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저녁에 준비물점검을 다 끝내고 다음날의 컨디션을 위해 일찍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간 필기한 것을 대충 둘러보고 시작시간보다 1시간 일찍 도착했다. 시험은 하루에 3번 있는데, 10시에 시작하는 2교시를 보게 되었다. 시험장소는 대전 문화동에 위치한 산업인력관리 공단이다. 지하 1층엔 이론시험장이 있고, 지하 2층에 실기시험장이 있다. 학원선생님은 이미 와 계셨고 같이 공부한 학생들도 여럿 와있었다. 무척 반가왔다.
내가 다니고 있는 둔산요리학원에는 원장님을 비롯해 모두 여성들인데 한결같이 미인들만 모여있다. 그중에 한식선생님은 자그만 체구에 보면 볼수록 깜찍함이 넘치는 선생님이다. 평소에 하얀가운만 입고 있는 모습을 보다가 오늘 시험장에 나온 선생님의 모습은 정말 달랐다. 흑백브라우스와 스커트 차림에 천사같은 얼굴은 나로하여금 가슴을 뛰게 하고 침까지 흘리게 했다. 선생님께선 시험 잘보라면서 사탕꾸러미를 주셨다. 가운을 갈아 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끈을 태권도 도복처럼 매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앞치마 두른 끈을 다시 이쁘게 묶어주셨다. 끈매듭은 오른쪽에 하는 것이 아니라 왼쪽에 하는 것이라 한다. 나비넥타이처럼 마무리하고 나니 정말 깔끔해보였다. 그간 학원에서는 목에 걸치는 앞치마만 입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조리사다운 복장을 해보았다. 아무렇게나 입고 요리하는 것보다 이렇게 복장을 갖추니 갑자기 무척 엄숙한 분위기의 요리전문가가 된 느낌이다. 기다리는 동안 책을 다시 읽으면서 다시 한번 순서를 생각하고, 그간 틈틈이 일러주신 실기시험의 요령을 읽었다.
10시가 다될 무렵 감독관이 와서 응시표 대조를 하고 번호표를 골라가라 한다. 뒤집어 놓은 번호표중에서 맨 위에 것을 하나 들었다. 12번 이었다. 열둘! 무척 맘에 드는 숫자였다. 12은 완전숫자로도 불리지 않던가. 열두달을 채워야 한해가 완성되고, 십이지가 있어 육십갑자가 운행된다. 오늘 확실히 붙을 것만 같았다. 물론 난 어떤 숫자가 나오더라도 희망스런 해석을 했으리라. 왜냐면 그게 나에게 득이 될 것이기 때문에^^
감독관이 다시 주의사항을 말한다. 지시대로만 하라고 한다. 설명 들을 시간에 혼자서 그릇만지고 있는다든가 재료확인할 시간에 재료손질한다든가 하면 안된다고 한다. 어떤 응시생은 주의사항을 제대로 듣지 않고 엉뚱한 짓하다가 칼에 세 번이나 베었다고 한다. 위험한 작업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시사항을 따라야 하고, 다치거나 좋지 않은 일이 발생될 때 감점은 물론 실격처리와 퇴장당할 수 있다고 한다.
이윽고 조리실로 옮겼다. 조리실은 무척 넓었다. 조리대는 2개씩 5줄 정도 되었고, 대략 50명 정도 작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내 옆자리엔 젊은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시험 잘보세요’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가운데는 2구짜리가스렌지가 2개 있었는데, 각기 불을 하나씩만 쓰도록 해놓았다. 작업대는 그리 넓지 않았는데 도마가 40*50cm 정도 되어서 주변에 접시와 그릇을 놓고나니 공간이 많지 않았다. 자리에 코팅된 출제문제가 2개 놓여져 있었다. 오늘의 문제는 잡채와 북어보푸라기였다. 일면 안심도 되었지만 시간이 바쁠 것 같았다. 출제문제지엔 종목과 시간, 요구사항, 수검자유의사항과 재료목록이 그램단위로 나와있었다. 책을 통해서 익히 봐왔던 것이라 대충 훝어보고 앞에 준비된 걸이에 집게로 걸어놓았다.
