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 ?~1822)의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하던 '남은 들 상여'다.
이 상여는 이장 때 사용한 후 남은들 마을에 주고 간 것이라고 전한다.
남연군이 죽은 것은 1822년으로 초장지는 경기도 연천군이다. 후에 예산군 덕산면 현재의 묘로 이장하였다.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의 남은들 마을 입구의 상여 막에 보관되어 있다.
보통의 상여 막처럼 상여를 해체하여 보관하지 않고 조립된 그대로 관람하기 좋게 전시되어 있다.
몸체에는 봉황・용무늬 등이 새겨지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주고 있다.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덜어주려는 의미인 듯싶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남연군은 1822년(순조 22)에 죽었다.
당시의 가야사(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보덕사) 터가 왕손을 낳게 하는 명당이라는 풍수설을 듣고
흥선 대원군이 1840년(헌종 6)에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의 묘를 이장한 것이라 한다.
이장을 하고 난 그 다음 해에 둘째 아들 이재황(李載晃; 후일 고종)을 낳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상여의 제작은 1840년과 고종의 탄생년인 1852년(철종 3)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남은들 상여는 자체의 가치보다도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상여라는 점에서 유물로서 가치가 있다.
각 부의 조각 수법도 당시의 조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며 다른 작품에 비하여 어느 정도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대원군이 세도를 얻기 전에 제작된 것이므로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보다는
조촐한 모습이다. 왕실 상여의 제작을 담당하던 ‘귀후서(歸厚署)’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인 대여(大輿)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숙종 대의 청풍 부원군 상여(중요민속문화재 120호)와
비교할 만한 가치를 지닌 자료이다.
1868년 에른스트 야콥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던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 교섭에 실패했다.
그는 병인사옥 때 탈출하여 프랑스 제독 피에르-구스타프 로즈의 조선 원정 때 향도와 수로 안내인이었던 프랑스 신부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도의 의견에 따라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발굴해서 시체와 부장품(껴묻거리)을 이용하여
대원군과 통상 문제를 흥정하고자 하였다.
이에 오페르트는 배후 인물로 자금을 전담하였던 미국인 젠킨스(F. Jenkins), 페롱, 선장 묄러(Möller), 조선인 모리배 2명,
유럽・필리핀・중국 선원 등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하였다.
그들은 1868년 5월 차이나 호와 그레타 호 등 1,000t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머스킷 소총과 도굴용 도구를
구입한다. 5월 10일 충청남도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 아라사(俄羅斯; 러시아)인이라 사칭하면서 남연군 묘로 행군하였다.
도굴단은 덕산 군청을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고 민가로부터 발굴 도구를 약탈하여 가동(伽洞)의 남연군 묘로 직행, 밤에 도굴에 착수하였으나 묘광이 견고하여 실패하고, 날이 밝아오자 철수하였다.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다.
이 사건은 국외에도 널리 알려져 젠킨스는 기소되는 등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대원군이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고 대외 강경책을 더욱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원군은 “이 괴변은 필시 사류(邪類; 천주교도)의 대응과 향도로 발생한 것”으로 단정 짓고,
“잔존하는 천주학쟁이를 가일층 엄단하라.”고 명을 내렸다.
결국 대외적으로는 서양인의 위신이 떨어졌고, 대내적으로는 대원군의 ‘쇄국양이 정책’ 강화와 ‘천주교 탄압’이 가중되었다.
“충청도 덕산 땅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고
또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으니 둘 중 한 곳에 선친의 묘를 쓰라.”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젊었을 때 '상갓집 개' '궁도령' 등으로 어렵게 지내고 있을 무렵이다.
당시에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이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찾아 두 명당 음택(陰宅)을 권한 것이다.
황제가 나올 자리란 평범한 산비탈이 아니라 가야산의 유서 깊은 거찰 가야사의 보웅전(普雄殿) 앞에 있는 금탑 자리라는 것이다.
흥선군은 이 절을 폐사 시키고 꼭 그 자리에 묘를 쓸 요량으로 먼저 가야산 아래쪽,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절골에 임시 묘 자리를 정했다. 그 후 흥선군은 가야사의 중들을 내쫓아 빈집을 만든 다음 불을 질러 폐사 시켜 버렸다.
가야사는 불타버리고 금탑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폐사지가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금탑을 부수고 묘를 파는 일이었다.
흥선군 4형제는 그 일을 이튿날로 미루고 잠을 자는데 세 형이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흰옷을 입은 늙은이가 노해서 욕설을 늘어놓으며
“나는 탑신(塔神)이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내 거처를 빼앗느냐? 끝내 장사를 지낸다면 4형제가 폭사할 테니 속히 돌아가라.”
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 흥선군은 오히려 흥분하며 진정 명당자리라며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른 아침 탑을 깨뜨리고 보니 그 자리는 전체가 돌이었다.
도끼로 깨뜨리니 도끼가 튀기만 하여 흥선군이 도끼를 치켜들고 하늘을 향해 “나라고 왜 왕의 아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인가?”
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도끼는 다시 튀지 않았다고 한다.
매장을 마치고 난 후 흥선군은 나중에 누가 손댈까 걱정되어 쇠 수만 근을 녹여 부었고,
그 위에 강회를 비벼서 다졌다고 한다. 오페르트 일당이 밤새 도굴하다 실패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남연군 묘를 거기에 선 후, 흥선군은 실제로 대원군이 되었다.
1865년(고종 2) 대원군은 남연군 묘 맞은편에 있는 서원산 자락에 절을 짓고 보덕사(報德寺)라는 이름을 내렸다.
은덕에 보답한다는 뜻이었다. 보덕사는 주지로는 벽담선사(碧潭禪師)를 임명했다.
절의 시주자는 큰 아들 이재면(李載冕; 1845∼1912)으로 했으니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실 원당 사찰인 것이다.
이 절은 6・25 전쟁 중에 불타 버리고 지금은 비구니 사찰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