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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도전의 신비
“실패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절망하고 포기한다면 더 기회는 없다. 스스로 용기를 불어넣으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언젠가 세상은 당신을 주목하리라.”
- 본문 ‘철 여인의 낙방’ 중에서 -
대통령의 독후 감상평
미국의 한 출판업자가 날로 쌓이는 책의 재고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대통령께 책을 보내 독후 감상평을 써달라고 하자!’
그러잖아도너무나 바쁜 대통령은 출판업자가 책을 보내어 귀찮게 하자 단 한 마디의 간단한 답신을 보내주었다.
「이거 괜찮은 책이군요.」
출판업자는 대통령의 이름을 빌려대대적으로 광고하였다. 「현직 대통령도 좋아하는 책입니다.」
책은 며칠 만에 동이 나버렸다.
얼마 뒤, 다른 책이 다시 재고로 쌓이자 출판업자는 대통령에게 또 책을 보냈다. 지난번 독후 감상평 때문에 고역을 치른 대통령은 골탕 먹일 심산으로 이런 답장을 보냈다.
「이 책은 완전히 엉터리 책입니다.」
출판업자는 한 번 더 머리를 써서 광고하였다.
「현직 대통령도 몹시 싫어하는 책입니다.」
사람들은 또다시 다투어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 후, 출판업자는 대통령에게 세 번째 책을 보냈다. 대통령은 앞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라 아예 회신조차 하지 않았다. 출판업자는 또다시 대대적으로 광고하였다.
「대통령도 할 말이 없어진 책입니다. 서두르세요.」
이 책도 눈 깜짝할 사이에 다 팔려나갔다.출판업자는 무사히 재고를 처분하면서 출판사를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친절의 가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늦은 겨울밤,어느 지방 호텔에 노부부가 들어왔다.
“예약은 하지 않았지만, 혹시 방이 있는지요?”
호텔 직원은 자기네 호텔에는 방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호텔에 연락해 보았으나 인근 어느 호텔에도 모두 방이 없었다.
직원은 죄송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객실은 없습니다만 지금 밖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새벽 한 시가넘은 시간이라 차마 나가시라고 할 수 없군요. 괜찮으시다면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 주무시면 어떨는지요.”
그리고는 노부부에게 기꺼이 자기 방을 내어주었다. 노부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미국에서 가장 좋은 호텔의 사장이 될 분 같군요.
당신을 위해 호텔을 하나 지어드리죠.”
그러나 직원은 정중히 인사를 하며 그냥 웃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노신사는 호텔 직원에게 뉴욕행 왕복 비행기표와 함께 방문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가 뉴욕에 도착하자, 노신사는 뉴욕 중심가에 대리석으로 지은 궁궐같이 호텔을 가리켰다.
“이 호텔이 당신이 경영하도록 내가 지은 것이지요.”
그 직원이 바로 미국의 최고급 호텔 월도프 아스토리아의 총지배인 조지 볼트였다.
철 여인의 낙방
옥스퍼드 대학의 화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여성이 영국 굴지의 화학 회사에 취직 시험을 봤다. 취직 시험에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보기 좋게 낙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법률 공부를 시작하여 변호사가 된 뒤 정계에 투신해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1975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보수당 당수에 선출되었고, 1979년 총선에서 당을 승리로 이끌어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 자리에 올랐다. 그녀가 바로 마거릿 대처(1925~)이다.
어느 날 대처 총리가기업인들에게 산업 훈장을 수여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과거에 취직 시험을 본 적이 있는 화학 회사의 중역이 수상자로 나오게 되었다.
대처 총리는그에게 훈장을 달아주며 다정히 말하였다.
“나도 젊었을 때 당신네 회사에 취직 시험을 쳤다가 낙방한 적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중역은 회사로 돌아와 당시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다섯 명의 심사 위원들이 기록한 채점표에는 ‘용모 단정, 학업 우수, 개성 강함, 협조성 결여’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대처 총리는그녀의 명연설 속에 이런 말을 남겼다.
“실패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절망하고 포기한다면 더 이 상 기회는 없다. 스스로 용기를 불어넣으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언젠가 세상은 당신을 주목하리라.”
처칠의 승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급작스러운 침공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프랑스가 항복 직전에 처하자, 처칠(1874~1965)은 영국도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대응책을 찾고 있었다. 그 무렵 불안한 정세를 지켜보던 영국인들 사이에는 이런 우화가 떠돌았다.
어느 날, 히틀러가 비밀 회담을 하자고 처칠을 초대하였다. 그들이 연못가에 마주 앉자 히틀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얼마 안가 우리는 영국을 침공할 것이오. 그때 가서 프랑스처럼 다치지말고, 지금 항목 문서에 서명하는 것이 어떻겠소. 영국의 안전은 내가 보장하리다.”
그러자 처칠은 단호한 어조로 말하였다.
“독일과 영국의 전쟁문제를 내기로 정합시다. 지금 연못의 물고기 한 마리를 먼저 잡는 사람이 이기는 거로합시다.”
히틀러는 “그거 좋은 생각이오.”라고 말하며,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물고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히틀러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총알만 다 써버렸다.
차례를 기다리던 처칠은 탁자에 놓인 물컵을 들고 연못가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물컵으로 연못의 물을 담아 어깨너머로 버리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처칠은 확고한 의지로 말했다.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릴지 몰라도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것이오.”
비밀의 방
중국의 화웨이사는 십여 년 동안 두 가지의 신기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첫째는 회사의 영업부서에 영업부장이 없다는 것, 다른 하나는 비밀의 사무실에 관한 것이었다. 런정페이(任正非) 회장은 회사 직원들에게 8층에 있는「비밀의 방」에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지시했다. 회사가 문을 연 이래 문제의 방에 들어간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신입 사원들이 들어왔고, 회장은 이와 같은 사규를 다시 강조했다. 그러나 신입 사원 중에서 호기심이 많은 왕스라는 청년이「비밀의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 다만 중앙의 탁자 위에는 종이 한 장이 놓여있었다. 종이에는 ‘런정페이 회장에게 이 종이를 보여라.’라고 적혀 있었다. 종이를 받아든 회장은 기뻐하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몇십 년을 기다렸는지 아나? 이제야 용감한 사람이 나타났군. 오늘부터 자네를 영업부장으로 임명하겠네.”
몇 년 후, 왕스는 런정페이 회장의 격려 덕분이었는지 정말로 오늘날 중국 최대의 부동산 회사 완커를 차렸고, 중국의 100대 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런정페이 회장은 직원회의 때, 간혹 왕스의 이야기를 했다.
“왕스는 호기심과 용기, 모두를 갖췄다.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다이아몬드를 찾아낼 것이고, 인생의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할 것이다.”
신입 사원의 면접시험
어느 회사에서 신입 사원을 뽑는 시험을 치렀다. 면접이 있는 날, 면접관들은 다른 회사와 같은 일반적인 문제를 묻고 나서는 그들에게 상자를 하나씩 주었다. 상자는 단단한 끈으로 수십 개의 매듭으로 묶여 있었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 상자를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지원자들은 모두 매듭을 풀려 했으나, 쉽지 않아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다. 일주일 뒤 두 명의 합격자가 발표됐다. 합격한 두 사람은 서로 어떻게 매듭을 풀었는지 물었다.
그중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저는 도저히 정해진 시간 안에 풀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상자를 부숴버렸답니다. 그랬더니 상자에서 ‘당신은 합격입니다.’라고 씌어 진 카드가 나오더군요.”
나머지 한 사람도 말했다.
“저는 끝까지 노력하였으나 시간 안에 매듭을 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면접에 떨어져도 좋으니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가르쳐 달라고 졸랐죠. 그러자 면접관은 상자를 다 져가라고 하더군요. 집에 와서 가위로 매듭을 자르고 뚜껑을 열어보았더니, ‘축하합니다. 당신은 합격입니다.’라는 리 본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회사는 끈기와 인내가 있는 젊은 일꾼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두 청년을 합격시켰던 것이었다.
분명한 목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라는 명언을 남긴 무하마드 알리(1942~).그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세 차례나 오른 전설적인 복싱 선수였다.
열여덟 어린 나이로 로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확정 짓는 순간, 그는 우연히 경기장에 나온 당시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 플로아드 패터슨을 발견하였다.
알리는 그에게 다가가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패터슨, 두고 보세요. 내가 언젠가는 당신을 링 위에 눕힐 거예요.”
그 당시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던 패터슨은 자신의 앞에 선 작은 복싱 선수인 알리를 향해 코웃음 치며 응수하였다.
“그래, 귀여운 꼬마야. 네 말대로 한번 해 보렴.”
8년 뒤, 1968년에 알리는 패터슨과의 타이틀전에서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KO승을 거두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사실 알리는 ‘떠버리’로도 유명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장담하곤 했다.
사람들은 내심 그의 자신감을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리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일을 이루려고 애써 노력했다. “나는 나 자신이내뱉은 말을 모두 이루어내고 말았다.”
