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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심리학
(Introduction to Personality)
6장. 융의 분석심리학2
*학습목표
1. 융의 무의식이론을 살펴본다.
2. 프로이트의 부정적이고 병리적인 무의식이론과 대비하여 융의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무의식이론에 대해 살펴본다.
3. 융의 분석심리학이론을 대표하는 이론인 ‘마음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ego(자아)와 집단의식인 페르조나(가면, persona), 그리고 집단무의식인 새도우(그림자, shadow), 아니마-아니무스(여성성-남성성, anima-animus), 셀프(자기, self)에 대해서 각각 살펴보고, 자아와 페르조나, 그리고 집단무의식들간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본다.
4. 진정한 의미의 자기실현인 개성화(individuation)의 의미와 고통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학습목차
1. 융에 대한 간단한 소개
2. 분석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마음의 의미 - 의식과 무의식
3. 프로이트와 융의 무의식관에 대한 견해비교
4. 마음의 구조와 기능
5. 고통(신경증 등)의 의미에 대한 융
1. 융에 대한 간단한 소개
1) 융과 프로이트의 만남과 헤어짐의 일화
융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되는 꿈이 있었다. 꿈의 내용은 이렇다
[내가 꿈속에서 어느 집에 들어가게 되면 그 집 중앙 한가운데 남근모양의 거대한 석상이 서있었다].
융은 이 꿈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융은 스위스 부르크휠쯜리의 대학 교수가 된 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과 성욕론을 접하게 된다. 이때 비로소 융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꾸어왔던 꿈의 의미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성적인 욕구를 상징하고 있음을 깨닫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기에 당시 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들에게 정신분석이론은 금기적인 이론이었다. 따라서 부르크휠쯜리의 대학 측에서는 융에게 정신분석이론을 선택하고 대학교수를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정신분석이론을 포기하고 대학교수로 남을 것인지에 대해 선택을 강요한다.
이때 융은 "오직 확률적인 것, 평균적인 것, 진부한 곳, 창조성이 빈곤한 것만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대학에 있을 수 없다", "만일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나는 그의 편에 머물겠다. 만일 대학에서의 출세가 연구를 끊어버리고 진실을 침묵시키게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출세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라고 주장하면서 대학교수직을 사임한다. 이로 인해 프로이트와 융은 학문적인 동지가 된다.
세월이 흘러 정신분석학은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하고, 아울러 정신분석은 미국에 까지 알려지게 된다. 당시 미국의 클라크대학에서는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프로이트와 융을 초청하게 된다. 그런데 미국으로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융은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의 꿈을 꾸게 된다. 융의 꿈의 내용은 이렇다.
[나는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집에 다시 들어갔고 역시 가운데 남근석이 있었다. 그런데 구석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하1층에는 중세시대 기사의 갑옷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 지하2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의 가운데에는 아주 원시시대의 무덤같은 것이 보였는데 그곳에는 해골을 비롯한 여러 유골들이 구덩이 속에 있었다]
융은 이 꿈의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해본 결과, 아마도 무의식에는 성적 본능보다 심층적인 무의식이 존재할 수 있음을 예시해주는 꿈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꿈을 프로이트에게 이야기 한 결과 프로이트는 융의 꿈이 정신분석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을 살해(배신)할 꿈 (자신의 오이디푸스컴플렉스이론)이라고 해석을 하였다. 융과 프로이트는 이런 견해차이로 인해 결국 서로 결별을 하게 된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성적 본능을 강조하는 정신분석학이론을, 융은 성적 본능보다 심층적인 무의식인 집단무의식과 인간무의식 속의 神性을 강조하는 분석심리학이론을 형성하게 된다.
위의 일화에서 보였듯이 프로이트와 융은 꿈을 통해서 만났고, 꿈을 통해서 헤어지는 기묘한 인연을 갖게 된다.
2) 융의 BBC방송 대담내용
사회자가 당시의 세계정세에 관한 의견을 물었을 때 융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나타난 불안과 공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으나 인류의 심리학적 자세에 장차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단언하였다. 사회자가 그 이유를 묻자 융은 이렇게 설명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좀더 많은 심리학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일한 위험은 인간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큰 위험인데도 우리는 너무도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모릅니다. 아는 게 너무 적습니다. 우리는 그의 정신을 연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가오는 모든 재앙의 근원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
융이 위의 이야기를 한지 벌써 40년이 지났다.
다양한 학문이 발전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이 발전하였다. 이념투쟁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보다 실리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그로 인하여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알게 되었는가?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더 지혜로워지고 현명해졌는가? 광야의 예언자나 영웅, 개척자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는 사라지고 물질적 풍요를 신봉하는 대중집단의 시대가 열렸다. 비록 제1, 2차 세계대전 같은 큰 규모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세계 도처에서 종교적 이념이나 인종간의 대립 또는 살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간은 여전히 증오와 상호비난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가 가고 21세기가 시작되는 전환의 시대에 인간의 내면, 특히 그 어두운 측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일지 모른다. 모든 재앙의 근원이 인간에게 있다고 한 융은 사실 인간의 마음 속에서 그 재앙의 근원뿐 아니라 이른바 '구원'의 근원도 발견하고 주장했던 사람이었다.
2.분석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마음의 의미 - 의식과 무의식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엄청나게 큰 세계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우리의 마음' 이라고 알고 있는 것, 우리가 남의 마음' 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마음의 전부인 양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오해를 받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혹은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저질렀을 때 우리는 "나도 모르는 내 마음" "나도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을 한탄하고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 속은 모른다"고 실토한다. 이로써 우리는 나와 남이 모두 가지고 있으나 평소에 모르고 지내는 '속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이나마 시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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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빙산"과 융의 "섬"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정신)을 바다위에 떠있는 "빙산"에 비유를 했지만, 융은 "섬"에 비유를 했다.
프로이트는 해면위에 드러나는 빙산의 윗부분을 의식이라고 했고 해저에 있는 빙산의 아랫부분을 무의식이라고 비유를 했다.
그러나 융의 경우에는 섬의 비유를 통해 바다위에 드러나 우리가 섬이라고 알고 있는 부분이 의식이며, 조류에 의해 드러났다 사라졌다하는 부분을
개인무의식이라고 했다. 그에 비해 바다속에 잠겨 있는 부분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다.
