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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3일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제1독서 : 말라 3,19-20ㄴ
제2독서 : 2테살 3,7-12
복 음 : 루카 21,5-19
그때에
5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6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7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9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10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11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12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13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14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15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16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17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18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19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전에서 어른을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다 자랐다는 것은 성인이 되었다는 것으로, 그렇다면 만 19세가 넘으면 어른일까요?
여기에 자기 일에 대한 책임까지 질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 외형적으로는 어른인데,
하는 모습은 철부지 애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른이 훨씬 넘었음에도
어머니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점점 늘어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른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할 것을 힘들겠다고 부모가 대신해 줬기 때문입니다.
정신 분석가 제임스 홀리스는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다음 세 가지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1) 고통을 겪는 일.
2) 자신의 의지보다 더 큰 힘이 있음을 깨닫는 일.
3)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
이를 경험하지 못하면 자기중심적인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무조건 피하고 볼 것이 아닙니다.
자신보다 더 큰 힘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어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어른답게 살고 있나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종말론적 훈계를 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다인들의 민족적인 자부심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모두 허물어진다는 것이지요.
성전의 멸망은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조국의 멸망을 뜻합니다.
이를 알고 있었던 제자들은 두려워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종말은 성전의 파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로 정신적인 혼란을 맞이하게 됩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큰 혼란에 빠집니다.
또 이와 같은 혼란 뒤, 민족적인 혼란으로 전쟁과 반란이 온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큰 지진이 발생하고 기근과 전염병이 생긴다고 하십니다.
고통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이럴수록 정신 차려야 한다면서 “무서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계기가 됩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려면 산고를 겪어야 하는 이치처럼,
제자들의 박해는 새 나라인 하느님 나라가 태어나는 고통의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라는 말씀을 새기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참고 견뎌야 합니다. 인내로서 진정한 어른의 모습으로 성장합니다.
시련과 혼란, 위기의 시대
-이를 타개打開하기 위한 구원의 6대 요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참조)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자 제6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다음 주일은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요
한해도 막바지에 이른 느낌입니다. 참 절묘한 위치에 있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8,9참조) 제하로 시작되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담화문이 감동적입니다. 다음 대목이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지난 5월 15일, 저는 샤를 푸코 수사를 시성 하였습니다.
푸코 성인은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따르고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모든 이에게 가난한 형제가 되어 준 사람입니다.
다음 푸코 성인의 말을 묵상 해 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이들, 작은 이들, 노동자들을 업신여기지 맙시다.
그들은 하느님 안의 우리 형제자매일 뿐 아니라,
외형적 삶에서 예수님을 가장 완벽하게 닮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자렛의 노동자 예수님을 완벽하게 보여 줍니다.
그들은 뽑힌 이들 가운데 맏배들이며 구세주의 구유로 부름받은 첫 번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분과 어울리곤 하였던 친구들입니다.
그들을 공경합시다.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거룩한 양친을 공경합시다.
끊임없이 모든 것에서 가난해져서, 가난한 이들의 형제자매,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됩시다.”-
인간의 본질이 가난이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가 가난한 이들입니다.
病苦나 죽음 앞에 참으로 얼마나 가난하고 가련한 존재의 인간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참으로 시련과 혼란, 위기의 시대입니다.
인류 역사가 언제나 시련과 혼란, 위기의 시대였지만
작금의 시대는 기후 위기와 더불어 노령화, 그리고 증가하는 자살자들,
여전히 생존경쟁 치열한 삶에다가 끊임없는 전쟁,
빈부격차의 심화, 온갖 분열과 갈등으로 시련과 대혼란의 위기 시기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까요?
타개를 위한 구원의 6대 요소를 제시합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이하여 참으로 가난한 마음 안에 다음 처방을 마음 깊이 새기기바랍니다.
첫째, 희망의 삶입니다.
종말은 심판과 더불어 구원의 희망을 보여 줍니다.
말라기서에서 제시되는 종말은 우리의 천박한 삶에 회개를 촉구하면서
동시에 구원의 희망에 우리 마음을 열어 줍니다.
심판과 구원이 엇갈리는 묘사가 실감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기지 않으리라.”
새삼 우리를 회개와 더불어 한없이 가난한 존재, 겸손한 존재가 되어 살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심판과 더불어 주님은 우리를 구원의 희망에로 눈길을 향하게 합니다.
바로 우리가 향해야 할 궁극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며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구원의 삶을, 지상천국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질서의 삶입니다.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자연스럽게 따라 오는 기도와 노동의 질서 있는 삶입니다.
영성생활의 원흉이 무질서의 게으른 태만한 삶입니다.
