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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시편 47(46),2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알렐루야.
본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하느님의 교회가 성령의 힘으로 한데 모여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순수한 뜻으로 서로 화목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나는 하느님께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굳건히 세우시고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그것을 나누어 주실 수 있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0,28-38
그 무렵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28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 떼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 곧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29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30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31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32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33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34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35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36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37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38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시편 68(67),29-30.33-35ㄱ.35ㄴㄷ과 36ㄷ(◎ 33ㄱㄴ)
◎ 세상의 나라들아,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또는
◎ 알렐루야.
○ 하느님, 당신의 권능을 베푸소서. 하느님,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소서, 우리 위하여 이루신 그 권능을. 예루살렘의 당신 성전을 위하여, 임금들이 당신께 조공을 바치게 하소서. ◎
○ 세상의 나라들아,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주님을 찬송하여라. 하늘로, 태초의 하늘로 오르신다. 보라, 그분이 목소리 높이시니 그 소리 우렁차네. 하느님께 권능을 드려라. ◎
○ 그분의 존엄은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분의 권능은 구름 위에 있네.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
복음 환호송요한 17,1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11ㄷ-19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2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13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16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17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주님,
주님께서 세우신 이 제사를 받아들이시어
저희가 정성을 다하여 마땅히 거행하는 이 거룩한 신비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의 구원을 이루소서.
우리 주 …….
감사송<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또는>
<주님 승천 감사송 1 : 승천의 신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광의 임금님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로서
(오늘) 천사들이 우러러보는 가운데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으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 세상의 심판자,
하늘과 땅의 주님이 되셨나이다.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함이 아니라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5,26-27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하시고 너희도 나를 증언하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한 성사에 참여한 저희에게 언제나 주님의 은총을 내려 주시고
이 성체의 힘으로 저희를 깨끗하게 하시어
이 위대한 성사를 나날이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 지상 사명을 마치신 뒤에도, 우리는 세상에 남아 그분의 사명을 계속 이어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고별 담화와 고별 기도(요한 13―17장 참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것은, 장차 그들도 고난과 박해를 당할 때 앞서 당신께서 보여 주신 확신과 기쁨을 기억하여 그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분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이에게만 충만히 주어집니다(15,9-11 참조).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보호’와 ‘성화’를 청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주신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와 권능으로’ 그들을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는 아버지께서 몸소 제자들을 보호하시어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하나 됨은 제자들이 하느님 사랑과 구원의 증거자이며 그들의 사명이 진실함을 세상에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17,21 참조).
주님께서 제자들의 ‘성화’를 청하신 것은, 속된 존재는 거룩하신 하느님과 올바른 친교를 이룰 수도(레위 11,44; 19,2 참조) 그분의 증인이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의 관계에 일치하여 사는 길은 오직 “진리”, 곧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고 악을 피하며 거룩함을 간직하는 데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굳건히 세우고, 우리가 구원을 상속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제1독서 참조).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여 거룩함을 간직하는 이는 늘 그분의 보호와 기쁨 속에서 살게 됩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제1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전하는 고별 담화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바오로는 그들이 자신과 양 떼를 잘 돌보고 늘 깨어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 안에 굳건히 서 있기를 염원하며 마지막 당부를 남깁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서로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며 흐느껴 울고 포옹한 다음, 그들은 바오로를 배웅하며 떠나 보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 서로서로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였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장면은 큰 감동을 줍니다. 한편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신 ‘대사제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거룩하신 아버지의 일치된 관계처럼,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모두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로 떠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바치시는 이 기도는 기쁨에 차 있습니다. 이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실현되는 하느님의 구원, 영원한 생명이 주는 완전한 기쁨입니다.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마지막 여정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이 기쁨을 누리며, 성령 안에서 제자들도 이를 충만히 누리기를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살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는 당신 제자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 아버지께 간구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일치하며 바치신 이 기도에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축복이 가득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의 시선과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리면, 마땅히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께, 또 우리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나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보살핌에 응답하는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고 성부께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기쁨을 충만히 누린 이들로 이 세상은 변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회칙 「복음의 기쁨」에서 ‘세상의 소비주의와 자기만족의 탐욕스러운 마음과 가벼운 쾌락에 대한 무절제한 추구, 무뎌진 양심은 우리에게 세상의 만족만을 찾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기쁨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한다.’