우리가 언뜻보면 섬은 서로 분리되어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섬과 섬은 사실상 해저면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융에 따르면 언뜻 사람과 사람이 달라보이지만 깊은 집단무의식 층에 들어가면 사실은 "서로 이어져 있는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만큼 인간의 정신(마음)에 대한 견해에 있어 프로이트에 비해 융이 보다 폭넓은 관점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말이나 표정으로 표현되지 않은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들에게는 밖으로 표현되지 않은 마음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 외향적인 서양인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사랑하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한다. 말하지 않은 감정, 말하지 않은 마음은 주목할 만한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되풀이해서 "I Love You"라고 말함으로써 사랑의 마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비교적 내향적인 동양인들은 대체로 마음과 마음이 말없이도 통한다는 이심전심의 '비언어적 소통'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말 뒤에 숨은 뜻을 생각하고 말없는 깊은 마음을 존중해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 마음이나 남의 속마음을 항상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 지레짐작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이나 타인의 마음을 잘못 판단하고 오해하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서구인처럼 외향적이든 동양인처럼 내향적이든, 마음을 표현을 하던, 표현을 하지 않던지 간에 내가 아는 나의 마음을 “의식”이라고 하고, 내가 모르는 나의 마음을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3. 프로이트와 융의 무의식관에 대한 견해비교
1) 프로이트와 융의 공통점 - 무의식의 존재에 대한 인정
프로이트와 융은 인간의 정신이나 마음속에 무의식이 존재하고 있고, 이런 무의식이 인간의 정신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아울러 무의식에 대한 발견을 통해 인간의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2) 프로이트와 융의 차이점 - 무의식의 내용과 그 기능
*프로이트
▶프로이트가 주장한 무의식의 내용은 현실의 도덕규범과 맞지 않아서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억압된 여러 가지 본능적 충동이었다. 특히 억압된 성적 욕구의 원초아(이드)와 이런 성적 욕구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적 감독 기능을 하는 초자아부분이 무의식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융
▶그는 또한 무의식은 사람이 태어나 의식이 생긴 뒤 거기서 억압된 내용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즉 출생이후의 유아기와 아동기 경험을 통해서 무의식의 내용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개인무의식 (the personal unconscious) - 출생이후 개인이 살아오면서 이루어진 무의식의 층. 무의식에는 프로이트가 말한 억압된 성적 충동뿐 아니라 단순히 잊어버린 것들이나 자극이 약해 의식까지 미치지 못하는 내용들이 있으며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여기에 해당된다.
▶집단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 - 개인적 무의식에서 나아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출생이전부터) 마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무의식의 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개인의 특수한 생활사에서 나온 무의식의 층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는 인간 고유의 원초적인,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무의식의 심층이다.
: 이런 집단무의식은 의식에 활력을 주고 그 기능을 조절하여 의식과 무의식이 통일된 전체정신을 실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바와 같이 무의식은 단지 충동의 창고, 의식에서 쓸어낸 본능의 쓰레기장이거나 병적인 유아기 욕구로 가득 찬 웅덩이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진정으로 성숙케 하는 창조의 샘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4. 마음의 구조와 기능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옛날 철학자나 심리학자는 즐겨 둥근 공으로 표시하였다. 전체정신을 설명하는 데는 이것이 가장 적절하다.
우리의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지며 무의식은 개인적 무의식, 집단적 무의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의식계와 무의식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 그림에서와 같이 독특한 요소가 있다.
의식과 무의식을 막론하고 우리의 정신은 심리적 복합체, 콤플렉스(Complex)로 이루어지며 이 가운데 집단무의식을 구성하는 콤플렉스를 다른 말로 원형(Archetype)이라 부른다.
click *융이 주장한 컴플렉스의 개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열등감의 의미와 다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열등감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애들러(Adler)라는 심리학자에 의해 주로 연구되었다. 애들러는 열등감은 여러가지 원인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보았으나 열등감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열등감이야말로 인간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자신의 열등감을 수용 인식함으로써 그런 열등감을 보상하여 우월감을 성취하려는 노력에 바로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고 보았다. 부정적인 열등감이란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고 열등감속에 머무를 때, 또는 자신의 열등감을 지나치게 보상하려고 할 때 나타난다고 보았다. 열등감은 부모의 무관심 혹은 정반대로 부모의 과보호로 인해 나타난다고보았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부모의 무관심으로 인해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껴서 자신의 열등감속에 주저 앉는 다거나 혹은 정반대로 부모의 과보호로 인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다른 사람이 모든 것을 대신해주어야 한다는 지나친 의존성으로 인해 나타난다고 보았다.
애들어는 열등감을 컴플렉스라고 하지 않고 인피리어리티(inferiority)라고 명칭하였다.
융이 주장한 컴플렉스의 의미는 이렇다.
정의를 내리면 어떤 일정한 대상이나 사람 혹은 사건에 대해 강하고 많은 정신적 에너지들이 모여 있는 것을 뜻한다(참고로 잠실운동장을 영어로 할때 잠실
스포츠 컴플렉스라고 한다 - 주경기장, 보조경기장, 야구장, 체육관 등등이 주경기장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에 대해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다고 가정하자. 친구가 이 사람에게 충고를 하더라고 이 사람은 자신이 돈이 없어서 친구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돈만 있으면 네가 내게 이런 소리를 하지 못할거야"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모든 경우를 '돈'이라는 대상에 의존하여 자신이나 타인의 삶을 판단하고 이끌어 나가기 때문에 돈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사람이 돈이 많아 졌다고 해도 결코 만족할 수 없기에 진정한 돈컴플렉스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나는 돈에 욕심이 없어"라는 말하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언뜻보면 이 사람이 돈에 욕심이 없어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찌 보면 돈에 욕심이 많다고 하는 사람보다 더 돈에 대한 욕심이 많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돈에 욕심이 없다면 돈에 욕심이 있다고 말할 필요도 없고 돈에 욕심이 없다고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즉 위 사람의 경우 그 심리를 정확히 표현하면 "나는 지금은 돈이 없어 욕심을 낼 수 없지만, 돈이 생길 기회가 오면 너보다 더 돈에 대한 욕심을 낼거야"라는 무의식 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런 경우도 돈에 대한 컴플렉스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컴플렉스는 돈 뿐만아니라 지위, 학력 등 사회적으로 선호되는 기준이나 사람 - 아버지, 어머니 등에도 나타날 수 있다.
1) 자아(Ego)와 의식
●자아의 정의: 자아란 사람들이 ‘나’라고 알고 있는 모든 의식내용을 뜻한다. (나=자아)
● 자아 또는 ‘나’ 는 의식의 중심에서 의식된 마음을 조절하고, 동시에 무의식의 마음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의식의 유형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의식의 모든 내용은 나(자아)와 연관되고 나(자아)는 의식의 영역을 넓히기도 하고 좁히기도 하며, 무의식의 작용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나(자아)는 개인이 외부(사회)세계와 관계를 맺는 중요한 창구인 동시에 자신의 내면(무의식)세계와도 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자아)의 태도는 우리의 인격의 성숙, 즉 정신의 전체성의 실현(외부세계와 내면세계의 균형과 조화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내가 아는 모든 것,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 나의 생각, 나의 지각, 나의 느낌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의식, 또는 자아의식이라 한다.
예) “나는 김철수다” “나의 종교는 기독교다” “나는 회사원이다” “나의 아버지는 김영수다”, “나는 성실하다” “나는 키가 작다” “나는 남자다” 등의 소위 나라고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을 의식 또는 자아의식이라고 한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나(자아)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생활 속에서 자기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성(성격:심리유형)과 함께 자신이 집단에서 행해야 할 일반적인 행동규범을 배우고, 사회의 일원으로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의식을 강화하고 그 영역을 넓히게 된다.
융은 나(자아)가 성장하고 사회의 일원이 되면서 맡게 되는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대해 사회가 집단적으로 개인들에게 요구하는 행동규범이 있는데, 이런 집단적으로 요구되는 집단정신을 페르조나(Persona)라고 하였다. 다음 절에서는 페르조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2) 페르조나(Persona)와 집단의식(집단정신)
● 나(자아)가 형성하고 성장하면서 소유하게 되는 집단사회의 행동규범 또는 역할을 ‘페르조나(persona)’ 라 부른다. 이것은 집단정신에서 빌려온 판단과 행동의 틀이다.
click *페르조나의 의미와 예
페르조나(persona)란 고대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말한다.
