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된 쉴레이만 2세는, 우선 비잔티움 제국을 재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될 때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는 군소 공국 몇 개와 아프리카 왕국의 지리 왕조,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분할통치되던 중이었습니다.
쉴레이만 2세가 이탈리아 반도에 눈독을 들인 이유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가 전통적인 로마 제국의 영토임과 동시에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로마 제국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당면한 강적인 비잔티움 제국 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여러 국가들도 견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쉴레이만 2세는 카푸아, 네아폴리스, 베네벤토를 정복하여, 서방세계로의 진출의지를 명백히 드러냈습니다.
이탈리아 남부는 이후 서유럽으로 진출할 때 교두보가 됩니다.

1109년, 쉴레이만 2세는 비잔티움 제국과 헝가리의 사이에서 이슬람 세력과 맞닥뜨리지 않고 있던 크로아티아 왕국을 공격했습니다.
이 지역 역시 로마 제국의 전통적 영토였으며, 이 곳을 정복한다면 비잔티움 제국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는 셈이었습니다.
크로아티아 왕국이 신성로마제국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위기를 맞이하기는 했으나, 신성로마제국의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쉴레이만 2세는 크로아티아의 왕을 무릎꿇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 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정복한 영토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고, 내실도 충분히 다져졌습니다.
쉴레이만 2세는 1117년에 모든 병력을 이끌고 다시금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면전을 벌였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이번 목표는 그리스 지방 전체였습니다.
트라키아를 빼앗긴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점점 쇠락하고 있었습니다.
잦은 내분과 자금난으로 인해 국력은 약해졌고, 겨우 긁어모은 병력은 룸 술탄국의 병력을 서너차례 패주시키는 위용을 보이기는 했으나 결국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그러모은 병력이 녹아내리자, 비잔티움 제국은 전쟁을 이어갈 힘을 잃고 강화를 요청하는 사절을 보내왔습니다.

다시 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룸 제국의 충만한 군사력은 비잔티움 제국을 일거에 소멸시킬 정도로 성장하였으나, 비잔티움 제국과의 평화협정 기간이 끝나지 않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던 중, 1125년에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큰 규모의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술탄 쉴레이만 2세는, 처음에는 이것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막강한 병력은 쉽게 볼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내전을 틈타 공격하더라도, 내전이 금방 끝나버리면 병력만 소모하고 얻는 것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나도록 내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쉴레이만 2세는 상비군과 용병으로 구성된 기동타격대를 편성하여, 1127년부터 야금야금 이탈리아 반도를 먹어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언제 신성로마제국의 내전이 끝날지 몰라, 처음에는 안코나, 베로나 등의 작은 공작령부터 공격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베네치아를 공격하여 병탄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나게 이탈리아 중북부를 공격하며 약탈과 흡수를 반복하던 중, 쉴레이만 2세는 칼리프 자리가 비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마침 쉴레이만 2세는 칼리프를 자청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자격을 갖추었기에, 그는 이탈리아 북부 정복이 한창이던 1127년에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권위가 계속해서 추락하여 정권의 꼭두각시 수준에 있던 칼리프였고, 덕분에 쉴레이만 2세가 칼리프가 되기도 꽤 쉬웠습니다.
하지만 쉴레이만 2세는 현재 가장 강력하게 팽창하는 룸 술탄국의 술탄이었고, 그가 신성한 직위인 칼리프가 되면서 칼리프의 권위도 과거의 것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쉴레이만 2세가 칼리프가 된 이후에도 이탈리아 정복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병력을 더욱 충원하여 토스카나, 롬바르디아, 카린티아 등의 커다란 공작령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접한 토스카나 공작령이 공격받아 자신들을 지켜주기 어렵다고 판단한 카톨릭 교황은, 카톨릭 세계의 군주들에게 시칠리아에 대한 십자군을 요청했습니다.
십자군이 꾸려진다는 소식을 들은 칼리프 쉴레이만 2세는, 토스카나를 정복하던 병력을 급히 돌려 교황령으로 처들어갔습니다.
교황령은 철저하게 유린되었으나, 수도 로마는 이후 수백년 뒤에 일어나게되었을 샤코 디 로마와 같은 처참한 상황까지 몰리지는 않았습니다.
칼리프 쉴레이만 2세는 언젠가 교황령도, 그리고 로마 제국의 옛 수도였던 로마도 자신의 영토가 되리라고 생각했고, 그 때 로마를 수도로 삼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나 과거에는 제국의 중심이었고 현재는 카톨릭의 중심인 그곳에, 나중에 로마의 황제가 된 자신이 수니 이슬람의 칼리프인 채로 입성한다면, 정녕 알라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진 것은 카톨릭교도가 아니라 무슬림들이고 그것이 새로운 세계의 질서가 된다는 것을 상징하지 않을까.
칼리프 쉴레이만 2세의 심중에는 그러한 생각도 있었습니다.
자기가 먹을 밥을 짓는 냄비를 엎어버리는 사람이 없듯이, 칼리프 쉴레이만 2세도 로마만은 고스란히 남겨두었습니다.
덕분에 성난 무슬림 군대를 피해 로마로 도망친 사람들과 교황 자신도 목숨은 건졌으나, 모든 수비병력은 몰살되었고 도시 바깥도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시칠리아에 대한 십자군은 제대로 모이지도 못하고 와해되어버렸습니다.
칼리프 쉴레이만 2세의 이탈리아 정복도 계속되었습니다.

