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9-11장은 매우 중요한 장이다. 7-8장과의 주제가 다른 것 같은 느낌은, 언뜻 보면 로마서 전체의 삽입부나 부록처럼 여겨질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서의 주제(1:16-17)가 하나님의 의라면 10:10도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하면서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주제를 간과하지 않는다. 7장에서 바울은 율법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음을 지적 한다. 그는 율법(Torah)이 주어진 것은 죄를 드러낼 뿐(7:8-13)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심지어 율법 무용론처럼 들릴 정도로 의에 대해 율법의 무기력함을 강조한다. 또한 율법으로 의롭게 된 다는 것도 불가능 하다(갈2:16). 율법은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잡이 일 뿐(갈3:24)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7장의 율법적 이해를 피력한 것은 간접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초청하기 위한 바울의 의도된 수사학적 기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구원의 문제를 위해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에로의 이해를 돕기 위해 1-8장과 9-11장이 연속선상에 있음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1-8장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보편적인 하나님의 의의 복음을 강조했다면, 롬 9-11장에서는 동일한 약속을 이어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다룸으로써 바울의 이스라엘의 구원문제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복음이 과연 모든 - 유대인과 이방인을 비롯하여 -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면(롬1:16),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의 대다수가 아직도 복음을 거부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으며 풀어 가고 있는지도 우리의 관심사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 하나님의 약속이 폐기되지 않으면서, 어떻게 현재의 하나님의 복음 역시 여전히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 결국 복음과 약속의 문제는 이 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신실성(주권) 문제로 압축된다. 그러므로 롬 9장-11장의 중심 주제는 우선적으로 현재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동족(이스라엘)의 대부분의 불신앙에 대해 구체적인 실 예(9:7-13, 17, 21-24; 11:2-6)를 들어서 그들에게 피력하고 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것이며, 그리고 바울이 말하는 참 이스라엘이 누구인가는 9-11장을 이해하는데 필요 충분한 조건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 소고는 먼저 1-8장과의 관계를 논하고 본문(9-11)을 다 살펴 볼 수는 없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의 문제를 조명할 수 있는 9:1-6절과 10장을 개괄 하면서 11:14, 26절을 살펴봄으로써 로마서 전체를 밝히는 바울의 사상을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련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접근 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바울의 서신 속에 담겨있는 그의 일관된 주장에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될 것이다.
본론
1.로마서1-8장과 로마서9-11장과의 관계
9-11장의 문제는 많은 학자들(Neill, Kaesemann, Weber, Baur)의 관심이 되어왔다. 최종상은 그의 책에서 바우어(F. C. Baur)는 9-11장이 로마서의 중심이며 해석의 키(Key)이며, “전체(서신)의 근원이며 중심”이라고 해왔는데 이러한 문제는 일반적으로 로마서에서의 바울신학의 논쟁의 피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따라서 본 글은 연구사의 모든 것을 개괄하지 않고 간략하게나마 본 주제의 의도에 맞게 그 관계성을 고려하려 한다.
지슬러(Ziesler)는 9-11장의 이해는 9장을 바울의 애가로 시작하는 것은, 8:39의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수 만 있으면 그런 분리도 감수할 것 이라고 그의 고백이다. 9장은 11장의 하나님의 장기적인 계획과 더불어, 10장에서의 현재의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바울이 의도하려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참 이스라엘을 새롭게 정의 한다는 바울의 논점을 정리하는 보편적 원리에 충실하려는 것 이라고 보았다. 케제만(Kaesemann)은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16장을 제외하고 9-11장처럼 통일성 있는 단락은 없으며 그래서 이 단락은 전체로부터 쉽게 분리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단락을 1-8장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독립적인 단락으로 생각하기도 하고(A. Feuillet) 로마서 이전에 바울이 쓴 글의 삽입(C. H. Dodd)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최종상은 로마서9-11장을 독립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8장의 주제가 연속적으로 9-11장으로 이어진 논쟁의 강화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이스라엘 구원의 문제는 상당한 차이를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패럿은 말하길 혹자는 9-11장이 다른 문제를 다룸으로 8장의 문제를 지연 시키고 있으며, 문학 형식에 있어서도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택하신 자”(8:33)의 주제가 9-11장에 걸쳐서 다른 장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 “택하심”(9:11, 11:5, 11:7, 11:28)이라는 단어로 자주 나타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끊으리요(χωρίσεί)”(8:35), “끊을 수 없으리라”(8:39)와 “끊어 질 지라도(χωρίσαί)”(9:3)의 반복 사용은 무언가를 바울이 8장과의 연결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9-11장이 독립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에는 바울의 치밀한 의도가 너무나 분명 해 보인다. 