● 우리나라의 탈춤처럼 어떤 사람이 각시의 탈을 쓰면 각시가 되고, 양반의 탈을 쓰면 양반이 되는 것처럼 인간이 집단속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여러 개의 탈을 썼다가 벗었다가 하면서 살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한 주부의 경우, 누구네 집 딸의 역할, 누구네 집 며느리의 역할, 누구의 처의 역할, 누구의 엄마의 역할, 직장여성으로서의 역할, 직급에 따른 역할 등등 개인이 사회속에서 살아가면서 지니게 되는 가면의 수는 매우 많다).
● 여기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탈이나 가면의 의미가 "도덕적인 위선"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페르조나"는 집단정신의 한 단면인데 사람들이 곧잘 나의 생각, 나의 신념, 나의 가치관,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결코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남들의 생각, 즉 부모의 생각, 선생의 생각, 다른 친구들의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수 있다. 즉, 집단적으로 주입된 생각이나 가치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페르조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페르조나"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진상, 개성)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가짜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모습(가면/가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 우리나라 말 가운데 '페르조나"에 해당되는 말은 '체면', '얼굴', '낯'과 같은 것이다.
어른의 체면, 남편의 체면, 교육자의 체면, 선생의 체면, 숙녀의 체면 등 그것은 모두 어떤 사회집단이 그 집단의 성원들에게 한결같이 요구하는 일정한 행동상의 규범이며 마치 의복과도 같은 것이다(예로 우리는 정장을 입고 고급음식점에 가는 경우하고, 일상생활복을 입고 고급음식점에 가는 경우하고 종업원들의 태도가 달라질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자신이 입은 옷에 따라 행동이나 어투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 또한 체면이라는 말은 '사명', '역할', '본분', '도리'라는 의미와 유사하다.
종교인의 사명, 교육자의 본분, 아들된 도리, 주부의 역할이라고 할 때 바로 이것은 한정된 집단적 직업상과 기대되는 규범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감히 뵐 낯이 없다", "얼굴을 들수 없다", 어디다 낯을 들고 다니느냐" 등의 표현은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 및 체면(페르조나)의 상실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 한국사회는 특히 페르조나가 강조되는 사회이며 개인이 싫든 좋든 그것과 동일시하도록(따르도록) 강요하거나 어느 틈엔가 동일시되어 있어 "진정으로 자신의 모습"을 잊게 만든다.
예를 들어 "여자는 시집가서 아이나 낳을 일이다", "염색한 머리는 부도덕하다"라는 말이나 누구네 집 딸, 누구네 아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아버지, 어디 출신, 무슨 대학, 무슨 직위 등이 개인의 개성과 능력을 판단할 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한국사회이다.
(실례로 어떤 부인이 소형승용차를 몰고 호텔에 갔을 때 종업원이 "아줌마라고 부르고, 고급승용차를 타고 간 경우 종업원이 "사모님"이라고 부르더라는 이야기가 이런 내용에 해당된다. 즉 동일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동차'로 표현된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그 사람의 능력이나 개성이 평가받을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페르조나와 같은 집단적 규범을 벗어나 조금이라고 개성을 발휘하려고 하면 "모난 돌이 정받는다"는 속담처럼 즉각 이런 행동을 위험시하고 아들된 도리, 며느리된 도리, 교사로서의 본분 등을 내세우고, 집단으로부터의 이탈을 "이기적, 독선적,비인간적 몰인정" 등으로 규탄함으로써 사회규범의 와해를 막고 개인을 일정한 틀에서 못 벗어나게 한다.
● 집단이 그 구성원들에게 요구하는 도리, 본분, 역할, 사회적 의무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집단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야 할 여러 유형을 말한다.
● ‘나(자아)’는 ‘페르조나’를 배우고 여러 종류의 '페르조나'를 바꾸어가면서 사회속을 적응을 한다. 그러나 그 '페르조나 '는 어떤 특정한 사회집단에만 통용되는 화폐나 지폐와 같은 것으로서 그 집단 밖에서는 인정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인간의 보편적 ·원초적 행동유형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 페르조나는 사회생활을 위해서 삶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나(자아)가 자신의 내면(무의식)세계를 무시하고, 이런 집단정신에 지나치게 동일시하게 되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내적인 정신세계와의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기자신을 돌보지 못하게 되고 그 존재조차도 잊어버린다.
예) 갱년기 우울증: 개인이 자신의 사회적 역할인 페르조나와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경우 무의식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갖게끔 하기 위해 나타내는 증상
click *페르조나와 지나친 동일시가 일어난 경우의 2가지 실제사례
(1)융이 치료했던 한 중년여성환자의 갱년기 우울증
융에 따르면 갱년기 우울증에는 인간정신으로 하여금 전체가 되고자 하는 무의식의 작용이 나(자아)의 의식의 외부세계에 대한 경직되고 일방적인 태도(페르조나)를 수정시키기 위해 우울증상을 일으키고, 그 결과 개인은 밖으로만 향해있던 나(자아)의 시선을 안(자기내부)으로 돌리도록 하는 목적이 담겨 있다.
갱년기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이 흔히 꼼꼼하고, 보수적이고, 지나치게 양심적이고 강박적이며, 규칙을 잘 지키는 성격의 사람이라는 점은 이런 설명을 뒷받침해준다. 비단 우울증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정신장애나 신체장애의 경우에도 이런 의미라 담겨있다.
융이 만났던 실제 한 여성의 실례이다.
이 여성은 결혼이후 30년 동안 성실하게 집안 일을 돌보아 온 주부로서 남편의 외도를 발견하고, 갑자기 히스테리성발작(예를 들면 신체화장애나 홧병)을 일으켜서 입원한 환자이다. 그 부인은 융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는 교회목사님이 하라는 대로 좋은 일을 도맡아 해왔습니다. 아이들 시중도 열심히 했고, 남편뒷바라지도 성실하게 해왔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나쁜 짓을 한 내 남편은 뻔뻔스럽게 돌아다니고 있는데 왜 나는 이런 병에 걸려 병원에 들어와 있어야 하는 겁니까?]
융에 따르면 그녀의 말은 옳다. 그녀는 모범적인 주부이며 좋은 어머니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녀는 집단사회가 좋다는 것만 따랐고, 그녀 자신의 마음을 소홀히 하였다. 어머니로서의 페르조나, 아내로서, 건전한 시민으로서의 페르조나에 자신의 자아를 완전히 일치시키며 사라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가족관계의 장애나 그녀의 장애는 그녀로 하여금 그녀 자신을 찾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런 예는 융의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와 상통한다. "우울이나 고통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줄수 있는 가장 위대한 축복이다"
융이 가장 좋아했던 성경이야기는 바로 "욥기"이다. 욥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가장 강했던 욥이 사탄이 주는 여러가지 고통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만일 이 주부의 경우를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보면 바로 그녀를 하나님께서 사랑하기에 그녀로 하여금 진정되고,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히스테리성발작을 일으키게 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고, 융의 이론에서 보면 바로 전체정신을 살도록 집단무의식이 그녀로 하여금 히스테리성발작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보다 다가가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2)해리증상(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중인격자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증상)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가정적이지 못하고, 가정적인 사람이 사회적으로 출세하지 못한다는 속설과 유사한 예이다.
