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서러운 우정
오전 강의가 끝나자 유일민은 동급생들을 피할 겸해 변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점심시간
을 혼자 보내는 것은 이제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으레 점심을 굶는 처지에 그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그러나 동생은 자신이 점심을 굶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늘 동생의 등교
시간이 자신보다 빠르니까 눈속임이 쉬웠다.
"세 끄니 밥이 보약이다. 께을름 피우지 말고 한 때도 걸르면 안 된다. 알겄지야?"
쌀 이는 것, 밥 안치는 것, 국 끓이는 것, 김치 담그는 것 등을 자신과 동생에게 가르쳐주
며 어머니가 몇 번이고 다짐한 말이었다. 그러나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사야 했고, 헌책이라
해도 대학교재 관계는 어쩐 일로 보통 책보다 갑절이 비쌌다. 그렇지만 적십자병원에 피를
팔아 연명해야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점심 굶는 배고픔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굶
는 것이 익숙해지다보니 배고픔을 견디는 것도 차츰 수월해져 갔다.
유일민은 변소를 거쳐 뒷마당을 느릿하게 거닐었다. 나무마다 신록의 푸르름이 싱그럽게
넘쳐나고 있었다. 그 푸르름에 햇살이 부서지는 눈부심을 바라보며 그는, 벌써 여름이 오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꽃을 본 기억이 없는데 꽃피는 계절은 어느새 지나가고 말았
다. 참으로 허둥지둥 살아온 나날이었다.
유일민은 저만치 피어난 눈익은 꽃들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 예쁠 것도 없고 볼품도
없는 꽃들은 토끼풀꽃이었다. 그 꽃들은 뒤늦게 나도 꽃이에요 하는 것처럼 가늘고 긴 꽃대
를 꼿꼿이 세운 끝끝마다 피어나 있었다. 어린 날 계집아이들이 꽃반지 꽃시계를 만들던 꽃
이었다.
유일민은 잔디밭 여기저기에 무리 지어 피어난 토끼풀꽃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꽃들보
다 더 싱싱하게 활력이 넘치는 게 짙푸른 잎사귀들이었다. 그런데 그 무성한 이파리들 사이
에서는 잔디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인간들만이 생존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동물들의 세계에서는 물론이고 식물들의 세계
에서도 생존경쟁은 치열하게 전개된다. 그런데 그 경쟁은 동족과 동종 간에, 타족과 타종 간
에 동시에 벌어진다. 여러분은 동물들의 세계는 모르지만 식물들의 세계에서 무슨 생존경쟁
이냐고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고 뱀이 개구리를 잡아 먹는 것처
럼 쉽게 표가 나지 않고, 사람들이 무관심하기 때문에 잘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활엽수 속
에서 침엽수는 햇빛을 못 받아 결국 고사하고, 속성수 속에서 보통 나무들도 그늘에 치여
다 죽고 만다. 식물들은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치열하게 동족을 번
식시키며 집단과 무리를 이룬다. 이러한 모든 현상을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고 한다."
새삼스럽게 생물선생의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정말 토끼풀의 무리는 군데군데 번성해 가
며 잔디밭을 점령해 나아가고 있었다. 유일민은 토끼풀들의 싱싱한 기세를 물끄러미 바라보
며 가슴 한편에서 서늘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그 살벌하기 이
를 데 없는 말 앞에서 자신은 얼마나 굳세고 강인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점심을 굶는
것도 그 무기를 튼튼하게 장만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잎 넓은 참나무들 속에 서 있
는 한 그루 소나무이거나,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황야에 내던져진 한 마리 토끼가 아닐까 하
는 불안하고 불길한 예감이 또 떠오르고 있었다.
유일민은 그런 생각을 떼치듯 수도 쪽으로 빨리 걸었다. 배가 부르도록 물을 마시고 앞마
당으로 나갔다. 넓지 않은 교정의 벤치는 거의 비어 있었다. 그는 신문이 놓인 벤치가 없나
하고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궁핍한 사회환경 속에서 학생들은 신문을 서로 돌려보는 지혜
를 발휘하고 있었다. 한곳에 누가 두고 간 신문이 놓여 있었다.
유일민은 신문을 펼쳐 들었다.
"유 형, 여기 있었군 그래. 한참 찾아다녔는데."
3학년 홍정배였다.
"아 예에......, 여기 앉으시죠."
유일민은 벌떡 일어나며 선배에게 자리를 권했다.
"점심은 먹었어?"
"예, 먹었습니다."
"자아, 담배 피우지."
홍정배가 담뱃갑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담배 못 피웁니다."
