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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유감(靑算有感)
지껄임에대한욕망을아시나요?
1
이열치열(以熱致熱)이라는 말마따나 난 지금 소금구이 일인분, 생맥 한 조끼를 주문해놓고 <길목바비큐>에 앉아 있습니다. 대학문턱을 빠져나온 지난 이태 남짓, 한 달에 두서너 번은 발길이 머무는 곳인데요. 그 제목이 풍기는 뉘앙스가 어째 늘쩡대기 좋아하는 저의 발걸음을 닮았습니다 그려.
'길-목'이라! 입구에 드리운 주렴을 팔로 걷어부치고 나가면 곧바로
6차선 경인(京仁)국도가 뱀장어처럼 뻗어있고, 그 몸통을 횡단보도가
수직으로 절단하고 있습니다. 통닭집을 바지 호주머니인양 꿰찬 골목으로는 사타구니께를 더듬으며 여관이니 여인숙등속이 울멍줄멍하구요.
그래 그런지 길목을 서성이는 사람들중에는 인근 청사초롱이나 무랑루즈, 프랑스 까바레에서 미처 거친 호흡을 잡도리못한, 일테면 금지된 과일의 향내에 혹한 유한마담이나 한량들이 곧잘 눈에 뜨인답니다.
마침 구석배기 탁자에도 한 쌍이 탁월한 견본인양 저의 눈길에 포착되는군요.
"어이 경험이 많으신가봐. 즥여주던데---"
청바지에 하양 셔츠를 걸친 앙바틈한 체구의 사내가 옆자리의 쑤세미처럼 퍼머를 한 여자의 어깨에 팔을 얹습니다.
'부끄럽사와요. 이 손 치우시와요.' 남세스럽다는 듯, 여자는 '앙이'하며 어깨를 까불려 사내의 팔을 털어내고요. '어쿠'하는 담배꽁초만한
비명을 뱉아내면서, 사내는 무릎 위에 걸쳤던 한쪽 다리가 풀리면서
옳커니! 여자 품에 앵깁니다 그려.
"손님. 오늘도 혼자 오셨네요. 맜있게 드세요."
메추리만한 낯익은 아가씨가 주문한 것들을 탁자 위에 부려놓으며
피-ㅇ허니 돌아서는데 칠칠한 머리칼이 그네의 꽁지까지 걸려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당돌한 아가씨가 말입니다. 대개 시집이나 얘기책 나부랭이를 뒤적이며 앉았는 나를 보고는 '손님은 책이 애인이라도 되시나봐. 무슨 책을 항상 그리 보고 계셔요.'라며 귀여운 부리를 튕겨 온 적이 있답니다. 대답대신 난 두툼한 책을 덮어 돈키호테(속)이란 글자가
백힌 겉딱지를 내보였지요. 그랬더니만 메추리양은 '아- 동끼호때 거
무진장 재밌대면서요. 내 친구는 밤을 꼬박 새워 오권까지 몽땅 읽었다던데'하고는 모이라도 물어가듯 카운터로 운반해서는 한 손에 쥔 옥수수를 야물딱지게 물어뜯으며 책갈피를 헤집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별일이구먼. 세르반테스 영감은 속권까지 동키를 둘 만든 걸로 아는데.'하고 난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며칠 후에 산책이라도 할 양으로 제 발걸음은 동네 책방을
알짱거리는데요. 베스트셀러코너에 <서울 동끼호때>라는 난삽한 표지의 휴지가 두루마리로 쌓여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잉!' 그제야
전 물그림자같은 잔잔한 미소를 입시울에 담그며 뉘였던 고개를 바로잡았던 것이랍니다.
하얀 타원형의 접시에는 절편만한 구이 여섯 점이 낮은 포복으로 포진해 있습니다. 그 중에 소대장격인 각선미를 슬쩍 걷어부치고 뼈를 드러낸 길쭘한 닭다리 한개가 별쭝한데요. 아따 나는 포크를 바로 총!하여 세워 놓고는, 장딴지에 일순 힘을 주어 쿠욱 찔러 넣습니다. 처음에 만만찮은 팽팽한 긴장감이 손옆구리를 압박하는가 싶더니 이내 흙벽이 뚫리는 듯한 푸석푸석한 느낌이 손목을 끌어 당기겠죠. 그리곤 은밀한 승리감에 젖은 난 전리품을 꿴 포크를 쓰윽 허공으로 한바퀴 휘돌리고는 살점이 엉겨붙은 부위를 입안에 쑤셔넣는 것입니다
. 위 어금니와 아래 어금니가 한바탕 맞물릴때마다 한 섬의 말을 지껄여대는 쾌감으로. 위뜨같은 물렁뼈도 아그작아작 으스려뜨려 재잘대고. 접시 한켠으로는 살점을 뜯긴 뼈쪼가리들이 버려집니다.
