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의 박정희에 큰 영향을 끼친 셋째 형 박상희가 기자가 되 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1928년 6월8일자 동아일보의 사 고에서다. 여기서 그는 '동아일보
선산지국의 기자'로 발령을 받고 있다. 지국의 위치는 '경부선 구미역전'이라 되어
있다. 그가 24세때, 박정희가 열한 살로 보통학교 3학년 때였다. 박상희는 동아일보
기자 가 된 그해에 또 다시 일본 경찰에 끌려간다. 관련기사는 조선일보 1928년
11월11일자 5면에 '선산신간지회의 간부 4씨를 검속 - 검속한 내용은 절대 비밀'이란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사진설명 : 오른쪽에 선 이가 조귀분. 조귀분은 기천 보통학교를 졸업한 1923년 대구 신 신명여학교에
합격했으나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입학식날에는 집에서 도망쳐 나와 참석했다고 한다. 학창시절엔
신여성운동으로 김활란(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과 함께 '건우회'를 조직하고 악극단을 편성해 계몽운동을
전파하기도 했다.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섰던 황태성과 만나게 된 조귀분은 그를 통해 박상희와 결혼하게 된다.
사진은 신명학교 입학한 해에 친구들과 함께 찍은 것으로 교복차림이다. 조귀분은이 신고 있던 구두는 당시 김천
황금동에서 광목 한필을 주고 사 신었다고 한다. 왼쪽에 선 이는 조귀분과 절친했던 이숙자.
'경북 선산 경찰서에서는 지난 9일에 동아일보 지국 총무 김수호, 기자 박상희, 김종석
3씨와 밋당디 병원 의사 안중호씨를 돌연 검속 하였는데 이들 모두는 선산 신간지회
간부이더라'.
1929년 4월19일자로 혼인신고된 박상희의 호적을 보면 그는 경북 김천의 양반가문
한양조씨 집안의 규수 조귀분을 아내로 맞고 있다. 조귀분은 큰딸 박영옥(69·자민련
명예총재 김종필의 부인)을 낳고 연이어 박계옥(62), 박화자(56), 박금자(작고),
박설자(53) 등 딸만 다섯을 낳은 뒤인 1947년에 유복자인 준홍을 보았다.
조귀분의 조카딸 조길수(76)는 대구 신명여고를 다녔던 고모의 모 습을 기억하고
있다.
"고모는 대구 신명학교까지 기차로 통학을 했습니다. 기차칸에서 고모부(박상희)를
만났다나 봅니다. 그 두 사람 사이를 엮어 준 사람 은 황태성씨였지요. 신명학교
다니던 고모는 김천 청년회관에 자주 나가면서 야학선생을 했고 이때 황태성씨를 알게
되었답니다.".
조귀분의 큰 아버지가 세운 김천 청년회관은 당시 무학자들을 불 러모아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조귀분의 집안은 김천에서 제법 재 산을 모았다. 부친이 고무신
가게와 포목상을 했고 두루마기와 조끼 를 만들어 파는 '조끼방'도 운영했다. 유지
집안의 딸답게 조귀분은 여장부였다.
"고모는 신여성이었지요. 사람들 앞에 나서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힘차게 연설을 했어요. 연극도 했고요.".
당시 김천을 드나들던 박상희는 전국적 민족운동단체 신간회의 같 은 회원으로서
황태성과 교분을 쌓았다. 박상희는 선산의 핵심활동가 였고 황태성은 김천지역을 맡고
있었다. 다시 조길수의 회고.
"황태성씨는 김천 의무면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부유한 집안이 어서 아들과 딸 모두
대구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황태성은 대구 계성 학교를 졸업했는데, 이 학교는
외국인이 세워 항일정신을 강조하기로 유명했습니다. 황태성, 박상희, 임종업, 박희수
같은 분들은 김천 경 찰서 고등계 형사들로부터 항상 주의를 받았지요.".
이때의 황태성과 박정희, 두 청년을 만난 사람이 있다. 재일거류 민단단장을 지낸
조영주이다. 선산이 고향인 그는 1986년에 기자에게 이런 증언을 남겼다.
"나는 그때 일본에서 다치메이칸 대학과 교토 대학원에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방학 때 고향에 와서는 친구 인 박상희, 황태성과 자주
어울렸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이 주로 화제 가 되었는데 박은 정열적이고 의분심이
강했으며 민족주의적인 데 반 해서 황은 냉철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이었습니다. 황은
골수 사회주의 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박은 그러기에는 너무 가슴이 뜨겁고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소작농출신, 신간회 활동, 사회주의자 친구… 박상희의 의 식은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이 결혼한 다 음 살림을 차린 곳은 구미 역 뒤편
각산이란 곳이었다. 버젓한 기와 집에 사랑채까지 딸린 건물이었다. 조귀분은 상모리
박정희의 생가에 갔다와서는 조카딸 조길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시집에 가 보니 정지(부엌)문은 가마니를 걸어 둔 것이 전부였고 사과궤짝으로 찬장을
하고 있지 뭐야. 시어머니(백남의)가 '신식 며 느리가 왔는데 부엌엔 들어 올 필요
없다'며 자꾸 방에 들어가라기에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쌀도 없고 간장도 없더라고.
시집이 그렇게 없 는 집인 줄 누가 알았겠노.".