"아직까지도 담배를 안 배웠어? 거 문리대생들의 전매특허 있잖아. 담배, 술, 커피는 대
학 낭만의 3대 기본조건이다 하는 거. 괜히 말쟁이들이 지어낸 말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그
럴듯하기도 하거든 그게 성년과 미성년을 구분 짓는 자연스러운 기본조건인 것은 분명하니
까."
좀 보고 배우라는 듯 홍정배는 담배를 맛있게 빨아댔다.
유일민은 그저 엷게 웃고만 있었다. 홍정배의 옆에 놓인 담배는 필터가 달리지 않은 대중
용인 진달래였다. 그게 한 갑에 100환이었다. 그건 어림잡아 쌀 한 되 값이었다. 쌀 한되면
1주일 치의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담배와 함께 술도 커피도 자신과는 멀리 있는 물
건들이었다. 몸이 너무 피곤하고 속상할 때 담배보다 술은 한잔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게 될 일이 아니었다. 술은, 빠져서는 안 되는 신입생들 모임에서 취하도록 마셔본 것이 전
부였다. 그리고 커피는 남들에게 서너 차례 얻어 마신 것뿐이었다.
"저어, 그 문제는 결정했어?"
홍정배가 선하게 생긴 얼굴에 웃음을 담으며 마침내 용건을 꺼냈다.
"예에......, 저는 여러 가지 형편상 그 활동을 하기가 어렵겠습니다. 공부에 도움도 되
고, 선배님들도 사귀고, 마음은 있습니다만 여건이 여의치 못해서......, 죄송하지만 선배님
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유일민은 후배로서 갖출 예의를 다 갖춰 완곡하게 그러나 거절의 뜻을 확실하게 나타냈
다. 가능하지 않은 일을 언제까지 미적지근하게 미룰 수 없었고, 그건 선배에 대한 예의도
아닐 성싶었다.
"여러 가지 형편이란 가정교사 생활에 자취까지 하는 것을 말하는가?"
"예에......."
"그럼 그중에서 한 가지 부담을 줄이면 어떨까? 마침 내 고등학교 동창이 입주 가정교사
를 구하고 있거든."
지난번에 생활형편을 대충 들었던 홍 선배는 그동안 입주할 수 있는 자리를 구한 것이 틀
림없었다. 자신을 인정해 서클활동을 권유한 것만도 고마운데 그런 데까지 마음을 쓴 것은
참으로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일민은 그만 몸이 달았다.
"선배님, 정말 죄송합니다. 실은 제가 동생을 데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고1인데......, 이
해해 주십시오."
유일민은 옹색한 앉음새로 말까지 약간 더듬거리고 있었다.
"아, 형편이 또 그렇구먼. 그럼 생활이 보통 어렵지 않겠는데......."
홍정배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혼자말하듯 하고는,
"그럼 당분간 어쩔 수 없지. 차차 형편이 나아지면 가입해도 상관없는 문제니까."
그는 유일민의 한쪽 무릎을 잡고 흔들며 결론을 내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유일민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는 상대에서 일급으로 꼽히는 그 서클에 가입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비애를 느끼고 있었다. 마음이 끌리는 서클활동이야말로 대학의 자유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낭만이고 참다운 실행일 수 있었다.
"죄송하긴,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현실이 중하니까 힘내라구. 그 신문에 혹시 조봉암 씨
기사 안 나왔나?"
유일민은 신문을 얼른 홍정배에게 옮겨주었다.
홍정배가 담배꽁초를 버리고 신문을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유일민도 목을 한껏 늘여 큰 제
목들을 대충 더듬어나갔다. 사회면까지도 진보당 사건의 조봉암에 대한 기사는 보이지 않았
다. 요즈음 대학생들의 관심이 조봉암에게 내린 사형 언도와 <경향신문>의 폐간 조처에 쏠
려 있듯이 유일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건 별개의 사건 같으면서도 한 꼬챙이에 꿰이는 정
치적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공통성은 한마디로 정적제거였는데, 진보당 간첩사건은 조
봉암을, <경향신문> 폐간은 장면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사건은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이승만정권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학생들은 그 사건들의 무리한 조
작으로 오히려 이승만정권이 위기에 처할 거라고 점치고 있었다. 유일민도 그렇게 되기를 은
근히 바라고 있었다.
"거 이상하단 말야. 진보당 사건에 미 CIA 입김이 작용했다는 설이 들리는데......, 알다
가도 모를 일이야."
홍정배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유일민으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어떻게요? 하는 말이 입 끝에 걸렸지만 꾹 참았다.