쭈우우-욱.
맥주를 한입 걸게 들이키고는 난 팔팔연기를 푸우- 뿜어내는 것입니다요.
2
어제그제 이틀 간은 대전을 다녀오게 되었더랍니다. <WELCOME
대전>을 통과하여 시내로 들어가다 보니 <EXPO D-14>라고 쓰인
팻말이 로봇처럼 뚱하게 서 있대요.
대덕연구단지내(內) 원자력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는 친구 집들이 겸, 서울에서는 은행에 근무하는 친구와 그의 아내 그리고 나까지
서이 내려갔고, 울산에서 트럭 운송업을 하고 있는 또 한 친구가 르망을 끌고 올라 왔습니다. 대전 친구와 은행원 친구는 두해전 결혼들을
했고 르망은 여직 법적 총각상태인고로, 여자가 여자로 보이는 날 결혼을 하겠답니다.
"그럼 르망은 여자가 대체 뭘로 보이는 거야?"
제가 돗수 높은 안경을 코허리 위로 밀어 올리며 물었겠지요.
"뭐랄까? 마네낑! 은제부턴가 쇼윈도 안에 멀거니 서 있던 반지르한
밀납인형들이 온통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기라." 라며 르망이 뾰죽한
턱을 당기며 거나하게 웃는 것이었습니다.
연구소 친구는 로얄층이라나 8층에 까무룩한 갑천(甲川) 밤풍경이
베란다를 통해 내려다보이는 32평 아파트에 살고있었는데요. 한 평에 300이라는 파격적인 저렴가에 직장에서 4천 융자받아 작년 말에
입주했다는 것인데 연구소 직원을 위한 특혜랍디다.
"냉장고는 크면 클수록 좋은데-------."
은행원 친구의 아내가 550L 대형 냉장고를 껴안으며 중얼댑니다.
"우리한테도 딱지가 하루 빨리 걸려들어야 할텐데. 일순위인데도 일백대 일이니 원."
은행원 친구는 하염없이 찌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대꾸를 하구요.
스르르륵-거실 천장에는-스륵-두쌍의 날개를 단 소형 프로펠라가-스르르륵-한갓지게 돌고 있었습니다-스륵스르르--ㄱ-----.
난 은행원 내외의 가난한 대화보다는 케니 지(KENNY G)의 영혼을
마사지하는 듯한 섹스폰 선율에 나른한 포만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연구소 내외는 6개월 된 사내아이까지 있었는데요. 발목을 찾느라
한참 숨바꼭질을 했답니다. 15킬로나 되는 그야말로 슈퍼우량아인데
발목이 가뭇없고 두 줄의 깊이 패인 주름만이 발과 정갱이의 경계를
확인시켜 주고 있었으니까요.
'모유를 먹여 이렇다구. 아가들은 차차 자라며 살이 빠지는 거라구.'라며 우량아 아빠가 저의 괜한 속걱정을 덜어줍디다.
"결혼 안하세요? R씨."
이번엔 기저귀를 갈아채우던 우량아 엄마가 저를 향하여 고난도의
질문을 던집니다. 어찌나 되알지게 던지는지 그네의 불룩한 밀크공장이 달캉이네요.
"결혼이요. 아직 애들 기분인걸요. 뭐- 어른이 되면 할래요."
"아이 R씨. 어른이 되야 결혼을 하시는게 아니고요. 결혼을 하시면
그때 어른이 되는 거예요. 우리 조상님네들도 상투만 올리면 나이에
상관없이 어른 대접 해 줬잖아요."라며 양손가락을 잼잼 우량아 앞에서 한창 재롱을 떨고있는 남편을 가리키는데요.
"이이 좀 보세요. 저럴 땐 어쩜 똑 트윈이라니까요. 호호호. 그러니까 이인, 아이같은 어른인 셈이에요." 하더니 한차례 침을 꼴깍이고는, "그래도 어른은 어른이잖아요."합니다.
'결혼만 하면 어른이 되는 거예요.'라는 그녀의 말에 저는 왠지 머쓱하여 애꿎은 눈만 끔뻑거렸습니다 그려.
