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신영복 교수(성공회대 석좌교수)님이 지난 2014년 12월에 서명원 신부님께 드린 저서들.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서울대출판문화원)
지난 1월 15일 밤 성공회대 석좌교수 신영복 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피부암의 일종인 악성흑색종을 진단받고 2년여 동안의 투병생활 끝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러한 피부암은 서구에서는 흔하지만 국내에서는 무척 희귀한 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병 후 3~6개월 만에 돌아가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병의 원인은 직사광선입니다.
피부가 특히 얇은 서양인들의 경우 이 병을 예방하기 위해 얼굴을 직사광선에 절대로 노출하지 않습니다.
제가 돌아가신 신영복 석좌교수님으로부터 호출을 받은 것은 지난 2014년 11월 말이었습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근황을 짧게만 전해들은 터라 자세한 소식을 알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당시에는 악성흑색종 진단을 받으시고 수술을 받으셨지만, 오히려 전신으로 퍼져서 힘들어하시던 때였다고 했습니다. 수술 후 충분한 회복시간도 갖지를 못하셨더라고요. 퇴원하신 다음 날 삼성그룹 사장단에 강연을 다녀오실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2014년 11월 말에 저에게 (더불어숲이라는 단체의 대표를 통하여) 연락을 주신 것은,
당시 준비하고 계시던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의 출판 준비 때문이었습니다. 워낙 위독하신 상황이라 2014년 강의 청강생들이 함께 녹취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 책을 만드시려고 하셨대요. 저는 이 일원이 아니었기에 그때까지의 작업에 제외되어 있다가, 마지막에 동승하게 된 셈입니다.
(저는 2008년에 신 교수님 강의를 1년 동안 꼬박 수강하면서 모든 시험을 치른 청강생이었고, 그때 신 교수님께서 필요하다고 하셔서 강의녹취록을 만들어서 제본하여 드린 일이 있습니다.
녹음파일을 잃어버려 녹취할 수 없었던 ‘자본론’ 강의 하나만 빼고 모두 녹취하였는데, 이 제본을 받으신 신 교수님께서는 저에게 서예 작품 한 점을 답례로 주셨어요.)
그러나 그 모임에는 서명원 교수님의 논문 마감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였어요. 그런 저에게 신 교수님께서는 무리하지 말고 논문 일을 잘 도와드리고 학교로 한 번 오라고 말씀하셨고, 천달 신부님도 허락하셔서 한 주 뒤 찾아뵐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전에도 천달 신부님께 ‘신영복과 강의 내용’에 대해 몇 차례 말씀드린 적이 있기 때문에 신부님에게 이 이름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무고하게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셔서 심한 고문을 당하셨던 분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천달 신부님께서는 예수님처럼 무고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는 것이나, 무고하게 남산 지하실에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신 분들을 존경한다는 말씀을 더러 하셨거든요. 제가 강조해서 말씀드렸어요. 신 교수님은 바로, 신부님께서 존경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그러한 분들 중의 한 분이라고요.
성공회대 캠퍼스의 신 교수님의 연구실로 찾아뵈니, 무척 반갑게 맞이해주셨어요.
“근데요, 선생님! 얼굴이 예뻐지셨어요.”
이때 신 교수님의 얼굴은 피부암 때문에 하얗게 변색되었던 것인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환한 얼굴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구.
“김선래도 더 예뻐졌어. 하하.”
서로의 근황과 안부를 나누고, 제가 신 교수님께 말씀드렸어요.
“선생님께서 쾌차하시라고, 서명원 신부님께 기도 부탁드릴게요. 기도력이 아주 영험하시거든요.”
이때 신 교수님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뭉클’ 하고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어요. 다른 말로 하면 깊은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강의가 시작할 시간이 되어 먼저 강의실로 올라가려는 저에게 신 교수님께서는 새해(2015년) 달력, 머그컵을 저와 서명원 신부님께 선물해주셨어요. 그리고 신부님께는 『강의』(돌베개 출판사)와 『더불어 숲으로 가는 길』(서울대출판문화원)을 주셨습니다. 신 교수님께서 서명하신 책에 ‘드림’이 붙어 있는 경우는 잘 볼 수 없는데, 이 책들에는 ‘신영복 드림’이 적혀 있어요. 이 선물들은 강의를 마친 뒤에 연구실로 돌아와서 가져갔고요.
서명원 신부님께는 먼저 문자 메시지로 보고를 드렸고, 그 다음 주 월요일 서강대학교 신부님의 연구실에서 상세하게 전해드렸습니다. 그 다음 주에도 신영복 교수님의 강의에 참석하면서 병환을 좀 더 깊이 알 수 있게 되었어요. 신 교수님께서 지나는 길에 만나신 동료 교수님께 “사실은 내 병 상태가 너무 안 좋아”라고 거친 호흡을 내쉬면서 말씀하시는 걸 들었거든요. 그리고 한 번 더 강의에 참석했습니다. (제가 종강에 간다는 말씀을 3주 연속 드리니까, 서명원 교수님께서는 무슨 종강을 이렇게 많이 하냐고 궁금해 하셨어요. 첫 번째 종강은 실제 종강, 두 번째 종강은 총 정리하는 시간, 세 번째 종강은 종강콘서트를 하는 시간이에요.)