경박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고,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홍 선배가 그 내막을 알 리 없었던
것이다.
"홍 선배, 여기 계셨군요?"
2학년 신무영이 묵직한 가방을 벤치에 놓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유일민은 급히 일어나며
그에게 인사했다. 1학년 신세에 소홀하게 대할 수 없는 선배들이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신문을 옆으로 치우며 홍정배가 신무영에게 담배를 권했다.
"예 오늘 쓸 유인물을 찾아왔어요. 신문에 뭐 볼 만한 것 났어요?"
"뭐 그저, 계속 <경향신문>사건 보도야. 한심하게 미군정법령 88호를 가지고 끝도 없이 왈
가왈부니 원."
홍정배가 얼굴을 찌푸리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건 이미 결판났잖아요. 전 대법원장 김병로 씨와 정구영 변협회장이 위헌이라고 공식입
장을 밝혔는데요."
"그 입장표명 가지고 돼? 칼자루 쥔 놈들이 잔소리들 닥쳐라 하며 맘대로 멋대로 몰아가니
까 문제지."
"아닙니다. 이건 대처방법이 근본적으로 잘못돼서 그런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경향신문>
을 폐간시키면서 미군정법령 88호를 끌어다가 적용시킨 것에 대해 위헌이라고 한 것부터가
발상이 잘못됐고, 방향이 어긋났다 그겁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수립과 동시에 미군정은 종
식됐고, 따라서 군정법도 완전히 폐기처분됐습니다. 그런데 엄연히 독립국가고 법치국가에
서 집권자치 편익을 위해 미군정법을 끌어다 적용시키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독립국가의 정
통성을 전면 부인하는 반역행위이고, 법치국가의 존엄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반란행위가 아니
고 무엇입니까. 미군정법을 끌어다 대는 건 일제 총독부의 법을 끌어다 대는 것과 뭐가 다르
냐 그겁니다. 이 점을 부각시켜 정부를 비판하고 공격해야 하는데 엉뚱하게 위헌이다 뭐다
하고 있으니 일이 해결될 게 뭡니까."
"히야, 이것 봐라, 그 말 그야말로 명언 중에 명언인데." 홍정배는 놀라는 얼굴로 무릎을
치고는, "너 그런 기발한 생각을 언제부터 한 거야, 도대체?" 하며 정색을 했다.
유일민도 놀라서 신무영을 새삼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 며칠 됐어요."
"그거 정말 정곡을 찌른 논리야. 그 문제는 현 정권의 장래와 직결되어 있는 중대사니까
오늘 모임에서 본격적으로 토론에 부쳐보는 게 좋겠는데."
"이놈의 정권은 제 도끼로 제 발등 찍은 게 아니라 제 권총으로 제 심장 쏜 거 아닙니까.
그렇잖아도 민심이 돌아서는 판에 그 두 사건을 일으켜 지금 민심이 얼마나 고약합니까."
"그래 독재의 말기증상이야 그만 갈까."
유일민은 멀어져 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그 간격만큼 커져가고 있는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
다. 그 감정은 배고픔보다 더 심하게 마음을 괴롭혔다.
유일민의 의식 속에서는 신무영에 대한 놀라움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입술 두껍고 거칠거
칠하게 생긴 인상과는 전혀 다르게 신무영은 예리하고 명료했으며, 그런 단호하고 충동적인
내용의 말을 하면서도 흥분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이 차분할 수 있다는 것이 또한 놀라웠다.
유일민은 그들이 남기고 간 감정의 잔영을 덮듯 신문을 펴들었다. 아까 신경을 끌었던 기
사를 서둘러 찾았다.
그건 간첩 자수에 대한 기사였다. 경찰에서는 간첩 자수주간을 5월 1일부터 실시했다가
더 많은 은전을 베풀기 위해 '자수주간'을 '자수기간'으로 바꿔 월말까지 연장했는데, 그 마
감일이 임박할수록 자수자들이 급증해 한 달 동안 자수자의 총원은 86명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자수자들에게는 과거를 묻지 않고 관대한 처분을 할 거라고 했고, 끝에 날짜별 자수
자 수가 밝혀져 있었다.
그 기사 위에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유일민은 가느다란 신음을 물며 눈을 감
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모습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아버지가 내려오면 어쩔 것인가 하
는 두려움이 찬바람으로 일어났다. 제발, 제발......, 신음과 함께 그의 몸이 움츠러들고 있
었다. 지난날 경찰에 서너 번 끌려갔던 공포가 엄습해 오고 있었다.
