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와 노래]
노란 봉투
늦은 밤 집에 돌아 와보니 야윈 아내 거칠은 손으로 편지가 왔노라고
내미는 노란 봉투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지 등줄기에선 식은 땀이 흘러 조심히 뜯어본 노란 봉투
" 귀하는 파견법에 의거 해고되었음을 통보합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창백한 형광등 불빛 눈물이 흘러 가슴에 흘러
주먹이 불끈 떨리네
세상아 이 썩어빠진 세상아 맘놓고 일할 권리마저없는 세상아 이 미쳐버린 세상아
뒤집어 엎을 세상아
병들어 누워계신 어머니 무슨 일이냐 물어오시네 한구석 겁에질린 딸아이
얼굴이 샛노래지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창백한 형광등불빛 눈물이 흘러 가슴에 흘러
주먹이 불끈 떨리네
세상아 이 썩어빠진 세상아 맘놓고 일할 권리마저없는 세상아 이 미쳐버린 세상아
뒤집어 엎을 세상아
사진은 방송사 비정규직노조 주봉희 위원장이십니다. 노란
봉투가 뭔지 아세요? 요즘은 사측이 해고시 메세지로 보낸다지요.. 참 좋은 세상입니다! 스피커 볼륨을 높이세요. 노래가 나옵니다.
곡명: 노란봉투 시: 주봉희 곡: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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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경이의 세상보기]
친구를 만나러 태백에 가다
사람과의 인연이란 질긴가보다 그 끈을 놓지 못해 4시간을 달렸다
안산터미널을 출발한 뻐스는 영동고속도로 달리다 원주에서 우회전 하여 제천, 영월, 고한, 사북을 지나 태백에 닿았다.
제천에서 태백까지의 국도변 경치는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수놓고 있다. 강원도는 역시 산과 물의고장이다.
술친구가 있어 이곳까지 왔다. 오지 않으면 자기를 무시한다는 협박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를 알게 된 건 98년 말쯤인 것 같다 건설노조 조합원이었다가 경기가
조금 풀리자 건설회사 사장이 되었다. 사업상 필요해서 인지는 몰라도 대학원도 다니고 정치인들과도 친분을 쌓고 병원장 학원장
종교인들과도 어울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결국 사업은 망했다. 하는 일마다 부실시공에 시달리고 임금체불을 다반사로 했으니
그런 결과는 당연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실업자이고 여러모로 망가져 있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대략 3가지 정도로 구분한다. 좋은가, 나쁜가?
선인가, 악인가? 동지인가 아니면 적인가 ?이다. 그 중에서도 우선순위는 좋은 감정이 먼저이다. 감정이 앞서서
이곳까지 찾아왔지만 친구에게 해줄 게 별로 없다. 그저 술이나 함께 마셔 주고 재기해서 당당한 사람으로 일어서길 바랄 뿐이다.
처음 찾은 태백이다 . 천제단이 있고 주목군락으로 유명한 함백산이 있다.
태백산맥의 중심지이다. 한강의 발원지가 있고 낙동강 발원지도 있다. 시내 중심에 있는 황지연은 1300리 낙동강 물길의
원류라 하고 하루 5000톤의 샘물이 아무리 가물어도 솟아나온다 한다. 비교적 잘 보존 되어 있다. 장맛비가 지나간
뒤라서인지 계곡의 물소리가 장쾌하다. 산과 물! 산은 하늘에 오르려는 그 기상 있고 물은 낮은 데로 흐르는 덕이 있어
좋다.
돌아오는 발길이 무겁다. 창가에 앉아서 이러저런 상념에 젖어든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풀리지 않은 여러 일들이 여행을 하고나면 개운해질 줄 알았는데 하나도 해결된 건 없다. 내일은 광주
쪽으로 일을 갈참이다. 육체적노동이 헝크러진 머릿속을 비우는 데는 최고의 보약일 것이다.
부처님 말씀 중에 숫타니파타가 생각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가라.
2005년 7월 안산노동인권센터 대표 송 일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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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식]
'7월'
안산노동인권센터 노동법 학습팀 구성
인권센터회원과 노동운동가 9명이 모여 노동법 학습팀이 구성되었다. 비일비재한
노동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학습을 통해 원칙적인 법의 테두리를 배우고 있다. 두 차례 걸쳐 진행되었고, 다음 주제는 ‘노동시간’이다. 수요일에
2주 간격으로 진행된다. 다음 모임은 8월 17일(수) 늦은 8시 인권센터 사무실에서 있다.
