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사일을 쏘는지 안 쏘는지 문제로 국제 사회가 주목을 하고 있다. 이러한 때 북한의 최고 통치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실체를 해부해본다.
김정일은 광명성?
하나님이 창조한 천사들 중에 품계가 가장 높은 그룹 (Cherub)의 신분으로 대천사중의 하나인 의 별명이 <계명성> (son of the dawn) 이었으나 (구약 이사야 14:12) 그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탄 (마왕)이 되어 이 세상을 죄악으로 괴롭히고 있다고 성경이 말한다.
우연일지는 모르나 김일성이 자기 아들 김정일의 생일에 그를 찬양하기 위하여 시를 쓰고 김정일을 새벽의 아들 <광명성>이라고 불렀다.
<계명성>이나 <광명성>이나 같은 말로서 (son of the dawn) 김정일은 지금 온 세상을 괴롭히는 사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절대로 타협이 불가능한 극단주의자로서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증세가 악화되고 있는 불치병의 말기환자와 유사하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집단의 교주처럼 우리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그는 북한국민과 인류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그는 언제나 벼랑 끝에 서 있다. 북한이 대외협상에서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하는 것은 과거의 모든 집단이 그러했듯이 체질상 생존과 파멸의 기로에서 다른 대안이나 퇴로가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파멸로 끝날 바엔 무슨 짓인들 못할까. 그런 북한을 상대해서 지금 우리가 6자회담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6자회담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며 김정일의 인간 분석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북한은 필연적으로 파멸할 것이며 인류평화를 위하여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가이아나의 <짐 죤스>가 그러했고, 텍사스 웨이코의 <데이비드>가 그러했고, 일본의 <아사하라>가 그러했고, 아프가니스탄의 <물라 오마르>가 그러했다.
북한을 외교적 설득이나 경제지원이나 그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타협해서 순화 하겠다는 어떤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을 볼 때 김정일에 대한 혐오감과 비슷한 혐오감을 갖게 된다. 북한은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구제불능의 체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문제 라면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북한이 파멸될 때 주변 국가들의 피해를 극소화하는 문제와 김정일 이후의 북한을 재건하는 방안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구상을 시작해야할 때이다. 우리는 무력에 의한 북한문제 해결을 원치 않는다.
와 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을 선두로 전 세계 평화애호 국민들이 합심하여 국제 공동책임으로 김정일을 제거해야한다. 우리의 북한동포들을 하루속히 생지옥과 같은 김정일 독재에서 해방시키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해야한다. 햇볕정책으로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파산시킨 김대중 전 대통령이 현재의 6자회담 체제를 동북아세아 평화를 위한 상설기구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했으나 필자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김정일을 포함하는 어떤 구상이나 제안도 실현성이 없다.
수도원에서 10년을 먹여 살려도 늑대는 산으로 돌아간다. 최근에 내한한 미국 국무부의 북한 인권특사 <제이 레프코위츠>는 “북한정권을 화나게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북한의 인권문제를 포기할 수 없으며 북한국민의 고통에 대하여 영원히 눈을 감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과 국제사회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미국은 현재 가시적으로 북한의 민주화와 북한국민의 인권을 위해 노무현정권의 역풍과 여러 가지 국제사회의 장애와 잡음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진두지휘를 하고 있으며 김정일 집단의 범죄행위를 차단하기 위하여 39호실 비자금 압박작전에 포문을 열었다.
청년 다윗은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렸고 고 레이건 대통령은 총 한발 쏘지 않고 전략으로 소비에트 연방을 쓰러뜨렸다. 이제 국제사회가 <민주주의 확산과 인권전략>으로 김정일을 쓰러뜨릴 날이 곳 올 것이다. 우리에겐 분명히 비장의 이 있다. 문제는 노무현 정권과 집권세력의 대북정책이 항상 핵심을 이탈하고 있으며 북한과 김정일에 대해여 철저하게 무식하기 때문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것 돌고 있다.
김정일 소련 이름은 유라
필자는 우리국민들이 북한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하기 위하여 최근에 몇 편의 글을 발표했다. 오늘은 김정일의 출생과 성장과정, 그의 성격과 기질, leadership style, 갈등, 권력투쟁, 건강, 잔인성, 가족관계, 방탕한 사생활 등등 그의 인간성을 분석하기위한 숨은 얘기들을 소개한다.
그러면 김정일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아버지 金日成 (본명 金聖柱)과 어머니 김정숙 (金靜淑)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 (東北抗日聯軍)이 일만군경 합동작전으로 괴멸될 때 패잔병으로 1940년 12월 소련원동으로 탈출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소련 연해주지구 경비사령부 소속 <오케얀스카야> 야영지에 수용되어 있을 때, 그곳에서 1941년 2월 16일 그들의 첫 아들 “유라” (김정일)을 출산했다.