제가 신 교수님의 병명을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더불어숲’이라는 모임의 2014년 연말 총회를 치른 다음이었습니다. 당시 그 자리에 참석한 한 지인이 전해 주었는데, 걸음을 제대로 걸으실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하시는 상태였다고 하였습니다.
저에게 병명을 전해 들으신 서명원 신부님께서는 신부님 누이께서도 이 병으로 돌아가셨다면서, 금방 돌아가시는 병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신부님의 누님께서도 금방 돌아가셨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신 교수님을 위해 죽도록 기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주에서도 매일 기도하시기 위해 신 교수님께서 주신 성공회대 달력을 직접 챙겨 가시기도 하셨어요.
저는 이러한 소식들을 빠짐없이 신 교수님께 문자로 간략하게라도 전해드렸어요. 신부님께서 좋은 에너지를 보내드리고 계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랐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곧 돌아가시리라 생각했던 신 교수님께서는 병을 이겨내고 계셨어요. 당신께서 마무리하지 못할 줄 아셨던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의 교정지를 직접 수정하셨고, 서문도 새로 쓰시기도 하셨어요. 책을 내신 후 북콘서트와 사인회에 참가하실 수 있는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어서 무척 기뻤습니다.
서명원 신부님께서는 가끔 저에게 불시에 신 교수님의 안부를 물으셨어요. 그러면 답변해드리면서 신 교수님께도 소식을 전해드렸습니다. 늦여름 즈음, 신부님께서는 저에게 신 교수님의 병환 상태를 확인하신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저는 기도를 바치면서도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척 대단하신 분이시네요.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이 말씀을 신 교수님께 문자로 전해드렸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감사합니다. 신부님도요.’라는 내용의 신 교수님 회신이 도착했습니다.
그 후로도 신부님의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15년 10월 신 교수님의 오른팔과 오른발이었던 지인께서 방광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로부터 2개월 뒤 신 교수님께서 병원에 다시 입원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신부님께 이 소식을 전해드리면서, 새로운 기도를 올려주십사 부탁드렸습니다. ‘신영복 교수님께서 부디 잘 돌아가실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저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신 교수님께 드릴 선물을 깊이 고민하다가 ‘커피’를 찾아냈고, 신부님의 영적인 이끌어주심 속에서 ‘성 아우구스티노’ 원두를 구해다 드렸습니다. 신 교수님께 문자로 여쭈었지만 회신이 없으셨어요. 그렇지만 아프신 분을 피곤하게 해드릴 수 없었기에, 자택으로 직접 배달해드렸어요. 저의 갑작스럽고 무례한 실례를 무척 통감함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인지라 사모님께서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한 뒤에 귀가하였습니다. 어쩌면 무척 힘드신 상황에 계신 신영복 교수님과 사모님, 그리고 서명원 신부님이 동시에 같은 커피를 드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저는 자꾸만 안도하게 됩니다.
서명원 천달 신부님의 영적 이끄심 덕분에 신영복 교수님께 성탄 선물로 드릴 수 있었던 커피.
서명원 신부님께서는 새해 1월 5일부터 한국과 유럽의 가톨릭 신자 20여 명을 이끌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요르단 순례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른바 약속의 땅 순례입니다. 1월 8일 금요일에 저는 서명원 신부님께 문자 한 통을 받았습니다. 순례지에서의 기도가 그날 아침부터 잘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서명원 베르나르도 신부가 중동에서 좋은 에너지를 보내드리고 계신다는 문자를 사모님께 드렸고, 사모님께서 감사하다는 문자 회신을 주셨기에, 또한 신부님께 전해드렸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저는 신 교수님의 부고를 접했습니다. 부고 기사에 따르면 신 교수님께서는 약이 말을 듣지 않자, 1월 5일부터 곡기를 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신 교수님의 부고를 전해 들으신 서 신부님께서는 하루 뒤인 16일에 이런 문자를 주셨습니다.
“신영복 님이 돌아가셨네요!!!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돌아가신 영혼을 위로하는) 미사를 세 번 바칠게요.”
서명원 신부님께서는 16일에 첫 연미사를 봉헌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돌아가셨다’는 희소식을 접했지만, 아직은 웃는 마음이 못 됩니다.
아까 거의 1년 반 만에 신영복 교수님의 폰으로 전화를 드려보았습니다. 전원이 꺼진 상태라고 하네요. 마지막까지 삶의 역경과 여정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체험하신 저의 스승 중 한 분이신 신영복 님께 진정 어린 축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늘 반갑게 맞아주셨던 분, 어디를 가더라도 빈손인 법이 없으셨던 분, 매사에 정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으셨던 분, 천민적 자본의 삶에 종속되지 않고 주도적으로 사셨던 분, 어머니처럼 섬세하고 자상하셨던 분! 쾌차되시면 꼭 안아드리려고 했는데……, 중국어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대해서 듣고 싶어하시는 말씀을 보고드릴 날이 올 줄 알았는데…… 이제 이승에서는 못 하겠네요. 그리고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신 교수님의 뜻을 더 깊이깊이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 신영복 교수가 서여 민여규 선생의 <예루살렘 입성기>를 읽던 중 발견한 글귀.
감사와 신뢰와 존경과 사랑으로
2016년 1월 17일
김선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