이제 갖고 온 도구를 꺼내라고 한다. 많이 갖고 왔겠지만 잡채와 북어보푸라기에 필요한 것만 꺼내놓으라고 한다. 잡채와 북어보푸라기에 필요한 도구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봤다. 하지만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가방을 뒤지면서 어떤게 필요하까 하면서 골라내니 금방 골라졌다. 강판에다 후라이팬도 모두 준비해갔는데 작업대 아래 사물함에 보니 강판도 있고, 냄비도 2개나 있고 후라이팬도 있었다. 그릇도 여러개 더 있었고, 주걱같은 것도 있었다. 준비물이 부족한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한다. 없는 것이 시험장에 여분이 있다면 빌려주겠다고 한다. 대부분 준비를 다 잘해온 것 같다. 누군가 칼인지 채반인지 없다고 했는데 감독관이 어디선가 가져다 주었다. 감독관은 이시간 이후로 결코 옆사람과 말한다든가 뭘 건네준다든가 빌린다든가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가방 가득히 많은 도구를 준비해갔는데, 행주3개와 칼, 나무젓가락, 채반, 후라이팬, 수저, 강판을 꺼냈고, 준비해 간 펜꽂이그릇을 놓고 도구를 꽂아놓았다. 그리고 쓰레기를 담을 검은 비닐을 싱크대 수도꼭지에 걸어두었다.
감독관이 맨 앞에 준비된 재료를 하나씩 가져가라고 했다. 나가서 이것 저것 고르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감독관 왈 “다 똑같으니 아무거나 가져가라고 한다.” 나도 아무거나 하나 갖고 왔다. 북어는 황태로 한 마리가 나왔다. 당면은 10가닥 정도 나왔고, 해동된 쇠고기, 마늘2개, 파 대가리 1개, 당근 1조각, 도라지 1뿌리, 오이 1/3개정도, 야채가 나왔다. 각 개인별로 재료확인과 불, 물 기타 도구 확인시간이 있었다. 모든 확인이 끝나면 시작과 함께 55분이내에 맨 앞 제출대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한다. 나는 평소 재료손질에 서툴기 때문에 손질할 게 많은 잡채는 시간안에 해내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평소에 연습했던대로 하면서 재료손질을 조금 줄이더라도 시간단축에 유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가지 요리의 작업순서를 떠올려 보았다. 실습도 했고, 상상조리도 여러번 했기 때문에 순서가 한눈에 보였다. 우선 야채 먼저 다듬고, 데칠 것 데치고 볶을 것 볶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북어포는 갈아내는 시간이 오래걸리는 종목이지만 시간이 정 부족하면 조금만 갈더라도 일단 시간내에 제출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시간상으로 북어포는 약 10분이내에 될 것같고, 잡채는 40분 정도하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시작한다면 10시 30분이 다돼가므로 11시 10분까지는 잡채를 끝내야 할 것이다. 그순간 드디어 “자 시작하세요!“라는 말이 떨어졌다.
그런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앞뒤좌우 대부분 북어포를 열심히 갈기시작했다. 사방에서 북북 거리며 북어갈아제끼는 소리는 정말 요란했다. 나도 순간 ‘어? 북어포를 먼저하는 것이 좋은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북어포는 나중에 당면 끓일 때 하면 될 것 같아서 물 닿지 않게 마른 행주위에 올려놓고 야채손질부터 했다. 뜨거운 물이 나오길래 조금 받아서 마른표고와 목이를 먼저 담가놓았다. 당면은 미지근한 물을 받아 큰 대접에 담갔다. 뻣뻣해서 잘 안담겼지만 가닥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쑤셔넣었다. 이어 오이를 돌려깍아 채썰어 소금절여놓고, 도라지 껍질벗겨 채썰어 소금뿌려놓았다. 당근은 채썰어 그릇에 담아놓고, 숙주는 거두절미하여 그릇에 담았다. 파와 마늘은 다졌다. 마늘은 2쪽이 나왔는데 1쪽만 다졌다. 숙주는 데치기 위해 냄비에 물 올려놓고, 양파도 채썰어 접시에 담고, 표고는 두꺼워서 포를 뜬다음 채를 썰었고, 목이는 그냥 찢었다. 고기는 살짝 씻어서 물기를 뺀 다음 채 썰었다. 대접에 고기, 표고, 목이를 따로 담았고, 간설후파마깨참 양념으로 각각 밑간했다. 냄비물이 끓어서 소금좀 넣어 채반에 숙주를 담아서 데쳐내고 찬물에 헹군 후 행주로 물기를 제거했다. 그 동안에 감독들은 주변을 여러번 왔다갔다 했다. 와서 유심히 보고 가기도 하고 무엇인가 적기도 했다. 점수를 +를 주려는건지 -를 주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마이너스될 요인은 별로 없지 않나 싶었다. 익히 배운대로 도마위엔 항상 작업하는 것 1가지 외엔 깨끗했고, 손질된 재료들도 접시에 가지런히 담으면서 쓰레기거리는 검은 비닐봉투에 담고, 또 배운순서대로 했으니 별 걱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감독관들이 오갈때마다 약간 떨리기도 하고 조심스러웠다.