예년같으면 장판지에 코를 박고는 퀴퀴한 곰팡내나 킁킁거리며 방바닥에 엎어져 지내는 장마철인데 이튿날인 일요일에도 하늘은 눈알이 시릴 정도로 쾌청하였습니다. 비단같은 바람의 품에 안긴 건물들은 열아홉 새색시인양 생기를 발하고. 이상저온 현상이라지요. 해면의 수온이 저하되어 대기순환에 탈이 생겨 비롯된.
어느 농부의 과수밭에선 채 여물지도 않은 과실들이 후드드드득, 슬픈 음정으로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합니다.
늦은 아침을 챙기고 일행은 정오가 다 되어 대덕단지내 충남대,과기대 등을 두루 드라이브하고는 원자력연구소내에 급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찌이이잉------ 양철판을 찢는 듯한 매미들의 떼울음소리에 이끌려
일행은 연구소를 병풍처럼 에두른 오솔길을 걷게 되었는데요. 나는
머지않아 신선한 공기도 돈 팔어 공기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호흡할
날이 오리라는 생뚱맞은 생각끝에, 사재기라도 하는 양 공기를 배불리 먹어 두었겠지요. 풀섶으로는 밝은 황금빛 모자를 눌러 쓴 금불초며 백색 바탕으로 보라빛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벌개미취,
한 켠의 습지에는 입술을 불퉁스레 다문 달맞이꽃들이 월낭군(月郎君)을 고대하며 오만한 태양에 수절을 지켜내느라 기진맥진한 행색이
안돼 보였습니다.
애기메꽃-기린초-짚신나물-노루오줌------나는 정감어린 들꽃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내빼다가는 가물가물------ 연록의 떡갈나무 아래 무릎
사이에 머리를 심고 물끄러미 흙바닥을 들여다보고 있는 기억 저편의
한 아일 맞딱드리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초여름일겝니다. 학교에 오갈려면 가풀막진 동산을
넘나다녀야 했는데 그 날은 학교가 파해 밤송이같은 땡볕을 피해 떡갈나무 그늘에 묻혀 혼자 중간 다리쉼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산이 그리 높은편은 아닌데 경사가 원체 가팔러 우리 조무래기들은 눈덮인
겨울날에는 솔나무가지를 부러뜨려 썰매인양 깔고 앉아 책보는 휘익,저 아래로 귀양보낸 채 신나게 미끄럼을 타며 내려오곤 했지요.
꼬마는 개미굴 앞의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개미굴은 한쪽이 송곳으로 후빈 듯 구멍이 나 있었고, 미세한 체로 거른 듯한 보드라운 흙이 봉긋한 젖무덤을 만들어 놓았어요. 굴 사위로는 구데타를 방불하는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답니다.
어느 개구장이가 급식 빵을 뜯어 먹다가는 예저에 떡고물마냥 흘린
모양입디다. 설탕 고물덩이엔 조개탄처럼 새까맣게 개미떼들이 들러붙었죠.
저의 눈길이 유심히 머문 곳은 개미 한 마리가 제 몸피의 서너 배는
될성부른 빵부스러기를 앞발로 끌며 이빨로 당기며 고군분투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아뿔싸, 잘록한 허리 중동이 동강이 나면 어쩌나 싶게
개미는 꿉실대고 있었죠. 그때 또 한 마리의 개미가 그 모양을 보고는
안됐다 싶었는지 비탈을 들입다 곤두박질치며 쫓아 내려가는 것이었어요. '형제애가 대단해. 식량을 항꾼 운반하려나?' 하지만, 저의 그러한 지레짐작은 착오였습니다.
그들은 동일한 모습을 띤 다른 족속이었나 봅니다. 이데올로기가 달랐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두 족속은 처음엔 먹이를 목표로 서로 용 쓰더니만 이내 빵조각은 제껴두고 들러붙어 육박전을 감행하는
것이었어요. 엎치락뒤치락 엉겨붙는 사이에 눈치, 코치, 발치도 없는
빵 부스러기는 살랑 바람에 날개를 얻어 달고는 어디론가 개미들의
시야를 영 벗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분노와 허탈감에 와락 스크린을 찢으며 미물들의 세계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 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난 굶주린 걸리버인양 엉겨붙은 한 쌍의 개미들을 앨써 엄지와 검지 심지어 중지까지 동원해 집어 올려선 떠억 벌리고 있던 아가리에 떨쳐넣었던 것입니다. 잉! 어째 벌레라도 씹은 표정이시네요? 그건 순전히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습니다요. 그게 뭐 양이나 차던가요.
