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의 배경에 대한 연구
이 종 범 (조선대 교수·한국사)
1. 머리말
광주민중항쟁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가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한국자본주의의 불균형 성장과 개발독재의 권력편중과 횡포에 따른 모순의 심화가 지역차원에서 극대화되었다고 하는 '객관론'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정치의식의 제고와 저항역량의 결집이라고 하는 '주체론'을 결합하여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 구조적 분석틀은 사회발전단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며 또한 이를 가져올 수 있는 인간집단(주체)의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의 거시적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에 지배블럭에 대한 민중적 저항과 지향을 살피는 연구에서는 거의 수용되고 있다.
주지하듯이 민중항쟁은 특정한 시기의 일정한 공간의 거의 모든 계층 계급과 연관을 맺으면 진행된다고 하는 양상을 띄고 진행되기 때문에 일시적이며 동시적으로 여러 행동양식이 폭발하면서 내면의 다양한 의식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집약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광주민중항쟁의 배경 인식을 역사 구조적 차원에 머물게 된다면 민중항쟁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다원적 행동과 지향, 그리고 관계하는 수준-지도·참여·지지 등의 문제-에 따른 의식의 문제 등을 역사 구조적 도식에 제한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획일화하고 단순화할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구작업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민중항쟁으로 이끌어 간 다양한 계층 계급의 의식과 행동이 집약되어 대세를 형성해 가는 과정과 그 동력을 부차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여기에서 1980년 5월이라고 하는 특정 시점에서 광주라고 하는 특정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1980년 5월의 시점에 대해서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군부가 중심이 되어 독점재벌과 반공극우세력의 유신체제의 연장 기도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광주라고 하는 특정 도시의 문제이다. 흔히 전남 농촌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하에서 값싼 식량 공업원료 및 노동력을 공급하는 처지에 있게 된 이래로 가장 혹독하게 수탈을 당해왔다고 이해되고 있다. 여기에 박정권의 권력 편중에 따른 호남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지역의 소외를 확대재생산하였다. 이에 따라 광주에서의 계층간·도농간·부문간 불균형이 심화되었다. 왜냐하면 차별과 소외를 당하는 지역 내에서 그 작용과 피해의식의 정도는 각 계급·계층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이고 어떠한 계층 계급에는 더욱 큰 희생과 소외를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자본주의의 대외의존성과 차등성장성이 지역에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지역 계급구성을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나아가서 다양한 인간집단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었는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파악하였을 때 지역문제의 실체는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역문제는 자본의 집적 과정의 공간적 분화, 자본의 지역지배와 작용에서 야기되는 문제로서 일국 차원에서의 계급문제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유신정권의 차별과 배제를 수반한 성장전략의 희생이 지역차원에서 어떻게 구현되었으며 그에 규정되고 있는 바의 계층 계급에 따라 서로 다른 생활과 의식에 분석이 있었을 때 광주민중항쟁의 무대가 되는 '광주'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미시적이며 질적인 분석방법에 의해 기왕의 배경 연구가 보충될 필요성이 제기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기왕의 역사 구조적 관점에서의 연구성과를 수용하는 한편, 한국사회의 변동과 모순의 심화가 다양한 계층 계급 속의 생활과 의식에 어떻게 투영되고 또한 내면화하는가의 문제를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광주에 살았던 민중과 학생의 생활과 경험 그리고 의식과 지향의 편린을 통하여 사실적으로 구성하고자 한다. 나아가서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의 발전과 지향이 민중부문과 어떻게 접점을 찾아갔는가를 탐색하면서 그 성과와 한계를 살피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신군부의 유신연장기도에 따른 학살만행에 대한 민중적 분노와 진출 그리고 시민무장궐기로 전환하게 된 과정의 내면의 민중적 선택의 과정에 접근할 수 있다. 또한 항쟁기간에 보여진 연대와 갈등의 조건과 지도노선의 分岐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며, 항쟁의 직접적 정치적 배경이 되는 바의 김대중 상징성의 의미를 조망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 글에서는 거시적 지표는 기왕의 연구를 인용하지만, 시대상황과 모순이 개인과 가족과 계급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는 항쟁관련자의 회상 증언은 활용하고자 한다. 또한 민주화와 민중운동의 발전 지향의 구성의 수준은 조직론, 운동론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 인식과 현장 실천의 측면을 중점으로 살피고자 한다.
2. 불균형 경제성장과 '유신'독재
1) 불균형 개발과 지역차별
반공과 경제개발을 명분으로 하여 등장한 '5·16 군사정부'는 1960년대에는 경공업을 중심으로 하여 제조업과 석탄 등의 기간산업을 육성하고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한편 사회간접자본시설을 크게 확충하였다.
그간에 베트남전쟁 특수와 중동건설경기라고 하는 외적 조건이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하여 박정희 정권 하에서의 외형적 경제성장은 분명히 괄목한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역수지의 적자폭이 확대되면서 무역의존도가 급격히 높아지고 급증하는 외자도입과 함께 원리금 상환의 부담이 가중되는 과정에서 이룩된 대외종속적 발전이었다. 또한 이 과정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국가 주도로 진행되어 한편에서의 특혜와 특권과 다른 한편에서의 침체와 소외를 강요하는 '지도받는 자본주의'의 발전이었다.
제조업에 대한 투자 집중은 농업생산력의 상대적 정체를 가져오고 낮은 임금을 통한 출혈수출강행하기 위한 저곡가정책은 농가경제를 파탄에 빠드리며 농촌의 해체를 가져오면서 대규모 탈농인구와 도시빈민층을 만들어냈다. 또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그리고 장시간 노동은 일자리의 창출이라는 측면에 못지 않게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대기업 중심의 경제개발은 수출산업 육성 명목의 금융특혜과 외자도입을 통한 자본집적과 부실기업의 인수 등을 지원하는 등의 재벌육성책과 병행되었다. 이는 시장경제의 원칙에 의한 기업간 경쟁과정에서 이뤄졌다기보다는 정부의 특혜와 권력의 선택이라고 하는 시장외적 요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재벌은 중소기업영역이 되어야 할 식음료·제재·섬유 ·의류·가구 등의 분야를 대부분 잠식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소기업의 쇠퇴는 1960년 수준에서 중소기업은 전제조업의 부가가치 총액의 66.4%를 생산하였는데 1976년에 이르면 겨우 23.7%에 지나지 않음에서 알 수 있다.
한편 공화당 정권은 성장과 개발의 극대화를 위하여 차등성장전략을 구사하였다. 이것은 연관효과가 큰 전략산업을 특정지역에 집중투자하는 것으로서 제한된 투자재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선택의 소산으로서 대외의존 수출지향선이 미국과 일본 등의 해양권을 향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정책입안의 연고지 중심이었다고 하는 사실이 개재해 있었다. 이는 지역차별로 귀결되었다.
이것은 공단조성과 관련하여 대공장의 분포를 통하여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1966년 500이 이상을 고용하는 대공장은 전국적으로 160개가 있었는데 이때 이미 수도권과 영남권에 63개와 48개 있었고 강원과 충청에는 38개소가 있었는데 전라도에는 겨우 11개가 있었을 정도로 지역간 차별이 심해있었는데 문제는 이후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이후 1975년이 되면 수도권 261개, 경상도 168개로 늘어나는데 전라도는 겨우 27개소에 지나지 않아 전체적으로는 그 비중이 1965년 7%에서 1975년 5%수준으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제조업의 부가가치 생산액의 비중도 호남권의 경우는 정체되어 있었으며 제조업분야의 노동인력의 비중에서 감소하였다. 이에 따른 권역 별로 보았을 때 호남권이 차지하는 총자산에서의 비중도 점차 축소되었고 나아가서 사회간접자본의 투자액 비중도 적어졌다. 1966-70년 수준에서 지역별 1인당 국민소득을 비교해 보았을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는 전국에서 최하위이었다.
이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전라도의 경우에 농업의 정체와 제조업 분야의 낙후에서 오는 것이었다. 1978년 현재 국민총생산에서 농업과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전국적으로는 18%: 39%이었는데 전남의 경우에는 농업 38% 공업 19%의 수준을 보이고 있었음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1960년대 이래의 한국경제는 노동자 농민 빈민층의 희생을 대가로 하여 중소기업의 침체와 퇴조를 수반하면서 발전하였던 것이다. 또한 지역차원에서 전라도는 상대적으로 더 심한 피해와 소외를 당하게 되었다.
2) '유신'억압체제의 성립과 본질
제3공화국의 경제개발과 성장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1967년에 실시된 제6대 대통령선거와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일단 공화당과 박정희의 승리로 나타났다. 군사쿠테타에 대하여 반감을 표시하였던 도시 지식인 및 중산층에서 박정희의 지지율이 올라가고 근로계층이 이에 가세하면서 영남에서의 몰표를 토대로 박정희는 윤보선에 비하여 115만 표 이상을 얻었으며 민주공화당이 개헌선을 넘어서는 압승을 거두었다.
1971년의 사정은 달랐다. '전태일 분신사건' '한진 파월노동자의 KAL빌딩폭동' '현대조선소노동자투쟁'과 '광주대단지사건' 등의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노동자 농민 빈민의 분노가 연쇄적이고도 대규모로 폭발하였다. 또한 박정희의 삼선개헌을 통한 장기집권 기도에 대하여 재야정치인 언론인 및 학생 등은 부정선거방지캠페인과 박정희3선 저지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김대중 진영은 '선거는 이기고 개표에서 졌으며', 박정희 진영은 정상적 방식으로 정권연장을 도모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종신집권을 위해 돌파구를 7·4남북공동성명에서 찾았다. 1960년대 말 미국과 중국, 일본과 중국의 화해 및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동북아정세에도 해빙무드가 일게 되고 이에 따라 남북간의 군사적 대치관계에도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남북 간의 긴장과 대립을 비상하게 강조하면서 국민에게 불안감과 위기의식을 증폭시키는 한편에서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한 국민총화와 이를 위한 강력한 지도력을 확립하기 위하여 한국적 민주주의를 구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유신헌법'에서는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과 법관 임명권 등이 귀속되고 국회의 국정감사권이 폐지되었으며, 국회의원의 1/3은 대통령이 임명하며 국민의 대통령 직접선거권이 부정되었다. 삼권분립의 원칙이 철저히 무시되고 대통령은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는 긴급조치권을 발포할 수 있는 등의 무한권력이 부여되고 국민 참정권을 제한하는 헌법이었다. 또한 '법률에 의해서는 언론 출판 및 집회 결사의 자유가 침해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성립한 '유신체제'는 독점재벌과 외국자본에 대한 특혜와 특권을 공고히 하고 노동자 농민 빈민층의 반발을 제압하고 민주주의적 평화적 정권교체를 제어하기 위한 박정희 종신집권 장치이었다. 다시 말하면 '유신체제'는 종신집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그 물질적 토대가 되는 독점재벌의 이익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성립되었던 독재체제이었던 것이다. 이후 '유신체제' 하에서 박정희 종신집권을 반대하는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발언과 행위는 물론이며 기층근로대중의 권익보호의 움직임은 초기부터 철저하게 억압당하게 되었다. 이에 비하여 독점재벌과 외국자본에 대한 특혜와 특권이 부여되었다.