안산노동인권센터 이주인권위원회
간헐적으로 진행되던 출입국의 단속인 연일 계속되고 있다. 7월 27일
시화공단 4마 블록에서는 50여명의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이 단속구금되었다. 또한 안산 원곡동 ‘국경없는거리’에서도 주야 가리지 않고 폭력적인 단속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주노동자노조에서는 끊임없이 대시민선전전과 집회를 통해 현재 만연된 출입국의 폭력단속을 규탄하고 있다. 이에 지역시민단체들이
모여 대응방안을 모색 중이다.
열 번째 ‘안산이주노동자문화제’에서는 500여명의 이주노동자들과 주민들이 모여 현재 진행되는
폭력단속에 많은 관심을 표현했다.
7월 안산노동인권센터 회원 워크샵 - 대안사회를 향하여
22일, 매달 진행하던 회원 워크샵을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했다. 몇차례
회원 토론을 통해, 대안사회 관련한 주제로 정기적인 워크샵을 진행하기로 하고 첫번째 '방향'에 관련한 워크샵이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사회, 그리고 그 사회를 향해서 당이거나 노동조합이거나 여러 방면에서 현실활동을 하고 있는 회원들의 문제의식을 듣는 좋은 시간이었다.
앞으로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에, 당과 노동조합 그리고 인권운동, 국가권력에 대한 문제 등을 강사를 초대하여 듣고 토론하기로
하였다.
경기서부지역건설노조
지난 7월 5일 부천 두산 중공업 현장에서 건설일용노동자
유용만씨가 머리 정수리에 움푹 패인 상처와 뒷목에 상처를 입고 심장발작으로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당시 두산 중공업에서는 사고가
발생하고 6시간 동안 관련자들과 진술을 맞추고, 현장을 치우고 나서야 경찰에 신고했다. 더욱이 노동부에서는 사업주의 지병으로 인한 심근경색이
사인이라는 말만 듣고, 사인불명으로 부검까지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현장조사를 전혀 실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조가 7월 7일 몇
차례 현장조사를 요구하고 산재은폐 신고로 접수했음에도, "관련 규정대로 할 뿐이다"라며 현장조사를 거부하며, 사고발생 후 4일간이나 현장을
방치했다. 현재 부검 결과는 '직접 사인은 심근경색이나, 심근경색의 유인 요인 일 수 있는 외부 충격과, 머리에 난 상처가 외부충격에 의한
것인지 여부를 재수사를 하라'고 밝힌 상태이며, 안전공단이 8일 조사한 재해 조사 의견서에서는 '현장의 안전조치가 미비하여 낙하물에 맞았거나,
추락에 의한 재해일 가능성이 높고, 머리부위의 상처와 현장 정황으로 보면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고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라는 의견을 제출하고 있다.
현재 양대노총과 사회단체가 모여 산재은폐의 의혹을 밝혀내기 위해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활동계획을 갖고 있다.
더불어 경기서부지역건설노조 이태진 상담실장이 7월 12일 진행된 부천지방노동사무소 앞 집회에서 경찰의 표적연행되어 인천구치소에
구금중이다. 조사 중인 경찰은 전경 5명이 연행된 이태진 상담실장을 지목하면서 폭력을 진행한 당사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기비정규연대회의 출범
7월 21일 민주노총 경기본부에서 경기비정규연대회의(이하 '경비연')가
출범하였다. 현재 13개의 노동조합 및 노동자 자치조직과 4개의 정치조직, 6개의 사회단체가 연대단체로 참여하고 있으며, 총 8차례의 회의를
걸쳐 본조직 출범하였다.
비정규직 투쟁의 절박함을 지역에서 투쟁의 기획과 지원을 하고자 출범한 경비연은, 집행위원체계로 운영되며
집행위원 대표는 이부영 한원C.C노동조합 위원장이다.
DPI(장애인연맹) 경기지부 출범
7월 9일 창립총회를 통해 장애인 연맹 경기지부가 출범하였다. 지부장으로는
김병태씨가 당선되었고 지역의 새로운 장애인단체가 만들어져 어떤 새로운 목소리를 낼지 기대된다.