재료 썰 것 다 썰고, 데칠 것도 다했으니 이젠 볶을 준비를 해야할 것 같았다. 잠깐 시간을 보니 정각이 넘어가고 있었다. 시작한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30분이 넘었다. 마음이 조금씩 급해짐을 느낀다. 순간 늘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시험장에선 연습하듯이, 침착하고 편안하게 하라’는... 그런데 지금의 나를 바라보니 연습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실전과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시험은 오늘만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편안함을 누리는게 합격보다 더 중요하고, 세상의 하고 많은 일 중에서 이깟일로 떨게 뭐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나니 갑자기 긴장이 놓이고 마음이 편해졌다. 양념찾느라, 수저 찾느라 허둥대던 동작이 조금 안정됨을 느꼈다.
먼저 달걀지단을 부쳐야할 것 같아서 팬을 불에 올린 후 달걀깨트려 소금뿌리고 노른자부터 지단을 부쳤다. 노른자는 얇게 만들어졌는데, 흰자는 좀 두꺼운 느낌이 들었다. 흰자 익는 동안 오이와 도라지를 물에 헹궈 행주로 물기를 제거했다. 그리고 먼저 오이부터 볶았다. 다음 도라지를 볶고, 숙주는 소금 조금 넣고 볶았다. 당근도 기름 더 둘러 소금 좀 넣고 볶고, 양파를 볶았다. 그 다음 쇠고기를 볶고 표고를 볶고 목이도 볶았다. 모두 다 볶아서 접시에 이쁘게 둘러놓았다. 노른지단을 채썰고 나서, 흰자를 채썰려고 하다가 요구사항을 다시 읽어보니 황백지단은 0.2cm라고 되어 있었다. 흰지단이 좀 두껍게 된지라 0.2cm가 넘지 않도록 신경섰다. 그리고 흰지단이 많을 것 같아서 절반만 썰어 준비하고 나머지는 검은비닐에 담아버렸다.
그런데 이때 방송이 나왔다. “남은시간 10분입니다!”하는 것이었다. 볶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센불로 단숨에 볶아버리면 될 것을 지적지적대고 있었는 모양이었다. 아뿔사! 10분밖에 안 남았다니...! 아직 북어보푸라기도 안했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제출하고 있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리 연습하는 마음가짐을 가진다해도 시간내에 제출하지 못하면 이거 무슨 망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마음가짐은 연습이되 제출시간은 실전이었다. 얼른 당면을 냄비에 올리고 불을 켠후 북어보푸라기를 갈았다. 북어손질을 좀 해야할 것 같은데, 그럴 틈도 없을 것 같았다. 대가리만 떼어내고 반을 꺽은 다음 고운살쪽을 마구 갈았다. 강판을 새것으로 준비해서 그런지 아님 북어가 부드러워서 그런지 학원에서 실습할 때보다 쉽게 갈렸다. 시간이 촉박하다고 여긴 때문인지 손이 떨리는 느낌이 들면서 강판잡고 있는 팔이 막 떨렸지만 최대한 속력을 내어 북북 박박 갈았다. 어느정도 갈고 나서 시간을 더 끌면 안될 거 같아서 아직 절반 가까이 남았지만 강판 뚜껑을 열어보니 양이 제법 되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남은 것은 나머지는 모조리 쓰레기봉지에 담았고 보푸라기에 설탕, 참기름 넣어서 막 비볐다. 3덩어리 분리 하고 한덩어리는 그냥 접시에 담고, 또 하나엔 간장을 넣어 마구 비볐다. 색깔이 조금 짙어졌다 싶어서 그냥 담고, 또 나머지에 고춧가루 반티스푼 넣고 박박 비볐다. 고춧가루 넣을 때 수저도 퍼담아야 하는데, 수저잡을 여유도 없어서 손가락으로 막 집어넣었다. 대충 담아서 북어보푸라기를 끝냈다. 북어보푸라기 끝내는데 5분도 안 걸린 것 같았다.
