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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파상(Guy de Maupassant)
프랑스 소설가 기 드 모파상
(Guy de Maupassant)
묘비명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의 프랑스의 소설가 모파상은 『여자의 일생』, 『벨라미』, 『죽음처럼 강하다』와 같은 타고난 재능으로 쓰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대에 커다란 부와 명예를 쌓게 되어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지중해에는 요트가 있었고, 여러 지역에 휴양을 위한 별장도 소유하고 있었으며, 매일 호화로운 삶을 누리며 마음껏 사치를 부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1892년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 하겠다며 갑자기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지만, 이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정신 발작을 일으켜 42세의 나이에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말년에 반복해서 했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J’ai tout convoité, et je n’ai joui de rien." "I tried to have everything, but I ended up with nothing." 진정한 행복이란 객관적인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돈, 명예, 권력, 모든 것이 완벽하다 해도, 모두가 부러워한다 해도, 마음에 만족이 없고 공허하기만 하다면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삶일 뿐입니다. 나이 들어 늙어갈수록 비우고 내려놓고 가는 소박한 삶을 살고자 노력할 때, 지구별 소풍길이 보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인연으로 많은 것을 가슴에 고이 간직한 채 본 고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처럼 더 한층 가벼울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Socrates, BC469?~BC399)는 일찍이 얘기했습니다. "Those who are satisfied with the least are the richest." "가장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오늘의 명언 행복한 생활은 마음의 평화에서 이루어진다. –키케로– 파리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있는 모파상의 묘비 "인생, 당신도 알듯이, 우리가 믿은 것들이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La vie, voyze-vous, ca n'est jamais si bon ni si mauvais qu'on croit." 공동묘지에서 만난 할머니 덕분에 찾을 수 있었던 모파상의 무덤, 어느 '여자의 일생' 속 문구가 적혀 있었다. 몽파르나스 호텔 1980년대에 몽파르나스 호텔 48층에 투숙했는데 객실료가 200불 이상이었다. 고층일수록 호텔비가 비쌌다. 당시 조선호텔 객실료가 80,000원이었다.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L.A.에 보나벤쳐 호텔은 층수에 관계 없이 객실료가 동일해서 최고층에 투숙했다. 호텔예약은 조선호텔에 부탁했다. 파리의 대표적인 공동묘지 세 곳 {세계 최초의 공원식 묘지,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Cimetière du Père-Lachaise), 몽마르트르 묘지 (Cimetière de Montmartre), 그리고 몽파르나스 공동묘지 (Cimetière du Montparnasse)}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8.5 ~1893.7.6) 프랑스 사실주의의 대표 작가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70년 보불전쟁에 종군했고, 얼마 후 파리로 나가 해군부와 문교부의 관리가 되었다 한편 어머니의 친구 플로베르의 지도 아래 문학 수련에 힘써, 시, 극, 소설의 습작을 하면서 리얼리즘 수법을 엄격하게 터득하게 되었다. 졸라 등과 사귀었으며, 소설집 '메당의 저녁'(1880)에 발표한 중편 '비계 덩어리'는 문단의 절찬을 받고 스승 플로베르에게서도 격찬을 받았다. 선천성인지 방탕한 생활의 결과인지 알 수 없지만, 20대 초반 매독에 걸린 결과로 얻은 신경쇠약은 그로 하여금 신비적 경향이 짙게 했으며 모파상의 단편소설들은 여러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870년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을 다룬 것, 노르망디 농민들을 다룬 것, 관료사회를 다룬 것, 센 강변의 생활을 다룬 것, 서로 다른 계층의 감정 문제를 다룬 것, 그리고 '오를라'(1887) 같은 후기 소설에서 약간 불길한 전조를 보이는 환각을 다룬 것 등이다. 이 소설들을 한데 모으면 1870~1890년의 프랑스인의 생활상이 포괄적으로 드러난다. 우울증, 여자에의 집착, 방랑벽 등으로 생의 대부분을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고, 결국 43 번째 생일을 맞기 1개월 전에 생을 마쳤다. 역사 속 위인의 유언과 묘비명 괜히 왔다 간다 서양의 공동묘지는 한국처럼 마을 밖 아주 먼 외딴 곳의 불쑥불쑥 불룩하게 잇따라 튀어 나온 봉분 모양이 아니라 대개 마을이나 도시의 한쪽 끝에 자리하고 있어 종종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많고, 작은 비석들만 잔디밭에 가지런하게 서 있거나 누워 있어서 시골 한적한 공원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인상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또 서양에선 묘비명에 유머가 넘치는 글을 남기고 간 사람들이 많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묘비명으로 잘 알려진 영국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노벨문학상(1925년)을 수상한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의 것일 게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겸 소설가, 비평가인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 출처, 지식백과 그는 자기 묘비에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이라고 쓰게 했다. 