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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광송신경교중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업을 완수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음을 기리는 주님 승천 대축일이다. 교회는 주님 승천 대축일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사십 일째 되는 부활 제6주간 목요일에 지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부활 제7주일로 옮겨 지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대중 매체를 통하여 효과적으로 교회의 사도직을 수행하고자, 각 나라에 홍보의 날을 제정하기를 권장하였고, 이에 따라 1967년 ‘홍보의 날’이 제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부터 기존의 ‘출판물 보급 주일’과 통합하여 해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을 ‘홍보 주일’로 지내고 있다.
오늘 전례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며 홍보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을 기뻐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립시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우리 인간의 품위를 들어 높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로 다짐합시다.
입당송 사도 1,11 참조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주님은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알렐루야.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저희를 들어 높이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기쁨에 가득 차 감사의 제사를 바치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올라가신 하늘 나라에
그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또는>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 구세주이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하늘로 오르셨음을 굳게 믿사오니
저희가 하늘에서 아드님과 함께 길이 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제1독서<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다.>
▥ 사도행전의 시작입니다.1,1-11
1 테오필로스 님,
첫 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분부를 내리시고 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다 다루었습니다.
3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에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6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8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10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시편 47(46),2-3.6-7.8-9(◎ 6)
◎ 환호 소리 가운데 하느님이 오르신다. 나팔 소리 가운데 주님이 오르신다.
또는
◎ 알렐루야.
○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 경외로우신 분, 온 세상의 위대하신 임금이시다. ◎
○ 환호 소리 가운데 하느님이 오르신다. 나팔 소리 가운데 주님이 오르신다. 노래하여라,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노래하여라, 우리 임금님께 노래하여라. ◎
○ 하느님이 온 누리의 임금이시니, 찬미의 노래 불러 드려라. 하느님이 민족들을 다스리신다. 하느님이 거룩한 어좌에 앉으신다. ◎
제2독서<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1,17-23
형제 여러분,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19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21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마태 28,19.20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끝입니다.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보편 지향 기도<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빛이신 주님, 주님 말씀을 날마다 되새기는 교회를 이끌어 주시어, 주님께서 하늘로 오르시며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신 말씀을 언제나 기억하며 실천하게 하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샘이신 주님, 불의와 폭력으로 분열되고 고통받는 세상을 보살펴 주시어, 온 인류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도와주소서.
3. 홍보 주일을 맞아, 교회 홍보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 홍보 매체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그들이 올바른 양심과 사명감으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스승이신 주님,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을 돌보아 주시어,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아 언제나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시며, 더욱 더 거룩하고 참된 삶으로 이끌어 주소서.
예물 기도
주님,
오늘 성자의 영광스러운 승천을 기념하여
저희가 봉헌하는 이 제사를 받아들이시고
이 거룩한 교환의 신비로
저희도 성자와 함께 하늘로 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주님 승천 감사송 1 : 승천의 신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광의 임금님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로서
(오늘) 천사들이 우러러보는 가운데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으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 세상의 심판자,
하늘과 땅의 주님이 되셨나이다.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함이 아니라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또는>
<주님 승천 감사송 2 : 승천의 신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모든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며
저희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마태 28,20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천사는 말합니다.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우리가 지니게 된 희망과 받게 될 상속의 영광을 알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쁘게 살아갑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이 성찬으로 세상에서 바로 하느님을 만나게 하셨으니
저희가 하늘 나라를 그리며 거룩하게 살아
마침내 하느님 곁으로 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그리스도의 강생과 부활과 승천은 단일한 구원 사건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요한 14,2). 주님께서는 지상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고, 우리는 그분을 따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의 승천으로 우리를 들어 높이셨습니다’(본기도 참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래아로 부르셨습니다(마태 28,10 참조). 그들이 처음 부르심을 받은 곳으로 말입니다. 주님을 버리고 숨어 버린 제자들이 그분을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섰던 그 첫 마음을 되찾도록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 갈릴래아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하신 말씀은 ‘전권 선언’(18절), ‘세례와 가르침의 명령’(19-20ㄱ절), ‘영원한 현존 약속’(20ㄴ절)이었습니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 명령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지상 명령’(Great Commission)으로, 교회의 가장 고귀하고 절대적인 사명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절대적 권능’과 ‘영원한 현존’은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알고 또 그분에게서 희망과 영광을 누리도록 이끄는 교회의 사명(제2독서 참조)이 세상 끝 날까지 이어지도록 요구합니다.
