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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웨싱(汪卫星) 《심판(審判)》 유화(부분도) 52in X 69in ( 2003)
【정견망】7월 15일,“견인불굴의 정신”이라는 주제의 미술 전람회가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미 하원 레이번 하우스 전시회장에서 개막되었다.
이번 전람회에는 10명의 화가들이 창작한 34폭의 작품들이 출품되었으며 화가들은 모두 파룬궁 수련생들이다. 그림 전람회는 4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즉, 천인합일(天人合一), 무명고난(無名苦難), 견인불굴(堅忍不屈)과 정의필승(正義必勝)이다. 화가들은 정밀하고 수준높은 기법으로 5년 간 파룬궁 수련생들이 겪은 피비린내 나는 박해와 이 과정에서 표현된 견인불굴의 정신을 전시해냈으며 동시에 광명이 어둠을 이겨내리라는 그들의 믿음을 표현해 내었다.
그림 선다츠(嬸大慈) 《집》유화 36인치 X 48인치 (2003)
3명의 화가가 직접 전람회장에 나와 관객들에게 작품을 창작한 과정을 설명하고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과 기법에 대한 소개를 하고 언론 매체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장쿤룬(張崑崙) 교수가 자신의 작품《붉은 담(紅墻)》에서 장쩌민 집단이 전방위적으로 파룬궁 수련생들을 탄압하고 전체 중국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감옥과 같이 선혈이 낭자한 높은 담안에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각종 혹형이 모두 사용되었고, 인생의 진실한 가치와 우주진리를 명백히 아는 개변할 수 없는 파룬궁 수련생들의 대법을 견결히 수련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공산당 권력을 상징하는 붉은 담은 이미 균열이 생겼고 철망, 혹형, 악경 등등은 단지 여명이 오기 전의 암흑에 불과하다.
다른 한 명의 화가 왕즈핑(王志平)은 고전 회화 기법을 이용하여 파룬궁 수련생이 받은 혹형 시달림을 표현하였다. 파룬궁 수련생이 혹형을 당할 때의 표정을 표현할 때 아무런 고통이나 근심과 괴로움이 없으며 표현한 것은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와 마음속의 眞善忍에 대한 견정함이다. 화가는 경찰의 얼굴 표정과 신체 동작을 세밀하게 그려 파룬궁 수련생에게 가하는 혹형과 광기 및 그것이 끝없음을 표현하였다.
왕웨이싱(汪衛星) 《심판(審判)》 유화 52인치 X 69인치 ( 2003)
심판은 전람회에서 두 폭으로 된 거대한 그림의 하나로 작가는 여성 화가인 왕웨싱이다. 그녀는 세밀하고 정교한 필법으로 3명의 활달하고 사랑스런 꼬마 천사들이 파룬궁 탄압의 원흉을 지옥으로 보내는 그림을 그렸다.
전람회를 참관하러 온 하원의원 및 세계 각지에서 온 관객들은 모두 이번 박해가 하루빨리 중지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고 표시하였다. 전람회는 16일에도 의회에서 계속된다.
인터뷰:“견인불굴의 정신” 예술전람회 소개(1)
천샤오핑(陣肖平) 《연등(蓮燈)》 유화 (일부분) 51in x 51in
【정견망】편집자의 말:7월15~16일 워싱턴DC 法輪大法협회 주최로 “견인불굴의 정신”이라는 주제의 예술전람회가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하원 의원회관인 레이번 하우스 전시회장에서 정식으로 열렸다. 이번에 전람회에 참가한 작품은 모두 파룬궁 수련생들이 창작한 것으로 그들 중에는 아직도 불법으로 감금되어 감옥에 있는 사람도 있다.
5년의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겪으면서 이 예술가 수련생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세인들에게 파룬궁을 수련한 후에 인심(人心)이 바르게 잡힌 즐거움, 파룬궁 수련생들이 혹독한 시달림과 피비린내 나는 탄압 하에서 표현해 낸 견인불굴의 꺽을 수 없는 정념, 眞善忍 우주 진리에 대한 끊어버릴 수 없는 추구에서부터 정의는 끝내 사악을 이긴다는 믿음에 이르기까지를 표현해 내고자 하였다.
이 예술가들은 각자 특징이 있으며, 그들은 힘써 전통 회화기법을 이용하여 이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전람회에 참가한 각 화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들의 구상, 창작과정 및 사용한 기법 등을 연속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 다음 인터뷰에서 記者는 정견망 기자인 주칭밍(朱清明)이고, 장(張)은 장쿤룬(張崑崙) 교수를 말한다.
기자 : 교수님께서는 이 전람회 조직위원 중 한 분이신데 이 전람회를 간단히 소개해 주신다면?
장 : 이 전람회의 작가들은 모두 파룬궁 수련생들이며 동시에 예술가들입니다. 일부는 예술가로서 아주 실력이 있는 분들이지요. 창작한 내용은 모두 대법(大法)과 관련있는 내용들이며 이 전람회를 개최하는 데는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런 예술가들은 평생 일종 순정(純淨)한 자아를 표현하고자 추구하지만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하는데 각종 유파(流波)는 모두 각종 관념에 이끌리어 깨끗한 자아을 덮고 있습니다. 파룬궁 수련을 통하여 비로소 순정한 마음이 있을 수 있게 되었으며 마음이 순정해진 후에야 비로소 각종 관념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진정하게 선천적으로 선량한 자신의 부분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작가들이 수련과정에서 체험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며, 또한 이번 사악한 박해 중에서 우리가 직접 경험하거나 다른 제자들이 직접 경험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동시에 우주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대법제자들의 견인불굴의 정신을 표현해 낸 것이자, 대법제자들이 본 사악한 세력들이 장차 멸망으로 가는 비참한 결과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전람회는 4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제1부분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이고, 제2부분은 무명고난(無名苦難)으로 이번 박해가 도리에 합당하지 않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제3부분은 견인불굴(堅忍不屈)로서 대법제자가 이번 박해과정에서 표현해 낸 숭고함을 나타냅니다. 제4부분은 바로 정의필승(正義必勝)으로 이런 사악한 세력들이 반드시 인류 법률의 판결을 받고, 우주 진리의 판결을 받을 것이며, 이는 피할 수 없는 결말임을 설명합니다.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위치를 잡고 있으며 이것이 왜 대법제자들이 전력을 다해 진상을 명확히 알리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이런 몇마디 말로는 똑똑히 설명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기자 : 전시회를 본 관중들이 아주 큰 감동을 받는 것 같습니다. 제가 주의해서 보니 세계 각지에서 온 관중들이 전시회를 본 후에 큰 감동을 받고 대법제자를 도와 하루 빨리 이번 박해가 끝나도록 돕겠다고 합니다. 이 전시회는 대단히 큰 의미가 있은 것 같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인터뷰:“견인불굴의 정신” 예술전람회 소개(2)
【정견망】(전편에 이어 장쿤룬 교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 다음 인터뷰에서 記者는 정견망 기자인 주칭밍(朱清明)이고, 장(張)은 장쿤룬(張崑崙) 교수를 말한다.
기자 : 장교수님, 당신께서 겪으신 예술 창작 경험을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장 : 저는 1969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에 줄곧 예술창작에 종사해 왔습니다. 80년에 산둥 예술대학에 와서 조각 전문가로 활동했으며 그때부터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다른 한편으론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당시 우리가 한 대부분은 전통적인 것이었어요. 사회 풍조가 예술에 대한 충격이 심해짐에 따라 우리도 원래의 예술 수단이 표현 방식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우리 사상의 일종 격식으로, 예술적 관점이나 사상 사물에 대한 일부 인식과 지식 등의 방면에서 모두 아주 제한적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현대과학이 검증한 일부분 지식의 격식이었어요.
그러므로 창작할 때마다 아주 쉽지 않았으며 숱한 고민과 번뇌 속에 온갖 궁리를 다 했는데, 마치 아이를 낳기 전에 10달간 회임을 하다가 하루 아침에 분만을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일생동안 좋은 창작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저는 예술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당시 예술 언어에 대한 표현을 추구하는데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일부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서양 예술 중에 흡수할만한 표현 방법이 더 많다는 생각에 89년에 캐나다 방문 교수로 오게 되었습니다.
외국에 나온 후에 곧장 현대 예술사를 파고 들었으나 7년 간의 탐구를 통해 스스로 일부 새로운 표현 방식 만을 찾았을 뿐입니다. 서양에는 예술의 자유가 있고 표현방법도 다종다양하여 객관적으로 자신의 표현언어를 확장할 수 있었으나, 나중에 저는 현대 예술의 문제는 단순히 표현형식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인류 도덕이 아래로 미끄러짐으로 인해 현대 예술의 표현방식도 일종 마성의 폭로가 되었습니다.
기자 : 교수님께서는 현대파 추상 예술의 표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서양 고전 예술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하지 않나요?
장 : 그렇습니다. 저는 서양 국가에서 전통예술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음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고전 예술은 별로 인기가 없고 현대예술이 인기가 있다고. 한가지 분명한 예를 들자면, 국가 예술위원회와 각 주 예술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자금은 일반적으로 모두 현대 예술이며 현대 예술 분야에서 성취한 예술가들입니다. 이것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현대 예술에 대한 일종의 체계적인 숭상입니다.
이 기간에 제가 걸은 길는 여전히 같지 않은 곳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책임감과 함께 사회 도덕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옴을 발견하였고 불(佛)과 도(道)가 인류사상을 지도하는데 아주 좋은 점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불가와 도가의 책을 보았으며 절에 가서 설법을 듣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말하는 것이 아주 도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깊이 있고 투철하게 설명하지 못하며, 가장 근본적인 것을 명확히 설명해내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시기에 제 작품은 불도(佛道)의 사상을 표현한 것이 많았으며 또 우주의 법칙을 표현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진정으로 명백하게 알게 된 것은 파룬따파를 수련한 이후입니다.
기자 : 언제부터 수련을 하셨습니까?
장 : 저는 96년 6월에 법을 얻었습니다.
기자 : 그렇다면 8년이나 되셨는데 8년 간의 수련이 당신의 예술창작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장 : 처음에 제가 막 파룬궁을 접했을 때 저는 아주 흥분했고 제가 줄곧 찾아오던 이치를 발견했음을 알았습니다. 이전에는 비록 아무리 고심해서 나를 찾았어도 진정한 출로가 없었습니다. 96년 제가 일찍이 “20세기 말(末)”이라는 제목으로 장치 예술(=현대 전위예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작품은 바로 현대인들의 단견(短見)과 이로 말미암아 조성된 벗어날 수 없는 악성 순환을 종합적으로 개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장치 주변에 하나의 유화 캔버스, 붓, 물감과 녹음기를 설치하고는 관중들이 창작에 참가하게 하여 이 제목에 대한 의견을 발표하게 했습니다. 그 캔버스는 나중에 그림이 가득 찼고 여백이 전혀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게중에는 시인도 있었고 정치가들도 있었으며 그들은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한번에는 똑똑히 표현해 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전람회를 세 번이나 다녀간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남겼습니다.
인류의 도덕적인 위기가 이런 위기를 야기한 것이란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식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퀘벡 대학의 예술계열 주임이 전람회를 보고는 아주 감동을 받아 말하더군요. “이것은 사람마다 모두 사고할 문제이며 모두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데 당신은 단번에 그것을 표현해 냈군요.”
제가 예술 언어를 연구하면서 일정한 표현정도에 도달했으며 이런 문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사회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하는 데 있어서는 사람마다 아무도 해법이 없었고 저도 답이 없었습니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에 우주, 인생의 진실한 의의와 진실한 가치에 대해 전면적인 인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마치 천장 창문이 열린 것처럼 마음이 아주 활연히 탁 트였습니다. 나중에 창작할 때는 사로(思路)가 끊임없이 열려서 표현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졌고 생각만 하면 오게 되었습니다. 법학습을 하고 진상을 알려야 하는 관계로 창작할 시간이 적어지긴 했지만 오히려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기자 : 사회 문제에 대하여 또한 우주 방면의 문제에 대하여 당신은 대법을 배운 후에 답안을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술 표현 기법에 있어서 어떤 변화가 발생했나요?
장 : 처음에 저의 예술 표현 수법은 현대적인 전위 예술의 그것으로, 장치예술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영화, 텔레비전, 사진, 회화, 조소 등을 종합적으로 이용하여 자유롭게 각종 방식을 종합하여 한가지 주제를 표현하는 것이었죠. 나중에 수련이 깊어지면서 저 자신의 관념이 개변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그런 표현 수법은 모두 현대인의 관념과 감상 습관에 적응한 것으로 현대인은 전체 사회의 변이(變異)에 따라 변이되었습니다. 우리 예술가들을 말하자면 예술은 영원한 것으로서 미래에 남겨주는 것이므로, 우리는 더 이상 현대인의 관념에 따라 변해선 안 되며, 마땅히 가장 바르고 가장 전통적이며 가장 순정한 것을 미래인에게 남겨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의 현재 이 길은 되돌아가는 과정으로서, 전통적이며 순정한 예술의 길로 되돌아가는 과정입니다. 물론 사상의 전변에는 과정이 필요한 것으로 원래 마음대로 하고자 하던 것에서 단번에 전통으로 되돌아 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드시 돌아가야함을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까요?