(2항 참조)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것만 찾으려는 마음을 지닌다면 더 이상 충만한 기쁨의 삶을 살지 못하고 성령 안에서 사는 삶도 살 수 없습니다. 충만한 주님의 기쁨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언제나 새로운 기쁨을 누립니다. 이 기쁨은 주님께서 누구에게나 주시는 기쁨으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얻어집니다. 주님과 인격적 만남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면, 기도의 깊은 기쁨 속에서 주님을 체험하기 어렵다면, 먼저 내 주변의 이웃이나 가까운 가족과 지인에게 나눔을 통하여 다가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고 전합니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하는 충만한 기쁨으로 살아갑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의 애잔한 갈라짐을 묵상합니다. 굳이 사회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가족과 이웃 안의 갈라짐도 가슴 한편에 쓰라린 상처로 남아 있음을 고백합니다. 상처를 헤집는 또 다른 갈라짐으로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힘겹게 살아갈 테지요. 언제 상처가 아물까 늘 기다리고 매달리고 기도하지만 아물기 전에 짓물러 터져 버리는 상처로 오늘 또 울먹거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고되고 쓰린 일상을 십자가에 빗대어 생각해 봅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듯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서로 힘들어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삶의 고통 가운데 살아가면서 그 고통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견디는 것이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이러한 가르침은 흔히 스스로 깨달았다고 가르치는 대중 설교가의 무책임한 현실 도피적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지금의 고통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시 살펴보고 희망을 가지라는 터무니없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현실의 고통과 처절히 ‘하나’가 되는 것이 십자가이고, 십자가의 고통을 기꺼이 짊어지는 것이 십자가의 가르침입니다. 고통을 긍정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고통 자체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힘든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사는 것이 고통스러우신가요? 아니면 힘겨우신가요? 고통스럽고 힘들면 그렇다고 크게 외치고 도와 달라 손을 내밀어 보세요. 그 외침을 듣고 그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이가 바로 옆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저 혼자 고통을 이겨 내겠다고, 마음의 생채기를 치료하겠다고 허둥대지 말고, 조용히 용기를 내어 손을 내미세요. 부족하지만 함께 맞잡은 손에서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내용을 들려줍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에서 교회의 몇 가지 근본적인 특징이 드러납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보호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공동체이며,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을 보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지켜 주시도록 기도하시고, 또한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하고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늘 일치를 지향하며, 분열과 분리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셋째는, 기쁨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치함으로써,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일치를 통해서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신 그대로입니다.
넷째는, 거룩함입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이 세상의 논리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섯째는, 파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우리가 생명의 빛으로 받아들인 하느님 구원의 메시지는, 이제 우리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원하셨던 그런 공동체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이성근 사바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한마음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온갖 종류의 오해와 분열, 불일치로부터 해방되어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바라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절박한 처지이시지만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하는 제자들을 위해 하느님께 청하십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도피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꿋꿋이 살아나갈 수 있게끔 지켜 주시도록 기도하시는 것이지요.
이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진리를 깨닫도록 기도하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8,32 참조).
오늘 머무르고 싶은 점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하리라는 것마저 내다보셨으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점입니다. 실로 놀라운 신뢰이지요.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늘 부족하고 실수를 되풀이하는 우리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습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해야 할 미래의 모습을 내다보시며,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화되도록 굳은 신뢰로 지켜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도 주변 사람들을 이런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그들의 부족한 점들보다, 변화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그 가능성이 실현되도록 힘껏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로 자신이 세상 창조 전부터 하느님 아버지와 언제나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말씀’이요 ‘하느님의 외아들’이심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관계가 우리에게도 적용됨을 알려 주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와 친밀성’을 가질 수 있으며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로 불립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신적 진리와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중재 기도로 하느님 아버지에게 속하게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으므로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아 이 지상의 험난한 길을 무사히 걷게 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삶의 기쁨을 깨닫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랍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더 우리를 염려하시고 격려하시겠습니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다가와 우리를 돌보아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화두는 우리의 전 삶을 끌어가는 견인차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선민의식은 신자들이 모두 하나가 되는 원동력,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시금석입니다.