재벌에 대한 금융·조세 특혜와 사채동결을 내용으로 하는 1972년 '8·3비상조치'나 자유무역수출공단의 조성 등은 그러하였다. 또한 '외국인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으로 외국자본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특히 자본의 노동지배를 위하여 노동운동은 법률적으로 억압되었다. 1971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서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제한하였으며, 유신헌법은 '노동 3권을 법률적으로 유보하였고, 이어 1973년 노동관계법을 개정하여 노사협의회의 기능을 강화하는 등의 조치로 노동운동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배타적 권력집중을 통하여 강권과 억압기구를 운용하고 그 효과의 극대화를 꾀하였다.
1960년대 이후 역대 정부에서 고위관료의 출신지역별 분포로 보아 전라도 출신의 비중은 꾸준히 감소경향을 보이면서 유권자 및 인구비율에 비하여 과소대표되었다. 즉 호남의 경우는 유권자 비율이 19.4%인데도 고위관료의 비율은 보다 적은 13%에 그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경제계에서 보다 극명하게 나타났다. 1972년 당시 자수성가대기업가의 대부분은 5·16 이후의 월남전 특수를 타고 수출산업을 통하여 성장하였는데 이들의 출신지역을 보면 서울 경기 출신 6명, 충청 강원 출신 8명, 이북 출신 14명 이외 경상도가 22명으로 압도적이었다. 호남 출신은 5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경상도 출신이 관계와 재계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는 사실은 다른 영역에서도 그대로 관철되었던 바이었다.
국가가 시민사회와 자본에 비하여 압도적 강제력을 가지고 주도권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정권유지와 연장에 유리한 수준에서 자원배분을 결정하고 정책을 집행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하였을 것이다. 또한 문화적으로 혈연 학연 지연을 중시하는 바의 사회합리화와 제도화의 수준이 낮은 단계에서 정통성이 부족한 정권일수록 집단 내의 신뢰와 충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는 한편에게는 유대와 기회로 인식되지만 다른 한편에게는 차별과 탈락·배제로 나타나게 되었다.
3. 민주화운동의 고양과 전망
1)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발전
박정희 정권의 불균형성장전략과 배타적 권력강화와 독재는 동북아국제질서와 남북관계의 변화라고 하는 긴장완화의 국제적 흐름과 상충되는 것이며 한국사회 전후 세대의 성장에 따른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적 지향과 요구가 대세를 형성하는 시대적 조류를 역행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른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이러한 저항의 흐름은 크게 보아 정치적 측면에서는 민주화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사회운동적 차원에서는 민중생활권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저항과 운동에 대하여 유신정권은 감금 투옥 고문 등의 인권유린을 자행하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긴급조치권을 발동하였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은 야당인 신민당보다는 재야정치인과 종교인 문인 언론인 교수 등의 진보적 지식인이 주도하였으며 학생운동이 이를 뒷받침하였다.
'10월 유신'으로 인하여 일시 침체되었던 민주화운동은 해외에서 활발하게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던 김대중을 납치하는 1973년 8월 이후에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생의 '김대중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가두진출시위가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의 1973년 겨울의 헌법개정청원운동을 시작으로 하여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을 거치면서 이 해 가을에 들면 언론자유화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1974년 11월에는 원로 및 현역 정치인, 카톨릭 개신교 불교 등의 종교계, 학계 언론계 문인 등이 국민선언을 통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또한 국회에서 정일형은 대정부 질의를 통하여 '박대통령은 …이제 역사의 뒷전에 물러앉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에 왔다'고 주장하였으며, 재야 정치인 장준하는 '박대통령에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다수 국민은 '민주회복의 성취를 위하여 비평화적인 불행한 방법 밖에 없다는 체념이나 폭력에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 와 있으므로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하되 … 자신의 거취를 지혜롭고 명예롭게 스스로 택함'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전 대통령 윤보선은 현재를 '무헌법상태'로 규정하고 '10월 유신은 위헌 위법이며 … 따라서 유신헌법은 무효이다'를 선언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민청학련구속자석방운동'과 '동아일보광고탄압사태'는 유신정권의 인권유린과 언론자유탄압의 실상을 각계 각층에 각인시켰다.
이미 긴급조치 1·2·4호로서 개헌청원서명운동과 민청학련을 탄압한 바 있는 박정희 정권은 1974년 후반기 이래의 국민적 저항의 확산과 심화에 대하여 '처음부터 혼자 뛰는 경주와 같은' 국민투표로 돌파하면서 민청학련 관계자의 석방조치를 취하는 등의 유화국면을 조성하려고 하였으나, 민주진영은 '국민투표와 관계없이 민주회복운동을 계속하기를 결의'하였다.
1975년 봄에 들어 베트남 전쟁의 종결이 다가옴에 따라 동북아 냉전체제의 변화의 기운이 일고 있는 상황에서 서울대 농과대학 김상진이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과 '양심선언문'을 통하여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과 '부조리와 악' 그리고 '비민주적 허위성'과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죽음으로서 호소하고 고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후 대학가의 유신철폐운동은 더욱 격화되어 학생들의 가두진출과 시위로 이어졌다.
박정권은 긴급조치 9호로서 맞섰다. 국민의 정치의사 표현행위를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탄압을 가하였다. 이는 정통성이 취약한 통치권력이 정상적 차원으로는 사회갈등의 관리능력을 상실하였음을 스스로 노출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緊措 9호 시기'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반대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주장하는 일'은 철저히 억압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저항의 예봉은 꺾이지 않았고 저변은 확대되면서 지역적으로 확산되었다.
2) 민중운동의 성장과 민주화운동의 지향
반독재 민주화의 정치적 요구를 직접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노동자 농민의 의식적 저항운동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조직율이 낮으며, 대부분이 어용적 노사협조주의적 지도부에 의하여 장악되고 있었으며 최소한의 생활상의 경제투쟁마저도 철저한 탄압을 가하였기 때문에 노동자 대중 차원으로 확산 발전되는데는 매우 곤란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공식 통계에 의하더라도 1971년 1656건, 1973년 666건, 1975년 1045건, 1999년 1864건, 1979년 1697건의 노동쟁의가 발생하였는데 비록 소규모의 자연발생적 분규라고는 하지만 유신 직후 다소 소강상태에 빠진 노동쟁의가 긴급조치 9호 이후에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또한 청계피복노동조합 결성투쟁이나 동일방직과 방림방적 노조활동, YH상사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정치적 의식화와 조직적 단결을 이룩해 나갔다. 또한 사회적 여론을 환기시키는 과정에서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과 연대를 강화하였으며 철저한 비타협적 투쟁을 견지함으로서 자본 및 권력 측과 정면 대결하였으며 이를 장기적으로 수행하였다.
이 시기 농민운동도 많은 제약을 뚫고 성장하였다. 분단과 전쟁과정에서의 정치적 투쟁역량이 마모된 농민운동은 1950-60년대에는 주로 증산을 통한 농업소득증대를 꾀하는 농업기술개발이나 독점자본 위주의 재정 금융정책에 대한 방어적 자조활동으로서의 신용협동조합활동을 주축으로 한 '농촌개발운동'에 치우쳤으나 1972년 카톨릭농민회가 창립되면서 '자주적 민주적 농민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자본주의 모순과 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다. 또한 '크리스챤아카데미'는 1976년부터 농민의식화교육과 중간활동가 양성사업을 진행하였다.
각처에서 농민은 유신독재의 관료주의 강제농정에 대한 준법투쟁을 전개하였다. 농협강제출자거부투쟁, 부당농지세부과시정투쟁, 경지정리피해보상투쟁, 새마을사업강제집행거부투쟁 등을 비롯하여 농협운영민주화운동을 펴나갔던 것이다. 이중에서 1976년에 시작된 함평고구마피해보상투쟁은 '피해조사- 진정건의 -기도회를 통한 선전과 농성'을 거치는 2년에 가까운 투쟁을 통하여 전국적 관심으로 불러일으켰으며 동시에 요구조건을 관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농민운동 발전의 획기가 되었다.
이 같은 노동자 농민운동의 성장 발전에서 학생과 교회의 역할은 적지 않았다.
일찍이 민청학련은 '민중 민족 민주선언'에서 '기아임금으로 혹사당하는 근로대중과 봉건적 착취 아래 신음하는 농민 그리고 또 하나의 격리된 세계에서 확대되어 가는 판자촌 - 이것이 13년에 걸친 조국근대화의 업적인가?' 라고 하면서 '민족자립경제의 확립, 민중의 생활권보장, 올바른 경제분재질서의 확립과 빈부격차의 해소'등을 주장하여 민주화운동의 민중지향성을 천명하였다.
1970년대 후반이 되면 학생운동 세력이 도시빈민 주거지와 공단 주변 노동자의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야학활동을 확산시켜 나가고 일부는 직접 열악한 작업장에 취업하는 등의 민중적 체험과 동시에 민생의 안정과 인권의 신장을 통일적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자신들의 학원민주화운동도 실제로는 '민중의 염원에 부응'하기 위한 일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카톨릭과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농민회' '카톨릭노동청년회' '도시산업선교회' 그리고 '크리스챤아카데미' 등도 많은 제약을 당하면서도 농민과 노동자의 자주적 각성과 의식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들의 역할은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에서 '카톨릭 노동청년회나 도시산업선교회가 … 한 일이 있다면 … "노동자도 사람이다"라는 교육입니다.…"우리도 사람으로서 살고 싶다" "우리도 적어도 생계유지의 임금은 받아야겠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도 단결권을 가지고 싶다"고 교육한 것'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생존권을 민권의 차원에서 접근하였다.
이 같은 교회와 학생의 민중지향적 경향과 흐름은 재야민주화운동세력도 수용하고 지원하는 바이었다.
1973년 말 개헌청원서명운동 등에서 표현된 정치적 민주화운동은 '억눌린 국민의 자유를 소생시키지 않으면 중대한 민족적 위기를 초래한 위험이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국민기본권보장, 삼권분립 체제의 재확립, 공명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 보장' 등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유신정권의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한 대응논리로서 '참된 민주주의'라고 하였다.