왜냐하면 로마서 전체 서산들의 주제와의 불 연속선상에 있기에는 주제의 반복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최종상은 로마서9-11장은 로마서 전체를 종합하는 바울의 의도를 파악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장이 아닐 수 없으며, 9-11장이 로마서의 주제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하는 다드(C. H. Dodd)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크랜필드의 말처럼 “서신의 주제를 푸는 데 있어서 불가결한 부분”이라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는 데에 동의 한다. 페데리꼬 바르바로(Federico Barbaro)도 바울이 9-11장에 로마서의 내용 즉 믿음으로 얻는 의가 차별이 없음을 더욱 더 확실히 하기 위하여, 또는 모든 민족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모든 오해를 풀기 위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9-11장은 지금까지 바울이 말해 온 유대인과 이방인의 의가 믿음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도 이방인의 하나님도 된다는 사실을 더욱 더 확고히 하기 위하여 세 장에 걸쳐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독특하게 믿음의 조상, 이방인 아브라함을 다시(4장) 등장 시키고, 두(유대인과 이방인) 그룹을 향해 서로를 비교시키면서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 문제를 상승시키고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얻는 의는 유대인의 문제만도, 이방인의 문제도 아닌 우주적인 문제이다. 9-11장은 지금까지 논의 해 온 바울의 결론이기도 하다. 박수암은 9-11장이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의 주제를 논증하는 것이며, 이 세 장이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서로 다른 주제의 각도로 보고는 있는 것 같지만 서로 보충관계에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9-11장을 전(前)장들의 연속선상에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이필찬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해체된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물인 의를 상속 할 하나님의 새 백성, 다시 말해서 새 이스라엘이 누구인가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9-11장은 1-8장의 연속선상에서 그리고 바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하나님의 의”의 일관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새 이스라엘의 문제는 자세히 다루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고는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에 접근하려 하기 때문이다.
2. 로마서9:1-6절,
바울은 혈통적 이스라엘을 정말로 사랑하는가? 그래서 자신의 영혼까지도 그를 사랑 하시어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진심으로 끊어지기를 원했던 것인가? 아니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은 것인가? 지슬러(Ziesler)는 바울의 이러한 심각한 탄식을 명백한 수사적 표현이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지적한다. 페데리꼬 바르바로(Federico Barbaro)도 바울 자신이 저주받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스스로 그리스도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하면서 자기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강조하기 위한 결심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간과 하지 말아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끊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염두하고 확신 있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χωρίσεί)”(8:35)말하고, 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χωρίσαί) 없으리라”(8:39)고 이미 말하였는데 만약에 바울의 바람이 가능 하다면 그는 싱거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8:39절의 “끊을 수(χωρίσαί)”가 과거 능동형으로 쓰여 졌다면 35절의 “끊어질 수(χωρίσεί)”는 미래 능동형이기 때문에 그 대답은 더욱 더 확실해진다. 그리고 9:3에서의 끊어짐은 전치사 “απο”를 씀으로 그 의미를 약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지슬러(Ziesler)도 이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으며, 바울은 모세 소원(출32:31 이하; 민11:15 이하), 또 그리스도의 자기희생(5:8; 8:32)에 미묘한 반향일지도 모르며, 바울의 수신자는 그 의미를 인간의 정으로 이해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위스트(Kenneth S. Wuest)도 그의 책에서 9:3절의 내용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는데 그는 말하길 “내가 원하는 바로다”(9:3)에서 바울은 미완료과거 시제의 희구법(optative mode)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발생하였더라면 하고 나는 원하고 있었다.”라고 표현해야 하고, 시제는 미완료 과거를 씀으로써 “그 행위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장애물이 있다는 뜻”으로 사용해야 함을 지적한다. 패럿(Perrot)도 3절을 주석하면서 바울의 이 소원은 불가능 한 일이라는데 동의한다. 박수암도 이 소원은 아직 불가능한 미 완료형임을 강조 하면서, 그러나 그에게 그 소원의 진지함이 나타난다고 한다.