주님께서 오르신 하늘만 바라보던 제자들에게 천사들은 “왜 하늘만 쳐다보며 서 있느냐?”라고 말합니다(제1독서 참조). 우리는 하늘만 바라보는 공허한 신앙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가족과 이웃들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축복의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만났던 나만의 갈릴래아로 돌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고, 그분의 뒤를 따라 승천하는 삶의 여정을 새롭게 시작합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오른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을 목격하고 체험하였습니다. 더 이상 새롭게 체험할 거리가 없는, 그야말로 예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보고 느낀 이들이 지금 갈릴래아의 산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더러는 의심하였습니다. ‘의심하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 말의 본디 의미는 ‘주저하였다’입니다. 모든 것을 보았음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 주저합니다. 신앙이란 그런가 봅니다. 애써 노력해서 깨닫고 이해하였다 싶다가도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막막한 것이 신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성인이 이른바 ‘어두운 밤’과 ‘사막’을 겪었고, 또 지나왔습니다. 신앙하면서 체험하는 의심과 주저함은 신앙의 반대말이 아니라 신앙 그 자체입니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 신앙이고, 의심하고 주저하다가도 다시 힘을 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모습 안에 늘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멋지고 잘난 이들을 선별하시어 화려한 본보기로 내세우시고자 제자들을 부르시고 소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의심하고 주저하는 이들의 나약함 안에서 당신께서 몸소 움직이시고 가르치시고자 산으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 우리 삶의 자리를 조금씩 내어 드릴 수 있도록 오늘의 삶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 삶에 빈자리를 만드는 일입니다. 그 빈자리에서 천상과 지상이 온전히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승천의 참된 의미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하늘은 두 가지 표상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볼 때, 하늘은 나의 진심과 믿음을 확인해 주고 지켜 주는 든든한 보루가 됩니다. 또한 “하늘이 무섭지 않는가!”, “천벌을 받을”이란 표현에서, 하늘은 두렵고 공평하며 정의로우신 하느님을 고백하게 해 줍니다. 이렇듯 하늘은 경외감과 거룩함, 자비와 정의를 동시에 깨닫게 해 주는 가장 적절한 종교적 표상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간 제자들과 만나시며, 그들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전할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복음의 기쁨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든 민족들에게로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깨닫게 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신비, 그리고 협조자이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가르칠 것을 명하십니다.
하늘로 오르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넋을 놓고 쳐다봅니다. 성령을 기다리는 남은 기간 동안에도 불안과 의혹으로 다락방에 숨어 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힘이 된 예수님의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우리가 가끔 인생에서 불안해지는 것은 내 곁에 아무도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외감과 외로움 때문입니다.
