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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변죽 울리기[제7구간]
☞ 당고개-숲재-사룡산-아화고개-만불산-관산-한무당재 ☜
- 洛東의 低山性 地帶 : 非山非野라고 얕보지 마라! -
♣ 산행개요 ♣
◆ 산행지 : 낙동정맥 제7구간[당고개-한무당재]
◆ 일시 : 2006. 1. 20.(금)/21.(토)[무박산행]
◆ 날씨 : 맑음/겨울 속의 봄
◆ 종주경로 : ☞ 당고개(321m)/20번국도 → 독고불재(455m) → 부산성(680m) → 숲재/숙재(480m) → 사룡산(685m) → 아화고개(130m)/4번국도 → 만불산(279m) → 관산(393.59m) → 청석재/한무당재(220m)/909번지방도 ◀
◆ 시간대별 산행코스 :
△ 04:35 당고개/20번국도 출발
△ 04:46 396m
△ 04:52 임도
△ 05:22 582m
△ 05:56 경계철망
△ 05:58 651.2m/좌 내리막
△ 06:17 독고불재/어두목장 좌측 목장도로 오르막
△ 06:59 753m/산불감시초소/우측으로 정맥길이 꺾임
△ 07:00 헬기장
△ 07:14 4거리 안부 직진
△ 07:19 부산성 남문 성터/10분 휴식
△ 07:41 730m
△ 07:49 능선분기점/묘/좌 내리막
△ 07:50 성터 내리막
△ 07:53 4거리 안부 직진 오르막
△ 07:59 철조망 내리막 길 임도/좌측 철문
△ 08:05 임도 진행 후 우측 숲길 진입
△ 08:13 임도
△ 08:15 숙(숲)재/2차선 포장도로 우측을 따라 ‘우라생식마을’ 표지석 3거리
△ 09:25 아침식사 후 출발
△ 09:34 생식마을 도로 따라 진행 후 우측 산길 접어들어 오르막 봉우리
△ 09:38 생식마을 식물분석장 철대문 진입
△ 09:52 생식마을 안길 따라 진행 후 사룡산 갈림길
△ 09:59 사룡산(685m)/비슬기맥 분기점
△ 10:07 사룡산 갈림길 복귀
△ 10:10 산불감시초소 지나 산불조심 게양대 봉우리
△ 10:17 전망바위
△ 10:19 삼각점(035) 전망대
△ 10:29 봉우리
△ 10:38 봉우리/내리막 계속
△ 10:56 4거리 직진
△ 11:07 형제목장고개
△ 11:08 철탑(No.15)
△ 11:10 철탑(No.14)
△ 11:25 숲 빠져나와 도로 통과/도로공사 중
△ 11:45 시원한 목장길 따라 진행 후 도로통과/밭둑 넘어 숲 진입
△ 11:53 경부고속도로 굴다리 통과
△ 11:58 좌측으로 고속도로 끼고 포장도로 진행 후 우측 산길 진입/철탑
△ 12:00 과수원/철탑(N0.6)
△ 12:04 공동묘지 통과 후 철탑(No.5)/송신탑 우측 농로/좌측 탱자나무 울타리
△ 12:08 도로 건너 숲 진입 후 철탑(No.4)
△ 12:11 철탑(No.3)
△ 12:16 하추마을로 내려와 좌측 마을안길 따라 진행 후 중앙선 철길 통과
△ 12:18 아화고개/4번국도 통과
△ 12:20 만불산 입구 둔덕 묘에서 대기 및 휴식
△ 13:00 휴식 후 출발
△ 13:10 철탑(No.2) 지나 4거리 통과 직진/완경사오르막
△ 13:17 만불산(279m)/우 내리막
△ 13:22 임도 건너 오르막
△ 13:24 성터 지나 포장임도
△ 13:30 축사/농장/과수원 도로
△ 13:33 294.9m/산불감시초소
△ 13:46 밀양박씨묘와 신설 쌍묘
△ 13:47 임도합류
△ 13:52 납골묘 오르막
△ 14:02 봉우리 3개 넘어 급경사 내리막
△ 14:16 봉우리/좌 내리막
△ 14:27 관산(393.9m)/묘1기/25분 휴식
△ 14:56 관산능선 따라 관끝/우 급경사 내리막
△ 15:12 385m/우능선/평탄한 솔숲 길
△ 15:23 임도
△ 15:29 묘지/우 사면 내리막
△ 15:35 봉 공터
△ 15:46 봉우리/좌 내리막 후 오르막
△ 15:48 봉우리 우 내리막
△ 16:04 봉우리
△ 16:18 351.4m/삼각점(경주42, 1982복구)/우 내리막
△ 16:33 한무당재(청석재)/909번지방도/1차선 포장도로/산행 종료
△ 17:25 하산주 및 휴식 후 한무당재 출발
◆ 산행거리 : 27.9km[GPS 실거리] +사룡산 왕복 1km
☞당고개-5.1km-753m-3.4km-숲재-1.3km-사룡산갈림길-5.9km-경부고속도로-1.3km-아화고개-5km-관산-5.9km-한무당재◀
◆ 산행시간 : 약 12시간(아침식사 1시간 10분 및 아화고개 40분 휴식 등 모두 포함)
◆ 형태 : 덕칠이 합동산행[서훈식 고문, 夷希美 회장, 허공 대장, 밤안개, 천사, 대왕, 윤비, 뚜벅이, 돌범+1, 황초롱, 나푸른솔, 탱크, 산정무한, 흑기사, 록수, 주유천하 : 1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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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과 詩 ♥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 오규원, “겨울 숲을 바라보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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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낙동정맥 변죽 울리기 제7구간 개요
낙동정맥 변죽 울리기 제7구간은 당고개에서 청석고개(할미당재/한무당재)까지의 구간이다. 원래 예정된 일정으로는 당고개에서 아화고개까지로 구간을 나누었으나, 이 경우 구간거리가 17km정도에 불과하여 산행시간이 6-7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껏 6시간 산행을 하려고 서울에서 무박으로 먼 길을 오가는 것은 비경제적이라 생각되어 구간을 청석고개까지 연장할 것을 제의하여 회원들의 동의로 구간을 조정하여 낙동정맥 전체 구간일정도 1구간 줄어들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처음에 20구간으로 예정했던 낙동정맥을 17구간으로 주파하게 되고(나와 산정무한님은 지경고개-배내고개-외항재를 1구간으로 주파했으므로 16구간), 올 6월 17일 백두대간 매봉산줄기의 낙동봉 분기점에서 낙동정맥 종주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올 5월 말에 낙남정맥 일정도 종료될 예정이므로 올 상반기 중에 낙동강을 위요한 두 정맥줄기답사는 일단 마무리를 하게 된다.