그러나 1975년을 지나면서 정치적 민주화운동은 실제 노동자 농민운동에 대한 지지 지원을 보내면서 '노동자 농민을 차관기업과 외국자본의 착취에 내어 맡기고 구상된 경제입국'은 국민 경제력을 키우지 못할 뿐 아니라 농촌경제를 파탄시켰다고 하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는 선언적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실제 노동운동에 대한 재야민주화운동의 지지 지원 내지는 동조투쟁을 전개하였다. 1977년 12월 23일 평화시장 노동자인권문제협의회 명의의 '한국노동인권헌장'이 발표되었을 때 대표위원은 윤보선, 함석헌, 지학순, 천관우 등이었다. 이것은 비단 유신헌법철폐를 위한 연대활동의 수단으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3)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전망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의 한국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민중의 희생의 문제에 대한 인식은 민주주의의 주체와 민주주의의 지향에 대한 전향적 이해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즉 '<국민을 위해서>보다는 <국민에게서>가 앞서야 한다. 무엇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좋으냐는 판단이 <국민에게서>나와야 한다'는 국민주체의 참여민주주의와 '남과 북에 독재의 구실을 마련'한 민족 분단이야 말로 군비경쟁으로 인한 한반도 경제력의 고갈과 문화창조 역량의 낭비 파괴의 기본조건이라고 하는 전제에서 우리 겨레의 최대의 과업은 민족통일임을 천명하였다. 이 같은 민주운동진영에서의 참여민주주의와 민중생활권 보장과 민족통일의 지향이라고 하는 민주 민생 민족 본위의 사고적 전환은 일단 국민의 비판과 참여를 봉쇄한 '한국적 민주주의'와 민중 희생의 '매판 독점경제'구조 그리고 반북대결의 냉전적 사고와는 결별을 고하는 것이었다.
또한 '한일협정은 이 나라의 경제를 일본경제에 완전히 예속시켜 모든 산업과 노동력을 일본경제침략의 희생물로 만들어 버렸다. …한반도에서 UN의 승인을 받은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말도 이제는 지난날의 신화가 되어 버렸다. … 세계사의 새 힘으로 대두하고 있는 제3세계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서방세계만 의존하다가 서방세계에마저 버림을 받고 말았다'고 하는 미국과 일본 및 서구 편향의 국제정세인식과 그에 대한 의존적 태도를 비판하여 제3세계 민족의 대두와 한반도의 운명을 심각하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과 새로운 방향의 모색의 조직적 성과물이 1978년 7월의 '민주주의국민연합'의 결성이었다. 비록 노동자 농민단체의 참여는 있을 수 없었지만, 노동자 농민 등의 기층 민중의 이해를 반영하였던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전국노동자인권위원회 전국농민인권위원회 등이 참여하고 있었던 점에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조직기반과 지평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국민연합'은 '반독재 민주구국투쟁, 반부패 특권의 민생보장운동, 반매판 민족자립경제건설, 민족통일의 지향, 민주민족언론과 교육 달성'을 실천목표로 하고 이를 '민주 민족 민생투쟁'이라고 규정하면서 '노동자 농민의 권익옹호운동, 생존권보장'을 중요과제로 삼았다. 유신체제 타파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당면의 과제로 내세우고 있었다.
이 같이 현실인식과 투쟁목표의 설정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전통과 기반에 대한 인식과 이해도 심화되었다. 즉 현재의 민주화운동은 당대의 '반유신독재'에서 당위성을 구함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으로 '우리는 동학혁명, 3·1운동의 반제반봉건 민중정신을 이어받고 4·19학생혁명의 시민적 반독재 자유정신을 계승하여 실천할 것'이라고 하여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계보와 정통성에 자부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의 반외세 반독재의 역사과정에서 축적된 민족자주와 민주주의를 향한 자치역량의 실체에 신뢰를 보내고 이에 의지하여 당면의 반유신독재투쟁과 민중생존권보장운동 나아가 민족통일운동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8·15는 분명히 연합군이 가져다 준 해방이라기 보다는 3·1운동과 36년간에 걸친 민중의 끈질긴 피의 투쟁이 가져다 준 값비싼 역사의 산물이다. 그리하여 36년의 일제 강점 하에서도 이 겨레는 자주 민족의 긴 역사와 전통을 이어 받아 자치능력을 꾸준히 길러왔다. 그러나 미국과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종전처리과정에서 국토의 양단이 강요되자 … 통분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조국통일과 민족의 완전한 해방의 그 날을 다지면서 이 나라에 민주정권을 수립하고 일천한 가운데서도 민주역량을 쌓아왔고 4·19, 6·3투쟁과 같은 민주 민족역량을 성숙시켜왔다.
1979년에 이르면 '말기적 증상'을 보이는 유신독재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민주화투쟁의 주체를 바로 민중으로 상정하고 그의 궐기를 추동하는 양상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민중에 대한 신뢰가 한층 깊어졌던 것이다.
이 땅의 민중은 지금 이 순간까지 길고 험난한 반독재민주구국투쟁을 벌려왔다. 인간답게 살 권리의 탈환을 위하여 투옥과 죽음까지도 무릅써왔다. 아직 목적을 달성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민중의 투쟁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머지않아 그 목적을 이룰 것이다. 현 정권은 분명히 민중의 힘을 두려워 하고 있다.
이같은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의 민중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민생 민주 민족을 향한 실천의식에서의 진일보한 인식과 자세와 함께 민족의 진로와 민권의 실태를 결정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이 맹아적이나마 공개되었다. 즉 한국의 인권상황의 개선이나 평화적 정권교체보다는 미국의 국가이익관철이 우선할 수밖에 없는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긴급조치위반으로 인한 실형선고와 만기출감 이후의 강제징집에 처한 청년학생이 주도한 '병역문제대책전국합동위원회'는 '카터가 표방한 인권정책이란 미국의 국가적 이익을 기본적 전제로 하여 대두된 미국의 외교적 술책'에 불과하고 카터대통령의 방한은 '노동자 농민 시민대중 양심적 지식인 및 학생 등의 민중적 차원에서의 민주화운동과 자주적 통일논의를 원천적으로 탄압 봉쇄하는 현 정권에 대한 최대의 지지표시'라고 확언하고 '카터의 인권정책에 대하여 한국의 양심세력이 지극히 허황된 기대를 가졌다는 사실은 민중의 주체적 투쟁을 변질 왜곡시켜왔다'고 비판하였다.
이 같은 미국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비합법적이었지만 공개적으로 표명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만 사회민주화진영의 주류 의견으로 자리잡지는 않았다.
당시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은 한국민주화를 달성하는 데에 있어서 '미국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특히 기독교 측의 인권 민주화진영에서는 '미 지상군의 철수정책이 미국의 도덕정치라는 기본입장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한반도의 분단에 대한 책임과 함께 비도덕적인 지원에 의한 비민주적인 악순환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고 국제 정치의 희생으로 고난 속에 살아온 한국국민을 위해 이 국가가 건전한 민주사회로 확립될 때까지는 미군철수정책이 철회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실제 카터행정부의 '인권존중과 도덕정치' 표방에 대하여 '한국의 많은 양심적 인사들은 적지 않게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입장에서는 1979년 6월 말의 카터의 방한을 '표현과 언론의 자유 보장과 양심범의 무조건 석방과 제적학생 복적 해직 교수 언론인 법조인의 원상회복'의 계기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수용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민주진영에서는 '이번 귀하의 방한이 현재의 억압적 상황을 오히려 추인하고 귀하의 방한 이후 더욱 억압이 가중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억압상황이 양극화된 극단주의자들만을 만들어낸다는 예증을 라틴아메리카, 중동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보고 있습니다'하는 견해를 피력하였던 것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제도의 회복과 인권신장을 위한 뚜렷하고 분명한 노력이 표시되고 있지 못함을 우리는 아쉬워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과 대응은 미국의 대한 정책은 반공전진기지로서 미 일 한 삼각군사동맹의 한 축으로서 한국문제를 다루는 데에 본질이 있음을 간과하고 카터행정부의 인권상황에 대한 불만표시와 주한미군 철수정책을 미국의 대한정책의 본질로 인식하였던 데에서 오는 결과이었다. 또한 1970년대 후반 한국정부와 미국의 부분적 갈등양상이란 실제 미국의회의 국제주의적 진보파와 한국정부 간의 국면 갈등을 과장하여 이해한 때문이었다. 또한 이 같은 관점에서는 미국은 인권 민주주의를 지원 지지한다는 기대를 품을 수 있는 것이었다.
4. 광주 지역의 민주화운동의 지향
1) 지식·종교인과 청년학생
197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은 지역적으로도 확대되었다. 광주에서도 지식인 종교인 및 학생을 중심으로 운동이 발전하였다.
특히 전남대학은 1971년 민족사회연구회 등의 모임이 결성되어 학원병영화 반대운동 즉 교련반대데모를 주도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유신 직후인 1972년 12월 5일 "함성"제하의 반유신 유인물 살포 사건이 있기도 하였으나 그다지 운동이 활발하였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는 … 우리 학생의 힘으로 이를 폐지하여야 하며, 나아가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체제의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전국 대학이 연합체를 형성하여 조직적인 데모를 감행해야 하는데 우리 전남대학교도 데모대를 조직하여 정부타도를 위해 투쟁하자'고 하여 시작한 민청학련운동을 통하여 질적인 수준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후 일시적으로 '운동권을 규합해보려고 했으나 교실을 빌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학내운동은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고 하듯이 공백기간이 있었고 일부는 '<내가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궁리하다가 <과연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자문하여 보았으나 뚜렷한 해답이 얻어지지 않았다. … 그 길로 학교를 뛰쳐나왔다. … 어려운 때인 만큼 우리들의 생각도 그만큼 조급하고 모험주의적으로 흘러 결국은 학교를 뛰쳐나온 뒤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긴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이것저것 장사로 해보았으나 그때마다 실패했다.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불만과 현실에 대한 절망에 빠져 지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지만, 민청학련 관계자들이 출감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찾게 되었다.
1975년 출감한 청년 학생은 이미 학교에는 들어갈 수 없는 상태에서 농민운동을 위하여 카톨릭농민회에서 일하도 하고 노동운동을 맡는 그룹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며, '문화연구소라는 외피를 쓰고 사회운동권의 결집을 모색하기 위한' 현대사회연구소를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비록 제적된 상태에서나마 대학생의 독서와 토론을 통한 의식화를 위한 학내 이념서클과 연결하여 소그룹 단위의 학습활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광주에서의 운동세력은 학생 노동 농민 사회단체 등과의 연계를 갖출 수 있는 틀을 마련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대학생들의 의식화는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기존의 대학내 독서서클에서 주로 실존주의적 문학작품 위주에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등의 사회과학서와 한국근대사 관련저작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이 '학회에서 활동하거나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이것은 바로 학생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의식과 조직의 문제이었다. 그렇지 못한 학생은 '대학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동참하고 싶었으나 학생운동세력에 대한 탄압이 심해서인지 겉으로 드러난 단체가 없어 그 맥을 찾지 못하고' 지내는 상황이었다.
대학에서의 학생운동 참여와 의식화는 '남편과 나는 6·25 때 빨치산 대원으로 활동하다 잡힌 사람들이라 용공분자로 낙인찍혀 항상 감시를 받기 때문에 고통이 심하다. 자식들도 …운동권에 가담하여'라고 하듯이 가족의 역사적 경험에서 오는 사회비판의식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고등학교 다닐 때 그 조건이 형성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광주일고 출신의 일부는 4·19 이후 '방학마다 농촌을 찾아가 노력봉사 체력단련 그룹토론회'를 목표로 한 특별활동이었던 '농촌연구반'(이후 '향토반'으로 개명)에 뿌리를 둔 '광랑'독서회에서 이미 '들어라 양키들아' 등의 서적에 접하였던 이력이 있었다. 1965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이 특별반의 지도교사로서 '백성이 주인되는 세상'과 '자아의 발견'을 가르친 김용근과 같은 교사의 역할은 대단히 컸다.