그 사이 끓고 있는 당면이 끓고 있었다. 익었는지 확인해야하는데 그냥 눈으로 보니 투명해 보여서 얼른 찬물에 헹궈서 행주로 물기제거한 다음 세도막 잘랐다. 다시 팬에 올려 설탕, 간장, 참기름 조금씩 넣고 후룩 볶다가 준비한 재료 모두 섞어서 같이 볶아서 접시에 쏟아 담고 나니 2분 남았다는 방송이 나왔다. 이제 지금 모두 갖고 나오라고 한다. 가까스로 다 된 것 같은데 잡채를 다시 살펴볼 시간이 없었다. 담을 때도 순서가 있지만 바쁜 와중에 그냥 쏟아부어도 지단을 올리니 보기 괜찮은 것 같았다. 윤기도 나는 것 같고해서 들고나갔다. 어휴,, 1분정도 남기고 가까스로 시간내에 제출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작품들을 둘러보니 정말 형편없이 담아낸 접시들도 보였다. 그 중엔 그래도 내 것이 못생겨 보이진 않았다. 직감적으로 60점은 넘었을 것 같았다. 감독관들이 제출작품을 평가하면서 헤집어보기도 하고 먹어보기도 했는데 잡채가 안 익었으면 어쩌나 싶었다.
내 앞자리 학생은 아직도 작업중이었는데, 종료될 때까지 제출하지 못했다. 둘러보니 제출못한 사람이 여럿 보였다. 숨가쁜 55분이 지나갔다. 설거지도 위생점수에 포함된다는 감독관의 설명이 있었다. 그릇과 작업대, 양념대 모두 물기하나 없이 깨끗하게 씻고 싱크대 오물거름망까지 청소했다. 쓰레기는 뒤에서 모으고 있어서 주고 나오니 선생님과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수고 했다면서 잘 했는지, 시간내에 제출했는지 물었다. 제출하긴 했는데 잡채가 확실히 익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잡채를 삶고 나서 잘라 주었냐고 물었다. 잘랐다고 하니까 그러면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 같이 시험보러간 학생들 모두 제시간에 제출했다고 한다. 그 중에 한명은 수험생중에서 가장 빨리 제출했다고 한다. 평소에도 가장 빨리 제출하던 분이었는데, 역시 실전에서도 그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여간 이번 시험은 운이 좋아서 그런지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였던 것 같고, 무난하게 끝난 것 같았다.
난 2교시 시험이었는데 1교시엔 비빔국수와 북어찜이 나왔고, 3교시엔 어선과 생채가 나왔다고 한다. 어려운 종목일수록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유리하다고 해서 어선을 열심히 연습했는데(머리속으로만) 나오지 않아서 조금 아쉬운 감도 들었다. 어쨌든 시험은 다 끝났고, 그간의 결실이 일주일후면 발표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불합격할 확률은 없다고 여기지만 이제 겸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리라. 그리고 다음 시험을 또 보게 된다면 더욱 숙달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설 것이다. 이번 시험에 잡채나 북어보푸라기 모두 실습시간에 단 한번 밖에 해보지 않았지만 그리 막히지 않고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세세한 가르침 덕분이기도 했고, 상상조리가 의외로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먼저 머리에 떠오르기만 하면 손발은 따라가기 마련이니까. 그간 늘 미소를 잃지 않고, 자상하고 꼼꼼하게 가르쳐주셨던 학원선생님 얼굴이 떠오른다. 수업중에 어떤 질문을 해도 논리있게 대답해주시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강의하시면서 만든 작품은 대다수 실기교재에 나온 사진보다 언제나 멋지게 만들었다.