박정희가 대통령시절에 쓴 수필 '나의 소년시절'에는 이 시절의 이야기가 나온다.
'국민학교 3학년 하계 방학 때였다. 상희 형님이 처가인 김천을 가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산골에서 자라서 촌뜨기이기 때문에 김천 을 구경시켜주겠다는 형님의
선심이었다고 본다. 형님의 처가댁은 김 천시 황금정이었다. 하루는 형님과 같이
시내를 걸어가는데 아이스크 림 장수가 있어 형님이 그것을 사먹으라고 돈을 주었다.
고깔같이 생 긴 용기에 아이스크림을 담아 주는 것을 조그마한 목제 스푼으로 먹
었다.생전 처음 먹어보는 아이스크림 맛이다. 먹다가 보니 형님은 자 꾸만 걸어가고
있었다. 빨리 먹고 형님을 따라 가려고 빨리빨리 먹다 가 아이스크림 용기가 깨어졌다.
나는 그릇은 주인에게 돌려주는 줄 만 알고 있었기에 깜짝 놀라 저기 걸어가고 있는
형님을 "형님"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형님, 이것이 깨어졌어요. 물어주어야겠어요"하
고 울상을 하고 당황하고 있으니 아이스크림 주인이 그 그릇도 같이 먹는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기에 그때서야 아이스크림을 든 채 형님을 쫓아 따라갔다. 그날
저녁에 형님과 형수씨가 촌놈이라고 놀 려댔다.'.
결혼한 뒤 박상희의 언론을 통한 민족운동은 계속된다. 1933년 1월14일자 조선일보
6면을 보면 박상희가 당시 조선일보 선산지국을 경영하면서 기사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지방시론'이란 고 정란에 '선산지국 박상희'란 이름을 내 걸고 '의료기관
설립을 촉함' 이란 주장을 싣는다.
'불충분한 시설이 많음은 하나 둘에 그치지 아니하겠지만 더욱 우 리 선산은 8만여
인구에 문화상으로나 교통상으로나 타군에 비해 별 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오직 8만인
생명을 좌우하는 의료기관이 불 충분함은 기자가 귀중한 지면을 보도할 것 없이 각각이
더 잘 알 것 이다. 어느 방면으로 보든지 타군에 뒤떨어지지 않으나 의료계를 살
펴본다면 의식이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한심함을 불금할 것이다. 우리 선산의
의료기관이라고는 한의가 다소 있으나 신의라고는 선산읍에 조선인의 공의가 하나
개업하고 있을 뿐이다. 그 외에 장천, 구미에 한지의가 둘이 있으나 여러 가지 설비가
불완전하야 주민의 불만이 불소하다. 그러면 한지의까지 합하면 전군 8만여 민중이
주거하는 지 방에 의료기관이라고는 3개소뿐이니 약 2만7천인에 의사 한 사람이
평균이다.
특히 구미로 말하면 경부선이 통한 소문화도시일 뿐 아니라 6백여 호란 주민이 살고
있는 지방에 50세가 넘은 일본사람의 한지의가 있 는 것도 여러가지 설비 불완전으로
주민의 적지 아니한 불평의 원인 이 되어있다. 위중한 병에 걸리면 안심하고 약 한 첩
사서 먹을 수도 없고 위급할 때는 김천이나 대구로 가지 않으면 구명할수가 없으니
문화가 발달된 금일에 있어서 전군민의 수치라 아니할 수 없다. 수치 일 뿐아니라
인도상 중대문제이라 할 수 있으니 하루 바삐 의료기관 증설을 절감하는
바이다(하략)'.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7)
(21) 지사같은 기자 .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와 김천 규수 조귀분의 연을 맺게 해준 황태 성은 광복 뒤
월북하여 고관을 지내다가 5·16 직후에 김일성에 의하여 밀사로 남파되었다. 그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만나기 위하여 당시 김종필정보부장의 장모이던 조여사를 찾게
된다. 그는 결국 친구의 동생 에 의하여 사형에 처해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
황태성에 관한 기록 을 찾아보았다.
사진설명 : 1935년 4월20일 박상희는 인천 월미도에서 만몽일보사의 깃발 아래 사진촬영을 했다. 맨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박상희. 박상희가 친일계 만몽일보와 어떤 관계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정중앙에 앉은 것으로 미루어 친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8년 2월26일자 조선일보. 황태성과의 인터뷰 기사가 나온다. 당시 경북내 유지들은
사재를 털어 무산아동을 위한 교육사업을 해왔는데, 경 상북도 당국이 그 중의 하나인
금릉군의 금릉학원을 폐쇄조치한 데 대해 서 황태성은 항변하고 있다.
'김천청년동맹위원 황태성씨담 : "금번 금릉학원 폐쇄처단은 경북도 당국의 독단적
처사가 아니고 김천에만 한한 국부적 문제가 아니오, 전 조선적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면으로 김천 각 사회단체 및 김천 주민과 합력 항쟁하는 동시에 전
조선민중에 호소하야 정당한 해결을 얻고자 합니다."'.
조귀분의 조카딸 조길수는 황태성이 며칠 뒤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끝에 초죽음이
되어 실려 나왔다고 기억한다. 박상희, 황태성, 박정 희, 이 세 사람은 사상대결의
시대에서 서로 꼬이는 인연을 맺게 된다. 박상희가 1928년에 동아일보 선산지국 기자가
되었다가 조선일보로 옮겨 선산지국을 운영하면서 기자역할도 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전후부터로 추정된다. 이 기간에 그는 지역 청년회를 조직하고 신간회 활동에도 앞
장서고 있었다. 언론을 이용한 전형적인 민족운동가였다. 그는 사업수완 도 좋았다.