바울의 심한 걱정은 위선은 아니었다(9:1). 그 고통은 바울의 마음과 양심을 파고들었다(9:2). 이 고통의 문제는 바울이 이스라엘을 정의 하면서 상황이 급진전되는 듯 해 보인다. 5절의 아멘 구를 보면 그가 해답을 찾은 듯하다. 그 해답은 그의 영혼과 마음을 충분히 적셔 줄 만 한가? 그러나 문제는 5절과 6절의 관계 따라 그 차이는 크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위한 해법을 찾은 것인가? 아니면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닌 참 이스라엘을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자신의 고통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그러나 전혀 새롭지 않은 길을 확고히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의 해석이 11:26에나오는 온 이스라엘의 대상의 문제가 결절됨과 동시에, 그가 지금까지 말했던 믿음으로 말미암는 보편 구원론에 치명적인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스너(Mussner), 가스톤(Gaston), 스텐달(Stendahl)같은 학자들은 “특별한 길(Sonderweg)”가정 하에서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것 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거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바울의 고통의 대상을 재 정의를 함으로써 혈통적 이스라엘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9:4). 지슬러(Ziesler)는 바울이 4절에서 짧게나마 이스라엘을 다시 정의하고자 추상적인 용어로 그 단어들을 배열한다고 본다, 최종상은 왓슨(F. Watson)이 “그들의 특권은 육체에 영역에 속할 뿐이다”고 한 주장을 육신의 영역에서만 보는 것이라며 이런 견해는 논리의 비약이라고 지적하면서 4절의 특권은 분명히 역사적 이스라엘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바울은 1-8장과 그 밖의 곳에서는 이 특권이 이방인들에게 적용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왜냐하면 9-11장의 전체적 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주의 깊게 보면 바울이 혈통적, 민족적 이스라엘의 특권만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다(9:6). 위스트(Wuest)는 6절의 “δε”를“또한”으로가 아니라 “그러나”로 사역하면서 5절과의 단절을 막았다고 한다. 또 그에 따르면 데어(Thayer)도 “그러나”로 사역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5절과 6절의 단절은 4절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정의를 입체적으로 볼 수 없게 한다. 지슬러(Ziesler)의 말처럼 9:6-23과 비교할 때 일관성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 6절b의 접속사 “왜냐하면(ϒαρ)"를 넣어 사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모두 이스라엘은 아니다”(9:6b ). 홍인규는 이스라엘 안에 참 이스라엘이 있으며, 당시의 표준적 이스라엘의 구성을 넘어서 의롭게 되는 것이란 혈통에 의존하지 않으며 이러한 주장은 전혀 새롭지 않다. 바울이 이미 로마서2:25-29에서 참된 유대인은 육체에 할례를 받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은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강조한바 있기 때문이다. 거쓰리(Donald Guthrie)는 9:6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적 표현이라고 말하면서, 이 문제가 역사적 사실로써 복잡해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폐하지 않으며 아브라함의 씨 중에 얼마 만 이스라엘에 포함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면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통회한 대상은 모든 혈통적 이스라엘은 아니었다. 바울은 비통해 하는 것이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9:4)의 조건이 갖추어진 이스라엘 중의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속해 있어서 바울의 마음을 통회하게 했던 것이다. 그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일에 예외 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 탄식한 참 이스라엘은 적어도 9:1-6을 살펴본 바로는 민족적, 혈통적 모든 이스라엘중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3. 11:14, 26절
본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10장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10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먼저 살피고 11:26절을 고민 해 보기로 한다.
10:1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열망이 식지 않음을 또 다시 보여준다. 그들은 ‘의’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모른 체 자기들의 의에만 집착을 보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이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었는데도 말이다(10:1-4). 역사적 이스라엘은 율법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전혀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참조 로마서7장). 바울 역시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빌3:6)고 자신을 잘못 평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3:21-22). 바울은 율법의 구원론 적 기능이 잘못 된 것이며 더 낫고 적합한 방편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다(10:4). 5절 이후에 대해서 최종상은 종속 접속사 “왜냐하면(ϒαρ)”이 4절의 내용을 더 구체화하기 위해서 쓰여 진 것이며, 오로지 하나님의 의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만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10:9-10은 믿음이란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라는 것을 특히 강조한다. 이것은 구원을 위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최종상은 바울의 견해가 확고히 나타났으며, 바울은 모세가“네 입술과 네 마음”(신30:14)을 “네 입으로 시인하고 네 마음에 믿어”(10:9)로 바꾸어 쓰고 있으며 10:10은 9절의 내용을 재확인 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또 10:5-10은 이스라엘의 불신을 심화 시키지만, 바울이 구원의 보편성을 마련한다고 강조한다. 10:12-13에서는 바울의 익숙한 표현으로 구원이 믿음으로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차별이 없음을 반복 강조한다.