우리는 단순히 인류 역사를 통해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역사는 기껏해야 몇천년으로 만약 우리가 우주 역사로부터 본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류와 우주에는 모두 성주괴멸(成住壞滅)의 법칙과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 많은 예술가들은 모두 한가지 공동의 규칙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보다 원시적인 것일수록 더 현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현대파 예술가들은 모두 원시예술 중에서 영감과 계발을 얻었습니다.
사실 많은 원시 예술은 이전 시기 훼멸된 문명의 예술로서 이전 문명의 훼멸은 인류 도덕이 부패되어 구할 방법이 없게 된 결과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안 다면 사람들도 더 이상은 과거의 일을 반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런 과정을 모른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예술을 줄곧 이런 과정으로 여길 겁니다. 사실 인류예술이 가장 휘황했던 시대는 문예부흥 시기로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와 같은 이런 대가들의 작품은 지금 보아도 대단히 훌륭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인터뷰:“견인불굴의 정신(坚忍不屈的精神)”예술전람회 소개:《영생(永生)》
야오중치(姚重琪) 《영생(永生)》유화 (부분도) (2004)
【정견망】야오중치 여사 인터뷰
※ 기자─정견기자 주칭밍(朱淸明)
야오─야오중치 여사,화가
기자:회화경력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야오:저는 어릴때부터 그림그리기를 즐겼으며, 어머님도 화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미술을 배웠는데, 지금까지 40여 년 그림을 그렸습니다.
기자:미술을 전업(專業)으로 하고 계신가요?
야오:기본적으로는 전업인데, 중국에 있을 때 했던 일도 모두 미술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림이 좋아서 줄곧 해 왔습니다.
기자: 수련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야오:96, 97년부터입니다.
기자:수련이 당신의 회화에 얼마나 큰 영향과 변화를 주었습니까?
야오:어떤 큰 변화가 있었느냐고요, 글쎄요. 비록 지금까지 저는 이름을 날리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림그리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간부학교에 있을 때, 그림을 그리면서 그 시기를 견지했습니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는 것이 정말로 재미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저는 너무 집착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기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좋아하는 색 몇가지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사람에게 줬습니다. 이번에 예술로 진상을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고 말씀하시어,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기자:수련하신 이후 지금까지 처음으로 붓을 드신 겁니까?
야오:거의 그런 셈이죠. 유화는 이번에 다시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단지 요청이 있을 때 한해서 간단한 선이 들어간 그림, 애니메이션, 만화 같은 것을 그리곤 했습니다. 저는 컴퓨터를 배우는데, 박해로 사망한 제자들의 이야기는 제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사진을 한군데 모아 두기 시작했습니다. 저 자신이 수련을 하기에, 수련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박해로 사망하신 분들은, 어떤 사람은 너무 어려서 겨우 8개월 난 아기일 때 박해를 받아 죽었는가 하면, 어떤 노인은 시달림을 받아 사망했는데, 그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파룬궁를 수련하는 사람들은 신체가 모두 건강한데, 이렇게 박해받아 사망한 걸 보고 마음이 아주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사진을 찾아서 한 화면으로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컴퓨터로 하는 것이 비교적 쉬워서, 배경을 없애고, 화면을 만들었습니다.
그림 속의 이 분들은 모두 이전에 살아 숨쉬는 건강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는데, 장××한테 박해받아 죽었습니다. 제 목적은 바로 이 그림을 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박해 진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 그들이 함께 이 박해를 제지하는데 참가하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야오중치 《영생(永生)》유화 110in.x 42in. (2004)
기자:이 그림에는 등장하는 사람은 몇명이나 됩니까?
야오:제가 찾을 수 있었던 사진은 280장이었는데, 모두 그림에 넣었습니다. 어떤 사진은 너무 작아서, 될수록 본인 사진과 비슷하게 그렸습니다. 어떤 사진은 손톱만하여 사진이 너무 작아서 아주 어렴풋합니다. 이런 사진들은 만들기가 아주 어려워서, 저는 될수록 비슷하게 자세히 그렸습니다.
장××가 이 선량한 사람들을 박해했는데, 사실 이 분들뿐만이 아니지요, 그들은 모두 가족이 있는데, 어떤 이는 부모가 박해를 받아 죽었고, 어떤 이는 자녀가 박해를 받아 죽었습니다. 저는 그림을 통해서 이 분들을 기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것은 그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박해받아 사망한 임신부의 출생하지 못한 태아(胎兒), 그 태아도 생명인데, 저는 그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박해로 사망한 사람 수는 이미 천명을 초과했습니다. 내가 이 그림을 구상할 때는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2백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만 천여 명이나 됩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제가 그들을 그려낸 목적은 사람들이 이번 박해를 제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훌륭한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진에서 얼마나 환하게 웃고 있습니까? 그들은 직장에서 모두 아주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 이런 것을 생각하면 저는 울음을 참을 수 없습니다……이 사람들 속에는 17 ~18세 가량 청소년도 있는데, 박해받아 죽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모두 사연이 있습니다.
인터뷰:“견인불굴의 정신” 예술전람회 소개:《붉은 담(紅墙)》
장쿤룬《붉은 담》유화 36 in. X 48 in.(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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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망】(전편에 이어 장쿤룬 교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 다음 인터뷰에서 記者는 정견망 기자인 주칭밍(朱清明)이고, 장(張)은 장쿤룬(張崑崙) 교수를 말한다.
기자 : 제가 교수님께서 이번에 출품하신 두 작품을 보니 모두 중국에서 파룬궁 박해와 관련된 것이더군요. 그중에서 한폭이 《붉은 담(紅墻)》인데, 이 그림의 창작 과정과 이 작품을 창작하실 때 당신께서 중국에서 박해 받은 경험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장 : 중국은 5천년의 문명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문화와 문명을 갖고 있지만, 이런 전통 문화들은 중국에서 발전하지 못할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파괴되고 있어요. 장쩌민이 권력을 잡은 후에는 파괴가 극에 달했습니다. 장쩌민은 독재 정치를 하면서 중국의 옛 문명이나 인권, 인간의 존엄성과 같은 것들은 전혀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정권과 개인적인 것을 수호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요.
파룬궁은 중국 전통 문화의 일종으로 사람들에게 마음을 닦고 선(善)을 향하도록 가르치며 단순히 육체적인 건강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에도 효과가 탁월합니다.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은, 의사들이 포기한 불치병이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치유되어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회복된 경우도 있습니다. 또 일부 탈선한 청소년들도 교육으로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지만 파룬궁을 수련한 후에는 좋은 사람으로 변했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론에 선전하거나 널리 알릴 필요도 없이 파룬궁은 중국에서 이심전심으로 널리 퍼져나가, 불과 몇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1억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정상적인 국가 지도자라면 당연히 아주 좋아할 일로서 문명한 국가로 되는데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장쩌민은 개인적인 질투로 인해 파룬궁을 탄압하시 시작했어요.
기자 : 왜 그림 제목을 《붉은 담》이라고 하셨나요?
장 : 장쩌민이 중앙 무대에 등장한 것은 “6.4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피로 짓밟고 나서였어요. 그의 정권은 줄곧 탄압을 통해 유지해 왔습니다. 그의 “성적(成績)”은 선혈(鮮血)로 얼룩진 붉은 것입니다. “붉은 담”은 장쩌민 독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실 붉은 색은 중국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색이지만 이 그림에서 붉은 색은 공포스런 음산함과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이 담은 보기에 아주 억압적으로 보이지만 위에는 균열이 간 선이 많이 있고 바닥도 곧 붕괴되기 직전입니다. 이것은 독재정치는 오래 지속될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이 기간중에 대법제자들은 거대한 마난을 감당했으며 그들의 정신은 영원히 빛을 발할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주의 진리를 위하여 가장 큰 선행을 하고 있는 것으로 결과는 좋은 것입니다. 보세요! 이 파룬궁 수련생이 비록 묶여서 형벌을 받고 있지만 그의 왠선(元神)은 이미 위로 승화되었답니다.
저는 중국에서 4차례 체포되어 구타, 전기 충격, 가택 수색, 감시, 불법 노동교양 판결 등을 받았지만 곧 석방된 적이 있습니다. 중국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과 같아서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감시되고 있으며, 언제라도 체포될 수 있는 상황이라 저는 진상을 알릴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국제 여론의 압력 하에 중국 정부는 할 수 없이 저를 석방했지만, 석방 후에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제가 창작한 이 그림은 당시 제가 느낀 것과 상황을 표현해 낸 것입니다.
기자 : 그림 속의 사람은 두손이 벽에 묶여 있고 다리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으며 또한 얼음 위에 앉아 있을뿐만 아니라 두손을 등 뒤로 돌려 놓는 등 온갖 혹형을 당하고 있는데, 이런 혹형들은 당신께서 직접 경험하신 건가요 아니면 다른 제자들의 경험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장 : 전기 충격은 제가 직접 경험한 것으로 그것은 대단히 고통스럽습니다. 당시에 저는 2개의 충격기로 고문을 당했습니다. 나중에 노동교양 판결을 받고 노교소에 가기 전날 그 노교소에서 한가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 파룬궁 수련생이 연공하다가 경찰에게 발각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는데 다른 28명의 제자들이 이를 보다 못해 그들에게 인권침범을 하지 말라고 호소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않자 28명의 제자들이 집단 단식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러나 노교소에서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단식에 참가한 파룬궁 수련생들을 하나하나 모질게 구타하였으며, 많은 수련생들이 구타당하여 혼수상태에 이를 정도까지 이르렀습니다.
제가 노교소에 들어간 후 목욕 시간에 그들 몸에 있는 커다란 흑자색 어혈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하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경찰이 7~8개의 전기봉을 동시에 한사람에게 장시간 충격하여 생긴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런 시달림도 진리에 대한 사람의 신념을 개변시키진 못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다른 노교소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그들은 아주 위선적인 방식으로 속임수를 진행했습니다. 특무(特務)를 이용하여 마음을 공격했는데 사람을 아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장기간 그속에 감금된 사람들은 상황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수련생으로 가장한 특무들의 거짓말과 거짓 정보에 의해 흐리멍덩해 집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세뇌하고 속이는 것이죠.
그곳에서 칭다오에서 온 한 수련생이, 제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을 때 경찰에게 맞아 눈에 초점을 잃자 경찰은 그가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멀리 스좌장에까지 가져다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뜻밖에 다시 살아났으며, 당시 그는 속으로 반드시 마음속의 말을 해야 하며 정부에게 파룬궁 탄압은 잘못임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에 다시 베이징에 갔으며 두 번째로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경찰은 모래를 신발 밑창에 뿌리고는 그의 엉덩이를 짓밟았는데, 이로 인해 그의 엉덩이 피부는 마찰로 벗겨져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몸을 움찔거렸으며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다른 한 노인은 원래 학교 선생님인데 저와 함께 노교소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쇠창살 안에 감금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마치 그림에 나오는 그 자세처럼 손이 묶여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후에 노교소 악인들은 독사를 가져다 그의 목을 물게 했답니다. 나중에 그는 독사의 부러진 이빨을 목에서 발견했고 이빨을 뽑아냈다고 합니다. 그는 수련인이기에 저항력이 있어서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이는 아주 초상적인 일이지요.
만약 속인이라면 틀림없이 죽었을 겁니다. 이와 같이 초상적인 사례들이 아주 많습니다. 난치병에 걸렸다가 수련한 후에 건강을 회복한 사례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제 주위에도 이런 예가 많아서 제 친구나 학생 가족 들 중에도 이런 상황이 있습니다. 장씨는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중국인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으니, 이 그림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바로 장씨 독재정권 탄압 하의 공포입니다.
기자 : 저는 그 공포스런 붉은 담 위에 흰글씨로 크게 ‘탄압’이란 두글자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선 이 두 글자를 통해 장씨 집단의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탄압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까?
장 : 맞습니다. 장XX는 파룬궁에 대해 “경제적으로 파탄시키고, 명예를 더럽히며, 육체적으로 소멸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장씨가 군대, 경찰, 특무에서부터 전체 행정관리까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문화 교육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정권기구를 동원한 것을 말입니다. 학생이 만약 파룬궁을 수련하거나 지지하면 진학하지 못합니다.
또한 다른 방면에서는 신문방송 등 선전매체 뿐만 아니라 외교 등 모든 것이 바로 이 일을 하는데 이용된다고 합니다. 그는 국민 수입의 4분의 1을 파룬궁을 탄압하는데 사용했으니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 압력이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모든 박해 수단을 집대성한 것입니다. 이런 혹형의 종류만도 100가지가 넘으니 얼마나 잔혹한 지는 상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인터뷰:“견인불굴의 정신” 예술전람회 소개:《정위(定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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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쿤룬 《정위(定位)》 유화(부분도) (2003년)
【정견망】
(전편에 이어 장쿤룬 교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 다음 인터뷰에서 記者는 정견망 기자인 주칭밍(朱清明)이고, 장(張)은 장쿤룬(張崑崙) 교수를 말한다.