교정에 학생들이 모여드는 소리가 차츰 왁자해지고 있었다. 오후 강의가 시작될 시간이었
다. 유일민은 감정을 수습하고 신문을 접으려고 했다. 그 기사 아래로 꽁치 풍어를 알리는
기사가 조그맣게 나와 있었다. 열흘 전쯤 딴 신문에 나온 기사가 또 나온 걸 보면 꽁치가 잡
히기는 어지간히 많이 잡히는 모양이었다.
"요 꽁치가 싸고 맛나고 지름지고, 가난헌 사람덜 배에 지름기 돌게허는 디는 질이다. 전
에 흔찮든 생선이 요리 많이 나는 걸 보먼 가난헌 백성 구헐라고 하늘이 돕는 갑는디 느그
도 대구, 도미 못 묵을 팔자에 꽁치나 많이 꾸묵어라. 요리 살살 소금 뿌려서."
꽁치 굽는 법을 가르쳐주며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유일민은 스산하게 웃으며 신문을 접
어 벤치에 놓고 일어났다.
며칠이 지나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유일민은 기분이 찜찜하고 불안스러운 것을 느꼈
다. 그날이 바로 가정교사 하는 학생의 중간고사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학생은 무사태평이었는데 자신은 그때부터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 마. 성적표 받아오는 날이 사형 언도 받는 날이니까. 성적이 떨어지는 거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제자리걸음만 해도 사형이지. 5등 이내의 경우는 예외지만, 그런 아이들이 가정
교사 두는 게 어디 흔한가. 끝없이 성적이 오르기를 바라는 부모들 욕심 앞에서 우리들 목숨
은 하루살이야. 아까운 돈 쓰고 있는 부모들 욕심 탓할 게 아니라 가난한 우리들 신세를 탓
해야지."
어떤 선배가 쓰디쓰게 웃으며 한 말이었다.
유일민은 아침을 먹으며 동생에게 성적표가 나왔는지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만두기
로 했다. 어머니는 당신 대신 단속 잘하라고 당부였지만 괜히 감독하고 간섭하는 느낌을 줘
서 그 성깔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제가 알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그 학교에서 중간만
해도 진학에는 별 걱정이 없었다.
"서울애들하고 공부는 할 만하냐?"
유일민은 슬쩍 에둘러 물었다.
"서울놈들이라고 별건가? 다 시시해."
유일표가 식욕 좋게 밥을 먹어대며 대꾸했다.
"그래도 중학교 때하고 똑같진 않을 텐데. 공부 잘하는 애들이 훨씬 많잖아?"
"형은 그런가 보지? 내 공부는 걱정 마. 엄니 실망 안 시키게 하고 있으니까."
동생의 그 눈치 빠르고 시건방진 대응에 유일민은 그만 픽 웃고 말았다. 동생은 다른 말들
은 거의 고쳤으면서도 어머니만은 꼭 '엄니'였다. 어쩐 일인지 자신도 그 말은 고쳐지지 않
았고, 어머니보다 엄니가 더 정겹고 포근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참, 나 그저께 기차에서 만났던 우리 고향 아저씨 봤어."
유일표가 숟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아니, 어디서?"
"전차를 타고 오는데 길 건너에서 지게에 짐을 잔뜩 지고 가잖아. 뛰어내릴 수도 없고 몸
달아서 혼났어. 무슨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결국 지게꾼 된 거야. 종로5가 쪽으로 가는 걸
보니까 아마 동대문시장에서 품팔이하나 봐."
유일표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그래, 기술을 배우자도 돈이 있어야지. 당장 먹고 살아야 하고, 제일 잘할 수 있는 건 지
게질이고, 어쩔 수 없지."
유일민은 밥상을 들고 나가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성적표에 대한 불안감은 하루 내내 유일민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최초로 겪게 되는 일이
라 그렇기도 했지만, 머리도 신통찮은데다 공부에 관심도 없는 임호태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강의가 다 끝나기 바쁘게 유일민은 창신동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임호태의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기 전에 자신이 먼저 성적표를 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다른 날과 달리 유일민을 맞이
한 것은 식모가 아닌 임호태의 어머니였다. 평소에는 장사를 하느라고 얼굴을 볼 수 없는 형
편인데 아들의 성적 때문에 시장에서 미리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일민이 학생, 나 좀 봐요."
이 한마디에 유일민의 가슴은 그만 얼어붙었다.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호태 성적이 2학년 때보다 겨우 4등밖에 오르지 않았어요."
그 순간 유일민은 소리나지 않게 긴 숨을 내쉬었다. 등수야 몇 등이든 간에 '올랐다'는 것
이 주는 안도감이었다. 그리고 임호태가 그렇게 예쁘고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번에 10등은 다 안 돼도 7, 8등까지는 올라야 되지 않아요?"