[직장에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활달하고 인정많은 사람으로 통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밖에서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흔히 무뚝뚝하고, 때로는 소심하고, 잔소리가 많고, 짜증내고
작은 일에 집착하는 소인이 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도 직장에서의 페르조나에 의해 행동을 하다가 집에 오면 자신도 모르게(무의식적으로) 정반대의 내적 인격에 의해 행동하게 되는 예이다.
위의 페르조나와의 지나친 동일시에 대한 2가지 예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무의식은 개인(자아)으로 하여금 외적 인격(페르조나)와 내적인격(내면정신세계)와의 균형을 이루게끔 한다. 이를 통해서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가게끔 한다.
● 페르조나에 대한 건강한 태도 - 페르조나는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페르조나가 나(자아)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자각은 페르조나를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수단이라고 보고, 거기에 절대적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 페르조나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페르조나와의 맹목적인 동일시가 문제되는 것이다. 즉, 사회적 역할, 의무, 도덕규범, 예의규범, 이런 것들을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의 것을 맹신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3) 무의식의 내용과 의식화과정
●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의식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고, 시시각각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는 마음의 세계는 모두 무의식이다. 무의식의 상당부분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의식화함으로써 의식의 내용에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 무의식의 적극적인 성찰의 한 방법은 심리학자에게 가서 자신의 무의식을 살펴보는 과정인 분석작업이다. 또한 종교적 수행은 어떤 면에서는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한 인격의 창조적 변환에 기여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일상적인 자아의식이나 페르조나를 초월하는 신성한 힘의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사람은 물론 그런 종교적 수행이나 무의식의 분석작업을 하지 않아도 무의식을 깨달아나갈 수 있다고 융은 주장한다. 그것은 무의식 자체가 그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이 그 자체의 자율적인 의지에 의해서 의식을 자극하여 무의식을 깨닫도록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은 자아가 무의식을 경시하고, 그것과의 대면을 피할 때, 자아로 하여금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자극함으로써 무의식의 경향을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자아에게 준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가 무수히 겪고 지나가야 하는 시련, 고통, 갈등, 절망, 상실의 아픔이 자기성찰의 귀중한 기회이며, 성숙에의 의미있는 고통이듯이 우리는 언제나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창조적 자극의 영향 아래 있고, 때로는 그것이 고통스런 체험, 심지어 신체적 ·정신적 병고의 시련으로 표현된다(위에서 살펴본 갱년기 우울증이나 해리증상에서의 예처럼).
자아가 그 고통의 의미를 알아차리느냐 모르고 지나가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자아의 문제이다.
● 이와 같은 무의식의 창조적 작용은 융의 심리학적 용어로는 자율성(autonomy)과 보상과정(compensation)으로 표현된다. 마치 자율신경계가 외부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응하여 신체기능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신체생리를 조절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피가 모자랄 때 피가 부족한 피를 체내에 많이 공급하기 위해서 심장이 자동적으로 빨리 뛰는 것과도 같다. 무의식은 자아의식이 한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나가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의식의 방향과는 다른 방향의 이미지를 활발히 보내서 그것을 보상한다.
예) 지나치게 이성적인 남자의 꿈속에서 그로 하여금 매우 비합리한 행동을 하게 하거나 평소와는 달리 열렬한 사랑을 나누게 만든다. 혹은 지나치게 소심한 사람의 꿈에서 깃발을 들고 데모행진의 선두를 달리는 영웅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욕구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일방성을 깨우치고 의식이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무의식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 그러나 무의식이 자율적으로 보상작용을 발휘하므로 누구든지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진정한 자기를 인식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자기인식의 작업을 소홀하게 하면 할수록 무의식의 보상작용의 강도가 높아지고 무의식의 과보상(overcompensation)은 결국 의식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거나 교란시켜 노이로제의 증상이나 생리적 이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의식을 깨달아 나가야 하고 그 가운데 무의식의 중요한 내용들인'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자기' 라고 부르는 것들을 만나게 된다
click 무의식의 의식화과정에 대한 그림
4) 무의식의 의식화과정 중에서 처음 만나는 무의식 - 그림자(shadow)
● 여기서 다루게 될 '그림자'는 의식에 가장 가까이 있는 무의식의 내용이다. 무의식의 의식화과정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그림자라고 부르는 심리적 내용들이다.
● 그림자란 무의식 속에 있는 열등한 인격(성격)이다. 그것은 위에서 살펴본 나(자아)와 페르조나의 의식 반대편에 있는 무의식의 어두운 면이다. 다시 말해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측면이다
(예를 들어 이전 시간에 실시한 심리유형검사에서 자아의 심리유형인 ENFP의 무의식속의 그림자는 ISTJ이고, 반대로 자아의 심리유형인 ISTJ의 무의식속의 그림자는 ENFP이다. 즉 자신의 성격의 정반대적인 특성이 바로 그림자에 있는 자신의 성격이다.)
그래서 그림자는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와는 대조가 되는,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아의식이 한쪽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림자는 그만큼 반대편 극단을 나타낸다.
click 심리유형을 예를 들어 그림자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한 예를 들어 A는 ENFP이고, B는 정반대 성격인 ISTJ라고 가정해보자.
위에서 설명한 대로 서로의 자아의 심리유형은 서로에게 있어 무의식 속으로 억압된 성격인 그림자를 나타낸다. 즉 ENFP의 경우 자신의 그림자에는 ISTJ가 있고, ISTJ인 경우에는
자신의 그림자에는 ENFP가 있다. 이들 각자가 자신의 성격이나 생각, 가치관이 옳다고 하면 이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대립과 갈등상태에 놓이게 된다.
ENFP의 경우에는 자신이 활달하고, 안목이 넓고, 따뜻하고, 이해심이 많다고 자신의 장점을 내세우는 경우, 그는 ISTJ인 B를 소심하고, 안목이 좁고, 쌀쌀맞고, 남을 이해하는 면이 조금도 없다고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ENFP가 비난한 ISTJ가 바로 자신이 언젠가 받아들여야 할 자신의 그림자의 성격이다.
이에 비해 ISTJ의 경우 자신이 신중하고 현실성있고, 침착하고, 사리분별이 있고, 성실하다라고 자신의 장점만을 내세우는 경우, 그는 ENFP인 A를 주책스럽고, 떠벌리기 좋아하고, 몽상가여서 현실개념없고, 우유부단하다고 비난하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도 ISTJ가 비난한 ENFP가 바로 자신이 성숙을 위해 언젠가 받아들여야 할 자기 그림자의 성격이다.
즉 ENFP에 있어 ISTJ의 현실감각과 결단력, 계획성이 자신에게 부족한 열등한 성격의 측면이고, ISTJ의 경우에는 ENFP의 넓은 안목과 따뜻한 이해심이 자신에게 부족한 열등한 성격의 측면, 즉 그림자인 것이다.