DPI는 싱가포르에서 제1회
세계대회를 가지고 출범한 국제적인 장애인조직이며,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규약 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국제적인 통합 장애인단체이다. 한국 DPI는
1986년 발족하여 DPI의 회원국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했고, 한국DPI는 현재, 서울과 제주, 충남, 대구에서 지역연맹이 활동 중이다.
710평화대행진
바다를 막아 땅을 일궈 오늘날 기름진 논밭을 만들어 놨더니, 미군기지로 쓰겠다는
정부의 말도 안되는 정책에 주민들은 "이 땅은 나의 목숨, 끝까지 지킨다!"며 저항하고 있는 평택 팽성읍 대추리에서 지난 7월 10일,
710평화대행진이 열렸다.
이 날 평화를 기원하는 대추리 주민, 시민노동단체, 학생 등 만여 명이 모였다. 경찰과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 많은 부상자들이 속출되었다. 또한 충돌과정 중에 많은 농작물이 훼손되어 안타까움은 더했다.
주한미군의 '동북아 기동군'
전략에 따라 동북아 지역에서의 전시나 위기 발생시 전력의 전시전환 등 신속한 대응하기 위해 지정학적 위치를 갖기 위해 평택이 선택되었다.
전쟁을 위해 생존권을 박탈해서는 안 된다.
민주노총 안산지구협의회 새 의장 선출
7월 8일(금) 오후 3시에 서부공단병원에서 열린 제5기 2년차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시흥안산일반노조 위성태위원장이 찬성 89%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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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선 영화? 살 같은 영화!] 데미지(damage)
루이 말(Louis Malle) / 1992
/ 111분
통속이
세습된 세계에 던지는‘루이 말(Louis Malle)’의 도발 - 관계의 개별성을 추구하다 맞은 비극성
7월, 후덥지근한 날이 계속되고 있다. 만져지는 것 모두가 끈적인다. 공기는 몹시 무겁게
느껴지고, 나는 고정된 채 열리지 않는 유리창을 통해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남자를 관찰하고 있다. 남자는 햇빛이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터벅터벅 걸어가 갯벌의 답싸리 밭으로 들어선다.
답싸리 밭은 도시의 사람들에게 잊혀진,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바다다.
남자는 그곳이 바다였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는 버려진 배들과 갈라지고 먼지가 풀썩이는 갯벌, 둔덕에 세워진 도시에서 수로를 따라 흐르는 까만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남자의 표정은 퍽 담담해 보인다. 그는 깊은 바다였던 자리에 저대로
날아와 밭을 이룬 답싸리 밭에 몸을 눕히고 하늘을 향해 자기 몸을 노출시킨다. 거리낌 없이 7월의 태양 아래 자기를 노출시키는 그는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에게 그의 행위는 일견 사물(일상의 욕망)과의 관계를 끊고 지내는 자들의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7월의
햇빛 아래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퍽 한가로워 보여 마치 답싸리 밭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 루이 말은 자신의 영화 「데미지」에서 창가에
선 스티븐을 자신의 아들과 그 아들에게 괴로움이었던 약혼녀, 그리고 자신이 함께 찍은 사진을 어떤 시각도 배제한 채 마치 그것이 하나의 정물인
것처럼 바라보게 한다. 담담하게 치즈를 썰며 회상에 잠겨있는 그의 모습은 사회적 관계를 알 수 없는 의아한 힘에 의해 잃고 청산한 자의 천천한
걸음으로 골목길을 올라오는 스티븐을 보여주고, 언뜻 언뜻 자기도 모를 열정 때문에 깜빡(?) 세계를 놓아 버린 자의 회한 이후의 '관조'를 보여
주기도 한다. 이때 스티븐의 움직임은 그의 존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정물인 것처럼 그려진다. 스티븐의 회상 또는 추억의
성질은 원한이나 애수적인 감정과 다르게 그려지고 그의 회상은 정적이고 고요하다. 늘 먼 하늘을 보고 있는 것처럼.