이번 구간은 당고개에서 사룡산 갈림길까지는 정맥길이 경주시 산내면과 건천읍의 경계가 되고, 이 이후에 한무당재까지는 정맥길이 좌측으로 영천시 북안면과 고경면을, 우측으로 경주시 서면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 정맥길은 이제 경북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이 구간 고도표를 보니 사룡산 갈림길을 지난 이후에는 관산에서 약간의 굴곡이 있을 뿐 고도차가 거의 없는 이른바 低山性 지대의 구간으로 보인다. 정맥길에서 약간 비켜난 곳에 있는 사룡산(685m) 이후에는 한무당재까지 400m이내의 산과 봉우리들이 이어지는(해발표고 393.5m의 관산이 최고봉이다) 낙동의 非山非野구간이다. 따라서 이번 구간의 GPS 실거리가 27.9km에 이르더라도 10시간 정도면 주파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2. 낙동정맥 제6구간 들머리 : 당고개
2006. 1. 20. 금요일 절기는 大寒이나 계절이 하수상한지 大寒다운 추위는 아니다. 겨울 속의 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모름지기 한겨울이라면 산꾼들은 심설산행을 선호하는데 경상도쪽 정맥길을 걷다보니 한겨울에 심설과는 관계없는 봄날 같은 산길을 걷고 있다.
산행준비 때문에 저녁 모임에도 빠지고 집으로 들어와 산행준비를 한다. 이번에는 각자 취사도구와 찌개거리 등을 분담하여 챙겨가기로 했고, 나는 참치캔과 햄, 그리고 보드카 한 병과 안주거리를 준비했다. 이것저것 챙겨 넣으니 배낭이 꽤 무겁다. 북새통이었던 예전과는 달리 금요일 밤 전철 안은 한가한 것이 이상하다.
밤 11시 양재동에서 우리들의 버스를 탔는데 참석인원이 줄어들어 17명이다. 우리들의 버스와 다른 버스의 백미러(rear-view mirror) 접촉사고로 기사들끼리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보니 버스 출발시간이 1시간 이상 늦어져 2006. 1. 14. 토요일 0시를 넘어 출발한다. 3시간 정도 안락한 우등버스의 두 자리를 혼자 차지하여 편하게 잠을 자고 깨어나 보니 지난번에도 들렸던 평사휴게소이다. 이곳에서 라면 한 그릇을 시켜먹고 이번 구간 들머리인 당고개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 10분이다.
이곳은 옛날 당(堂)집 이 있어 ‘당고개’ 라고 부르는 고개로 20번국도가 지나고, 지도에는 간혹 당고개가 硬音化하여 된소리가 된 ‘땅고개’로 표기되어 있는 것도 있다. 당고개 동쪽 아래에 있는 ‘우중골’이라는 지명은 구름이 덮이고 어두워지면 곧잘 비가 몰려온다고 하여 ‘우징곡(雨徵谷)’이라고도 하는 곳이다.
산행채비를 마치고 버스에서 내려 흑기사 후미대장의 선도로 산행 전 체조시간, 쌀쌀한 새벽공기를 가르며 10여 분간 가볍게 온몸을 풀어준다. 밤하늘에는 보름달을 지난 후의 반달모습으로 달무리가 진 모습이고, 북두칠성의 국자가 거꾸로 자리를 잡았다. 달빛이 힘을 잃으면 별이 더욱 빛이 나는 법, 스러지는 달빛에 반비례하여 별들은 더욱더 총총하다.
3. 달빛 산행 : 부산성(富山城)과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당고개 → 숲(숙)재 : 8.5km//3시간 40분]
새벽 4시 35분 당고개의 20번 국도를 건너 절개지 좌측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시멘트옹벽을 튀어 넘거나 좀 더 진행하여 산내면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올라 우측 절개지 위 홈통을 따라 올라간다. 땅이 푸석푸석하고 잡목을 스치며 오르다가 바로 좌측 숲 안으로 들어선다.
묘를 지나 솔숲 속으로 오르막을 치고 오르니 이 봉우리가 396m봉 같고, 어둠 속이라 삼각점은 확인하지 못한다. 이 봉우리에서 내리막을 내려서면 임도가 나오고 이 임도 좌측으로 진행하다가 바로 우측의 숲길로 들어선다. 묘를 지나 솔숲 오르막을 치고 오르다가 오리재로 보이는 평지에서 덥고 답답한 기운으로 자켓을 벗는다. 산에는 날씨가 추울 것으로 알고 고소내의를 껴입고 왔다가 벗을 수도 없고 답답하기만 하다.