기자 : 당신께서는 전람회에 다른 한폭의 그림 《정위(定位)》를 출품하셨는데 이번 전람회에서 가장 큰 작품으로 가히 거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시게 된 동기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장: 저는 이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우주 중에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법칙이 있습니다. 바로 “선에는 선한 보답이 있고, 악에는 악한 보답이 있다.[善有善報 惡有惡報]”입니다. 파룬궁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될 것을 가르침에도 그 사악한 세력은 박해를 진행했습니다. 누구라도 상관없이 이번 사건에 대한 태도는 바로 우주 중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악한 경찰들을 보세요. 그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대법제자들을 구타할 때 실제적으로 그들의 왠선(元神)은 지옥으로 떨어진 것으로 결말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심지어 이 개조차도 대법제자를 물 때에 그것의 원신은 곧바로 지옥의 작은 귀신이 잡아 갔습니다. 대법제자가 박해를 받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렸기 때문인데 이는 가장 큰 선행입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원신은 하늘에 올라가 신이 되고 보다 높은 경지로 진입한 것이죠. 그녀의 사장 경지가 그 층차에 이르렀기 때문에 곧 그렇게 높은 우주 층차 중으로 가서 생존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층 경지 중의 불도신(佛道神)은, 층차가 아무리 높다고 할지라도, 이번에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정사(正邪)교전 중에서, 만약 사악을 지지하고 사악을 조종하여 나쁜 일을 했다면 그는 곧 그 층차 중에 머물 수 없으며 바로 떨어져서 지옥에 들어가고 무생지문(無生之門)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기자 : 이 그림은 아주 커다란 이치를 말하고 있군요. 이 그림은 세부분으로 나뉘는데, 바로 천상(天上), 인간(人間) 그리고 지옥(地獄)입니다. 천상을 나타내는 윗부분은 색채가 밝고 투명하여 지옥의 어두침침함과 대조를 이룹니다. 서양화 중에는 이와 유사한 천상과 인간세계의 서로 다른 시공간을 한 화면에 그린 경우가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이 그림을 그리실 때 서양고전회화의 구도에서 계발을 받으셨는지요?
장 : 이렇게 말할 수는 없고, 이것은 제가 법리(法理) 중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우주의 존재 형식이 이러한데, 즉 삼계를 말한다면 바로 천상(天上), 지상(地上), 지하(地下)입니다. 삼계를 벗어나면 또한 층층의 우주 공간이 있는데 무궁무진합니다.
张:不能这样讲,这是我从法理中悟到的。宇宙的存在形式是这样的,就三界来讲,有天上、地上、地下。出了三界,还有层层宇宙空间,是无穷尽的。
그림 설명 : 장쿤룬《정위(定位)》유화(油画). 67in.x 117in.(2003)
기자 : 당신께선 서양고전회화의 기법을 채용하셨습니까?
장 : 회화 기법에 있어서는 서양 유화의 기교를 학습했습니다. 저는 원래 조각을 했으며 회화기법에 있어서는 전문적인 유화작가들만 못합니다. 제 생각에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알려 주려면 마땅히 서양의 이런 회화 형식으로 표현해야겠다고 깨달았기 때문에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그림은 제가 원래 표현하고 싶었던 내용을 기본적으로 표현해 냈다고 여겨집니다.
기자 : 조각의 형식으로 작품을 만드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장 : 조각도 만들고 있습니다. 조각의 장점이라면 아주 단단하고 강렬하다는 것인데 반면 단점도 있습니다. 서사(敍事)하는데 있어서 회화만큼 편리하지 않지요. 그래서 저는 조각도 하고 유화도 그리게 되었습니다. 어떨때는 중국화로 그리기도 합니다. 예술 수단은 일종의 언어이자 일종의 표현형식으로서 제 인식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면 바로 그 방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자 : 당신은 조각을 하셨고 조각에서는 인체비례의 파악을 아주 엄격하게 요구하는데 이 그림을 그리실 때 인체비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셨습니까?
장 : 그렇습니다. 이런 대작은 제 일생 중 최초의 전문적인 유화 창작입니다. 착실한 기본기 훈련은 예술 창작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지요.
기자 : 경험으로 보시기에 좋은 예술가가 되려면 기본기 훈련이 아주 중요하다고 보십니까?
장 : 예. 한 예술가로서 말하자면 기교는 최소한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지요. 만약 기교가 없다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기기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기교는 단지 가장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것이 창작의 전부는 아니며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기자 : 중국 고대의 문인들은 도덕수양을 강조했으면 예술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좋은 예술가가 되자면 도덕수양에 있어서도 요구가 아주 높았습니다.
장 : 맞습니다. 당신이 제기한 문제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예술의 근본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글이나 그림이 바로 그 사람을 나타낸다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한 획을 그릴 때에도 화가의 인품이나 수양, 경험 심지어 건강상태까지 모든 정보가 같이 들어갑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 내면 세계의 거울이지요. 그러므로 예술가가 되자면 우선적으로 고상하고 도덕이 있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며, 사상이 있고 사물을 깊은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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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쿤룬(張昆侖) 교수 약력
장쿤룬 교수는 중국 산둥성(山東省) 출신으로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산둥 예술대학 조각연구실 주임을 역임했다. 1989년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McGill)대학 방문교수로 있었고, 1995년에는 캐나다 시민권을 얻었다. 1996년 산둥 예술대학에 돌아와 조각연구소 소장을 맡았으며 많은 대형 기념비와 장식예술작품을 창작했다. 아울러 작품 중에는 중국화, 서양회화 등도 같이 창작하여 그 명성이 높다.『세계 명인록』, 『세계 조각전집』, 『세계 화인(華人) 예술가 성취박람』, 『중국 저명 서예가와 화가 대전』등 수많은 서적에 이름이 올라 있다.
장쿤룬 교수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노동교양 처분을 받고 노동교양 기간 중에 전기 충격, 강제 세뇌, 24시간 감시 등 정신적 및 육체적인 시다림을 받았다. 이후 캐나다 정부와 국민들의 구원 노력에 힘입어 2001년 1월 캐나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인터뷰 : 《견인불굴의 정신》 예술전람회 소개 (5)
[정견망]
왕웨이싱(汪衛星) 여사 인터뷰
기자는 정견망기자 주칭밍(朱清明)이고 왕은 화가인 왕웨이싱(汪衛星) 여사를 가리킵니다.
기자 : 왕여사님, 창작 경력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왕 :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아버님은 미술교사셨는데 제가 어렸을 때 하루는 빈 깡통 하나를 갖다 주면서 그리게 하셨습니다. 그 때 저는 제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진정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후에 저는 그림을 그리면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림을 저의 직업으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미 30년 동안 그림을 그렸습니다. 문화혁명 기간에는 개인적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림은 자신의 노력이 제일 중요합니다. 후에 전문적인 교육을 일년 더 받으면서 인체(人體)를 그렸는데 저에게 도움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데생은 제일 기본이기 때문에 색채가 있는 그림이든 아니든 모두 사실파 그림을 그리는데 기초를 닦아 주었습니다.
미국에 간 후, 저는 샌프란시스코 예술대학에서 그림을 배웠는데 모두 현대파 그림이었습니다. 저는 기본기가 좋았기에 현대파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현대파의 일부 사유 방식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런 사유 방식은 전통적인 사유만 하던 저에게 있어서는 일종 보완이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사유 방법이 비교적 개방적이어서 한 가지 문제를 생각할 때 단일하게 사고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그림뿐만이 아니라 음악, 시가 등 예술 표현 방식이 포함됩니다. 때문에 저는 당시 그러한 그림들이 저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현대파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많이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졸업한 뒤 줄곧 현대파의 수법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1995년까지 말입니다. 나중에 저는 수련을 시작했지요.
기자: 정확히 어느 해에 수련을 시작하셨습니까?
왕: 1996년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현대파 그림을 95년까지 그렸다고 하는 겁니다. 저는 미(美)를 추구하면서 항상 순수하고 영원한 것을 찾으려고 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찾지 못했습니다. 저는 현실 생활은 불완전한 것이라는 알게 되었고 제가 찾으려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왕 모든 것이 다 불완전하다면 그 불완전함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 쪽으로 노력하기 시작했지요. 예를 들어 땅을 그린다고 한다면, 땅에 있는 돌들의 거친 표면은 바로 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보여주려 할수록 저는 그림에 재미를 느꼈으며 구도(構圖) 상 틀에 얽매이지 않고 불완전한 것들을 조화롭게 한데 모아 놓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그 당시 사용했던 수법이었습니다.
수련을 하기 시작한 후, 일감은 사실파 그림에만 몰려 있었고 전처럼 큰 주제로 내심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릴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 시기 저는 수련 때문에 창작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갈수록 평온해 졌습니다. 그 때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저는 하버드 대의 화랑에서 그림 한 폭을 보았는데 순간 저는 예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수련을 통하여 저는 우리가 그림을 통하여 보여주려고 했던 진실이라는 것은 단지 우리의 당시 마음일 뿐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련을 통해 내면이 바뀌고 난 후에는 그림에 담고 싶은 내포가 달라졌습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미를 보여 주고 싶었지요. 돌은 어디까지나 돌일 뿐입니다. 왜 돌을 표현하려고 했을까요? 그건 제 자신이 돌의 차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그 차원을 벗어났기에 더 이상 돌을 보여주고 싶지 않게 되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이젠 다른 시선으로 이 세상을 보게 되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왕: 미에 대한 표준이 달라졌다는 거지요.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무슨 美를 표현한다는 것은 가식적이고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저는 고전적인 그림에 관심이 없었기에 매 번 그림 전시가 있을 때면 그런 그림들은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전적인 그림은 이미 지나간 과거만 보여줄 뿐이고 인상파, 현대파 그림만이 우리와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변화가 생기고 마음이 아주 평온해 졌을 때 다시 그런 그림들을 보니 그제야 고전적인 그림들도 우리와 가까운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구들은 그런 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고 저의 그림이 퇴보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지금 그린 그림은 산속에서 흥얼거리는 노래와 같다고 하면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갈수록 더욱 고전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지요. 한번은 제가 파리의 루브르 궁에서 스케치하고 있는데 제 친구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견딜 수 있냐고 하면서 놀라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에게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친구가 놀라워했다는 것은 제가 그 전에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인데 만약 마음이 그 정도로 조용하지 못했다면 그림은 그저 표상을 그린데 불과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정말 잘 그렸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냥 보면 피부는 그냥 피부일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조용히 하고 보면 차고 따뜻한 온도의 차이도 느낄 수 있어 아주 자세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리는 그림은 인상파가 강조하는 것처럼 처음 인상 그대로 농도를 똑같이 하여 한조각 한조각 씩 칠하지 않습니다. 고전적인 그림은 색조를 옅게 하여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처럼 아주 정확하게 매 하나의 음을 표현하지요. 이것은 간단하고 거친 수법의 인상파와는 달리 많은 노력을 한 결과입니다.
저는 현대파를 선호하는 과정에 사람들이 갈수록 게을러진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고전적인 것을 귀납하고 간단하게 하여 한 가지 색상을 천 가지 만 가지로 보여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짙고 옅은 농도의 변화도 없이 그저 한가지로 보여주지요. 제가 10전에 그렸던 그림들을 아직도 좋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그림이 완성되면 더 이상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하면 잘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저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그림이 완성된 후에도 많은 수정작업을 합니다. 더욱 미세한 부분까지 잘 표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이어짐)
인터뷰: ‘견인불굴의 정신’ 예술전람회 소개: 《아빠는 어디 있어요?》
왕웨이싱《아빠는 어디 있어요?》유화,24in x 30 in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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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망】편집자의 말:7월15~16일 워싱턴DC 法輪大法협회 주최로 “견인불굴의 정신”이라는 주제의 예술전람회가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하원 의원회관인 레이번 하우스 전시회장에서 정식으로 열렸다. 이번에 전람회에 참가한 작품은 모두 파룬궁 수련생들이 창작한 것으로 그들 중에는 아직도 불법으로 감금되어 감옥에 있는 사람도 있다.
5년의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겪으면서 이 예술가 수련생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세인들에게 파룬궁을 수련한 후에 인심(人心)이 바르게 잡힌 즐거움, 파룬궁 수련생들이 혹독한 시달림과 피비린내 나는 탄압 하에서 표현해 낸 견인불굴의 꺽을 수 없는 정념, 眞善忍 우주 진리에 대한 끊어버릴 수 없는 추구에서부터 정의는 끝내 사악을 이긴다는 믿음에 이르기까지를 표현해 내고자 하였다.
이 예술가들은 각자 특징이 있으며, 그들은 힘써 전통 회화기법을 이용하여 이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전람회에 참가한 각 화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들의 구상, 창작과정 및 사용한 기법 등을 연속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왕웨이싱(汪衛星) 여사 인터뷰
기자-정견망기자 주칭밍(朱清明)
왕-왕웨이싱(汪衛星) 여사, 화가
기자: 여사께서는 다이즈전(戴志珍) 및 그녀의 딸과 관련된 《아빠는 어디 있어요?》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셨는데 이 그림의 구도(構圖)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왕: 《아빠는 어디 있어요?》라는 말은 한 아이에게 있어서 아주 단순한 감정을 담은 말입니다. 아빠가 보이지 않으니 아빠를 찾는 겁니다. 구도에 대해 말한다면, 아이가 아주 어리다고 해서 엄마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놓으면 그림이 구도상 아주 길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윗부분에 대한 구도가 어려워집니다. 때문에 저는 아이를 좀 높은 위치에 놓았는데 아이가 계단에 서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엄마는 아이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게 했고 아이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있게 처리했습니다.
