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6 주일낮설교 / 청주, 충만교회 민창근 목사
살후 3:2,3 /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2)
(0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0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 오늘 말씀
(예) 페북에서 본 영상
오피스텔 같은 작은 방에 사는 한 여자가 자신의 팬티를 베란다에 가지고 가서 빨래줄에 널려고 했는데, 옆을 보니 옆방 남자가 창밖을 바라보며 이를 닦다가 자기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어색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팬티를 널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바람이 불었고, 그 여자의 팬티가 집게를 안해 놓는 바람에 날려서 그 남자에게 날아갔습니다.
자,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이 남자가 여자의 베란다로 소리를 쳐서 “당신의 팬티가 이리로 날아왔어요. 가져가요. 또는 제가 당신의 집으로 가져다줄게요. 또는 당신이 우리 집으로 와서 가져가세요.”라고 하면 요즘은 성추행이랍니다. ㅠ.ㅠ
그런데 이 남자는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여자가 부끄러워할 것 같아서 조용히 문제를 처리해주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긴 장대를 가져다가 팬티를 잡아서 빨래줄로 향하여 뻗기 시작했는데....그때 이 여자는 자신의 팬티가 없어진 것을 알고 베란다로 나와 보니 남자가 긴 장대로 팬티를 옮기고 있었습니다.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남자가 나를 도우려 한 것이다. 아니다 남자가 내 팬티를 훔치려 한 것이다.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요?
남자의 말을 들어보고 결정할까요?
아니면 남자의 평소 행동을 예측하여 결정할까요?
좋게 볼까요? 나쁘게 볼까요?
(예) 그리스신화 중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티카의 강도이며, 힘이 엄청 센 거인이었습니다. 아테네교외의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노상 강도질을 하며 살았습니다.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집에는 철로 만든 침대가 있는데, 지나가는 나그네를 잡으면 무조건 자신의 침대에 눕힙니다.
그리고 나그네가 자신의 침대보다 크면 머리와 발을 잘라 죽이고, 작으면 늘려서 죽여 버리는 무시무시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나그네 중에 그의 침대에 딱 맞는 사람은 없을까요? 없습니다.
왜 없을까요? 이 침대는 무조건 잡은 사람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침대에 누이는 것이지 풀어주려는 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침대를 조절하는 비밀장치가 있어서 그것으로 조절을 해서 너는 침대보다 크다고 작다고 트집을 잡아 무조건 죽이는 것입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말은 “자기 생각에 맞추어 남의 생각을 뜯어 고치려는 행위,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횡포를 말합니다.”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무조건 판단하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절대 듣지 않고, 자기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이야기조차 무시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런 못된 프로크루스테스의 악행은 아테니의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끝이 나게 됩니다.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서 침대에 누이고는 똑같은 방법으로 머리와 다리를 잘라내어 처치했습니다.
무조건 자기 기준이, 자기 고집이 최고가 되면 안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한 방향성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합니다.
(예)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에서 쳐 죽이는 최초의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이 무시무시한 살인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가인 자신이 프로크루스테스와 같이 자기 기준으로 삶과 제사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에게 첫 아들이라 너무 귀하니까 자신이 무엇을 하든 자신의 삶은 동생 아벨보다 더 귀하게 취급되어져야 하고, 제물을 드린 것에서도 하나님은 먼저 자기의 제물을 받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제사를 보시고, 인간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기준으로 보니 가인의 제사는 받으실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기쁨을 위한 제사, 정성이 부족한 제사, 믿음이 없는 제사, 사랑이 빠진 제사, 소망이 없는 제사 즉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주실 복에 대한 기대가 없는 제사였습니다. 피가 빠진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고, 이것에 대해 가인은 충격을 받으면서 질투하고 반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동생 아벨을 들에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동생을 죽이면 자신의 제사가 잘 받아들여질까요?
동생을 죽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까?
동생을 죽이면 제사에 정성이 더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까?
동생을 죽이면 믿음이 더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까?
동생을 죽이면 사랑이 더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까?
동생을 죽이면 소망이 더 넘치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까?
동생을 죽여 그 피를 뿌린다고 양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피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동생을 죽임으로 가인은 큰 벌을 받았습니다.
이제부터 땅은 그 효력을 잃어 농사를 짓는 가인이 밭을 갈아도 농사가 제대로 안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인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기준이 최고이고, 자기 시각이 최고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을 바꾸려 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기준으로 동생이 자기보다 앞서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기준으로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자신의 결함, 부족, 잘못을 보지 못하고, 동생이 잘못한 것으로 몰아갔고, 나아가 하나님이 잘못한 것으로 몰아갔습니다.