또한 '오전에는 예배를 보고 오후에는 목사님과 함께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아놀드 토인비와의 대화" 등의 책을 가지고 목사님이 설명하면 우리는 질문과 토론을 벌렸다'고 하듯이 교회를 통하여 비판적 사회의식을 단련시키기도 하였다.
1974년 10월과 11월에는 '유신헌법 철폐, 구속학생 석방, 군사독재 물러가라, 언론자유 보장하라'는 등을 내세우고 광주시내 고등학생의 연합 시위를 모의하였으며 부분적으로 실행에 옮기기도 하였다. 연합시위 계획은 교회를 통한 고등학생 상호의 연대 활동과 여러 고등학생이 함께 모여 시와 소설 등을 읽고 토론하는 "울림문학동인"을 통하여 서로 연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8년 6월 27일에 발표된 '우리의 교육지표'는 광주의 지식인 학생운동을 다시 한번 고무하였다. 한국의 교육현실의 모순은 '부국강병 국가주의와 반민주 권위주의'에 있음을 고발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을 위한 '인간화와 민주화 그리고 자주평화통일'을 주창하였던 선언은 사회민주화운동의 중요한 부문이며 핵심적 과제로서 교육문제를 전면화하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사회민주화를 위한 '교육과 의식'의 중요성과 아울러 진실·인간교육을 위한 구체적 실천의 당위성을 고취하였다.
교사 교수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은 고등학생 대학생에게 좋은 책을 읽히자는 목적으로 YWCA에 <양서협동조합>을 결성하였다. 여기에서 교사는 주로 고등학생들이 양서조합을 자주 찾아올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으며 대학생은 '현대사회문제연구소'에서 담당하였다.
또한 노동현장에 투신하고 노동야학을 운영하는 노력이 구체적 실천을 보게 되었다. 1978년 7월부터 들불야학이 시작하였으며, 윤상원 등의 현장활동이 구체화되었다. 또한 1978년 겨울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야학팀을 육성하고 현장에 투신할 계기를 만들기 위한 사회조사가 진행되었다. 약 300명 이상을 조사하여 작성한 '광주공단실태조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197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 대학문화활동에서도 일정한 변화가 있었다. 즉 순수예술을 지향하기보다는 현실비판 참여적인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민족극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현대화과정에서 서구문화가 급속도로 침투한 우리 나라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의 몸짓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탈춤반이 활동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민족문화운동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마당극 '함평고구마'를 무대에 올리고 또한 '대학생활의 한시성을 감안하여 졸업 후에도 계속 몸담을 문화운동을 해나가기 위한 극운동단체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1980년 초 극단 광대가 탄생되었다.
일련의 민주화운동으로 '우리 호남은 그 동안 많은 민주인사와 종교인 청년학생들과 농민 근로자의 값진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주의를 밝히는 소중한 불씨를 죽이지 않고 지켜왔다'고 하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2) 교사와 고등학생
우리 나라 교육현실은 청소년 장래에 어두운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니, '국민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노골적인 금품 요구에 접하고 스승에 대한 존경심은 물론, 어른들에 대한 믿음까지도 사라지고 말았다'라든가, 고아원에서 자란 가난한 학생이 납부금을 내지 못하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돈 없으면 학교에 다니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퇴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특히 가세의 빈부와 권세의 유무에 따른 교사의 편애는 쉽게 감지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은 충격을 받고 갈등을 느꼈다. 이런 경우에 흥미를 잃고 학교를 뛰쳐나오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반면에는 오히려 청소년의 세상을 보는 안목을 열어주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학생들의 의식형성에는 그 자신의 생활환경과 조건과 관련되어 있었다. 특히 농촌 출신의 도시유학은 도시와 농촌간의 문화적 경제적 격차와 함께 부모를 떠난 생활환경의 변화와 관련하여 청소년기 성격 및 의식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농촌과 도시생활에서의 빈곤과 관련하여 '아버지는 무척 열심히 일하셨는데도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어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게을러서 못산다는 말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쉽게 표출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취직을 해서 어려운 집안형편에 보탬이 되고자 실업계고등학교에 진학한 여학생이 '부쩍 말이 없어졌고 열심히 책을 읽고 … 일기장에 <빈익빈 부익부> 사회에 대한 갈등과 고독이라는 말을 끄적거리는' 모습으로 내면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형들의 사업 실패로 인한 아버지의 충격과 사망을 겪으면서 시골에서 올라와 광주에서 혼자 자취하던 학생이 '도시 놈들에게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오기로 무엇이든지 적극적이고 열심히 활동했다. 특히 웅변을 잘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제3땅굴이 발견되는 등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반공 궐기대회가 자주 열렸다. 그때마다 나는 웅변도 하고 혈서도 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와 같이 공격적 성격 형성의 단서가 되었다.
청소년의 의식 형성에 있어서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였고 또한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이때 교사들은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자세와 '올바른 인생관과 철학적 사고'를 갖추도록 주문하였으며, '애국애족의 길과 자유와 민주정신'을 가르쳤으며 또한 '박정희 정권 하의 한반도 실정'과 '사회모순'을 이야기하였다. '교과서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오직 교과서를 위주로 하지 않고 영시를 우리말로 옮기고 또 이것을 한시로 번역해주는 낭만적이며 열정적인 수업'을 통하여 또한 '직접적인 형식이 아닌 비유 은유적'인 강의를 통하여 학생들의 세상의 사물과 인간을 보는 안목을 키워주었던 것이다. 또한 교사들은 '학생들의 자의식 제고와 단결된 모습'을 위하여 각별히 노력하였다. 그래서 학생자치신문의 제작을 지도하였으며, 학생 독서회 활동을 권유하고 후원하였으며 학내의 입시위주 교육이 야기하는 불합리한 점을 시정하도록 노력하였다. 여기에서 '대학생 형들이 데모하는 것을 보고 "왜 그럴까?" 이상하게만 생각했던' 중학생이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어렴풋이 내 주변을 통해 사회의 모순들을 알게 되었다.' 한반도 정세와 사회모순 등에 관한 교과서 외적인 지식에 접하고 그렇게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정치적 관심이 일어나 고등학교에서는 '통일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는 결심'을 키우게 된 계기는 '야당에 관계하신 선생님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육의 힘은 가세의 몰락에서 야기되는 가정내의 불화와 상호 괴리감까지를 치유하였다.
그러나 모든 교사가 이와 같지 않았다. 일부의 교사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극찬하는 등 장기적으로 집권하고 있는 독재정권을 비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학생들은 '선생님에 대한 불신과 함께 묘한 반항심'을 품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학생들이 '인간 민주교육을 추구하는 교사'들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교사들을 비교 평가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학생들은 교사의 영향을 크게 받기는 하지만 학생 스스로 혹은 선후배간이나 동기간에 모임을 가지거나 독서를 통하여 '항상 건전하고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폭넓은 교양을 쌓았으며' 나아가서는 '불교교리에 관해서 이야기하는가 하면 조선 중기 주자학의 대가 이황과 이이를 비교하면서 토론'하였다. 그러면서 이들은 '깨끗한 사회, 범죄없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하였으며, '대통령 간선제와 1인 장기집권의 문제를 비롯하여 '왜 야당출신 대통령이 나오지 않는가'나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업주와 싸우는 공장노동자들의 입장이 무엇인가' 등을 고민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교교육에만 얽매기이기보다는 차츰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으며' '교과서적인 지식보다는 선배들과의 대화 속에서 폭넓은 사상을 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거나,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사실을 접할 때마다 사회현실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 '학교 공부에 회의'를 느끼기도 하고 공교육에 대하여 불신감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스쿨버스에서 내리면서 '대통령 서거'를 전하는 방송을 들은 학생들은 동요하였고 '모두들 잘 죽었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3) 빈민운동과 노동야학
1977년 봄 YWCA 전남협동개발단 간사 김영철은 대표적인 빈민지역 광천동 시민아파트 A동 216호로 이사를 왔다.
당시 광천동은 '궁색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방을 얻을 만한 돈이 없는 사람은 시장자리의 큰 방앗간 옆에다 천막을 짓고 살았으며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전세를 얻어 살았으며,' 광주시에서 여기에 1969년에 10평형 시민아파트 175호를 지었다. 입주조건은 월 4천 원, 20년 상환이었다. 아파트는 '복도가 암굴처럼 어두웠고 내부 벽은 매우 더러웠으며 공동화장실은 수세식이 아니어서 냄새와 메탄가스로 눈이 따가울' 정도이었으며 '사방 군데가 쓰레기장'으로 '이름만 아파트지 판자촌과 다름이 없었다.' 어린이들은 '놀이터가 없어서 부서진 리어커 위에서 난폭하게 놀던' 상황이었다.
김영철은 아파트주민의 종교 학력 직업 및 소득에 관한 기초조사를 실시한 후 시민아파트개조사업과 신용협동조합운동, 청소년 교육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는 아파트개조를 위하여 유명무실한 '유진청년회'를 부활시키고 산하에 청소년부를 두고 어린이주말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는 매일 '아파트대청소'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아파트 내부 벽에 페인트칠을 하고 염산과 하이타이로 공동화장실의 요석을 벗겨내고 변기와 타일을 새로 하얗게 단장하였다'. 아침 청소는 아동의 몫이었는데, 그는 주말학교를 통하여 각종 놀이도 하고 능력개발훈련을 시켰으며, 청소가 끝난 후에는 인근학교 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하였다. 아파트 개조사업은 청년회에서 적극 나섰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놀라울 정도로 아파트환경이 개선되고 주민생활의 질서가 잡혀가자' 주민총회를 열어 '아파트제값받기' 즉 '2백원 이하는 팔지 않는다는 결의를 하였다.
또한 김영철은 '주민과 조합원으로부터 불신을 받았던' 광천 삼화신용협동조합의 인수 운영하였다. 먼저 '어린이에게 빈 병을 모아오게 해서 노란 출자금 통장을 만들어 주면서' 신협의 신뢰를 쌓아갔다. 다시 조합원의 예금이 들어오고 조합원이 늘어가면서 신협의 자산도 불어났으며 새 사무실을 마련하여 이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실과 성취는 '주민과 직접 부딪치며' 한다는 자세를 가지고 'A동 반장, 광천동 11통 새마을 지도자'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의 안방을 '지역주민들의 회의실과 주민교육, 나아가서는 신협 사무실'로 제공하는 등의 헌신이 바탕이 되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신협의 이사장이 될 수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유덕동에 농장과 목장을 조성하고 효광여중과 광주천 사이의 넒은 밭에 협동촌 복지회관을 건립하며, 광천시장에는 지하 백화점 설립한다'는 내용의 '장기발전 10개년계획'을 세웠다. 여기에는 야간학교 건립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같이 김영철의 지역개발 주민운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을 즈음인 1978년 7월부터 광천동 천주교회에 '들불야학'이 생겼다. 6개월을 한 학기로 하여 3학기 1년 6개월 과정이었던 들불야학에는 박기순 박관현 신영일 윤상원 등이 강학으로 참여하였으며 김영철은 토의진행법 레크레이션을 지도하였다. 이 곳에서는 중학과정의 영어 수학 등을 가르쳤지만 강학들이 등사기로 직접 만든 '일반 학생들과는 다른 교재'를 사용하였다. 들불야학은 당시 광주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던 진학을 위한 2-3군데의 야학과는 성격이 달랐다. '노동자의 의식화와 조직화'와 '민주시민의 양성'을 우선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1기마다 50명을 정원으로 하였는데 초기에는 남녀학생의 비율은 4:6 정도이었다가 이후에는 6:4 정도로 되었다. 야학은 1978년 7월 1기 모집 이후 1979년 2월에 들어 2기 모집이 있게 되자 처음부터 자리잡았던 광천동 천주교회의 교리실로는 감당할 수 없어 시민아파트에 방 2칸을 더 얻었다.