그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1941년 2월 16일이며 소련이름은 <유라>고 조선이름은 金正一 이었는데 후에 <金正日>로 바꿨다.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사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김정일의 생년월일을 1942년 2월 16일로 바꾸고 김정일의 출생지도 백두산 밀영이라고 날조했으나 그의 출생지는 엄연히 소련 땅이다.
어머니 김정숙은 1917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고 1949년 9월에 평양에서, 김정일이 8살 때 삼남매 (유라, 수라, 경희)를 남겨두고 32세에 죽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아들 김정일을 김일성이 총애했으나 그 후 계모인 김성애와 이복형제 (평일, 영일, 경진)들과의 갈등은 심각했다.
동생 수라는 어려서 수영하다가 익사했고 여동생 김경희에 대한 그의 혈육의 정은 대단하다. 생모 김정숙의 볼품없고 왜소한 외모를 닮은 김정일 남매는 자기들의 못생긴 외모 때문에 열등감속에 시달리며 성장했고 김정일은 자신의 작은 키와 비대한 모습을 스스로 의식하고 자신을 <똥자루>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젊었을 때는 자기의 키를 늘리기 위해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머리도 길게 추켜올리는 두발을 하고 다녔다.
반면에 이복형제들은 인품이나 외모가 아버지 김일성 쪽을 닮아서 준수하고 삼촌 김영주를 위시하여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더 받았다. 그래서 김정일은 늘 경계심을 높이고 살았고 방어심이 강하다. 김일성의 관심을 더 끌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으며 충성을 다 했다. 아버지의 총애와 관심을 받기위한 최고의 무기는 김일성의 필생의 꿈인 한반도 적화통일과 사회주의 혁명완수를 계승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국의 홍위병과 유사한 <사회주의 혁명소조>를 조직 하여 전국을 설치고 다녔고 대남공작을 강화하여 남한을 파괴하고 방해하기위한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다. 아웅산 사건과 KAL기 폭파사건이 다 그런 것 들이다. 1970년대에 노동당이 공식적으로 그를 김일성의 후계자로 책봉한 이후에도 그는 불안했고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들을 고립시키는데 철저했다. <곁가지>라고 해서 그들을 중앙 요직에 배치하지 않고 항상 한직으로 내몰고 심지어 외국에 보내어 국내에서의 권력구축 기회를 차단했다. 김성애 소생 평일은 현재 주 폴란드 대사로 나가있고 영일은 독일주재 대표부의 과학참사로 있다가 1999년에 당뇨병으로 죽고 딸 경진은 주 오지리 대사 김광섭의 아내로 비엔나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늘 숨은 눈들의 감시를 받고 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당 정치국 일부에서는 후계자로 성격이 표독하고 오만불손한 김정일보다는 외모도 준수하며 성격이 원만한 김평일을 옹립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그런 바람을 차단한 사람이 2003년 10월 26일에 사망한 대남사업담당 당 비서 김용순 이었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과 김용순이 밀착되어있었든 이유도 다 그런 데에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 때 김성애와 그 소생들은 숨을 죽이고 살았으며 김성애는 생활비도 대주지 않아 한동안 고생을 했다.
김평일은 사람이 원만하고 미남이며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인물이나 비운의 일생을 살고 있다. 숙부 김영주의 보호막이 없었더라면 김성애와 그의 소생들은 참으로 어떤 비참한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대를 이어 혁명을 완수
김정일은 <대를 이어 혁명을 완수>하자는 아버지의 뜻과 당이 공식으로 인정한 권력후계자란 의미와 어느 정도 검증된 리더십 외에 아버지 김일성과 같은 카리스마는 없었다. 그래서 권력세습을 반대한 원로들이 숙청되고 소위 혁명 1세대 늙은이들이 죽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간 후에 당과 군부 요직에는 모두 장성택, 연형묵, 조명록등 김정일 추종세력으로 포진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당의 일부에서 김평일 옹립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특히 중앙당에서 김정일 거부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자 김정일은 당황하여 재빨리 군부와 손을 잡고 당의 세력을 제압할만한 선군정치의 구도를 시작했다.
김일성 사망 직후 김정일은 당을 경원했으며 최고 정책기구인 정치국 (Politburo) 까지도 무시하고 군 중심으로 국가운영의 방향을 돌렸다. 그때 김정일은 자기를 배신한 중앙당도 믿지 못했고 6군단 사건에 가담한 국가보위부도 믿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선군정치를 보강하기 위하여 인민군 총정치국 내 일개 국이었던 보위국을 <보위사령부>로 승격 재편하고 보위사령부에 군부와 민간인을 모두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중앙당과 국가보위부 내부의 소위 <불순분자> 즉 반 김정일 세력을 색출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보위사령부가 김정일을 위기에서 구출했다. 그 후 헌법이 개정되고 국가 최고 정책기구로서 <국방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당의 <정치국>은 현재 아무 실권이 없다.