무질서의 삶 중에 점차 내적으로 무너지고 망가지는 사람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충고가 참 적절합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양식을 거져 얻어 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은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참으로 묵묵히 제 소임에 충실하며 건강하고 질서있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중국 당나라의 선승 백장 선사의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는 말씀도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셋째, 영원의 삶입니다.
피상적 삶이 아니라 본질 직시의 본질적 깊이의 영원한 삶입니다.
보이는 외관의 것들에 마음 뺏겨 허영과 교만의 헛된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할 때
주님은 이들의 환상을 깨며 지나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도록 경각심을 줍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것이다.”
안이 깨끗하고 진실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하고 빛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영원을, 영원한 하느님을 향할 때
저절로 거짓과 위선이 없는 가난과 겸손, 순수와 단순, 진실과 투명의 삶입니다.
보이는 것들의 외관 넘어 영원하신 하느님께 눈길을 두며
본질 직시의 영원의 삶, 부단한 自我超越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한결같은 건강이 아니라
세월과 더불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참으로 영원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튼튼한 영혼으로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의연하고 품위있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정주의 삶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 하느님 중심 안에 뿌리내린 안정과 평화의 삶, 정주의 삶입니다.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 같은 안주가 아니라,
밖으로는 산 같은 정주의 삶이지만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 같은 삶입니다.
바로 다음 주님 말씀대로 주변의 이런저런 말들에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말고
제자리에 깊이 뿌리 내리는 정주의 삶에 충실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이들이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日日是好日, 하루하루가 좋은 날입니다.
그러니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정신으로,
하루하루의 일상에 충실하고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증언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박해의 상황입니다.
이런 박해받는 일이 제자들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니,
미리부터 겁먹지 말고 주님께 맡기라 하십니다.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 이런 노골적인 박해는 없을 것입니다만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信望愛의 정신으로 매사 단단히 영적 무장할 일입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한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언변과 지혜를, 필요로 하는 모두를 주실 것이니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증언하는 삶에 충실 하라는 것입니다.
여섯째, 인내의 삶입니다.
인내하는 자가 마지막 영적 승리를 거둡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참으로 하느님께 궁극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둘 때
한결같이 기다릴 수 있고 인내할 수가 있습니다.
인내의 믿음, 인내의 정주, 인내의 겸손, 인내의 사랑, 인내의 희망, 참으로 인내의 덕이 모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가 절정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인내로써 생명을 얻습니다. 이 말씀 마음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 무엇도 우리 영혼을 다치지 못하리라는 주님의 확산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어지럽게 하지 마라’는
모든 수도자들이 좋아하는 아빌라의 대 데레사의 영시가 생각납니다.
“아무것도 너를 어지럽히지 않게 하라.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마라.
모든 것이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하느님으로 넉넉하도다.”
오늘날이야말로 시련과 혼란, 위기의 시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시간, 강론을 통해 이를 타개하기 위한 구원의 6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가난한 우리의 빈 마음에 가득 채워지는 미사 은총의 선물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6,20).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어릴 적의 기억입니다.
자주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우리 집을 마련할 때까지 9번 이사를 갔습니다.
주인집이 있고 작은 공간에 세를 들어 살았습니다.
세를 들어 살면 알게 모르게 주인집의 눈치를 보기 마련입니다.
장독대도 있고, 등나무도 있고, 다락방도 있고, 작은 마당도 있던
새집으로 이사 갔을 때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는 형들이 쓰던 가방, 옷도 물려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 참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쌀가게, 연탄가게, 마트, 밥 장사를 하였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충실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정한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가난해서 굶주리고, 가난해서 병들고, 가난해서 배우지 못하고,
가난해서 제대로 입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도록 권고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도와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자신만을 위해서 재물을 창고에 쌓아놓지만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편히 쉴 수 없었던 것은
집 앞에 머물던 가난한 라자로를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지금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도와주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최후의 심판 날에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배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묻습니다.
언제 저희가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배고프고, 가장 목마르고,
가장 헐벗은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가난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발적인 가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독신, 순명, 청빈’을 서약합니다.
부유함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열정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부유함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부유함 때문에 갈등과 분열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유해진 나라들의 교회는 비어가고 있습니다.
부유해진 나라들의 성소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제국주의는 그들의 부유함을 채우기 위해서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식민지의 역사는 약탈과 침략의 역사입니다.
교회는 권력을 가지고 부를 축적했을 때 분열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인 가난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구조적인 가난입니다.
흙수저로 태어나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일할 수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가난입니다.
궁핍한 지역에서 태어나서 굶주리는 가난입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 태어나서 기회는 박탈당하고 있는 것마저 빼앗기는 가난입니다.
