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脫門 (四天王門) (石門) 東門에 해당 (문화재자료 79). 자연 암반위에 폭 47 x 43 센티 화강석을 方形으로 깎아 두 기둥을 세움 그 뒤에 172 센티 장대석으로 터널 구성. 그 위에 5개의 장대석으로 지붕 - 양옆으로 石壁.. 이런 石門은 희귀한 예. 고려 후기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해 쌓은 것 이라고. 우왕(1374-1388) 開泰寺 왜구난입 소실. 적의 방어 기능으로 石門造成.
□ 石造菩薩立像 (보물 218호)
우리나라 최대 石造보살입상 온몸 길이 19미터, 둘레 9.2미터, 귀길이 2.7미터, 눈썹사이 1.8미터, 갓의 가로 3.3미터 보관과 머리부분 한돌, 가슴 한돌, 허리아래 한돌, 세 돌로 구성.
神異한 行蹟 1. 거란침입. 압록강 도강할 때 어떤 중 얕은 내 건너듯 건너감 - 그곳을 따라 건너다가 대군이 몰사. 대장 대노하여 중을 칼로 치니 갓 한쪽이 떨어져 나감. 이 흔적이 불상에 남음. [갓 한쪽 떨어져 나감 - 조선 숙종 시 보수]
2.1909년(순종3) 日人 셋이 불공하면서 큰 갓 위의 金銅化佛 훔쳐가고 이마의 光明珠 깨뜨 림 - 은진미륵이 빛을 발하지 못한 이유.
□ 石燈 보물 232호
보살 앞 석등 1기 보살상 못지 않게 강건한 힘이 느껴짐. 같은 시기 조성 높이 5.45미터 둘레 4미터 (남한에서 화엄사각황전 앞 석증 다음으로 큰 석등) 고려초기의 강력한 힘이 분출된 고려특유의 사각석등의 걸작품
[우리석등의 典型은 통일신라시대 팔각간주에 八角火舍石의 八角이 기본]
□ 오층석탑
보살석상과 석등에 비해 왜소한 느낌. 동시대 조성 높이 5.4미터 둘레 3.6미터. 이중기단위 5층 [현재는 4층]
拜禮石(유형 53호) 석탑옆 폭 0.4 미터 길이 1.5미터 八葉蓮花 세 송이 조각
事蹟碑 1743(영조19) 覺慧스님과 佛糧契員들이 造成.
2. 大正雲寺址 (은진면 관촉리 215)
관촉사 위치한 마을의 북서쪽 계곡. 통일신라기의 토기 파편. 통일신라기의 창건 - 고려시대까지 존속된 듯 石佛 원 위치에서 민가내로 이건(유형 88) 고려시대 양식의 비러자나불 입상 높이 340센티. 광배 멸싱. 사걱대좌 위. 머리부분 크게 장조 은진미륵보다 먼저 조성되었다 하여 "은진미륵의 어머니 부처"로 불리움.
3. 益城君神道碑 및 武石(은진면 용산리 산 93-3) 中宗의 曾孫 이름 형령(1566 - 1612) 광해군 4년(1612) 이이첨의 무고로 거제도에 유배 - 사망. 인조21년(1643) 이곳으로 이장 이수와 비신이 한돌. 조익 撰 오준 書.
4. 은진향교 대성전 (은진면 교촌 77) (기념물 120호)
[채운면]
1. 미내다리 (채운면 삼거리) (유형 11호)
채운다리로 불리움, 민간의 소용에 따라 물자소통 원할. 돌다리 (궁궐이나 사찰)
강경장이 아우른 사람들의 경제력 짐작할 수 있는 중요 유적. (英正祖 시대의 경제력 번성의 중심지로서의 江景의 모습 대변) 강경읍에서 채운면으로 들어가는 금강의 지류인 강경천의 둑 아랫 쪽에 위치.
홍예(무지개 모양의 반원)로 이루어진 정교하고 튼튼한 다리. 홍예 셋을 잇는 30미터 정도 잔존. 홍예 이맛돌에 호랑이 머리 조각. 다리폭 2.8미터 높이 4.5미터
미내 - 이 내가 渼奈이기 때문이라고 / 미나라는 중이 공사감독했기 때문이라고.
파손되어 부여박물관 이건 恩津渼橋碑 영조4년(1728) 송만운(강경장의 큰 손 접주가 아닐까?) 주도 다리 놓았다고.
전라도에서 서울 가는 길목. 정월대보름 踏橋놀이 중심지.
2. 논산 원목다리 (채운면 야화리)(유형 10호)
백제 의자왕이 이곳에 野草를 심어 놀이터를 만들고 봄철에 와서 놀았다는 "들꽃머리"라는 낮은 산의 서남쪽.
원목(院項) 간이역원과 길목의 뜻이 합해져서 주막을 이르는 말. 이 다리 어귀에 이런 시설이 있었던 데서 유래. 公州에서 全州 가는 길목.
홍예 세칸 - 전체적으로 미내다리와 비슷. 약간 작아 길이 16미터 폭 2.4미터 높이 2.8미터
원래 미내다리와 비슷한 시기에 축조 광무4년(1900) 홍수로 파괴 - 승려 4명과 마을 삶들이 다시 세웠다고. 가운데 홍예에만 양쪽 머리돌에 용두와 귀면 양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