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るろうに劍心~明治劍客浪漫譚~ 追憶編
(방랑자 검심 - 메이지검객낭만담 - 추억편 디렉터즈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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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 일본어 DD 2.0
Display - 1.77:1
Region Code - 2 / NTSC
Running Time - 125분
안녕하세요. 이태석입니다.검심은 다들 알다시피
막부 말부터 메이지유신 이후를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입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애니의 배경이
되는 실제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역사적 배경- 에도막부의
성립 당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江戶-지금의
도쿄) 막부가 일본을 지배하고 있었다. 12세기 초
처음으로 등장한 막부는 천황이 아니라 무사계급인 쇼군(將軍)이 지배하는 정치체제였다. 바쿠후(幕府)는 본래 전장에서 장군이 지휘소로 쓰던 천막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후에 무인정권의 정부를 뜻하게 된다. 막부의 최고 지도자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직책을 가지며 이를 줄여서 쇼군(將軍)이라고 부른다.당시 일본은 250여 개의 한(藩)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겉으로만 보면 장군은 이 중 가장
큰 번인 도쿄(東京) 일대를 다스리는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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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들어낸 교묘한 장치로서 막부를 형식적으로나마 천황의 밑에 놔둠으로서 실제로는 하나의 정권 - 즉 막부만이 정통성을 가지고 일본을 지배하는 구조였던 것이다. - 막부의 위기 막부가 위세를 떨칠 때는 어느 누구도 여기에 도전하지 못했으나 영향력이 약해지자 서서히
반기를 드는 다이묘(大名-각 번의 지배자)들이 나타났고, 이는 반역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란군들이
천황을 업게 되면 장군을 역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었다. 막부가 미국 페리제독의 개항요구에 무력하게 대응하고, 갖가지 천재지변이 그치지 않는 등 나라가 계속 어수선해지자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유력한 대명이 발언권을 갖기 시작했다. 대명들은 자신들의 발언과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조정의 권위를 이용하려 했고 조정의 관료들은 조정에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존왕론(尊王論)을 제창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1858년에 막부는 에도에 있는 대명들에게 부득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했음을 알리고, 천황의 칙허없이 통상조약을 체결했다는 이 소식에 개혁파 대명들과 천황은 크게 분노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정세를 이용하여 개혁파는 반개혁파에 대한 세력만회를 시도하지만, 오히려 막부로부터 1858년부터 2년에 걸친 대대적 탄압을 받게 된다. 이를 ┳안세이(安政) 다이고쿠(大獄)┳라고 하며 당시에 처형된 자만 1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카츠라 코고로우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도 이 때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이후에 존왕양이(尊王壤夷)파의 선두인 초슈번이 교토의 조정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다시 막부측에 의해 일어난 정변으로 세력을 축출당하고 반전의 기회를 노리게 되며, 이것이 ┳검심 추억편┳의 배경이 되는 동란의 교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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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신의 스승이자 비천어검류의 13번째 계승자인 히코 세이쥬로(이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비천어검류 계승자의 이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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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신은 스승의 곁을 떠나 ┳칼잡이 발도제(人斬り拔刀齋)┳로 불리며 교토에서 유신지사측의 암살자가 되어 활동한다. 교토 정무관 시게쿠라 쥬베와 그의 호위무사를 암살하는 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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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인사를 죽이고 다닌 이들을 히토키리라고 부른다. 유명한 3대 히토키리가 있는데 도사번의 오카다 이조오와 가와카미 겐사이(켄신의 모델), 그리고 다나까가 있다. 이들은 하급무사도 못되는 천한 신분이 많았다. 유신지사와 어울리면서 무식함까지 겹친 열등감이 커지자 명성을 위해 닥치는 대로 사람을 베어 악평이 자자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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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슈번의 실세인 카츠라 코고로우. 켄신에게 회합에 참여할 것을 권하다 거절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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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고 다카모리, 오오쿠보 도시미치와 더불어 카츠라 코고로우(후에 기토 다카요시로 개명)는 유신 3걸이라 불리운다. 그 역시 상당한 검술실력을 가졌다고 한다.