위대한 승리
1990년대 초, 일본 바둑 주간지가 ‘고금(古今)을 통해 누가 가장 강한 기사인가?’라는 설문 조사를 했다. 1위는 한국인 기사가 차지했다. 그는 현대 바둑 일인자로군림하면서 혼인보를 10연패하고, 기성·명인·혼인보 등 3대 기전을 싹쓸이하여 대삼관(大三冠)을 두 차례나 이루었다.
1985년 일본의 최대 바둑 타이틀 기성전(棋聖戰) 7번 승부 마지막 판. 기성과 도전자 다케미야 9단이 맞붙었다. 50분간을 생각한 끝에 한 점을 놓은 기성이 복도를 비틀거리며 나가다 중얼거리는 말을 지나가던 기자가 들었다. “이것으로 한 집 반을 이겼다.” 100수 가까이 더 진행돼 159수에 바둑은 끝났다. 기성이 한 집 반으로 승리하였다. 기성의 ‘100수 앞 수읽기’가 알려지자 일본 바둑계는 놀라움으로 들끓었다.
그리고 1983년 기성전 당시, 후지사와 기성이 도전자인 그에게 “네 판만 가르쳐 주겠다.”라고 큰소리쳤다. 그때 그는 “세 판만 배우겠다.”라고 응수했다. 그의 말대로 3연패 뒤에 4연승을 했다. 또, 1986년 기성전 때는 교통사고로 전치 6개월 중상을 입고도 “목숨을 걸고 둔다.”라며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평생 라이벌 고바야시에게 선전했으나 아깝게 2대4로 지고 말았다. 그러나 8년 뒤 기성전에서 고바야시에게 설욕하기도 하였다.
그가 바로 조치훈(1956~) 기성이다. 6세에 일본에 건너가 12세에 입단한 그는 40년 2개월 만에 달성한 최연소ㆍ최단기간 1,300승이라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통산 71회 우승이라는 대기록은 앞으로 여전히 뜨겁게 진행될 것이다.
인생의 벽돌 쌓기
원스턴 처칠(1874~1965)이 영국 상원 의원에 출마했을 때 일이다.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당선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처칠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 충격으로 그는 두문불출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창가에 기댄 채 멍하니 밖을 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안되나 봐. 이렇게 끝나 버리다니, 정말 불쌍한 인생이야. 내 꿈은 모두 산산이 조각나버렸어.’
바로 그때, 한 벽돌공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건너편 담장을 수리하고 있던 벽돌공은 벽돌을 한 장 쌓고 콘크리트를 바른 뒤, 다시 그 위에 벽돌을 쌓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처칠이 보기에는 단순하고 지루해 보이는 작업 같은데 벽돌공은 벽돌을 하나하나 쌓을 때마다 정성스레 일하였다.
시간이 흐르자 마침내 긴 담장이 완성되었다. 그 담장을 바라보던 처칠의 머릿속에는 한 줄기 빛이 지나갔다.
‘그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인생은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는 작업이나 다름없어!’
그날 이후, 처칠은 은둔 생활을 끝내고, 다시 정계로 돌아와 상원 의원에 재도전하여 당선되었고, 나중에는 수상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자기수상록에서 이렇게 밝혔다.
“큰 꿈을 가지고 도전할수록 실패에 따른 실망감도 큰 법이다. 하지만 한 번의 실패를 인생 전체의 실패로 규정짓는 것은 옳지않은 일이다.”
미국의 NYT 회장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했던 무렵, 미국의 한 청년이 전쟁에 대한 지나친 걱정으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입원한 청년의 병실에는 위암 말기 환자가 있었다. 그 환자는 몸이 쇠약했지만, 늘 즐겁게 생활하고 병원 안에서 작은 소모임 활동까지도 참여했다. 하루는 청년이 환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다가올 미래가 두렵지 않나요?”
“미래는 먼 이야기예요. 저는 낙심하기보다는 지금, 이순간을 즐겁게보내려고 노력해요.”
이 말에 용기를 얻은 청년은 걱정 대신 희망을 품기로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서 성공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가 바로 37세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문인 미국의 《뉴욕타임스》 발행인이자 42세에 회장으로 취임한 아서 설즈버거 (1951~ )이다.
그는 2005년 6월에 세계신문협회(WAN) 서울 총회에 참가하여 이렇게 강연하였다.
“우린 종이가 아니라 뉴스를 판다. 그래서 뉴스의 신뢰는 바뀔 수 없고 바뀌어서도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신문의 근본적 가치이다. 신문이 독자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고, 새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다. 그리고 종이 신문을 읽지 않는 시대가 온다고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뉴스’라는 단어이지 ‘종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우승자
400m 계주 경기에서 선두로 달리던 선수가 마지막 골인 라인을 10m 남겨놓고 다리에 쥐가 나서 넘어졌다.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400m 계주 준결승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넘어진 선수는 영국의 데릭 레드몬드로서 그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골인 지점을 몇 발자국 남겨놓고 넘어진 레드몬드를 많은 관중이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레드몬드는 이 시간을 위하여 얼마나 피땀을 쏟는 훈련을 했겠는가?
레드몬드는 쥐가 난 다리의 통증보다 꿈이 깨어진 슬픔으로 뜨거운 눈물을 쏟고 있었다. 그때 관중석에 황급히 레드몬드에게 달려 나온 사람이 있었다.
데릭 레드몬드의 아버지 짐 레드몬드였다.
"아들아! 지금 네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아버지! 골인 지점까지 가고 싶어요!"
"나와 함께 가자꾸나.!"
아버지는 아들을 부축하여 골인 지점으로 갔다. 아들도 울고 아버지도 울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모든 관중과 이 생중계를 지켜보던 시청자들도 모두 울었다.
데릭 레드몬드도 나중에 아버지가 되어 이렇게 말했다.
“세상 어디에나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위대한 분이시다. 그래서 아버지는 위대하시다.”
모나리자 미소의 비밀
이탈리아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가 그린 《모나리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작품은 다 빈치가 피렌체에 살던 한 상인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로 「모나」는 이태리말로 ‘부인’, 「리자」라는 ‘성’이다. 즉 리자 부인이라는 뜻이며, 일명「라 조콘다」라고도 부른다.
색의 깊이, 명암의 부드러움을 완숙한 처리와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온화한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로움을 자아내기 충분해 불후의 명작으로서 현재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다. 다 빈치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 눈을 하나 그리는데도 웃는 눈, 찢어진 눈, 우는 눈, 성낸 눈 등 수백 가지의 눈 모양을 습작하였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입, 코, 귀, 턱, 뺨, 턱, 그리고 머리 스타일까지도 얼굴 부위에 따라 각각 수천 가지의 그린 습작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 빈치는 이런 습작을 여러 형태로 짜 맞추며, 4년간 자신이 의도한 모습의 모나리자 초상화를 그리려 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요즘 말하는 수많은 얼굴 부위의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최고의 맞춤식 조합으로 가장 이상적인 초상화를 그린 셈이다. 그래서 이런 기법을「다 빈치 기법」이라고 한다.
명예보다 실리
하버드대학에서 학위를 두 개나 받았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도 의학 학사와 문학 박사. 그는 애초의사가 되려고 의과대학을 지망했으나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니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지 상상이나 되는지…….
그 당시 작가가 되겠다고 의사를 포기하는 것은 판사를 그만두고 법원 서기가 된다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이클 크라이튼(1942~2008).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하버드 작문 교수에게 C 학점을 받아 충격을 받은 그는 의사가 되는 것보다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했다. 당시만 해도 작가가 의사보다 돈을 더 벌 확률은 극히 희박하였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일이든 열정을 추구하면 돈은 자연히 따라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결과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쥐라기 공원」과 영화 「트위스터」의 대본이 완성되었으며, 인기 TV 드라마 「ER」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즐거운 일을 할 때는 활력이 넘치고 즐거움도 배가 된다. 그러나 싫어하는 일을 할 때는 의기소침해서 활력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건성으로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는 일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역설적으로 말하였다.
“일은 피해야 할 필요악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일이면 즐겨라.”
용기 있는 자의 선택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서는 300여 년 전부터 매주 금요일이면 알레그리의 명곡인 《미제에 레 메이, 데우스(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곡이 연주되었다. 곡 자체도 아름답거니와 로마 교황청이 악보를 외부에 유출하지 않으려고 봉인까지 해 두어 더욱 유명해졌다.
교황청은 이 곡을 베끼는 사람에게는 파문시킨다는 경고를 할 정도로 성당 밖에서 연주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그런데, 1770년 아버지를 따라 유럽 전역으로 연주하러 다녔던 13살 소년이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단 10분 동안 이 곡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도 연주할 수 있는 악보가 없다는 것은 정말로 통탄할 일이다.”
