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를 토대로 음악을 쓴 작곡가는 많지만 푸치니 앞에선 모두 빛
을 잃는다.자신에게 청혼한 왕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는 공주. 3개를 다
맞히면 결혼이 허락되지만 하나라도 틀리면 목을 베인다.’
무슨 엽기 소설에 나올법한 얘기 같지만, 이는 이탈리아 후기 낭만파의
거장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내용이다. 미지의 시대,
중국의 공주 투란도트는 이런 식으로 오랑캐에게 능욕 당한 할머니에 대
한 복수를 한다. 막이 오르자마자 무대는 잿빛 분위기다. 실패한 도전자
의 머리가 창에 꽂힌 채 객석을 바라고 있으며, 군중들은 또 한 명의 희
생자를 환영하며 망나니의 등장을 기다린다. 음악에 담긴 기괴한 화성과
리듬이 듣는 이의 심장을 고동치게 한다.
그렇다면 앞날이 창창한 왕자들은 왜 이렇게 무모한 청혼을 하는가? 영
웅 설화의 근간이 되는 사나이 특유의 모험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공주가 절세미인인 까닭이다. 창백한 미모가 끊임없이 무고한
청년들을 죽음으로 유혹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주인공 칼라프가 등
장하고 그 역시 수수께끼에의 도전을 뜻하는 공을 울린다. 이쯤 되면 사
실 이야기는 뻔하다. 주인공이 죽을 리 만무하니, 수수께끼를 모두 맞히
고 결국 공주와 결혼에 골인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기에 칼라프를 흠
모하는 하녀 류가 끼여들고, 수수께끼를 맞힌 칼라프가 결혼을 한사코
거절하는 투란도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맞혀보라는 수수께끼를 역으로 제
시하면서 극은 재미를 더한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흥미진진한 음악.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마지막 작품이다. 작곡가는 작곡에 유래 없이 긴 시간을 투자했으나, 후
두암에 걸리는 바람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만큼 작품
에는 작곡가의 역량이 집약돼 있다. 관현악은 이야기 전개에 따라 갖가
지 음영을 띠며, 등장 인물의 아리아는 적재적소에서 청중의 심금을 울
린다.
특히 수수께끼를 모두 맞힌 뒤, 마지막 막에서 칼라프가 부르는 ‘공주
는 잠 못 이루고’는 테너 아리아 중 인기 순위 1, 2위를 다투는 명곡이
다. 중국의 민요를 차용해 동양적인 색채감을 살린 점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
투란도트의 이야기는 대대로 전해오는 유럽 민화이다. 이 이야기를 토대
로 음악을 쓴 작곡가는 꽤 많다. 하지만 푸치니 앞에선 모두 빛을 잃고
만다. 푸치니의 ‘투란도트’만큼 광채 나는 음악과 장엄한 드라마, 스
펙터클한 효과가 깃들인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극은 푸치니의 손을 떠나 그의 제자에 의해 완성됐다. 하지만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오페라의 초연 때 작곡가가 마지막으로 쓴 부분에
서 지휘봉을 내려놓으며 공연을 끝마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마침내 실현된 자금성에서의 공연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투란도트’의 음반은 의외로 적다. 남녀 주인
공을 위해 최고 수준의 테너와 소프라노가 필요한 데다, 장엄한 음향을
구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1972년 녹음된 주빈 메타 지휘의 음반(
Decca)은 이러한 어려움을 완벽하게 극복했다. 공은 마땅히 칼라프를 맡
은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는 푸치니가 쓴 험난
한 악절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무기교의 기교’로 표현한다. ‘공주
는 잠 못 이루고’에서 마지막에 찌를 듯한 고음은 아직까지 이 아리아
의 전형적인 연주로 남아있다. 상대역인 조운 서덜랜드가 해석한 ‘냉혈
공주’의 이미지도 흠잡을 곳이 없다. 주빈 메타가 조형하는 관현악과
합창도 빼어나다.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 ‘하이파이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빈 필하모닉을 이끈 음반(DG)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연주의 첫 째 미덕
은 역시 멋을 한껏 부린 카라얀의 지휘이다. 그는 메타보다 템포를 느리
게 잡고 한층 장대한 음악을 빚어냈다. 1막에서 칼라프가 공을 울리면서
합창과 어우러지는 피날레는 압권이다. 칼라프 역의 플라치도 도밍고는
파바로티만큼 고음을 잘 내지 못하지만 힘있는 중저역으로 영웅적인 면
모를 과시한다.
카라얀은 원래 극의 실제 무대인 자금성에서 ‘투란도트’를 영상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중국 당국의 불허로 무산됐다. 카
라얀 이후 집요한 설득이 계속 됐고, 마침내 중국은 1998년 ‘서방 음악
인’들에게 자금성을 개방했다. 그 영광의 주인공은 바로 데카에서 뛰어
난 음반을 만든 바 있는 주빈 메타(RCA)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오페라를 이끌고 중국으로 들어가 현지 음악인들과 함께 자금성을 배경
으로 ‘투란도트’를 공연했다. 이 때 중국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 장예
모가 연출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이 연주는 실황으로 녹음돼 CD와 DVD
로 각각 발매됐다. 무대 비중이 높은 공연이니 만큼 시각 정보가 없는 C
D보다는 DVD 영상물로 접해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