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에 올라가는 우진이와 아들 친구 두 명이 현관문을 나가려는 찰나였다.
“우진아! 위험한 곳에서 놀지 말고 안전한 곳에서 놀다가 와라. 알았냐?”
“예, 아빠.”
위험한곳을 피하라는 나의 말이 오늘따라 네 번이나 강조되었다는 사실을 나조차 잊고 있을 때 쯤, 집을 나간 지 삼십분도 채 되지 않아서 아들 친구가 초인종을 눌렀다. 벌써 시무룩해 보이는 아들 친구의 표정으로 보아서는 무슨 일인가 터지고 말았다는 직감이 스쳐갔다.
“왜, 그러니? 왜 벌써 왔어?”
나의 다급한 질문이 이어졌고 아이의 불안한 음성이 스피커를 울렸다.
“우, 우진이가 놀이터에서 넘어졌는데 못 일어나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아이를 앞세우고 뛰어서 아랫동네 놀이터에 다다랐다.
쇠로 만든 정글지대가 있었고, 미끄럼틀과 낙타호처럼 생긴 줄이 내려져있고, 꼭대기에는 철봉대가 미끄럼틀 위에 올려져있는,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한 놀이터였는데, 아이는 놀이터 중간 바닥에 앉아 죽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훌훌 털고 일어났어야만 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들은 꼼짝도 없이 그 추운 겨울바람을 다 맞으며 미동도 없이 손목만 부여잡고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서둘러 차를 가져와 아이를 태우고, 정형외과를 잘 안다는 아들 친구를 태우고 차를 몰았다. 간간히 죽는소리를 내는 아이를 내가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저렇게 아픈 표정을 짓는다면 분명히 팔이 삐었을 거라는 생각만 했지 팔뼈가 부러졌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차마 하지 못하였다.
아들친구가 안내하는 정형외과를 올라갔는데 아뿔싸. 토요일은 3시까지만 진료를 한다는 안내문만 빈 병원 앞에 허수아비처럼 세워져있었다.
결국 나는 동네에서 가장 큰 병원인 강남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바삐 응급실에 아이를 데리고 가 사진을 찍었다. 제발 힘줄이 놀라서 아이가 아파하기만 바랬다. 제발 아무 탈이 없게 사진이 찍혀주기만 바래고 또 바랬다.
그러나, 하늘은 내 의지대로 그렇게 되어주지는 않았다. 엑스레이 사진은 최악이었다.
어깻죽지를 벗어난 팔은 일자형 팔뼈가 댕강 부러져 심하게 서로 어긋나 있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내 팔이 부러진 것처럼 간담이 서늘해져 가고 있었다.
‘혼자서 얼마나 아팠을까? 저렇게 아픈데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들을 대견스럽다 해야 하나? 아니면 더 큰 사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응급실에서는 여기저기 전문의에게 통화를 하더니 결국 밤 아홉시에 수술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수술 결과에 대해 이의 없음’ 이란 서약서에 사인을 하고 서둘러 수술준비를 하였다.
“아빠! 엄마한테 전화하자 응?”
진통제를 맞고 나서야 아이는 엄마 생각을 하나보다. 가게를 하고 있는 엄마가 또 얼마나 놀랄지 모르는바 아니기에 확실하게 입원을 해야 하는지, 수술을 해야 하는지 확인을 받고 연락을 할 참이었는데 아이가 먼저 엄마를 찾은 것이다. 나 한사람으로는 아이가 지탱해 나가기에는 그 수술이란 단어가 그렇게 무거운 단어로 어린 아들을 짓눌렀나 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아빠! 수술하면 아파?”
“응, 많이 아플 거야. 참아야 해. 넌 할 수 있을 거야. 넌 용감하니까.”
“마취하고 하는 거야?”
“응, 마취하겠지. 전신마취할지도 몰라.”
“아빠! 전신마취 하면 좋겠어. 아프는 것 싫어요.”
아이는 전신마취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 모른다. 고통이 없다는 것이 아이에겐 좋을지 모르나, 전신마취의 부작용이 혹시라도 아들에게 전가될까봐 나로서는 섣불리 전신마취를 하라는 말을 의사선생님에게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간호사와 의사선생님은 수술 방법에 대해 내가 안심할 상황까지 친절하게 설명을 하셨다. 팔 하나 때문에 모든 질병검사를 다 해가는 행위가 싫어서 따져 물었다.
“아니, 팔만 고쳐주면 되는데 무슨 피검사, 심전도검사, 간 검사, 등을 다 하려 하는 겁니까?
그리고 팔이 부러졌으면 팔만 사진을 찍으면 되지 무슨 가슴사진을 찍는 거죠?”