너무나 감명을 받은 소년은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숙소로 돌아와 9개의 파트로 구성된 곡의 악보를 단숨에 옮겨 적었다. 그렇게 시작한 그는 자기의 음악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완벽한 악보는 즉시 출간되어 이내 유럽 전역에서 연주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음악 신동인 모차르트(1756~1791)였다.
모차르트는 연주를 위해 다니는 곳마다 이런 말을 남겼다.
“두려움이란 어떤 일을 시작하는데 최대의 적이다. 눈앞의 두려움을 이긴자. 이런 용기 있는 자만이 자기의 꿈을 이룩할 수 있다.”
토양을 가꾸는 시간
일본 프로 야구 만년 하위 팀이던 세이부 라이온스는 팀 정비를 위해 막대한 돈을 들인 라이온스의 구단주는 어느 날 명감독 네모토 리쿠오를 초대 감독으로 영입한 뒤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 팀이 우승하려면 얼마나 걸리겠소?”
“글쎄요, 적어도 5년은 걸리지 않을까요?”
구단주는 펄쩍 뛰며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느냐고 되물었다.
“뿌리를 내리고 가지가 자라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익기까지는 당연히그만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후,네모토 감독은 코치진을 구성하여 선수를 키웠고, 구단의 전문 인력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감독 부임 4년만인 1982년에 감동적인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승을 1년 앞당긴 감독의 소감이 기가 막혔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습니다. 내년부터는 진짜 실력으로 우승할 겁니다.”
그의 말대로 라이온스는 리그 우승 열세 차례, 일본 시리즈 우승 여덟 차례 등 최고의 성적으로 승승장구하였으며, 명문 팀으로 명예를 누렸다.
평소 네모토 감독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우승이란 단기간에 고액 연봉 선수를 끌어들인다고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능력 있는 인재를 발굴해 토양을 가꾸고 가지가 굵어지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꿈의 전파
1920년 벨기에 앤트워프 올림픽 육상 100m에서 10초 8로 우승한 찰리 패덕이 미국 클리블랜드의 한 고등학교에서 특강을 했다. 유심히 듣던 학생이 물었다.
“저도 열심히 하면 우승할 수 있겠는지요?”
찰리 패덕은 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격려해 주었다.
이 학생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육상부문에서 4관왕을 석권한 제시 오언스(1918~1980)였다. 그런데 그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한 소년이 다가와 그와 똑같은 질문을 하였다. 그도 그 소년에게 똑같은 말을 해주었다. 그 소년이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해리슨 딜라드(1923~2009)였다,
꿈은 릴레이식으로 전파되었고 그렇게 실현된 것이었다. 참된 속마음에서 바라는 바를 진정소발(眞情所發)이라고 한다. 이처럼 간절한 염원과 각오가 때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1962년 라이스대학에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10년 이내에 인간이 달 위를 걷게 하겠다.”
그러자 과학자들의 반응은 가능과 불가능으로 나뉘었다.
케네디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과학자와는 더는 만나지 않았다. 가능하다고 하는 과학자들만 만나 해결책을 찾는 데 노력하였다. 그 결과 드디어 인류는 1969년 7월 21일 달나라에 인간의 발자국을 남기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는 회사
등산복 소재로 잘 알려진 ‘고어텍스’는 물방울의 2만분의 1 수증기 분자의 700배인 구멍이 촘촘하게 뚫려 있어, 외부의 빗물은 차단하고 내부의 땀은 배출하는 원단이다. 이 섬유를 개발한 고어텍스사에서는 고어텍스 원단을 사용해 만든 모든 옷에 ‘Gore-Tex : Guaranteed to Keep You Dry’란 꼬리표를 달게 하는 마케팅으로 브랜드를 널리 알렸다.
그런데 최근 들어 고어텍스가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바로「포춘」이 선정한 ‘가장 일하고 싶은 100대 기업’에서 1998년부터 11년 연속 상위권을 차지한 것이다.
고어텍스의 인기 비결은 특유의 조직 체계에 있었다. 고어텍스에는 조직이나 상사도 없다. 표준화된 고정 업무는 더더욱 없다. 모든 직원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동료에게 프로젝트를 제안하였고 그때마다 TF팀을 만들어 일한다. 이런 경영 방식이 비효율적이지 않으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구성된 팀은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과정에서 혁신과 창조가 창출됐다. 고어텍스 CEO 테리 켈리의 주장은 이러하다.
“틀에 갇히면 모든 게 끝이다. 우리 조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면에서 틀에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이 회사의 보상 시스템 역시 독특하였다. 연공서열이나 직함이 따로 없으므로 발명과 혁신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높은 성과급을 부여하였다. 연봉도 동료들의 평가로 결정되고, CEO의 보수도 역시 동료들의 평점에 의해 결정됐다고 한다.
유명한 검술사
영국은 지금도 신사의 나라라고 불리고 있다. 예부터 검술을 다루는 기사가 많았고, 그들이 싸움할 때는 언제나 정정당당히 검으로 결투를 하곤 하였다. 그중 오말 백작이라는 유명한 검술사가 있었다. 그는 검술 솜씨도 뛰어났지만, 인격 또한 훌륭하였다.
한 번은 라이벌과 최고의 검술사를 가리는 대결을 하게 되었다. 서로 칼을 휘두르던 중 상대편이 말에서 떨어지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오말 백작이 이길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였다. 순간 당황한 상대방은 오말 백작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오말 백작은 즉시 검을 내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내일 다시 겨루기로 합시다. 오늘은 그만 결투를 끝내는 게 좋겠소.”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고 그 연유를 묻자 오말 백작이 단호하게 말하였다.
“나는 화가 났을 때는 절대로 검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방금 그가 내게 침을 뱉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분노를 품고 검을 겨뤄서이긴경기에서는 진정한 승리의 기쁨을맛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기는 다음 날도 열리지 않았다. 오말 백작의 말에 깊이 감명받은 상대편 검술사는 용서를 빌고 그의 제자가 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우연한 사고와 부주의한 사고
세계 최초의 사진 중심 잡지 《라이프(LIFE)》의 창간 멤버였던 마가렛 버크화이트(1906~1971). 그녀는 여성 최초로 미 공군 종군기자로 활약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실상을 낱낱이 보도하였다.
특히 1941년 6월에 독일의 모스크바 최초 공습 광경과 스탈린을 촬영한 것이 특종이 되어 유명세를 더 했으며, 대표작으로 《자유의 도중》, 《당신들은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등이 있었다.
그녀는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1869~1948)가 물레 앞에서 정좌하고 글을 읽고 있는 모습을 포착한 사진 등을 발표하여 많은 사진작가로부터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빼어나다고 평가받는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런 그녀가 훌륭한 사진작가가 되기까지는 부모의 영향이 컸다. 어렸을 때 접시를 깨면 어머니는 이렇게 물었다.
“우연한 사고였니? 아니면 부주의에 의한 사고였니?”
만일 부주의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마거릿의어머니는 그녀에게 벌을 주었다. 그러나 우연한 사고였다고 하면 관대하게 용서해 주었다. 그 덕분에 마거릿은자신의 행동을 올바르게 판단할 방법을 이렇게 밝혔다.
“엄격한 규칙을 통해 삶의 진실을 추구하는 자세가 방임보다 훨씬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만이라는 선물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오랜 기다림 끝에 사랑스러운 왕자를 얻었다. 왕자가 세례를 받던 날에는 온 국민이 몰려와 축하를 전했다. 옥황상제도 열두 선녀를 축하 사절로 보내 진귀한 선물을 선사했다. 선녀들은 왕에게 지혜, 고귀함, 힘, 건강, 재력, 영민함, 지식 등의 선물을 차례로 바쳤다.
마지막 선녀의 차례가 되었을 때 딱히 내놓을 것이 없었던 그녀는 ‘불만’을 선물하기로 했다. 그러자 왕은 기분 나쁜 마음을 숨기고 그녀의 선물을 정중히 거절했다.
“내 아들은 이미 선녀들이 선사한 선물을 열한 개나 받았으니 살아가는 동안 어떤 불만도 품지 않을 것이오.”
세월이 흘러 무럭무럭 자라난 왕자는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영민하고 건장했으며 성정이 온화하고 박학다식했다. 게다가 마음속에는 어떤 불만도 없었다. 왕자는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며 나라를 더 강하게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왕을 모시는 대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의 나라는 오래되지 않아 이웃 나라에 함락되고 말았다.
불만은 때로 매우 좋은 선물이다. 중국의 사상가 루쉰은 ‘불만은 진보의 수레’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은 전혀 다르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야말로 성장과 초월의 동력이 되지만 불평은 아무런 미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불만은 부단한 성장과 초월의 과정에서 사람의 잠재력을 무한히 솟아나는 법이다.”
원가(原價)와 원가(元價)
열 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출발한 아오야마 상사는 1974년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도심에서 벗어나 변두리에 신사복 전문점을 열었다. 그때까지 일본에는 도시 외곽에 쇼핑센터를 여는 경우가 없었다. 창업자인 아오야마 고로는 품질이 좋고 값이 싸다면 멀어도 소비자가 반드시 찾아올 거라고 믿었다.