● 그림자는 본래 의식에 가까운 무의식의 내용이다. 그래서 그림자가 다른 사람에게 투사될 때는 나와 비슷한 부류의, 나와 같은 성별의 대상에 투사되며, 거기서 그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을 본다
click *대인관계에서 나타나는 그림자의 실례
대인관계상으로 볼 때 이런 열등한 성격의 측면인 그림자는 자아(자신)과 비슷한 대상에게 향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 테면 같은 성별의 친구사이, 형제간, 자매간, 직장동료사이, 상사와의 관계, 같은 성별의 가족사이, 예를 들면 시누이와 올케사이 등에서 "웬지 모르게(괜히) 그 사람만 보면 싫다, 거북하다, 긴장이 된다, 화가난다"고 할 때 여기에는 그림자의 투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왜 싫은가"를 설명하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이유여서라기 보다는 대개 "공연히 잘난체 하니까", "덮어놓고 저속하고 째째하니까", "뭔가 비굴하고 천해 보이니까", "미욱하고 돼지같이 욕심많아 보이니까", "영악스럽고 교만해서", "너무 쌀쌀맞아서" 하는 등 우선 "부정적인 감정이 앞선 다음에 합리화를 위해 붙여놓은 이유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이런 상호 그림자의 투사가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보다 강화될 때 관계의 단절 - 소위 "철천지원수"가 된다.
이런 그림자의 투사는 개인간 뿐만 아니라, 집단간에도 나타나게 된다. 지역간의 편견, 민족간의 편견 등도 집단적인 그림자의 투사현상으로 볼 수 있다. (축구경기를 할 때 한국과 일본간의 치열한 응원전과 민족감정의 부가, 그러면서도 한국인은 일제를 좋아하고, 또 일본인들은 한국에 주로 관광을 오는 행동들이 서로간의 그림자투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옛말에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란다", "두손이 맞닿아야 소리가 난다"라던가 "끼리끼리 싸운다"라는 말은 바로 이런 그림자의 투사로 인한 두 사람이나 두 집단간의 갈등을 의미한다.
또한 민간설화에 많이 나오는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가짜와 진짜 등 무수한 쌍들은 인간정신의 의식인 자아(페르조나)와 무의식인 그림자간의 명암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 그러면 어떻게 해서 겉으로 보아 파괴적이고 위험하며, 부정적인 작용을 나타내는 그림자를 창조적으로 전환시킬 것인가, 그 열쇠는 자아의식이 무의식에 대하여 어느 만큼 관심을 가지고 그림자의 존재를 깨닫고자 노력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자기반성을 통해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게 투사된 자신의 무의식적 그림자를 다시금 나(자아)에게 되돌려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작업을 하여 자신의 그림자가 깨달아질 때 의식의 변화가 생기고, 그 결과 그림자의 부정적인 작용은 해소되어, 자아의 삶을 돕는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기능으로 바뀐다.
● 인간의 마음속에 얼마나 무서운 그림자가 있을 수 있는 가를 직시하는 것이 심리적 의미에서 진정한 성숙의 첫단계라고 할 수 있다.
click1 대인관계에서 나타나는 그림자의 문제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림자의 투사는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 증오와 갈등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그는 틀림없이 그런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을 거야"라는 터무니없는 선입견을 서로 상대방에게 가지고 있으면 그림자의 상호투사는 두 사람사이의 오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투사된 그림자의 내용과 비슷한 행동을 보이면 "그것봐, 내말이 틀림없잖아. 그는 그런 사람이야"라고 단정지음으로써 투사를 강화시킨다(사회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자기충족적 예언"이라고 한다).
그림자의 투사는 직장동료, 선후배, 청소년친구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크던 작던 자주 일어난다. 형제자매는 물론 시누이 올케사이, 또는 세대간,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등 권위적 존재와의 관계에서도 그림자의 상호투사는 일어날 수 있다.
아들이 실제 이상으로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필요 이상으로 거북하게 느끼거나 어려워하고, 시누이 올케사이에도 서로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 우리는 그림자의 투사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의 "오해"는 항상 그림자의 무의식적 투사에 의해서 비롯된다.
가족 중에 온 가족이 미워하는 구박둥이이며 '미운오리새끼'를 만들어 내는 것도 가족성원의 그림자의 투사에서 비롯된다. 이 경우에는 그림자의 개인적인 투사라기보다는 집단적인 투사의 결과이다
(가족구성원 중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닌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나머지 가족구성원들의 그림자가 무의식적으로 투사되고, 그가 그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 되면 가족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제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저 애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 모양이지?" 등의 표현에 바로 가족그림자의 투사로 인한 '희생양'의 의미가 닮겨 있다)
click2 어머니와 딸,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그림자의 투사
(1)어머니와 딸
딸이 어머니의 그림자를 의식 또는 무의식 중에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임으로써 어머니의 무의식의 그림자를 자극하는 경우가 있다. 기겁을 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기의 그림자를 보지 못하고 딸에게 투사하여 딸의 잘못된 행동만을 야단치거나 몹시 걱정하고 통제하려 든다. 그것은 둘 사이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다가 결국 둘다 불행해진다.
그림자란 대개 모든 면에서 열등한(그래서 무의식에 억압하려 했던) 성격측면이므로 도덕적으로도 열등한 경향을 지니고 있다.
"도덕적으로 완벽하며 이성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하고 모든 면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하는 어머니의 무의식에는 정반대로 "억압된 자유로운 사랑에의 욕구, 육체적 감각적 쾌락, 물질적 탐욕, 사치하고 싶은 마음" 등 여러특징을 가진 그림자가 우연히 딸에 의해 계승되어 실천에 옮겨지는 경우가 있다.
이를 발견한 어머니는 딸의 '방종한' 행동을 비난함으로써 더욱 그런 행동을 부채질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딸의 '부도덕한 행동'을 고치기 전에 어머니 자신의 '부도덕한' 그림자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2)아버지와 아들
예를 들어 자타가 공인하고 존경받는 교수나 성직자의 망나니 아들도 이와 같은 그림자의 무의식의 배열 또는 옮김의 결과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청소년의 문제를 다룰 때 부모들의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그림자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3)그 밖의 관계
그림자로 인해 사회적 관계에서 사회적으로 선한 사람이 악한 반려자를 거느리는 경우 가 있다. 그는 괜찮은 사람이지만 참모나 비서는 고약한 사람이라든가, 청렴결백한 가난한 학자 나 공무원 남편과 유능한 투기꾼 마누라와 같은 결합을 우리는 현실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한다.
click3. 그림자가 없는 사람, 그림자가 없는 가족
사람에게 그림자가 없다면 그는 "죽은 사람"이거나 "신"이다. 그림자(열등한 성격의 측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장담하거나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집단이 요구하는 선한 마음과 행위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 온갖 사회악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가지거나 혹은 멸시하는 사람 - 그런 사람은 이른바 '그림자 없는 사람'이다.
스스로 '인격자'임을 자처하고 확신하며 인격자인 양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위선자이거나 이중인격자, 또는 각종 신경증을 일으킬 조건아래 있는 사람이다. 즉 무의식적 그림자에서 단절되어 의식의 분리가 일어나고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므로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노이로제가 되지는 않는다. 자기에게 그림자 따위는 없다고 자처할 때 그림자가 자신 속에 있는데 보지 않으려 할 때 그것이 바로 신경증의 온상이 된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자기의 그림자를 무의식간에 크게는 사회, 작게는 가족 중의 누군가에게 옮겨놓는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옮기면 그 아이는 부모의 그림자가 되어 부모대신에 가족 내에서 악역을 맡는 속죄양의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의식화나 인식되지 못한 부모의 그림자는 생물학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심리학적으로 자식들에게 유전된다.