배낭이 무겁고 뒤로 쳐지다보니 돌범님과 회비가 1만원 싸다고 돌범님이 꼬셔서 데리고 온 친구분과 함께 최후미가 되어 산길을 오른다. 선두의 불빛은 멀리 사라졌고 뒤돌아보니 아래 마을의 불빛만이 명멸한다. 지대가 높아지는지 쌓여있는 눈이 그나마 겨울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 날씨는 포근하다. 달빛은 교교하고 새벽 산길을 나홀로 걸으며 침잠의 세계로 빠져드는 달빛산행이다.
연신 뽀얗게 흐리는 안경알을 닦아내며 582m봉으로 추정되는 봉우리에 오른다. 아직도 깊은 밤중이라 조망은 기대할 것이 없고 이곳에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르막에서 바위 덩어리 위로 오른 후 철조망을 넘는다. 눈길을 따라 바로 651.5m봉으로 이어지고 정맥길은 이 봉우리에서 급격히 좌측으로 꺾여 급경사의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눈길 급경사 내리막이 미끄러워 조심스레 내려서다 보니 20여분 만에 넓은 개활지가 펼쳐지는 공터로 내려선다.
이곳이 어두목장이 있는 지도상의 독고불재이다. 지도를 보니 이 동네에 ‘어머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는 마을의 생김새가 ‘고기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어(魚)머리’이고, 어두목장은 어머리=魚頭에서 따온 목장이름일 것이다. 생선고기머리 목장에서 말 사육을 하고 있다. 우리는 말고기를 잘 먹지 않으나, 말(馬)도 고기임에는 틀림없고 일본에 가보니 그 놈들은 말사시미를 즐겨먹고 있었다.
어두목장 좌측의 목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니 좌측으로 정자 같은 것도 보이고 3거리에서 계속 직진하여 오르막을 오르다가 우측의 숲길로 들어선다. 돌범님은 친구분과 같이 오기로 하고 홀로 먼저 오르막을 오른다. 땀을 닦아내며 생각없이 오르막을 오르다보니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753m봉이다. 이 봉우리가 오늘 구간의 최고봉이다. 정맥길은 이곳에서 우측으로 급격히 꺾여 진행한다. 753m봉에서 우측으로 조금만 가면 헬기장이고 계속 우측으로 진행하다보니 우리 일행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허공 대장님 등 선두가 헬기장에서 아마도 좌측으로 우뚝 솟은 774.4m봉 방향으로 진행하였다가 알바를 한 모양이고, 산정무한님이 막 되돌아오는 길이다. 선두가 종종 알바를 좀 해주어야 不敏한 후미들이 보조를 맞출 수 있다. 왜 남들이 알바를 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지? 이번 구간부터 중종대왕의 ‘대왕’이라는 닉을 하사받은 하상배님이 웬일인지 선두에 끼였다가 대형알바를 함으로써 알바대왕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쓴다.
아침 7시가 넘어가면서 세상은 환하게 밝아오고 이제 랜턴은 필요 없게 되었다. 이제 바야흐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 산줄기들이 첩첩하고, 확 트인 능선을 따라 걷는데 눈발을 옴팡 뒤집어 쓴 소나무 가지가지마다 맑은 수정처럼 영롱한 빛을 발한다. 소나무 눈길 터널을 지나며 산뜻한 새벽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시원하고 상쾌하다. 아! 이런 맛에 무박의 고통을 이겨내고 아침 산길을 걷는 것이 아닌가.
4거리 안부에서 직진하여 오르막을 오르는데 참나무와 잡목과 억새가 어우러진 호젓한 길이다.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성터에 오르니 이곳이 바로 부산성 남문성터이다. 이곳에서 알바를 한 선두도 기다릴 겸 잠시 휴식을 취한다. 날이 밝아오면서 멀리 뾰족하게 솟은 단석산과 어둠 속에 지나온 651.2m봉과 753m봉이 보이고 앞에 영남채석장의 흉한 모습도 함께 눈에 들어온다.
부산성 남문터에서 바라보는 단석산, 651.2m, 영남채석장
부산성(夫山城 또는 富山城, 사적 제25호)은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하고, 663년(신라 문무왕 3년)에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이 성은 주사산, 오봉산, 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부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 현재는 남문터와 군대의 창고터(軍倉址),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터, 우물터, 못터 그리고 비밀통로인 암문터 등이 남아 있다.
산성이 있는 곳은 대구에서 경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선덕여왕 때 백제군이 이 산을 넘어서 옥문곡(玉門谷, 女根谷으로 현재의 샙들<씹들>마을이 있는 곳)까지 잠입한 뒤 축성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북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하여 경주의 외곽산성으로 쌓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성밖은 4면이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하고, 성안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많으며 물이 풍부하여, 신라의 중요한 군사기지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산성은 신라 효소왕 때 이곳의 창고지기였던 화랑 득오가 죽지랑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모죽지랑가는 화랑 죽지랑의 무리인 득오가 자기가 모시던 죽지랑이 죽자 그를 그리워하며 읊은 노래로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인 죽지랑을 찬양하면서 그를 그리는 마음이 행여 무심치 않다면, 저 세상 어느 곳에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적 소망을 드러내고 있는 향가이다. 자칭 국보 양주동 박사가 그럴 듯 하게 이 향가를 해설한바 있다.
낙동정맥길을 걸으면서 지난 구간의 단석산도 그렇고 이번 구간의 부산성터를 지나면서 그때의 편린을 보고 잠시 신라의 옛 향기에 젖어본다. 여기서 잠시 신라의 ‘화랑’이란 것의 실체를 알아보자. 신라의 화랑은 현재에 와서 변용되고 곡해된 면이 많다(신복룡의 「한국사 새로 보기」에서).