"야아 게 퍼질러 앉아 뭐하노. 이 문딩이 자슥."
르망이 한껏 발돋음질을 한 발레리나의 유려한 자태를 흉내중인 참나리 곁, 자그마한 돌팍 위에 앉았는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볼일 보러 간단 녀석이---- 이건 또 뭐꼬? 강애지 풀은 와이 질겅이고 있노. 밀어내고 나니께 배고프데. 그나저나 우량아 땜에 드 몬올라
가게꼬, 그만 내려가 어데가 밥이나 묵자."
나는 유모차에 늘펀하게 누워있는 우량아의 발바닥에 강아지풀을
대고 간지럼을 태웠는데요. 우량아는 산낙지의 그것인양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거인처럼 데퉁스런 머리통을 주억거리데요.
그 모양을 보며 한때 인간들이 저런 우스꽝스런 시절을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전 조금 우울해졌습니다 그려.
일행은 산책을 마무려 허길 때울 요량으로 계룡사 입구 동학사로 핸들을 꺾었습니다. 이태 전에도 계곡물에 발등을 씻기우며 동동주에
더덕구이를 씹으면서 오붓한 한때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계곡으로 오르는 초입에는 시골 잔치집 안마당같은 부산함과 풍요로움 가운데 함지박에 삶은 고구마, 찐 옥수수, 군밤 등을 수미산(須彌山)처럼 쌓아놓고 있었는데요. 각다분한 삶의 오랜 경험 속에서 절로 밴 아주머니네들의 여유는 차라리 저를 칼끝같은 두려움으로 긴장시켜 오는 것이었습니다.
"저-치들은 뭐꼬?"
툭 불거진 말투에 정신을 바로잡으니, 남국풍 반바지차림의 이국인
청년 둘이 부숭숭한 털을 나부끼며 옥수수를 하모니카라도 연주하는
폼으로 언덕을 내려옵디다.
그 거들먹거리는 꼴이 흡사 울짱을 막 튀어나온 멧돼지 한 쌍을 닮았습니다.
"지들 나라에선 옥수수니 바나나는 돼지 사료로 쓴다카며----"
르망이 시동이 말썽난 오토바이처럼 투덜거리데요.
나는 르망의 불량 오토바이에 대하여, 저런 경우를 빗나간 증오심이라고 하는 걸까? 잠시 숙고해 보았습니다만, 대구 보궐선거 막판 유세장을 찜쪄 먹는 혼란 속에서 람보의 후예답게 거칠 것없는 그들의 행동거지가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계곡도 아니나다를까 국립공원인지 이건 유원지인지 ------ 엉덩짝 들이 밀 짬바귀도 없이 북적거렸으나, 일행은 요행이 자리를 얻어 비빔밥이랑 동동주를 주문했습니다. 고사리, 취나물, 콩나물서껀 어우러진 비빔밥은 입천장에 달착지근하게 들러붙었습니다. 허나 동동주는
모두들 시큰둥한 표정입데다. 운전수가 둘인데다 술버릇이 유난한 은행원 친구는 엊저녁도 제일 먼저 시동을 걸더니 이내 엔진과열로 와이프까지 쫓아 들어간 화장실 문틈새로는 모가지가 비틀린 애처로운
닭울음소리를 뽑아냈던 것이지요. 그리곤 마누라 손에 매달려 한쪽
방으로 끌려 들어갔던 것이에요.
은행원 친구는 여태 속이 거북하다며 예편네 무릎팍을 베고 누워 말간 하늘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마들아, 시상에서 질로 행복한 사내의 기분은 바로 이런 것이느니라' 하고 자랑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동동주는 오롯이 제 차지가 되었습니다. 근데 무심코 사위를 둘러보니 계곡물을 사이에 둔 양편으로는 자갈돌 위에 돗자리를 깔아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요. 엉덩이가 배겨 무척 불편하였습니다. 시간은 돈이거들랑요. 빨랑 드시고 얼른 딴 데 볼일 보라는 분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손님은 여전히 왕인걸 어떡하겠습니까? 장사치들의
얄팍한 상술도 외면한 채 대개의 돗자리패들은 화투짝을 쪼고 뒤집고
내리 조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21세기는 말야-----첨단 과학기술문명에 힘입어 총알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면, 태평양 선상에서 앞에다 무턱대고 방아쇠를 당기면 말이야--- 몇 초 후엔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날아온 제 총알에 뒤통수를 맞아 자살하는 신종 도박이 대유행할거란 말씀이야."