가정의 평화를 글자그대로 강조하여 모든 가족성원들이 겉으로는 평화롭게 협동하면서 무의식 속에 적개심을 억압하고 있는 가족의 가짜-협동성(pseudo-community)을 개인의 정신건강을 해치는 좋지 않은 가족관계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대학에 가고 싶어 했으나 경제 등 여러가지 사정으로 대학에 갈 수 없었던 어머니가 공부를 못한, 영어를 못한 '한'을 오랫동안 억압하여 마음속에 품고 있을 때 가족 중의 누군가를 대상으로 삼아 '한풀이'의 희생물로 삼는다. 그리하여 결국 자식의 정신장애라는 댓가를 치르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림자 그 자체는 살아있는 인간에게 인간다움이나 인간의 실체성(실수도 할 수있고, 잘못도 할 수 있는)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한'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그림자에는 공부못한 것말고도 여러가지가 있다. 가난에 대한 한, 힘없는 것에 대한 한 - 부모가 스스로 그 한을 풀거나 수용하지 않을 경우, 부모의 한을 채워주려는 아이가 생기게 된다. 그것이 요행히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때때로 아이 자신의 길과는 다른 길을 택하게도 만든다. 그리하여 일확천금을 노리다 실패하거나, 사법고시를 쳐서 수없이 떨어져서 만성적인 신경쇠약증에 걸려 시달리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5) 무의식의 의식화과정에서 다음으로 만나는 무의식 ?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
일반적으로 그림자가 의식화되면 그 다음 단계로 아니마, 아니무스를 인식하게 되고 이것이 인식되면 자기, 즉 마음의 전체를 실현하는 마무리 단계에 도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순서일 뿐 언제나 이렇게 일직선상으로 전체정신을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 아니마, 아니무스란 무엇인가? 아니마는 독일어의 제엘레(Seele, 심령)에서, 아니무스는 가이스트(Geist, 심혼)에서 빌려온 라틴어 용어이다. 심령이니 심혼이니 하는 말이 가리키듯 그것은 우리 마음 속의 혼과 같은 것이다 혼이나 넋, 또는 심령이란 모두 자아의식을 초월하는 성질의 표현이며 '나(자아)'의 통제를 받기보다는 고도의 자율성을 지닌 독립된 인격체와 같은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 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그와 같은 독자적 인격이라 할 만한 것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내적 인격”이라 불러 집단사회에 적응하는 가운데 형성된 외적 인격인 페르조나에 대응하는 "무의식적 인격"이라고 보았다.
● 그런데 외적 인격이 타고난 성에 따라 남성성과 여성성의 특성을 나타내듯이 내적 인격도 남성과 여성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융은 발견하였다.
남성의 무의식의 내적 인격인 아니마(Anima)는 여성적 속성을, 여성의 무의식의 내적 인격인 아니무스(Animus)은 남성적 속성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의 여성적, 남성적 속성이란 집단사회의 전통적 여성관, 남성관과 같은 것이 아니다.
*남성의 무의식(무의식적 여성성-아니마) 여성의 무의식(무의식적 남성성-아니무스)
● 아니마(무의식적 여성성) - 남성이 지닌 무의식적 여성성으로서 인류의 역사속에서 남성이 여성에 관해 체험한 모든 심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
● 아니무스(무의식적 남성성) - 반대로 여성이 지닌 무의식적 남성성으로서 인류의 역사속에서 여성이 남성에 관해 체험한 모든 심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
● 이것은 우리의 꿈, 신화, 민담에 상징을 통해 나타난다. 반드시 여신과 영웅신, 선녀와 같은 인격적인 이미지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새, 사슴, 바람처럼 비인격적인 이미지로 표현되는 수도 있고, 심지어 물질이나 이념에 투사되기도 한다.
click 아니마 아니무스가 투사된 실제 예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투사됨으로써 잘 인식될 수 있다.
(1)사람에게 투사되는 경우
짝사랑이나 이성간의 강렬한 사랑이 대표적인 예이다. 강렬한 황홀감을 일으킬 때 바로 남성에게는 아니마가, 여성에게는 아니무스가 상대 이성에게 투사되어진다.
이 때 상대방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선녀, 공주, 혹은 왕자, 영웅으로 인식될 때 거기에는 언제나 아니마, 아니무스의 일방적(짝사랑) 혹은 상호투사가 일어나고 있다.
이때 남성은 그녀에게서 현실적인 여성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의식에서 투사된 여신상(이상적인 여인상)을 보고 있는 것이며, 여성은 그에게 신화에서 나오는 영웅상, 성자상(이상적인 남성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2)심리유형을 통해서 본 투사
재미있는 사실은 심리유형상 자신의 무의식적 성격이 동성에게 나타나게 되는 경우 대체로 적대감(미움)으로 나타나지는 것에 비해 무의식적 성격이 이성에게 나타나게 되는 경우 대체로 애정(사랑)으로 나타나지는 것을 목격하기 쉽다
-예를 들어 ISTJ의 성격을 가진 사람의 경우 대체로 싫어하는 동성의 성격은
"비계획적이고 우유부단한 사람", 즉 자신의 그림자이다. 그러나 ISTJ가 이성을 대할 때 매력을 느끼는 대상은 "따스하고 이해심 많은 활달한 성격"을 지닌 이성이 된다. 이는 곧 자신의 아니마(아니무스)이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바로 미워하는 동성이 지닌 성격(그림자)이나 좋아하는 이성이 지니는 성격(아니마-아니무스)이 모두 ENFP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물론 도식적으로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기는 하나 융의 그림자와 아니마(아니무스)의 개념을 동성관계와 이성관계에 연결시켜보면 결국은 미움도 사랑도 심리적으로는 동일한 원천(자신의 무의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3)이념과 물질에 대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투사
이념이나 물질에 아니마나 아니무스가 투사되는 경우에는 단순한 "애인, 연인"의 의미를 넘어서 종교적인 헌신의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여성들의 무의식속에 지닌 아니무스가 외부 이념에 투사되는 경우의 예
사회주의이념이나 사이비종교에 투사되는 경우, 그 여성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념이나 사이비종교에 광적으로 집착을 하게 된다. 이 예로 독일의 히틀러는 바로 독일여성들의 지지를 받아 나찌즘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다. 즉 독일여성이 지니고 있는 무의식적 남성성인 아니무스가 히틀러와 그의 이념인 나찌즘(남성과 남성적 페르조나인 이념)에게 무의식적으로 집단투사되어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을 갖추게 된것이다.
*남성들의 무의식속의 아니마가 외부물질에 투사되는 경우의 예
아니마가 가장 잘 투사되는 대상의 예로서는 돈-도박, 알콜(술)이 있다. 이런 경우 돈이나 도박, 그리고 알콜은 수단이나 취미가 아니라 거의 종교적인 신봉의 대상이 된다(돈이 목적이 되어 돈의 노예가 된다던가, 술이 사람을 마신다던가 등의 표현에 나타난 예).
즉 알콜중독자와 도박중독자의 술과 돈에 대한 애착은 이성에 대한 애착을 능가한다.
일례로 신을 모시던 그리이스의 신전이 돈을 거래하는 근대은행건물의 주요한 건축양식이 되어 버린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과거에는 신전 중앙에 신이 있었지만, 현대에는 돈을 가득채운 금고가 중앙에 있다.