김일성 사망 전 약 20년간 김정일은 <당 중앙>이란 호칭아래 당을 완전히 장악했고 자기 권력의 튼튼한 지반으로 삼고 있었으나 김일성 사망 후 그 지반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신속하게 군부에 몸을 옮기고 군국주의통치의 새로운 지휘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지금 북한에서는 <당 중앙> 이란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위대한 장군님>, <국방위원장>이란 호칭만 사용한다. 당은 지금 군부의 시녀에 불과하다.
기쁨조 파티에서 폭음 건강 나빠
김정일은 한때 매제 장성택과 함께 술을 많이 마셨고 <기쁨조> 파티 같은데서 폭음을 하여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과로해서 간과 심장이 나빠져서 독일과 소련 같은 나라에서 외국 의사들이 평양을 드나든 일이 있었다.
그들은 김정일의 몸이 나이보다 10년이 더 늙었다고 경고를 했다. 김정일은 야행성 체질을 갖고 있어서 낮에 보다 밤에 일을 더 많이 하며 어떤 때는 새벽 3시 4시까지 그의 집무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사망 후 음주량을 줄이고 집무시간도 축소를 해서 건강이 많이 회복 되었으나 야행성 집무습관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 그는 생각보다 세심하며 올려오는 모든 서류를 검토하고 중요하고 특별한 일에 대해서는 소위 <친필지시>를 내린다.
그의 업무처리 방식은 <위임, 승인, 친필지시>의 삼단계로 구분 된다. <위임>은 업무의 성격에 따라 전담이나 협조할 부처를 지정하여 재량껏 처리하라는 지시이며, <승인>은 상신한 계획대로 처리해도 좋다는 지시이고, <친필지시>는 자기의 견해와 방법을 제시하며 특별히 비중 있게 처리해 달라는 부탁의 지시를 말한다.
<친필지시>가 떨어지면 해당 기관이나 부처에서는 작전지시에 방불한 명력으로 접수하고 사생결단 그 일의 추진을 위해 전투에 임한다. 그런데 김정일이 이 <친필지시>를 남발하여 밑에 있는 사람들이 혹사를 당하며, 사사건건 이래라 저래라 하는 바람에 특히 중앙당에서는 그를 <마이크로 매니저>로 짜증을 내는 일이 많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그는 김일성 대학을 졸업한 후 몇 년간 호위사령부에서 위관급 군관으로 근무한 일이 있는데 주로 자기 아버지의 공식 행사 때 경호와 의전을 담당했고 자기보다 상급자인 군관들에게 명령이나 지시를 해서 크게 문제가 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김정일은 이때 몇 년간 근무한 것 외에는 군대생활의 경험이 없는데 1992년 4월 21일 일약 <원수>의 계금을 받고 <위대한 전략가, 위대한 장군님>으로 불러야하니까 일부 엘리트 군대 간부 들이 심한 반발을 했고 드디어 1992년말-1993년초에 소련 푸룬제 군사대학 출신이 중심이 된 11명의 장성들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사전에 적발되어 실패했다.
김일성대 여학생들 거느리며 활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김정일은 김일성대학에 다닐 때 문예써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김일성의 아들이란 후광 때문에 여학생들과 고위직 간부들의 자녀들을 거느리고 활개를 쳤다. 어느 정도의 예술 감각이 있는 청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는 서방세계의 문물에 감수성이 빨라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는 영화를 미칠 정도로 좋아해서 영화광이 되었고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영화감독 신상옥씨를 납치해 갔다.
그는 지금도 남한의 TV와 미국의 CNN을 보며 남한 영화나 미국의 영화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해박하며 서방세계의 물정도 많이 알고 있다. 1990년대 초 한국과 미국의 대북 전문가들은 김정일의 그런 점을 고려하여 김일성 이후에 김정일이 권력을 잡으면 소련의 <고르바초프> 처럼 북한의 정치 경제 체제에 일대 변혁을 시도할 사람으로 예상을 했다. 그러나 그는 독재자의 아들로 태어나 안하무인으로 성장했고 cult 집단의 교주가 누리던 일인숭배의 영화가 몸에 배서 그 탈을 벗지 못한다. 그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권력과 영화를 누리며 살아왔다. 자기가 원하면 무엇이나 가능한 것처럼 세상을 착각하며 살고 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무엇인가 최고를 추구한다.