나는 사실 요리에 대해서는 정말 문외한이었다. 요리책을 뒤적여보기도 하고 사이트에 올라온 레시피를 흉내내 보려고 했지만 요리다운 요리를 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요리학원을 다니게 된 건 자격증 때문이었는데 조리사 자격증은 해외취업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조리관련학과에 무시험 전형도 가능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사이 나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에서도 깜짝 놀랄일이 벌어졌다. 한달간의 이론수업을 거쳐, 지금까지 두 달도 채 안되게 실습을 해오는 동안 어느새 제법 숙달된 요리사로 변신해 있었던 것이다. 정말 혼자서 배우는 요리와 선생님을 통해 자세한 가르침을 받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컸다. 학원에서 가르쳐준대로 집에서 실습해보면 식구들이 어쩜 이렇게 깔끔하고 맛있게 만들었냐고 감탄들을 한다.
밥, 국, 찌개, 국수, 만두, 죽, 조림, 볶음, 찜, 무침, 전, 구이, 장아찌, 생채, 후식 등등 한식의 많은 종류를 느끈하게 요리해내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놀라웠다. 그 뿐만 아니라 요리의 윈리와 기본을 마스터하게된 덕분에 그저 어깨너머로 배워서 요리하는 일반 주부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요리에 걸맞는 재료와 양념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든가 주재료와 어울리는 부재료를 선택하는 일, 또 각 재료의 크기나 모양을 잡는 일, 또 그릇에 아름답게 담아내는 일 등, 그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불과 두 달 새에 일어난 것이다. 그저 책에서 멀리 그림으로만 있던 요리가 나의 손끝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님께 배운 많은 노하우들은 책에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보고, 들으면서 배우고, 또 하루에 두 가지씩 직접 만든 것에 대한 세세한 평가가 매일 되풀이 되면서 어느 틈에 요리전문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요리에 있어서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주고, 또 제출한 요리작품을 평가하여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해주는 선생님을 모시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집에서는 어떤 요리를 만들면 맛있다 없다하는 평가만 있었는데, 학원에서는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고쳐야하는지를 지도 받을 뿐만 아니라 많은 학원생들이 만들어 제출한 요리의 심사평을 들으면서 정말 큰 공부가 되었던 것 같다.
매일 한 두 시간 학원에서 공부한 것을 집에서 꼭 복습했고, 다음날 공부할 내용을 집에서 예습했다. 실습을 할 여건이 안 되는 날은 틈나는 대로 머릿속으로 조리대를 만들어 상상조리를 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거나 걸어갈 때도 조리순서를 떠올리곤 했다. 실습초기에는 금방 만드는 것을 보고 강의를 듣고 나서도 뭣부터 먼저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노트에 순서를 꼼꼼하게 적어서 다시 읽으면서 연습하곤 했다. 하지만 조리하면서 노트를 보고 하는 게 작업이 더디고, 허겁대는데다 시간초과의 요인이 되었다. 그런데 식당 개 삼년이면 라면을 끓인다고 하는 말이 있던가, 한달정도 지날 무렵 갑자기 조리순서가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요즘엔 메모를 하지 않아도 순서가 머릿속에 다 들어오는 느낌이다. 이젠 선생님이 꼭 강조하는 부분이라든가 잊기 쉬운 부분만 메모하면 그 뿐이다.