또 그림의 오른쪽 공백에는 높게 솟은 문틀의 일부분을 넣었고 왼쪽 엄마의 머리 위에는 공간을 남겨 두었습니다. 이렇게 한 결과 오른쪽과 왼쪽이 높고 중간이 낮은 구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V'자형 등 개념적으로 그림을 구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보기에 편하도록 구상할 뿐이고 또 그렇게 하면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잘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원래 큰 그림에 집착하면서 큰 그림이어야만 큰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닙니다. 제가 끌렸던 그림들은 모두 큰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깊은 내포를 담아낸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제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고 작은 그림에 깊은 내포를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그림의 핵심은 아이의 눈입니다. 엄마 혹은 아빠의 얼굴이 더 튀어 보이면 저는 다시 그렸습니다. 사실 그림을 어떻게 처리하는 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만약 엄마와 아빠를 너무 자세하게 그리면 보는 사람들은 첫 눈에 아이의 눈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아이의 신체를 포함하여 저는 그림의 많은 곳에 대하여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 아니라 후반의 처리가 중요합니다. 보여 주려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처리하는 방법도 틀려지고 많은 심혈을 기울여야 하지요.
기자: 확실히 저도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여자 아이의 눈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 다음 여자 아이의 얼굴이 보였고 그 다음 엄마, 아빠가 보였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그림입니다.
왕: 후반에 정말 많은 수정을 했지요.
왕웨이싱(汪衛星) 《아빠는 어디 있어요?》(부분도) 유화 24in x 30in (2004)
기자: 서양의 많은 명화(名畵)들은 인물의 눈과 얼굴을 아주 세밀하게 처리했고, 특히 눈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주제를 표현하는 핵심 역할을 했는데 이 그림도 그런 것 같습니다.
왕: 이 아이는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데 저는 그렇게 한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마음이 그리 평온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입도 벌리고 있고요. 저는 예전에는 아름다움을 강조하면서 그림을 그릴 때 인물의 입을 아주 예쁘게 그렸지만 이번에는 실제 존재하는 아이이기 때문에 아빠를 잃은 아이의 모습을 이렇게 보여주었습니다. 입은 약간 벌리고 이마는 찌푸리고 있게 말입니다.
그림 《아빠는 어디 있어요?》의 배경 자료
이 작품은 파두(法度)의 이야기에 근거하여 창작한 것이다. 파두는 9개월 무렵 아빠를 잃었다. 파두는 아빠에게 전화하는 놀이를 즐겼는데 자문자답하면서 아빠에게 마음속 말을 털어 놓았다. 또 기분이 안 좋으면 항상 울면서 아빠를 찾았다. 파두의 아버지인 천청융(陳承勇)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박해받아 사망했다. 파두의 엄마는 호주 국적을 가진 다이즈전(戴志珍) 여사이다. 그녀는 어린 파두를 데리고 세계 십여 개국과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중지시켜 줄 것을 호소하였다.
(계속 이어짐)
인터뷰: “견인불굴의 정신” 예술 전람회 소개 :《무엇 때문에》
그림설명: 왕웨이싱(汪衛星) 유화, 26in x 20 in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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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망】편집자의 말:7월15~16일 워싱턴DC 法輪大法협회 주최로 “견인불굴의 정신”이라는 주제의 예술전람회가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하원 의원회관인 레이번 하우스 전시회장에서 정식으로 열렸다. 이번에 전람회에 참가한 작품은 모두 파룬궁 수련생들이 창작한 것으로 그들 중에는 아직도 불법으로 감금되어 감옥에 있는 사람도 있다.
5년의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겪으면서 이 예술가 수련생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세인들에게 파룬궁을 수련한 후에 인심(人心)이 바르게 잡힌 즐거움, 파룬궁 수련생들이 혹독한 시달림과 피비린내 나는 탄압 하에서 표현해 낸 견인불굴의 꺽을 수 없는 정념, 眞善忍 우주 진리에 대한 끊어버릴 수 없는 추구에서부터 정의는 끝내 사악을 이긴다는 믿음에 이르기까지를 표현해 내고자 하였다.
이 예술가들은 각자 특징이 있으며, 그들은 힘써 전통 회화기법을 이용하여 이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전람회에 참가한 각 화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들의 구상, 창작과정 및 사용한 기법 등을 연속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왕웨이싱(汪衛星) 여사와의 인터뷰(계속)
※다음 문장에서 기자는 정견기자 주칭밍(朱淸明)을 말하고 왕(汪)은 화가인 왕웨이싱(汪衛星) 여사를 의미합니다.
기자: 《무엇 때문에》이 그림은 많은 관객들을 매료시켰으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에 나오는 남자 어린이의 눈과 얼굴을 보고 너무나도 감동적이라고들 말합니다. 당신께선 이 그림의 이야기 배경을 소개해 주실 수 있습니까?
왕(汪): 이 그림은 저도 별 구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언젠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친구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그녀는 아들과 함께 바로 이렇게 감옥에 갇혀 있었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이것이 진실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뭐 별로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릴 때, 저는 이렇게 더럽고 헤어지고, 어린애가 얻어맞아 헤어진 것을 표현해본 적이 없어서, 감히 그 정도까지는 그리지 못했습니다. 대신 제가 그려 낸 어린이는 아주 깨끗하며 얼굴의 피부도 아주 좋고 윤기가 있습니다.
저는 옷을 더럽게 처리했지만 그래도 실제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감옥에서 그들은 엄마와 함께 아이도 때렸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저는 실험적으로 눈에 어혈(瘀血)을 첨가했습니다. 눈을 얻어 맞으면 피가 나잖아요. 이 어머니는 일부러 제게 와서 알려주기를 눈에는 눈물이 좀 있어야 하는데 흘러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약간의 눈물이 있어야 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모델이 없었는데 그녀가 직접 모델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 후에, 제가 눈물을 그려 넣었으나, 눈 부분이 너무 밝아서 눈물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처리한 후(어혈을 첨가한 것을 가리킴-편자 주), 눈의 흰자위 쪽이 어두워졌고 적은 눈물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눈물이 흘러내리지는 않는데, 이는 남자 아이는 여자 아이와 같지 않기 때문이며 또는 아마 울다가 눈물이 말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표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묻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가? 무엇 때문인가?” 그는 무엇 때문에 어머니가 여기에 갇혀 얻어 맞았으며, 자신도 얻어 맞았는지 모르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여기에 갇혀서 나갈 수 없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의 발은 여기에 서 있지만 손은 저기에 있어서, 몹시 나오고 싶어하지만 나올 수 없는 상황을 표현합니다.
왕웨이싱(汪衛星) 《무엇 때문에》(국부)유화, 26in x 20 in (2004)
기자: 맞습니다, 어린이의 그런 곤혹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아낼 수 있습니다. 또 표정 표현이 아주 진실합니다. 당신은 늘 어린이를 그리며 모두 깨끗한 그림만 그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몸에 상처가 있고 피가 묻은 이런 어린이를 그릴 때 곤난이 많지 않았습니까?
왕(汪): 그렇습니다. 저는 모두 아름다운 것만 그립니다. 그러나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한 어린이가 감옥에 서 있는데 어머니는 맞아서 이 지경이 되고 그는 깨끗하다면 그것은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울러 어머니가 특별히 이 그림을 보러 왔을 때, 제게 말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실험적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던 겁니다.
기자: 당신은 아이 어머니의 발을 일부분만 나타냈는데, 어떻게 이렇게 작은 일부분을 나타냄으로써 모친이 얻어맞아 땅에 누워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내셨습니까?
왕(汪): 원래 제가 그림을 그릴 때 늘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완전한 구도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하고자 해도 하나의 완전한 구도를 사용합니다. 얼마 전에 제가 대 도회지 박물관에 가서 하바로티(Havarotti)의 그림 한폭을 보았는데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메고 있었으며 옆에서 누가 그를 때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줄곧 이 문제를 사고하였기 때문에, 큰 그림 대신 작은 그림을 그려서 사람들의 눈길을 한 점에 집중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제가 본 아주 많은 그림들은 모두 매우 완전한 것이어서, 저는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은지 어떤지를 잘 몰랐습니다.
마침 박물관에서 제 시선을 가장 끌어 당기는 한 폭의 그림을 보았는데, 바로 그리스도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메고 옆에 있는 사람은 다만 머리만 있고 표정이 있는데 마치 사진을 잘라낸 것과 같았습니다. 후에 저는 만약 이 사람들의 신체를 모두 그려낸다면, 이렇게까지 저를 잡아 끌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 눈길이 갑자기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그가 그린 것은 매우 진실하며 또한 매우 감동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게 제가 하려는 것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처리한 것은 관중들의 시선을 어린이의 얼굴에 모으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런 처리는 어머니가 얻어 맞아 움직이지 못함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기자: 당신의 이 그림은 특히 국부의 세부 묘사를 치중하여 주제를 표현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을 끌어 당기는 이유입니다.
왕(汪): 저는 바로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제가 주려는 정보를 볼 수 있게 하자는 의도였습니다.
기자: 당신의 그림 중에 어린이에 대한 묘사는 모두 섬세하며 어린이의 눈길과 표정을 통해 아주 섬세하게 묘사하였습니다. 당신은 아동을 즐겨 그리는데 그들의 표정, 내심의 감정을 비교적 잘 이해합니까?
왕(汪): 저는 아동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즐겨 그리는데 노인도 그립니다. 아마도 저는 사람의 내심을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회화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에도 속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왕웨이싱(汪衛星) 《강제 음식물 주입》유화(油畵) 2004년
【정견망】편집자의 말:7월15~16일 워싱턴DC 法輪大法협회 주최로 “견인불굴의 정신”이라는 주제의 예술전람회가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하원 의원회관인 레이번 하우스 전시회장에서 정식으로 열렸다. 이번에 전람회에 참가한 작품은 모두 파룬궁 수련생들이 창작한 것으로 그들 중에는 아직도 불법으로 감금되어 감옥에 있는 사람도 있다.
5년의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겪으면서 이 예술가 수련생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세인들에게 파룬궁을 수련한 후에 인심(人心)이 바르게 잡힌 즐거움, 파룬궁 수련생들이 혹독한 시달림과 피비린내 나는 탄압 하에서 표현해 낸 견인불굴의 꺽을 수 없는 정념, 眞善忍 우주 진리에 대한 끊어버릴 수 없는 추구에서부터 정의는 끝내 사악을 이긴다는 믿음에 이르기까지를 표현해 내고자 하였다.
이 예술가들은 각자 특징이 있으며, 그들은 힘써 전통 회화기법을 이용하여 이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전람회에 참가한 각 화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들의 구상, 창작과정 및 사용한 기법 등을 연속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왕웨이싱 여사 인터뷰 (계속)
※ 기자는 정견기자 주칭밍(朱清明)을 말하고 왕은 화가인 왕웨이싱(汪衛星)여사를 말한다.
기자: 《강제 음식물 주입》이 그림은 당신의 몇폭 그림 중에서 박해의 잔혹함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그림의 중심부위는 젊은 여자의 얼굴인데 입주위는 온통 혈흔(血痕)이 낭자하여 관중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다. 이 그림의 구상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왕 : 제가 아는 분들 중에 강제 음식물 주입 고문을 당한 사람이 있었어요.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난 후 이를 표현해 내려고 생각했습니다. 표현함에 있어서 저는 관중들이 단번에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정보를 알아보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밝은 부분에 여자 수련생의 얼굴을 배치하고 눈과 눈썹을 찡그리고 코에는 피가 흐르게 했습니다. 또한 경찰을 어둡게 처리하되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게 하였고 이를 통해 여자 수련생의 얼굴 빛이 그들의 얼굴에 반사되게 했습니다. 그 반사된 따스한 빛이 암부(暗部)를 차거운 색조로 변하게 했습니다.
저는 빛의 반사를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음영(陰影)이 지게 하였어요. 맨 뒤에 있는 경찰은 더욱 멀리 있는데 암부(暗部)에 있고 그의 밝은 부분은 차거운 색조로, 그의 암부(暗部)만 온화한 색조로, 이렇게 처리하였습니다. 이 사람을 그리기가 아주 어려웠어요.그는 이렇게 멀고 어둡기 때문에 조금만 밝아도 밝으로 튀어 나오는데 저는 부단히 이를 내리눌러야 했습니다. 그림을 그림에 있어서 명암의 대비와 하모니의 처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꼭 알맞게 처리해야 합니다.
왕웨이싱(汪衛星) 《강제 음식물 주입》유화(油畵) 2004년
기자 : 이 그림을 그리실 때 모델을 사용하셨습니까?