그가 승마를 좋아하며, 쾌속 보트를 즐기며, 자기가 차를 직접 운전할 때는 언제나 과속 운전을 한다. 낙마나 자동차사고 같은 것을 예상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무슨 일이 막히면 즉흥적인 해결책을 모색한다. 자기 방어에는 언제나 잔인하다. 부모에게 용돈을 많이 타 쓰는 자식들이 방종하며 사회에 쓸모없는 인간이 되듯이 그의 방종한 사생활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를 지켜본 영화감독 신상옥씨가 지적했듯이 그는 어떤 자리에서 누가 맘에 들거나 들지 않으면 합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즉석에서 승진을 시키거나 해직을 시킨다. 그가 일개 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열등감이 많은 겁쟁이로서 물려받은 부모의 재산이나 탕진할 그런 위인밖에 못된다. 그러나 권력과 그가 자라난 사회적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모든 독재자들에게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잔인한 것이고 또 하나는 위기에 몰렸을 때 돌발적인 행동을 취한다. 1995년 이후 북한의 경제가 파탄되어 수백만이 굶고 병들어 죽어나갈 때 김정일은 자기 측근들에게 <병들고 노동력이 없는 인민들은 빨리 죽어 없어지는 게 내게는 편하다. 철통같이 뭉친 군대와 당원 300만만 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공화국은 건재하다>라고 했다.
이런 말을 북한의 일반 국민들이 들었더라면 어떻게 될까. 1980년대 중반 한국의 경제가 급성장하고 ‘88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질 때, 김정일은 이것을 방해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KAL기 폭파와 같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듣고 듣던 얘기를 또 하는 유는 그의 인간성과 행동을 연결시켜보기 위해서다. 1995년 초 청진에 있는 6군단이 반 김정일 음모에 가담했고 상당수의 국가보위부 간부들이 연루되어 숙청을 당했다.
그 이후로 1997년에 당비서 황장엽이 남한으로 귀순하고, 수많은 국민들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줄을 지어 중국으로 탈출하고, 1998년 초 김일성의 최고 신복이었던 오극열 대장의 아들이 반 김정일 음모에 가담하여 총살당하고, 1998년말에는 보안담당 당비서 계응태의 사위가 또 반 김정일 음모에 가담하여 총살을 당했다. 이때 무렵 김정일은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군부 내에 보위사령부를 신설하여 인민탄압의 강도를 높였고 그 이후 매년 군인과 민간인 합하여 약 300명 정도를 공개 처형하고 있다.
그는 한 측근에게 <주위에 누가 나의 적인지 알 수가 없어서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으며 가끔 악몽을 꾼다>고 했다.
권력투쟁 치열한 북한
지구상에서 가장 권력투쟁이 치열한 곳은 북한이다. 소련의 앞잡이로 가짜 김일성이 북한에 들어와 진짜 김일성 노릇을 하기위하여 그의 항일투쟁사를 허위날조하고 자기의 일인독재체제를 구축하기위하여 수많은 정적들을 죽이고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등을 반당종파로 몰아 씨도 없이 숙청했으며, 그 아들 김정일도 권력 세습에 반대하는 수많은 간부들을 죽이고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고 숙청했다.
1974년 2월 당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그가 당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되고 김일성의 후계자로 당의 공식 인정을 받은 후에도 그는 항상 불안했으며 자기 앞에 “넘어야할 큰 산” 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늘 경계하며 살았다.
그 중에 세습반대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에 간 고급간부들은 1975년 9월 정치국 후보위원 유장식, 1977년 10월 부주석 김동규, 1982년 1월 국가보위부 부장 김병하와 부총리 김경연, 1986년 2월 부총리 홍성룡, 1988년 12월 내각총리 이근모 등이며 아버지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과 특별한 보호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위협적인 존재는 제일먼저 이복동생인 김평일 이었으며 그다음은 남일과 오진우등이었다.
김정일은 공식 후계자가 되고부터 “당 중앙” 이란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노동당의 전권을 장악했고 김일성은 외국의 국가원수나 외교사절을 접견하는 정도의 업무에만 표면에 나타났다. 이때 이후로 호위사령부가 개편되고 제1총국은 김일성담당 호위업무를 제2총국은 김정일담당 호위업무를 취급했는데 제2총국 대원들은 복장 급식 등 모든 대우가 제1총국 대원들보다 월등하게 좋았으며 밖에 나가서 제1총국 대원들은 제2총국 대원들에게 얻어맞고 다녔다한다. 그 후로 김정일은 김일성이 사망할 때 까지 김일성의 집무실이나 사저를 전화 도청했고 김일성의 동정을 일일이 파악하고 간섭했으며 그 도가 지나쳐서 한 때는 김일성이 아들에게 권력세습을 하게 된 것을 후회한 일도 있다고 한다.