결국,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고객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어 사업은 번창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1992년 10월, 아오야마 상사가 도쿄 한복판인 긴자에 백 평짜리 ‘양복의 아오야마’라는 신사복 전문점을 열었다.
남들이 도심 외곽에 상점을 만들고 있을 때, 그는 다시 도심지로 돌아온 것이다. 이 신사복 전문점의 첫날 매출액은 1억 엔을 가볍게 넘어섰다.
「일본의 가장 비싼 땅에서 일본에서 가장 싼 신사복을 판다.」는 것이 긴자점 개업을 알리는 광고지 문구였는데, 이에 대해 아오야마 고로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가장 비싼 땅에서 가장 비싼 물건을 팔려고 하면서도 가장 비싼 땅에서 가장 싼 물건을팔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남이 하지 않은 일을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소비자는 저렴한 가격의 합리적인 소비를 원하고, 판매자는 매출 증대를 희망한다. 소비자와 판매자 모두의 욕구를 충족시킬 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 문제는 원가(原價)이다. 그러나 원가(元價)도 중요하다.
천 번의 시련, 한 번의 기회
Britain′s Got Talent, 미국의 리얼리티 쇼 ‘아메리칸 아이돌’의 영국 버전이다. 끼가 넘치는 참가자들은 스타가 되기 위해 불꽃 튀는 경쟁을 벌였다. 그런데 한눈에 보기에도 뚱뚱하고 못생긴 초라한 남자가 무대에 올랐다.
어떤 긴장이나 기대감도 들지 않았다. 그가 준비한 곡은 푸치니의 오페라 곡《네순 도르마 : 공주는 잠 못 이루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아! 이 남자, 영혼을 다 바쳐 노래를 부르는구나!”
그는 서른여섯 살의 휴대전화 판매원 폴 포츠였다. 노래 부르는 기쁨을 알았을 때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있는 돈을 모두 털어 이탈리아로 건너가 단기 과정 오페라 교육을 받았지만, 쟁쟁한 프로들의 세계에 진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충수파열, 종양, 오토바이 사고로 성대 결절에 이르기까지 온갖 불행이 겹쳤고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꿈을 접고 일상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날,그는 쇼의 최종 우승자가 되었다. 영국 여왕 앞에서 공연할 기회도 얻게 되었고, 마침내 오페라 앨범 《원 찬스》를 발매하기에 이르렀다.
“내 삶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아요. 숨 막힐 듯 긴장되지만 내릴 수 없는 짜릿한 맛과 스스로 멈출 수 없는 롤러코스터요. 무섭다고 뛰어내리지는 않을래요. 이겨 내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교만이 불러온 대참사
역사에 오명을 남긴 채 사라진 타이태닉호는 세계 최대 호화 여객선으로 1912년 4월 14일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가눈 데대서양을 횡단할 목적으로 처녀 항해에 나섰다.
2,300여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승객을 태우고 타이태닉호는 유유히 북대서양을 항해하고 있었다.
캐나다 동부 해안에 이르렀을 때, 해안 통제소로부터 「빙산 주의」라는 무선을 받았다. 그러나 항해사는 거대한 타이태닉호를 신뢰한 나머지 선장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급박해진 통제소에서는 계속 무전을 보내왔지만, 이미 자리를 뜨고 만 항해사는 무전이 오는 것을 알 리 만무하였다. 타이태닉호의최후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간, 그제야 선장은 항해사로부터 이와 같은 보고를 받았다.
“전방에 빙산이 있다는 무전을 받았는데 어찌할까요?설마 이 타이태닉호가 빙산 따위에 눈깜짝이나 하겠습니까?”
선장도 항해사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이렇게 명령하였다.
“하나님이라도 감히 이 배를 어찌할 수 없을 걸세. 항해를 계속하게!”
그러나 수 킬로미터도 못 가서 타이태닉호는 그 거대한 물체를 바다에 내맡기고 말았다. 승객 2,300명 중 단 700여 명만이 살아남은 이 대참사는 한 인간의 교만이 불러들인 처참한 결과였다.
대통령에게 도끼 판 세일즈맨
미국의 부루킹 연구소는 1927년부터 세계적으로 뛰어난 세일즈맨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이 연구소는 해마다 특별한 과제를 내었다. 그중 클린턴에게 속옷을 파는 일은 8년 동안 누구도 실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부시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부시에게 도끼를 팔라」는 과제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세일즈맨 조지는 드디어 2001년에 부시 대통령에게 도끼를 팔았다. 부루킹 연구소는 그를「가장 훌륭한 세일즈맨⌟으로 선정하고 챔피언 벨트를 수여하였다. 그는 1975년 닉슨 대통령에게도 소형 녹음기를 파는 데 이어 두 번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과연 대통령에게 도끼를 판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를 기자들과 인터뷰에서 그는 성공 내막을 이렇게 밝혔다.
“저는 부시 대통령이 소유하고 있는 농장을 방문해 자세히 조사했지요. 그의 농장에는 말라버린 나무가 많았고, 또 대부분 나무는 약하고 연한 나무여서 부시의 할아버지가 쓰던 큰 도끼보다는 작은 도끼가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편지로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대통령께서는 15달러를 보내주셨습니다.”
또 부루킹 연구소가 밝힌 시상의 배경은 이러하였다.
“우리의 챔피언 조지는 다른 사람들이 실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에자신감을 잃지 않고 끝까지 해내었습니다. 문제는 일의 어려움이 아니라 자신감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그의 도전적인 판매 전략을 높이 산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어머니
「행복 수리공」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한 뒤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한 번 잠이 들면 누가 업혀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이 들기 때문이다. 만약 밤에 갑자기 딸이 우는데도,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을 것을 생각하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하나님, 하나님이 저의 잠귀를 좀 밝게 해주셔서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잘 들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 문득 스쳐 지나가는 분이 있었다.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청각 장애인이다. 잠귀만 어두워도 이렇게 답답한데, 귀가 들리지 않는 어머니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그런데 우리 삼 형제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신 어머니.
어머니는 어린 제가 잠들어 있을 때 그 옆에 누워 모든 감각을 열고 숨 쉴 때 나오는 콧바람에 귀 기울이며 작은 뒤척임에도 집중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몇 년 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온몸에서 전율이 느껴졌다.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나를 지켜 주며 끝없는 관심과 사랑을 잠시도 멈추신 적이 없는 분.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고,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귀 기울여 주는 분. 그분은 졸지도 않고, 나의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게 나의 오른편에 서서 나의 그늘이 되어주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 어머니이다.」
나이보다 마음
27세의 나이에 단돈 7달러를 가지고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년이 있었다. 그는 처음 할렘가의 유대인지역에서 현금 출납원으로 출발하였고, 열심히 노력한 덕에 장사가 잘되어 11년 만에 상당한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77세가 되는 해에 은퇴하여 조용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일상은 노인학교에 나가서 잡담하거나 체스(서양 장기)를 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느 날, 장기의 상대자가 없어 그냥 멍하니 있는데,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냥 그렇게 앉아 계시느니 그림이나 그리시지요?”
“내가 그림을? 나는 붓 잡을 줄도 모르는데…….”
“그야 배우면 되지요?”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나는 이미 일흔이 넘었는걸.”
“제가 보기엔 할아버지의 연세가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더 문제인 것 같은데요.”
젊은이의 그런 핀잔은 할아버지가 화실을찾게 했다. 처음 붓을 잡은 손은 떨렸지만, 그는 매일 거르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 않았다. 더욱이 그 나이에서 오는 풍부한 경험으로 새롭게 시작한 일은 그의 마지막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장식해 주었다.
그가 바로 미술 평론가들이 ‘미국의 샤갈(1887~1985)’이라고 극찬했던 ‘해리 리버맨(1880~1983)’이다. 그는 이후 많은 사람의 격려 속에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그림을 남겼으며, 백 세 살에 스물두 번의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삶을 마쳤다.
꿈을 분명하게 인식하라
서른 번째 생일을 쓸쓸하게 보내던 미국의 한 실업자가 5년 뒤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다 깜짝 놀랐다.
자신의 삶이 아무 비전도 없는 실패한 인생이라고만 여겼는데, 5년 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 그것을 위해 도전하고 싶은 꿈이 생긴 것이다. 그 꿈은 자신의 혼을 담은 글을 출판할 수 있는 회사를 갖는 것이었다.
자신의 꿈과 목표, 그리고 실천하는 방법을 명확히 알게 된 그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꿈을 향해서,그렇게 해서 처음 출판한 책인 《백만장자 코스》가 전 세계 30개국 출판이라는 성공을 거두었다. 자기의 꿈을 계획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 1,5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출판사의 CEO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가 바로 매리 마크 앨런(1940~)이다. 그는 《백만장자 코스》에서 자신의 꿈을 구체화한 다양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으로 다가갈 방법을 이렇게 제시하였다.