바울은 11:13절에서 자신의 사도된 일이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14절에서“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 하려 함이라”고 소망하며 9장에서의 자기 골육 친척을 향한 마음을 다시 반복한다. 지슬러(Ziesler)는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자신이 핵심적인 역할을 지녔다고 믿었다는 뭉크(Munck)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하면서 이방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사의 위치를 파악 하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13-14절에 나타난 바울의 끈질긴 태도가 왓슨(Waston)으로 하여금 ‘그래서 바울의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구원이다’라고 하지만 13c를 14절과 연결시키는 것은 맞지 않고 13b에 관련이 있다고 하면서 설득력이 없다고 최종상은 주장한다. 또한 그는 지적하기를 “시기케 하여”와 “구원 하려 함이라”를 가정법 과거로 취하므로 유대인들을 시기 나게 하여 얼마를 구원 하는 것은 이방인 사역의 참 목표라기보다 부차적인 기대라고 한다. 그러나 케제만(Kaesemann)은 13c가 14절의 종속절로써 바울의 원대한 목표 즉 자기 백성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도구로 표현하는 변증법적 방법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13-14절 이해가 무리 없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케제만(Kaesemann)의 본문 이해는 바울이 지금까지 일관되게 주장해 온 하나님의 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믿음으로 얻게 된다는 바울 자신의 논리를 무시하는 편중된 처사이다. 이필찬은 바울이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단적으로 말했으며 골육에 대한 바울의 바람은 그가 골육 모두를 구원케 할 것을 바라지 않고 “얼마”(τίνεϛ)만이 기대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또한 1-10에 나타난 남은 자 사상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며 골육에 대한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은 시오니즘의 발상이 아니라‘남은 자’로서의 간절한 기대의 표출이라고 설명한다. 페데리꼬 바르바로(Federico Barbaro)도 바울이 유대인 신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바울이 너무 마음을 기울인다고 생각 했지만 사실 바울은 이방인 사도로서의 일을 잘 감당하면서 유대인들의 적은 수 만이라도 믿음으로 이끌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주석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11:26절에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σωθήσεταί로 미래 수동형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온 이스라엘”의 뜻은 무엇인가? 홍인규는 집합적인 의미의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의미 하지만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개인들의 총 집합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박수암은 “온 이스라엘”이 누구에 대한 주장이 네 개의 그룹이 있음을 그의 책에서 밝히며{①유대인과 이방인중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Calvin), ②이스라엘 백성 중 택함을 받은 모든 백성(Bengel, Olshausen)}, ③이스라엘 백성 전체(Aquinas, Kuhl, Schmidt), ④개개인을 포한 하지 않는 전체로서의 이스라엘(Zahn, Lagrange, Sanday & Healam, Barrett, Kaesemann, Schlier, Cranfield)}, 바울이 말하는“온 이스라엘”란 이스라엘 민족의 택한 자의 총수를 말하는 것이지 민족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 케제만도 “ 온 이스라엘”은 유대적 표현인데 이러한 양식은 개인의 총합을 나타내지 않으며 차라리 선택 받은 공동체로서의 구별 짓는 백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지슬러(Ziesler)는 이스라엘 내의 소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그는 “온 이스라엘”은 “모든 이스라엘”이라고 일축하며 “온 이스라엘”이 다(多) 인종적 새롭게 구성된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그 가능성은 없으며, 그러나 어떠한 예외도 없는 모든 유대인 인지에 대해서 알려고 한다면 결코 답을 얻을 수 없고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슬러(Ziesler)의 분명치 못한 지적은 의구심만 일으킬 뿐이다. 왜 그는 “모든 이스라엘”에 대한 결론을 흐리고 있는 것일까? 감히 생각해 보건대 지금까지의 자신의 논리와 어긋나서인지 아니면 다분히 교리적 배경으로부터의 부자유스러움인지 그는 “만약 끝에 가서 후자의 반전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매우 상식 밖의 일이다. 따라서 다소의 막연한 방식으로 바울은 남은 자에 속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결국 ‘시기하게’ 되어 회개 할 것이라는 믿음을 고수 한다.”는 말로 불분명하게 주석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제에 대해서 박수암은 “온 이스라엘”이란 이스라엘 가운데서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며 그것은 민족적 회심으로 생겨지게 될 믿는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리고 바울은 구원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민족적 우월성과 특권을 말하면서도 그들의 민족 전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일부(ἀπὸ μὲρουϛ)인 것을 말해 왔다(9:7, 11:5,14).