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 마니아들의 피를 끓게 하는 자동차 레이스 포뮬러 원 (F1)은 한때 죽음의 레이스였다. 극단적으로 높은 속도에서 현란한 드리프트를 구사하는 레이스였기에 1985년까지 20년 동안 20명이나 되는 F1 운전자가 경기 도중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1985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안전성과 내구성 측면에서 따라갈 자가 없는 탄소섬유가 차체 소재로 채택되면서부터다. 그 덕에 30년간 사망자 수를 3명으로 줄여 금속 소재보다 훨씬 탁월한 안전성을 증명했다.
`꿈의 신소재`라 불리는 탄소섬유는 골프채를 비롯해 풍력발전 블레이드, 셰일가스 압력용기, 선박, 자동차, 비행기는 물론 우주선에까지 들어가는 새로운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철이 `산업의 쌀`이라는 말은 이제 틀렸다. 철에 비해 비중은 4분의 1 정도로 가볍고, 강도는 10배 강하며, 탄성률은 7배나 우수한 탄소소재가 이제 철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탄소섬유는 녹이 슬지 않고, 내열성이나 내약품성이 높으며, 전기 전도성이나 X선 투과성까지 있는 우수한 특성도 보유하고 있다.
탄소섬유 역사는 발명왕 에디슨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말 에디슨이 마나 대나무 섬유를 탄소화하여 백열전등 필라멘트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탄소섬유의 시작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상업생산은 1971년 일본 도레이사가 시작했다. 1959년 미국에서 우주 개발을 위해 높은 내열성을 가진 탄소섬유가 필요해지자 미국 유니언 카바이드사가 레이온계 탄소섬유 생산을 개시했고 이에 자극받은 일본 오사카공장시험소 신도 오키오 박사는 다양한 섬유에 관해 탄소화 가능성을 검토했다. 결국 신도 박사는 1959년에 폴리아크릴로니트릴(PAN) 섬유를 사용하면 성능이 뛰어난 탄소섬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해 특허를 출원했다. 이후 도레이사는 탄소섬유 소재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것을 간파하고 신도 박사 연구실에 기술자를 파견해 양산화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1971년 세계 최초로 상업적 양산에 성공하며 T300 탄소섬유를 출시했지만 35년간 탄소섬유는 회사 내에서도 `돈 먹는 벌레` 취급을 받았다. 복잡한 탄화(炭化) 공정으로 인해 양산화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비용 문제 때문에 연구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을 정도로 적자는 계속됐다. 낚싯대, 테니스 라켓, 골프채 샤프트 정도에만 쓰이다 보니 큰 부가가치를 창출하지도 못했다.
돌파구는 2006년 보잉과 맺은 장기계약이었다. `전 세계에 (탄소섬유를 사용한) 검은 비행기를 띄워보자`는 비전을 공유하면서 적자를 견디며 새로운 용도 개발에 힘을 쏟은 도레이에는 고진감래의 열매였다. 탄소섬유 연구 개시로부터 근 반세기 세월이 흐른 뒤, 지속적으로 연구개발에 투자한 도레이의 소재혁신 DNA가 빛을 본 것이다.
보잉과 장기에 걸친 개발과 협력을 통해 탄소섬유 제품에 대한 신뢰성과 안정성을 인정받아 2006년 보잉787기 단독 공급업체로 지정받았다. 거기에 2021년까지 약 7조원에 이르는 공급계약을 체결했고 최근에는 보잉 차세대 기종인 777X를 포함해 2014년부터 10년간 약 10조원대 대형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탄소섬유를 활용한 보잉787기는 종래 보잉 767기와 비교하면 비행기 무게 감소로 연비가 20% 개선되는 효과를 거뒀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0% 줄어들었다.
탄소섬유 쓰임새는 항공기뿐만 아니라 자동차에도 확대되고 있다. 자동차에 탄소섬유 복합재료(CFRP·Carbon Fiber Reinforced Plastic)를 사용하면 자동차 무게가 줄어들어 연비가 향상돼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탄소섬유 복합재 부품을 사용하면 차체 무게가 400㎏ 정도 줄어드는데 보통 중형차 무게가 1400㎏ 정도임을 감안하면 30% 정도까지 줄일 수 있는 셈이다. 또한 강한 충격 에너지도 흡수하기 때문에 차체 안정성이 올라가고 모듈화 방식으로 생산되는 탄소섬유 성격상 조립 공정 비용이나 시간도 단축된다.
도레이는 2010년부터 독일 다임러와 협력관계를 맺고 이미 합작공장에서 탄소섬유를 사용한 자동차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자동차 골격 부분인 구조재에 대한 공동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은 고급 자동차와 레이싱카 정도에만 용도가 한정돼 있어 양산차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가공비용을 낮추는 방향으로 도전하고 있다. 도레이는 철판은 몇 초 만에 성형할 수 있지만, 탄소섬유 복합재료는 성형에 5~10분이 걸리므로 이를 단축하면 양산차에도 채용되는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