구미면에서 기와공장을 운영했고 19정보 가량의 산판을 사들여 목재를 부산 등지로
내다팔아 돈도 제법 벌었다. 언론과 이재, 사회활동에 두루 능숙한 그는 일본 경찰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성격이 괄괄한 박상 희는 그를 미행하던 고등계 순사에게
세숫대야 물을 뒤집어 씌운 적도 있었다.
1929년 11월3일에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은 신간회 운동의 기회이자 위 기였다.
광주학생시위는 1백94개 학교 5만4천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전 국적인 규모로 번졌다.
일본 경찰들이 일본인 학생들만을 옹호하자 전국 에서 1백50여 지회를 이끌던 신간회는
청년학생들을 상대로 주요도시마 다 강연회를 열고 여론을 자극하여 제2의 만세운동으로
유도해 나갈 계 획을 추진했다.
조병옥(1932-1933년 조선일보 전무 역임)을 비롯한 신간회의 중앙 간 부진들은 대규모
시위를 계획했는데, 이 계획서를 입수한 일제 경찰은 간부진들을 대거 검거한다. 한편
1928년 7월1일부터 9월1일까지 모스크 바에서 있었던 제6회 코민테른 대회에서 채택된
'식민지-반식민지 제국 에 있어서의 혁명운동에 관한 테제' 중 조선문제에 대한
언급에서 코민 테른은 신간회의 정당적 조직형태를 부정하고 '협의체적 공동전선'으로
의 개편을 요구한다. 이 '테제'에 따라 조선 공산당계열의 신간회 간부 진들은 기존의
연합체적 성격을 탈피해 계급투쟁적 조직으로 개변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들은 사실상
신간회의 파괴를 의미하는 '해소운동'을 벌인다.
이 해소운동은 분열만 심화시켜 1931년 5월16일자로 신간회는 해체됨 으로써
민족운동역량의 커다란 손실을 빚게 되었다. 박상희는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 6학년에
다닐 때 있었던 이 신간회 해산 이후에도 언론-민 족운동을 계속하였다.
대구 영남일보의 김진화가 1978년 10월에 간행한 '일제하 대구의 언 론연구'에도
박상희의 이름이 등장한다.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대구 지 국기자를 지낸 이선장은
신간회 대구지부의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신간 회가 해산한 뒤에도 '대구청년동맹을
이활(시인 이륙사의 본명), 남만희 등과 함께 재조직하였고 1931년 가을에는 경북도내
각 군에서 신문지국 을 경영하거나 또는 통신을 맡은 사람들을 망라하여 보도협조망을
만들 었다'는 것이다. 이 보도협조망은 '특히 정치적인 면에서 서로가 연락을 긴밀하게
가지도록 하여 독립운동가들의 구속사건을 신속히 알림으로써 그 대책을 재빨리
강구하는데 많은 성과를 얻었다'고 한다. 이 보도협조 망은 경산, 안동 등 21개 지역의
기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선산지역 엔 '박상희, 최관호'가 들어 있다. '일제하
대구의 언론연구'에는 박상 희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데도 관여하였다고 적혀
있다.
'박상희는 1934년 유정락씨가 경영하던 조선중앙일보 대구지국 기자 로 취임하여
활동하던 중 1935년 북경에서 입국한 윤명혁씨와 손을 잡고 조선일보 대구지국의
허병률씨와 함께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금했다. 그 는 선산출신으로 대구에서 장사를
하던 김모씨에게서 3천원의 자금을 얻 어 윤씨에게 제공한 일이 있다. 이 사실은
이선장씨의 증언이다.'.
1992년에 작고한 박상희의 부인 조귀분이 생전에 조카딸 조길수(76) 에게 남긴 이야기는
구체적이다. 조귀분은 남편의 옷을 수시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비밀 편지를
넣었다고 한다. 검문이 심해지면 양복 바 지단을 꿰맬 때 실에다가 일정한 간격으로
매듭을 지어 모르스 부호로 이용했다. 조길수의 남편 이서용(작고)은 평생을 철도국에서
근무해 지 방역장도 역임했다. 이서용이 모르스 부호를 이용해 전보치는 법을 박상
희에게 알려주었다. 이씨의 부인 조길수는 이렇게 기억한다.
"고모부는 남편에게 '이서방, 이거 봉천에서 박○○가 나오는데 전해 주게. 이서방,
이건 북경역에서 김○○가 나올 건데 전해 주게'라고 하 면서 편지를 건네주곤
했습니다. 당시 철도청에 근무하는 공무원들끼리 는 친했어요. 그들은 기차를 매개로
하는 가장 빠른 우편방법을 암암리 에 사용하고 있었거든요. 고모부는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에게까지 선이 닿았던 것으로 압니다.".