왕 : 이 그림을 그릴 때 사람의 동작이 관련되기 때문에 몇분께 부탁해서 사진을 찍은 후 참고로 하였습니다.
기자 : 지금 한창 구상하시고 있는 그림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왕 : 저는 《매화(梅)》란 그림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詩)에서 계발을 받았지요.
탁세(浊世 )에 핀 청련 같은 매화 억 만 송이
그 자태 찬바람에 더욱 어여뻐라
연일 내리는 눈비(雪雨 )는 신의 눈물이요
부처의 눈물이라네
매화 돌아와 피어나기 바라네
세상사 집착에 미혹되지 말고
정념을 견정히 하거라
먼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름은
오로지 이 한 차례 위함이어라
(『홍음(2)』)
저는 이 시를 아주 좋아합니다. 이 시는 본래 원곡(元曲)인데, 아주 아름답습니다. 읊을적에 저는 “연일 내리는 눈비(雪雨 )는 신의 눈물이요 부처의 눈물이라네 매화 돌아와 피어나기 바라네”중의 매화는 우리 수련인을 가리킨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이번 박해 중에서 고통을 받고 있지만 정념을 견정히 해야 합니다. 먼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름은 오로지 이 한 차례를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화면 위에 한 제자가 눈위를 걷고 있는데 옷과 바지에는 핏자국들로 얼룩얼룩합니다. 경찰은 그래도 그녀를 때리고 있어요. 눈보라가 아주 거세고 그녀는 높은 언덕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날씨는 매우 춥습니다. 그녀는 아주 얇은 옷을 입었으나 경찰들은 솜외투를 입었습니다. 그 경찰은 고개를 뒤로 돌린 채 총자루는 계속 그녀의 발을 때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발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으나 그녀의 머리는 위로 쳐들고 있으며 머리 위에는 태양이 있고 눈에는 약간의 놀람과 기쁨의 빛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파룬을 보았을 겁니다. 천상에서는 신과 부처의 눈물이 흐르고 있어요. 그림 위에는 아주 많은 매화꽃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구상에 불과하고 아직 그림에 착수하지는 않았습니다.
기자 : 당신께서 경험하시기에 훌륭한 화가가 되려면 기본기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왕 : 물론입니다. 화가가 만약 기본기가 없다면 모든 게 다 영(零)입니다. 제가 샌프란시스코 예술 학교(San Francisco’s Art Institute)에서 공부할 때 실제 물건을 십년 동안 그렸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무엇을 그리고자 하면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은 훌륭한 기본기를 구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엇을 그려도 신통하지 않습니다. 당시에 학장은 기본기를 별로 중시하지 않아서 학생들은 매우 고민을 하다가 급기야는 학교 측에 기본기 훈련을 강화하자는 의견을 제출했습니다. 나중에 학원에서는 학장을 교체했습니다.
새로운 학장님은 물건을 아주 흡사하게 그렸으나 사상이 없었어요. 그 결과 학생들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워 했습니다. 원래 학장은 비록 학생들에게 많은 기본기를 가르치진 않았지만 대신 학생들에게 시를 읊게 함으로써 내심의 감수를 발굴해 냈습니다.
반드시 훌륭한 기본기를 구비해야만 표현하려는 물건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사상이 없어도 않됩니다. 이번 그림전시회를 말한다면, 예술가로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박해받아 죽어가는데, 우리들이 그냥 방관자가 되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실제상 진정한 예술가가 아닙니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린다 하여도 그저 범속한 화공에 불과할 따름이지요. 사람은 영혼이 있고 양심이 있고 도의가 있기때문입니다. 많은 유명 예술가들은 관건적인 때에 모두 양심에 비추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표현할 겁니다.
기자 : 당신의 말씀은 예술가로서 도덕, 수양, 사상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인가요?
왕 :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림은 아주 잘 그리지만, 한 사람이 그의 면전에서 다른 사람한테 맞고 있어도 아무 느낌이 없거나, 심지어 얻어 맞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심령(心靈)은 실제로 아름답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잔인하게도, 다른 사람이 맞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 자리에 서서 무관심하다면, 제 생각에 그는 진정한 예술가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저는 “견인불굴의 정신” 예술전람회와 같은 이런 그림전시회에 참여하길 원합니다. 예술가로서 저는 이런 때에 반드시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 회화의 매 획(劃)마다 모두 화가의 정보를 지니고 있으므로, 오직 내심이 아름다워야 만이 그림 속에 진정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왕 : 마음속이 어떻다면 제가 그려낸 그림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만일 제 마음이 아주 난잡하다면 붓놀림도 난잡할겁니다. 제 마음이 안정하지 못할 때는 전혀 세밀한 부분들을 그려낼 수 없습니다. 고요한 상태에서 조용히 체험해야 만이 자신의 내면 세계와 다른 사람의 내면 세계 및 표현하고자 하는 물건을 아주 안정적인 기법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제가 수련과정 중에서 발견한 한가지 아주 흥미로운 현상인데, 매 예술가마다 모두 자신의 풍격(風格)과 자신의 습관이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물건을 아무렇게나 놓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건 좋지 않다고 한다면 저는 승인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사람은 각기 개성이 있기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으면 곧 그것을 하는 것으로 이러한 것을 결점으로 여기지 않았을 겁니다. 제 원래 생활도 본래 아무런 규율이 없어서,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자고 싶으면 자고, 저는 이래야만이 예술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가답지 않다고 여겼던 거지요.
수련을 한 이후에야 저는 전혀 이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모두 많은 좋지 않은 물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좋지 않은 물건들을 예술가의 표지로 여기죠. 예술가라서 이렇다고 간주하며, 사람이 아주 조용하고 아주 정결(淨潔)하면 예술가답지 않다고 하는데, 모두 사람의 이러한 개념으로 귀납한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아주 훌륭한 예술가라 할지라도 만일 아주 합리적인 생활 안배가 없다면 그는 그림을 잘 그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싶을 때 몇 획을 그린다면 그것은 모두 일종의 정서(情緖)를 갖고서 그린 것이라 그는 조용해질 수 없습니다. 조용해질 수 없는 사람은 섬세한 것들을 제대로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전에는 몰랐고, 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후 절실한 경험을 통하여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한사람이 술을 마셨다면 그의 붓놀림은 필연코 퇴폐적이고 난잡할 겁니다. 그는 이러한 심정과 상태에 있기 때문이죠…….
수련을 통하여 저의 대뇌는 매우 명석해져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가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시간이 검증하는 것으로 저는 다시는 부화뇌동 하지 않을겁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좋은 예술이라는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화가 왕웨이싱 여사 약력
왕웨이싱은 예술 교사로 상해교통대학과 샌프란시스코 예술대학을 졸업하였다. 일찍이 중국과 미국에서 여러 차례 그림전에 참가하였고 세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2002년 5월 캠브리지 다(多)문화 예술센터(the Arts and Cultural Center in Cambridge)에서 《미망(迷茫) 속의 탐구》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 그림전은 예술과 생활 중에서 그녀가 추구하는 회화의 성과를 종합하였다. 그녀는 파룬따파가 자신을 인도하여 망망한 속에서 걸어나와 반본귀진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감수를 표현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자신의 예술작품을 사랑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바친다고 하였다.
인터뷰: ‘견인불굴의 정신’ 예술전람회 소개 (9)
사진 설명 : ‘견인불굴의 정신’예술전람회장의 모습
【정견망】
샤오핑(肖平)여사 인터뷰
※기자는 정견기자 주칭밍(朱清明)을 말하고 샤오는 화가인 샤오핑 여사를 가리킨다.
기자 : 샤오 여사님, 당신의 창작 경력을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샤오 : 제 경력은 국내와 국외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릴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기자 : 대략 몇세 쯤이셨죠?
샤오 : 여섯 살 무렵이예요. 15세까지 전문적으로 선생님을 모셨는데 산수화를 그리는 분이셨습니다. 저는 그분을 따라 4년간 산수화(山水畵)를 배웠습니다. 중국 전통의 중국화였지요. 열 살 때는 중국에서 아주 유명한 선생님을 모시고 서예를 배웠는데 안진경체를 배웠습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에 가기 전까지는 줄곧 데생을 배웠는데 기본기 훈련을 한 셈이지요. 대학입시에서는 미술 대학에 시험을 치러 3등을 했습니다.그러나 정원문제로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지역에는 그해 정원이 한 명밖에 없었거든요. 운명의 배치겠죠. 그리하여 저는 기회를 놓치고 나서 출국을 선택했습니다. 대략 92년 경에 중국을 떠났습니다.
기자 : 해외에서의 회화경력도 소개해 주시겠어요?
샤오 : 저는 출국한 후 메릴랜드 대학(University of Maryland)에서 도예를 배웠습니다. 수채화와 수분화(水粉畵 water crayon)도 배웠습니다. 저는 당시에 많은 창작을 했는데 모두 현지의 풍토와 인정(人情)에 대한 창작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여러 해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책을 읽고 생활하고 일하고 아주 많은 현지 토착인들과 접촉했습니다. 저는 그런 소재를 찾아내는데 많은 흥미를 가졌어요.
기자 : 주로 중국화와 수채화를 그렸습니까? 유화는 접촉한 적이 없으신가요
샤오 : 제가 중국에서 회화의 기본기를 배울 때 색채에 대해 배웠으며 기본적으로는 수분화를 배웠습니다. 유화는 많이 접촉하지 못했어요.
기자 : 언제부터 수련을 시작하셨습니까?
샤오 : 저는 99년 5월부터입니다.
기자 : 지금까지 이미 5년이 되는군요. 수련을 하신 이후 회화에 대한 인식과 기법에 어떠한 영향이 있었습니까?
샤오 : 수련한 후 그린 그림이 과거보다 더 대범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심태가 더욱더 순수해졌다고 느껴져요. 과거에는 훌륭한 화가가 되어 이름을 날리고 나이 들면 명성과 재물을 동시에 얻는게 목적이었습니다. 친구들도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지요. "야, 샤오핑! 네가 어느날 대화가가 된다면 우리가 수장한 네 그림값도 아주 비싸겠지.”
물론 제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동력하에서 힘써 노력하여 자습하고 연마했습니다. 수련한 이후에 저는 사람은 이런 것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욱 아름답고 추구할 가치가 있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중국의 산수를 그려는데 산수는 원래 의경(意景)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으로 단순히 기법을 추구한 것만이 아닙니다.
저는 대법 책을 볼때 너무나도 좋다고 느꼈어요. 만일 전 중국,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두 와서 배운다면 그것은 매우 아름다울 거라는 그러한 감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을 내려놓은 후 심태가 아주 평화로웠으며 저의 화면 위에서도 그러한 상서로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신과 물질은 일성(一性)입니다. 저의 심태가 개변되자 제가 그린 물건도 따라서 정화(淨化)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그린 그림이 날이 갈수록 대범해진다고 느껴집니다.
기자 : 그럼 당신께서도 날이갈수록 대범해지십니까?
샤오 : 맞아요. 저도 날이 갈수록 대범해집니다. 많은 친구들은 저를 보고 아주 젊어보일뿐만 아니라 성취도 있다고 합니다. 저는 세 차례의 개인 전람회를 열었고 총독 표창도 받았습니다. 현지에서는 그래도 매우 성공한 화가였습니다. 수련한 후에 저는 더욱더 제가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고 되었고, 생활에서도 더욱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예전에 많은 사람의 도리를 알고 있었지만 수련을 한 후에야 비로소 수련인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게 되었고 심신 각 방면에서 모두 제고하게 되었습니다. 신체에는 아무런 병도 없어졌고 이 책을 보자 참으로 잘 썼다고 생각되어 아무런 배척하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인터뷰: ‘견인불굴의 정신’ 예술전람회 소개 : 《천인합일》
【정견망】
샤오핑(肖平) 《천인합일(天人合一)》 유화油画, 47 in. x 69 in.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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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핑(肖平)여사 인터뷰 (계속)
※기자는 정견기자 주칭밍(朱清明)을 말하고 샤오는 화가인 샤오핑 여사를 가리킨다.
기자 : 여사께선 이번에 5폭의 작품을 출품하셨습니다. 그중 하나가 《천인합일》인데 한 여자 수련생이 가부좌를 하는데 머리 위에서는 빛기둥이 천상(天上)과 바로 연결되어 있고 위에는 작은 영해(嬰孩)들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구상하시게 된 동기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샤오 : 제가 가부좌 할 때 느낀 감수가 있었어요. 느슨해져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아무런 잡념도 없을 때 아주 편안한 감을 느꼈습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보아도 당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낄 겁니다. 사람이 눈을 뜨고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얼굴에 마스크를 씁니다. 그러나 가부좌 하는 그때에는 진정한 당신 자신이며 가장 아름답고 가장 편안하며 가장 느슨합니다. 저는 대법 수련이 가져온 그런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고 그래서 가부좌를 그린 것입니다. 책에 삼화취정(三花聚顶)이라고 씌어진 부분이 아주 흥미로웠는데 저는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내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삼화취정은 수련인이 일정한 층차에 도달했을 때 출현하는 것으로 바로 세송이 꽃이 머리 위에서 회전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바닷가에서 오랫동안 거주한 관계로 큰 바다와 푸른 하늘이 만나는 광활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동경하는 경지이지요.