팔이 부러졌는데 가슴사진을 찍어야 하는 논리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간호사는 시종일관 친절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 나갔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을 뿐,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이미 알기에 그저 긴 숨만 내 쉬고 있었다. (아이가 자주 아프기에 이런 검사를 수 없이 받았고, 매번 이상 없음 이라 나왔다.)
수술 시간까지는 3시간이 남았다. 나는 아이에게 나의 어릴 때 팔을 삐었던 사건을 이야기해주었다. 아들과 아들친구는 나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경청을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동네에도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날도 타잔을 보려고 동네 집을 물색하였다. 마당 한 가운데에 큰 감나무가 있는 형 친구 집에서 우리는 타잔을 보기로 하고 우르르 몰려갔다.
그 집 형이 우리를 반기는 가 싶더니 말을 했다.
“너희들 여기서 텔레비전 보려면 일 좀 하자. 고추 좀 따고 오면 보여줄게.”
우리는 타잔을 볼 욕심으로 그 형친구네 밭에 가서 고추를 땄다. 그러다가 심심한 차에 밭 근처 소나무에 있는 새알을 주으러 나무에 올라갔다. 그런데, 그리 높지도 않은 나무였는데 나는 그만 발을 헛 딛고 말았다. 순식간에 내 몸은 수직낙하를 하더니 ‘우두둑’ 소리와 함께 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별명이 호랑이이신 아버지의 호통소리가 생각났다.
남의 집 고추 따러 갔다가 팔을 부러져 왔다는 소리를 하면 그 집과 또 얼마나 싸움을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너무나 바보 같은 나는, 그 호통소리가 무서워 밤새 끙끙 앓으면서도 부러진 팔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버티고 났더니 팔은 이내 구부러진 채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곧게 펴지지가 않았다. 이제는 아프지도 않았다. 툭 튀어나온 팔꿈치의 뼈마디와 휘어진 팔이 이상했지만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쯤 되었을까?
그날은 부엌 아궁이 옆에 커다란 다라를 올려놓고, 따스한 물을 가득 담아 엄마가 목욕을 시켜주셨다. 엄마는 한참 때를 미시다가 휘어진 나의 팔을 보고는 기겁을 하시며 자초지종을 캐 물으셨다. 결국 나는 타잔을 보기위해 남의 집 고추를 따러갔다가 나무에서 떨어졌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그냥 산에 새알 주우러 갔다가 혼자 떨어진 것이라고 말을 하였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렸고,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시며 어린 것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렇게 아프면 바로 이야기해서 고쳐야지 여태 놓아두느냐며 난리를 피우셨다.
아버지는 턱없이 비싼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으신지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시더니 정읍에 팔 잘 맞추시는 집이 있다며 그곳으로 가자고 하셨다.
이미 한달이나 지나버려 꽁꽁 굳어서 휘어진 팔을 의사인들 쉬이 고칠 수 있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나 보다. 무허가로 시술하는 의사는 해보는데 까지 해보자는 말만 되풀이하셨다.
그렇게 병원에 한 달 동안이나 다녔을까? 처음엔 굽었던 팔이 차츰차츰 물리치료와 강압적인 팔 펴기 작전으로 마침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굳었던 팔을 강제로 펼 때의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었다. 어린 나는 핏물이 고이는 입술을 깨물며 그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때 그 후유증으로 팔꿈치 뼈 한 조각이 튀어나와 보인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나 같은 사람도 나라에서는 꼭 필요하니 군대에 가야 한단다. 그럼, 나 같은 사람도 나라가 불러서 군대에 가는데, 사지가 멀쩡한 몇몇 잘 나간다는 사람들은 왜 군대를 가지 않느냐 말이다. 그것을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내가 바보인가? 그들이 바보인가?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던 아들은 아빠처럼 고생하지 않고 빨리 낫게 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는 것 같았다.
“우진이 너 또 철봉에 매달려 타잔흉내 낼 거야?”
“아니요. 놀이터도 안갈 겁니다.”
이 일로 인해 혹시라도 철봉에의 공포심이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도 있지만, 적어도 위험한 놀이는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서서 다행이다.
밀린 주문을 마치고 부리나케 시간을 맞추어 다시 병원에 도착하여 병실 문을 열었는데 벌써 아이는 수술실로 가고 없었다.
그래도, 아빠의 격려 소리 한마디 듣고 수술을 받길 원했건만 눈물 흘리는 아내만 수술실 밖을 서성거릴 뿐 아이는 이미 수술대 차가운 침대에 누워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우진이 어머님! 울지 마세요. 수술 잘 될 거에요.”