박상희의 행동반경은 대단히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족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일본과
북경뿐 아니라 상해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취재도중 입수한 사진이 있다. 1935년4월20일
인천 월미도에서 찍은 것이다. 박상 희가 맨 앞줄에 나오는 이 사진 속의 한 인물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만 몽일보사'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1933년 8월25일 일제는
'국책적 견지 에서' 한글신문인 만몽일보(사장 이경재)를 신경에서 창간했다. 박상희 가
만주국 유일의 한글 친일신문이던 만몽일보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주
활동무대였던 경북에서 인천까지 올라와 함께 기념촬 영한 점이나 그가 중앙에 앉은
모습을 보아도 이 신문사 기자들과도 친 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박정희의 둘째형 박무희의 장남인 박재석은 상희 삼촌의 신문지국 일을 한동안 돕고
있었다. 1938 년부터 해방 직후까지 구미역전 중앙통에 있었던 지국사무실에서 일했던
박재석은 이렇게 증언한다.
"상희 삼촌은 외부활동을 하신다고 사무실에는 잘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배달,
수금도 하고 총무 노릇을 다 했지요. 일제말기에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문 등을
다 합쳐 운영했고 구미면에 나가는 부수도 1백∼ 2백부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언론학자 정진석(한국 외국어대학교)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 가운 데 '매일신보사
사원명부'를 보면 박상희의 이름이 등장한다. 1939년 10월1일 현재 박상희는 매일신보
선산지국 구미분국의 분국장으로 기록 되어있다. 민족지 조선, 동아일보에서 일하던
박상희가 일제말기에 가서 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자가 되었는지는 앞으로
밝혀야 할 과 제이다.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8)
박정희가 보통학교 6학년으로 열네 살 되던 해, 막내 누님인 박재희는 열아홉의 나이로
상주의 한정봉에게 시집을 갔다. 한씨는 소년 시절에 일본에 건너가서 토목공사로 재산도
꽤 모은 사람이었다.
박재희는 훗날 며느리 선우민숙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상희 오빠가 한정봉씨를
소개시켜 주었단다. 정희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라도 네가 희생 좀 해야겠다고 말했지,
그렇게 해서 시집을 갔는데 오빠가 시집까지 따라왔다가 돌아가면서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평생 잊혀지지 않는구나."
사진설명 : 앞줄 왼쪽부터 히스메 기누에 박갑이(1조담임) 이시카와 고이치(교장) 이동기 선생. 뒷줄 왼쪽부터
김득명(2조담임) 이숙렬 이시이 고히로 박병철 박상만선생. 박병철 선생은 박정희가 2,4,5학년 때 담임을 맡았으며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에 합격하자 구미 역에 마중나가 제자를 등에 업고 학교까지 돌아왔다고 한다.
이시카와교장은 박정희가 합격한 뒤 상모리 집에 찾아와 "정희가 떨어질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당시 나이 마흔이었던 한정봉은 재력이 있어 그 뒤로 수십년 간 가난한 박정희를
뒷바라지해주게 된다. 박상희는 구미 보통 학교에 자주 들렀다. 교장 이시카와 고이치도
무던한 사람이었지만 박상희와 동년배였던 대구사범 출신의 박상만교사와는 특히 친하게
지냈다.
박교사는 박정희가 2학년 때 부임해 잠시 담임을 맡기도 했었다. 박상희는 박교사를
만날때마다 '우리 정희를 잘 좀 부탁하네'라며 신신당부했다. 박상만의 장남 박성호(65,
현 경북대학교 생물교육과 교수)는 선친으로부터 들었던 박정희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까무잡잡하고 작고 귀여운 아이였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했답니다. 그런데도 공부를 아주
잘해 부친께서는 언제나 마음을 써주셨답니다. 당신의 도시락을 정희 소년에게 주신 적도
많고요."
1920년에 개교한 구미공립보통학교는 박정희가 졸업한 1932년까지 대구사범학교에 단
한명의 합격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박정희에게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도록 권한 사람들은 교장과 교사들이었다. 10년 전
기자와 만난 박재희는 이렇게 말했다. "상주에 살고 있는데 정희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선생님이 시험을 치라고 하는데 어머님이 반대를 하신다는 겁니다."
교장과 교사들이 정희 소년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만약 집에서 반대하면 우리가 데려가서
시험을 치르도록 하겠다"고 강력하게 권했다.
어머니 백남의는 끼니때우기가 걱정인 집안형편으로는 박정희의 학비를 댈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시험마저 못치게 하면 막내의 가슴에 평생 한을 남기게 될 것 같아서
승낙했다. 그래놓고는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박정희가 시험을 치르기 위해 대구로
떠나던 전날 밤에 있었던 다음 이야기는 박재희가 증언한 것으로 다분히 신화 적이다.
"어머님은 걱정이 되셔서 잠도 잘 주무시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면서 바깥을 보고 있는데
집앞에 있는 대추나무 위에서 이상한 물체가 움직이고 있더랍니다. 자세히 살펴보고
있으니 큰 구렁이 두 마리가 나무를 기어 내려왔다가 올라갔다가 하고 있더랍니다.