“만약 당신이 성공을 향해 아무 의미 없이 무작정 달려가고 있다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나는 5년 뒤에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라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
중국의 광무제 휘하에 있던 복파장군 마원(馬援)이 군사를 이끌고 남방의 교지로 떠났다. 장군은 남방의 밀림에서 3년 동안 치열하게 싸운 끝에 교지군을 대파했다. 광무제는 마원 장군의 공을 크게 치하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이번에는 동정호 일대의 만족(蠻族)이 반란을 일으켰다. 광무제는 곧 군대를 보냈으나 풍토병 때문에 많은 군사가 죽고 말았다. 다시 군대를 보내려 했지만 젊고 유능한 장수들이 모두 병을 핑계로 출정을 사양했다.
이때 마원 장군이 분연히 자원하고 나섰다.
“폐하, 제가 나가서 반란군을 토벌하겠습니다.”
광무제는 마원 장군의 나이를 걱정하여 말렸다.
“그대는 이미 나라에 큰 공을 세웠잖소. 그리고 나이가 많아서 군사들을 지휘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마원 장군은 단호하게 말했다.
“신의 나이 비록 예순두 살이지만 아직도 갑옷을 입고 말을 탈 수있습니다.”
광무제의 승낙을 받은 마원 장군은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용감하게 전투에 임해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군사들에게 말하였다.
“나이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젊은 마음을 잃지 않는것에 있다.”
단 한 번뿐인 내 인생
어린 시절에 사람들 앞에 서면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내성적인 소년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여서 그의 가족은 늘 숨어 지냈다. 그런 그는 남들이 학교에 다닐 때, 부동산 중개소에 취직했다.
그가 학교생활에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보다 경쟁이라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경쟁에 약하다. 칭찬이나 표창도 받고 싶지도 않다. 따라서 경쟁을 하는 시험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만일내가 이긴다고 해도 내 기쁨보다 상대방이 실망하는 모습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할 것이니까.”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조금씩 지식을 얻었다. 본래 그는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통찰하고 그 내면에 숨어 있는 진실을 파헤쳐서 그것을 희곡으로 만들어 내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50대 후반이 되어 이런 고백을 하였다.
‘내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그리고 그 인생은 나의 것이 야. 이제부터 과감히 나 자신을알리면서 살자.’
그가 바로 극작가, 소설가, 비평가이며, 위대한 풍자 작가로 알려진 버나드 쇼(1856~1950)이다. 그는 1925년에 《인간과 초인》으로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에 그의 대표작인 《피그말리온》은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제목의 뮤지컬과 영화로 만들어져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나이키의 유래
나이키(NIKE)는 운동화, 운동복, 이와 관계있는 액세서리 등을 디자인하고 판매하는 회사로 1962년 육상선수 필립 나이트와 오레곤대학교육상코치였던 빌 보어만이 함께 만든 회사였다.
오레곤대학교와스탠퍼드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나이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트럭에 러닝슈즈를 싣고 운동 경기장을 찾아가 판매를 시작하였다. 상품 이름은 블루리본 스포츠(Blue Ribbon Sports)라 하였다.
얼마 후, 그는 신발을 직접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회사를 차리고 회사 이름을 나이키로 하였다. 첫해의 판매량은8000달러였으며, 신발로 벌어들인 이윤은 250달러에 불과하였다.
두 사람의 목적은 ‘쓸 만한 운동화가 없으니 수입해 팔아보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걱정이 있었다. 자신들이 ‘행상원’이라는 것이 일본에 알려지면 수입처가 끊길 위험이 있었다. 이들은 궁리 끝에 일단 회사를 설립키로 했다.
이때 떠오른 것이 페르시아에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42.195km를 달렸던 그리스 병사였다. 이 병사가 기도를 올렸다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회사 이름으로 택했다. 영어 발음으로 ‘나이키’이다.
그들은 회사 마크도 만들었다. 주위의 미술대학원생에게 부탁해서 단돈 35달러를 주고 V자를 부드럽게 뉘어놓은 것 같은 ‘스우시(swoosh : [휙]이란 뜻)’ 마크를 만들었다고 한다.
도전과 모험의 미래
미국의 억만장자 스티브 포셋(1944~2008)은 금융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사업가였다. 그는 40대가 되자 사업을 줄이고 모험가로 변신하였다. 1985년에 도버 해협을 22시간에 헤엄쳐 건넌 것을 시작으로 1992년에는 알래스카 횡단 개썰매 경주, 1996년에는 철인 3종 경기를 완주하였다.
2004년에는 58일 동안 요트를 타고 최단 기간에 세계 일주 항해의 기록도 세웠다. 어디를 막론하고 숱한 모험에 도전한 그는 지금까지 109개의 다양한 스포츠 세계 기록을 가졌다.
지난 2005년, 그는 또 하나의 도전을 이뤄내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과거에 다섯 차례나 실패한 모험으로 초경량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일이었다.
그는 마침내 대서양과 유럽, 아시아와 태평양 상공 3만 7천 ㎞를 날아 67시간 2분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중간에 재급유나 중간 기착하는 일이 없이 단독 비행으로 성공한 세계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약 3일 동안 비행하면서 절대적인 고독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과 싸워야 했다. 잠을 자는 것은 물론 음식을 제대로 섭취할 수도 없었다.
그가 비행기에서 내릴 때 어느 기자가 끊임없이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짧게 대답하였다.
“도전과 모험이 없다면 미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시장을 점령한 창의력
LG전자는 우리나라의 전자기기 제조 회사로 LG그룹의 대표 계열사이다. 1958년 금성사란 이름으로 설립, 이듬해 1959년우리나라 최초로 진공관 라디오를 생산하며 전자산업의 장을 열었다. 이어 1960년, 1965년, 1966년, 1968년에 각각 선풍기, 냉장고, 흑백텔레비전, 에어컨을 최초로 생산했다.
1977년 매출 천억 원을 달성하였고 이듬해에 수출 1억 불을 돌파하였다. 그리고 1984년에는 매출이 1조 원을 돌파하였다. 1995년금성사에서 LG전자로 상호를 바꿨다. 2004년세계 최초로 지상파 DMB 핸드폰을개발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이 회사가 러시아에 에어컨을 판 이야기는 자못 흥미롭다. 모두 러시아는 추운 나라이므로 에어컨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겠지만 LG전자는 이런 상식을 깨고 역발상의 창의력으로 승리를 일궈내었다.
그래서 러시아 시장을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먼저 LG전자는 시장 조사를 통하여 1년에 45일 정도가 여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또, 러시아 사람들은 추위에는 강해도 더위는 참지 못한다는 사실까지도 간파한 것이었다. 즉각 판매 전략을 세우고 에어컨 수출 전선에 뛰어들었다.그 결과 러시아 에어컨 시장의 35%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이 역발상의 창의력, 즉 발상의 전환에서 이룩된 쾌거이다. 우리도 종전의 인식이나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시작한다면 많은 변화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존심 찬 한마디
네팔에 있는 에베레스트산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높이가 8484m나 된다. 더구나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정상에 오르기가 몹시 힘들다. 1950년 초반까지 세계 각국에서 여덟 개 이상의 팀이나 정상에 도전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영국의 에드먼드 힐러리(1919~2008)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도와 벌꿀을 치다가 늦깎이 모험가로 나서서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한 등반탐험가로 꼽혔다.
초기 에베레스트산의 등정에 실패하고서도 그는 이렇게 투혼을 불태웠었다.
‘에베레스트산은 이미 다 자랐지만, 나의 꿈은 계속 자라고 있다.’
1953년에 네발의 셰르파족 산악인 텐징 노르가이(1914~1986)와 역사상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의 정상을 정복하여 그곳에 영국의 국기를 우뚝 꽂았다.
그런데 그 뒤, 어느 국제회의에서 외국 대표가 영국 대표에게 이렇게 비난을 퍼부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영국 국기를 꽂다니, 영국 국민에게 는 땅에대한 지나친 욕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당황할 만도 하지만 의연하고 당당한 영국 대표의 자존심 찬 대답에 다른 나라의 대표자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제가 답할 자격은 없습니다만 영국 국기가 싫으면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생각이 사람을 바꾼다
사람은 누구나 독특한 개성이나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재능을 어떻게 발현하느냐는 당사자의 의지에 달렸다. 독일의 윈랜드와 렌스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들은 괴테(1749~1832)와 같은 시대에 독일에서 활동했던 천재적인 시인들이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괴테보다 문학적인 소양이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았고 자신들의 능력 개발을 게을리하였다.
결국, 천재 시인으로 불리던 윈랜드는 연애 사건에 휘말려 실족하고, 렌스는 문학의 길 대신 사업을 택해 평범하게 살았다. 반면에 괴테는 20세 때부터 유명해졌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이 이룰 수 있는 큰일을 해내기로 했다.
1765년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내던 괴테는 1768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 생활을 하였다.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鍊金術), 경건파(敬虔派)의 신앙에 관심을 두었으며, 23세 때 드디어 대작 《파우스트》를 쓰기 시작했다.