기자 : 구도상에서 볼 때 당신의 그림은 직선으로 된 빛기둥이 위로 올라가는 모양이라 구도잡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이 빛기둥을 처리하실 때 구도를 어떻게 설계하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샤오 : 저는 삼화취정을 소재로 삼고자 생각했을 때 본래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연계되는 것을 빛기둥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표현을 더 심도있고 광범위하게 하기 위하여 바다를 먼 배경으로 이용하여 인물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인물과 빛기둥을 돋보이게 할 수도 있고, 관객들에게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지요.
기자 : 관객들이 한눈에 이 빛기둥과 여자를 보게 하시려는 생각이셨군요?
샤오 : 저는 그녀들이 하나의 정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 그림속의 작은 영해들은 화면의 균형을 잡기위해서 그리셨나요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샤오 : 천목이 열린 동수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다른 공간의 작은 영해들은 아주 장난이 심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린 이유는 하나는 그림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도상에서 볼 때 비교적 보기가 좋았기 때문에 S자 형을 이루도록 했습니다. 구도상에서 직선적인 감각을 타파하고 일종의 활력을 준 셈이죠. 그래서 저는 그들을 그리기로 한 겁니다. 그들은 진실한 존재이지만 단지 일반인들이 보지 못할뿐이지요. 볼 수 있는 사람은 제게 이런 모양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샤오핑 《천인합일(天人合一)》 유화(부분도),47 in. x 69 in. (2004)
기자 : 가부좌 한 여인은 당신과 모습이 흡사한데 혹시 자화상(自畵像)인가요?
샤오 : 기본적으로 제 사진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지만 완전히 똑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과 비슷하게 그리기는 쉬워도 비슷하지 않게 그리기는 어렵습니다. (웃음) 그림에는 자신의 정보가 담겨있기 때문이지요. 제 친구들은 모두 제가 그린 그림을 구별해 낼 수 있는데 제 정보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기자 : 이 그림은 당신의 사진을 모방해서 그리신 건가요?
샤오 : 예, 단 순결함을 표현하기 위해 윗옷 색을 흰색으로 바꿨고 두발도 짧게 그렸습니다. 그리고 인물의 표정과 얼굴모습도 완전히 똑같지는 않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인터뷰: ‘견인불굴의 정신’ 예술전람회 소개 : 《선택(選擇)》
【정견망】편집자의 말:7월15~16일 워싱턴DC 法輪大法협회 주최로 “견인불굴의 정신”이라는 주제의 예술전람회가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하원 의원회관인 레이번 하우스 전시회장에서 정식으로 열렸다. 이번에 전람회에 참가한 작품은 모두 파룬궁 수련생들이 창작한 것으로 그들 중에는 아직도 불법으로 감금되어 감옥에 있는 사람도 있다.
5년의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겪으면서 이 예술가 수련생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세인들에게 파룬궁을 수련한 후에 인심(人心)이 바르게 잡힌 즐거움, 파룬궁 수련생들이 혹독한 시달림과 피비린내 나는 탄압 하에서 표현해 낸 견인불굴의 꺽을 수 없는 정념, 眞善忍 우주 진리에 대한 끊어버릴 수 없는 추구에서부터 정의는 끝내 사악을 이긴다는 믿음에 이르기까지를 표현해 내고자 하였다.
이 예술가들은 각자 특징이 있으며, 그들은 힘써 전통 회화기법을 이용하여 이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전람회에 참가한 각 화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들의 구상, 창작과정 및 사용한 기법 등을 연속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샤오핑(肖平) 《선택》 유화(油画), 40 in. x 30 in. (2004)
샤오핑(肖平)여사 인터뷰 (계속)
※기자는 정견기자 주칭밍(朱清明)을 말하고 샤오는 화가인 샤오핑 여사를 가리킨다.
기자 : 당신의 다른 작품 《선택》이 있는데, 이 그림을 구상하신 동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샤오 : 저는 늘 사이트에서 일부 문장들을 보는데 거기서 중국대법제자들이 박해받는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백석(齊白石 역주: 중국의 저명한 화가)의 손녀가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 내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런 예술가들이 받는 박해를 알리고 이런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신병원의 박해를 소재로 선택한 겁니다.
저는 한 젋은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녀의 아름다움이 사악과 선명하게 대비되도록 했습니다. 비록 그녀가 사악의 박해를 받고는 있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眞善忍으로 충만되어 있고 다른 경지에 있습니다. 신체는 비록 잔혹한 박해와 시달림을 당하고 있으나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종 화면을 분할하는 기법을 통해 그녀를 표현해 냈습니다.
두명의 악경은 밝은 부분과 분할시켰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순수한 빛으로 충만되어 있고 그 속에 두 영해가 있는데 그중 한 영해는 손에 왕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를 찬미(讚美)한다는 뜻입니다.
기자 : 그림속의 여인은 별로 고통스럽게 보이지 않으며 원망하는 표정도 없고 도리어 아주 평화롭고 자비로울뿐만 아니라 편안하게 보입니다.
샤오 : 맞습니다. 저는 단지 그녀의 눈썹부근에 약간의 주름살을 그려 넣어 아주 큰 고통과 큰 시달림을 감당하고 있음을 표현했습니다. 제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대법제자의 감당으로 일종 자비의 표현인데, 그녀는 선(善)으로 이런 사악을 대하고 있습니다.
샤오핑(肖平) 《선택》 유화(油画) (부분도)
기자 : 예전에 악경을 그려보신 적이 없으실텐데 이번 그림에서 악경을 그리시는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샤오 : 아주 힘들었습니다. 악경을 그리는 과정에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쳤고 아주 여러 번 손을 본 후에야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되었습니다. 저는 심지어 그들 두명을 귀신과 같이 기다란 앞니를 가진 모습으로 그리고자 했었습니다. 나중에 인간의 모습을 한 사악을 표현하기로 결정한 것이죠. 악경의 얼굴은 약간 파랗고 녹색으로 처리해서 아주 나쁜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예쁜 것들만 그려서 악인을 그리는 것이 아주 어렵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기자 : 이 그림을 그리실 때 모델이 있나요?
샤오 : 뒤에 있는 악인은 완전히 제가 창조한 것이고 동작은 모델에서 취했지만 얼굴은 창작한 것입니다. 코를 납작하게 그리고 눈은 크게 그린 것은 제가 상상한 사악한 형상에 근거하여 그린 것입니다. 저는 주로 초상화를 많이 그려왔기에 상상으로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이전에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본 악인의 인상에 근거하여 뚱뚱하고 살찐 얼굴에 담배를 꼬나 문 모습을 통해 사악함을 표현해 낸 것이지요.
기자 : 수빈화(역주 : 수채화와 크래용을 이용한 그림)는 자유자재로 운용하실 수 있겠지만 유화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텐데 굳이 유화를 사용하신 것은 이런 소재를 표현하기기 쉽기 때문입니까?
샤오 : 저는 원래 수빈화를 많이 그려왔기에 그것을 운용하는 것이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이번에 유화를 그리면서 저는 스스로 아주 큰 제고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유화를 이용하여 저는 더 세밀하고 심도있게 하나의 주제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유화의 기교를 배우는 것도 아주 의미있는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유화의 대가들은 모두 많은 작품을 남겨놓아, 우리가 학습하고 참고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런 주제는 유화로 표현하는 것이 좋고 수빈화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기자 : 출품하신 작품을 보니 저는 당신께서 수빈화에 상당한 조예가 있으시다는 것을 뚜렷히 느꼈습니다. 색채라든가 투명도, 필치 등이 제가 본 대부분의 유화작가들과는 달랐습니다. 혹시 수빈화의 기교를 사용하신 것은 아니신지요?
샤오 : 저의 유화실력은 아직 부족하기에 수빈화의 영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더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웃음) 수빈화를 그릴 때는 아주 자유롭긴 하지만 수빈화로는 대작을 그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큰 종이도 없고요.
(계속 이어집니다)
인터뷰: ‘견인불굴의 정신’ 예술전람회 소개 : 《연심(蓮心)》
【정견망】
샤오핑(肖平) 《연심(蓮心)》 유화(油画) 51in. x 51in. (2004)
샤오핑(肖平)여사 인터뷰 (계속)
※기자는 정견기자 주칭밍(朱清明)을 말하고 샤오는 화가인 샤오핑 여사를 가리킨다.
기자 : 다른 한 폭의 그림 《연심(蓮心)》은 관객들에 대한 흡인력이 아주 강해서 비교적 강렬한 반향이 있었고 대단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 작품의 창작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샤오 : 이 그림의 영감은 작년에 제가 참가했던 7.20 기념비 앞에서의 촛불 추모식입니다. 작년에 저는 첫줄에 앉아 촛불을 들고 있었는데 당시에 아주 신성하고 장엄하며 대단히 아름다운 감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앉아 내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많은 수련생들이 모두 촛불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매 촛불은 곧바로 암흑을 밝히는 밝은 등불이 되어 너무나도 따사롭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만약 천만의 사람들이 모두 이런 마음이라면……
매 하나의 불꽃이 하나의 마음이라면 그림속의 여인이 들고 있는 불꽃은 바로 마음과 같지 않겠습니까. 매 하나의 연등(蓮燈)은 모두 대법제자의 금(金)과 같은 마음으로 세인들에게 바치는 것이며 암흑 속에서 이 세계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념하거나 추도할 때 촛불을 사용하므로 저는 그것을 결합시킨 것입니다. 아래에 있는 혹형 표현은 사람들에게 그녀가 생각하는 대상이 바로 혹형을 받아 죽음의 고난에 처한 수련생들임을 알려 줍니다. 아래에 있는 제자가 펼친 眞善忍 현수막은 마치 연등과도 같이 빛을 발하는데 이것은 암흑 속의 빛입니다. 형식은 다르지만 사실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같습니다.
샤오핑(肖平) 《연심》 유화(油画) (부분도)
기자 : 구도를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샤오 : 이런 구도는 비교적 전통적인 것으로 인물을 가장 중앙에 놓고 삼각형 모양의 구도를 잡은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화에서, 특히 종교적인 소재를 표현할 때, 아주 많이 사용한 형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물을 가운데 놓고 표현하면 아주 장엄하고 신성한 느낌을 주는 그런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저는 이런 구도가 제 감수를 표현하는데 가장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게 등불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으며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고 하십니다. 불빛은 따스한 색조로 사람의 얼굴을 비추므로 평상시 사람의 얼굴모습과는 같지 않습니다. 일종의 촛불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 수련생 자체가 아주 순정(純淨)하고 단정한 얼굴인데 이런 잔혹한 박해와 대비되어 사람들에게 진동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평온하고 조용한 가운데 일종 내재적인 힘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점이 바로 사람들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저는 한 사람을 통해 모든 수련생을 대표한 것입니다.
기자 : 제가 멀리서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아주 끌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촛불은 아주 따스한데, 저는 먼저 이 연등을 보았고 이후에 촛불에 비춰진 여인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위와 아래 화면을 보았습니다. 그 등은 사람을 잡아 끄는 흡인력이 있습니다. 그림에서 빛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이전에도 경험이 있으신가요?
샤오 : 이전에 그린 것은 모두 태양광입니다. 수빈화를 그릴 때는 태양광 아래의 아주 밝고 찬란한 경치를 그리거나 태양광 아래에서 인체의 운동을 그립니다. 촛불은 처음 그려보았습니다. 당시 저는 반드시 그것을 잘 그려내고야 말겠다는 아주 강렬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린 것을 보면 스스로는 만족스러운데 효과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시에 직접 촛불을 한 대 붙이고 들어도 보고, 비춰도 보면서……연꽃은 다른 참고자료가 있습니다. 배경은 단순하게 했고 예술적인 처리는 바로 등을 많이 그려넣어 천만 대법제자들의 마음을 대표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인터뷰:“견인불굴의 정신”예술전람회 소개:《혹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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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망】
샤오핑(肖平)여사 인터뷰(계속)
기자─정견기자 주칭밍(朱清明)
샤오(肖)─샤오핑여사,화가
기자:박해시리즈 중의 《혹형》이란 그림은 몇몇 악경이 한 대법제자의 머리를 변기통 속에 내리 누르고 있고, 다른 한 제자를 뒤에 달아맨 것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에 그려진 이야기의 내원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샤오: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저는 단지 이야기를 한 화면에 집합하여 표현했을 뿐입니다. 중국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을 박해할 때 여자 제자를 달아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아주 추잡한 방식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임신한 젊은 여자 제자를 달아매는 것은 그래도 표현할 수 있지만 더욱 엄중한 것은 저로선 표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변기통에 사람을 밀어 넣는 것은 일찍부터 있었던 인격을 모독하는 고문방법입니다....
기자: 이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샤오: 이 그림의 구도를 구상할 때가 비교적 어려웠습니다. 이 그림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위에는 임신한 대법제자를 달아맨 것으로 일종의 배경이고, 폭력을 가하는 악경(惡警)은 중간에 있으며, 가장 아래에는 짓눌리는 대법제자의 모습입니다. 이 그림을 정리하기는 쉽지 않았는데, 잘 그리지 못하면 오히려 그림이 산산조각이 납니다. 후에 저는 사악을 어두움 속에 그려놓고 두 명의 대법제자를 돌출시켜 관중들의 시선이 대법제자의 몸에 집중되게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대표한 것이 광명(光明)이기 때문입니다.