막부 말기에 일본의 무사들은 크게 도쿠가와 막부 체제를 고수하려는 좌막(左幕)파와 천황을
중심으로 새로운 체제를 세우려는 유신파로 나뉘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게 되는데, 초슈(長州), 사스마(현재 가고시마), 도사(土佐)등이 대표적인 유신의 중심지였으며 아이즈(會津)는
좌막파의 대표적인 중심이었다. 유신파로서 메이지 유신을 성립시킨 사람들을 유신지사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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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병대를 양성하는 타카스키 신사쿠. 여기서 카츠라 코고로우는 켄신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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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스키 신사쿠 역시 실존인물로 카츠라 코고로우와 같이 요시다 쇼인의 제자인데 난폭한
성격의 괴짜였다. 후에 기병대를 이끌고 초슈번을 도막파로 통일하였으나 폐병으로 죽고 그의 애인인 우노는 불문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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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토 하지메 역시 실존 인물로 신선조 3번대 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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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츠라 코고로우는 스승의 죽음을 되새기며 각오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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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왕양이(尊王壤夷)파의 선두인 요시다 쇼인(1830-1859)은 고향인 초슈번에 사설학원을 세워 수많은 개국공신들을 길러냈다. 타카스키 신사쿠와 카츠라 코고로우도 그의 제자였다. 또한 그는 정한론(조선 정벌)을 주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안세이 대옥 때 체포되어 사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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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장인 곤도가 신선조 대원들을 모아놓고 이케다야를 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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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센구미(新選組)는 막부의 공인을 받은 단체로 법적 지위는 교토 수호직 마쯔다이라의 수하
낭사대이다. 교토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낭사를 모집한다는 말에 모여든 낭인 집단으로
1963년 미부(壬生)라는 마을에서 신선조를 결성하였다. 이즈카가 초슈번의 낭인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나눌 때 ┳섣부른 행동을 해 봐라. 미부 늑대의 생각대로 된다┳라고 하는데 이것이 신선조의 별명인 미부로(壬生狼)다. 이들 신선조의 이념은 악즉참(惡卽斬-악한 것은 베어 버린다)이며, 톱니무늬의 하오리를 입고 성(誠)이란 글자가 씌어진 깃발(추억편을 보시면
깃발이 나옵니다)을 내세웠다. 조직구성은 국장 밑으로 참모, 부장 등이 있고 1번대에서 10번대까지 있었다. 발족 당시 국장은 3명이었는데 세리자와 카모, 니이미 니시키에 이어서 다음이 곤도였다. 후일 세리자와와 니이미는 곤도파 대원들 손에 암살, 모살되었다. 신선조는 교토를 누비며 유신지사를 색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는데, 역시 사람들을 함부로 죽였기 때문에 평이 좋지는 않았다. 이들은 구성원들 대부분이 무식한 지방무사 출신인데다 정치적 사상마저 결여되어 있고, 구체제인 막부를 신봉하는 좌막파로 오직 장군을 모시는 일만이 무사의
도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집단이었으나 ┳이케다야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전투력만은 막부 말 최강이었다. 1868년에 막부가 정권을 천황에게 이양하면서 해체되었으나 잔당들은 부장이던 히지카다 도시조를 따라 도바 후시미 전투에 참가한다. 막부군이 패하자 북상, 훗카이도에서 벌어진 하코다테 전투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유신에
저항하다 조직의 최후를 맞는다. 사이토 하지메는 처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히지카타가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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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도와 부장인 토시. 신선조는 조를 나누어 이케다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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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조와 맞서는 켄신. (포토샵으로 장난쳤더니 흐릿한게 몇개 있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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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야 사건 1864년 6월 5일 신선조가 유신지사들의 회합장소인 여관 이케다야를 습격한
사건.
교토에서 축출된 초슈의 유신지사들은 세력을 일거에 만회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수도인 교토에 불을 지르고 천황을 초슈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 사실이 교토의 유신지사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신선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유신지사들의 회합날 이케다야를 습격한
신선조는 2시간 가량의 접전 끝에 유신지사들을 몰살하였고 교토를 화재에서 지켜냈는데, 이는 살인자집단으로 혐오받던 신선조가 가장 자랑하는 업적이며 그들의 막강한 전투력을 보여준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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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츠라에게 이케다야 습격을 알리는 카타가이. 실제로 카츠라는 8시까지 이케다야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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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츠라와 같이 있는 게이샤(일본 기생)는 이쿠마츠(機松)로 역시 실존인물이다. 카츠라가 신선조에 쫒겨 숨어지낼 때 연락책 역할까지 하며 그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메이지유신 후