결국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지만 이것을 통해 사실은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하나님도 죽여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만 이 사실 때문에 자신이 죽게 되고 말았습니다.
가인의 제사의 잘못은 제사 자체보다도 가인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주체성),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기준, 중심, 믿음 등 총체적 삶이 잘못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예)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의인이어서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며 형들이 올바르게 살도록 아버지께서 징계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집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그것에 대한 기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형들은 자신들의 삶을 고치려 하기보다 요셉이라는 녀석이 입만 다물고 있으면 얼마든지 자기들 맘대로 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보여지는 삶은 장자권을 가져가는 네 번째 아들인 유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형제들을 떠나 이방인과 섞여 살면서 두 아들이 죽고, 며느리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는 문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요셉이 꿈을 꾸었죠? 이 꿈 때문에 더욱 미움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꿈은 밭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는데, 형들을 상징하는 곡식 단이 요셉을 상징하는 곡식 단에 엎드려 절하는 충격적인 꿈이었습니다.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해와 달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징하였고, 열 한 별은 형들과 동생 베냐민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꿈 이야기에 형들이 반발하는 것 뿐 아니라 아버지 야곱도 충격을 받아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복이 야곱의 가정 속에 임하기를 원하시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수준, 자세, 의식을 가진 요셉을 통해 가정에 비전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아버지와 형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꿈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못된 녀석이 꾸는 개꿈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놈이라고 해도 반드시 형들 다음에 줄을 서서 자기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런 나쁜 꿈을 꾸어 가정에 분란을 일으키고, 질서를 파괴하는 녀석은 죽어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구덩이 던지고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렇게 시각차가 컸습니다.
형들의 문제, 보디발 아내의 문제.. 그 속에서 기도, 원망 등도 있었겠습니다만 하나님은 요셉을 결국 애굽의 총리로 높여주었습니다. 가정을 구원하고, 애굽의 역사를 바꾸고, 하나님의 구원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예) 마찬가지로 이새의 가정에 막내인 다윗도 똑같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잘난 형들은 막내 다윗이 왕이 되는 기름부음을 사무엘로부터 받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계속 형들 대신에 양들이나 지키고 혼자 수금이나 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형들도 외모는 출중하나 그 수준, 자세, 의식이 하나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골리앗이 선동하는 블레셋과의 전쟁터에 왔고,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아직 군대로 나갈 나이가 안된 녀석이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과 장군과 병사들조차 두려워하는 골리앗과 싸운다구요?
미쳤니? 너 돌았니? 전쟁이 장난인 줄 아니?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전쟁에 나가는 놀라운 경험을 한 적이 없었던 형들은 다윗을 오해하고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결국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뜨리고, 그의 칼을 빼앗아 목을 잘라 버렸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놀라운 장수가 되게 하였고, 마침내 왕이 되게 올려주었습니다.
- 내 수준으로 볼 때 ... 전통적 시각에서 볼 때... 내 경험으로 볼 때... 불가능하다는 일들이 하나님의 역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기준으로 쉽게 판단하고 사람을 공격하고, 사실을 왜곡하고, 비판하며, 죽이려 달려들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겸손히 여쭙고, 보여주시는 큰 뜻이 있다면 그것을 따라 지혜롭게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의 기준을 바꾸지 못합니다.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은 세상적 판단으로 사람을 질투하고 깎아내리고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통한 구원과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싫어합니다.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은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복음 외에 다른 철학, 다른 종교를 말하며 헛된 것을 의지하려 합니다.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조차 싫어하며, 자기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하나님조차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하나님조차 죽이려고 악을 씁니다.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은 성령님의 거룩한 역사와 은혜로운 사건을 왜곡하여 사탄적인 것이라고 반대합니다.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은 좋은 일을 위한 사업을 무너뜨리기 위해 욕심을 부리며 그 사업을 방해합니다. 자기를 위한 사업으로 만들어 자기 이름을 내려 합니다.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에 저항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에게 지켜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지혜롭게 판단하며 삶을 살고, 선교를 해가야 합니다.
베드로 같은 제자들도 예수님이 가시려는 십자가의 길 문제에서 하나님의 뜻을 막으려 하였고, 가룟 유다는 적극적으로 팔면서까지 저항하였습니다. 하지만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예수님이 이기십니다. 성령님이 이기십니다.
사람의 뜻, 내 뜻은 무너지나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서는 것입니다.
⇒ 주여,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고, 주의 뜻이 이뤄지고, 주의 선교가 잘 이뤄지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부흥케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