특기할만한 일은 1994년 7월 25일 평양에서 열기로 예정된 남북 정상회담을 김정일과 군부가 반대했고 남북통일은 오로지 전쟁이나 혁명적 방법으로 달성해야한다고 주장한데 반해 김일성은 북한의 어려운 경제를 살리기 위해 남한과의 경제교류를 역점으로 하는 협상전략을 짜고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그가 평소에 인민들에게 약속한대로 1995년에는 최소한 통일의 기틀을 다지는 해로 정하고 서울에 답방하여 “남조선 인민들이 위대한 김일성동지를 환영하는” 환상 속에 젖어 있었으며 자기의 협상전략을 아들 김정일과 군부에 설득하고 남한 대통령 김영삼과의 대담을 성공적으로 유도하기위해 향산 (묘향산) 휴양소에서 당과 국가 주요간부들과 여러 날 동안 밤낮으로 토의하다가 과로에 지쳐 1994년 7월 8일 목욕탕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평양에 즉시 연락하여 헬리콥터 두 대로 의료진이 출동했으나 그때 마침 바람이 세게 불고 기상이 험악하여 향산 도착이 상당히 지연되었고 김일성은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남한에서 일부 전문가들이 그 당시의 상황을 분석하여 부자간에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합의가 없이 김일성이 일방적으로 강행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들이 기술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전혀 근거가 없는 소리다.
그때 휴양소에 같이 있었던 후처 김성애와 비엔나에 있는 딸 김경진과의 국제전화를 모 기관에서 포착했는데 평양과 유럽 각지와의 국제전화는 평양과 모스코간의 통신위성으로 중계가 되고 모스코로부터 다른 나라까지는 유선으로 중계가 된다. 통화 내용을 분석하면 위에서 언급한 사실 외에 다른 의혹을 제기할 아무 단서가 없다.
이복동생 김평일 넘어야할 산
<=북한 군부의 최고 실세인 김정일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평소에 예견했던 대로 이복동생 김평일이 “넘어야 할 산”으로 접근했다. 1954년생 이복동생 김평일은 아버지를 닮아서 미남이고 준수하며 성품도 원만하고 숙부 김영주를 비롯하여 혁명1세대 원로들의 호감을 샀으며 심심치않게 권력후계자로 거론되었다. 그들은 김평일을 보면 김일성이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다고 아주 좋아했다. 김평일이 평양 남산고급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의 성적은 같은 학교 출신인 형 김정일보다 도덕, 일반 학과, 예술, 체육 등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높았다.
그래서 그 학교 졸업생들과 교사들은 언제나 김평일을 김정일 보다 높이 평가하고 김일성후계자로 믿고 있었다. 이 사실을 감지한 김정일은 참을 수가 없어서 남산학교의 모든 학사기록을 소멸하기위해 하수인을 시켜서 그 학교를 폭파한 일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다. 김정일의 살생부 첫 페이지에는 남일과 오진우도 끼어있었다. 남일은 김일성보다 2살 아래인 1914년생으로 타시켄트 사범대를 나와 소련군 장교로 임관되고 1942년도에는 육군 대위가 되었다. 1945년도에 스타린의 밀명을 받고 김일성을 돕기 위해 평양에 왔으며 건국 초기에 외무상을 지냈고 1953년 휴전협정에서 인민군 대장으로 북한 측을 대표하여 휴전협정에 조인한 사람이다.
그는 그 후 당 정치국 위원, 부수상 등 요직을 거쳐 1972년도에는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도 김정일의 권력승계를 강력히 반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으나 그가 소련의 시민권자인 이중국적 때문에 모스코를 인식하여 함부로 다룰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976년 3월 초 남일 부총리가 평안남도 안주에 있는 석유화학공장 건설을 시찰하기위하여 갔을 때 그 시골 비포장도로 좁은 길에 공장건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대형 트럭이 갑자기 나타나 남일이 탄 승용차를 받아 남일이 즉사했고 1976년 3월 7일 로동신문에 “남일 부총리 뜻밖의 교통사고로 사망” 했다는 짧은 기사를 남기고 김정일의 살생부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졌다.
오극렬을 인민군 총참모장 앉힌 이유
이 사건 바로 직후 김정일은 당시 절대추종자의 한사람인 인민군 총정치국장 이용무 대장에게 지시하여 인민무력부 총참모장 오진우를 감시하며 비리를 적발하여 “남일과 같은 운명”을 맞게 하자고 했다. 김정일이 오진우를 특별히 경계했든 이유는 그가 아버지 김일성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혁명1세대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며 김정일을 늘 어린애 취급을 했기 때문에 항상 자기 앞에 “거대한 장애물” 로 여겼다. 더욱더 그를 불안하게 한 것은 오진우가 김성애와 그녀의 동생 김성갑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그를 김평일의 강력한 배경으로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의 이미지를 존중해야 함으로 혁명1세대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어 고민했다. 1976년 5월 오진우가 인민무력부장으로 승진하자 김정일은 이용무를 앞세워 오진우 압박공작을 서둘렀다. 이용무는 총정치국장의 권한으로 전군의 막사와 사무실에 김일성초상화 바로 옆에 김정일의 초상화를 걸게 하였고 김정일 관계 출판물을 대대적으로 보급하여 전군이 학습하게 하였다. 그 공으로 이용무는 1974년 6월에 당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기고만장한 이용무가 군부 내에서 월권 행동을 많이 하여 오진우의 진언으로 김일성이 그를 해직하고 바로 후에 김정일은 또 박충국을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밀어 넣었다. 박충국은 김정일과 장성택의 술친구였다. 박충국은 오진우 집무실에 도청장치를 했다가 발각되어 해직 되었으나 곧 큐바 특명전권대사로 나갔다. 오진우와의 싸움은 만만치가 않았다. 1976년 6월 당 정치위원회에서 혁명 1세대들이 김정일의 정책을 공개비판 했고 당의 질서와 규율을 파괴하고 노 간부들을 일선에서 퇴진시키려는 그의 공략을 비판했다.