다부지고 억센 인상의 임호태 어머니가 성적표를 흔들며 말했다.
"예 사모님, 더 노력하겠습니다."
유일민은 굳이 사모님이란 호칭을 붙이며 고개를 숙였다. 첫날 면접을 하면서 임호태의 어
머니는 호태의 아버지는 사장이며, 자신을 사모님이라 부르라고 분명히 못박았던 것이다. 사
모님이란 스승의 부인에 대한 존칭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요즈막에 들어 '사장 사모님'으로
쓰이면서 마구 남용되고 있었다.
"그냥 쉽게 말해선 안 돼요. 우리 호태는 무슨 일이 있어도 5대 공립 중에 하나는 꼭 들어
가야 하니까 새로운 각오로 단단히 결심해야 한다니까요. 5대 공립 중에 하나예요!"
"예, 명싱하겠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서울에 있는 남자 고등학교를 놓고 5대 공립이니 5대 사립이니 하는
구분이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었다. 그 학교들이 속칭 일류로 꼽히는 것들이었다.
"엄마, 양심도 없이 그렇게 공갈 때리지 마. 딴 선생들에 비하면 4등이나 올린 게 얼마
유? 상 줄 생각이나 해야지." 쟁반에 주스잔을 받쳐가지고 나오며 임호태의 누나 임채옥이
입을 삐쭉하고는, "선생님 칼피스 드세요. 냉장고에 있는 물로 타서 시원해요." 그녀는 주스
잔을 유일민 앞에 놓으며 생긋 웃었다.
냉장고가 있다는 것은 이 집의 재력이 얼마나 튼튼한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선풍기 없
는 집이 수두룩한 형편에 냉장고는 귀물 중의 귀물이었다. 그런데 집은 그저 평범한 한옥이
었다. 잘사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알부자였던 것이다.
"공갈 때리다니, 다 큰 처녀가 말버릇이 그게 뭐냐! 넌 나서지 말고 들어가 공부나 해. 못
된 에미나이 같으니."
임호태의 어머니는 성난 목소리만큼 사납게 딸에게 눈을 흘겼다.
"그 말이야 아무나 다 쓰는 건데 엄만 괜히 야단야. 아무 때나 그저 공부, 공부, 아유 지
겨워."
어머니의 입에서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기세에 밀려 쫓겨 들어가면서도 임채옥은 이렇게 종
달거렸다. 그 몸집은 어른이었지만 쌍갈래로 땋은 머리가 고등학생 티를 내고 있었다.
"일민이 학생, 잘 들어요. 우리가 38선을 넘어와 38따라지로 괄시당하고 서름당하면서 요
만큼 살게 된 건 그냥 된 게 아니라우. 입을 것 제대로 못 입고, 먹을 것 제대로 못 먹고,
언 손발 불어가며 고생고생해서 이룬 거라우. 그리고 주님께서 돌보심이 함께한 거구. 그간
에 우리가 겪고 고생한 사연을 소설책으로 쓰면 열 권도 넘을 거고, 영화로 만들면 서울 장
안이 눈물바다가 될 거유. 겪어봐서 알겠지만 우리 호태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하려는
게 흠 아니우. 내가 왜 지금도 구호물자 장사를 하면서 이 고생이겠수. 호태 저것 잘되게 하
자는 게 욕심 하나 아니우. 저게 5대 공립을 거쳐 서울대학에 딱 들어가야 우리 부부 고생
한 보람이 생기고, 교회에서 내 체면도 서요. 일민이 학생, 다음 기말 시험에는 10등 더 올
려야 해요, 10등! 나하고 약속해요."
임호태의 어머니는 이미 서너 번 했던 지난날의 이야기를 지치지도 않고 또 되풀이하고는
손가락 열 개를 확 펴서 유일민의 눈앞에 디밀듯 했다.
"예 사모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유일민은 또 고개를 숙여 보였다.
"됐어요. 가서 공부 시작해요."
임호태의 어머니는 아들 성적표를 유일민에게 내밀었다.
"호태야 정말 잘했다. 사람이 맘먹고 하면 안 되는 게 없는 거야."
유일민은 임호태를 다정하게 보듬으며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칭찬의 교육적 효과를 올리
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전신을 에워싼 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호태 어머니
의 끝 모를 욕심 앞에서 자신은 언제 하루살이 목숨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6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여름은 불기를 서서히 내뿜기 시작했다. 어느 길목에나 리어카
에 얼음덩이 띄운 냉차통이나 색색의 물감병을 차려 놓은 냉차와 빙수장수들이 수없이 불어
나 있었다. 어떤 리어카에는 손님을 끄느라고 어색한 글씨로 '빠인쥬스'며 '깔삐스'라고 써
붙이고 했다.