현재는 화랑이 花郞으로 쓰이고 있지만 三國遺事나 東國正韻 등에서는 花郞이 아니라 花娘(아가씨‘랑’으로 娘子의 娘이다)이었다. 화랑은 원래 부락축제의 리더역할(요새의 치어리더)을 한 源花인 여자들이었다. 원화가 화랑으로 바뀌었어도 화랑은 여자였고, 신라의 모계중심사회가 퇴조를 보이면서 화랑도 남자로 바뀌고 이름도 國仙으로 불린다(그 최초의 인물이 薛原郞이다). 화랑은 ‘화냥’으로 불렸고 요새처럼 상무정신의 발로가 화랑이 아니었다. 화랑은 단지 어굴 고운 남자들이었다. 世俗五戒라는 것도 화랑과 관계없는 서민청년들의 생활규범이었다.
화랑을 상무정신의 발로로 호국의 꽃으로 미화한 사람이 이선근(후에 문교장관, 성대총장, 정신문화연구원장 등을 지냄)이었다. 육본 정훈감이던 이선근 대령이 호국의 꽃인 청년의 문화유산을 발굴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발굴해낸 것이 바로 화랑이었다. 이선근의 ‘화랑도연구(1954)’로 화랑은 하루아침에 일약 한국역사상 위대한 청년문화의 유산으로 부상한 것이다.
역사 뒤집어보기다. 오늘도 화랑대, 화랑정신 운운하면서 그 유산을 이어받고 있다. 원래 역사가 구라라고는 하지만 학자가 정치권력과 유착했을 때의 폐해를 우리는 북한의 역사에서도 그대로 보고 있다.
부산성터에서 직진 오르막 능선위로 오르면 우측으로 시원하게 넓은 고랭지단지가 펼쳐진다. 좌측은 솔가지들이 눈을 덮어쓴 채 황홀한 모습이고 억새밭 능선길을 따르다가 밑으로 내려서니 이어지는 고랭지 채소단지이고 뽑다 버린 무들이 간혹 보인다. 고랭지단지의 억새 임도를 따라 걷다가 730m로 추정되는 한 봉우리에서 내려섰다가 올라가는 길에 우측으로 펼쳐지는 분지 내 부산성목장과 볼록볼록 솟아있는 산봉들의 모습이 볼만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고랭지단지에서 : 뒷쪽이 부산성 분지
고랭지 끝자락의 능선분기점에는 묘1기가 있고, 정맥길은 이곳에서 좌측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내리막에 있는 부산성 성터흔적을 만난다. 계속 눈길 내리막을 내려서면 4거리 안부가 나오고 여기서 직진하여 오르막을 오른다. 바위가 몇 개 있는 봉우리에서 내려서는데 좌측으로 철망이 쳐져 있다. 숲에서 빠져나오니 좌측으로 철대문이 있고 우측으로 임도가 있다. 이 임도를 따라 5분쯤 내려가면 우측으로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솔숲 속의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면 다시 임도가 나오고 이 임도를 따라 내려서면 2차선 포장도로와 접하고, 우측으로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우라생식마을’ 표지석이 있는 3거리지점이다. 이 동네가 숙령(淑嶺)이라고도 하는 숙재 또는 숲재이다. 우라생식마을의 우라리(牛羅里)는 이곳의 산 지형이 소의 모습(牛形)과 같은 형상이라고 하여 우라(牛羅)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고, 근자에는 이곳이 생식마을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 동네에는 골짜기가 시루처럼 생겼다 해서 ‘시루미기’라고 하는 독특한 지명도 있다.
당고개에서 숙재까지 8.5km를 오는데 3시간 40분이 걸렸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으나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가기로 한다. 생식마을 입구 도로변의 장송과 넙적 통바위가 있는 곳에서 선두는 버너에 불을 붙이고 찌개를 끓이는 등 조찬준비를 하고 있다. 식사장소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나는 준비한 보드카를 꺼내어 한잔씩 돌리니 그 향기가 제법 좋다. 햄과 통배추를 그냥 된장에 찍어먹는 것도 안주로는 괜찮다. 내가 보드카를 맛보기 시작한 것은 5년 전 시베리아횡단을 하면서 보드카를 맛본 때부터인데 독주이면서도 뒤끝도 없고 해서 좀 마시는 편이다. 보드카는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마시는 게 정석이다.
후미들도 모두 도착하고 17명이 버너 4개로 끓인 찌게를 나누어 생식마을에서 생식을 하지 않고 역설적이게도 조리음식으로 즐거운 조찬시간을 갖는다. 생식이란 음식물을 익히지 않고 살아있는 음식물을 그대로 섭취하는 것이다. 밤안개님은 동네 집으로 찾아가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참소주 큰 병 하나를 구해 왔는데 그 기지가 놀랍다.
유쾌하게 먹고 마시다 보니 시간은 1시간 이상 흘러가고 서둘러 장소를 정리한다. 록수님에게 음식찌꺼기와 잔반들을 모아 이웃집으로 가서 염소나 개에게 주고 오라고 하자 개들이 알아서 와서 먹는다고 하면서 가다가 중간에 부어넣고 와버리는 또 다른 기지를 발휘한다. 아침식사 시간으로 1시간 10분이 소요되었으나, 그리 급할 일은 없다. 그리 빨리 가서 뭐 할 것인가? 산천경개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갈 뿐이다. 오늘 중에 집으로는 돌아가겠지!