그저께는 식구들이 수박을 사다 먹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학원에서 배운 오이숙장아찌나 무숙장아찌를 수박껍질로 만들면 어떨까 싶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식구들이 수박껍질로 만든 것인 줄 모르고 맛있게 먹었는데 수박껍질 인 것을 알고 모두 감탄을 했다. 요리의 이론과 원리를 알고나니 어떤 재료가 주어지든 응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학원 다닐 시간이 여의찮아서 그냥 책으로 공부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실습이 부족할 것 같아서 다니게 되었는데 그것이 정말 행운으로 여겨진다. 만일 얼렁뚱땅 독학으로 조리사 시험에 합격했다면 지금처럼 조리원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우지도 못한 채 평생 돌팔이조리사로 지낼거라는 아찔한 생각도 들었다. 선생님 말씀대로 정말 요리는 생명의 예술이었고, 조리사는 시각, 미각, 후각과 함께 몸과 마음을 행복하게 하는 종합예술가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혼자 집에서 간단한 거 하나라도 요리하면 주방이 아수라장이 되곤 했는데 지금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만들어도 얼마나 깔끔한지 모른다. 도마위엔 작업중인 재료를 한가지 이상 올리지 말아야 한다든가, 손질한 재료는 항상 접시에 가지런히 놓는다든가 하는 조리시의 수많은 기본사항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힌 덕분에 이젠 뭐 하나 할 때마다 난장판처럼 벌려놓는 습관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어제도 순두부찌개, 두부조림, 육원전, 더덕생채, 탕평채를 하는데, 내가 생각해도 정말 신기할 정도로 주변은 항상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깔끔했다. 접시나 그릇에 준비된 재료를 하나씩 정리해서 다시 이쁘게 담으면서 정리와 손질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인 것 같은데 이런 습관이 어느틈에 내 손에 배어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게다가 작업시간은 정말 빨라졌다. 재료는 종목별로 담아놓고, 씻거나 썰거나 볶거나 같은 작업끼리 묶어서 해내고, 먼저 완성해야할 메뉴부터 만들면서 주변을 항상 정리해가면서 하니 다섯가지를 다 하는데도 한시간 정도밖에 안 걸렸다. 불가사의한 일이 이런 허접떼기 요리만 하던 내게 일어나다니 난 요즘 내자신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또 ‘요리는 청결로 시작해서 청결로 끝내야 한다‘라든가, ’요리는 칼과 그릇을 준비하면서 시작되고, 각종 도구의 원위치로 마무리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맨날 지적당하면서 이젠 몸에 배어서 그런지 그전에 그렇게 귀찮던 설거지가 즐거운 요리의 한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맛있게 먹어준 식구들의 환한 얼굴을 보고나서도, 설거지가 끝나고 반짝 반짝 빛나는 그릇을 볼 때 요리를 통해 생명을 살리고 행복을 이끌어낸 뿌듯함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음식을 할 땐 정성스럽게 하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정성을 들이는 방법을 모르면 아무리 정성을 들이려 애를 써도 음식에 정성이 깃들지 않는다. 예전엔 정성스럽게 요리를 한다고 했는데도 이렇게 엉성하게 했냐는 소릴 듣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맥도 모르고 침통을 흔든 격이었다. 원리원칙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정성을 쏟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제 단순한 요리를 한가지 하더라도 정성들이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열심히 노력하는 일이 가치를 가질 때 그 노력이 아깝지 않고, 오히려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정성을 눈과 코와 입으로 확인하면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식구들을 생각해보면 요리할 시간이 마구 기다려진다. 요리는 정성이고, 요리는 사랑이라는 선생님 말씀이 떠오른다.
칼한자루를 갖고 따뜻한 정성과 사랑이 샘물처럼 솟아나게 만드는 생명예술가의 길을 걸어가며 시험후기를 마칩니다.
첫댓글 모든이들이 공유할수 있는 아름다운 요리들이 쏱아져 나오리라는 벅찬 기대감을 가지고 부족함을 메꾸기위해 노력 하시는 소중한 한분 한분의글 사랑합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쭈욱 읽을 수 밖에 없군요^^ 세세하게 써주신 덕분에 큰 도움 얻습니다. 참고로, 전 5월 실기셤 준비중이예여~**
안녕하세요? 저는이번 7월18일에 필기시험을 계힉하고있습니다 종목은 양식이지만 님의 글이 많은 도움이 될것같아요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하며 멋진 조리사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