국제사회는 구조적인 가난 때문에
굶주리고, 병들고, 배우지 못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 연대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선교사를 파견하여 병원, 학교, 보육원을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모범을 보여 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와 연대, 형제애를 실천하도록 일깨우고 촉구합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발적인 가난을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구조적인 가난에 내몰린 사람들과 연대하며 그들을 도우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의 삶의 태도를 성찰케 하십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성전이 된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 주시도록 성령께 기도합시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새 성전이 된 우리의 삶은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삶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풍부하고 담을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그 은총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 성요한).
내가 믿음으로 굳건하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 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근심 걱정 없이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쿵저러쿵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내 마음 안에 평화가 없음을 염려해야 합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주님의 마음에 드는가?
아닌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삶은‘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예수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여기서부터 사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살고있는 모습 속에 미래에 내가 맞이하게 될 영원한 삶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잘 살아야 합니다. 오늘을 천국처럼 사는 사람은 내일도 천국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 했을 때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야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 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부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할 것입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작은 선, 사랑이라도 수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수없이 징검다리를 놓다 보면 길이 되는 것처럼,
내가 놓은 수천, 수만의 징검다리를 밟고
안전하게 천국의 풍요로운 아름다움 속으로 옮겨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이태원참사와 같은 세상의 혼란을 접할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조심해야 할 것은 어지러운 상황이 아니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속임수’입니다.
그리고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길은 참 진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거짓말과 속임수가 난무하고
또다시 생명을 앗아가는 현실을 보면서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우리는 두려움 없이 진실을 봐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10절에도 의회에 끌려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6,15). 고 말합니다.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 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6). 하시는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버려진 자식이 아니고 하느님의 보호 속에 있는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사실,
“이 지상의 순례 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성 아우구스띠노).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모두가 생명의 화관을 쓰고 기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33주일: 다해
오늘 전례는 영광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오심,
즉 야훼의 날,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분의 오심은 하느님의 사랑의 힘의 결정적 승리를 의미한다.
말라키는 주님의 날에 있을 의인들의 승리를 예언하고 있다.
불이라는 상징적 개념은 주님의 날을 묘사할 때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다.
교만한 자들은 풀무 불처럼 불이 타오르는 날 검불처럼 타서 없어지고 말 것이며,
야훼께 충실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불이 빛나는 태양으로 나타날 것이다.
심판이 드러나게 될 주님의 날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날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복음: 루카 21,5-19: 너희가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놀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너무나 아름답고 웅장하여
“예루살렘의 찬란한 모습을 다 보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고,
그 성소의 눈부신 장식을 보지 못한 사람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신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6절).
그래서 제자들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고, 그 징조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7절),
예수께서는 광신적인 헛된 소리를 조심하라고 하신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따라가지 마라.”(8절) 오류를 믿게끔 하는 것은 기만이다.
모든 것이 복음인 양 떠들어대는 것은 사기이다.
그러한 징조를, 위기를 의식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마지막 때의 모든 불길한 징조 가운데서 한 가지 독특한 사실은
그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바로 이때가 복음을 증언할 때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종말론적 삶을 살면 살수록 그만큼 강해질 수 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13-15.17-19절).
그리스도인은 전쟁과 박해 속에서도 항상 희망을 품어야 한다.
그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참으로 종말론적 기다림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건설하기 위해
그들의 불행과 고뇌와 모순에 철저히 파고 들어가 함께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에야
충만히 완성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우리 신앙인들이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
그 때문에 현세의 삶의 순간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는
구원을 체험하는 구체적인 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 그리고 누룩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이 오심이 가까웠다고 이 지상의 현실을 멀리하며
계속 불안감 속에서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을 당시의 신자들에게 자주 하였으며,
자신이 그 모범을 보였다. 정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기다리는 자세는
모든 사람이 더욱 그분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이 세상의 일에 더 열렬히 참여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항상 자신이 처한 위치와 상황에서
자신이 맡은 책임을 항상 성실히 수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러한 삶 속에서 언제나 다가오시는 주님을 그 마음에 맞아드릴 수 있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이러한 깨어있는 삶 속에서 언제나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주일입니다.
왜 우리가 가난의 영성을 살아야 합니까?
답은 너무나 명료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가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려는 모든 사람들에 가난을 살 것을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쭉 묵상해보면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사신 분이 또 없습니다.
여러 정황을 고려해봤을 때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은 절대로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를 축척하려면 한곳에 오래도록 터를 잡아야 하는데,
그래야 땅값도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리아와 요셉은 신혼 초부터
헤로데의 영아 살해 사건을 피해 이집트로 삶의 기반을 옮겨갑니다.
거기서 꽤 머물렀는데, 이집트에서 공짜로 밥 먹여줬겠습니까?
