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 주님 승천 대축일 - 전야 미사
입당송 1베드 2,9 참조
너희는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시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주님의 위업을 선포하여라. 알렐루야.
본기도
주님,
저희에게 언제나 옳은 일을 가르쳐 주시어
저희가 날마다 더 옳은 일에 힘쓰며
파스카의 신비를 온전히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아폴로는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8,23-28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 23 얼마 동안 지낸 뒤 다시 길을 떠나,
갈라티아 지방과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쳐 가면서
모든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24 한편 아폴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달변가이며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25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알고 있던 그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정확히 가르쳤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그의 말을 듣고 데리고 가서
그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27 그 뒤에 아폴로가 아카이아로 건너가고 싶어 하자,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그곳의 제자들에게 그를 영접해 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아폴로는 그곳에 이르러,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미 신자가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28 그가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면서,
공공연히 그리고 확고히 유다인들을 논박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시편 47(46),2-3.8-9.10(◎ 8ㄱ)
◎ 하느님이 온 누리의 임금이시다.
또는
◎ 알렐루야.
○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 경외로우신 분, 온 세상의 위대하신 임금이시다. ◎
○ 하느님이 온 누리의 임금이시니, 찬미의 노래 불러 드려라. 하느님이 민족들을 다스리신다. 하느님이 거룩한 어좌에 앉으신다. ◎
○ 뭇 민족의 귀족들이 모여 와, 아브라함의 하느님 그 백성이 된다. 세상 방패들이 하느님의 것이니, 그분은 지극히 존귀하시어라. ◎
복음 환호송요한 16,28
◎ 알렐루야.
○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 알렐루야.
복음<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23ㄴ-2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25 나는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을 비유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가 온다.
26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27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8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저희가 드리는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영적인 제물로 받아들이시어
저희의 온 삶이
주님께 바치는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7,24 참조
아버지,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하시어,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소서.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하신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성자께서 당신 자신을 기억하여 거행하라 명하신 이 성사로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이방인들은 신의 이름을 거듭 부르면, 신을 조종하여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주실 것이다.” 하신 말씀은, 그러한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오직 아버지의 뜻만 생각하신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내 뜻만 고집하기보다 먼저 그분의 뜻을 찾고 나의 의지가 그 뜻에 일치되기를 청하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십니다. 그 성령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충만한 기쁨, 이해와 깨달음, 아버지의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여야 할 것은 무엇보다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아버지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결정적으로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께 직접 청하고 사랑과 기쁨을 받아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 제1독서에서 아폴로는 예수님을 증언한 탁월한 설교가였지만 요한의 세례만 아는 이, 곧 성령의 세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로 말미암아 성령을 알게 되고, 마침내 바오로가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1코린 3,6)라고 말할 정도로 하느님의 소중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문득 ‘내가 하느님께 무엇을 간절히 청한 때가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아버지께 필요한 은총과 성령을 청하는 자녀의 삶으로 서둘러 돌아갑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강수원 베드로 신부)
형님 집에 놀러 갔다가 어린 조카 녀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네 살 동생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여섯 살 오빠가 빼앗으려다가 싸움이 난 것입니다. 집안 여기저기에 수많은 장난감이 쌓여 있는데도 동생의 장난감이 탐난 모양이었습니다. 동생도 만만치 않습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용을 쓰다가 장난감을 끌어안은 채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오빠가 흠칫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납니다. 그러고는 곧장 엄마에게 달려가 “나 저 장난감 가지고 놀고 싶어요.”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두 아이 사이에서 형수는 엄마로서 먼저 오빠에게 충고합니다. 동생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다른 장난감도 많으니 그걸 가지고 놀라고. 그러고는 네 살 동생에게도 오빠랑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고 다독입니다. 여섯 살 조카 녀석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집안은 다시 평화로워집니다.