오후 강의가 휴강이어서 유일민은 바로 학교를 나섰다. 동대문 헌책방골목을 들러서 창신
동으로 가기 알맞았다. 종로에서 청계천변에 이르는 그 헌책방 지역은 이제 유일민이 서울에
서 가장 정 붙인 곳이었다. 미로 같은 그 골목골목을 누비다 보면 허기를 쉽게 잊을 수가 있
었고, 좋은 책을 뜻밖에 싸게 살 수도 있었고, 온갖 종류의 책들의 제목을 훑어보고 더러 저
자의 머리말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지식의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헌책방 지
역은 언제나 활기차게 성업중이었다. 중, 고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까지 헌책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사고 파는 상거래가 빈번했다.
큰길에 이른 유일민은 더위를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물들인 군인작업복의 단추 두 개를
땄다. 양쪽 팔은 벌써 5월에 팔꿈치 위로 바짝 접어올렸던 것이다. 진작 남방이든 와이셔츠
든 사 입었어야 했지만 동생의 하복을 사주고 나니 돈의 여유가 전혀 없었다. 동생은 하복
도 그대로 입겠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입어보니 작아서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다. 잘 먹지
도 못하고 살면서도 동생은 1년 동안에 부쩍 큰 거였다. 동생은 새 하복을 입고 얼마나 좋아
했는지 모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입이 절로 벙글거렸고, 학교를 오가는 것이 전과는 달
리 기가 나는 것 같았고, 옷을 무슨 보물 다루듯 소중히 여겼다. 그런 것을 보며 입학 때 동
복을 사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그때도 가정교사를 했었더라면 그래도 여유
가 있었을 것이다. 2학기에는 동복을 사주리라 마음먹었다.
유일민은 단추 따놓은 옷깃을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며 버스정류장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
데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정오가 아닌데 이상해서 유일민은 엉거주춤했고, 오가
는 사람들도 어리둥절해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호루라기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울리
며 경찰들이 큰길로 나서고 있었다.
"빌어먹을, 또 민방공훈련이야."
한 남자가 거칠게 내뱉었고,
"아유, 지겨워. 날도 더워죽겠는데."
어떤 여자가 짜증을 부리며 뛰듯이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렌은 민방공훈련의 경계경보였다. 유일민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해졌다. 차
량이나 행인들의 통행이 일절 금지되는 공습경보가 울리기 전에 가까운 다방이나 빵집으로
피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데 쓸 돈은 없었다. 공습경보가 해제될 때까지 꼼짝없
이 더위 속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공습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경찰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더 요란해지고, 완장 찬 남자들
이 빨리 피신하라고 외쳐대며 행인들을 가로막았다. 유일민도 예닐곱 사람과 함께 골목으로
밀려 들어갔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자알들 한다."
"꼴이야, 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까짓 걸 맨날 하면 뭘 해. 정작 적기가 나타나면 숨을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으면서.
병신들 꼴값하는 거지."
입마다 불평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말마따나 이미 신문들은 유사시에 대비할 방공시설이 전무한 상태에서 실시하는 방
공훈련이 무슨 실효가 있겠느냐고 야유조로 비판하고 있었다. 유일민은 쪽그늘을 찾아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방공훈련이 끝난 버스정류장에서는 시비가 붙어 있었다. 버스 옆에서 남자 차장과 군인이
서로 멱살잡이를 한 채 소리치고 있었다.
유일민은 버스로 다가가며 얼굴을 찡그렸다. 보나마나 또 요금 시비일 거였다. 시내버스
를 타면서 군인들은 무턱대고 요금을 안 내려고 했고, 완력깨나 쓰는 남자 차장들은 그걸 그
냥 보아넘길 리 없었다. 그 시비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건 여러 가지 전쟁
후유증 중의 하나였다. 전쟁 동안의 특권의식에 젖어 헌병들이 경찰들과 자주 충돌을 일으키
고 민간인을 취조하는 월권을 범하듯 일반 군인들도 그 특권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시비가 자주 폭력화해서 사회문제를 일으키자 정부에서는 전방의 군인은 무임승차하
고 후방의 군인은 요금을 내게 하는 방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건 싸움을 더 많
이 일으키는 혼란을 가중시켰을 뿐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아니, 저건......."