● 아니마(남성이 지닌 무의식속의 원초적 여성성)는 여러 가지 다양한 성질을 나타내지만 특히 남성들이 남성의 페르조나(사회적으로 남성이기에 요구되는 특성이나 역할)때문에 소홀히 하기 쉬운 감성(pathos)과 예감능력으로 표현될 수 있다. 또한 아니무스(여성이 지닌 무의식속의 원초적 남성성)은 여성들이 소홀히 하기 쉬운 이성- 생각하는 힘(logos)과 지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내적 인격(아니마-아니무스)의 표현은 남성에서는 주로 기분(mood)으로, 여성에서는 의견(opinion)으로 나타난다.
● 내적 인격, 아니마, 아니무스는 우리가 그 존재를 인식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면 다른 모든 무의식의 내용처럼 미숙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이때 우리는 아니마, 아니무스의 부정적 작용을 목격하게 되는데 남성에서는 남자다운 남자의 변덕스러운 기분과 짜증 섞인 잔소리로, 여성에서는 융통성 없이 따지는 버릇으로 표현된다.
click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미성숙한 상태에 남아 있게 되는 경우의 심리적 현상
(1)남성의 아니마가 미숙한 상태에 있게 되는 경우
이것은 원시적인 감정과 통하게 된다. 그것은 침착하고 이성적임을 자랑하는 남성으로 하여금 폭발적인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이 순간 그는 부정적이고 미성숙한 아니마에 사로잡힌 것이다. 아니마가 의식화되지 않으면 남성은 여성화되어 요변스럽고 변덕스러운 남자라는 평을 듣게 된다. 때로는 미성숙한 예감능력(아니마의 특성)으로 인해 분방한 추측, 질투, 의혹에 사로 잡혀서 부인을 괴롭히는 수도 있는 데, 그것은 남성이 바로 완전무결한 호남(사회에서 요구하던 진정한 남자의 페르조나)의 페르조나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2)여성의 아니무스가 미숙한 상태에 있게 되는 경우
이것은 "따지는 버릇", 즉 미성숙한 논리력(아니무스의 특성)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자기의 생각이 정당하다는 것을 미리부터 정해놓고 시작하는 의논이므로, 가족이나 주변사람 중 아무도 반대의견을 제기할 틈을 안준다. 그것은 "확고부동한 의견"의 형태를 취한다. 논리정연한 논리적 판단이 아니고 , 자기의 의견을 증명하기 위한 궤변이다.
예를 들면 한국문화에 있어 부부간의 대화의 문제나 토론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부부간의 말다툼이나 여러가지 집단모임이나 수업상의 토론에서 부정적이고 미성숙한 여성의 아니무스는 남성의 아니마를 유혹해서 토론장으로 끌어들이지만, 결국 남성은 자신의 미분화된 아니마로 인해 분노에 사로 잡혀서 화를 내고, 여성은 '무엇이나 바르게 하는 신'으로서의 아니무스로 하여금 "미안하지만 내가 또 옳았다"고 궤변을 떨면서 그런 대화나 토론은 파장하게 된다. 여기서 바로 미성숙한 여성의 아니무스는 비합리적인 의견(opinion)이고, 미성숙한 남성의 아니무스는 비합리적인 기분(mood)인 것이다.
그러니까 부부싸움하다가 미성숙한 남성은 화를 내고 밖에 나가고, 미성숙한 여성은 자신이 옳았고 그러기에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미성숙한 부부가 지니게 되는 일반적인 형태로 융은 보았다.
● 아니마, 아니무스는 원형이지만 무의식의 원형 중에 특수한 원형이어서 자아의 의식의 심층이자 중심인, '자기'에게로 인도하는 인도자, 또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융은 이런 인도자 또는 매개자로서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상징의 예로서 광야의 예언자, 성모마리아, 보살 등을 예로 들었다). 그러므로 아니마, 아니무스의 의식화를 통한 자아로의 통합과 분화는 자기실현의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click.*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의식화의 중요성과 성인식의 필요성과 의미
(1)성인식
성인식(입사식)과 같은 모성으로부터의 효과적인 극복단계가 특별히 제도화되지 못한 현대인에게 있어 자신의 모성상은 그대로 부인에게 전이된다.(즉 부인에게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기대했던 역할을 그대로 기대하고, 그에 맞추어 행동하게 된다 - 소위 "마마보이")
예를 들어 남성은 결혼만 하면 어린애 같아지고, 감상적이고, 의존적이 되던가 아니면 폭군적이며 예민하거나 인색하여 남성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게 되는 데 후자, 즉 폭군적 변모응 바로 전자, 비굴한 수동성과 종이 한장 차이이며 어린 남자아이의 모성에의 의존이라는 점(어렸을 때 자신의 어머니에게 했던 행동)에서 다를 바 없다.
cf. 한국의 경우 성인식은 사라졌지만 남성이 군대에 입대하여 어머니를 떠나 여러가지 힘든 경험 속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것은 사실상 매우 중요한 성숙의 기회이다. 피상적으로 아들을 군대를 안보내려고 하는 것이 당장은 좋아 보이지만, 그 점이 궁극적으로는 아들의 성숙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가를 인식해야 한다.
성인식의 전통적인 의미는 집과 어머니를 떠나 자신 혼자 고통을 이겨내서 이 세상에 살아나가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여러가지 의례로 구성된다. 즉 성인식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의존성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과정이다.
6) 무의식의 의식화의 궁극적 만남으로서의 무의식 - 자기(Self, Selbst)
click *자기 또는 자기원형
"내마음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과연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가? 남이 나의 단점을 찔러 비판하면 화부터 낸다. 그리고 남이 잘났다고 칭찬해주면 쉽게 우쭐해진다. 남이 나를 못났다고 하면 위축되어서 정말 자신이 못났다고 믿는다. 어느 경우나 우리는 나의 진정한 모습을 못보고 있고, 정말 '자기자신'을 보는 것을 피하고 있다. 대개 자기 나름대로의 자화상에 사로 잡혀서 진정한 자기자신을 못보게 된다. 다시 말해 나(자아)가 의식에만 매달리면 그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마음의 세계인 무의식을 못본다. 그런데 모든 인간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의 전체로서 살 것을 스스로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 사회와 이웃과 다른 사람의 투사와 기대에 의하여 만들어진 그의 가면인 페르조나나 자아의식에 집착하여 좁고 경직된 역할 속에서 기계적인 인생을 보내지 않도록 자극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주어진 전생명력을 불태우도록 촉구하는 무의식의 힘 - 그 힘은 그의 자아가 좋아하던 싫어하던 그 자체의 목적에 의해 의식에 작용한다. 그 힘은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자신의 전체”로서 살도록 자극한다. 바로 이것이 융이 말한 자기(원형)의 기능이다.
*자기의 정의 - 자기' 란 자기실현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다. 자기란 전체정신,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합된 전체정신이다. 그것은 인격성숙의 목표이며 이상이다. 그것은 의식의 중심인 '나' (자아)를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크기의 전체정신 그 자체, 혹은 그 전체정신의 중심이며 핵이다.