흔히 우리나라에선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 그룻된 번역으로 널리 더 알려졌다. 그런데 "우물쭈물하다"는 결단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런 단어나 의역해야 할 문구도 없기에 분명히 잘 못된 번역이다. 정확한 번역은 "오래 (버티고)살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길(이렇게 될)줄 알았다."이다. 한편,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묘비명으로 꼽는 아일랜드의 각본가, 작가, 희극 배우, 저널리스트, 연극배우, 영화배우, 시인, 음악가 등 여러 분야에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칭송받던 스파이크 밀리건 (Spike Milligan, 1918~2002)의 묘비에는 "I told you I was sick! 내가 몸이 아프다고 그랬잖아!"라고 써있다. CNN 창립자인 테드 터너 (Ted Turner, 1938~ )는 묘비명으로 ‘Don’t wake up! 깨우지 마!’ 라는 말을 미리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남은 사람은 떠난 사람이 남긴 마지막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역사 속 위인의 유언과 묘비명을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삶의 여유가 없고 힘겹다." 또는 "융통성이 없고 꽤 고지식하다."라는 의미의 "팍팍하다"는 말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아마도 한 많은 그 민족의 정서는 유언이나 묘비명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듯하다. 반면 서양인들의 묘비명은 예전부터 냉소적이고 재치있는 비문들이 일반적으로 흔히 눈에 띈다. 중세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 전쟁을 꼽자면, 유럽의 패권을 겨룬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영어: the Hundred Years' War, 프랑스어: la guerre de Cent Ans, 1337~1453)"으로서 당시 영국의 태자였던 에드워드 (Edward)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 이 있다. "Remember me, my passing man. I was once alive, as you are now. As I am asleep now, you must also fall asleep." "지나가는 이여, 나를 기억하라. 지금 그대가 살아 있듯이, 한 때는 나 또한 살아 있었노라. 내가 지금 잠 들어 있듯이, 그대 또한 반드시 잠 들리라,” 어느 성직자의 묘지 입구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라고 적어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1954년 노벨 문학상과 1953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노인과 바다』로 유명한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는 인간의 비극적 모습을 간결하게 표현하던 자신의 문체 답게 "Pardon me for not getting up."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라는 묘비명을 남겼다. 영국 시인 겸 극작가 존 게이 (John Gay, 1685~1732)는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에서 당시 자유당 내각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아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날 선 비판으로도 유명했는데, 그의 풍자적 인생관은 "Life is a jest. And all things show it. I thought so once. But I now know it. “인생은 농담이야. 모든 것이 그것을 말해주네.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죽어서야 알겠구나." 라는 묘비명에도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에도 재치있는 말을 남긴 사람이 있다. ‘걸레’ ‘미치광이 중’이라 자처하며 삶을 파격으로 일관했던 중광 (重光, 1934~2002) 스님의 묘비명에는 “괜히 왔다 간다” 고 말하며 떠났다. 권력이나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인생이든, 가난에 찌들었던 인생이든 모두 덧없는 것임을 명쾌하게 나타낸 문장들이다. 얼마전 노환으로 선종하신 천주교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은 “여러분 행복하세요. 그리고 평안하세요." 라는 인사를 남기셨다고 전한다. 미움과 다툼이 없고 평화로운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얻으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정말, 인생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하는 묘비명임이 분명하다. "인생, 당신도 알듯이, 우리가 믿은 것들이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요. La vie, voyze-vous, ca n'est jamais si bon ni si mauvais qu'on croit." 19세기 후반의 프랑스의 사실주의 대표적 작가의 한 사람인 소설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의 『여자의 일생』은 선량한 한 여자가 걸어가는 환멸의 일생을 염세주의적 필치로 그려 낸 작품으로서, 그의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함께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이 낳은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톨스토이도 이 작품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여자의 일생』, 『벨라미』, 『죽음처럼 강하다』와 같은 인생의 참된 가치를 일깨우는 소설들로 명성을 얻은 작가이다. 