어머니께서는 동희 오빠를 깨웠다고 해요. 한참 놀던 두 마리는 새벽 이 밝아오자 마당에
쌓아둔 장작더미 속으로 들어가버렸답니다. 이걸 보신 어머니는 '정희가 합격은 하겠는데
돈이 없으니 이걸 어쩌나' 하고 더욱 걱정을 하셨답니다.' 당시 농촌에서는 집에 있는
구렁이를 영물이라고 귀하게 여겼다. 우연이겠지만 박정희는 뱀띠이고 그의 날카로운
눈은 뱀눈이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사범학교 시험을 다른 학교보다도 일찍 특차로
치러졌다. 유만식(82. 전 김천여중교장)도 상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박정희와 같은 날
대구 사범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6학년에 올라와서는 매일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았습니다. 선생님들이 과외지도를
하셨지요. 각 반에서 5등 이내에 들어야 원서를 써 주었습니다. 우리 학교는 비교적
사범학교에 많은 학생들을 합격시켜 그 해에는 2개 반의 13명이 원서를 받아서 대구로
올라 갔습니다. 선생님들의 인솔하에 교과서와 공책들을 잔뜩 싸 짊어지고 상주에서
김천까지 경북선을 타고 가서 김천에서 경부선으로 갈아타고 대구에 내렸지요.
역전에 나오자마자 저는 5층짜리 공회당 건물에 기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까지 본
건물중 가장 높은 것이 3층이었거든요. 공회당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벽돌이
까마득하ㅎ게 쌓여져 올라간 것을 올려다 보다가 그만 일행을 놓쳐 혼났지요. 논 두렁
길에 눈이 익은 저에게는 찻길은 또 왜 그렇게나 넓은지. 시험 사흘 전에 도착한
우리들에게 선배들은 예상문제를 만들어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
박정희를 포함하여 구미보통학교에서는 일곱 명이 대구사범에 응시하게 되었다. 이들도
시험에 대 비하여 방과 후에 교사들로부터 특별지도를 받았다. 아마도 6학년 담임
김득명교사가 이들 소년을 인 솔하여 서울로 갔을 것이다. 필기시험 과목은
국어(일본어)1,2,3과 산술 1,2 및 국사, 지리, 이과, 조선어였다. 1차 시험이 끝난 이틀
뒤에 합격자 발표가 있었기 때문에 수험생들은 대구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했다. 발표 날
아침 게시판에 수험번호와 이름이 걸렸다. 떨어진 학생들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합격한 학생들은 그날로 면접과 신체검사를 받은 뒤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면접시험에서는 주로 『왜 사범학교에 진학하려는가』라는 질문이 대종을 이루었다.
대부분이 『훌륭한 교사가 되어 어린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국어(일본어)과목에서 각각 80점,40점,8점씩을 받았다.산술 제1은 만점인
1백점을 기록했고 제2는 40점을 받았다. 국사가 88점,지리가 50점,이과가 60점 그리고
조선어가 50점,그가 받은 총점은 5백16점으로서 응시생 8백85명, 그리고 합격자 1백명중
51등이었다. 1백명중 10명은 일본학생들이었다.
박정희는 1932년 4월8일에 대구사범에 입학하여 5년간 수학한 위에 1937년 3월25일에
졸업하였다.만 15세에서 20세에 걸친 인격형성기였다.만주사변(1931년)에서 시작된
일제의 군국주의적인 대륙침략정책이 중일전쟁 (1937)을 계기로 하여 드디어 중원으로
확산되던 시기와 일치한다.조선사람들을 이른바 충직한 「황민」 으로 개조하려는 정책이
적나라하게 진행되면서 민족혼을 담은 우리 말의 사용이 점차 제한되어가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황민화 교육의 첨병을 양성하는 것이 설치 목적이기도 했던 사범학교는
또한 군국주의 시대에 걸맞는 장교적 소양을 갖춘 교사를 양성한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에 후진일본인들을 근대적 공민으로 교육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역점을,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 육성에 두었다. 좋은 시설과 우수인력 확보에
집중적인 투자를 했으며 공무원으로서의 교사들 대우도 잘해주었다. 일제시대에 가장
안정되고 존경받는 직업이 교사였다.
사범학교 교육내용도 지식보다는 인물 양성에 역점을 두었다.체육과 예능 및 군대식
교육에 많은 시간을 배당하는 전인교육과 기숙사제도를 시행하였다.사실상
준사관학교였다.구미보통학교 때 이미 군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박정희로서는 이
학교에서 자신의 소질을 검증할 수가 있게 되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유지되었던
박정희의 엄정한 무인적 자세를 이해하려면 그가 장교교육만 근 10면(사범학교
5년,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서 약4년,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3개월)을 받았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흐트러짐이 없는 그의 단아한 자세는 이런 단련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런 몸가짐이었다.
그는 이런 교육을 통해서 한국의 일반문화,일본의 무사문화,중국의 한자문화를 골고루
섭취하였다. 박정희란 인물은 그런 점에서 동양3국의 문화가 함께 빚어낸 어떤
공동작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영웅에게 있어서 숙명이란 것은 눌러도 눌러도 튀어오르는 생명력 같 은 것이리라.
박정희는 태아시절에 이미 어머니로부터의 집요한 공격을 받고서도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최초의 관문을 통과하였다. 대구사범 에 진학할 때도 어머니는 아들이
떨어지도록 빌었으나 정희 소년은 합격 함으로써 상모리를 떠나게 되었다. 박정희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에서 농사꾼으로 주저 앉았다면 그의 운명과 이 나라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사진설명 : 대구사범 5년 중 3년간 그는 꼴찌권을 맴돌았다. 품행평가도 '양'이 네번, '가'가 한 번이었다. 그는
군사 및 체육관련 과목에서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기간에는 공개금지가 되어 있었다. 항상 생각하고
눈매가 날카로운 학생이었지만 동기생 중 아무도 그의 장래를 예측할 수 없을 만큼 평범하였다.