#. 영화에서 안나 바톤(줄리엣 비노쉬)은 퍽
도발적인 눈매와 조금은 냉정함을 가지고 등장한다. 그녀가 처음 화면에 나타나는 특징은 루이 말이 사용하고 있는, 계급으로 구성된 사회적 관계의
견고함에 도전하는 자신의 관점이 투영되어 있고, 안나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여자로 나타난다. 그녀는 외출할 때마다 작은 찬바람을
몰고 아열대 지방을 공격하러 나서는듯한 위태로운 몸짓으로 나서고, 그녀가 관계하는 공간은 거센 바람으로 출렁이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오히려 기쁜
것을 맞이하러 가는 자의 열정으로 나타난다. 인습에 의한 관계를 거부한 채 삶을 개별적인 관계 맺기로만 파악하는 그녀는 아무 원죄 없이 세상에
태어나 세계가 요구하는 질서와 도덕, 가치관을 부정하고 그것의 가치관을 의도적으로 부정한다. 영국 상류사회의 보수성 속에 안나를 정면 배치한
루이 말은 안나를 극단성과 비이성성에 내맡겨 스티븐과 그의 아들을 동시에 관계하게 하고, 스티븐을 광적인 열정의 공간으로 몰아세우지만 안나형의
사랑이 내뻗은 손은 처음부터 그 대상에게 제대로 가 닿지 않는다. 루이 말이 구상하는 개별적인 자아에 의한 독립적인 관계 맺기는 완전하게 목발을
짚고 나타난다.
『관계』 우호적이지 않은 정적(政敵)들에 둘러싸인 스티븐은
일상에서 탈출을 꿈꾼다. 그리고 어느 날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한 때 안나가 날려 보낸 유혹을 만나게 된다. 스티븐을 향해 안나가 날려 보낸
유혹의 성격은 루이 말이 의도한, 종속적인 관계의 청산과 개별적인 자아에 의한 관계 맺기가 그 중심인 안나 바톤적인 것으로의 성향이다. 그것은
스티븐의 조용하고 냉정한 성격과는 일치하지 않지만 한편으로 스티븐은 망설이지 않고 안나의 유혹에 응한다. 스티븐의 대담성은 '환기'되지 않는
일상에 대한 역겨움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스티븐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관계가 장기적으로
비밀에 쌓여질 것을 가정한 이후의 행복이기보다는 무모한 일탈에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어떤 생기와 파격이었다. 한편으로 스티븐은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지금의 관계를 청산(이혼)하는 다분히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안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들 관계에서 충분히 감지되는 우울의 느낌을
고스란히 떠안고 모험의 한가운데서 살아간다. 평화적인, 그러나 스티븐에게도 평화롭게 느껴졌을까 싶은 가정에 불길한 바람을 몰고 오는 말썽꾼(?)
안나는 관계를 가족과 종족으로 이어지는 종속성에 기반 한 보편성을 버리고 인간의 관계를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타인과 타인, 너와 나의 관계로
파악한다.
스티븐과 그의 아들을 동시에 관계하는 안나의 행동이 그것을 말해준다.
안나는 사회가 구성한 엄격한 룰과 모럴을 벗어나 자신 안으로는 확신에 찬 발랄함으로 사회적 합의인 가족 관계를 부정한다. 스티븐은 모순적이지만
부성(이 때의 부성은 스티븐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에서 나타난다)애를 지닌 채 안나를 품어내며 때로 자기중심적인 관계(서로에게 집중하는)만을
요구한다.
-아내를 떠나겠어. 그게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야. 안나는 스티븐이
매달리는 모습을 투정부리는 아이를 달래듯이 바라본다. 그리고 스티븐을 향해 당신이 원하는 것은 실상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당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라고 말한다. -못
견디겠어. 스티븐이 소리친다. 그러나 안나는 스티븐이 아침을 함께 먹는 것과 그와 함께 매일 밤을 보내는 것은 단지 그의 이기적인 욕심이고 삶의
질서가 요구하는 그 일련의 코드에 또다시 자기를 끼워 맞추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안나는 스티븐이 주장하는 것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다시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스티븐은 낙심하여 돌아서고 안나는 단선으로 늘어선 일련의 코드를 거절한 채 새로운 관계 맺기를 모색하지만 그녀가 의미를 두고
있는 관계는 인류가 살아있는 동안 다다를 수 없는 명왕성 밖의 얼음 행성 ‘1996 tl 66’을 향해 쏘아 올린 미사일 같다.