우리의 참평화는 내 곁에서 누군가가 나를 든든히 지켜 주고 있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영광의 자리인 하늘로 오르심으로써, 하늘은 이제 우리 영혼을 지켜 주고 쉬게 해 주는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땅에 매여 사는 인생이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늘을 향해 삽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을 잊고 사는 이들이 하늘을 볼 수 있도록 곁에 머물며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께 받은 소명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성경에서 ‘갈릴래아’라는 말은 단순히 지명만을 가리킬 때 사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갈릴래아 사람’으로 불리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갈릴래아라는 말은 매우 인상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을 통하여 이르신 대로 갈릴래아로 가서 예수님과 만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그들에게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하고 말합니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사랑하신 곳이었고, 제자들은 바로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는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보자면 ‘변방’이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만나기 위하여 그 변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골뜨기, 곧 변방에서 온 이들로 여겨진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교회의 시작이 맡겨집니다. 변방으로 돌아가고, 중심지가 아닌 변방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20년 수형 생활의 옥중 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세간의 이목을 끈 신영복 교수는 오만하고 경직된 사유에서 벗어나는 길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변방을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변방에 대한 오해이다. 누구도 변방 아닌 사람이 없고, 어떤 문명도 변방에서 시작되지 않은 문명이 없다. 어쩌면 인간의 삶 그 자체가 변방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변방은 다름 아닌 자기 성찰이다. ‘변방을 찾아가는 길’이란 결코 궁벽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님을, 각성과 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변방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변방을 찾아서』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전하는 삶은 갈릴래아, 그 변방의 땅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삶 또한 주님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전교’라 하면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협박성 외침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교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 피부가 좋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 약국들 가운데 피부약이 좋기로 소문난 약국에서 지은 약을 발랐더니 며칠 만에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 뒤로 저는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그 약국을 자주 추천하였습니다. 전교도 바로 이러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 살아가는 데 뿌리가 되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어느 본당 신부님이 예비 신자 환영식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신부님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떻게 성당에 오게 되었는지 들어 보는데, 한 예비 신자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 성당 앞에서 10년째 슈퍼마켓을 운영해 온 사람입니다. 그만큼 이 성당에 다니는 분들이 우리 가게를 많이 찾아왔지요.” 여기까지 이야기할 때만 해도 신부님은 ‘아, 우리 교우들의 모범적인 모습에 감동받았거나 누구의 권면으로 오게 된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그의 말은 뜻밖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신자가 10년 동안 우리 가게를 찾아 주었는데, 단 한 사람도 저에게 성당 가자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기가 생겨 직접 제 발로 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본당 신부님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전하고 있습니까
어릴 적에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은 늘 저 멀리 하늘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 무한한 거리에서 빛을 밝히는 별을 바라보며 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영원성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우주에서 거꾸로 지구를 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구에서 수억 킬로미터 떨어진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은 그야말로 한 점 푸른빛을 내는 작은 별이었습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본다는 것은 마치 탁상 위에 작은 지구본을 올려놓고 바라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지구 표면에 사는 사람을 관찰하려면 다시 수십억 배로 확대할 수 있는 현미경으로 보아야만이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잘났다고 키 재기를 하며 사는 세상이지만, 사실 먼 우주에서 바라본 우리는 이렇게 현미경으로도 관찰하기 어려울 정도의 작은 생물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지구는 저 멀리 우주에서 바라보면 한 점 별이지만, 다시 땅 위에 발을 딛고 서서 하늘을 바라보면 지구는 하늘의 한 중심에 있게 됩니다. 지구 위에 사는 사람도 광활한 우주 저 멀리에서 보면 존재 자체마저 가늠할 수 없는 지극히 작은 존재이지만, 반대로 지구의 한 점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면 온 하늘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위대한 존재가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날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에 감싸여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우주 저 멀리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온 우주를 품고 섭리하시는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점 작은 별에 사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이지만, 하늘이 되신 주님을 모시고 살고 있으니, 다시 우리는 온 하늘을 품고 사는 가장 큰 존재가 됩니다. 주님 승천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는지요? 예전에는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대기권을 뚫고 하늘 저쪽으로 가셨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동화 같은 표현입니다. 이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으로서는 당연한 표현입니다. 그러니 표현 그대로를 내용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승천입니다. 교리적인 해석을 하자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신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오셨다가 다시 본모습으로 되돌아가신 것이지요. 성경에서는 이를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기에 그분을 믿는 우리도 언젠가 하늘 나라로 갑니다. 그리고 새로운 모습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승천의 교훈입니다. 그러니 지상의 것에 너무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지나친 욕망에 정신을 빼앗겨서도 안 될 일입니다. 세상은 영원히 살 곳이 아닌 탓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처럼,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연구기관에서 미국의 백만장자들을 면담하면서,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일을 선택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백만장자가 된 이유를 자신의 전공을 살리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백만장자 대답의 1위는 아주 뜻밖이었습니다. 글쎄 ‘우연한 기회에’(29%) 이라는 답변이었습니다. 2위는 27%는 시행착오에 의해서, 3위는 예전 직업과의 관련성 때문에(12%), 4위는 이전 고용주가 놓친 기회 때문(7%)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며, 어쩌다 한 일로 돈을 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공통점을 하나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일을 사랑하고 즐겼다는 것입니다. 일을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이 소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과연 지금 자리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기뻐하십니까?
