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상궁이었던 외조모
나의 외할머니는 조선의 마지막 상궁이셨다. 외할머니의 생신은 1887년 정해년 3월 19일로 유성 후암선원에 모신 계룡산 여산신님과 생년월일이 같으시고, 나와는 60년 차이 나는 정해년 띠 동갑으로 항상 나를 ‘한 갑자 친구’라고 부르시며 특별히 귀여워하셨다.
은진 송씨 양반 가문의 딸로 태어난 외할머니는 외롭고 힘든 궁궐 생활을 하셨다. 일본이 고종황제를 독살하고 강제로 영친왕을 일본여성과 결혼시키는 과정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셔야 했다.
외할머니의 자매들은 영친왕의 친구와 결혼하거나, 신여성으로 외국유학을 떠나 뛰어난 예술가로 살아가셨지만, 외할머니는 궁궐에서 왕실의 요리비법을 배우거나 왕실에서만 구할 수 있는 책들을 읽으시면서 고통스러운 궁궐 생활을 이겨내셨다고 한다.
외할머니의 수라간 친구 중에는 조선 궁궐 문화의 산증인이자 학술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계시는 H여사가 있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과 결혼한 이방자 황태자비를 모신 H여사는 평생을 왕실의 의식주 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노력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궁궐 생활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일본이 조선의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궁궐에 최소 인원만 남기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외할머니는 할 수 없이 출궁을 하게 되셨다. 본래 상궁은 죽어야만 궐 밖으로 나올 수 있었기에 하루아침에 출궁당한 상궁을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외할머니는 송도의 유명한 상인인, 중인 출신의 외할아버지와 늦은 나이에 혼례를 올리게 되셨다.
나는 운 좋게 왕실 수라간 출신이신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외할머니의 요리솜씨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셨다. 예술의 경지에 오른 요리라고나 할까. 외할머니의 뜨끈뜨끈한 콩나물 국밥은 정말 신기한 맛이었다. 아무리 봐도 콩나물 한줌에 소금 한줌이 다인 것 같은데 맛은 한 마디로 끝내주었다.
특히 외할머니의 김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외할머니의 김치는 시원하면서도 달고 적당히 매웠다. 그런 김치를 매일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외할머니께서 김장을 담그실 때마다 나는 그 옆을 지켰다. 김장을 담그시는 모습이 큰 구경거리기도 했지만 외할머니께서 돌돌 말아 내 입에 넣어주시는 김치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외할머니, 김치는 어떻게 담가요?” 그러자 외할머니께서는 “김치는 잘 담그려고 하면 안 된다. 김치에 영혼을 담아야 해.”라고 대답하셨다. 당시 열 살도 안 되던 나에게 그 말은 어려운 숙제였다.
외할머니는 김장하실 때마다 홀로 방문을 닫고 들어가 비법 양념을 만드셨다. 하루는 어떻게 양념을 만드시는지 궁금해 몰래 방문을 열어보았다.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외할머니는 디딤돌에 떨감(아직 익지 않은 떫은맛의 파란 감)을 올려놓으시고는 부지런히 썰고 다지시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비법 양념에 떨감이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김치 속을 버무리는 국물도 다른 국물은 쓰지 않고 소뼈를 푹 고아 만든 소뼈 국물만 사용하셨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비법양념을 만드시는 장면을 몰래 훔쳐 본 나는 ‘저게 우리 집 김치의 비법이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그 양념이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들어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외할머니의 김치 비법은 어머니에게로 전해졌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공주 경찰서장으로 계셨을 때, 그 지역 교육계 인사의 부인에게 김치 비법을 전해주셨다고 한다. 훗날 그 분은 한국전통요리의 대가가 되셨으니 어쩌면 그 분을 통하여 외할머니의 김치 비법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게 된 셈이다.
어느 김치전문가가 말하길, 김치는 다섯 번 죽어야 진짜 김치가 된다고 한다. 배추가 뽑힐 때 죽고, 칼로 다듬을 때 죽고, 소금에 절일 때 죽고, 양념에 무칠 때 죽고, 마지막으로 김장독에 묻힐 때 죽는다고 한다. 맛있는 김치를 먹기 위해서 김치는 무려 다섯 번이나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치를 만드는 어머니의 손맛만큼은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가족의 자랑인 김치의 손맛은 영원히 변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