안나에게 스티븐은 자기애가 강한, 연애의 상대자가 누구라 할지라도
애정의 관계에 있을 때 상대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사랑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소유되었을 때 그것을 잘도 잊어버리고, 자신의
세력 안에 구축된 평화만을 가지겠다는 마치 철없는 아이로 보여 진다. 스티븐의 욕망은 루이 말이 의도한 그대로 지상에서 인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욕망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문제는 그 지배욕의 성취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안나』 관객들은 누구나 이 영화의 관계 설정에
의아해 한다. 스티븐은 영국다운 질서를 지키는 상류계급의 일원이다. 그를 지원하는 아내와 장인, 주변의 파워는 거세고 이 관계에서 안나의 존재는
매우 왜소해 보인다. 그녀가 스티븐을 정점으로 하는 관계에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자라는 직업을 통해 거의 가치 없이
발표되는 몇 줄의 정치적 글을 인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루이 말이 안나와 스티븐의 관계를 마치 성적인 충동에 의한 것인 양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은 그와 안나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지점이 이 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런데 루이 말은 왜 안나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스쳐가게 한 다음 화약고의 심지 같은 스티븐의 만남을 고집했을까?
영화가 진행 될수록 이 만남은 이해할 수 없는 의도로 비쳐지고 설명하려 해도
난감한 문제로 읽혀진다. 안나가 스티븐에게 부성애적인 사랑을 느낀 것일까? 그러나 안나는 대담하게 마틴의 가족에게 첫인사를 하면서 스티븐에게
다가서서 “내가 당신을 만나지 못한다면 왜 마틴과 결혼하겠어요?”라고 반문한다. 스티븐은 단지 안나를 깊이 바라 볼 뿐이다.
안나는 스티븐과의 관계에서 정치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그러한 욕망을
위해 몸 던지기를 시도한 것일까. 그러나 영화가 끝나도록 그녀가 신분 상승을 위해 몸을 던졌다는 흔적은 읽히지 않는다. 영화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안나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그 직업에 대한 견해를 밝히진 않지만 그 직업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영화의 어느 곳에서도 안나가 스티븐에게 어떤 목적을 위해 위험한 몸(?)을
날렸다는 흔적은 없다. 그렇기에 어떤 상승을 위한 몸 던짐의 구조는 처음부터 잘못 읽혀진 것으로 이해된다.
#. 루이 말의 데미지를 이해하기 위해 나에게 두
번째로 읽혀지는 것은 다소 특이한 그의 대화 방법이다. 그의 영화들에 익숙한 독자들은 그가 어떤 문제의 본질을 향해 나가는 데 있어 자신의
작품이 거칠어질 수 있지만 뛰어난 영상미나 사소하고 진부한 설명들을 생략하고 바로 문제를 향해 직진하는 파격적인 대화 방법을 자주 쓴다는
점이다.
자신의 직관으로 사물을 읽는 것이 자신의 미적인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 점을
인정하지만 대화중에 마치 기본 공식에 장난을 거는, 상대의 이야기를 실소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려는 행위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모럴에 대한 사소한
논쟁을 피하면서 인간이 소통해야 할 그 지점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충격을 감수하고 스티븐 안나의 관계를 배치한 것, 그의 대화 방법은 큰
놀라움으로 진부함을 한꺼번에 덮고 바로 사물의 본질과 만나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는 이 세계의 질서가 통속이 세습된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이 우리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방법은 때로 흑백 논리화된 비난을 받지만 복잡한 문제를 한 번에 넘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가 의도한 안나 스티븐의 만남은 보수적인 모럴리스트들의 거센 반발의 강도에 의해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스티븐 안나, 절연된 세계』 스티븐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일상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고요하게 침잠된 세계를 담담하게 살아간다. 그야말로 성공된 모든 것에서 손을 놓아버린 스티븐은
그에게 치명적이었을 아들 마틴의 죽음 이후에도 인생을 살아낸다.
밝은 햇빛이 창을 투과하는 작은 룸에서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붙여두고, 시장을 다녀오고 주요 일과를 회상으로 보내며 “우리는 알지 못하는 감정 때문에 사랑에 빠지고 그것의 여운(추억)으로 세상을
살아낸다.”고 말한다. 안나는 이전의 연인에게 돌아가고 스티븐은 어느 날 공항에서 아이를 안고 걸어가는 안나를 발견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이
파탄된 것에 항의하거나 원망 없이 그녀의 삶을 존재하는 그대로 승인하며 떠나보낸다.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낸 그는 열정의 순간에 세상의
관념(인습)에 의해 놓아진 끈을 관조하며 살고 있지만 그 삶의 끈까지 놓지는 않는다.