괴테는 가난과 실연의 모진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의 재능을 꾸준히 갈고닦았다.마침내 그는 독일 최대의 시인이자 세계적인 대문호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이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상으로 등용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같은 출발 선상에 있었지만, 끝에 가서는 전혀 다른 열매를 맺었다.
꿈을 발사하다
국제 우주 정거장에서 2주간의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귀환한 우주왕복선 엔데버호에는 특별한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55세의 교사인 바바라 모건이었다. 평범한 교사인 그녀는 지난 1985년,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을 가지고 미 항공우주국이 진행한 우주 교사 프로그램의 예비 후보로 뽑혔다.
그러나 첫 번째 우주 비행 교사로 선정된 크리스타 메컬리프가 탔던 챌린저호가 발사 후 75초 만에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자칫 자신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폭발 사고에도 불구하고 모건은 꿈을 접지 않았다.
1998년 정규 우주 비행사 자격을 따냈고, 이후 7년간의 지상 근무를 마친 끝에 지난 8월 7일 발사된 엔데버호의 최종 탑승자로 선발되었다. 모건의 도전 정신과 우주왕복선 탑승에 대한 의지가 높이 평가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우주왕복선 엔데버호 안에서 지구와 연결한 최초의 우주 수업을 성공리에 진행하였다. 미국 아이다호주 디스커버리 센터에 모여 모건의 모습을 지켜보는 초등학생들에게 무중력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주변 동료들을 번쩍 드는 척하기도 하고, 음료수를 마시는 시범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녀의 수업 광경은 미국 전역에 25분간 생중계되었다.
지난 20여 년간 자신이 이루고 싶은 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도전한 바바라 모건의 의지는 우주 비행의 역사에 또 하나의 발자취를 남겼다.
빈 주머니가 성사시킨 계약
2001년 1월, 중국에서 자기 부상 열차 건설 사업 계약을 따내기 위해 독일 지멘스그룹의 하인리히 핸드폰 피래회장이 중국의 주룽지(1928~) 총리와 협상을 벌일 때의 일이었다. 서로가 자신들의 이익만을 주장하다 보니 협상은 꼬일 대로 꼬였고, 풀릴 기미도 좀체 보이지 않았다.
협상 장소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갑자기 피레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협상에 참여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피레 회장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양복 주머니에 양손을 넣더니 빈 주머니를 뒤집어 내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두 팔을 벌이는 몸짓을취했다. 더는 양보할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약 몇 분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룽지 총리가 갑자기 피레 회장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무려 1조 원이 넘는 거대한 사업 계약을 단순한 제스처 한 동작으로 성사시킨 것이다.
후일 피레 회장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당시 협상에 진전이 없어 묘안을 짜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협상 장소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주머니를 모두 비워 두고 마지막에 빈 주머니를 내보이기로 작심했습니다.”
협상 타결로 지멘스는 컨소시엄을 구성한 티센크루프와 공동으로 열차 공급과 역사(驛舍) 건설을 맡게 되었다. 단순한 몸짓 하나가 때로는 거대한 협상을 좌우할만한 용기 있는 전략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영원한 현역
1960년대. 서부 영화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클린트 이스트우드(1930~ ).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로 유명했지만, 그가 1970년대 초 영화감독으로 변신했을 때는 주위 반응이 냉랭했다. 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만 해 본 배우가 영화 전체를 아울러야 하는 감독의 일을 너무 만만하게 본 게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이 많았다.
하지만 이스트우드는 1990년대부터 작품성 높은 영화들을 선보이며 평론가들을 놀라게 하였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필두로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등이 미국 아카데미상 주요 부문 후보에 단골로 오르더니, 마침내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이스트우드에겐 ‘아카데미가 인정한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이스트우드는 여러 영화제에 출품해 좋은 성과를 일궜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유독 칸영화제에서만은 상복이 없었다. 2008년 5월,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한 《체인질링》은 황금종려상을 향한 다섯 번째 도전이었으나 칸은 그를 외면하였다.
그러자 항간에는 그가 경쟁 부문이 아닌 비경쟁 부문에 출품했다면 결과가 달랐으리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다음 해 칸영화제 기자 회견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비경쟁으로 참석해 안전하게 상을 타는 게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는 새 영화에 대한 반응을 체험하는 게 더 중요하다.”
위대한 대통령
등에 있는 상처 때문에 미 육군에서 입대 거부 판정을 받은 한 젊은이는 피나는 훈련 과정을 마치고 나서 미 해군 신체검사에 통과하였다. 그 후, 젊은이는 해군 기지인 진주만 부근의 남태평양에서 어뢰정을 지휘하는 해군 대위가 되었다.
1943년 일본 구축함 한 척이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뉴조지아섬 근처에 있던 대위의 어뢰정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두 명의 병사가 죽었지만, 해군 대위는 상처 입은 부하 한 명을 가죽끈으로 묶어 입에 물고 4마일이나 헤엄쳐 구해냈다. 이 공로로 그는 미 해군과 해병대가 주는 최고의 수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의한 고통과 등에 난 상처가 악화하여그는 미국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해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무렵, 정치 경력을 쌓고 있던 그의 형이 전선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형의 전사로 그는 자기 가문을 대표해서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가 미국의 32대 대통령 존 F‧ 케네디(1917~1963)이다. 그는 대통령 취임식부터 젊은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그가 남긴 대통령 취임 연설문이 아직도 유명하다.
“나의 동포 미국인 여러분! 여러분은 나라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해줄 것인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여러분의 나라를 위해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시오.”
생각을 현실로 옮기는 용기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 슈에 발레리라는 우편배달부가 있었다. 하루는 마을을 걸어 다니다가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넘어뜨린 돌이 특이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져왔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가방에 큰 돌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도 매일 돌을 가지고 걸어 다니는 것이 무겁지 않으냐며버리라고 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피곤해서 잠이 들려 하는데 문득 이 아름다운 돌로 성전을 지으면 얼마나 휘황찬란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우편배달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늘 돌을 주워왔다.
때론 밀차를 밀며 우편배달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는 그 밀차에 돌을 싣고 왔다. 그는 날마다 돌을 가져오느라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낮에는 우편배달과 돌을 운반했고 밤에는 건축가가 되어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해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20여 년 동안 끊임없이 그런 일을 반복했다.
1905년 프랑스의 한 신문기자가 우연히 슈에 발레리의 성전과 건축구조를 보고 큰 감동하고 소개하는 글을 실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건축물을 보려고 찾아왔다. 그중에는 유명한 화가 피카소도 있었다. 지금 프랑스의 유명한 관광지가 된 이 성의 이름은 ‘우편배달부 슈에 발레리의 이상 궁전’이다. 처음 슈에 발레리를 넘어뜨린 궁전의 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희망을 담은 돌이 얼마만큼 빛을 낼 수 있을지 궁금했었다.」
첫 흑인 메이저 리거 선수
미국 프로 야구 메이저리그 선수의 등 번호 가운데 42번은 없다. 전 구단에서 영구히 결번된 것으로 그 등 번호는 재키 로빈슨(1919~1972)에게 영원히 헌정된 것이었다.
재키 로빈슨은 최초의 흑인 선수로 메이저리그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에서 10년간 2루수로 뛰면서 통산 3할 1푼 1리, 홈런 137개, 도루 197개를 기록했다.
그 정도의 성적이라면 123년의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발군의 선수로 분류하기는 어렵지만, 당시에 흑인으로서 메이저리그에서 뛴 것만으로도 미국 민권 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흑백 차별 철폐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는 1947년 28세의 늦은 나이에 데뷔해 지독한 인종 차별에 시달렸다. 타석에 설 때마다 관중들은 야유를 보냈고 상대편 선수들까지도 ‘목화밭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그러나 늘 웃으며 따돌림을 견뎌내었다. 처음에는 함께 뛰길 거부했던 팀 동료들부터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라운드에서는 강인한 투지와 집념을 보여줘 첫해 내셔널리그 신인왕, 1949년에는 MVP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은퇴 후, 흑인을 위한 재단 설립과 정치 활동에 전념하다 53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매년 4월 15일 ‘재키 로빈슨의 날’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메이저리그 선수 모두가 등 번호 42를 달고 경기를 한다고 한다.
사쿠라이의 실험
30여 년 전의 일이었다. 31세에 일본의 유명한 여성 잡지의 한 편집장이 ‘인간이 달걀을 품어 부화시킬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설문 조사를 하였다. 설문에 응답한 대부분 사람은 입을 모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라고 답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체온이 36도 전후지만, 닭의 체온은 40도가 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편집장은 실험으로 증명해 보자고 나섰다. 소용없는 일이라는 부하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네 명의 실험자들을 모집했다. 그리고 그들을 도쿄의 토큐 호텔에 투숙시키며 수의사와 기록자를 동반해 지속해서 관찰했다.