입시 철이 다가오면,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해 달라는 부모들의 기도가 줄을 잇습니다. 미사와 기도의 지향에 대 놓고 ‘합격하게 해 달라.’는 말은 못 하지만, 결국 그런 의향으로 미사도 봉헌하고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 기도를 들으셔야만 하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난처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합격하면 좋겠지만, 누군가가 합격하면 누군가는 불합격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합격하게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정의와 공정의 하느님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하느님, 내 가족만을 위한 하느님이 되어 주십사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가지고 놀고 싶으니, 엄마에게 동생의 장난감을 빼앗아 달라는 여섯 살 아이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을 묵상하며, 먼저 우리가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만을 위하여 하느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지는 않은지요?(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오늘 미사의 본기도는 우리가 날마다 간절히 바쳐야 할 기도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언제나 옳은 일을 가르쳐 주시어, 저희가 날마다 더 옳은 일에 힘쓰며, 파스카의 신비를 온전히 실천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이가 날마다 더 옳은 일을 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베푸시는 자비, 주님의 사랑인 은총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모든 것에 앞서 가장 옳은 일인 당신의 복음을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제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며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당신 집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하느님 구원 업적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며,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길로 초대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주님을 전하는 모든 이, 우리의 부모님, 형제, 친지, 그리고 우리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그분과 일치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 줍니다. 주님과 일치한 이들이 바치는 기도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들어주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기도란 바로 주님의 제자들이 온전한 믿음과 사랑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성부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믿음과 사랑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 ‘항구함’을 잃어버리고 많은 시련과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께 ‘항구함의 은총’을 얻으려면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 주시는 것을 받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노력은 바로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와 관심과 사랑의 실천에서 드러납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것을 청하고 누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름’은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표징이었습니다.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상대를 나의 삶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고, 삶을 나눌 친구이자 가족으로 여기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청하는 것도 그분의 존재에 나의 존재를 살며시 포개어 놓고 서로를 생각하고 나누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먼저 예수님의 삶을 좇고, 그 삶이 지향하는 가치를 되새기며,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 되어 말씀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힘이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가 예수님을 통하여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교는 이 세상에 구원의 소식이 널리 퍼져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뜻이 곧 우리 신앙인의 뜻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심전심’이라고 할까요? 내 마음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 안에 함께할 내 마음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시듯, 우리의 삶이 오롯이 하느님을 향할 때, 우리는 우리만의 청이 아니라 이 세상과 그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실천하는 것으로 우리의 청을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말하기만 하면 바라는 그 모든 것을 이루어 주는 마술적인 주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우리가 청원 기도를 드리는 그 순간에도 성부이신 하느님과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신적 일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여 기도하는 그 순간에 내 마음에 사적 욕심이 끼어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나오는 충만함과 기쁨으로 이미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기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을 받느냐가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서 느끼는 기쁨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나를 사랑하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체험은 내적인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이 넘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드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아버지께서 주십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시는지 잘 모릅니다. 그보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것은 간절히 청할 때 기쁨이 넘친다는 사실이고, 그 기쁨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끼게 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물론 청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야 합니다.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이라는 단서를 붙이지 않으셨습니까?
기도의 순서도 중요합니다. 먼저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이어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잘못에 용서를 청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뒤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한 강복을 청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청하는 것은 맨 마지막 단계에 놓아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정성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직전에 약간의 여유를 두고,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면서 성령께 기도의 은총을 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의력을 집중시키면서 내가 바라는 은총이 주어지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도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지요. 그만큼 우리가 기도해야 할 대상은 많지 않습니까? 가족과 친척, 가까운 이들에게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회개, 고통받는 이, 병자, 연옥 영혼들, 성직자와 수도자, 나라의 위정자들은 물론 세계의 평화와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은총을 가득 내려 주실 것입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청하려면, 그 이름이 가진 권위와 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능력과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고백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기도 끝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이라고 합니다.