어느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만일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아기가 태어났다면, 이 아기를 한 사람으로 여겨야 하는가, 아니면 두 사람으로 쳐야 하겠는가?”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머리가 둘이라 할지라도 몸이 하나라면 한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 또 다른 학생은 달리 말했습니다. “머리 하나를 한 사람으로 간주하여야 합니다.”
이에 교수는 다음과 같은 답을 내렸다고 합니다. “만약 한쪽 머리에 따뜻한 물을 부었을 때 다른 쪽 머리도 소리를 지르며 함께 운다면 한 사람인 것이고, 다른 쪽 머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있다면 두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주님 안에 모두 한마음이요 한 형제라고 고백합니다. 같은 성체를 나누어 받아먹는 우리가 참공동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른 이의 아픔에 함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러 사람이지, 한마음 한 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왼손이 오른손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른손이 아프면 왼손 역시 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 늘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을 보면 우리가 하나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하나 되려면 서로의 허물과 상처를 보듬어 주고 상대방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우리의 고통과 죽음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면서 우리와 하나 되셨던 것입니다.
수난을 앞두고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예수님의 고별 기도에는 제자들에 대한 염려와 사랑이 담뿍 배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바치시는 기도는 그때 당신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를 위해서도 바치시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우리가 참된 기쁨을 충만히 누리기를 바라시는 마음과, 세상의 악에서 지켜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악이 옛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실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범람하고 있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영상물, 편리성과 능률, 쾌락을 숭배하도록 이끄는 문화, 반 그리스도교적인 주술적인 명상이나 신비 요법 등, 그 자체가 너무나 교묘해서 선인지 악인지 분별할 수조차 없는 환경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뉴욕 코넬 대학의 심리학 교수가 개구리를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개구리 한 마리를 45도가 되는 뜨거운 물에 던져 넣었더니 그 개구리는 순간적으로 튀어 올라 밖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마리는 찬물이 들어 있는 시험관에 넣고 서서히 가열하였더니 개구리는 큰 저항 없이 놀다가, 결국 뜨거운 물속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마치 개구리가 놀기에 좋은 온도를 가진 물처럼, 사람들이 악에 젖어 들어 살기에 좋은 온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로 거룩해지지 않으면, 주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이런 악에 젖어 살게 됩니다. 점차 우리 자신의 영혼도 생명을 잃게 됩니다.
안젤라 자매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랜 냉담 끝에’ 다시 신앙으로 돌아와 봉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고, 혼인해서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성당을 다녔고, 사회생활도 평범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아들의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술로써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신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남을 해친 일도 없는데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반항심 때문에 성당에 가는 것을 끊었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이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들 친구의 혼인식 때문에 성당에 들렀습니다. 그녀는 십자가를 보는 순간, 가슴에 묻어 두었던 슬픔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옴을 느꼈다고 합니다. 영영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주님이신데, 사실은 한 발짝도 멀어지지 않았음을 그날 이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잘 살기를 바랍니다. 삶의 기쁨을 깨닫고 당당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심 깊은 이들만 챙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은총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늘 간직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는 길입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진리에 속한 이는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진리를 따라가는 제자들이 될 것을 청하고 계십니다.
누구나 하늘의 힘을 받고 싶어 합니다. 모든 부모는 ‘진리의 기운’이 자녀들에게 머물기를 바랍니다.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늘 접하는 성경의 가르침이며, 무심히 듣는 자연의 소리이며, 소극적으로 대하고 있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옛날 중국 진나라에 ‘도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 속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됩니다. 승진을 거듭해 높은 지위에 이르자 그는 매일 아침 항아리 100개를 마당에 내놓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다시 안으로 들여놓는 일을 반복합니다. 사람들이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너무 편안한 생활에 빠져들까 싶어서 몸을 수고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선행과 성사 생활에 힘쓰지 않으면 영혼은 게을러집니다. 나중에는 신앙생활이 귀찮아집니다. 진리와는 먼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노력 없이 ‘하늘의 힘’을 청하면, 정작 주어지더라도 못 알아보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진리로 거룩해지는 삶’이 될는지요? 바른 정신과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부모답게, 교사는 교사답게,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사는 것입니다. 온몸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겠지요.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결코 높은 곳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 곁에 있지 않으면 진리가 아닌 것이지요. 사람을 떠나 홀로 있는 것을 어찌 진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에게 매일 아침 다정한 눈빛으로 얘기해 주는 그 말씀을 진리라고 하신 겁니다. ‘잘 살아라. 기쁘게 살아라.’ 그런 말들이 아버지의 말씀이 아닐는지요?