근로청소년이 들불야학을 찾은 동기는 '가난으로 배움을 중단한 것을 아쉬워 하는'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활상의 절실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7년 나는 광주에 내려와 신흥금속에 취직하였다. 공원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볼 때마다 나의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 찢어졌지만 가정형편이 어렵다고 부모님을 원망하면 무엇하나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노력하였다. 내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기 위해 남의 책도 많이 빌려 보았다. 노력의 결과로 프레스반장도 하였지만 중학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나는 도면의 영어와 한문을 눈치로 대강 해석할 정도였으므로 정확하게 작업지시를 할 수 없었다. 배움에 대한 욕심이 강하였던 나는 반장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내가 살고 있는 광천동에 들불야학이 있다는 것을 알고 1979년도에 2기로 입학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공부한다는 의식이 없는 경우는 적지 않는 수가 탈락하였다. 1979년 2월 제2기 입학생에 그러한 경우가 많았는데 수업이 시작되자 절반이 줄고 6개월이 되자 남은 학생이 열 명이 못미치기도 하였다.
당시 강학은 이 같은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지 않는가를 항상 문제삼고 반성하는 자세로 임하였다. 윤상원은 이렇게 남기고 있다.
2기 학생수가 27명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 10여명이 줄어든 셈이다. 모두들 어려운 가운데 배우자고 찾아온 사람들인데 어쩌자고 이렇게 학생수가 줄게 되었는가? 수업에 흥미가 없어서인가? 별로 배울 게 없어서인가? 강학들이 학생을 무시했기 때문인가? 개인적으로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빨리 파악해야 할 것 같다.
이 같은 자세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강학들은 야학생과 일체감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쳤다. '검정통고무신에 항상 똑같은 작업복을 입은' 박관현은 '거리감없이 하나되어' 야학생과 어울렸으며 윤상원은 시민아파트에서 야학생과 같이 자취를 하였다.
야학교실이 비좁아 일일다방을 통한 아르바이트를 해서 아파트 방을 얻었을 때 강학들이 '돈이 많아서 얻었겠지'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대하던 야학생들도 강학들을 이해하고 믿었으며 '무척 좋아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야학생들은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우리 노동자들이 어떠한 조건에게 일을 하고 있는가를 알' 만하게 되었으며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겨났고 나아가서 '사회구조의 불평등과 사장들의 비리 등을 알고 난 후 이용당하였구나 하는 분한 생각까지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노동자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 찾아야 할 권리 그리고 노동자 자신을 위해서 노동자 스스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발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발언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여성노동자를 보면서 '공부보다는 공순이들과 만나 적당히 즐길 수 있겠다'의도를 가지고 있던 한 남자 야학생은 '그 동안 공장 다니는 여자아이들에 대한 나의 왜곡된 생각 … 얕잡아보고 무시하는 내 사고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하고 또한 간혹 아파트청년들과의 마찰이 있었을 때에도 '이것저것 안가리고 싸움만 한다면 우리가 이길 수도 있었겠지만 혹시나 야학 여학생들한테 피해가 돌아올까 봐 항상 당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남녀차별에서 남녀동등의 동료의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자치회를 운영하여 회장을 선거하였으며 야학의 위기과정에서 자치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의지를 모으기도 하였다.
'1979년 8월 제3기 입학식을 하면서 …강학들이 자기 수업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강학들이 학교에서 나름대로 할 일도 많았겠지만 경찰에 쫓겨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는 나름대로 회의를 하여 "언제 어느 때 강학들이 안 나올지 모르니 각자가 수업을 맡아놓자. 만약에 국사 강학이 나오지 못하면 국사를 맡았던 사람이 수업을 하자"고 정했다.
야학생 중 일부는 노동현장에서의 낮은 임금수준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야학을 통하여 다져진 비판적 사고를 실천에 옮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현장에서 싸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프레스 반장을 하고 있을 때 하루 9시간 근무에 일당 900원, 그 외 8명의 일당은 6-700원이었는데 하이컬러층에 비하여 너무 적은 액수라고 생각되었다. 8명 중 몇 사람을 추천하여 일당을 인상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프레스반 일당을 인상시킬 경우 신흥금속 의 전체 공원의 일당을 인상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나의 요구는 관철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 부사장 공장장 공장장과 면담을 요구하였지만 결렬되었다. 토요일 근무가 끝나고 "야 월요일부터 출근하지 마라. 연락할 때까지 집에서 기다려라"하는 조치를 취해 놓고 일요일 과장 부사장 집에 찾아가 재면담을 했지만 나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도 상급자에 전화를 걸어 "나는 출근하고 싶은데 반장이 출근을 못하게 한다"고 아부를 하였던 동료도 몇 명 있었다. 후에 그들만 일당이 인상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1979년 12월 31일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1980년 5월 초…들불야학에서 2년 동안 배운 것을 바탕으로 "노동자로서 살아야 할 길과 권리를 찾자"는 생각을 했다 … 광천공단 내의 노동자의 생활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한달 내내 뼈빠지는 작업과 숱한 잔업을 해도 1개월 월급이 12만 원에서 최고 15만 원 정도였을 뿐이다. 이러한 대우와 이외에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해야 한다고 요구하다가 …"그만둠"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 상의 요구에 기초한 경제투쟁은 소규모이었으며, 쟁의수준에서 집단적으로 제기되지 못하였다. 여기에는 회사 측의 노무관리의 개입이 있었으며 또한 비판적 사고가 바로 실천적 운동역량의 제고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노동자의식은 '1980년 5월 학생들의 데모가 연일 계속되었지만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나는 회사에 충실하면서 다만 동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상황을 파악하였을 뿐이었다'고 한 것에서 보듯이 바로 정치의식 내지는 정치행동과 접목되지 않았다.
그러나 10·26 이후에 들불야학은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되었다. 오히려 야학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던 것이다. 야학생 수는 더욱 줄어들어 제1기가 졸업하던 1980년 2월에는 '전체가 30명 정도밖에 안되었다'. '운동권으로 지목된 강학들의 부모를 동원한 별의별 협박이 가해지면서' 강학들은 '집에 감금당하였으니,' '일부 자취하는 강학이나 운동권 명단에서 제외된 강학들이 야학을 꾸려가려고 몸부림쳤으나 정상적인 야학운영을 하기에는 미력'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광천동에서의 들불야학의 발전과 시련의 시기에 근로청소년의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야학도 서서히 성격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1978년 10월 말 쯤 나는 친구의 권유로 야학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랑의 교실이라는 이 야학은 당시 들불야학과는 달리 상급학교로 진학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검정고시 준비를 시켜주는 곳이었다. …1979년 가을 이 학교의 졸업생이었던 여자 형제가 아이스크림 공장에서 손을 잘리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현대문화연구소 YWCA YMCA JOC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노동야학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우리 팀은 1980년 백제야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남동성당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5. 광주 민중의 생활과 의식
1) 광주 전남의 정치적 선택
박정희 독재정권의 종속적 불균형 차등성장전략으로 전남 지방은 상대적으로 정체 혹은 낙후를 면치 못하였다. 전남농촌을 배후로 한 광주는 생산도시로서의 면모보다는 행정·교육·유통의 중심지로서 성장하였으며 그만큼 농촌잉여의 점증 유입을 불가결한 재생산조건의 하나로 하고 있었다. 이 같은 경제사정은 계급구성에 반영되었다.
우리 나라에서의 농촌의 급격한 해체를 수반하였던 경제개발로 인하여 계급구성은 노동자계급의 급격한 성장, 쁘띠부르조아지의 감소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전남은 대규모 탈농인구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산업화의 상대적의 낮은 수준으로 인하여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즉 전국적 수준과 비교하여 노동자계급의 비중이 낮을 뿐 아니라 그 성장의 속도가 더디었으며, 쁘띠부르조아지의 감소경향은 정체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쁘띠부르조아지의 동향과 관련하여 전국 수준에서는 농촌쁘띠부르조아지의 급격한 감소와 도시쁘띠부르조아지의 꾸준한 성장의 양상인데 비하여 전남은 농촌쁘띠부르조아지가 강력히 그 존재를 유지하였으며 도시쁘띠부르조아지는 그다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현상이 광주와 전국 주요 도시간의 비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광주의 노동자 계급의 비중이 낮은데 특히 생산노동자의 비중은 전국 시부 평균이 31%인데 비하여 광주는 21.9%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대신 농촌과 도시쁘띠부르조아지의 비중은 전국 시부의 평균을 넘어고 있었다. 이는 농촌쁘띠부르조아지의 비중에 의한 바이기도 하지만 도시쁘띠부르조아지 중에서도 판매직 종사자와 서어비스종사자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었다.
이상을 살펴보면 전남과 광주의 계급구성은 농촌쁘띠부르조아지의 대규모 잔존, 광주시의 도시쁘띠부르조아지의 퇴적 노동계급 성장의 미약성 등의 특징으로 보여주는데 이는 전국적 수준에서의 자본주의적 계급분해양상과는 상당한 차이는 보이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비단 제3·4공화국에 한정되어 벌어진 일은 아니었지만, 박정권의 지역차별 불균형성장전략의 추진과정에서 광주 전남의 상대적 저개발의 실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1963년 대통령선거에 전라도는 윤보선보다 박정희에게 더 많은 표를 던졌다. 서울과 경기에서 윤보선은 71만 표를 더 얻었던 박정희는 경상도에서 55만 표를 앞서는데 불과하였다. 박정희는 전라남도 28만 표 전라북도 6만 표를 합한 34만여 표를 더 얻어 이상의 열세를 만회하고 15만여 표로 승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67년의 대선에서는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다. 비록 적은 표 차이지만 윤보선은 호남에서 약 9만 표를 앞섰다. 그러나 박정희는 윤보선에 비하여 경상도에 3배 가량의 몰표를 얻었다. 이 같은 투표성향은 공화당 정부의 지역편향적 차등성장전략에 대한 영남의 전폭적 지지와 호남에서의 부분적 반발의 표현이었다.