생식마을 입구에서 : 아침식사를 마치고
4. 사룡산(四龍山, 683m)과 비슬기맥
[숲재 → 아화고개 : 8.5km//2시간 53분]
오전 9시 25분 아침 식사 후 포식으로 터질 듯한 배를 움켜쥐고 생식마을로 가는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포장도로를 200여m쯤 오르다가 표지기를 따라 우측으로 나 있는 산길로 올라서서 진행하는데 후미들이 “헤헤!” 하면서 포장도로를 따라 그냥 진행한다. 산길로 올라갔다가 내려서나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나 생식마을 입구에 다다르게 됨은 동일하나 선두는 정통 마루금을 고집한다.
‘獅巖’ ?
봉우리로 올라서기 직전의 묘에 세운 오래된 비석이 눈길을 끈다. 큰 돌판에 그냥 ‘獅巖’이라고만 새겨져 있고 다른 글은 없어 무슨 뜻인지 헤아리다가 그 뜻을 알 수 없어 그냥 오른다. 지금까지 세상을 주유하면서 이런 비석은 처음 본다. 오르막 봉우리에서 좌측 내리막으로 내려서면 도로가 나오고 좌측으로 내려서면 ‘식물분석장’ 철문이 가로막고 있다. 철문 우측으로 사람이 다니는 문이 열려져 있어 그곳으로 들어간다. 생식마을로 들어가는 것이다.
생식마을 도로를 따라 쭉 들어가다 보니 건물들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 ‘감사’라는 맷돌이 세워져 있는 곳을 지나고, 곳곳에 성경의 말씀들이 새겨진 돌들을 보게 되며, ‘靈門’이라는 곳도 있는 것을 보니 생식마을이라는 곳이 일종의 신앙촌 내지는 집단수행시설 같은 곳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신앙생활과 함께 생식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보통사람들이 함부로 생식을 하기는 쉽지 않지!
생식마을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마을 끝집 부근에서 우측으로 올라서면 산길이 나오고 좌측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사룡산 갈림길이 나온다. 표지판에선 사룡산 방향으로 [오제소공원 구룡산(무지터)→]로 되어 있다. 언제 다시 사룡산이라는 곳을 와볼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배낭을 부려놓고 사룡산을 갔다가 오기로 한다. 정맥길에서 500m쯤 좌측으로 더 가야 하나 완만한 길이고 장애물도 없어 7분 정도면 사룡산 정상에 이를 수 있다.
사룡산 정상에서 : 뒷쪽은 관산 방향
사룡산 정상(683m)에는 한가운데 靈山辛氏 묘 1기가 턱하고 자리를 잡고 있고, 관산이 보이는 곳의 나무에 표지기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잡목들로 사방이 시원하게 터진 것은 아니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뿐이다. 이 나라는 어디 가도 산밖에 없는 나라이다. 사룡산에서 좌측(남쪽) 방향으로 뻗어가는 산줄기가 이른바 비슬기맥줄기이다. 대구 마루금산악회의 비슬기맥 표지기가 달려 있다.
비슬기맥 분기점임을 알려주고 있는 표지기
비슬기맥(금호남기맥)은 낙동정맥 사룡산 분기점에서 사룡산-구룡산-발백산-대왕산-선의산-용각산-봉화산-우미산-비슬산-수봉산-천왕산-호암산-화악산-종남산-팔봉산을 거쳐 밀양강으로 맥을 다하는 146.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비슬기맥은 앞으로 이어갈 낙동정맥의 가사령 분기점에서 뻗어 내려오는 팔공기맥과 더불어 대구방향으로 향하는 큰 산줄기이다.
팔공기맥이 낙동강의 상류 물줄기를 서북방향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면, 비슬기맥은 낙동강의 하류 물줄기를 서남방향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박성태님의 남한산경도를 보니 이 두팔공기맥과 비슬기맥의 중심인 팔공산과 비슬산이 영천 금호강의 물줄기를 안고 대구를 둘러싸는 형국을 취하고 있다.
대구에서 지하철화재와 서문시장 화재 등 근래에도 대형 화재가 많이 발생하는 이유를 대구를 둘러싼 산세에서 찾는 견해가 있는데(조선일보 2006. 1. 19.자 「조용헌 살롱」 “대구의 풍수와 화재”),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럴듯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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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세(地勢)의 특징은 동서남북에 모두 높은 바위산이 포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쪽에는 1192m의 팔공산(八公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남쪽에도 역시 1084m의 비슬산(琵瑟山)이 포진하고 있다. 1000m가 넘는 산은 고산(高山)에 해당한다. 더군다나 팔공산이나 비슬산과 같이 뾰쪽하게 생긴 바위산은 풍수에서 ‘화체형(火體形)’으로 진단한다. 화기가 많은 산이라는 뜻이다. 동서쪽에도 역시 산이 가로막고 있다. 한국 대도시 가운데 대구처럼 1000m급의 높은 바위산이 둘러싸고 있는 도시는 없다. 대구가 유일하다.
우리나라 도시들은 ‘주(州)’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전주(全州) 진주(晉州) 원주(原州) 상주(尙州) 나주(羅州) 충주(忠州) 등이 그렇다. ‘주’자가 들어간 곳의 지리적 공통점은 강이나 하천이 도시를 관통하거나 돌아간다는 점이다. ‘주’의 사전적 의미는 ‘물 가운데 있는 높은 곳’을 의미한다. 물이 빙 둘러 있어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주’자가 들어가는 도시들은 공통적으로 물이 풍부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대구(大邱)의 지명은 ‘주(州)’ 대신에 ‘언덕 구(邱)’자가 들어간다. 산과 언덕은 많지만, 강과 하천은 부족한 형국임을 암시하고 있다. 풍수상으로 볼 때 대구는 원천적으로 수기(水氣)가 부족한 지역인 것이다. 대구의 화재는 수기의 부족과 관련이 있다. 어떻게 하면 물을 보충할 것인가. 이것이 대구 풍수의 과제이다.