그런데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20일 만에 한 할머니가 품고 있던 달걀에서 건강한 병아리가 나온 것이다. 고정 관념이 여지없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일본의 전 언론이 들썩였고, 전 세계로 이 뉴스가 타전되었다. 완전히 빅뉴스가 되었다.
그가 바로 여성 잡지 쇼덴샤의 유명한 편집장인 사쿠라이 하데 놀(1931~)이다. 그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회사의 직렬적 서열 구조를 없애고 팀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직원들 마음마저관리하는 《팀장 대화법》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늘 소속 직원들에게 이런 말로 격려하곤 하였다.
“전문가의 말만 따랐다면 결코 굳은 머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혁명가가 되는 기분으로 덤벼보라.”
도미노 피자 창업자
미국의 한 소년이 4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혼자 가정을 꾸리기가 힘든 어머니는 소년과 동생을 미시간주의 한 가톨릭 보육원에맡겼다. 그는 그곳에서 사제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신학교에서 친구들과 다투다 징계를 받아 사제의 꿈을 접고 해병대에 입대했다.
1959년 제대 후, 소년은 미시간 주립대학에 입학할 등록금을 벌기 위해 신문 가판대에서 일했다. 그러나 학업과 일을 병행하기 어려웠고 병까지 얻어 결국 대학을 중퇴해야 했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럽게 기회가 찾아왔다. 미시간주 앤아버의 한 식당 주인으로부터 피자가게를 인수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인수 가격은 500달러에 수천 달러의 부채를 떠맡는 조건이었다.
당시 23세의 젊은이가 된 소년은 학업을 계속하지 못한 설움을 달래며 피자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상호는 애초이탈리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도미니크’로 정했다. 그는 배달 과정에서 훼손되지 않도록 피자 만드는 모든 과정을 개선했다. 큰 사각형의 골판지 상자와 피자가 배달되는 동안 식지 않도록 보온상자나 절연체로 만든 작은 주머니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시내 전역을 30분 이내로 배달할 수 있도록 해 그 분야에서 최고의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가 바로 피자 하나로 억만장자 대열에 오른 입지적인 기업인으로 4세 때 고아가 된 뒤 30세에 세계 최대 피자 체인점을 건설한 도미노(Domino's) 피자의 창업자 톰 모나건이다.
한 우물을 파야
선진국에서는 한종류의 제품으로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개발 도상 국가의 기업들은 문어발식 경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여러 분야에 침투하여 백화점식 기업 경영을 하는 경우가 이런 부류에 해당한다고하겠다.
씨티즌은 1924년 일본에 세워진 시계 전문 제조 회사로서 세계적인 브랜드를 가지고 명품을 창출해 가며 한 분야에 전문성을 발휘한 유명한 회사이다.
영어 이름 그대로 「국민 시계」라는 뜻이다. 반세기 이상의 역사를 지닌 씨티즌은 1986년 이후로 해마다 「세계에서 가장 시계를 많이 만드는 회사」라는 영예를 얻었다.
이유는 이러했다. 씨티즌 보다 시계 산업에 먼저 뛰어든 세이코는 1881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시계 메이커였다. 세이코는 시계의 정교함과 정확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각종 스포츠 행사에 타임키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세이코는 시계뿐만 아니라 안경, 보석 등 각종 스포츠 관련 장비까지 손을 뻗치다 보니 후발 업체인 씨티즌에게 정상의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결국, 세이코는 2001년 좀 더 전문적인 시계 회사로 거듭나고자 「세이코 시계주식회사」로 다시 탄생하였다. 이젠 시계 생산에만 전념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뒤늦게나마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삼류 복서의 꿈물
콘크리트, 철, 유리 등 한정된 재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현대건축에서 노출 콘크리트 건물 등으로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선물한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가 있었다. 지난 1995년 건축 분야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미국 프리츠커상을 받은 그의 학력은 ‘독학’이라 적혀 있었다. 실제로 그는 정식으로 건축을 공부한 적이 없는 공고 출신의 가난한 복서였다.
삼류 복서로 배고픔과 설움에 휩싸여있던 1962년, 어느 낡은 서점에서 만난 한 권의 책이 그를 건축가의 길로 이끌었다. 바로 스위스의 유명한 건축가인 르 꼬르뷔제의 일생을 담은 《르 꼬르뷔제 전집》이다. 친구들이 대학에 진학할 때 그는 르 꼬르뷔제의 흔적을 찾아 여행길에 올라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 모스크바 등을 돌면서 보이는 것을 모두 스케치하였다. 또 미켈란젤로, 르 꼬르뷔제, 알바 알토 등의 작품과 수많은 건축물을 직접 보고 독창적인 건축관을 확립했다.
그렇게 7년간의 여행길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무수히 많은 공모전에 참여하였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연전연패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패배를 경험했다. 정말 힘들어 그 만두어 야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또 도전하였다. 창조는 역 경 속에서 비로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책 속에서 발견한 하나의 꿈으로 세계 건축계의 흐름을 바꿔 놓은 안도 다다오(1941~)다.역경에도 포기하지 않는 그의 도전이 빛을 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두주불사(斗酒不辭)
유방(BC 247~BC 195)이 한 고조가 되기 전에 진(秦)나라 수도 함양을 함락시키고, 진나라의 왕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항우(BC 232~BC 202)는 질투와 분노가 치솟았다. 이를 안 유방이 항우의 진중에 해명하러 갔다. 이를 중국의 역사에서 홍문의 만남[鴻門之會]이라고 한다.
유방의 변명에 항우는 귀가 솔깃하였으나 그의 책사 범증(范增)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풀어 유방의 목숨을 노렸다. 유방이 위급한 처지에 있는 걸 알게 된 심복 장군 번쾌(?~BC 189)가 방패와 칼을 들고 항우의 호위병들을 쓰러뜨리고 연회장에 뛰어들어 항우를 쏘아보았다.
항우가 칼자루를 만지며 소리쳤다.
“누군가?”
유방의 옆에 있던 책사 장량(張良)이 대답했다.
“패공 유방의 수하 장수 번쾌이옵니다.”
“이자에게 술을 주도록 하라.”
한 말들이 술잔을 번쾌는 선 채로 단숨에 들이켰다.
“이자에게 생돼지 다리를 하나 갖다 주어라.”
번쾌는 방패 위에다 생돼지고기를 놓고 썰어 먹었다. 이를 본 천하의 항우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굉장한 장사로군. 한 잔 더 하겠나?”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 제가 어찌 술 몇 말을 사양하겠습니까?(斗酒不辭)”
번쾌의 이런 용맹으로 유방을 사지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노벨상과 퀴리 부인
세계 최초 여성 노벨상 수상자이며, 최초 노벨상 2회 수상자인 마리 퀴리(1867~1934). 그녀는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로 유학하러 간마리는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베크렐 교수의 지도로 방사능에 관한 연구에착수하였다. 여자의 몸으로 무거운 광석을 다루고, 광석을 녹이기 위해 석탄을 운반하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때, 제3국에서 온 실험실 후배를 도와준 프랑스 귀족 출신의 과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피에조 전기 현상을 발견한 공로로 190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피에르 퀴리(1859~1906)이다. 그들은 결혼하여 학문에 더욱 열중하였고, 같은 해에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퀴리 부인과 노벨상은 상당한 인연이 많았다. 본인의 2회 수상도 그러하거니와 그녀를 지도하던 베크벨 교수, 남편인 피에르 퀴리, 그리고 딸, 사위까지 모두 노벨상을 받았다.
특히, 1965년 유니세프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단상에 오른 라부제라는 사람이 그녀의 둘째 사위라는 것을 알고는 온 세계인 다시 한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인이라는 신분을 딛고, 명문인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자 교수가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인류학자들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20세기를 대표적인 학자로 가장 입지적인 인물은 마리 퀴리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쌍둥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쌍둥이 형제의 백만장자 성공기가 지난 2008년에 미국의 리얼 TV에서 ‘어메이징 피플’이라는 타이틀로 방송됐다. 방송에 따르면 존과 그렉은 키가 1m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쌍둥이로 이미 기네스에 올라 있었다.
형제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그 후, 존과 그렉은 남부 플로리다에 사는 양부모에게 입양됐다. 양부모는 고등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늘 형제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평범한 삶을 살던 존과 그렉은 17살이 되던 해 양부모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또 한 번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렇지만 형제는 좌절하지 않았다. 평소 갖고 있던 탁월한 유머 감각과 자신감으로 당당히 장애와 맞서 극복하는 쪽을 택했다. 그들은 해충 박멸 회사 ‘휴렛’을 차려 성공 신화를 써나갔다. 형제는 회사 광고에 직접 출연해 스스로 바퀴벌레가 되는 등 코믹한 분장으로 소비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 후, 승승장구를 거듭하면서 그들은 ‘싱크 빅’이라는 회사의 대표로 각종 학회나 집회의 대중 연설가, TV 제작자, 세일즈맨으로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존과 그렉 형제는 오늘날의 성공을 이렇게 이뤄냈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시련이 닥칠 때마다 ‘키로 사람을 평가해선 안 된다. 뭔가 안 되면 계속한다. 그러면 하나씩 풀린다.’라며 긍정적인 사고로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한다.”
