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궁이에 군불을 넣은 게 100년도 넘었을 거란다. 고산서원을 닦고 쓸고 있는 지킴이들은 대구의 김민주(8)·김동주(5), 경주의 이예진(10)·이진우(8), 안동의 최재욱(8)어린이 가족. 청소가 끝나고 모두 모여 아궁이에서 군고구마를 꺼내 먹었다. | 안동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주름살 가득한 하회탈? 퇴계 이황 선생의 정신이 살아 있는 도산서원은 어떠세요. 하지만 오늘 week&은 유학의 고장 경북 안동의 속내를 보여드립니다. 그냥 공개만 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소개되는 곳은 여러분이 앞으로 자기 것마냥 가꾸고 돌봐도 되는 곳입니다. 이젠 내 집처럼 당당히 문 열고 들어가 하룻밤 묵을 수도 있습니다. 문화재청과 전국 11개 시민단체가 힘을 합쳐 '한 가족 한 문화재 가꾸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첫번째가 안동입니다. 앞으로 이 운동은 경주.전주.광주 등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질 겁니다. 얼른 신청하세요.
안동=손민호 기자<ploveson@joongang.co.kr">ploveson@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임청각(臨淸閣)
1519년 처음 용마루를 올린 고택. 이후 400년 동안 고성 이씨 종가로 내려오다 후손들이 2002년 국가에 헌납했다. 이 건물은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한 유학자 집안의 한맺힌 가족사를 담고 있다. 주인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임청각을 세운 이명의 17대 후손이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그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아들과 손자도 독립운동에 투신, 임청각은 모두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후손들은 생계마저 위협받을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그렇지만 종가는 팔지 않고 지켰고, 마침내 국가에 바친 것이다. 일제가 일부러 임청각을 관통하는 철길을 놓는 바람에 99칸 기왓집은 입구 쪽이 잘려나가 지금은 70여칸만 남아 있다. 현재 민박도 가능하다. 1박에 2인 기준 4만원. 개별 취사 금지. 임청각 내 군자정이란 정자는 보물 182호.
고산서원(高山書院) 도산서원은 안다. 그러나 고산서원은 모른다. 안동 사람도 암산은 알지만 고산서원 하면 고개를 갸웃한다. 암산은 안동에서 유명한 유원지다. 여름엔 바나나보트가 뜨고, 겨울엔 스케이트장이 열린다. 이 유원지 안에 도산서원 부럽지 않은 고산서원이 들어서 있는 걸 아는 이는 안동에도 많지 않다. 서원은 모두 9동이다. 지자체 기념물 치고는 대단한 규모다. 고려 말 성리학자 이색의 15대 손이자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대산 이상정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1789년 건립됐는데크게 훼손되지 않아 전성기의 풍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옛날 강당이었던 호인당은 당장 숙소로 사용할 수 있고, 조금만 손을 보면 한꺼번에 50명이 숙박할 수도 있다. 아궁이가 있지만 개별 취사는 아직 금지. 경상북도 기념물 56호.
만휴정(晩休亭)
동양화에서나 봄직한 그림 같은 정자다. 계곡을 따라 산길을 오른다. 10분쯤 오르면 계곡엔 돌다리가 걸려 있고, 다리 건너편에 정자가 앉아 있다. 정자 왼편 아래론 24m 높이의 송악폭포가 있다. 정자는 누마루 형식으로 개방됐다. 자연 경관을 감상하기 위한 구조다. 양쪽으로 들인 방에 온돌이 깔린 건 주인이 평소 기거했다는 증거다. 만휴정은 연산군 때 낙향한 보백당 김계행의 정자다. 보백당의 이력도 특이하다. 49세 때 과거에 급제, 늘그막에 벼슬길에 올랐지만 이내 낙향한다. 늦은 휴식을 취하러(晩休) 여기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 내부엔 '내 집에 보물은 없다. 있다면 오로지 청백함뿐이다(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보백당(寶白堂)이란 호의 뿌리다. 숙박 허용 여부는 미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73호.