조선 정조 2년(1778) 대구의 판관이었던 이서가 시내의 중심을 가로지르던 하천에 제방을 쌓아서 현재의 신천(新川)으로 물줄기를 돌리는 공사를 한 적이 있다. 장기적으로 대구는 신천과 같은 하천 증설을 검토해야 하지 않나 싶다. 현대 도시는 전기와 에너지 사용의 과다로 화기 과잉 상태이다. 화기를 내리려면 물의 보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만 ‘수화기제(水火旣濟:물이 위로 가고 불은 아래로 내려옴)’로 건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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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룡산에서 다시 정맥 분기점으로 돌아와 북쪽 방향의 정맥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간다. 분기점에서 3분쯤 올라가면 좌측으로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근무자가 근무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산길을 다니면서 숱하게 산불감시초소를 보아왔는데 근무자가 근무를 하는 것을 본 적은 거의 없다. 봉우리에는 산불조심 현수막이 걸려있고 게양대 같은 것이 세워져 있다.
이 봉우리에서 내려섰다가 올라선 전망바위에서 첩첩 산그리메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내에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고 있는 마을들과 수많은 저수지가 올망졸망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기만 하다. 금남정맥종주를 하면서 곳곳에 소류지(小留池)라는 저수지를 많이 본 적이 있는데, 이곳의 지도에는 저수지들이 ‘못’ 또는 ‘지(池)’로 표기되어 있다. 아마도 멀리 보이는 장대한 산줄기는 ‘소경이 문고리 잡는’ 격으로 대구로 가는 ‘팔공기맥’ 산줄기이리라. 경부고속철도 대구-부산구간 공사현장도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 : 좌측의 경부고속철공사현장과 저수지들
그리고 하늘금을 이루고 있는 팔공기맥?
전망바위에서 내려섰다가 올라서니 또 전망대다. 그런데 이곳에는 옛 삼각점(035)이 박혀있다. 이곳 역시 조망이 훌륭한 곳이다. 여기서도 점점이 많은 저수지들이 올망졸망 박혀있다. 전망대에서 내려서는데 큰 소나무가 쓰러져 정맥길을 막고 있다. 내리막에서 평지같은 낙엽길을 따라가다 오른 봉우리에서 다시 내려선다. 다시 오른 봉우리에서 솔숲 내리막을 계속 내려서는데 포도송이마냥 잔솔방울들이 잔뜩 달린 소나무들이 빽빽하다.
4거리에서 직진하여 쌍묘가 있는 곳에서 좌측 언적을 따라 솔숲 오르막을 오르는데 역시 볼품없는 소나무가 빽빽하다. 솔잎이 잔뜩 바닥에 깔려있어 푹신푹신한 맛은 있다. 이윽고 포장도로가 가로지르는 형제목장고개이다. 우측으로는 마을과 오봉산이 바라다 보인다. 흑기사 후미대장으로부터 돌범님이 친구분이 힘들어해 함께 탈출하였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형제목장고개의 도로를 통과하여 숲으로 들어가 철탑 두개를 연이어 지나 4거리에서 좌측 사면을 따라 진행을 한다. 숲에서 빠져나오니 좌우로 도로공사중이고, 도로를 건너 절개지를 따라 숲으로 들어간다. 5분쯤 휴식을 취하고 넓은 도로를 따라 과수원길을 걷는다. 우측으로 철망이 쳐져 있는 시원한 목장길을 따라 걷는데 멀리 만불산 만불사의 황금불상이 눈에 들어오고 경부고속도로도 보인다.
모든 것이 텅 비어버린 겨울들판을 걷는다. 그러나 황량한 겨울 들판에는 끈질긴 생명력이 움트고 있다. 겨울 들판을 걸어본 자만이 땅의 훈훈함과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흙 위에서 쓰러진 자, 반드시 흙 위에서 딛고 일어서야 함을 땅은 일깨워준다.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 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대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 허형만, “겨울 들판을 거닐며” 전문
겨울들판 : 목장길 따라
도로를 통과하여 밭둑을 넘어 다시 숲으로 들어가 봉우리에서 내려서니 바로 앞에 자동차들이 씽씽 달려대는 고속도로다. 앞으로 진행할 정맥길을 가늠해보고 고속도로를 통과하기 위해 좌측으로 고속도로를 끼고 진행하다가 굴다리를 통과한다. 굴다리에서 빠져나온 후 이번에는 좌측으로 고속도로 철망을 끼고 포장도로를 따라 5분쯤 진행하면 우측으로 산길이 나 있고 전봇대에 표지기가 달려있다. 바로 산길로 접어들면 복숭아밭 과수원과 철탑이 나온다.
과수원 안에서 길을 찾아가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밤에는 알바를 하기 쉽겠다. 표지기를 유심히 살피며 과수원을 지나 공동묘지 둔덕을 오르니 또 과수원이다. 과수원의 나무들 사이로 철탑과 송신탑이 같이 있는 곳에서 우측 농로를 따라 가는데 좌측으로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서 있다. 축사의 분뇨냄새가 코를 찌른다. 좌측의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도로를 건너 다시 숲으로 진입을 하는데 철도와 4번국도가 보이는 곳에서 연이어 두개의 철탑을 지나면 농가가 있는 하추마을 도로로 떨어진다.