구미보통학교 시절에 이 소년의 마음밭에 뿌려진 어떤 소질의 씨앗 이 대구사범시절에
인격의 틀을 갖추면서 자라난 점에서 5년은 중대한 기간이었다. 성적표로만 본다면
박정희 학생의 이 5년은 대실패였다. 천 상에서 골짜기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성적표는 대구 사범의 후신인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공개를 금지시켜 왔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박정희의 집권시절에 나온 전기류에서는 1등 만 한
구미보통학교의 성적표는 소개하면서도 사범학교시절의 성적은 그 냥 '우수한 편' '중간
정도'식으로 넘어갔었다.기자는 작고한 이낙선(상 공부장관 역임)이 남긴 메모와
자료들을 1991년에 열람하다가 그가 육군 소령으로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로
있을 때인 1962년에 모아 두 었던 '박정희 파일'중에서 사범학교 성적표를 발견하였다.
박정희는 입 학시험에서는 1백명중 51등으로 합격했으나 1학년 석차는 97명 중 60등 으로
내려갔다. 2학년 때는 83명중 47등으로 약간 올라갔다가 3학년 때 는 74명중 67등, 4학년
때는 73명중 73등, 5학년 때는 70명중 69등을 했 음이 밝혀졌다. 이 성적표가 그의
시대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도 '꼴찌 출신 대통령'이란 구설수를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박정희의 행동 평가도 나빴다. 품행을 의미하는 '조행'평가는 5년간 '양, 양, 양, 가,
양'이었다. 2학년 담임은 그를 '음울하고 빈곤한 듯함' 이라 적었다. 3학년 때는 '빈곤,
활발하지 않음, 다소 불성실'이라 되어 있고 4학년 때는 '불활발, 불평 있고,
불성실'이라고 적혀 있다. 지조 는 '견실', 습관은 '과언', 사상은 '온정', 학습태도는
'보통'으로 평가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장기결석이다. 2학년 때 10일, 3학년 때 41일,
4학년 때 48일, 5학년 때 41일이다. 기숙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고향에 가서 돈이
마련될 때까지 눌러 앉았기 때문이다.
'취미'란에는 '검도'라고 되어 있다. 이밖에도 박정희는 사격, 나팔, 육상에 뛰어났다.
학업에서는 꼴찌였지만 교련 시간에는 소대장이었다.
군사 및 체육과목에서 활발했다는 것은 그의 신체발육상태가 많이 향상 된 것을
반영한다. 5학년 때 그는 키가 1백59.2㎝에 몸무게는 59.5㎏,가 슴둘레 88㎝로서 '갑'의
평가를 받았다. 학과 중에서 그래도 성적이 괜 찮은 과목은 역사, 지리, 조선어였다. 이
'박정희 파일'에는 동기생(대 구사범4회)인 석광수(작고·국제신문 상무 역임)가 이낙선
소령에게 보 낸 편지가 철해져 있었다. 학창시절의 박정희를 평한 편지였다.
'말이 없고 항상 성난 사람처럼 웃음을 모르고 사색하는 듯한 태도가 인상 깊었다.
동기생 중 누구와 친하게 지냈는지조차 알 수 없다. 5학년 때 검도를 시작하였으므로
크게 기술이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권투는 기숙사에서 그저 연습을 했을 정도이지
도장에는 나가지 않았다. 군악대 에 들어가서 나팔수가 되었다. 축구도 잘했고 주로
자신의 심신 연마에 노력했다. 성적에는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으나 (머리는)우수한
편이었 고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동기생 조증출(문화방송 사장 역임)이 써보낸 인물평도 있었다.
'대체로 내성적인 편이었고 항상 무엇인가를 구상하고 있는 듯하였으 나 외표하지 않은
관계로 그의 진정한 위인됨을 파악한 학우가 희소하였 다. 다른 학우들은 장차의 이상 및
포부에 대하여 종종 피력하였으나 그 는 일절 침묵을 지켜왔고 교우의 범위도 그다지
넓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검도에는 전교에서 손꼽히는 용자로서 방과후에는 죽검을 들고
연습을 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에 학우들과 장난칠 때도 검도 하는
흉내를 내어 머리를 치곤 했다. 나팔의 제1인자로서 큰 버드나무 아래서 하급생들을
데리고 나팔 연습하는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기계체 조도 잘했다. 4, 5학년 여름휴가
때는 대구80연대에 들어가서 군사훈련 을 받았는데 박정희는 교련에 매우 취미를 가진
것으로 기억난다. 시범 때 그가 자주 조교로 뽑혀나왔다. 특히 총검술은 직업군인을
능가할 정 도로 우수하였다.'.
조증출은 이 편지에서 당시 대구사범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일본정신이 투철한 교육자들만 모아놓았기 때문에 교육이념이 천황 절대 숭배로
출발하여 신격화로 끝나는 교육이었다. 그럴수록 학생들 사 이에서는 민족적 의분심이
불타올라 소위 '무저항적 반항'을 일삼았다. 소설을 읽을 때도 일본인의 작품은
의식적으로 읽지 않고서 세계문학전 집을 읽었다. 기숙사에서도 탄압에 굴하지 않고
조선, 동아일보를 구독 하였고 '개벽'같은 잡지도 읽었다. 특히 신문연재 소설 중에서는
'상록 수'가 기억에 남는다.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진 학생들도 있었으나 대개가 민족운동을 전개하 는 한 방편이었다.
