 고르세요. 저는 남는 곳 아무데나 할게요.” 점잖을 한참 피운 후, 사무실에서 전철 두 정거장 지나 조금 걸으면 되는 잠실 파크리오아파트에 있는 다섯 개의 어린이 집을 맡게 되었습니다. 또 착착 마음이 잘 맞는 파트너 할머니와 한 팀을 이루게 되었지요.
월요일을 기준으로 매월 둘째 주와 셋째 주 2주 동안 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합니다.
가정어린이집을 방문하여 그림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주고 책 대여 및 반납 업무도 합니다. 먼저 한 주간동안은 매일 송파시니어클럽에 모여 도서관에서 대출해 온 그림책을 고르고 읽어 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어떻게 읽어주어야 재미있을까? 목소리 톤도 높여보고 몸짓도 하면서 연구를 합니다. 어린이집에 가서는 내 손주에게 읽어 준다 생각 하면서 파트너와 각각 4권씩 준비하여 각 2권씩 4권을 읽어준 후, 가정어린이집에는 8권을 맡겨놓고 다음 주에 나머지 4권을 읽어주고 모두 회수해 옵니다.
시립과 구립어린이집을 포함하여 송파구에는 400여개의 어린이 집이 있다고 합니다. 그중 저희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가정어린이집만 대상으로 무료봉사하고 있습니다. 가정어린이집은 일반 가정집을 개조하여 꾸몄기 때문에, 아이들이 사는 집과 유사한 공간이라 큰 규모의 어린이집 보다 오히려 아이들이 적응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유아용 동화그림책을 챙겨들고 지하철로 이동합니다. 날이 엄청 더워서 땀이 줄줄 흐르지만 아이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아주 가볍습니다. 우리 팀이 맡은 가정어린이집은 다섯 군데 모두 아파트 1층입니다. 어린이집 벨을 누르기 전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란색 유니폼으로 갈아입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오셨다!” 어린이집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이 주르르 나와 반겨줍니다. 어느 어린이집은 두 줄로 예쁘게 앉아 기다리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우리 일은 시작됩니다. “친구들, 안녕! 그동안 많이 컸네! 키도 크고, 발도 크고, 손도 크고!” 일종의 너스레를 떱니다.
들어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손 씻는 일입니다. 어린 아이들과 활동하는 것이라 청결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알콜(에탄올) 세정제를 준비하여 사용하고 있지요. 대개는 아이들을 나이 별로 두 반으로 나누는데, 어린아이들은 1년이나 6개월 정도라도 엄청난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먼저 만2~3세 아이들을 먼저 만납니다. 나의 오카리나 연주에 맞춰 ‘안녕’ 율동과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지요. “안녕 안녕 선생님, 안녕 안녕 친구들, 오늘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안녕 안녕 안녕!” 아이들도 부르고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신이 나서 같이 부릅니다.
내가 오카리나를 배운 것은 딱 이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마침 같은 건물 6층에서 오카리나 기초반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월사금(?)이 제법 비싸지만 이 기회에 배워두면 아이들과 만났을 때 긴하게 활용할 수 있겠다 싶어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직 수련생신분으로 터무니없이 부족한 실력이지만 아이들 노래 정도야 그럭저럭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주 “할아버지 최고!”하면서 앙코르를 외치지요. 꼬마들의 환호소리에 나도 엔도르핀이 막 솟습니다. 신이 난 나는 ‘거미가 줄을 타고 올라갑니다’, ‘숲 속 작은 집 창가에’를 계속해서 연주합니다. 10여 곡의 악보를 준비해 놓았는데 흠이 있다면 잘 외워지지가 않아 꼭 악보를 펼쳐야 된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제 동화그림책을 폅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표정과 말로 아이들과 교감을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후유~ 깜작 놀랐네!” 차를 타고 가는 너구리들이 깜짝 놀라게 된 이유를 표현한 이야기입니다. 아이들도 자신의 생각을 마구 발표하지요. 어떤 아이는 발을 구르면서, “공룡이 밟았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번에는 ‘보인다 보여’ 그림책을 읽어줍니다. 아이들은 숨바꼭질 하듯이 숨어 있는 것을 찾아내고요. 색깔과 모양을 잘 기억하고 있어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인지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됩니다.
‘신난다 신난다’ 그림책에는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아이들은 오리, 참새, 원숭이, 코끼리들이 나올 때마다 울음소리와 몸짓을 흉내 내면서 즐거워합니다.