3-4세기에, 예수님을 한낱 인간으로 여기고 다만 하느님의 능력을 얻으신 분이라고 폄하해 온 아리우스 이단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단과 투쟁하며 많은 교부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라는 신앙을 지켜 냈습니다. 그 바탕에 단순하면서도 간절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살아온 신자들의 ‘신앙 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 감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보았고, 자비와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게 해 주신 분이심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주실 것이고,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만 나의 관심과 마음이 아닌, ‘예수님의 지향과 마음’으로 기도할 때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폴로라는 유다인이 지닌 달변과 성경에 정통한 능력을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열정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느님의 지혜를 전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통하여 성장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의 능력을 내 이익의 도구로 삼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는 힘으로 청할 때 관계 속에서 내가 성장합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보이지 않는 힘이 되는 내 배우자와 가족, 형제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용기를 가져 봅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우리는 자주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하고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통로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과의 우정”을 이야기합니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친구를 만났을 때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그러한 친교의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으로부터 선택받고 사랑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가 됩니다. 기도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기억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하며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내걸면서, 실제 삶에서는 예수님과 전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기도는 가짜 기도일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을 내걸면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것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기도 역시 가짜 기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예수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헤아리고 그 정신에 맞게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가 빠진 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요술사가 주문을 외우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에 귀 기울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지도층은 사도들과 순회 설교가들과 선교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계속 격려하고 가르치면서 그들이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도록 보살폈습니다. 그러나 코린토 교회에는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1코린 1,12) 하면서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바오로 사도의 증언을 살펴볼 때,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언변이 좋은 아폴로는 아마도 여러 가지로 그를 궁지에 몰아넣거나 바오로에게 어려운 문제를 던져 주어 공동체의 일치를 위협하던 한 집단의 우두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에 따르면 그는 과거를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복음의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신앙 공동체 안에서 힘을 얻습니까, 아니면 본당 공동체 안의 삶이 짐스럽고 지치게 합니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어 줍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듭니까? 주님 안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삶은 그리 녹록치만은 않은 것 같아 걱정입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실망하거나 당혹스러워하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의 말씀은 커다란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오늘 독서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부활과 복음의 기쁨으로 공동체에 활력이 넘쳐흐릅니다. 서로에게 그 기쁨과 활력을 전해 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전해 주는지 살펴봅시다. 바오로는 갈라티아와 프리기아 신자들의 힘을 북돋아 주고, 아폴로는 에페소에서 열정을 가지고 가르치며 담대하게 설교합니다. 프리스킬라와 아퀼라가 아폴로에게 가르침을 주고 형제들도 그를 격려합니다. 격려를 받은 아폴로는 다시 아카이아에서 신자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이와 같이 초기 공동체는, 사도나 선교사만 신자들을 가르치고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모두 서로 격려하면서 믿음을 키워 주고 가꾸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복음에서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면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에, 갈등과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 공동체라 하더라도 사도들처럼 문제를 해결하려고 먼저 그분께 겸허하게 간청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노력한다면, 보호자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이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복음 말씀대로 우리 기쁨은 충만해질 것입니다.
아울러 이 기회에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복음의 기쁨』 첫머리)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기쁨이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힘과 용기와 희망과 활력을 줄 수 없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 이는 복음을 믿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행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나의 건강도 재물도 재능도 오히려 다 거두어 가셨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절실해졌고 간절해졌습니다. 숨 쉬며 걸을 수 있는 것도, 한 조각의 빵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어느새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것 하나하나를 모두 감사하게 되니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지만, 사실은 엄청난 은총을 얻어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글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총은 깨닫지 못하고 우리의 부족함만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행복은 우리 곁을 떠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행복을 청원하고 싶다면 기도드릴 때도 삶의 부족함을 채워 주십사고 하기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을 깨닫고 그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십사고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삶의 어떤 것에 목이 마르고 무언가가 부족한 것 같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만이라도 다 헤아리고 감사드릴 수 있어도 우리의 부족함은 사라질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것을 바라기보다 주님을 더 깊이 깨닫고 알기를 바라게 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단순히 주님의 호칭으로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이 되어 ‘주님의 마음으로 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세상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것을 우리가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청원 기도가 주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로 더 성숙하고 깊어져야 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이름에는 힘이 담겨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끝맺어 왔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은 부모를 찾습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찾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찾습니다. 다급하면 부모 생각을 먼저 하도록 길들여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는 것도 주님과 ‘그러한 관계’를 만들며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미끼가 먹음직스러워 보이기에,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물고기가 잡힙니다. 걱정만 보이는 것 같더라도, 어딘가에 있을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어린 시절처럼 부모님 생각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신앙인의 부모님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부르는 것은 부모님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좋은 관계’를 그분께서 맺어 주셨습니다. 자녀인 우리가 행복하게 살도록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는 자신에게 일어난 ‘좋은 일’을 먼저 떠올려 봐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다가 깜짝 놀랐던 일이 기억납니다. 아마 늦은 봄이었을 것입니다. 친구들과 성당 마당에서 재미있게 노는데, 한 친구가 “눈 온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후드득 떨어지는 것입니다. 얼음덩어리인 우박이었습니다. 눈인 줄 알고 맞았다가 따끔하고 아파서 얼른 우박을 피했습니다. 다행히 금세 그쳤지만, 우박의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했던 날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박으로 농산물 피해가 크고, 단단한 차에도 커다란 흠집을 내지 않습니까? 그때 우박의 크기가 훨씬 컸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렇게 크지 않았음에도 따끔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가정을 해 봅니다. 눈 대신 매번 커다란 우박이 떨어졌다면 어떨까요? 그렇지 않음이 정말로 다행스럽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께 감사드릴 이유입니다.