그는 타고난 재능으로 쓰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커다란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그의 삶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지중해에 요트가 있었고, 노르망디에 저택과 파리에는 호화 아파트도 있었다. 그리고 은행에도 많은 돈이 예금되어 있었다. 모파상은 이미 27세 때부터 신경질환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증세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불과 10년간의 문단생활에서 단편소설 약 300편, 기행문 3권, 시집 1권, 희곡 몇 편, 그리고 『죽음처럼 강하다』(1889년), 『우리들의 마음』(1890년) 등의 장편 소설을 썼다. 다작으로 인한 피로와 복잡한 여자관계로 지병인 신경질환이 더욱 악화되어 1892년 1월 2일 니스에서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 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파리 교외의 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정신 발작을 일으켜 이듬해 43세의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말년에 반복해서 했던 말(유언)이 기록되어 있다. "J’ai tout convoité, et je n’ai joui de rien." ("I tried to have everything, but I ended up with nothing.")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진정한 행복이란 객관적인 조건에 있지 않다. 돈, 명예, 권력, 모든 것이 완벽하다 해도, 모두가 부러워한다 해도, 마음에 만족이 없고 공허하기만 하다면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삶일 뿐이다. 나이 들어 늙어갈수록 비우고 내려놓고 가는 소박한 삶을 살고자 노력할 때, 지구별 소풍길이 보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인연으로 많은 것을 가슴에 고이 간직한 채 본 고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처럼 더 한층 가벼울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Socrates, BC469?~BC399)는 일찍이 얘기했다. "Those who are satisfied with the least are the richest." "가장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수학자 디오판토스(Diophantus, 200년 또는 214년 태어남 ~ 284년 또는 298년 죽음)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출생과 사망년도조차 불분명하다. 3세기에 주로 활동했으며, 고향은 이집트였고 알렉산드리아가 주 활동 무대였던 수학자다. 문자를 도입하여 문제를 푸는 방법을 최초로 도입한 사람으로 '대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지은 『산학(Arithmetica)』에는 방정식에 대한 많은 문제가 포함되어 있어 후세의 수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추종자가 그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 같은 글귀를 새겨 넜었는데, 간단한 1차 방정식 으로 풀 수 있다. "여행자들이여! 이 돌 아래에는 디오판토스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그의 신비스런 생애를 수로 말해 보겠노라. 그는 일생의 6분의1을 귀여운 소년으로 지냈노라. 그 후 일생의 12분의1이 지나서 수염을 길렀으며, 다시 그 후 일생의 7분의1이 지나서 결혼을 하였고, 결혼 후 5년 만에 첫 아들을 얻었다. 슬프구나, 그 아이는 사람들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 아비의 생애의 절반을 살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슬픈 시련을 견디며 지내기를 4년, 아비 또한 이 땅의 삶을 마쳤도다." 극진히 사랑하던 아들을 먼저 보내고 깊은 슬픔에 빠진 그는 그 뒤 4년간 정수론에 몰입하여 자신의 연구 내용을 『산학』(算學, 라틴어: Arithmetica 아리트메티카)이라는 책에 정리함으로써 정수론(整數論)에 공헌이 컸다. 그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를 정리하여 디오판토스의 나이를 x라고 놓고, 방정식을 세우고 구하면 아래와 같다. 1×/6+1×/12+1×/7+5+ 1×/2+4=x 14x+7x+12x+420+42x+336 =84x14x+7x+12x+420+42x+ 336=84x 14x+7x+12x+42x-84x= -336-42014x+7x+12x+42x −84x=−336−420 -9x=-756−9x=−756 그러므로 알고자 하는 디오판토스의 나이 x는 x=84x=84세에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12과 1/7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부터 디오판토스의 나이는 12와 7의 최소공배수의 개념으로도 실제로 돌아가신 나이가 84세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의 대수학자다운 비문임을 알 수 있다. 종이로 만든 작품들... |
옮겨온 글 편집
첫댓글 청산님은
묘비명에 무엇이라고 남길 것인가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는 생각하지 말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현재만 생각하라. 오늘 하루 마음 편안하게 지내기만 하면 된다.
나는 마음이 편안하다. 나는 마음이 편안하다. 나는 마음이 편안하다.
묘비명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마음이 편안하다"를 자꾸 되뇌인다는 건 마음이 편치않다는 뜻입니다요.ㅋㅋㅋ
제가 만일 묘비를 세울것 같으면
"최선을 다하며 살았노라"입니다만
이 지구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ㅋ
다른 별에 갈 것이니까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