부모는 자녀들이 잘 살기를 바랍니다. 똑똑한 자식이든 못난 자식이든 다 같이 잘 살기를 바랍니다. 몸이 성치 못한 자녀가 있다면 애정을 더하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뛰어난 이에게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 속에 있는 이에게도 똑같이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니 자녀답게 신뢰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로 거룩해지는 삶’ 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젊은 형제님의 불만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했는데, 자신이 하는 일이 거의 허드렛일이라는 것입니다. ‘겨우 이런 일을 하려고 비싼 학비를 내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가?’라는 회의가 든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토대로 회사에 기여하고 싶은데, 허드렛일만 하니 자기 능력을 보일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일본 교토에 ‘일본 전산’이라는 초소형 정밀모터 제조업체가 있습니다. 연간 매출이 3,000억 엔(한화 3조 원 정도) 이상으로 아주 탄탄한 기업입니다. 이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많은 이가 매년 지원합니다. 소위 스펙이 좋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지원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회사는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무조건 1년 동안 화장실 청소를 시킨다고 합니다. 이 회사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청소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신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청소처럼 아주 간단한 것도 못 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철학입니다. 결국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회사에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찮은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 그만큼 필요한 사람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사회 안에서의 지위가 성당 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길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존감을 세우는 것은 주님보다 더 윗자리에 오르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도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고 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는 주님만을 탓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명령대로 행동하는 ‘종’처럼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 17,11)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를 이룬 것처럼, 우리가 하나 되어야만 진리로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 됨을 위해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겸손이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만이 하나의 가능성을 만듭니다. 자기만을 따르라고 하고, 자기 원하는 것만 하는 곳에서 서로 ‘하나’ 될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안에서, 또 교회 안에서도 허드렛일이란 없습니다. 제자의 발을 닦아주시면서까지 주님께서 왜 종처럼 행동하셨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처럼 겸손의 마음으로 자기를 낮춰서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펼쳐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경청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 가운데 하나이다(데일 카네기).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어머니 성모님의 인생 여정은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합니다. 반전에 반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생애였습니다. 성모님께서 위대하신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의 신앙이 한 단계에 머물러있지 않고 거듭 일취월장했다는 것입니다.
어리고 연약한 한 산골 소녀 마리아는 용기 있는 응답을 통해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로 변신합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도우미요 협조자로서 최선을 다하십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십자가상 예수님의 안내로 사도들의 어머니로 임명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오랜 세월 아들 예수님에게 하셨던 일을 사도들에게 하게 됩니다.
사도들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은 대체 어떻게 생활하셨을까요? 마치 대왕대비 마마처럼? 아니면 영부인처럼?
절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할머니 한 분은 평생 자녀들을 위해 허리가 휘도록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자녀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제는 건강도 좋지 않고, 허리도 굽고, 무릎 상태도 좋지 않으니, 제발 편히 쉬시라고 목청을 높여도, 할머님은 막무가내입니다. 매일 새벽이면 밭으로 나가십니다. 평생 해오던 그 일을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당신이 아들 예수님을 위해서 평생 해오셨던 바로 그일,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 자질구레한 일을 이제는 사도들을 위해 계속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묵묵히 사도들의 어머니로 충실하게 살아가시던 성모님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을 하늘로 들어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하늘의 어머니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로 발령내셨습니다.
천상에서 성모님께서 하시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천상에서도 그 역할은 똑같습니다. 아들 예수님, 사도들에게 하셨던 그 일, 우리의 도우미요 협조자, 후원자요 안내자로 살아가십니다. 성모님은 예수님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으셔서, 어떻게 하면 우리를 잘 변호해줄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계십니다.
저희 살레시안들은 이런 어머니,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합니다. 오늘 많이 힘드십니까? 누군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십니까? 다른 그 누구에 앞서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마치 어린 자녀가 어머니에게 청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