연구소친구는 공학도답게 자기부상열차 원리에 대한 소견을 읊조리더니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사람들을 어리뻥하게 만들어 놓았답니다.
그는 여세를 몰아 얼마전 안면도 핵 폐기물 처리시설 무효건은 땅임자와 언론이 짜궁해 과잉여론을 부추긴 터무니없는 과장된 언론보도의 무책임이라느니 은행원친구는 돈세탁, 금융 실명제, D은행 대리
부도사건, 르망은 현대 자동차 사태의 막판 정부의 개입으로 인한 극적인 타결은 한갖 정부를 겨낭한 현대의 파워 과시라느니 제 직업은
개도 못 주겠다는 듯 저마다 짖어댑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꼬치 삼아 거푸 술잔만 빨았습니다. 졸업한 이후로 <타인은 지옥이다>정도는 아니지만 간혹 친구, 선배를 만나면 학창시절의 생활의 때묻잖은 순수한 분위기의 대화는 묵살당하고 결혼,연봉,아파트 딱지 하는 서너개의 단일 품목으로 수렴되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난 시들시들 지껄임에 대한 신명을 잃어가고----- 그 욕구만 요술램프의 거인처럼 제 몸안에 갇혀있는 것이예요.
"학원 일은 잘 되나, 어떻노?"
멍하니 술잔만 빨고있는 내가 안돼 보였는지 르망이 허벅지를 팍 갈깁니다. 난 그 통에 마악 입술로 운반하던 술잔을 엎어 내용물이 튀는
바람에 엉덩이를 달싹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마침 자리밑 자갈돌이 잘사코니 엉덩이에 배겨 들어옵디다. 잊혀서 서운했다는 듯이 말이예요.
"막말로---- 남의 돈 뺏어 먹는 주제에, 하루 품 팔어 하루 끼니 때우는 거지. 한두해 강사생활 하다보니 신명도 떨어지고----적성이--- 문제인 것 같기도 하구."
나는 기필코 제 몸통만한 한숨을 끄집어 내고야 말았지요.
"에이 문딩이 자슥아, 세상에 머꼬 살자고 해는 일이 웬 지랄맞을 적성은 적성 타령이노. 내사 도둑질이나 할래면 모를까. 도둑질이야 말로 적성이 안 맞으면 못하는기라."
르망의 투아웃 만루 홈런 역전타였습니다그려.
3
적성이란 상관을 엄마 탯줄로부터 제 배꼽아 묶어 모시고 나오는
것도 아닐테고 르망 말마따나 먹고 살자니 똥장군도 지고,남의 때도
밀고,구두도 닦는게 아니겠습니까? 그제야 뒷북 두드리며 기름기 피둥한 적성이란 단어란 놈도 필시 국어사전에 한몫 낑긴 것이겠지요.
그런 제대로 된 생각을 뒤미처나마 하며 나는 막 손가락사이로 기어
들어가는 연기가 설설 붙은 꽁초를 끄집어 내어 노란 플라스틱 재떨이에 잉그려 껐습니다. 재떨이는 화상입은 안면처럼 군데군데 물집이
잡히고 검게 타들어간 흉물이에요.
재떨이는 온 몸으로 재떨이군,하는 객적은 생각마저 듭디다.
"예 담배 없죠."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실없는 상념을 털어내느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다 드릴께요. 팔팔이시죠?"
메추리 양이 포르르 양 날개를 펴려는 것을,
"아니 제가 사오죠."하고는 나도 따라 일어섰던 것이예요.
물을 좀 빼야할 것 같았는데 화장실이 옆건물 노래방 이층으로 오르는 중간에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차분히 어둠이 깔린 바깥세상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엊저녁 서울로 올라 오면서부터 방울방울 뿌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오늘 한낮을 질금거리더니 그예 퍼부울 심사인가 봅니다. 도로위엔 헤드라이트를 무기처럼 켜 든 자동차 행렬이 빗물에 반죽된 질척한 어둠을 제 세상 만난 펑크족처럼 날뛰고 있었습니다.
뒤샹의 변기에다 물을 빼고 있자니 벌렁 화장실 문 제끼는 소리가 나데요. 고갤 왼 방향으로 틀었지요. 양손으로 바지춤을 추스리며 하양
셔츠의 사내가 나오더니 가슴을 부풀려 고개를 턱 세우고는 큼큼거리며 이층 노래방으로 기어 오릅디다. '쯧쯧, 고래(古來)로 가무(歌舞)를
즐기는 민족의 후예답군' 전 야릇한 질투에 혀를 끌끌 찰 밖에요.