이 때 비판을 주도한 김동규는 결국 정치범 수용소에 갔고 김정일은 자기의 권력기반 구축작업을 계속했다. 그는 자기를 추종하는 젊은 세대에서 60만 명을 새로 노동당에 입당 시켰다. 그는 1979년에 오진우의 동의 없이 48세의 젊은 오극렬을 인민군 총참모장의 자리에 앉혔다. 오극렬은 김정일의 만경대 혁명유자녀학원 동기이며 혁명2세대를 대표하는 군인이다. 그는 공군 출신으로 소련 공군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영어, 로어, 중국어에 능하며 탁월한 군사이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매사를 상관인 오진우보다 김정일에게 먼저 보고했다. 그래서 김정일과 오진우 사이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했다.
그러다가 김정일은 오진우와의 싸움에서 전략을 바꿨다.“멀지 않아 오극렬이 오진우를 밀어내고 인민무력부장이 될 것”이란 풍문을 군부 내에 유포시켜 오진우로 하여금 극도로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퇴근하여 집에 와 보니까 부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마당에 전에 없던 차 두 대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광택이 번쩍 번쩍 빛나는 미제 Ford 와 독일제 Mercedes Benz 450 이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당신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 후에 김정일은 오진우에게 호화주택을 지어 주었고 기쁨조 비밀파티에 꼬박 꼬박 초대했다. 이렇게 해서 오진우는 “어린 목동이 고삐를 끌고 가는 한 마리의 늙은 소”가 되었다. 기쁨조 파티 에서는 오진우가 가장 나이 많은 손님이며 여러 사람이 권하는 술에 항상 만취하여 집에 돌아갔다. 그런 세월이 어느 정도 지나가다가 1987년 봄 밤 늦게 까지 비밀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만취한 오진우가 직접 차를 몰고 집에 가다가 가로등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새벽에 그를 발견하여 병원에 옮겼으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두개골이 깨지고 여러 대의 갈비뼈가 부러져 국내에서 치료가 가능한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서 김일성은 자기 전용기로 오진우를 마취상태로 <모스코>에 보냈고 <모스코>에서는 동독에 보내어 수개월간 치료 끝에 그를 회복시켰다.
만취한 71세의 노인에게 차를 자기가 직접 운전하게 하고 밤길에 경호원도 없이 집에 보냈다는 일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며 이 교통사고의 저변에 그를 해치기 위한 고의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따질 길이 없으며 그 때의 사정을 더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1986년부터 김정일은 자기 측근들에게 별도로 Mercedes Benz 280 형 한대씩을 지급하였다.
차의 번호판은 일률적으로 동일하였다. 자기생일을 의미하는 <216-9999>, 후에 <216-5555>로 바뀌었다. 그러나 꼭 지켜야하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김정일이 사적으로 모이라고 부를 때는 반드시 이 차를 이용할 것, 그리고 이 차는 반드시 본인이 직접 운전할 것이며 다른 사람은 아무도 태우지 말 것.
아마도 그들의 난잡하고 방종한 사생활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오진우가 없는 동안 김정일은 오극렬에게 인민무력부장과 총정치국장 직무대행을 하게 하였다. 이 짧은 기간에 오극렬의 리더십이 인민군내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작전지휘관들의 사기가 충천하였으며 모두 그가 계속해서 인민무력부장이 되기를 원했다.
그의 주장은 군대는 전투지휘관이 지휘해야지 정치군관이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재기불능으로 믿었던 오진우가 목다리를 집고 평양에 돌아왔을 때 인민군 내부의 상황이 많이 변해있음을 발견하고 오극렬의 실책을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그는 당의 권위와 정책을 무시하고 정치군관들의 활동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정일의 의도와는 달리 오진우가 다시 인민무력부장의 자리에 복귀하고 오극렬은 한직인 민방위사령관으로 좌천됐다.