수맥을 찾자
사람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그 시절의 기억을 되새겨야 한다. 그중 기억에서 가장 크게 자리 잡은 것이기억의 연상이다.
그러나 오감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기억에 가장 깊이 각인된다는 후각도 과거의 모든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현해내지는 못한다.
19세기 중반, 많은 사람이 너도나도 금광이 발견됐다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모여들었다. 이른바 ‘골드러시’였다. 부자가 되겠다는 꿈에 부풀어 모두 금광을 찾는 일에 매달렸지만, 대부분은 금 부스러기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17세 청년이었던 아무르도 실패의 문턱에 서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금광을 찾아 헤매다가 빈 물통을 쳐다보았다.
“계속 이 일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아, 물이라도 쉽게 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그 순간, 그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금맥이 아니라, 수맥을 찾자!’
이후, 그는 금맥을 찾을 때 사용한 도구로 강에서부터 물길을 만들었다. 그러고선 끌어온 물을 여과시켜 식수로 바꿨고, 병에 담아 산 위로 짊어지고 올라가 팔기 시작했다.
과연 그의 예상은 적중해 물을 사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골드러시가 끝날 무렵 그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서재필과 독립신문
1884년 김옥균(1859~1894)을 비롯한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급진 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사건을 갑신정변이라고 부른다.
그때의 일이었다. 조국의 개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서재필(1864~1951)은 큰 꿈을 품고 미국으로 가서 어렵게 공부를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리던 고국에 돌아온 그는 독립협회를 세우고 신문을 발간하기로 했다.
“신문을 만드는 것은 국민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고 막힌 귀를 뚫리게 하는 길이다.”
그러나 신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서재필은 고민에 빠졌다. 신문을 어떻게 만드는지 전혀 모르는 그는 생각다 못해 혼자서라도 신문을 만들기로 하고 혼자서 기사를 쓰고 활자도 고르고 편집도 하면서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독립신문》을 탄생시켰다.
막상 만들긴 했지만, 이번엔 신문을 파는 일손이 모자랐다. 서재필은 신문 뭉치를 겨드랑이에 끼고 직접 거리로 나섰다. 어떻게 하더라도 국민에게 민족정신을 심어 주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인 그였기에 《독립신문》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생각하는 정원
제주에는 올해로 개원 15주년을 맞은 분재예술원 「생각하는 정원」이 있다. 중국의 장쩌민(1926~) 주석이 이곳을 방문한 이후, 10여 년간 중국의 고위 인사 5천여 명이나 다녀갈 정도로 유명하였다. 이는 1995년 한ㆍ중 정상회담 당시 장쩌민 주석이 구경삼아 이 정원에 들렀다가 큰 충격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장쩌민 주석이 받은 충격은 바로 한 농부의 ‘개척 정신’이었다. 농부는 정부의 지원 없이 홀로 정원을 가꾸어 세계적인 기술로 분재 예술품을 탄생시켰다. 분재에 대한 열정을 승화시킨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불고 있는 한류 배우에 대한 열풍과 함께 새바람을 일으킬 만하였다.
최근 이 분재원의 15주년 기념식에도 중국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정도로 「생각하는 정원」은 여전히 주목을받고 있다. 하지만 장쩌민 주석은 또 다른 것에도 충격을 받았다.
바로 150~200년 된 감나무 분재였다. 3~5년마다 뿌리를 잘라 주면 감나무는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뿌리를 뻗는 생육 활동을 지속해서 한다는 것이다.
장쩌민 주석이 본국으로 돌아가 관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필생의 마음으로 뿌리를 내리려는 개척 정신을 지속하지 않으면, 나무의 근간인 뿌리가 썩는 것처럼 우리 중화 인도감나무가 가르쳐 준 이 범상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먼저 마음으로 뛰어넘어라
장대높이뛰기의 전설적인 스타 세르게이 부브카(1963~ )는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6회 연속 우승하였으며, 세계 기록을 서른다섯 번이나 갈아치운 선수였다. 은퇴 후 지금까지도 그가 세운 6m 14cm라는 세계 기록은 깨어지지 않고 있다.
‘인간 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장대높이뛰기 분야에서 성공한 그도 새로운 높이에 도전할 때면 언제나 수많은 좌절을 맛봐야 했다. 어느 날 훈련 중 실패를 반복하던 세르게이는 포기한 듯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코치에게 소리쳤다.
“도저히 못 하겠어요. 저 높이 걸려 있는 바만 보면 숨이 멎을 것 같아요.”
울먹이는 그를 바라보던 코치가 버럭 소리쳤다.
“세르게이, 나약해선 안 돼! 눈을 감고 먼저 마음속으로 바를 뛰어넘어 봐!"
코치의 야단에 정신이 번쩍 든 세르게이는 다시 장대를 잡고 눈을 감았다. 바를 뛰어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이내 불안감이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세르게이는 코치를 바라보며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그 후 그는 국가 훈장 수여식에서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먼저 마음속으로 바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높은 장애물 앞에서 좌절감에 휩싸여 포기해야만 하는 기로에 서 있다 면, 먼저 마음으로 장애물을 뛰어넘어 보시오.”
흙빛으로 변한 맥아더
훗날 미국의 원수가 된 맥아더(1880~1964) 장군이 웨스트포인트사관 학교의 교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미국 상원의 국방 위원들이 사관 학교로 시찰을 나왔다.
맥아더는 업무 보고를 모두 마치고 일행은 육군 학교를 둘러보는 차례가 되었다. 그러던 중 그들 일행을 장군의 방으로 안내하였다. 그 방에는 특별한 가구나 장식품도 없는 초라한 방이었다. 단지 야전 침대 하나만이 달랑 놓여있을 뿐이었다.
“여기가 제가 생활하는 방입니다. 이곳에서 일주일을 지내고 주말에만 집으로 갑니다.”
맥아더는 자기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를 목에 힘을 주며 야전 침대에서 자는 것을 강조하였다. 시찰이 끝난 후 만찬이 베풀어졌고, 여러 모양의 금 접시에 멋진 요리들이 담겨 나왔다.
만찬이 끝나고 모두 돌아간 뒤에, 금 접시 하나가 분실된 것이 드러났다. 먼저 국방 위원들을 의심한 맥아더는 서신을 보내 금 접시의 행방을 물었다.
며칠 뒤 정군은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만일 장군님께서 그날 밤 야전용 쇠침대에서 주무셨더라면 벌써 금 접시를찾으셨을 겁니다. 금 접시는 제가 모포 밑에 넣어두었습니다.”
편지를 읽은 맥아더 장군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페덱스의 설립자
미국의 예일 대학에 다니던 학생이 자전거 바퀴를 보고 화물을 편리하게 보내고 받을 수 있는 획기적인 운송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제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경제학 강의 기말 보고서로 제출하였다.
그런데 담당 교수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에게 C 학점을 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흥미로운 아이디어야. 하지만 C 학점 이상 받으려면 실현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학생은 몹시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27세에 그 아이디어를 토대로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 해 동안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래도 손해를 감수하면서 보완하고 보완하며 포기하지 않았다.
학생은 자기의 아이디어에 애착을 갖고 열정을 쏟으며 수차례 도전한 끝에 세계 210개 국가에 지사를 둘 정도로 대재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페덱스의 설립자 프레드 스미스(Fred Smith)이다. 페덱스는 세계 각지에서 일하는 직원의 수만 해도 14만 명이나 되었고, 하루에 3백만 건의 화물을 운송하고 있었다.
프레드는 남들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세계에서 인정받는 대규모의 회사를 일구어내었다.그리고 그가 남긴 명언은 아직도 유명하다.
「진주를 팔아서 지혜를 사라」
섭씨 13도의 냉동 화차
소련 철도국에 근무하는 직원이 그의 실수로 냉동 화차에 갇히고 말았다. 아무리 빠져나오려고 해도 안에서는 문을 열지 못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두드려도 모두 헛일이었다. 이제는 누군가 우연히 냉동 화차의 문을 열어 주는 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사람은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드디어 몸이 저리기 시작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상태를 벽에다 기록해 나갔다.
「아! 몸이 점점 차가워진다. 몹시 춥다. 그러나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온몸이 얼어 옴을 느낀다. 정신도 몽롱해진다. 아마도이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제발 누가 나를 도와주었으면…….」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연히 다른 직원이 이 냉동 화차의 문을 열었다. 그때 그는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체가 되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냉동 화차의 실내 온도는 13C °에도 불과했고, 냉동 화차의 공간이 넓어 공기도 충분하였는데 그는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는지 아직도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냉동 화차의 실내 온도가 13C °밖에 되지 않는데, 그는 왜 그렇게 춥다고 생각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