요셉은 외국인 근로자로 열심히 일하셨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아기 예수님을 등에 업고 갖가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헤로데가 세상을 떠나자 나자렛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새롭게 거주지를 옮긴 두 분은 또다시 원점에서 시작해야 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삶도 절대 부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노숙인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이 노숙인이라고 밝혔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면서 굶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가끔씩 기회가 닿으면 양껏 드시는 장면이 종종 목격됩니다.
가진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 그리고 사랑밖에 없었던 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누군가를 대신하여
당신 목숨을 내어놓는 일밖에 없었던 사람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습니다. 노숙인으로 사셨던 예수님이시다 보니
또 다른 노숙인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셨습니다.
나병 환자들, 거지들, 갖은 종류의 병자들, 죄인들, 어린이들, 창녀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한번 훑어보면 이 사실은 명백하게 입증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아주 드물게 고관대작의 집에 초대도 받으셨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가난하고 소외 받은 민중들 사이에서 지내셨습니다.
또한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주도권이나 기득권을 쥔 사람들 편이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 편에 서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편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교회 典禮 週年은 待臨시기와 더불어 시작하고, 그리스도 王 축일로 끝납니다.
다음 주일이 그리스도 왕 축일입니다.
전례 주년이 끝날 이 무렵이면, 우리는 복음이 전하는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상의 종말을 말하기 위해 신약성서는 유다인들의 묵시문학에서 빌려옵니다.
묵시문학은 후기 유다교가 세상 종말에 대해 상상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문서들입니다.
예수님시대 유다인들은 그 문서를 잘 알고 있었고,
유다인들이 중심이 된 초기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도 그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 종말을 말하기 위해 자연스레 그 표현들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세상 종말에 있을 큰 재난도 그 문서들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습니다.
성전의 파과,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이 징조, 박해,
이 모든 것이 세상 종말에 있을 것이라고 후기유다교 묵시문학은 상상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그것을 배워 실천합니다.
신앙은 세상의 미래에 대해 비밀스런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종말의 ‘날과 때“(마르 13,32)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서가 기록된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이미 십여 년 전에 파괴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다가 기원후 66년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그 전쟁은 4년 후, 곧 기원후 70년에 유다의 패전으로 끝났습니다.
로마 군대는 유다 민족의 정신적 중심인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처참하게 파괴하였습니다.
식민지가 반란을 일으키면, 어떤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유다교 당국으로부터 박해당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유다교 묵시문학이 말하던 종말이 이미 왔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도 그런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운동하고, 건강식품과 보약도 먹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대우받는 미래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우리의 지혜와 노력으로 우리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으로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잘하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신앙은 자기가 설계하는 자기중심적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를 살자는 운동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셔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우리는 그분의 일을 실천합니다.
이웃이 불행하면 도와주고, 이웃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를 용서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교의 실세들과 갈등을 겪고, 당신의 죽음이 다가올 때도
당신의 노력으로 살아남을 궁리를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 36)
예수님은 하느님이 주실 미래만을 희망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오래 살려 두지 않습니다.
죽음의 휘장을 넘어 하느님이 예수님을 살려 놓으셨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하느님의 일만이 우리가 사는 시간을 넘어서 존속할 것입니다.
푸르고 싱싱하던 대자연에 단풍이 아름답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길에는 낙엽이 떨어져 우리 발아래에 밟힙니다.
앙상하고 스산한 겨울의 풍경이 곧 온다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푸르렀다가 단풍이 들고,
또 떨어져 이 세상과 결별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계절입니다.
우리를 버티어 주던 자존심, 명예, 지위, 재물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못하는 잠시의 푸름이고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死生決斷하고 덤비는 일이,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보존하고 높이기 위함이라면,
하느님의 미래는 우리 안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 자신과 주변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조금 더 선하고, 조금 더 관대하고, 조금 더 자비롭게
주변을 보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 (루카 17,21)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우리의 삶이 변하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우리의 욕심이 우리를 지배하면,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획한 우리의 미래만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라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축복이나 해주면서 하늘 저 멀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하는 일이 더 잘되도록 하느님의 힘을 빌리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길을 바꾸라고 권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우리가 보장하겠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미래를 향한 길로 들어서라고 신앙은 권합니다.
하느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소중히 생각한다면, 우리가 실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삶은 모험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도 모험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일도 아무런 보장이 없는 모험입니다.
인간에게 소중한 일들은 이렇게 보장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가 獻身하지 않고,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면,
반드시 실패하는 모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도 모험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이미 하신 모험입니다.
그분의 부활은 그 모험이 하느님의 생명과 기쁨에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미래를 택한 사람은 하느님이 자기 안에 살아계시게 합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 들어온 현실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그분이 하실 일을 생각하고 실천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