1971년의 대선에서 호남은 김대중에게 63만 표를 더 주었으나 박정희도 전남에서 38%, 전북에서 35%를 득표하였다. 박정희는 영남에서 160만 표 가량 우세하였고 김대중의 득표는 28% 수준이었다.
이와 같은 선거결과는 호남인은 선거를 통하여 공화당 정부의 출현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가, 지지를 철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철회의 정도는 영남에서의 박정희에 대한 일방적 지지와 비교해 보면 보다 완만한 것이었지만 분명히 공화당 정부의 지역차별에 따른 소외의식을 투표로 나타난 것이었다. 유신체제 성립 이후에는 이마저 봉쇄되었다. 오히려 호남에 차별과 배제의 굴레를 씌워나갔고 이에 대한 깊은 소외와 회한을 품고 있었다.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이었겠지만 야당활동을 하거나 정권에 대하여 반대하면 가정경제를 책임질 수 없는 경우가 많았으며, 또한 생업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배척당하거나 승진에서 탈락하여 울분을 새겨야만 하였다. 그 대가는 일차적으로 가족이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부모님은 내게 꾸중을 많이 하셨다. 나는 이에 반발하여 중학교를 마치고는 아예 공부를 포기해버렸다' 고 하는 이면에는 부친의 야당활동에 따른 승진대열에서 탈락과 낙오에 대한 울분이 자녀에 전이된 사정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 하의 비리와 불법에 대하여 회의하였을 때 직장을 떠나 다른 생업의 길을 찾으려고 하여도 권력 측의 냉대와 일종의 보복적 성격의 비협조를 경험하였다.
2) 민중생활
1970년대 광주 민중생활의 한 단면은 '큰애가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금이 없어 간신히 돈을 구해 들어갔다 … 전세금을 모을 틈이 없었으므로 우선 사글세를 살아야 했는데 열 달이 지나면 다시 돈을 주고 방을 구해야 했다. 학동 가죽공장 뒤에 있는 5만 원짜리 사글세방에서 살다가 기간이 끝나자 더 싼 방을 얻어 방림동으로 이사했다'고 하듯이 자녀의 교육비와 주거해결에도 힘겨운 생활이었다.
또한 가난한 집 자녀는 '학교에 나가면 있는 집 없는 집 애들의 차이가 확연했다.… 나는 주로 고아원 출신 애들과 잘 어울렸다. …집에 들어가면 밥이 없었을 뿐더러 항상 썰렁했다. 그래서 자주 고아원에 가서 밥도 얻어먹고 잠도 잤다. 학교에서 나는 어느덧 고아 거지로 통했고 없는 집 자식이라고 자주 구박을 받았다'거하듯이 멸시와 차별을 당하면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도시서민층은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 현실과 처지에서 생존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일찍부터 스스로를 '조숙하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었고 또한 '돈을 벌어 자립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공부보다는 무엇을 해서 돈을 벌 것인가' 하는 문제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하였기에 '중학생 어린 나이였지만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은 나라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움을 느꼈고 … 할머님과 어머님 그리고 여동생을 내가 부양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나를 어둡고 그늘지게 하였다'와 같은 중압감과 긴장감을 안고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또한 10남매의 셋째이었던 소녀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간다는 말도 못하고 취직하였다'고 하듯이 다른 가족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또한 더 나은 보수를 얻기 위하여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방을 전전하기도 하였으며 '미싱 자동차정비 식당종업원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일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기술을 한 가지라도 배워야 앞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신념에서 시작한 숙련공 기술자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의 시련도 이들에게는 잊혀지지 않았다. 영세한 가내공장과 점포에서의 견습공의 길은 특히 고달픈 일이었다. '처음에는 종업원이 아니라 종 취급을 받았다. 선배기술자에게 갖은 학대를 다 받으며 기술을 배우던 5년 동안은 월급도 받지 못하다가 그 뒤에는 1만원씩을 받았'던 1960년대 견습공의 생활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시계수리공이 되기 위해서는 '말이 숙식제공이지 일과가 끝나면 가게문을 닫고 차가운 바닥에 자리를 깔고 자는' 환경에서 '가게청소, 심부름, 식사 나르기 등'의 일부터 하여야 하였으며, 양복재단사가 되기 위한 5년 견습기간에는 '처음 배우는 과정이라 보수는 전혀 없고 먹고 자는 것이 전부였다'고 하는 정도이었다.
그리고 숙련되었다고 하여도 근로대중은 노동현장에서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그리고 기업주의 자의에서 주어진 위축당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12시간 이상을 작업하였으며 임금지불형태는 주로 할당급이나 일당제이었다. 즉 수도시설 등을 맡아하는 배관공은 화장실 수도 등의 시설을 공사하는 회사에 '매일 출근하지만 일이 있으며 하고 없으면 그냥 놀았다. 보수도 당연히 일당으로 계산해서 받았다'고 하였으며, 이름있는 회사의 기능공도 임금은 다소 높다고 하여도 일당제이었기 때문에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처지'나 다름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매우 낮은 임금에 혹사를 당하였다. 광천공단을 예로 들어보면, 여기에서 임금수준이 높다고 하는 금속 기계 분야에서 평균임금은 33,981원으로 이는 당시 한국노총 산차 전체근로자의 기본금 평균 74,125원의 45.8% 수준이었다. 또한 광천공단 노동자의 60% 이상이 사용자측이 책정한 최저임금 즉 최저생계비를 보장받고 있지 못했다.
이들의 생활상태는 영세기업 노동자나 농촌 출신일수록 더욱 열악하여 숙식문제만 하더라도 '2층 건물의 아이스크림 만드는 식품회사에서 '5-6명의 남자 공원들이 숙식하며 일하였으며', '쉬는 날에만 집에 왔다 가곤 하였다'는 상황이었다.
이들에게 노동시간이나 임금수준은 '모든 것이 주인 마음대로' 정해진 경우가 많았으며, '모든 사원들은 무슨 말을 하고도 그 말이 높은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봐 무서워서 벌벌 떨었고 사장의 말은 지상 최대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고 하는 상황에서 어떠한 논의나 의견은 극도로 제약당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노동조합의 결성율이 낮고 있더라도 활동은 매우 침체되었다. 또한 노동자의 움직임이 있으면 사용자 측은 '긴급조치위반으로 해고한다'는 강박을 일삼았다.
또한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회사에서는 나를 특별히 대우하였는데 노동자로서는 좀처럼 드문 일인 개별면담도 자주 했다. 나는 원래의 조건대로 반장을 했을 뿐 아니라 조장 차장 노무과와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에 내가 월급을 올려달라고 하면 잘 들어주었다. 그러나 다른 노동자의 월급은 무척 적었다'에서 보듯이 기업 측의 노무관리에 구사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생활에서도 '하루의 고된 일이 끝나면 동료들과 술도 한잔 걸치고 이것저것 이야기도 나누었다'고 한 것처럼 정보교환과 상호유대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이들은 절약생활을 몸에 읽혀 어린 시절부터 이미 '공장에서 숙식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별다르게 생활비가 들어가지 않아 꼬박꼬박 저금을 하였다'거나 '양복점 사장의 안집에서 지내면서 받은 월급을 특별히 쓸데도 없어 어머니께 꼬박 꼬박 갖다 드렸으며', '부모님이 경영하신 세탁소에서 옷을 분실하는 등의 사고가 잦아서 집안형편이 더욱 어렵게 되자 월급은 모두 부모님께 갖다드렸고', 또한 '좀 더 좋은 조건이라면 지방도 마다하지 않고 가서 일하고 돈을 벌면 으레 시골집에 갖다 주었다'고 하듯이 열심히 저축을 하거나 어려운 가족을 위하여 적지 않는 보탬을 주었다. 그리고 기술을 익혀 월급을 받게 되어 약간의 여유가 생긴 18세 재단사는 '소 2-3마리와 한봉으로 입에 겨우 풀칠하는 시골집의 여동생을 광주로 데리고 나왔다'고 하듯이 기꺼이 동생의 부양책임을 떠맡았다.
그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저축하였다. '국민학교 졸업 후부터 … 14년 간 꾸준히 나전칠기 일을 계속하였다'거나 '10여 년 가까이 공사판 여기 저기를 찾아다니며 목수 일을 했다 … 어느덧 나는 숙련공이 되어 있었다'고 하여 외길을 걸어 숙련공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처음에는 막일을 하다가 1980년 초 위생배관자격증을 따서'라고 하듯이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하였다. 또한 '4년 동안 공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자전거를 한 대 사서 도매점에서 물건을 사다 소매점에 넘기는 장사를 하였다. 간장공장에 다니면서 안면이 있던 사람이 많아 그 장사를 그럭저럭 할 만하였다'와 같이 어느 정도 자립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오후 5시까지 일을 찾아 날마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을 하여 주위의 신망도 얻었으며, 영세하나마 사업체를 직접 경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성취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밥 한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재건중학교 졸업으로 정규교육 과정을 마쳐야' 했던 소년이 1년을 경찰서 사환으로 봉급 없이 지내다가 18세에 직접 화물트럭을 운전하게 된 것은 3년 가까이 조수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책을 사서보고 아는 선배 밑에서 영어공부도 계속'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자족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였다. 즉 '2개월만에 10만원을 받고 3개월만에 14만원 정도를 받았다. 당시 광천공단 내에서 견습공 월급이 그 정도면 최고의 대우라고 할 수 있었다'고 같이 임금수준에 어느 정도 만족하기도 하였으며, 그리고 화물배달꾼과 스낵코너 종사원 부부도 '악착같이 일하며 … 가진 것 없었지만 서로 의지하며 재미있게 살았다'고 하듯이 가난 속에서도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았다. 화물차를 운전하다가 군소버스회사를 거쳐 대기업 버스회사에 취직한 운전기사는 일이 더욱 바빠졌지만, 이전보다 대우를 잘 받게 되자 '모처럼 저축이란 것도 해보고 앞날을 구상해 보며 하루하루 희망에 부풀어 살았다.'
또한 그들 나름의 꿈을 키우면서 보람을 찾아 살고자 하였다. 양장점에서 재단일을 하던 근로여성에게는 '시내에 양장점을 차리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고, 국민학교 6학년 때 광주로 나와 신문팔이 등을 하였던 소년이 군복무 후 숙박업에 종사하면서부터는 '관광학원에라도 다녀 서울 일류 호텔에 근무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간직해온 기다림과 소박한 소망을 이룩하게 되면서 안정을 되찾고 삶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도 하였다.
내가 여섯 살 때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어머님은 그 해에 나를 고아원에 맡기고 개가하셨다. … 무등갱생원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학용품은 각자 벌어서 썼다. 나는 구두닦이를 하였는데 다른 친구들은 신문팔이도 했다.…서울로 올라갔다. 그때 고생했던 것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연락이 닿은 한 고향사람들을 틈틈이 찾아다니면서 어머님 소식을 물었다. 그렇게 생활한 지 2년… 어머님이 화순에 살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 화순으로 내려왔다. 여섯 살 때 헤어진 후로 13년 만에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와 함께 살기 힘든 조건이었기 때문에 식당에서 먹고 자고 했다. 그 후 화순터미널에서 구두닦이를 하면서 매표소 일도 했다.