생각해 보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불평불만만을 늘어놓습니다. 감사할 일이 없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불평불만 거리만 찾고 있으며, 이런 것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본당 신부를 하다 보니 완전히 초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솔직히 의욕이 넘쳐서 부족한 부분을 많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형편없는 강론도 잘 들어주시는 것 역시 감사합니다. 주일 미사에 충실히 나와주시는 것도 너무 감사합니다. 신나게 떠들면서도 성가를 힘차게 부르는 어린이들, 공부할 것이 그렇게 많은데도 미사와 교리에 참석하는 청소년들, 할 일이 많은데도 열심히 미사에 나오는 청년들, 세상의 힘듦 속에서도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신자들…. 모두 감사한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니, 제가 얼마나 행복한 본당 신부인지를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사할 일을 너무 많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감사할 일을 찾는 데 집중한다면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주시고 감사할 일을 주시는 주님임을 받아들여야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기쁨 안에서 우리는 계속 주님께 청할 수 있고, 또 이런 믿음으로 청하는 사람만이 주님께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불평불만의 이유를 찾는 것보다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 노력이 쓸데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당신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오드리 헵번).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꼭 유념해야 할 사항 한 가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최근 우리가 계속 봉독한 요한복음 내용은 예수님의 고별사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고별사는 절정을 향해 나아갑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3~24절)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표현 중에 ‘진실로 진실로’란 표현이 있습니다. 100 퍼센트 확실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면 100 퍼센트, 꼭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꼭 유념해야 할 사항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 내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아무 것이나 죄다 청해도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할 때, 허무맹랑한 청원, 황당무계한 청원, 낯부끄러운 청원, 유아기적 청원은 해서 안 될 것입니다. 청원 기도에도 식별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들의 청원 기도에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개입되기 십상입니다.
유한한 우리들의 불사불멸을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의 작은 노력은 뒷전인 채,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바뀌는 동화 같은 인생의 반전을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인간 측의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느님 아버지께만 공을 넘겨 드려서도 안되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나 자신의 인생과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청해야겠습니다. 결국 우리의 청원기도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드린 기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가 원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무엇을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을 것인가에 대해 신경을 좀 껐으면 좋겠습니다. 그보다는 기도 중에 하느님 아버지와 나 사이에 오고 가는 깊이 있는 영적 친교에 더 큰 방점을 찍어야겠습니다.
기도 중에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 그분 앞에 내가 앉아 있고, 그분께서 내 안에 현존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있고, 그분께서 사랑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왕이 자신이 아끼는 신하에게 “무엇이든 소원 한 가지를 말하라.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신하는 과연 어떤 것을 청할까요?
한 가지만 청하라 했으니 아무래도 심사숙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 청할 것 정말 크게 한 가지 청할 것입니다. ‘현금으로 백만 원을 주세요.’ ‘땅 다섯 평만 주세요.’라고 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평생 먹고 정도의 돈인 ‘10억만 주세요.’ 아니면 ‘넉넉한 퇴직금이나 연금이 보장되는 장관 자리 하나 주세요.’ 라고 청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청입니다. 이왕이면 드리는 청, 보다 큰 청, 보다 중요한 청을 드려야겠습니다.
인간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할 작은 고통 하나, 눈 녹듯이 없애 달라고 청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그 고통을 잘 극복할 힘을 청하고, 그 고통 안에 담긴 하느님의 큰 뜻을 이해할 능력을 청해야겠습니다.
다양한 한계와 약점 지닌 존재이기에 필연처럼 짊어져야 할 매일의 십자가 없애주시기를 청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일상의 십자가 기꺼이 지고 갈 인내심을 청하고, 내 십자가 통해 주님의 십자가 묵상할 지혜를 주시라고 청해야겠습니다.
부초처럼, 뜬구름처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 보다는 보다 영원한 것, 보다 가치 있는 것, 보다 불멸하는 것,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 구원에 합당한 자격을 청해야겠습니다.
더불어 하느님의 성령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 한 가운데 성령께서 현존하시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갈 힘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더 영적으로 변화되기를, 고통을 기쁘게 견뎌낼 용기를 주시기를,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과 기꺼이 직면할 당당함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