고산정(孤山亭)
청량산 자락에 정자가 하나 걸터 앉았다. 조선 명종 때 문신인 금난수가 지었다. 주변 경관이 뛰어나 퇴계 등 선비들의 내왕이 잦았다고. 퇴계의 여러 시가 여기에서 나왔다. 금난수는 퇴계의 제자다. 뒤로는 청량산을 업고, 앞으로는 낙동강을 내려다 본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아 '가송협곡(佳松峽谷)'으로 불리는 좁은 계곡의 옆구리에 자리를 잡았다. 고산정은 금난수의 정자지만 퇴계와 얽힌 일화가 더 많다. 도산서원이 인근인 데다 말년의 퇴계는 이 강변을 따라 청량산을 자주 내왕했다. 고산정만은 알려지지 않기를 내심 바라는 향토 사학자가 여럿일 만큼 안동의 비경이다. 숙박 허용 여부는 미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74호.
[Tip] 간고등어 맛 보세요
안동 간고등어는 옛날 안동의 한 부호가 생선을 먹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됐다. 종을 시켜 영덕 강구항이나 울진 후포항에서 생선을 사오라 시켰는데, 영덕에서 안동으로 넘어오는 황장재에 이르면 영락없이 생선이 상하고 말았다. 그래서 황장재에서 고등어에 소금 간을 했다. 이후 고등어 소금 간을 전문적으로 하는 부류가 생겨 이를 간재비라 불렀다. 안동 시내에만 간고등어 전문점이 수십 곳이다. 그 중 안동간고등어 양반밥상 본점에서 맛을 봤다. 2인분 양반밥상 1만1000원. 054-855-9900.
[놀며 배우는 가족 나들이 떠나세요]
한 가족 한 문화재 가꾸기 운동. 이름만 보면 1960년대 새마을 운동 같은 캠페인 느낌이다. 하지만 이 운동은 캠페인이라기보다 놀이다. 다시 말해 '레저'다.
운동은 안동의 시민 모임인 '안동 문화 지킴이'가 2000년부터 방치된 문화재를 주민과 함께 쓸고 닦던 데서 비롯됐다. 법적 소유자는 따로 있지만 지자체가 대신 관리를 맡은 비지정 문화재나 지자체 지정 문화재가 대상이었다. 이러한 지역 운동은 지난달 18일 '한 가족 한 문화재 가꾸기' 출범식이 열리면서 범국민운동으로 확대됐다. 지킴이 활동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신임 유홍준 문화재청장을 비롯해 서울.경주.광주 등 전국 11개 지역 시민단체가 참석했다.
운동은 지킴이 가족에게 재미와 의미를 함께 준다는 점에서 기존 캠페인과 다르다. 가령 안동의 고산서원.임청각처럼 숙박이 가능한 곳에선 지킴이 가족이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지역 사회는 지킴이 가족에게 시내 식당이나 관광지 할인 혜택도 추진 중이다. "주말 농장의 문화재판 버전". 문화재청 관계자의 정의다.
그렇다면 가족 나들이 여정이라고 불러야 한다. 무엇보다 문화 유산을 내 방처럼 가꾸는 일은 아이들에게 귀중한 경험이 된다. week& 레저가 이 운동을 소개하는 이유다. 이른바 '품격이 다른 주말 가족 나들이'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아직은 시작 단계다. 현재 안동에서 공식 활용 허가를 받은 문화재는 열 곳이 안 된다. 그러나 안동에만 방치된 정자.서원.고택 등이 500곳을 넘는다. 관심있는 사람의 손을 기다리는 자원이 널려있는 셈. 이제 문화재는 보호가 아니라 활용돼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시대는 지났다. 아는 만큼 가꾸고, 즐기는 시대다.
▶안동 지역 문의=안동 문화 지킴이(http://adzikimi.com) 054-858-1705, 한가족 한 문화재 가꾸기 운동 (www.heritagefamily.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