1980년 봄 나는 광주로 내려오면서 할머님과 어머님 그리고 여동생을 광주로 올라오게 하였다. 10년 이상을 떨어져 살았던 식구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 때문이었다. 광주에서는 군대에 가기 전에 했던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공장에서 바로 물건을 떼어다가 가게에 넘겨 주는 중간상인 정도의 일이었다. 1980년 봄을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와 새로운 각오로 보내고 있었다.
3) 민중 경험
근로대중의 생활현실은 우리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사회의 변화 발전의 음영과 민족의 상흔이 짙게 베어 있었다.
이들에게 농촌의 해체와 농업의 위기에서 오는 농촌생활의 빈곤함은 쉽게 잊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갖은 고생 끝에 통신고교를 마치고 우체국의 임시 집배원을 거쳐 제1회 대전체신청 집배시험에 합격하였던 청년은 고향에서의 '머슴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생활은 어려웠고 품팔이로 연명하였던' 경험을 안고 살았다.
빈농의 출신은 '우리 집은 손바닥만한 논도 밭도 가진 것이 없어 소작을 하며 농사를 지었다 … 무척 힘겨운 생활이었다. 때문에 형들은 내가 어렸을 때 객지로 나갔다 …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이 마을의 다른 집 아이들도 대부분이 중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객지로 돈벌러 나가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집을 떠난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와 같이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예사이기도 하였다. 또한 '나는 5남매를 낳았는데 죽자꾸나 농사를 지어봐야 농사밑천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아이들 교육문제도 있어서'라고 하여 농사수지의 악화와 자녀교육문제 등으로 농촌을 떠나온 경험이 있었다.
이들에게 도시에서의 생활은 농촌보다 나아지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더욱 가혹한 시련을 안겨주었다. '몇 뙈기 논밭을 팔아 광천동에 조그마한 중국음식점을 마련해 왔으나 시골에서 보다 더 나을 것 없는 생활이었다'거나 '막상 광주로 이사했으나 식구들은 많은 데다 특별한 기술도 없어 끼니를 굶을 때가 다반사'인 경험이 있었다. 또한 농토매각대금으로 상점을 열고 시작하였지만 '아버지는 노름으로 … 가지고 있던 돈을 거의 다 날려버린'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생활환경이 농촌에서 도시로 바뀌면서 오는 정신적 혼란이 이러한 사고를 야기하였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또한 기업과 도시는 '1965년 경 송정리로 이사하여 과일가게를 1년 정도 하다가 밑천만 까먹고 화순 이양의 개인탄광에 취직하였다가 다리를 탄대에 다치는 바람에 그나마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라든가 국민학교 6학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신문팔이 밀감장사 껌팔이를 하는 소년의 '시장에서 팥죽을 사먹기도 하고 잠은 …날씨가 따뜻할 때는 공원 벤치에서 잤다 … 깡패들한테 많이 맞기도 하였다'는 등의 산업재해나 배고픔 속에서 도시의 공포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빈민층에게는 '가난한 집에는 돈들 일도 많다더니 내가 6세 때인 1965년 어머니가 위 수술을 하였다. 거기에다 아버지 마저 심장병으로 전남대 병원에서 세 번이나 수술을 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병원비를 대느라 얼마 되지도 않는 논을 다 팔아버려 살아갈 길은 더욱 막막하게 되었다'거나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 두 살 뒤 누나의 병치료를 위하여 광산구 삼도면 논을 모두 팔았으나 결국 누나는 죽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급자족하던 식량마저 사먹는 입장이 되었다'고 하는 가족의 질병 등의 우환으로 인한 경제적 박탈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때 도시개발과 부동산경기의 활성화 속에서 '농토를 팔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은 더욱 커지는 것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주류판매 도매상은…빈번한 외상거래와 비아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가세는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그 일 때문에 재판을 너무 오랫동안 하느라 재산을 탕진했다'거나 가게를 열기 위해 집을 판 돈을 친척에게 빌려주었다가, '돈을 갚을 때 한꺼번에 주지 않고 조금씩 주었기 때문에 변변한 장사밑천을 마련하지 못하고' 리어카 행상을 하게 되었다고 서민금융관행에서 피해를 당하였던 아픔이 있었다. 이는 다른 한편에서는 '서민에게 은행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제기를 하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신용사회의 과제를 안겨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집에 밧줄공장을 자동차 헌 타이어로 고무 밧줄을 만들어 파셨다…그런데 1973년 석유파동이 있게 되자…아버지의 공장도 타격을 받게 되었다'와 같이 석유파동의 와중에서 가업이 몰락하고 또한 중동의 시리아를 상대로 전화접속기를 수출하던 회사가 '제3차 중동전쟁으로 1975년까지 스에즈 운하가 패쇄되자 선박을 이용하여 시리아에 수출되었던 전화접속기 전량이 반입되어 파산하자 어렵게 얻은 직장을 잃고 여기저기를 전전'하였던 고통을 겪었다.
이들은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학교용지나 공단부지에 편입되어 생활의 근거를 박탈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 대에 화순 이양에서 서석동으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서석동 집은 원래 적산 땅이었는데 조선대학교 부지로 편입됨에 따라 쫓겨나야만 했다. 이사를 하기까지 박철웅의 횡포는 실로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우리 집은 높은 지대에 있어서 물난리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는데 어느 날은 비가 조금 왔는데도 집안에 물이 들어와 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박철웅이 불도저로 흙을 우리 집 부근에 쌓아 놓았기 때문이다. 집 앞에다 쓰레기더미를 잔뜩 쌓아 놓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박철웅의 협박과 공갈에 못이겨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14여 평의 대지 값으로 40만원을 받았을 뿐이었다. 간신히 전세방 하나를 얻을 수 있는 돈이었다. 집단적 항의 한 번 못한 채 그 마을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억울하게 쫓겨나고 말았다.
1930년대 후반 남평에서 광주 내방동으로 이사하여 열 다섯 마지기의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었다… 청천벽력 같게도 1968년 생존의 터전인 땅을 강제로 헐값에 팔고 쫓겨나게 되었다. 땅이 아세아자동차 공장의 부지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겨우 평당 3천원을 받았는데 당시 땅을 빼앗겼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후 가세는 형편없이 기울어졌다. 부모님은 하루 하루 노동으로 생활을 꾸려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 마을 120가구의 사람들도 모두 아세아자동차 공장의 부지로 땅을 빼앗기고는 잡노동 등으로 어렵게 생활하게 되었다.
이처럼 농촌의 해체와 도시화의 진행 과정에서 그리고 수출지향적 대외의존적 한국경제의 모순의 한 가운데에서 좌절하고 굴절당하는 경험이 그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신용이 지켜지지 않았던 낮은 합리화 수준에서 나아가 의료보장제도가 갖추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그토록 쉽게 몰락하게 되었던 와중에 휩싸였던 것이다.
이 같은 서민생활의 가난과 질곡의 이면에 한국전쟁의 상흔이 짙게 맺혀 있었다. 전몰군경과 상이군인과 전쟁고아로서의 사회적 멸시와 고통은 비단 한 세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와 그의 가족에 미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기간의 상이용사의 자녀들은 가난으로 인하여 '식구가 많다는 이유로 셋방살이에서 쫒겨난 경험'이나 또한 '동네 친구들이 아버지를 보고 불구자라고 놀릴 때'의 가슴아픈 기억으로 재현되었다. 산지기와 차고지기 아버지와 고물장사 어머니 아래서 고학하는 청소년에게는 6·25때 가족을 잃고 전쟁고아가 되어 고아원일을 돌보며 성장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유공자의 자녀들의 생활상의 곤궁함과 외로움은 잊혀질 수 없었다.
4세 때 6·25로 인하여 아버님을 여의고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렵게 되자 작은아버님 집에서 자랐다. 국가유공자라는 혜택 때문에 겨우겨우 먹고사는 형편이었다.…중학교를 진학하면서 광주로 나와 누님과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꿈같은 생활이었다. 연탄보급이 되지 않아 나무를 피우며 살았다. 무등산 작고개를 넘어 나무 한 다발을 하려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출발하여야 했다. 나무 한 다발로 연필 노트 등 학용품을 몇 개 살 수 있었으므로 도저히 나무를 사서 땔 수가 없었다. 누나는 낮에는 미용학원을 다녔고 내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나무를 해 온 날에는 너무나 피곤하고 가난의 설움에 지쳐서 누나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기도 하였다.
분단과 전쟁은 또한 양극의 폭력적 충돌과 광기 하에서 한편의 선택을 강요하면서 진행되었던 만큼 그 과정에서의 억압과 좌절의 굴레와 기억은 쉽게 지울 수 없었다. 또한 그리고 이는 가족에게 그대로 씌워지게 되었으니 이른바 '연좌제'이었다.
4남 2녀 중 형님 두 분이 빨치산 활동을 하신 관계로 우리 가족은 경찰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고 살았다. … 경찰의 빨치산 토벌작전이 본격화되자 빨치산 가족에 대한 탄압도 극심했다. 우리 면에서는 지서 옆에 수용소를 지어놓고 그곳에 입산자의 가족을 감금시켰다. 우리 마을에서 수용소 생활을 한 사람은 5가구에서 15명이었다. 우리 가족은 편찮으시던 아버님을 제외하곤 5 명이 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경찰들은 밤에는 숨어 지내다 날만 새면 우리들을 이끌고 산으로 갔다. 경찰의 강요에 못이겨 산을 쏘다니며 "자수하라"를 소리치며 다녔다.
나의 아버님은 명치대 법대를 졸업했음에도 고시를 볼 자격조차 박탈당할 정도로 불운한 세상을 살다 가셨다. 그것은 작은아버님 때문이었다. 작은아버님께서 여순사건에 참가한 후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실형을 살았던 것이다. 아버님은 전국운수노조조합장을 지내다 세살 되는 해에 작고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가족은 심한 경제적 압박 속에서 생활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무렵 배 한 척을 가지고 계셨는데 6·25전쟁이 나자 해창에서 국방군에 의해 돌아가셨다고 한다 … 누님과 나를 키우시느라 어머님은 보따리 행상을 하셨다…나는 15세 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집을 나왔다. 그때부터 1980년까지 20년 동안 안 해본 일 이 없다시피 했다. 서울에서 군밤장사도 했고 식당 홀보이 다방주방장 여관 등 순천 완도까지 돌아다니며 생활했다.
아버지는 담양에서 지주급에 속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고등교육까지 받은 분이셨다. 고등학교 재학시절이었던 6·25 때는 유격대 활동을 하였는데 … 휴전 후 할아버지는 전재산을 거의 헌납하는 조건으로 광주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지은 그 동안의 죄(?)때문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전력은 아버지 자신을 물론 자식들은 우리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공부는 해서 뭘 해? 빨갱이로 낙인찍힌 아버지 밑에선 출세하지 못할 것이 뻔한데". 특히 아버지를 보면 "아버지 때문에 내 앞길이 막혔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교편생활을 하신 아버지는 6·25 때 좌익활동에 연루되어 총상을 당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3살 된 나를 영광금융조합 상무인 양부에게 입양시켜 버렸다. 양부모의 끔찍한 보살핌으로 활발하게 지냈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춘기 때부터 나의 뿌리에 대한 갈등이 시작된 나는 … 건달세계에 발을 들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도 나는 친부모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1972년 가사재판을 하여 다시 호적을 찾았다. 그때는 형님 한 분만 살아 계실 뿐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없었다.