카츠라는 이쿠마츠와 정식으로 결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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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문의 난 (2막의 마지막 장면)1864년 7월 18일에서 다음날에 걸쳐 교토 궁궐의 하마구리문(蛤門)을 사이에 두고 초슈번의 군대와 쿄토를 수호하는 아이즈, 구와나, 사스마의 군대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년 8월에 있었던 정변으로 교토에서 축출당한 초슈번이 세력을
만회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수부대인 초슈의 군대가 패하여 그 지휘관들이 모두 자살하고 말았다. 이 전투로 교토는 2만8천호가 불타버리는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7월 23일 천황은
초슈번이 궁궐을 향하여 발포한 죄를 물어 막부에 토벌명령을 내린다. 21개 번이 모인 정벌군이 초슈로 향하자 초슈번에서는 막부에 따르는 것이 초슈번을 위하는 길이라는 보수파의 의견이 존왕양이파를 압도하게 된다. 10월 21일 초슈는 진군해 오는 막부군에 항복하게 되고,
싸울 상대가 없어진 쵸슈정벌군은 10월 27일 해체되었다. 이즈카가 교토 근처에 숨어사는 켄신을 찾아와 번의 보수파들이 속론파들을 숙청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 시기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초슈정벌군이 해체되자마자 초슈번에서는 존왕양이파가 하층계급의 무사와 농민, 상인들을 포섭하여 다시 세력을 만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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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신자 이즈카를 처치하는 시시오 마코토. 켄신의 뒤를 이은 어둠의 검객. 후에 그의 야심을 두려워한 일부 유신지사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불태워지나,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나머지 내용은
원작을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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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병대를 이끄는 타가스키 신사쿠. 초슈번을 도막파로 통일하였으나 유신성공을 보지 못하고 병으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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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문의 난 이후 초슈로 진군하던 막부군이 철수하자마자, 초슈는 다시 막부타도를 외치는 존왕양이파가 세력을 만회한다. 막부는 재차 초슈정벌에 나서기로 하였고, 1865년 9월 초슈정벌의 칙허가 내려진다. 그러나 정치적 라이벌인 초슈와 사스마가 비밀동맹을 맺어 막부군을
격파한다. 물가폭등과 민중의 반란 등으로 여러 어려움에 처해 있던 막부는 이 전투를 기점으로 급속히 몰락하게 된다. 비밀동맹을 맺은 당사자가 초슈와 사스마의 실세였던 카츠라 코고로우와 사이고 다카모리다.새로 장군이 된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청하는데 이는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하고 새로운 정부 밑에서 세력을 유지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막부타도의 구실이 없어질 것을 우려한 사스마와 초슈는 천황에게 막부토벌밀칙을 받아 교토를 점령해 버린다. 대정봉환을 위해 교토에 와있던 도쿠가와 장군가는 이에 위압당하여 사관납지(장군직을 사직하고 영지를 바침)를 강요받는 치욕을 당하고 오사카로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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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전쟁(戊辰戰爭) 무진전쟁은 1868년 초에 일어난 도쿠가와군과 유신정부군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을 총칭하는 말로, 1868년 1월 도바, 후시미에서 시작하여 우에노, 아이즈를 거쳐
69년 봄 하코다테에서 끝나는 유신정부에 대한 막부 최후의 저항이었다. 장군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한 뒤에도 초슈와 사스마를 싫어하는 좌막파는 여전히 존재하였다. 1868년 정월 요시노부를 추대한 구(舊)막부군은 오사카를 출발하여 교토로 진군하였고, 양군의 싸움은 도바
후시미에서 벌어졌는데 병력이 3배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의 능력 뿐 아니라 신식무기에 있어 열세였던 도쿠가와군이 패하였다. 유신정부군이 승리하자 서국의 여러 대명과 오사카의 유력세력은 일제히 신정부측으로 기울었다. 이후 사이고가 이끄는 사스마, 초슈, 도사의
번병이 에도를 둘러싸고 총공격을 하려 하자 요시노부는 항복을 하였고 유신정부군은 에도에
무혈입성한다. 요시노부가 항복한 다음에도 이에 불복하는 도쿠가와군은 우에노 산속으로 들어가 저항을 하였다. 아이즈번을 비롯한 여러 번도 동맹을 맺고 정부군과 싸움을 벌였으나 결국 아이즈가 함락된 9월을 고비로 반란은 잠잠해졌다. 이후 계속 북쪽으로 밀려난 도쿠가와군이 훗카이도의 하코다테에서 유신정부군에 패함으로써 내란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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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 유신의 성립.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니시키노미하타(錦の御旗 - 조정의 적을 칠 때 관군임을 표시하는 깃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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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8월 메이지(明治) 천황은 에도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연호를 메이지로 고친다. 이듬해인 1869년 에도는 도쿄(東京)로 이름이 바뀌고 새로운 수도로 선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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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끝내고 나니 여러가지 생각이 듭니다.
내전이 일어나면서도 서구열강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대의를 위해서 타협할 줄 아는 정신이 일본에는 있었습니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주변 여러나라를 침략하는 등 잘못된 길을 가기도 하였지만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이를 수 있었던 저력이 무엇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 본 리뷰는 켄신 관련 홈페이지와
일본사 관련서적을 참고하였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나 작품설정에 대한 오류가 있을 경우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본 리뷰의 목적은 작품을 감상하면서 참고할 수 있는 배경지식의 제공에 있습니다. - 본 리뷰는 DP와 MDL에 올렸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