기자: 이 그림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인데 당신의 바람이 있다면... ...?
샤오: 그림을 보는 사람은 내심(內心)으로 감동을 받을 것이고, 정말로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구나 하고 알게 됨으로써 놀라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마땅히 더 많은 사람들이 진상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림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박해가 정말로 잔혹하다는 것을 그 일부라도 보게 할 수 있습니다.
기자: 예술가로서 이번 박해반대에서 당신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샤오: 제게 있어서는, 제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잘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림전에 참가할 때, 공원에서 여행객들에게 그림을 그려 줄 때, 저는 저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릴 것이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들은 아주 정상이고 훌륭하다는 것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기자: 산수화를 그리는 것이 당신께서 법을 얻는데 도움이 되었습니까?
샤오: 예. 중국에서는 산수화를 통해 의경(意景), 산수와 사람의 관계를 표현합니다. 좋은 산수화를 보면 그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고 아주 홀가분하고 유쾌합니다. 사람들에게 아주 홀가분한 느낌을 만끽하게 하여 번뇌를 잊게 합니다. 좋은 산수화를 보는 것은 일종의 시각 향수(享受)입니다.
기자: 이번 전시에 참가한 화가 중 아주 많은 분들이 유화(油畵)를 그렸던 분들입니다. 당신은 수채화 전공임에도 유화로 전시에 참가하셨는데 아주 독특합니다. 중국화와 서양화의 다른 점에 대하여 당신은 어떤 감수가 있으신지요?
샤오: 중국화에는 아주 아름다운 표현수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線), 의경(意景) 등 걷는 길이 유화와는 다릅니다. 각각 아름다운 일면이 있습니다. 유화는 입체적인 효과, 섬세한 것을 사람의 실생활에 더 진실하고 더 가깝게 체현할 수 있습니다. 반면 중국화는 비교적 뜻을 표현하고[寫意] 속세를 초탈합니다. 중국 역사에서는 줄곧 불도(佛道)의 사상이 유전되어 왔으며, 대다수 중국인들은 모두 유교와 불도(佛道) 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화를 아주 쉽게 받아들입니다. 서양화는 아주 진실하고 아주 입체적인 바 완전히 다른 풍격입니다. 유화의 그 묵직하고 진실한 기법, 분위기에 대한 표현을 저는 한층 더 탐구하고 학습하고자 합니다.
기자: 좋은 화가가 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샤오: 그것은 바로 마음을 닦는[修心]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그림을 배울 때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려면 품행이 반드시 높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수화를 그리는 선생님마저 우리를 이렇게 교육하였습니다. 품위가 높게 그리려면 그 인품도 높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술가에게 있어 수련은 아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견인불굴의 정신” 예술전람회 소개(12)
【정견망】
왕즈핑(王志平) 인터뷰
※다음 문장에서 기자는 정견 기자 주칭밍(朱清明)을 말하고 왕은 화가 왕즈핑을 가리킨다.
기자 : 왕즈핑 선생님, 당신의 미술창작 경력을 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왕 : 저는 어려서부터 미술을 좋아했습니다.
기자 : 몇 살때부터 미술을 시작하셨나요?
왕 :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시간 만 되면 아주 즐겁고 흥분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삼학년 무렵, 즉 16~7세 무렵부터 기본기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기자 : 미술 수업을 받으셨나요 아니면 따로 선생님을 모셨나요?
왕 : 시에서 운영하던 미술반에서 배웠습니다. 한 일이년 정도 하고 나니 미술 대학에 가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루쉰(鲁迅) 예술대학에 진학해서 조각을 전공했습니다. 학교에서 5년을 배운 후에 졸업을 하고 대학에서 미술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기자 : 이 기간에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이 있습니까?
왕 : 없습니다. 저는 줄곧 예술에 대해 집착하고 있었고 아주 좋아했지만, 예술의 변이(變異)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가령 피카소와 인상파의 작품이 아주 수준이 높다고 보았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떠받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류의 작품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습니다. 고전적인 것, 가령 유럽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대가들의 작품에 대해서는 벌어진 차이가 너무 멀어서 도저히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일종의 모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술을 너무 좋아해서 이런 상태로 20년을 지속해 왔습니다.
기자 : 어떻게 법을 얻으셨나요?
왕 : 저는 96년에 미국에 왔고 제 집사람은 10개월 뒤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막 미국에 왔을 때 생활이 어려웠고 아주 거대한 압력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생활도 침체되어 있었고 미래가 불투명했습니다. 아내가 자신도 읽어보지 않은『전법륜』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중국 제자에게 받은 것이었죠. 아내는 제가 기공에 아주 흥미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중국에 고인(高人)이 나타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렇다면 한번 보자, 이렇게 해서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보고 난 후에 아주 흥분되었고 즐거웠으며 참 잘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요구가 너무 높아서 저로서는 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과거 20년간 받은 오염과 변이가 너무 커서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행동이나 말투에서 아주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이전 같으면 아주 거칠게 말을 했을텐데 사부님께서 저를 관할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는 할 수 없었습니다. 서양 예술 중의 유명한 대가들은 모두 『성경(聖經)』 중의 소재를 가지고 표현을 했습니다. 당시는 신(神)에 대한 믿음이 있던 시대였기 때문이지요. 그때에 주변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저는 아주 호의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럽 명화(名畵)들에 나오는 장면이 모두 성경 중의 것이었기에 성경책을 접수하기가 쉬웠기 때문이지요.
제가 진정으로 법을 얻게 된 것은 99년 사부님께서 뉴욕에서 설법하실 때였습니다. 저도 참가를 했었는데, 내심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을 받았고 수련을 시작하기로 맹서했습니다.
기자 : 수련을 하신 후에도 창작을 하셨습니까?
왕 : 98년에 저는 조각에 초서(草書)를 새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법을 얻은 후에는 대법의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겨 더 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기자 : 그러면 이번 전시회에 참가하신 작품 시리즈가 대법을 수련하신 이후 최초의 창작인가요?
왕 : 예, 시리즈물로는 이것이 최초입니다. 사실은 제가 미술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체계적으로 창작한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 : 이 그림들을 창작하실 구상은 어디서 얻으셨나요?
왕 : 저는 대법을 수련하므로 우선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며 원래의 좋지 못한 것들을 전부 포기해야 합니다. 사부님의 설법으로부터 저는 인류의 예술 준칙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고전화 대가들의 작품을 통해 풍부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술가들의 신(神)에 대한 존경과 신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가지 일에 아주 몰두했으며 현대 사회의 이런 물욕(物慾)이나 정욕(情慾)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경지임을 알게되었습니다. 왜 이런 박해를 그려야 하는가? 제가 5~6년간 수련하면서 저는 眞善忍이 인류를 반본귀진하게 할 수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사람마다 모두 사회를 원망하지만 사실은 자신도 좋지 않은 것들을 추동해 왔음을 모릅니다.
저는 지금 아주 분명하게 제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런 좋은 사람들이 박해받고 있기에, 제 내심(內心)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표현으로 이번 박해를 표현해 내는 것은 도의상 저버릴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제 수련의 한 부분입니다.
기자 : 이번 전시회에 참가한 다른 작가들 중에도 박해를 그린 분이 계신데, 당신께선 박해 중에서도 혹형을 소재로 시리즈 회화를 제작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이런 시리즈를 그릴 생각을 하셨는지요?
왕 :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또한 대법제자들이 박해받은 잔혹한 사실을 예술적인 언어로 진실하게 표현하고자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표면적인 것을 그리는데 그쳐서는 안 되면 사악의 박해를 분명하게 폭로해 내야 합니다. 이 수련인들은 생사(生死)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얻었기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위배할 수 없으며, 자신의 믿음을 배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심정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인터뷰: “견인불굴의 정신” 예술 전람회 소개 《혹형 시리즈》
【정견망】
왕즈핑(王志平) 인터뷰(계속)
기자―정견기자 주칭밍(朱淸明)
왕― 왕쯔핑(王志平), 화가
기자: 나는 당신이 그린 대법제자의 얼굴 표정을 주의하여 보았습니다. 그러한 혹형을 당하면 일반 사람들은 몹시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대법제자들의 얼굴에는 일반 사람들과 같은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 없는데 당신께선 그들의 표정을 그릴 때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왕: 수련인은 법(法)을 얻었고 “쩐,싼,런(眞,善,忍)”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이 되며 생명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얻었으며, 그의 행위도 역시 이 준칙(準則)에 따라 합니다. 저는 박해 받는 제자들을 접촉하며 그들과 교류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정말로 대륙에서 혹형의 시달림을 받았었습니다. 그들과의 교류 중에서 저는 그들은 절대로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깊이 느꼈습니다.
제가 그림을 그릴 때 아주 많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도식화를 피하면서 동시에 또 대법제자 내심 깊은 곳의 견정함과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음을 표현해 내야 합니다. 그러나 대법제자에 대한 사악의 박해는 존재하는 만큼 그런 육체적인 시달림도 표현해 내야 합니다. 처음에 저는 정말로 수련생이 얻어맞은 그러한 참상을 차마 그릴 수가 없어서 다만 그들의 신체 표면에 약간 가벼운 상처를 그렸을 뿐입니다. 만약 사이트에 나오는 진실한 사진을 본다면 이것은 실제 사진과 차이가 너무나도 멀지요. 어떤 대법제자는 맞아서 피부가 찢어지고 터져서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화면에 가중(加重)하였던 것입니다. 정말로 박해를 받았던 제자들은 제 그림을 보고는 “당신이 그린 것은 아직 부족합니다. 사악을 아직 충분하게 표현해내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림이 완성된 다음에 한 단락이 지난 후 또 반복해서 끊임없이 수정하며 전체적으로 조절하고 국부적으로 깊이 들어 갔습니다. 저는 줄곧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이 그림들은 제가 수련에서 깨달은 것[感悟]과, 동수들과의 교류 및 사이트 보도를 보고 창작해 낸 것입니다. 물론 이 한 세트의 그림들은 어떤 부분은 표현이 충분하지 못하기때문에,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저는 가급적 빨리 이런 사악을 폭로하기 위하여 이 한 세트의 그림들을 비교적 빨리 그려 냈습니다. 비록 빨랐지만 저는 가급적 제가 표현하고자 한 것을 표현해 냈습니다.
왕즈핑(王志平)《혹형 시리즈》유화(2003-2004)
기자: 매 그림마다 모두 웃통을 벗은 악경(惡警)이 있는데 표현을 고려한 것입니까 아니면 구도(構圖)상에서 고려한 것입니까?
왕: 사이트에 실린 수련생이 박해 받는 정황, 악경의 그 잔인한 박해를 저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대법제자들에 대한 그들의 박해는 끝이 없었으며 준칙이 없는 그런 악함은, 이지(理智)를 잃고 발광적이며 일종 변태적 심리이며 또한 사악했습니다. 그들은 대법제자를 때리다 힘이 들어서 숨을 헐떡이며 자신마저 힘들어 지쳐버립니다. 저는 웃통을 벗은 형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그들이 악을 행함에 끝이 없으며 자신이 때리다가 힘이 들면 웃통을 벗어 던지고는 계속 쉬지 않고 때리는 것을 보도록 한 것입니다.
기자: 제가 보기에 당신은 악경을 처음 그리신 것 같은데 아주 힘들었으리라 봅니다. 악경을 그리는데 모델이 있었습니까?
왕: 저는 정상인의 비례를 참고하였습니다. 정통적인 예술은 비례를 강조하며 비례는 정확함을 요구합니다. 화면에서 악경의 색깔은 어두우며 수련인 피부의 매끄러움과 대비를 이룹니다. 저는 어두컴컴한 것을 사용하여 사악을 상징하였습니다. 중국화던지 아니면 서양 고전 유화던지 악인을 그린 것이 모두 비교적 흉악한데 저는 회색과 어두운 색깔로 사악을 체현하였습니다. 사악한 경찰의 피부는 정상적인 사람의 피부와 같아 보이지만 그들의 내심 깊은 곳은 세포를 포함하여 모두 시커먼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본질적인 것을 비교적 강렬하게 표현해 내어 선량한 사람들에게 사악한 본질을 보아낼 수 있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행위 속에는 모두 그러한 사악이 있습니다.
기자: 당신의 그림 중에 이런 명암의 대비는 아주 강렬합니다. 대법제자들은 모두 담황색 혹은 흰색의 옷을 입어 전체적으로 비교적 밝습니다. 하지만 사악은 모두 회색이나 검은 색이므로 사람들에게 일종의 어두운 감각을 줍니다. 당신은 조각을 하시는 분인데 조각으로 표현해보려는 생각은 가져보지 않으셨는지요?
왕: 지금 한창 조각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이 혹형 시리즈를 당신은 계속 해나가실 생각이십니까?
왕: 예 계속 해나갈 겁니다. 좋은 아이디어만 있다면 계속 해나갈 것입니다.