좌측으로 마을안길을 따라 진행하는데 우측으로는 사과나무 과수원이고, 좌측의 축사와 농가를 지나면서 마을안길 우측으로 가면 바로 앞에 중앙선철길을 건너는 곳이 있다. 단선 철길을 건너면 바로 4번국도 위로 올라선다. 우측으로 4번국도 갓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자동차가 뜸한 기회를 엿보고 바로 국도를 통과한다. 이 동네가 바로 아화고개이다. 옛날 한해가 심하여 언덕에 불을 지르면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탔다고 하여 아화(阿火)란 말이 붙은 마을이 아화리이고, 아화고개는 이 마을의 고개라는 뜻이다.
국도 통과 후 이제는 좌측으로 마루금을 잇기 위하여 진행하다가 묘가 있는 만불산 들머리 입구의 둔덕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쉬기로 한다. 숲재에서 아화고개까지 8km를 오는데 3시간 가까이 걸리고 말았다. 선두와 후미가 별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을 보니 아마도 후미들은 과수원에서 길을 헤매고 있는 듯하다. 멀리서 오는 사람들을 손짓하며 부르는 동안 묘위에 드러누우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40여 분간 기다리는 동안 모두 도착하여 한무당재까지 가기로 한다. 당고개에서 아화고개까지 17km를 오는데 9시간 정도가 소요되고 말았다. 아침식사시간으로 1시간 이상을 까먹기는 했지만 원래 예정했던 6시간은 훨씬 초과하고 말았다. 원안대로라면 아화고개에서 산행을 마무리해야 하지만 오늘 한무당재까지 더 가야하고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
5. 非山非野라고 얕보지 마라!
[아화고개 → 관산 : 5km//2시간 27분]
아화고개에서 한무당재까지 10.9km를 가는데 3시간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만불산을 향하여 숲길로 들어선다. 출발시간은 오후 1시, 하지만 이 구간에는 높은 산도 없고 이른바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非山非野의 구간으로 고도차가 별로 없는 평탄한 구간으로 지제 짐작하고 호기를 부리며 출발하였다.
숲으로 들어가 편한 길을 가는데 좌측으로는 가동 중인 공장건물에서 소음이 들려오고 만불사 미륵불상이 덩그러니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산위에 ‘삐까뻔쩍’한 거대한 불상을 세워놓는 것은 나에게는 부조화의 극치로 보인다. 철탑을 지나 4거리에서 직진하여 완만한 들길을 걷는다. 산길이라기보다는 동네 뒷산을 걷는 기분이 든다. 아화고개에서 20여 분만에 도착한 만불산(279m) 정상은 소나무숲 속에 위치하여 정상이 뚜렷하지도 않고 표지석도 없다.
만불산에서 우측 솔숲 내리막을 내려서면 임도로 떨어지고 이곳에서 임도 건너편 산길로 접어드니 성터 비슷한 돌무더기를 지나 직전에 지났던 포장임도를 만난다. 이 포장도로를 따라 5분쯤 진행하면 축사와 농장 비슷한 건물이 보이고 우측으로 과수원길을 간다. 지도상의 294.9m를 가늠하며 가다보니 꼭지점 비슷한 곳에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지도에 삼각점표시가 되어 있어 삼각점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주위에는 거름 더미들 뿐이다.
관산으로 가는 길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꺾여야 되는데 과수원이라 길이 두렷하지 아니하여 산불감시초소에서 잠을 자는 근무자를 깨워 관산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온 길을 되돌아가 축사 사잇길로 가라고 한다. 따뜻한 날씨로 질퍽한 길을 가는데 좌측에서 서고문님이 축사 건물사이로 올라오고 있다. 우측의 관(冠)을 쓴 것과 같은 관산의 모습을 보면서 농로길 비슷한 임도로 진행하다가 숲길로 들어서지만 평지길이 계속된다.
뒤의 관산을 배경으로
임도에서 솔숲으로 들어가지만 나중에 임도와 만날 것으로 보이고, 오르막에 있는 밀양박씨묘와 신설 쌍묘 우측으로 난 길로 가보니 역시 임도와 합류한다. 다시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좌측으로 납골묘가 있는 곳에서 우측의 솔숲 오르막길을 오른다. 우측으로 심곡저수지의 모습이 보인다. 심곡리의 深谷이라는 말로 보아 골짜기가 깊어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오른 봉우리에서 내려섰다가 다시 오른 봉우리의 좌측 능선을 따라 오른 봉우리에서 급경사의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관산이 바로 앞 봉우리일 것 같은데 몇 개의 전위봉을 오르내리도록 되어 있다. 非山非野라고 얕보다가 혼이 나고 있다.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는 봉우리들이 인간들을 시험하고 있다.
산이 낮다고 깔보거나 산을 높이로만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정맥길에서 충분히 배우고 있다. 다시 10여 분간 급경사의 오르막을 오른 후 도착한 봉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섰다가 이제는 진짜 관산을 향하여 급경사의 오르막을 다시 오르니 관산(393.5m)이다. 관산(冠山)이라는 이름은 산의 모습이 멀리서 볼 때 신라시대에 벼슬을 하는 사람이 쓰는 관(冠)과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관산은 멀리서 보아야 산의 모습을 알 수 있지 막상 올라와 보니 별 특색이 없는 산이다.
관산 정상에서
아화고개에서 한무당재까지의 중간지점인 관산까지 1시간 30여분이 걸렸다. 너무 이른 시간에 밥을 먹어 허기도 지고 목이 마르나 남아있는 물도 없어 괜히 피로도가 가중된다. 관산 정상에도 사룡산 정상에서와 같이 어떤 묘 1기가 턱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정상석은 없고 지도에는 삼각점 표시가 되어 있으나 삼각점은 찾지 못한다. 어떤 산악회에서 나무 둥지에 관산이라고 쓴 비닐판을 감아두었다. 나무에 가려있어 정상의 조망도 좋지 않다.