우리 사회의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이라고 하는 문제와 장남 중심의 차등적 상속제도도 생활 상의 장애가 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큰아버지는 장남이었기 때문에 농토를 많이 물려받았다. 그래서 우리 집은 그것을 소작의 형태로 부쳐먹었다'고 한 경우의 청소년은 '배우고자 하는 열의는 있었지만 배울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집에 대한 회의'를 품고 성장하였으며, '광주에서 큰집 형님이 운영하는 전남주유소에서 잔일을 도와주며 생활하였다 … 월급은 없었고 고작 의식주를 해결하고 약간의 용돈을 받으면서 …큰집 가족들 모르게 공부를 해 중학교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다'고 하는 생활의 여정을 밟게 되었다.
또한 가족주의의 멍에는 보다 심각한 갈등요인이 되고 있었다. 즉 '아버지는 첫 부인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여 어머니를 맞으셨는데 첫 부인도 우리와 함께 살았다 …집안 분위기는 항상 어색하였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재혼하시고 우리는 큰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동네친구들을 따라 무작정 집을 나왔다'고 하거니와, '나의 형제는 11명이다. 위로 내리 여섯 분의 누님들은 큰어머님의 소생이다. …아버님이 아들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의 어머님을 둘째 부인으로 얻으셨다. 어머님은 나를 낳으셨고 …아버님은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태어날 무렵 임신 중이던 큰어머님이 내게는 불행하게도 바로 며칠 후 아들을 낳으셨다. 갑자기 나의 존재는 개밥의 도토리가 되었다. …아버님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으신 것이다'고 하는 예에서 그 내면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근로청소년에게는 배울 수 없었다는 한이 있었다. 그들은 '나이가 나이인 만큼 객지생활은 힘들었다.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들고 다니는 학생들을 보면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못 배운 것이 한스러웠다. 그러니 당연히 가난을 원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듯이 배우지 못한 데에 따른 회한이 있었다. 그리고 사정이 조금은 나아서 고학을 할 수 있었다고 '어떤 인쇄소 주인은 자가용이 2대나 되는 부자인데도 우리가 학교에 가려고 하면 못 가게 했다. 그 일로 화장실에서 어린 동료들과 서럽게 울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며, 새벽에는 신문배달, 낮에는 사환으로 하던 고학생은 '야간학생이었던 인간적 차별'을 당하면서. '학력이 낮으면 진급할 수 없다'는 현실의 벽에 힘겨워 하였다. 그러기에 기술을 익혀 노동현장에 있으면서도 '실업계 고등학교라도 다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슴 한 구석에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새벽 4시에 일어나 밤 12 , 1시까지 일을 하는 벅찬 생활'을 하면서 중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실업계 야간에 입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우 거기에서 오는 아픔과 혼란, 갈등과 방황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경제적 곤란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청소년은 방황하고 일탈하는 생활을 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생활전선에서 열심히 살아갔던 것이다.
3) 민중의식
이처럼 민중의 생활과 경험은 농촌의 해체와 농업의 위기, 의료보장체제의 미흡함과 신용과 신뢰가 허물어진 사회의 단면이 투영되었으며, 또한 도시화 산업화 과정이나 한국경제의 세계자본주의 종속성과 분단과 전쟁의 민족적 불행이 개재해 있었고 또한 그 상흔이 짙게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봉건적 가족주의의 폐단에서 희생당하고 있었다. 또한 노동현장에서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희생당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자립과 자활을 위하여 노동하고 절약하며 저축하였고 또한 그 나름의 꿈을 간직하고 목표를 세워 살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생활경험과 행로에서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즉 다른 지방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지역차별의 현실을 절감하였으며, 미군주둔이라고 하는 민족현실의 한 부분에 다가서기도 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납부금 1350원이 없어 학교를 중퇴하였다. … 서울로 올라가 양복점에 들어갔다. …기술도 웬만큼 익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산으로 갔다. … 취직을 하려고 광복동 남포동 동래까지 양복점이란 양복점은 모두 돌아다니면서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하나같이 처음에는 써줄 듯하다가도 고향이 전라도라는 말을 하면 고개를 저었다. … 정확히 석달 23일을 그렇게 떠돌아다니다가 겨우 전라도 사람이 경영하는 작은 양복점에 취직되었다. …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차별대우하니까 전라도사람들은 같은 고향사람끼리 뭉칠 수밖에 없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는 이발소에 들어가 일하다가 18세가 되던 해에는 이발소 대우가 서울이 더 좋을 거라는 소리를 듣고 서울로 올라갔다. …이태원 부근의 이발소에서… 일당으로 받는 120원으로는 혼자 생활하기도 벅찼다. 이태원에서 나이어린 애들이 미군들 틈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볼 때 울분과 분노를 느꼈다.
그러면서 이들은 '박정희 같은 군사정권이 전라도 사람들을 탄압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야당기질'을 가지고 있다든가 또한 1971년의 대통령선거에서의 '김대중'을 기억하고 추종하였다.
이들도 민주화를 기대하였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화는 '1976년 10월 26일을 기쁨의 날로 맞고 은근히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민주화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우리 같이 가난한 서민들이 잘사는 사회로만 알고 있었다'고 하였듯이 정치적 차원이 아니라 생활의 문제와 관련한 민주화이었다. 그는 '배우지 못했을 망정 성실하게만 살면 잘살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것'을 민주화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이 이들이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있었고 또한 자신들의 경험에서 주어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들은 세금문제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도청 앞 민주화 시위를 참여한 청년은 '나처럼 농사짓는 사람들은 애들 대학에 보내기도 힘겨운데 하다 못해 하수도세니 뭐니 하여 세금의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게 많은 세금을 내면서는 도저히 살수가 없다'고 도청연단에서의 외치는 한 아주머니의 발언에 오히려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민은 이 같은 의식이 잠재화되어 있다고 하여도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은 생활상의 자립과 성취이었다.
평소에 가난하여 자주 굶었던 농촌을 떠나 광주에서 연탄배달을 하여 조금이나마 수입이 있었던 청년은 '시내가 시끄럽다고 하여도…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무관심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이 '생활에 쫓기다 보니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으며,' '관심은 오직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버는가'에 있었으며, 정치에 대해서도 '돈 많고 권력있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들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학생운동에 대해서 '학생들은 부모 잘 만나 대학 다니면서 겉보리까지 팔아 돈을 대주니까 데모나 한다'라거나 '배가 따뜻하니까 데모를 한다'는 식으로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가난하여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운전사가 된 청년은 '사실 데모하는 학생들을 미워했다. 비싼 납부금을 내고 공부는 하지 않고 3,4일을 계속 데모하면 운전자의 입장에선 학생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로가 막히게 되니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고하여 생활문제와 관련하여 반발심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반감은 일방적 매도는 아니었다. 여기에는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나온 것으로 그들 나름대로 생활경험에서 체득한 본분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바램의 한 표출이었다.
6. 맺음말
유신체제 하에서의 개발독재와 지역차별 민중희생에 대하여 197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 진영은 동학농민전쟁으로부터 3·1운동 등의 일제하 민족독립운동 나아가서 반독재민주화 반외세자주화의 4월혁명과 6·3운동의 연장선에서 역사적 정통성을 찾으면서 민중주체성을 전면화하면서 발전하였다. 또한 정치 권력부문을 넘어 산업 교육 언론 등의 사회 각 분야의 민주화를 통하여 민생안정과 민권신장 그리고 민족통일을 지향하였다. 이같은 사회민주화운동은 학생과 교회를 통하여 민중운동과 접맥하였으며 상호 연대와 단결을 추구하였다. 민주주의 민족통일 국민연합은 비록 상징적이었지만 상층전선적 지도기관을 자임하였다. 그리고 제도권 야당으로 재야나 지식인 학생 등으로부터 외면당한 신민당이 선명성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반유신 반독재의 기치 아래 집결하자 유신권부는 야당 총재를 국회에서 축출하고 1979년 가을 학기 민중운동에의 지지와 성원 연대를 표방하면 재연하였던 학생운동에 대하여 강경일변도의 진압으로 맞섰다.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의 시위는 민중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부마민중항쟁은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정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로서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나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 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발포와 학살'로 대응하고자 하였고 결국 10·26을 맞게 되었다.
박정희의 죽음은 유신체제의 종식과 새로운 정치질서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매판독점자본의 억제와 민족자본의 부흥과 민중생활의 향상이 주어질 수 있는 계기이었다. 또한 국민의 참여민주주의와 건전한 시장경제를 구현할 수 있는 기회이었다. 또한 민권보장과 민생안정을 위한 민주주의의 복원이 기대되었다. 또한 국민의 제약당한 기본권과 인권의 신장이 열리는 단서를 마련한 셈이었다. 다수 국민은 이러한 과제가 유신체제를 폐지 극복함으로서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대통령선출이 있어서는 안되었으며 또한 유신헌법을 개정하여야 하였다. 당시 야당에서는 공화당과 함께 구성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중심으로 '국회발의와 개헌'를 주장하였으며 재야와 사회민주화운동진영은 '거국민주내각' 구성에 중점을 두었다. 이에 비하여 유신체제연장론의 중심으로 부상한 신군부는 12·12사태를 도발하였다. 이후 '서울의 봄'과 '안개정국'이라고 하는 유신철폐세력과 유신연장세력간의 대항 갈등국면이 전개되었을 때 학생과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유신잔재청산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독점재벌과 기득권세력은 후자에 가세하였다. 계엄령의 전국확대실시(5·17)는 무력동원과 폭력행사를 위한 장치이었다. 이들에 의한 광주에서의 학살만행의 자행은 차별과 박탈 속에서 침체와 소외를 당하면서 생활현실에서의 희생과 역사 구조적 상흔을 안고 살았던 민중의 체념과 포기를 수반하는 분노를 야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독재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에서 대중성을 견지하였던 청년 학생과 노동운동세력은 방어적이었지만 주체적 응전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반폭력을 위한 무장투쟁은 결국 유신철폐운동세력에게 유리한 공간을 제공하여 주지 않았다. 미국은 군대를 통한 광주진압-충정작전을 묵인하였다.
미국이 그동안 '칠레의 아엔데 정권을 붕괴시킨 군사쿠데타 방조와 피노체트 정권의 인권탄압에 대한 피상적 견제, 팔레비 국왕의 이란민중에 대한 대량학살 묵인과 민족적 회교혁명세력이 행하는 반민족적 반민주적 도당에 대한 정화작업 비판' 등에서 나타난 미국의 국익관철의 대외정책의 실상이 '광주'에서 어김없이 현실화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