김정일 군부장악 속사정
1991년 12월 24일 김정일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되고 1992년 4월 21일에 원수 계급을 받음으로서 그는 명실 공히 군부를 완전장악하게 되었다. 김정일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지 4개월 만인 1992년 4월에 그는 창군 이래 최대규모의 장성 급 승진 인사를 단행했다. 차수 오진우를 원수로, 최광을 포함한 8명이 대장에서 차수로, 상장에서 대장이 16명, 중장에서 상장이 96명, 대좌에서 소장이 524명이나 진급했다.
김정일은 만경대구역에 거대한 장성급전용의 병원을 건설했고 국경일에는 장성들을 대동강구역 능라초대소에 초청하여 대 연회를 베풀었으며 군단장급 이상 군 간부들에게는 김일성의 이름이 새겨진 은색 “백두산 권총” 과 고급 혁대 등을 하사하고 무력통일을 위한 군의 단결과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맹세케 했다. 아버지를 의식하여 혁명1세대 오진우는 그가 1995년 2월 25일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상징적으로 인민무력부장의 직위에 두고 그 외의 군부 실세는 모두 김정일 심복으로 포진했다.
후에 김일철은 인민무력상이 되고 조명록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총정치국장이 되었다. 김일성 사망후에 김정일은 선군정치로 자기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고 자기와 군 지도부와의 관계를 옹벽으로 둘러 싼 운명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그는 조국통일의 주력은 역시 군대라고 생각하고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할 뿐 아니라 그와 병행해서 대남 공작을 강화하여 남한 내에 혁명역량 (좌익 친북세력)을 구축하고 때가 오면 자기가 통일대통령이 된다는 꿈을 누누이 군 지휘관들 앞에서 피력했다.
그래서 그는 군부를 장악한 다음에 대남공작활동을 본격적으로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2년 12월에 그동안 공석으로 있던 노동당 대남사업담당 비서에 김용순을 발탁했다. 중앙당 산하에는 4개의 방대한 대남공작기구가 있으며 김용순은 대남담당비서일 뿐만 아니라 그중에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통일전선부 (약칭 통전부)를 직접 지휘했다.
김정일은 대남공작을 위해 39호실의 비자금중에서 막대한 돈을 풀고 남한내부와 해외교포들을 포섭하여 공작금을 주고 친북활동과 반미운동을 전개하도록 통일전선부의 기본 활동지침을 직접 지시한 바도 있다. 남한에서 소위 해외 민주인사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는 일본이나 유럽에서 평양에서 파송된 통일전선부 간부들과 수시로 은밀히 만나 공작지령과 공작금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 대남공작 기구 편성-활동
북한의 대남공작기구의 편성과 활동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인민무력성 정찰국 = 군사정보 수집 분석, 남한 후방교란을 위한 비정규전 작전지휘통제, 서해안 교전과 같은 제한목적의 작전, 미군 한국군 일본 자위대를 상대로 하는 통신첩보 수집분석. (아래 4개 기구는 노동당 산하에 있음)
35호실 = 전에는 대외정보 조사부로 불렀음. 대남 및 국제정세정보수집, 아웅산 폭파, 대한항공 858기 폭파와 같은 테러공작, 요인암살 납치 공작 담당.
작전부 = 노동당 산하의 모든 대남공작기구의 공작원과 간첩들의 교육훈련, 김정일 정치군사대학 운영 대남공작 전투원 양성, 김현희도 이곳에서 교육받음, 동해안 침투 잠수함 등 공작 장비 제작 및 각종 기술지원, 남파 공작원들과의 무전교신과 공작지령.
대외연락부 = 전에는 사회문화부라고 불렀음. 대남공작원 파송, 지하당 구축, 이선실 김낙중 간첩사건도 이에 속함, 남한의 정계 언론계 노동단체 예술단체 학생단체 교육기관 교수 학자들 사이에 침투하여 치밀하게 친북 반미 반전평화 활동을 전개하며 배후에서 조종한다.
통일전선부 = 약칭 통전부, 북한의 모든 대남선전, 적십자 회담, 남북 이산가족문제, 체육관계, 경제교류, 금강산 관광문제, 남북 고위급 회담, 장관급 회담, 심지어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남북 교류와 회담은 통전부의 전략과 기획에 따라 진행된다. 고려연방제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남한에 간첩을 파송하고 국내 모든 분야와 해외교포사회에 침투하여 친북반미세력을 확보하고 공작방향을 제시하며 자금을 지원한다.
공개된 소속기관으로는 조국 평화통일 위원회와 범민련 등이 있으며 대남공작차원에서 사회민주당, 천도교 청우다, 조선기독교인연맹, 조선불교도 연맹 같은 유령단체를 운영한다. 금강산 관광사업에서 버는 돈이나 한국과 국제 종교단체 에서 선교목적으로 북한에 제공하는 돈은 모두 통전부가 흡수하여 대남공작비로 사용한다.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방북하는 교포들이 북에 있는 가족들에게 주고 온 돈은 전액 당이 압수하고 통전부가 대남공작비로 사용한다.