우리가 자아실현이라 하지 않고 “자기실현”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체정신의 중심핵이라는 뜻에서 자기를 말할 때 우리는 특별히 이것을 자기원형이라 한다. 많은 원형 중 가장 핵심적인 것,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로운 통합을 위해 스스로 조정하고 질서지우는 우리 정신의 내적인 방향타이며 나침반이며 고등종교에서 최고의 신, 최고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의 상징, 마치 태양계의 많은 혹성의 배열을 결정하며 운행을 조정하는 알 수 없는 궁극의 원리 같은 것 - 그것이 자기원형이다. 한마디로 융은 인간무의식 속에서 하느님과 같은 신의 상을 발견한 것이다. 하느님이 하늘 위의 빛나는 왕좌에 계시고 안 계시고는 심리학의 한계를 넘는 형이상학의 물음이니 심리학자가 여기 대해 말할 입장이 아니다. 그러나 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인간들이 신이라 부르는 대상에 해당되는 것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자기실현의 의미 - 개성화
click 자기실현(개성화)이란 무엇인가?
자기실현이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나(자아의식)이 받아들여 실천에 옮기는 능동적인 행위를 말한다. 여기에는 자아의 결단과 용기와 인내심이 필요하며, 이것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무의식과 의식이라는 대극의 합일이 가능해진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 속에서 자기실현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여부는 그 사람의 나(자아)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 자아가 무의식에 관심을 두고 그 의미를 이해하여야 한다.
자기실현을 다른 말로 "개성화(Individuation: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자신이 되게 한다/ 그 사람 자신의 전부가 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개인이 사회적 평가와 사회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모습에 맞추어 살기만 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자기소외, 자기부정에 빠지게 된다. 그는 다만 외부적인 역할이나 집단적인 이상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며, 자신의 내적인 추구(무의식의 내면세계)를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실현 또는 개성화란 기본적으로 집단정신과 나의 삶의 목표를 구별하는 데 있다. 이와 같은 구별을 통해 나(자아)가 집단에서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페르조나)에 맹목적으로 동일시되는 것을 막고, 나(자아)성숙의 궁극적인 목표가 페르조나가 아니라는 자각으로 나의 사명과 집단정신을 구별하면서 때로는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때로는 여기서 물러나 자기 안의 세계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cf. 그러므로 자기실현이 통속적인 의미의 성인, 군자, 도사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이런 개념들은 오히려 모두 사회가 만들어준 '성인, 군자, 도사'의 페르조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실현을 통해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끝없는 무의식(자기 또는 자기원형) 앞에서 자아가 취해야 할 ”겸허한 마음의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고 융은 이야기한다.
7) 자기실현(개성화)해나가는 사람의 특성
자기실현은 간단히 말해서 농부로 하여금 농부로, 서양인으로 하여금 서양인으로, 한국인으로 하여금 한국인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자기실현이 되면 될 수록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갖출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원만하고 선하다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속하고 있는 사회의 윤리관에 비추어 그는 때로는 이기적이라는 평을 받고, 때로는 냉정하다는 평을 받고, 때로는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무한한 정열로 이웃을 돕고, 때로는 권력의 도가니에서 싸우고, 금욕과 정욕에 사로 잡히며 고민하고, 때로는 질투와 증오의 감정으로 허덕일 것이다.
다만 그의 머리에는 집단적 투사에 의하여 생기는 명성이라는 후광(사회에서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한 추구)이 없고, 굳이 스스로 그 후광을 만들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만일 누가 그것을 만들어 씌어주면 그는 또 구태여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생에서 대수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평범하나 분수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그가 가야할 바를 마음속에 묻고, 그것이 그가 가야할 길이라면 그렇게 간다”. 그것 때문에 그가 대인관계에서나 세속적인 이권에 반해서 손해를 보게 된다고 할지라도
- 이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으로 고독한 사람’일 수 있다. 또한 그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진정으로 무능력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의 일치라는 점에서 진정으로 가장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강하다 약하다 하는 생각을 그는 가지지 않는다.
“그는 반성할 줄 알며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종교적인 인간이다”
무엇이 나의 갈 길인가를 항상 마음속에 물으나, 그 해답이 늘 분명하지 않음을 알며, 때때로 인간은 그 불분명한 혼돈과 방황속에서 찾아 헤매는 고통을 겪어야 하며, 그러나 “그 물음과 찾음에 응답이 있을 것임을 믿는다.”
5. 고통(신경증, 성격문제, 정신질환 등)의 의미에 대한 융의 태도
“신경증은 그 의미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마음의 고통이다” - Jung
융에 따르면 신경증(예를 들어 자신이 암에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적인 생각에 다른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질환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나(자아)가 지나치게 페르조나와 동일시되었을 때, 다시 말해 그가 속한 집단정신의 기대에만 일방적으로 맞추어 살려고 할 때 무의식 속의 자기원형이 그로 하여금 외부세계로부터 눈을 돌려 자신의 내면적 정신세계에 귀기울이게 하여 정신과 인격의 전체적 균형을 이루게 하기 위해 드러내는 징후라고 보았다.
따라서 융의 입장에서 성격장애나 신경증은 병리자체라기 보다는 그 사람의 “인격의 변화와 성숙을 위한 좋은 기회”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런 신경증에 걸린 사람들은 나쁜 짓을 많이 하는 사람들도 정신적인 고통이나 신체적인 질환에 걸리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가는데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냐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융의 말에 따르면 이런 신경증환자들은 정상인에 비해 “선택된 사람”이다. 즉 그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보다 성숙할 기회를 제공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ex)융의 중년남자 치료사례에 나타난 신경증의 의미
잠을 자다가 “호흡이 곤란해져서 숨이 막히고 곧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증상”으로 잠에서 자주 깨는 중년의 성공한 사업가를 융이 치료한 예가 있다.
그는 말그대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업가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공을 나타낼 때 “산의 정복” “산꼭대기” “정상”에 올라섰다라는 표현을 자주 빌려 사용한다. 무의식은 그의 사회적 성공에 대한 일방성을 보상하고, 자신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갖게끔 하기 위해 실제 그가 높은 산(사회적 성공)위에 올라가서 산소부족으로 인한 호흡곤란증상을 겪게끔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 증상으로 인해 비로소 자신의 계속적인 사업성공의 길에서 잠시 물러나 병원에 입원하거나 집에서 쉬게 함으로써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런 자신의 증상의 의미를 인식하고 의식화함에 따라 이 사업가는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고, 자신의 사업뿐만 아니라 “자신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 이렇듯 신경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증상에는 기본적으로 나(자아)가 사회적 역할과 기대인 페르조나에 지나치게 동일시된 경우 그로 하여금 바로 내면의 성찰기회를 갖게 하고 이를 통해 성숙의 기회를 제공하는 증상인 것이라고 융은 보았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한 결론
융의 분석심리학은 성격심리학이론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심층적인 이론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심리학자들도 가장 어려워하는 이론 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의 분석심리학이론을 강의한 것은 모든 심리학이론 중에서 가장 인간의 본모습을 대변한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융의 이론이 언뜻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기는 하나, 사실 융의 분석심리학이론은 간단히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인생에 대한 겸허한 자세과 외부현실세계와 자신내부 정신세계의 조화와 균형”입니다. 사실 융 자신도 인정했듯이 그의 방대한 이론들이 사실은 위에서 이야기 한 2가지 개념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융은 심리학자 중에서도 가장 영적으로 성숙했던 심리학자이며, 인간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던 심리학자입니다. 이 이론이 언젠가 여러분의 심리적 성숙과 대인관계의 본질적 변화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첫댓글 담아갑니다.
멋진 정리... 감사드립니다.
감사...감사..^^
좋은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