기자: 당신께선 화가이자 예술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왕: 우선 기본기가 튼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전 예술의 색, 인체의 비례, 그리고 화가가 사람이 되는 준칙들은 제게 모두 중요합니다. 저는 그림을 그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량해져야 하며 사람들을 선을 향하도록 계발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나서 어두운 것을 생각하게 함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것은 제가 수련을 한 후에 인식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저도 조류(潮流)에 따라 가면서 아주 재미 있다고 여겼습니다. 졸업 후, 저는 한동안 예술과 멀리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고전적인 것들은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여겼으며, 그 길은 몹시 고생스럽고, 그런 정통적인 예술은 진정 아주 많은 시간과 정력을 지불해야 하며, 사람의 두뇌와 마음이 매우 안정되고 순정함을 요구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사람 노릇을 하건 물건을 만들건 상관없이 모두 이런 한 가지 요구가 있었습니다. 가구를 예로 들자면, 중국 명(明)나라 시대의 가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값을 따질 수 없는 보물로 되었습니다. 현재의 가구는 새로 살 때는 가치가 좀 있지만 며칠 지나면 쓰레기와 같이 됩니다. 고대 사람들이 물건을 만들 때는 일종의 수련상태에 처해 있으며 그가 한 가지 물건을 만들 때, 그의 심신, 체력, 사람이 되는 준칙이 이 물건에서 모두 표현되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현재 예술을 하는 것은 그 즐거움이 무궁하며 추구함에 있어서 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시간이 있으면 대 도회지(大都會) 박물관에 가서 고전 그림을 봅니다. 그것은 인류가 진정하게 마땅히 따라야 할 예술의 길입니다.
기자: 당신에게 있어서 그런 고전 대가[大師]들의 작품은 너무 멀어서 도달하기 힘든가요?
왕: 저는 더이상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현재 그런 대가들의 그림을 볼 때 모두 그 예술가들의 사람 됨됨이가 어떻다는 것을 감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신에 대해 존경하는 그런 심태를 능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저는 현재 자신의 진정한 예술의 길을 찾았으며 어떻게 걸어가야 할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인터뷰: “견인불굴의 정신”예술전람회 소개: 《견인불굴의 정신》
캐슬린 질리스(Kathleen Gillis)《견인불굴의 정신》유화(구분),32in X 58in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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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망】
※ 다음 인터뷰에서 기자는 정견망 기자인 주칭밍(朱清明)이고, K는 화가인 캐슬린 질리스(Kathleen Gillis)를 말한다.
기자: 당신의 경력을 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K: 저는 계속적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닙니다. 나는 과거에 상업목적의 일부 예술작품을 만들었는데 후에 아이가 생긴 후부터 여유 시간을 이용하여 연수를 받았습니다. 그 후 캐나다 오타와 대학에서 시각(視覺)예술(Visual Arts)에 관한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학교에서 배운 것은 모두 추상예술의 표현기법이었습니다.
기자: 당신은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셨습니까?
K: 예, 저는 12살 때 예술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기자: 회화에 그토록 흥미를 갖게 한 계기가 있었나요?
K: 제가 어릴 때 살던 그 작은 마을에서는 볼만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삼촌은 저를 몬트리올에 있는 갤러리에 데리고 갔는데 그곳은 제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기자: 당신은 언제부터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습니까?
K: 1998년부터입니다. 저는 오타와(Ottawa) 대학에서 한 부스를 보았는데 그곳의 연공은 저를 끌어 당겼습니다. 대법제자의 에너지와 순정함은 강렬하게 저를 빨아들였고, 그때 나는 신체가 노화되어 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수련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기자: 수련을 하신 후에 당신의 신체 건강은 어떠한 개선이 있었습니까?
K: 정신적으로 제 두뇌와 사유는 더욱 깨끗하고 뚜렷해졌습니다. 신체적인 변화는 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하였습니다. 저는 갑상선을 수술하여 반쪽만 남아 있었고 평생 약으로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때 제가 수련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갑상선 호르몬의 분비가 높아졌으며 더는 약을 먹을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Kathleen Gillis 《견인불굴의 정신》유화,32in X 58in (2004)
기자: 저는 이번 예술전람회에서 당신이 그린 몇 폭의 그림을 보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견인불굴의 정신》입니다. 이 그림의 배경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이 그림을 구상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K: 저는 사이트에서 한 대법제자가 의자에 묶여 있는 사진을 보았으며 그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화면은 제 마음속에서 공명(共鳴)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한 조각상을 보았는데 그것은 어떤 기독교인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자태였습니다. 그 조각상 역시 저를 진동시켰습니다. 이 두 개의 화면이 하나로 융합되어 이 화면을 형성하였습니다. 저는 한 대법제자를 청하여 사진을 몇 장 찍어서 모델로 삼았는데, 그는 바로 중국에서 체포되어 구타당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캐나다 주재 중국대사관에서도 구타당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대사관 사람은 심지어 대사관은 중국영토에 속하므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기자: 이 그림을 그리실 때 가장 어려웠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K: 음, 제일 어려웠던 점은, 일반적으로 말할 때 한 폭의 그림을 절반 그린 후에는 잠깐 내려놓는데, 그러나 이 한 폭의 그림은 제가 그것을 다 완성했다고 느꼈을 때 사실 비로소 시작된 것입니다. 그림의 아래 부분을 그릴 때 초기엔 이 부분의 화면이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부분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그 부분을 구상함에 있어서 전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니 영감이 곧 떠올랐습니다. (제가 말한 것은 마치 마룻바닥에서 나온 듯한 그러한 형상을 가리킵니다.)
화면의 주인공에 대하여 저는 그의 자비와 힘을 충분히 표현해 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손, 그 손을 그린 것은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손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그 손가락 마디의 무늬가 마치 밖으로 발사된 파룬과 같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 손의 자비를 그려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 그림의 배경이 사람들에게 주는 감각은 바로 지하, 동굴 속에 있는 듯한 그낌입니다.
기자: 제가 듣기론 이 그림의 주인공은 원래 류청쥔(柳成軍)이라고 하던데, 대륙에서 TV삽입방송을 하여 박해받아 사망한 대법제자가 맞습니까?
K: 그렇습니다. 바로 그의 사진이 저를 감동시켰는데, 그가 의자에 앉아 있던 그 사진입니다.
(계속)
인터뷰:“견인불굴의 정신” 예술전람회 소개:
《인민법정》,《우주의 소리》,《동화(同化)》
캐슬린 질리스(Kathleen Gillis) 《우주의 소리(宇宙之聲)》유화,32in X 58in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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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망】 편집자의 말:7월15~16일 워싱턴DC 法輪大法협회 주최로 “견인불굴의 정신”이라는 주제의 예술전람회가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하원 의원회관인 레이번 하우스 전시회장에서 정식으로 열렸다. 이번에 전람회에 참가한 작품은 모두 파룬궁 수련생들이 창작한 것으로 그들 중에는 아직도 불법으로 감금되어 감옥에 있는 사람도 있다.
5년의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겪으면서 이 예술가 수련생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세인들에게 파룬궁을 수련한 후에 인심(人心)이 바르게 잡힌 즐거움, 파룬궁 수련생들이 혹독한 시달림과 피비린내 나는 탄압 하에서 표현해 낸 견인불굴의 꺽을 수 없는 정념, 眞善忍 우주 진리에 대한 끊어버릴 수 없는 추구에서부터 정의는 끝내 사악을 이긴다는 믿음에 이르기까지를 표현해 내고자 하였다.
이 예술가들은 각자 특징이 있으며, 그들은 힘써 전통 회화기법을 이용하여 이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전람회에 참가한 각 화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들의 구상, 창작과정 및 사용한 기법 등을 연속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Kathleen Gillis인터뷰(계속)
※ 기자─정견기자 주칭밍(朱淸明)
K─캐슬린 질리스(Kathleen Gillis),화가
Kathleen Gillis 《인민법정(人民法庭)》유화,32in X 58in (2004)
기자:다른 한폭의 그림 《인민법정(人民法庭 People’s Tribunal)》은 장쩌민 공개심판 사진에 근거하여 그린 것입니까?
K: 아니요, 이 그림은 한 장의 사진에 근거하여 그린 것이 아닙니다.(캐나다 오타와 장쩌민 공개심판)때 저는 그 장소에 있었는데 거기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는 일부 사진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화면을 만들었는데, 노란색옷을 입은 대법제자들이 한 조로, 장××을 향해 서 있게 했습니다. 하늘의 생명들은 자비하게 주시하고 있습니다.
기자: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려 주었습니까? 아니면 당신 자신의 이해에 근거하여 그린 것입니까?
K:누가 알려 주진 않았습니다. 처음에 제가 보지 못한 것을 그리는데 대하여 사실 저도 많은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다시 고려해 보고 나서, 내가 본 것만 그릴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도 그려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기자:당신은 이 그림을 통해 관중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합니까?
K:그림에 보시면, 서양인이 몇 명 보이는데, 저는 관중들이 기회가 있다면 이것을 자기와 연계시켰으면 합니다. 즉, 이것을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일로 여기지 말고, 바로 이곳에서 한창 발생하고 있는 일임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한번은 제가 국회산(Parliament Hill) 에 간 적이 있는데, 한 여사가 걸어와 제게 한 말이 생각납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당신의 문제를 당신이 온 곳으로 가져가지 못하나요?”
저는 서양인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강렬한 인상으로 이것은 다른 사람의 문제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이점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파룬궁에 대한 중국의 박해를 보고도 못본 척 하면서, 이것은 지구의 다른 쪽에서 발생한 일로, 자신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사실 이 일은 정말로 그들한테 영향을 주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기자:다른 한폭의 그림《우주의 소리(The Heavens Speak)》관련하여 이 그림에 대한 일화가 있으실 것 같은데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K:(작년 장××의 휴스톤 방문 기간에)저도 휴스턴에 있었는데, 폭우와 추위가 심했습니다. 장××가 가는 곳마다 검은 구름도 따라서 이동했습니다. 시커먼 구름이 그가 머물던 호텔 상공을 뒤덮고 있다가, 장이 부시 대통령 농장으로 갈 때면 먹장 구름도 따라서 갔습니다. 그 먹장 구름은 마치 그림속에 그린 것처럼 그렇게 짙고, 그렇게 검었으며, 그렇게 무시무시 했습니다. 그런던 잠시, 무지개가 하늘 한쪽에 나타났는며 우리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고 경각심을 늦추고 경축하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저는 우리가 늦춘 사이에, 장××에게 숨돌릴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그 무지개가 우리를 해이하게 만든 것 같았습니다.
기자: 그림의 각 부분에 대해서, 즉 하늘, 무지개, 그리고 땅위의 사람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세요.
K:하늘 구름속에서 한창 전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흐린 색조로 처리하여 관객들이 단번에 알아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저는 관중들이 기타 부분을 본 후에 다시 여기를 보기를 원했습니다. 하늘의 격동은 제가 당시 감수한 것입니다. 당시의 감수가 모두 이 대전(大戰)에 표현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신병(神兵)들이 들이 닥친, 이 화면은 제 꿈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나자 이 화면이 제 머리속에 떠올랐습니다.
기자:관중들이 첫눈에 무엇을 보았으면 합니까?
K:관중들의 시선은 아주 자연스럽게 길을 따라 무지개를 보게 되며, 그후에 무지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갑니다. 하늘은 나중에 주시받게 됩니다. 가까이 다가서서 볼 때, 당신은 하늘의 사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또 강렬한 색채로 방향을 인도했는데, 위로 혹은 안으로 하다가, 그들은 최후에 모두 하나의 시각중심에 모이게 됩니다.
Kathleen Gillis 《동화(同化)》유화,32in X 58in (2004)
기자:또 한폭의 그림은 두 어린이가 『전법륜』을 읽고 읽는 모습을 그린것인데, 이 그림을 구상하신 배경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K:저는 아주 가정적인 분위기를 그려서, 서양인들이 익숙하고 친절한 감을 느끼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두가지를 종합했습니다. 하나는 제가 사이트에서 본 대법제자가 공공장소에서 대법책을 보는 화면입니다. 당시 그의 머리 위에는 붉은 안개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그 빨간 안개를 보고는, “저 얼굴을 봐!”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신기했는데, 처음에 저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그와 책을 읽는 두 어린이를 한 가정 배경 속에 담았습니다. 나중에야 저는 그 붉은 것들이 파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운행할 때, 그들은 붉은 아치형의 안개를 형성하였습니다. 그 얼굴은 바로 수련하는 고급생명이었습니다.
기자:그림속의 두 어린이는 아주 사랑스러운데, 모델이 있습니까?
K:제 손주들입니다. 저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 아이들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이 그림을 보지 못했습니다.
기자:서양화에서, 보통 인간 세계와 천국 세계가 한 폭의 그림에 나타납니다. 당신의 그림에도 몇 개 공간이 펼쳐졌는데, 물론 다른 그림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K:사실 현대인은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그림을 볼 때 중시하는 것은 그림의 구조, 색채이고, 그림의 내포와 그 화면이 표현하는 뜻을 소홀히 하는데, 사람들은 이미 어떻게 그림을 감상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