팔팔을 탁자위에 휘-ㄱ 던져놓고, 냉큼 안경을 벗어 냅킨으로 물기를
걷어내었지요. 그리고 거품이 잦아든 금방 뒤샹의 변기에서 뽑아낸
것같은 뉘리끼리한 액체를 허겁지겁 들이켰습니다.
끄으으으으-ㄱ. 탁.
"메추리 양. 여기 한잔 더."
4
유성 터미날 매표구 창문에는 <전화예매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받지 않고 있으니 손님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전화가 불통인 연유를 알겠지요. 6시 반인데 7시 차도 매진인고로
7시 30분 표를 끊었습니다. 울산에서 올라온 르망이랑 연구소 친구
내외 우량아를 돌려 보내고 서울일행은 대합실 의자에 기대어 알로에
껌을 잘근이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겠지요.
"저어 혹시 서울행 예매 부탁하신 분들 아닌지 모르겠네."
대추씨만한 눈을 깜작이며 한 아줌씨가 한 손을 움켜쥔 채 고개를 빼어 묻더군요. 장딴지까지 말아올린 바지밑 맨발에는 곤색 슬리퍼가
꿰어 있구요.
"연구소에 계신다는 양반이 예매부탁해설랑 전화 오기만 똥줄이 타도록 기대리고 있구만---도착했으면 전화를 넣던가 해야지 원--남은 생돈 들여----"
아줌만 차표 쥔 손을 나머지 손바닥으로 안달안달 치며 괘씸허단 표정이더만 이내 휴-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우리들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죄송해 어떡하죠."
붕어입모양 입을 뻐끔히 벌리고 있던 은행원 친구가 그녀의 말을 받더니,
"이 쪽으로 오시죠. 제가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양손까지 시늉하며 아줌마를 매표소로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실은 연구소친구는 터미날로 몇번인가 전화를 했는데도 불통인고로
우연 본 적이 있다는 터미날 옆에 자리한 카센터에 전화안내 서비스까지 이용해 예매부탁을 해 놓았던 것인데, 확인 결과 예매된 표가 없길래 무심히 넘겼던 것이었습니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환불을 마치고 돌아오고 나서야 전 아주머니한테 허리를 잭나이프처럼 접어 고마움을 표했던 것인데, 생면부지인 그녀의 아낌없는 수고에 전 정말 가슴이 찡했던 것입니다.
"내참. 그 연구소에 계신다는 양반 전화번호 좀 일러줘요."
저만치 열보남짓 아줌마를 끌고가던 슬리퍼가 휘딱 주인을 돌이켜
세우더니만 도로 끌고 오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 순간 주인을 돌려 세운 슬리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요. 그네가 다음처럼 명쾌한 주석을 덧붙이기 전까지는 말이예요.
"저희 단골이라시는데 사정도 모르고 발을 끊으면 어떡해요. 혹 엉뚱한 소문이라도 나면 -----연구소 손님이 어디 한둘인가! 지금쯤 댁에 들어갔나 모르겠네."
"저 아줌마 고객관리 하나 쌈빡하네."
은행원 친구의 샤워를 막 긑낸 개운한 말투였습니다.
하지만 전 아줌마의 수고는 단지 무사(無私)한 것으로만 받아들였던
터라 그때 저의 참담한 기분을 친구는 상상이나 했을런지요.
세상은 적당히 감동하고 적당히 슬퍼해야지요. 자칫 도를 넘었다간
제 슬픔만 커질테니까요. 이런게 다 나이가 들며 타성화 되어가는 이른바 사회생활의 미덕인 셈은 아닐까요?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이행하는 첫 과정이다. 어른이란 배반당한 청소년의 모습이다.(다자이
오사무의 '쓰가루' 중에서)
사회생활이라는 어른 중심의 돈 놓고 돈 따먹는 돈세상에서 뭐니뭐니해도 머니는 믿을 망정 사람은 못믿는 세태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닐겝니다. 심지어 돈이 없었던 저 야만의 시절에도 인간들끼리의 여하한 갈등은 존재했을테니까요? 혹자는 '人'이라는 글자를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모양새라고 말합니다만 제겐 사람과 사람이 이마를 맞대고 뻗대고 있는 형상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듭니다. 인간들의 본원적인 투쟁을 가리키는 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여하튼 전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인정하기가 무척 괴롭습니다. 그 말은 자기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말도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른이란 배반당한 청년의 모습이다'라는 것도 어른이 된 자로서의 자기 합리화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어른 중심의 사회가 청년의 순수한 욕망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은 우리들 스스로를 배반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버스안에서 R은 눈을 감은채 마치 우주의 미아가 된 심정으로 근 서른 해의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았다. 존재근거(raison d'etre)를 위한 참회라고나 할까? 사실 R의 삶은 한마디로
재래식 화장실의 엉거주춤식 포즈였던 것이다. 항시 커다란 의문부호로만 찍혀오는 사랑, 생활의지의 빈곤, 문학에의 아둔한 열정-------.