버스에 가까워진 유일민은 깜짝 놀랐다.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보았다. 남자 차장은 틀림
없이 서동철이었다.
"동철아, 동철아!"
유일민은 반가움과 싸움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뒤섞여 차도로 뛰어내렸다.
"엉? 이, 일민이구나......." 서동철은 놀란 듯하다가 어색한 웃음을 띠더니, "야 이 좆만
헌 새끼야, 너 오늘 재수 존 줄이나 알고 싹 꺼져버려." 하며 군인을 떠다밀었다.
"아, 얼렁 타. 바쁜디." 서동철은 유일민을 차에 밀어올리고는, "오라이!" 외치며 버스 옆
구리를 텅텅 두들겼다.
"너 어떻게 된 일이냐?"
버스 천장에 연결되어 길게 뻗은 손잡이를 잡으며 유일민이 물었다.
"나는 진작에 니럴 서너 번 봤다."
서동철이 헤벌쭉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니야 맨날 고개 푹 숙이고 댕긴께 나럴 볼 수가 있겄냐. 나는 니가 앞문으로 타면 뒷놈허
고 바꾸고, 뒷문으로 타면 앞문으로 바꾸고 험서 피했응께 더 보기가 에로왔제."
유일민은 그제서야 아까 왜 서동철이가 자신보다 반가움이 덜했는지를 깨달았다.
"아니, 그게 말이 되냐?"
"요런 꼬라지 뵈서 머헐라고. 노선 바꿀 참이었는디 들켜부렀다."
코밑을 씩 문지르는 서동철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너 어떻게 된 거야?"
"그 이약얼 여그서 어찌 다 허겄냐. 니 요분 공일날 시간 있지야?"
유일민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오포 부는 시간에 종로5가 호산나다방에서 만내자."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고, 버스가 시가지로 들어서면서 서동철은 차장노릇 하기에 바빴다.
빡빡 깎은 앞뒤 머리가 유난히 불거져 별명이 쌍짱구였고, 그 머리통이 꼭 돌덩어리처럼
단단해 보이는데다, 툭 튀어나온 이마로 어찌나 박치기를 잘해대든지 당해내는 아이들이 없
었던 서동철. 머리를 길렀지만 그의 머리통은 여전히 앞뒤 짱구였고, 살이 붙지 않고 강파르
게 보이는 얼굴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체구는 깡말랐던 옛날의 모습을 벗고 실한 장
정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이 미친놈아. 친구 좋다는 것이 머시냐!"
서동철은 돈을 받는 대신 유일민의 등을 철퍽 쳤다. 그리고 버스는 곧 떠났다.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고 있는 유일민은 콧등이 찡해지고 있었다. 이 미친놈아......,
그 말이 그리도 정답고 다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한마디로 지난날의 슬픔과
아픔이 한꺼번에 솟구쳐 올랐다.
그래, 너와 나는 어쩔 수 없는 친구였지. 같은 병을 앓는 마음으로 살아야 했으니까. 그런
데도 서로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눈치로만 위로를 했었지. 차이가 있었다면 넌 아버지가
산에서 돌아가셨고 난 아직 살아계시다는 거지. 지금 너와 나는 누가 더 나을까.......
이틀이 지나 유일민은 호산나다방으로 나갔다. 서동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벽시계가
5분을 지나고, 10분이 되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동안 두 번 거쳐간 레지 아가씨가 사뭇
험한 얼굴로 세 번째 다가오고 있었다. 공짜인 보리차만 축내고 앉았다가 그냥 나가는 실업
자들이 많아 다방 인심이 사납다는 말은 널리 퍼져 있었다. 유일민은 눈치가 보여 커피를 시
켰다.
서동철은 15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교통사고라도 났을
까......, 유일민은 커피를 아껴 마시며 30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25분쯤 되었을 때 서동철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상자를 들고 있는 그는 몹시 숨을 헐떡
거렸다.
"와따메. 니 가부렀을 줄 알고 뽕빠지게 뛰었다. 요것 하나썩 사니라고 그랬는디, 니 얼
렁 변소에 가서 요것으로 갈아입고 나오니라. 이 염천에 을매나 덥겄냐."
서동철이 상자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이거 뭐냐?"
유일민은 상자를 받을 생각은 않고 서동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니 유식헌 눈으로 보먼 몰르냐? 와이사쓰의 왕 조광와이사쓰! 으떠냐, 멋나지야? 나는 백
화점서 발써 갈아입어 부렀다."