안쓰러운 생각이 드는지 지나가던 간호사가 위로의 말을 던졌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진아! 네가 태어나던 날, 나는 지금처럼 불안한 마음으로 널 기다렸었단다. 네가 태어나고 환하게 웃으며 나오는 간호사의 얼굴을 볼 때 난 하늘을 날것만 같았어. 이제는 너를 전신마취라는 암흑 속으로 밀어 넣고 있구나. 제발 수술 잘 되어 다시 돌아오길 바란다. 우진아! 힘내야 해!’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성이는 아내의 어깨가 한없이 가냘 퍼 보였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만 했을 뿐........
예약된 두 시간이 훌쩍 지나도 아이는 수술실에서 나올 줄 몰랐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혹시라도 잘못되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전신을 휘어 감았다.
두 사람 모두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의사선생님이 나오셨다.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 걱정 마시고요. 이제 마취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다시 30여분이 지났다.
부러진 뼈에 철심을 박고 다시 지지대를 넣고 압박붕대를 감아서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아이가 나오고 있었다.
“물, 물 좀. 아이고, 배야!”
아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간호사의 말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물기를 적신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주기만 할 뿐 부모 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진통제 주사가 놓여지고, 아들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불 꺼진 병실 창문사이로 희끗희끗 차량불빛이 흔들리며 달아났다. 세상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이따금 스르르 문을 열고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간호사의 발자국만 느껴질 뿐 힘들고 길었던 하루가 그렇게 잠들어가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뜬눈으로 지새우다시피 한 나에게 아들이 깨어나 물었다.
“아빠! 새벽에 깨어나서 아빠 찾았더니 안보이던데 어디 가셨어요?”
“어디가긴 빈 침대에서 졸고 있었지. 괜찮니?”
“응, 하나도 안 아파요.”
“아빠! 수술실로 들어가 조금 있었는데 갑자기 아무 생각이 안 났어요. 그리고 눈 떠보니 입원실이네요?”
그랬다. 아들이 잠시 죽어있는 사이 수술은 시작되었고, 내가 사고 났을 때처럼 아이도 그렇게 아무 기억 없이 수술을 마치고 나온 것이었다. 그동안 마음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을 부모의 심정은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았다. 우리는 아이가 아무 탈 없이 깨어난 것, 그리고, 수술이 잘 된 것 그 자체가 소중할 뿐이었다.
아이는 그렇게 또 몇 주간의 입원생활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부쩍 성장한 새 어린이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우진아! 나중에라도 혹시 또 이렇게 아픈 상황이 되면 지체 말고 이야기 하렴! 거짓말은 해서 될 거짓말도 있지만 하면 안 될 거짓말이 훨씬 더 많단다. 그리고 지독하게 아프걸랑 엉엉 울어도 된다. 에고 기특한 녀석. (토닥토닥)”
첫댓글사년전 울뚱뚱이도 담낭제거술을 받았었는데 수술실로 들어가는 뚱뚱일 붙잡고 어찌나 울었던지요..하지만 그 뒤 6개월뒤 다시 간절제 수술을 받게되었는데 간절제수술에 비하면 담낭쯤은 감기정도에 지나지 않더군요..그 당시에는 정말 다신 못 보는 줄 알았습니다..수술실안으로 들어갈때 내손을 꼭 잡고선 "당신한테는
자식이 열 감기만 해도 부모들은 잠을 못자는데 갑작스런 사고에 수술까지....정말로 그날은 하루가 길었을 겁니다.......어쩔수 없는 이런 경험으로 인해 아이도 부모도 아픔을 느끼는 세상살이에 묻혀 한층 더 성숙해 가는게 아닐까요......우진아~~~~~~~~~힘내라 ^^
첫댓글 사년전 울뚱뚱이도 담낭제거술을 받았었는데 수술실로 들어가는 뚱뚱일 붙잡고 어찌나 울었던지요..하지만 그 뒤 6개월뒤 다시 간절제 수술을 받게되었는데 간절제수술에 비하면 담낭쯤은 감기정도에 지나지 않더군요..그 당시에는 정말 다신 못 보는 줄 알았습니다..수술실안으로 들어갈때 내손을 꼭 잡고선 "당신한테는
정말 미안해" 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뚱뚱이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 하네요..우진이도 큰 일을 치루었군요..그렇게 호되게 아픈일을 겪고나면 김작가님 말씀데로 한층 더 성숙한 아이로 다시 태어날 거라 믿습니다..우진이의 빠른 쾌유를 빌며...........
자식이 열 감기만 해도 부모들은 잠을 못자는데 갑작스런 사고에 수술까지....정말로 그날은 하루가 길었을 겁니다.......어쩔수 없는 이런 경험으로 인해 아이도 부모도 아픔을 느끼는 세상살이에 묻혀 한층 더 성숙해 가는게 아닐까요......우진아~~~~~~~~~힘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