세 권 또는 네 권 쯤 읽을 즈음이면 아이들의 몸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비비꼬지요. 마칠 시간이 됐습니다. 이때도 안녕노래를 부릅니다. 가사가 조금 다르지요. “안녕 안녕 선생님, 안녕 안녕 친구들, 다음 다시 만나 재미있게 놀자. 안녕 안녕 안녕!”
옆방엔 1세 내외의 아주 어린 아이들이 올망졸망 앉아 있습니다. 역시 ‘안녕’ 노래로 반가운 인사를 나눕니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하는 작은 꼬마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많아야 두 권이면 끝납니다.
구연동화가 일방적인 1인극 형태라면 저희들의 책읽어주기는 양방향 소통의 장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더 친근감이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활동일지를 작성하고 원장님한테 확인 사인을 받고 이젠 아이들과 헤어질 시간입니다. 아이들이 모두 현관으로 나와 고사리손 흔들며 “빠이, 빠이~!”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때론 할아버지 할머니 간다고 우는 녀석도 있습니다.
가끔은 친구들 모임에 못가서 아쉽기도 하지만 이 일이 재미있으니 그냥 괜찮습니다. 행복합니다. 덤으로 얻은 것도 있습니다. 집에서 나와 클럽 사무실 들렸다가 어린이집에 가서 일하고 귀가하면 7,000~8,000보를 걷게 됩니다. 10,000보 걷기 목표를 쉽게 달성합니다. 옆 팀의 한 분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걷기가 다소 불편했는데 이 일을 하고서부터 많이 좋아졌다고 신이 나 있습니다.
매달 열흘 각 3시간씩 총 30시간 일합니다. 급여는 월 27만원, 좀 더 많았으면 하지만 욕심은 한이 없지요. 큰 도움이 됩니다.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저는 이 일에 참여한 이후 활력 넘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선,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 - 버킷리스트 두어 가지를 해결했습니다. “시간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 없다”는 말이 있지요. 약간의 돈과 넉넉한 시간이 함께 하니 정말 기막힌 행복입니다. 지난 4월 말에는 한라산을 등반하여 백록담을 보았고요, 또 7월에는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보았습니다. 기후 탓으로 자칫 산에 오르고서도 백록담이나 천지를 보기 힘들다고 하던데 저희 부부는 두 곳 다 청명한 날씨에 단번에 그 굉장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백두산 여행 중에는 보너스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거기 있음을 확인했고요, 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등 기개가 대단했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있었지요. 일송정 앞에서는 선구자 노래를 목청껏 불러보는 호사까지 누렸답니다.
이런 얘기를 선배 후배 그리고 친구들한테 하면 다들 부러워하지요.
이렇게 활력 있는 요즈음 저의 삶은, 어린이집을 찾아 책을 읽어 주는 이 일에 대한 만족, 보람 등 정신적인 안정과 함께 적은대로 경제적인 도움이 되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아마 이런 뒷받침이 없었다면 저의 버킷리스트는 영원히 그대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해결된 버킷리스트 하나 더 얘기하자면 오카리나를 배운 것도 포함됩니다. 젊어서부터 악기 하나를 꼭 배우고 싶어 기타를 사서 만지작만지작 해보기도 하고 하모니카를 구해서 아무렇게나 싱싱 불어보기도 했지만 거기에서 멈췄었는데, 이번엔 오카리나를 확실하게 배우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간단한 독주회(獨奏會)라도 한 번 열어보고 싶습니다.
오래 동안, 여기저기 널려있는 ‘세 잎 크로버’(행복)를 마다하고, 잘 보이지 않는 ‘네 잎 크로버’(행운)를 찾으려 헤매고 다녔지만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이제 ‘행운’을 포기했더니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앞으로도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계속 지워나가며 활력 있는 여생을 살려고 합니다. 끝.
추서 1 : 드릴 말씀 아주 작은 것 하나 있습니다. 노란색의 예쁜 가방을 만들어 주시어 사용하고 있는데, 활동일지 등 서류철과 책 4권 그리고 오카리나와 악보 등을 넣고 다니기에 좀 팔이 아픕니다. 아무리 건강한 척 해도 저는 노인인 모양입니다. 어깨에 둘러매는 배낭 같은 것으로 바꾸면 참 좋겠네요.
추서 2 : 노인사회활동을 연구하고 지원하고 시행하고 있는 여러 기관과 종사자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 이 글은 2019년 9월25일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수기 현상공모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노인일자리 참여수기입니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