1학년에 기숙사에 입사하면 선배들이 민족의식을 고 취시켜주었다. 선배들은 우리에게
기숙사 안에서는 게다를 신지 못하게 하였다. 국어담당이신 김영기 선생이 국어 시간에
우리 국사이야기를 해 주신 것이 많은 감명을 주었다. 박정희는 특히 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 었던 것이 기억난다. 기숙사 생활은 대체로 유쾌하고 유익하였다. 박정 희의
인품은 이 사생활을 통해서 배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 체생활을 5년간 해왔기
때문에 공덕심과 희생적 봉사정신을 도야하게 되 었고 소아를 대의적입장에서 버릴 수
있는 정신적 소지를 함양하였다.'.
박정희는 학업에서는 바닥을 기고 기숙사비도 내지 못해서 고향으로 내려가 장기간
결석을 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군사훈련 과 체육에는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황민화를 목 적으로 한 학과교육을 충실히 하여
모범생이 되는 길은 포기하고 국가주 의를 추구하는 군사교육에는 열심이었던 것이
박정희였다. 박정희의 이 런 선별적수용이 '나는 민족혼을 너희들에게 팔지는 않겠다. 그
대신 군 사문화의 실질은 적극적으로 배우겠다'는 계산에 의한 것이라면 그의 꼴 찌는
'이유 있는 꼴찌'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1932년 4월8일 대구사범 대강당에서 열린 4회 입학식에서 박정희도 다른 학생들처럼
히라야마 교장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히라 야마 교장은 학생들을 향해서는
일본말로 연설을 한 뒤에 학부형들을 향 해서는 유창한 우리 말로 인사를 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대구사범 4회 입학생으로서 교정에 첫 발을 들여놓았을 때 분위기는 무거웠다.
3년 선 배인 심상과 1기 학생들 중 27명이 사회주의자 현준혁 교사가 조직한 독
서회(사회과학연구회)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고 퇴학을 당한 직후였기때 문이다. 1기로
입학한 한국인 학생은 93명중 86명인데 졸업자는 55명이 었다. 탈락자 31명은 거의가
항일운동에 관계했다가 퇴학을 당한 것이었 다. 해방 뒤 김일성의 지시로 암살되는
공산주의자 현준혁이 대구사범의 교사로 부임한 것은 1929년이었다. 평남 개천 사람인
그는 경성제대 철 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대구에 첫 직장을 구해서 온 것이었다.
현준혁 교사는 영어를 가르쳤지만 한글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그때 조선일보는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현준혁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교재를
구해서 한국인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이 렇게 말했다.
사진설명 : (왼쪽)대구사범 5학년때의 박정희.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다.
(오른쪽)사회주의자였던 현준혁교사. 그는 학생들 사이에 독서회를 조직하였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구석되었다.
그는 대구사범 학생들에게 선후배간의 인격 존중을 당부하여 선배도 후배에게 존대말을 썼다. 박정희도 이런
분위기의 영향으로 대통령이 된 뒤에도 부하에게 하대를 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은 무식한 사람이 많으니 한글을 배워서 신문 잡지라도 읽어야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되고 그래야 우리같은 약소민족이 살아갈 수가 있다. 우리 학생 90명이
방학을 이용하여 한글보급운동을 하면 매년 9천명에게 글을 깨우쳐줄 수가 있을 것이다.
졸업 후에도 과외수업이나 방학을 이용하여 이렇게 하자.".
현준혁 교사는 영어를 가르칠 때 발음표를 반드시 한글로 썼다. 일 본인 학생들이
불평을 해도 무시해 버렸다. 그는 또 기숙사를 순시할 때는 일부러 일본학생들이
벗어놓은 게다짝을 발에 걸린다는 듯이 차 버리기도 했다. 한국학생들과 잡담을 나누는
척하면서 광주학생 사건 에 대해서 말해주기도 했다. 영어시간에는 학과와 관계가 없는
이순신 이야기를 꺼내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했다. 2기생 김노계는 '대
구사범심상과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제나라 역사를 배워보지 못했던 우리인 지라 우리는
현선생의 국사강의에 너나 할 것 없이 숨을 죽였고 눈시 울을 적시기도 했다. 비로소 내
조국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망국 의 설움과 함께 일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북받쳐
올랐다.'.
현준혁은 2학년에 들어가서는 우제동 학생 등 다섯 명을 조직책으 로 뽑아 점조직식으로
사회주의 서적 독서회인 사회과학연구회를 만들 었다. 이 조직의 목적은 '조선민족의
해방과 무산농민의 구제'였다.서 적은 오사카에 살고 있던 대구사범 자퇴생 부장환이
비밀리에 보내주 었다. 현준혁은 이 책들을 약 30명으로 불어난 독서회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기숙사에서 소등후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손전등을 켜서 읽도록 하였다.
그때 대구사범 학생들은 대구역에 나가서 만주로 북상하는 일본군 인들을 환송하곤
했다. 이 독서회 회원들은 그 자리에서는 침묵을 지 키고 일장기도 펴들지 않았다.