삶 안에서 사랑이 가득하면 기쁨도 저절로 생깁니다. 가족을 사랑하면 집에 들어가는 것이 기쁘고, 직장에서의 일을 사랑하면 직장 출근이 기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어떨까요? 성당 가는 것이 기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사랑은 단순히 자기만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 전체 안에서 사랑을 키워 기쁨의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행복은 사랑 안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이 세상일을 모두 마치고 승천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는 더 크게 느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제자들과 만나시며, 그들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전할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복음의 기쁨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뵙고 엎드려 경배합니다. 하느님께 경배드리는 모습입니다. 성당 안에서 모든 신자가 성체 앞에 무릎을 꿇거나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6-20)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따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을 직접 만날 그날을 기대하면서, 사랑으로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열심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함께하시는 주님이시기에 용기를 내어 살 수 있습니다. 기쁨의 시간을 계속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의 옷을 입히고 사랑의 신발을 신기도록 할 것입니다(십자가의 요한 성인).
그 무엇도 주님과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주님 승천 대축일에 제자들은 주님과 또 한 번의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지난번 이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별입니다. 지난번 헤어짐이 고통과 슬픔의 이별, 엄청난 상처와 충격, 큰 두려움을 가져다준 이별인데 비해, 이번 이별은 축제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마치 부모님 효도 관광 여행 떠나는 분위기입니다. 영영 이별, 이제 떠나가면 다시 못 뵐 마지막 작별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을 전제로 한 잠깐의 이별입니다.
스승님과의 첫 번째 이별 때의 분위기가 기억납니다. 떠나가시는 예수님께 대한 예의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목숨이 두려웠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후환이 두려워 멀리멀리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비겁하게 골방에 숨어서 전해오는 소식을 듣곤 했습니다. 제자로서의 도리를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이별은 철저하게도 다른 분위기입니다. 예수님 부활 체험 이후 그제야 눈이 밝아진 제자들, 늦게나마 귀가 뚫린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이제야 드디어 그분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명명백백해졌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었기에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기쁜 얼굴로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스승님께서 자신들을 떠나가지만, 제자들은 한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무엇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진리 말입니다.
그 어떤 권력자도, 그 어떤 두려움도, 죽음조차도 스승과 제자 사이를 떨어트려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상황에서나 스승께서는 자신들과 함께 하시리라는 사실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외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소외시킨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그저 그분께서 내 일생 전체에 걸쳐 함께 해주실 것이니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 드리는 일, 그것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 등장하는 두 천사의 질문이 계속 제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행전 1장 11절) 이 말이 제겐 이렇게 들리더군요. ‘너는 왜 아직도 왜 뜬구름 속에서 살고 있느냐? 왜 움직이지는 않고 그럴듯한 미사여구만 늘어놓느냐?’
어쩔 수 없는 교회의 본래 모습은 하늘만 쳐다보는 모습이 아니라, 인간 세상 한복판으로 내려가는 모습입니다. 죄와 타락과 고통이 뒤엉킨, 그래서 짜증나고 힘겨운 인간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과거 교회는 보통 도시의 한 가운데,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곤 했습니다. 세상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높은 곳에 고색창연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성에 따르면 교회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인간 세상 가장 한 복판에 자리 잡아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까마득한 교회의 첨탑 위로 끌어올리기보다, 죄인들이 득실대는 삶의 현장 한가운데로 스며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라진 까마득히 높은 하늘로 향했던 우리들의 시선을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돌릴 때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승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