서동철은 와이셔츠 중에 최고품으로 꼽는 조광와이셔츠의 신문광고 문구를 읊으며 엄지손
가락을 세우고는, 다시 그 손가락을 뒤로 젖혀 자신을 가리켰다. 유일민은 그제서야 서동철
이가 눈부시도록 하얀 새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서동철의 심중을
알아챘다. 자신에게만 사주면 안 받을 것 같으니까 두 개를 사서 제가 먼저 갈아입고 그대
로 시키는 거였다.
"이 미친놈아, 니 미쳤냐?"
유일민은 일부러 이렇게 말하면서 목이 꽉 메었다.
"아무 소리 말어. 나는 월급쟁이고 니넌 학생잉께. 아, 얼렁 가서 갈아입어, 사람 쪄죽는
디. 헌옷은 그 곽에 도로 넣고."
서동철이 상자를 더 디밀었다.
"참말로 미친놈이다......."
유일민은 상자를 받아가지고 일어섰다.
"하이고, 베룩에 간을 내묵제 요것이 무신 소리여. 니 오늘 돈 낼 생각허덜 말어. 이 성
님 체면 깎잉께로."
찻값을 내려는 유일민을 떠다밀며 서동철이 한 말이었다. 갈수록 그의 사투리는 짙어지고
있었다.
음식점에 가서도 서동철은 불고기를 시키려고 했다. 불고기값을 자기가 내면 몰라도 그렇
지 않으면 그만 가겠다고, 유일민은 정말 화를 냈다. 서동철은 그 기세에 꺾여 갈비탕을 시
켰다.
"서울 온 지 2년 되얏다. 니가 알디끼 중2에서 학교 작파허고 철공장으로 성냥공장으로 떠
돌아도 기술 갤차준다고 밥만 믹여주제 어디 돈이야 땡전 한닢 주기럴 허냐. 근디 기술은 지
대로 안 갤차주고 잡일만 시키제, 기술자 될라면 부지하세월 감감허제, 그런 판에 서울서 돈
벌이허는 친척 성님을 만낸 것이여. 당장 돈벌이 헐 수 있다고 따라갈라면 가자는디 마다헐
것이냐. 그려서 팔자에 없는 차장질이 시작되얏다."
서동철은 이마의 땀을 문지르며 씁쓰름하게 웃었다.
"그럼 차장 다음에는 운전수가 되는 것이냐?"
"잉, 대개 그런 코스로 가는디, 나 곧 차장질 때래치울 판이다."
"왜, 좋은 자리가 생겼어?"
"글씨, 존 자린지 어쩐지넌 몰르겄는디......." 서동철은 잠시 망설이다가,
"반공청년단 일 보기로 혔어."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반공청년단?"
유일민은 숟가락질을 멈추었다.
"워찌 그리 놀래냐? 우리 아부지 땀시? 아니여, 우리 아부지가 그리 죽었응께 나는 인자
이 험한 시상 살아갈라먼 힘씬 이짝으로 붙어얄 것 아니냐. 나가 넘덜맨치로 배운 것이 있기
럴 허냐, 빽이 있기럴 허냐. 그렇다고 쌔빠지게 고상혀서 차장질 졸업허고 운전수 된다고 뻐
스회사럴 채릴 것이냐. 니 나 알지야, 쌈 잘허는 거. 나가 지닌 재산은 서울 와서 배운 당
수 2단이 전분디, 고것이 밑천이 돼야 갖고 어물쩍 반공청년단에 뽑힌 것이여. 니가 어찌 생
각헐란지 몰르겄는디, 나 인자 우리 아부지 일 깨끔허니 잊어불고 살고 잡다. 반공청년단서
공 세우고 살아가먼 형사고 경찰이고 안 무서와허고 살 수 있을 것 아니겄냐? 니넌 워찌 생
각허냐?"
서동철은 담배를 피워물며 물었다. 그 얼굴에 괴로움이 서려 있었다.
"그래, 니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너무 갑작스러워 뭐라고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데......, 니 맘은 알 수가 있어."
"니 시방 기분 상했지야?"
서동철이 유일민을 응시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러나 걱정은 돼. 눈치껏 조심해서 행동해야 될 거야."
"글먼 우정은 변치 않는 것이제?"
"그럼."
서동철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유일민은 그 손을 잡았고, 둘이는 손이 으스러져라 악수를
했다.
유일민은 서동철의 얼굴에 또 하나의 얼굴이 겹쳐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빨치산의 자
식놈이라고 욕해대는 아이들 앞에서 분을 못 참아 일그러지고 있는 그의 눈물 젖은 얼굴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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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님의 한강
한 강 = 제1부 격랑시대 (1권)ㅡㅡㅡ 6. 서러운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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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1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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