R이 눈꺼풀을 걷어올리고 창밖을 바라보니 XX휴게소를 지나치고
있었고, 비가 내리는지 두 손을 머리에 인채 종종 걸음치는 사람들의
검은 실루엣이 오락가락하였다.
5
"손님, 다음 번에 오실땐 친구분이랑 함께 오세요."
메추리 양이 R에게 잔돈을 주며 함께 건넨 말이었다.
그네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길목을 빠져나오는 그의 발걸음은 추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R은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차마 안녕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하듯 앞으론 영원히 길목을 서성거리지 않을 것이며, 그래 다시는 메추리 양을 보지 못하리란
야박한 말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듀 메추리 양. 행복하세요.'라고 R은 마음속으로나마 그녀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어둠을 뚫고 빽빽한 빗줄기가 아스팔트위로 장죽을 친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다 뒤통수를 긁적이며 R이 돌아보니 골목이 둘로 갈라지는 예의 사타구니께에 박힌 XX여관 입구에서 하양셔츠 사내가 발을 탁탁 구르며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고, 두어발짝 못미처 퍼머머리가 손수건을 머리에 얹은 채 따라 들어가고 있었다.
'남편께선 화와이 연수라도 가신 모양이군. 저들은 죄의식을 동반한
쾌락이야말로 진정한 쾌락이라고 믿는 걸까?'
R은 심리학 논문감이라도 되는 양 쾌락과 죄의식의 함수관계에 대해 자못 진지하게 고구하고 있었다.
빗줄기는 점차 장죽을 휩쓸며 통으로 들이 붓듯 쏟아지고 있었다.R은 강을 통째로 껴안고 꾸역꾸역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전신은 해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고, 의식은 발걸음이 꿈꾸는 곳을 향하여 육체의
한 끄트머리에 겨우 붙어있었다. 이럴때 의식은 한없이 초라해져 발가락에 생긴 물사마귀와 같은 거추장스러운 느낌도 드는 것이다. 마침내 대지를 딛고 있는 발걸음만이 몸뚱아리와 의식을 이끄는 유일한
나침반이 되었다. 고도의 난시성 근시인 R의 맨눈에는 물에 잠긴 도시의 휘황한 밤풍경이 춤을 추고, 주황,초록,노랑,백색 광선이 허공에
거미줄을 치며 잠시 떠올랐다간 사라져버리곤 하였다.
R의 지친 영혼은 바다를 부르고 있었다.
바 - 다
그
리
고
J
R은 언젠가 J가 뜬금없이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해서 밤 열차를 타고
화진포 앞바다엘 갔었다. 그들 앞에는 거대한 현처럼 팽팽한 수평선이 금시라도 쩡하고 끊어질 것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때 J가 한 말이
R의 혼미한 의식 속에서 웅웅거리며 울려퍼졌다.
'형. 형은 바다를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 해? 남들은 바다 앞에 서면 편하다느니 해방감을 느낀다던데----난--- 바다를 보고 있으면 우선
따분해. 한량없이 밀고 당기는 파도의 시소게임을 보고 있노라면 거대한 바다의 권태란 느낌이 들어. 천고의 세월을 늙어 온 바다 물결의
미세한 주름. 바다 자체가 거대한 주름진 이마와도 같아. 이런 생각을 하다가는 -----곧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바다의 엄청난 권태에 비하면 내가 때때로 느끼는 권태란 얼마나 사소한 것일까? 그래서 또
살고 싶은 거야.'