김정일 초호화판 생활
김정일을 용납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방종과 초호화판 사생활이다. 인민은 굶어 죽어도 그와 그 가족은 39호실 비자금에서 돈을 물 쓰듯 사용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생활 용품은 거의 다 외제 수입품이며 심지어 그들의 애완동물 까지도 프랑스 샴푸를 쓴다. 그들이 먹는 식품과 일용품은 동남아시아의 열대 과일을 위시해서 지중해 연안국산 오렌지, 수단의 수박, 스칸디나비아의 바다가재와 연어, 이란의 캐비아, 독일 맥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의 샴페인과 포도주, 스페인의 거위 알, 덴마크의 돼지고기, 오스트리아와 독일 지역의 소시지와 치스, 독일과 미국의 의약품, 일본의 도자기와 의류, 프랑스 향수와 샴푸, 일제 또는 미제 컴퓨터, 시세이도 화장품, .
아랍 국가들에서 사오는 안마기계, 남부 아프리카에서 밀수하는 코뿔소의 서각 (정력제로 사용), 이치오피아의 고양이 사향, 등등이 포함되며 세계에서 진귀하고 값비싼 물건들을 사들이는데 이런 물자를 1호 물자라고 해서 <다엑심, 아미산 상사, 2월 은빛 달 상사>등 여러 개의 전담 상사들이 있고 일본, 중국, 로마, 부다페스트, 브라티슬라바, 파리, 코펜하겐, 베를린, 마카오등지에는 상주하는 지사가 있다. 이런 일을 총지휘 하는 사람은 김정일 직속 서기실의 박용무 라는 사람인데 그는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김정일을 위한 물자조달에 신명을 다 받치고 있다.
1호물자는 주로 컨테이너 로 항공수송 하는데 물자가 많을 때는 김정일의 전용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해외에 나가있는 북한의 재외공관은 1호물자 수송에 최 우선순위로 협조해야 하며 북경에 있는 고려민항총국은 1호 물자를 모두 받아서 평양까지 보내는데 목숨을 건다. 김정일 과 그의 측근들은 주로 코펜하겐과 로마에서 포르노 잡지와 남녀 성생활 보조기구나 자위기구들은 대량으로 사 가는데 이탈리아에서는 한 때 이 문제를 신문에 보도해서 말썽이 된 일도 있다.
김정일의 <기쁨조> 향연에 사용되는 술과 음식의 재료가 다 이 1호 물자이며 <기쁨조> 향연에 초대되는 간부들은 10여명 정도인데 거의 다 김정일 보다 나이가 많은 노인이지만 김정일 밑에서 설설 기는 것을 김정일은 대단히 즐긴다. 그가 옷을 다 벗으라면 옷을 벗어야하고 <기쁨조> 젊은 아가씨와 짝을 지어 어느 밀실에 보내면 초대된 손님들은 그것을 또 즐기며 아가씨들은 잠자리에 응하는 사람도 있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어 우스운 일도 이따금 벌어진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난잡한 생활 외에도 김정일은 영화배우 나 예술단의 반반한 젊은 여성들과 밀애를 하며 후한 생활보조를 해주고 그들의 최대 소원은 해외여행인데 가끔 김정일의 전용기가 해외취항을 하게 될 때 신원을 모르는 젊은 여자들이 동승하지만 당에서도 모르고 항공사측 에서도 모르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지시라고만 하면 지정된 행선지까지 말없이 그들을 태워다 준다. 그러나 반드시 국가보위부 직원이 escort 한다.
국민들은 굶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으며 정치범수용소에서는 약 27만명 정도의 억울한 인간들이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저 세상에서 김정일과 그의 측근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김정일의 여자와 자식들
끝으로 김정일의 자식을 낳은 여자들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김정일 (1941년 2월 16일생) (1942년생으로 조작)
첫째 부인 홍일천 (1966-1971 결혼생활 5년간) - 딸 김혜경 (1969년생)
둘째 부인 김영숙 (1947년생, 1973년 결혼)
- 딸 김설송 (1974년생) - 딸 이름 미확인 - 아들 이름 미확인
혼외 여인 성혜림 (1937년생, 1967-1973 동거, 사망)
-아들 김정남 (1971년생)
혼외 여인 고영희 (1953년생 - 2004.8.13 사망)
-아들 김정철 (1981년생) - 딸 김일순 -아들 김정운 (1984년생)
혼외 여인 정일선 (출생년도 미상)
-아들 김의성 (1985년생)
2006/06/21 [10:00] ⓒ브레이크뉴스 이명산 북한전문가
첫댓글 이명산 북한 전문가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당장에라도 남북대화를 중단하라는 메시지 같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