현준혁은 1931년 11월 1기생 신현필 등 학생 수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수사가 확대되어
1기생 중에서만 27명 이 구속되었다. 현교사와 다섯 명의 조직책은 구속기소되고 나머지
학 생들은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나왔으나 전원 퇴학당했다.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우가키 총독이 학교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 직후 히라야마
교장은 전교생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 설을 했는데 많은 조선인 학생들이
그것을 오래 기억했다.
"학생제군들의 심정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과거의 학 창시절을
회상하면서 말하노니 참고해주기 바란다. 내가 동경에서 일 고에 다닐 때는 명치유신
직후로서 벌족제도타파를 내건 문명개화운동 이 한 시대를 소란케 하고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상아 탑을 뛰쳐나가 사회의 물결에 휩쓸렸다. 그들은 다시는
대학으로 돌아 오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의 일본문명을 쌓아올린 사람들은 그때 거리 로
뛰어나간 학생들이 아니라 상아탑을 고수한 학생들이라는 점을 제 군들은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현준혁이 주도한 독서회에 가입하였다가 퇴학당하였던 1기생 옥치 상 박준호는
'대구사범심상과지'에 실린 회상록에서 '현 선생을 지금 에 와서 단순한 공산주의자라고
보는 사람도 있으나 당시는 사회주의 와 민족주의가 공존하여야 하는 불가피한 관계에
있었고 3년간 그로부 터 공사석에서 계급투쟁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박정희 등 4회 동기생들이 기숙사에 처음 들어가서 놀란 것이 있었 다. 4학년이 된 1기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말을 놓지 않고 존대를 하는 것이었다.
다른 학교에서는 선배가 후배에게 말을 놓는 것은 물론이고 예사로 기합을 넣고 구타를
하는데 대구사범에서는 선후배간의 인격존중이 전 통으로 정착되어 있었다. 박정희와
동기로서 같은 나팔수였던 이영원 (81세·서울 강동구 거여동 거주)은 "그런 전통은
아마도 현준혁 선생 이 지도하여 만들어놓은 것으로 추측되었다"고 했다. 이영원은
동기생 인 이정찬과 친하면서도 졸업할 때까지도 말을 놓지 않았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친밀하지 않은 사람이면 그가 청와대 보일러공이 라 해도 존대하는 말을
썼다. 인간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박정희의 특 징은 이런 학창생활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박정희보다 1기 선배인 3 기의 진두현에 따르면 현준혁은 첫 시간에 이런
당부를 하더라고 한다.
"상급생이라고 하급생을 일본학교서처럼 기합줘서도 못쓰고 하급생 이라고 굴종해서도
못쓴다. 우리는 다같이 압박받고 있는 조선사람들 이야.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현준혁은 사회주의자로서의 윤리에 철저하여 결혼도 아주 평등하게 했다.
그는 고향의 무학처녀와 결혼했던 것이다. 현준혁은 치안유지법위 반으로 기소되어
징역3년에 집행유예5년을 선고받았다. 그가 조직한 독서회는 그 뒤로도 맥을 이어갔다.
박정희와 동기인 황용주(81세·경 기도 분당 거주·전 문화방송 사장)는 2학년 후학기에
현준혁계열의 독서회에 들어가 사회주의 책을 읽다가 기숙사 검색 때 발각되었다.퇴
학처분. 그는 고향인 밀양에 돌아왔다가 영어와 수학을 공부한 뒤 오 사카
중학교4학년에 편입하였다. 이어서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입학하 였다. 홍종한(작고·전
수산개발공사 부사장)은 5학년 때 영국 사회 주의 저술가 H G 웰스가 쓴
'세계문화사대계'를 읽었다는 이유로 해서 퇴학을 당하였다. 이런 식으로 퇴학을 당한
4회생이 중퇴자 27명중 대 부분을 차지하였다. 박정희와 동기인 윤치두(작고·경북
영천시 교육 장 역임)는 생전에 이렇게 회고했다.
"학교에서 보호자를 소환하면 그 학생은 영락없이 퇴학을 당한다. 그러면 고리짝을
짊어지고 밤에 보호자를 따라 학교를 떠나는데, 우리 는 한솥밥을 먹고 같이 뒹굴던
친구들이 그렇게 떠나는 것을 기숙사에 서 내려다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12회 이장환은 '대구사범심상과지'에 이렇게 썼다.
'5년 동안이나 날마다 드나들던 연붉은 교문기둥에 노랗게 붙여져 있는 '관립대구사범
교'라는 동판 문패. 그 저편에 보이는, 본관현관 에 우거진 담쟁이 덩굴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푸르디 푸른 잎사귀로 뒤덮인 붉은 벽돌 교실에서 우리들은 자랐고 거기서
우리들은 뼈가 아 팠으며, 그 속에서 심상과는 서러웠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그 어려웠
던 입학시험의 관문을 뚫은 총명한 눈동자에 거칠 것이 어디 있었겠느 냐마는 식민지
치하의 현실은 냉혹했고 시대상황은 너무나 달랐던 것 이다.꿈은 깨어지고 바람은
거세었다. 대구사범 학교로 말미암아 거기 서 우리는 이민족을 만났고, 그것도 정복자
일본인으로 만났기에 서로 의 갈등과 충돌은 극심했었다. 압박받는 우리의 처지는
슬펐으며 슬픔 은 곧 저항으로 변해갔고 우리로 하여금 민족의 살길을 찾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