1129년에는 이탈리아 중부의 커다란 공작령이던 토스카나 공작령이 정복되었습니다.
토스카나 공작은 모든 이탈리아 영토를 잃고 동유럽으로 쫓겨났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내전 상황에서도 폴란드를 정복하였고, 토스카나 공작도 거기에 참여하여 많은 영토를 하사받았으나, 결국 그것은 룸 술탄국을 피해 동유럽으로 달아난 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룸 술탄국의 진격이 멈춘 것은 1131년, 신성로마제국의 내전이 종료된 시점이었습니다.
내전 종료 후, 신성로마제국은 폴란드를 얻었으나 알프스 산맥 이남의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였습니다.
만약 한 번 더 내전이 일어난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프스 산맥 이남의 공작이 반란에 가담한다면, 그들은 그 즉시 룸 술탄국에 정복당하여 영지를 빼앗길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동유럽에서는 같은 이슬람 세력인 볼가 불가리아가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내전을 이용해 철저하리만치 이탈리아 영토를 강탈한 칼리프 쉴레이만 2세의 행동은, 과거 아드리아노폴리스 정복 당시 내전에 의해 발목이 잡혔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제아무리 강력한 국가라도 내전에 빠진다면 그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고, 그것은 곧 적에게 기회로 나타나게 되는 법이죠.
신성로마제국의 장기간에 걸친 내전 덕분에, 룸 술탄국은 생각치도 않았던 이탈리아 정복의 위업을 단기간에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잠시동안의 정비를 거친 뒤, 1133년에 칼리프 쉴레이만 2세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불가리아 침략전쟁을 걸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전과 같은 강력한 저항 한 차례 하지 못하고, 룸 술탄국의 군대를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결과 룸 술탄국은 비잔티움 제국이 가지고 있던 불가리아 지방을 모두 얻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제 룸 술탄국은 한 때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던 땅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칼리프 쉴레이만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몰아내고, 자신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셀주크 황조 룸 제국의 성립이었습니다.
셀주크 가문은 페르시아 제국과 룸 제국이라는 두 제국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동방으로부터의 공격을 막아주던 방파제 역할을 하던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 소식을 접한 카톨릭 세계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지만 카톨릭 세계의 위기는 이미 이탈리아 반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은 그저 그것을 확실시할 뿐이었습니다.
첫댓글 ㄷㄷㄷㄷㄷ
와..
룸 제국의 샤한샤!
카톨릭과 정교회를 털어먹는 모양세가 시원시원하군요!
가짜 로마제국이다! 으허허헣
이슬람 로마 하악
이보시오! 이게 무슨소리요! 이슬람 로마라니! 이슬람 로마라니!! 이게 무슨 소리요!! 으헣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