관산 정상에서 후미를 기다릴 겸 휴식을 취한다. 산정무한님은 아침식사 후에 갖고 온 소주와 참치캔으로 허기를 달랜다. 관산 정상에서 20여분 쉬는데 후미가 속속 도착하고 혹시 흑기사님이 이곳에서 다방을 차리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올라오면서 커피 떨이를 해버려 그냥 한무당재를 향하여 출발한다.
7. 마무리 : 한무당재 상거지들의 만찬
[관산 → 한무당재 : 5.9km//시간]
관산에서 한무당재까지 1시간 30분이 소요될 것이다. 관산 정상에서 좌측의 능선을 따른다. 이 능선은 5분 정도 따르면 관끝 지점에 이르고 이곳에서 우측으로 급경사의 내리막이 이어진다. 기울기가 거의 50도에 가까운 급경사 내리막인데 로프도 없고 나뭇가지에 의지하면서 조심조심 내려간다. 10여분을 정신없이 곤두박질쳐야 평지로 내려설 수 있다.
다시 빽빽한 솔숲이 이어진다. 간벌이 되지 아니하여 소나무가 잔잔하고 화목으로나 아니면 어디 써먹을 수 없는 소나무들이다. 385m봉에서 우측으로 내려서서 평탄한 솔숲 길을 걷는다. 길은 편하다. 빨리 한무당재에 도착할 수 있기를 고대하며 발걸음이 빨라진다. 임도에서 묘지가 있는 봉우리로 올라갔으나 좌측으로는 길이 없어 우측사면으로 내려서니 길이 있다.
거의 평지같은 길을 가다가 봉우리 공터에서 내려선 후 오르막을 오르면서 선후미가 모두 모여 일체로 움직인다. 나타날 듯 나타날 듯 하는 316.4m봉이 꼭꼭 숨어서 사람을 약 올린다. 봉우리 좌측에서 내려섰다가 오른 봉우리 우측으로 내려선다. 다시 고만고만한 봉우리 두개를 넘으니 삼각점(경주42, 1982복구)이 있는 316.4m봉이다. 우측으로 솟아있는 남사봉 봉우리도 만만치 않은 기세다. 고도표에서 밋밋한 것으로 보고 우습게 알았으나 결코 우습지 않은 정맥길이다.
316.4m봉에서 우측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314m봉이 마지막 봉우리인줄 알았는데 아니 또 오르막 봉우리가 ‘약 오르지!’ 하면서 막아서고 있다. 그야말로 마지막인 이 봉우리에서 좌측 사면으로 내려서다보니 발밑에 우리들의 버스가 보인다. 바로 1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한무당재이다.
이곳은 옛날 무당 할미를 모신 서낭당이 있었다고 해서 한무당재 또는 할미당재로 불리고 혹은 근처 골짜기에 靑石이 많고 산적이 출몰했다 해서 청석골재라고 불려 지기도 하는 고개이다. 옹벽의 계단을 따라 내려서니 드디어 오늘 산행 끝!! 시간은 오후 4시 33분이다.
우선 돌범님이 따라주는 막걸리 두 잔을 거푸 마시고 물을 페트병째로 통재로 마시니 살 것 같다. 중간에 탈출한 돌범님이 소주와 막걸리, 과메기와 순대 등 먹거리를 푸짐하게 준비하고 있다가 도착하는 일행들에게 제공하여 훌륭한 마무리가 될 수 있었다. 앞으로 산행 후 날머리에서 이런 식의 준비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회사일로 이번 구간 산행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막걸리를 버스에 실어둔 범털 총무님의 혜안에도 박수를 보낸다.
한무당재에서 : 정맥 거지들의 합창
남아있는 라면을 끓여먹는 모습은 그야말로 상거지들의 잔치이다. 물이 부족하여 소주를 부어 라면을 끓이는 묘기까지 보인다. 아침 8시경에 아침을 먹고 그 후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허기진 탓에 게걸스럽게도 처먹는다. 거지들의 모습이 따로 없다.
일몰의 기운을 받으며 한무당재에서의 마무리
결국 오늘 산행시간은 아침식사 시간 등으로 포함해 12시간 가까이 걸렸다. 다음 구간부터 우리와 합류할 예정인 김수영님이 이 구간을 불과 7시간 만에 주파하였다니 대단한 주력이다. 물론 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이내에 주파하는 주력이니 대단하다고는 생각해왔지만 어떤 식으로 우리와 산길을 달려갈 것인지 궁금해진다.
나로서는 이번 구간을 非山非野라고 얕보다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지만 어쨌든 과정이 힘든 만큼 보람도 있는 구간이었다. 어차피 일요일에 쉴 것이라면 토요일에 좀 세게 내려치고 쉬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화고개에서 한무당재까지의 꼬리를 잘라냄으로써 앞으로의 구간운용이 편해졌다.
저녁 5시 25분 버스는 출발한다. 처음 생각으로는 10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오후 2시경부터 한무당재에서 버스를 대기시키고 장시간 기다리면서도 아무 불평도 않고 우리를 맞아주신 기사님께도 감사한다. 차창 밖으로 일몰의 광경을 감상하며 심곡저수지를 지난다. 이내 잠에 떨어졌는데 깨어나 보니 천안3거리 휴게소이다. 이곳에서 천안팀인 천사님과 탱크님이 호두과자를 선물로 내놓고 버스에서 내렸다. 기사님의 능숙한 운전솜씨로 밤 10시경 강남역에 도착하고 집에 돌아오니 10시 30분, 오늘도 하루 일당을 충분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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