고 한다. 또한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들어옴”은 종말론적 의미이며(Michel) 25절의 “이방인의 충만한 수”(πλήρωμα)와 26절의 “온 이스라엘”(πας Ίσραήλ)은 대조가 되어있으며 “온 이스라엘”이란 “이스라엘의 충만”이란 개념으로 이해해야한다. 왜냐하면 “충만한 수”는12절의 “충만”과 병행을 이루면서, 5절의 “남은 자”(λείμμα)와 상응하며, 14, 17절의 “얼마”(τίνεϛ)와 25절의 “얼마”( ἀπὸ μὲρουϛ)와는 서로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Dunn). 따라서 바울은 “얼마”중 믿을 자가 드러옴으로 미래의 충만을 기대하고 이 충만은 막연한 수의 전부가 아니라 제한된 수의 전부를 가리키고 있다고 그의 책에서 길게 설명하고 있다. 최종상의 소개에 의하면 상당히 호응을 받고 있는 근래의 견해는 바울은 ‘온’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들’(Barrett, Kaesemann, Cranfield, Dunn)은 ‘온 이스라엘(πας Ίσραήλ)’이란 표현은 모든 이스라엘의 개개인을 필연적으로 포함하지 않고 나라 전체를 언급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복음을 믿지 않고도 구원은 가능한 것인가?(최종상에 따르면 무스너(Mussner), 가스톤(Gaston), 스텐달(Stendahl)은 “특별한 길(Sonderweg)”이 있어서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율법은 선한 것(7:12)이라고 바울은 말했는가?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걸쳐 살펴본 바로는 바울은“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주장해 왔다(1:17, 3:22,27-28,30, 4:5,11, 5:1, 9:30, 10:9-11,17) 이러한 주제는 더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이제 바울이 말하는 “온 이스라엘”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말을 맺고자 한다. 바울은 자기민족을 향해 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바람은 실현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얄팍하게 상황을 바꾸어 재치 있게 유대인을 위하는 척 하면서 이방인의 사도됨을 자랑하는 그런 기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인류를 사랑하였고 혈통적 이스라엘이 바울의 마음을 더 징 하게 할 수 있었던 것에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편파적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10:12-13). 그러나 바울의 바람은 자기의 골육인 개개인으로서 “모든 이스라엘”의 전부는 아니지만 “얼마” 즉 제한된 전부를 고대하면서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9-11장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는 지극히 민족적 사랑을 가지고 다루어진 바울의 사랑의 메시지이다. 적어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이방인을 편애하지도 않는다. 그는 교차적으로 두 그룹을 설명하면서 혈통적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기’ 함으로 얻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만의 목적을 위해 이방인을 도구삼지는 않는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방인의 구원도 얼마의 가지가 꺽임으로 얻어진 ‘하나님의 의’가 이방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서로 자랑하거나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주적이며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 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민족으로서의 자신의 골육인 모든 이스라엘이 다 구원받기를 바란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가 탄식하며 소망하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은 아니었다.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마음의 절규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8:35,39). 그러면 그 대상은 누구였는가? 6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이스라엘중의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이면적 이스라엘 사람들이며,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4)”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저희 것인 사람들이다. 이들 또한 이방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는‘하나님의 의’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미래적 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작금의 한국의 교회는 바울의 민족애 정신과 더불어 이방인에게도 차별이 없는 이방 사도로서의 자랑이 필요로 한다. 세속의 정신이 들어와 이미 계급화 되고 차별화되어 나누어져, 보편적 구원의 정신으로부터 멀어진 이 조국의 교회에게 주는 바울의 절규를 듣고 잠시 선조들의 핏 길을 곱씹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