그 말을 듣고 R은 '권태의 패러독스이군' 했던 것인데 마침 J와의 눈길이 평행선을 달리고 J의 유난히 빛을 발하는 눈망울 속에 잠겨있는
만삭의 배처럼 얼굴이 부른 그로테스크하지만서도 여전히 귀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R은 자신의 꿈꾸는 듯한 때론
방황하는 듯한 모호한 눈동자 속에는 J의 깜직한 모습이 들어있겠지
하는 마음에 가슴이 포근해 오는 것이었다.
R이 J를 마지막으로 본 지도 육백 삼십 팔일 째. 졸업한 이후로 그
해 겨울에 H대 입구 한 카페에서 잠깐 만났을 뿐이었다. R은 그때 유자빛 스탠드 불빛아래 스웨터를 걷어올린 J의 팔뚝에 묻어있는 야드르르한 잔 솜털이 기억난다. 저무는 햇살 속에 들판에서 휘날리고 있는 은빛 억새의 애잔한 그리움이 R에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었다.
가끔 혼자 술을 마시면 R은 J에게 전화를 건다. R이 주로 지껄이는
편인데 다 듣고 난 J는 '형.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요. 예?' 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R이 J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더 고독하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고독을 대상을 통해 실체로서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 번은 웅웅거리는 전화통 속에서 무슨 말끝에 '형 한 20년 있다,
종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요.'하는 말을 듣고는 R은 북어대가리로
명치를 갈기는 듯한 아픔에 '아 심근경색증이 이런 것인가부다'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R은 난파된 몸을 이끌고 기어이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자그마한 무인도였는데 주변엔 해안선을 따라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있었다. R은 그 곳을 <그린 섬>이라 명명하였다. 우체국 앞에 전화기가 달랑 한 대만 설비된 녹색 부스를 언젠가부터 R은
그렇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R은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J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쪽을 안경으로 눌러놓고는 왼 손 검지로 일곱 개의 숫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번호판을 누른다. 그 모습은 마치 베토벤이 한 음과 한 음의
여백 사이에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쏟아 넣는 신중함을 연상시켰다. R은 '비창' 소나타를 들으며 처음 두 음의 사이가 그렇게 장중하고
깊은 것인 줄 몰랐으며 세상이 온통 그 여백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쿠우르ㄹㅇ--- 콰ㅇ----
수만 대의 빈 드럼통을 언덕 아래로 굴리는 듯한 천둥소리에 신호가
떨어졌는지 확인도 않고 R은 조난신호라도 발하듯이 '나,R 그린섬!'
구조의 외침을 던져 놓고 수화기를 귀에다 바짝대고 있었다.
R의 목소리는 물에 불어 다소 흥분해 있었다.
번 쩌어그르르-----쫘아아-----ㄱ
"형 거기도 비 많이 와."
쿠우르르------ㅇ---콰아----ㅇ
"J랑 함께 살고 싶어"
R의 음성은 한 옥타브 더 고조돼 있었다.
"---------------"
"J가 한순간이라도 더 늙기 전에-----"
"?!?!?!?????"
"-----------"
"혀엉. 맨날 무슨 엉뚱한 소리예요. 이제 그만 집에 들어가요. 예!"
딸-칵.
콰아 ㅇ--쿠우르르르ㅇ.
타작이라도 하는 양 천둥번개의 도리깨가 허공을 어지럽게 난무하였다. 행여나 질투심 많은 제우스가 R과 J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는 줄도 모를 일이었다.
도로 위엔 자동차 불빛들이 흐느끼듯 끈적끈적 떠다니고----- 플라타스너스 잎새들은 일제히 어깨를 들먹이며 슬픔에 겨워 후두둑후두둑
몸서리치고 있었다. R은 감전된 순간처럼 송수화기를 입과 귀에 가만 댄 채 심장은 새까맣게 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전화통 속의 썰렁함은 서서히 밀어 닥쳐 마침내 R의 가슴속에서 가파른 여울을 이룬다.
삐이-삐이.
R이 송수화기를 제 자리에 걸어 놓으니 전화카드가 툴툴거리며 면목 없다는 듯이 기어 나온다. 입술 한 귀퉁이를 깨물며 R는 카드를
전화통 속으로 도로 밀어 넣고는, 안경을 움켜쥐더니 벌컥 전화 박스문을 꺾어 제끼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번쩌그르르----- 하늘은 만면에 조소를 품고 필라멘트처럼 깔깔깔 비아냥거리는데, R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 허공을 향해 몸을 솟구쳤다. 마치 제우스의 얄미운 턱이라도 보았다는
듯이.
쿠우르르ㅇ-----콰아ㅇ-콰------ㅇ..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