스티븐은 사회적인 모럴 때문에 자신들의 생을 옥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유로운 자들의 행위를 스캔들화 시켜 스스로의 도덕에 우위를 내보이려고 하는 것에도 불평하지 않고 절연된 세계를 안아 들인다. 루이 말이 정작
그려 보이고자 했던 것은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 오르는 스티븐의 모습과 삶의 태도, 삶은 영광이나 절망에 의해 유지되지 않고 그 자신의 내면적인
성찰이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정신의 힘에 의해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 영화의 뒷부분이 이상할 정도로 길었던 것은 이것을 언급하고 싶어 했기
때문인 것 같다.
#. 루이 말은 데미지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사회적인 관계와 모럴을 자아의 개별성과 정면충돌시키는 것으로 우리의 관계 맺음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놓여져 있는가를 살피는 한편의 수작(?)을
만들었지만 그의 작품이 지나치게 주제 전달에 집착한 나머지 매끄러운 영상을 보여주지 못했고, 주제 전달이 도식적이었다는 점은 피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미 사후의 세계에 살고 있는 그에게 흠이나 되지 않기를 바란다.
"몇 해 전 영화 평론가 a를 위해 씌어졌고, 두 후배의 리포터로
제출되었으나, A와 F라는 극과 극의 점수를 받았다. 이유는 상상에 맡김" - 도도네 숲 영화비평에 안목이 있는 회원 발견~! 도도네 숲님이
앞으로 이 꼭지를 맡아주시기로 했습니다. 박수~ 짝짝짝~!!!이 영화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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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사는 세상] "카풀 + 목적
"
처음 학교에 접수를 할 때 나는 장애인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장애인이라고 하면 잘릴 것 같아서였다. 야학인데 잘리면 가만히 안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예비 소집이 있던
날,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예비 소집 때도 잘릴까봐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하면서 앉아 있었는데, 교장 선생님 왈, “다 할 수
없으니까, 사람을 **명으로 추스릴 거예요” 하셨다. 떨어져도 어쩔 수 없지 뭐...하면서도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예비소집 다음날부터 수업이 있진 않았다. 수업 시작 날까지
나에겐 ‘교통수단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과제가 남아 있었다. 맨 처음엔 엄마 혼자서 자전거로 학교 사전답사를 가셨다, 어떤 곳인지,
거리, 걸리는 시간 그리고 내가 혼자 다닐 수 있는 곳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일하고 오셔서 바로... 두 번째 답사 땐 엄마께서 해야 할
일도 미뤄 놓으시고 같이 전동휠체어를 타고 나섰다. 얼마쯤 갔을까... 전동휠체어가 속도도 나지 않으면서 가지 않는 거였다. 그래서 충전이 안
되었나 싶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충전을 시켜놓았다. 결국 오늘은 버스에 걸리는 시간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버스승강장까지 걸어가 버스를 탄 후
내려서 학교까지 걸어갔다.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서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세 번째 답사. 바로 다음날 전동휠체어로는
얼마나 걸릴까? 엄마는 휴일을 반납하고 나와 함께 전동휠체어로 학교를 향했다. 1/3도 체 가지 못했는데 전동휠체어가 또 움직이지 않았다. 어제
충분히 충전이 되고도 남았을 텐데... 휠체어를 세워 놓을만한 곳도 없었고, 잠금 와이어도 미처 가져오지 않았고, 집에서도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휠체어를 학교까지 끌고 가기로 했다.
끙끙대며 앞치락 뒷치락 얼마나 왔을까? 봉고차를 탄 어떤 아저씨가
차를 인도 쪽으로 가까이 몰면서 “도와줄까요?” 물어왔다. 우리는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도 내리셔서 “어디가냐”고 도와주신다고 했다. 우리는
휠체어 때문에 또 “괜찮다”고 했다. “뒤에 실으면 된다”고 하시면서 휠체어를 이렇게 저렇게 만져 보셨다. 엄마가 “전동휠체어가 무거워서 실을
수 없다”고 하자, 그제 서야 그만 두셨다. 엄마가 “휠체어는 제가 밀고 갈테니까, 얘를 좀 부탁합니다”고 하시고, 휠체어를 끌고 먼저 집으로
가셨다. 아저씨는 나에게 학교 가는 길을 설명해주면서 친절하게 학교까지 데려다 주셨다. 그리고 집 앞까지 데려다 주셨다. 정말 고마웠다. 요즘
이런 아저씨가 어디에 있을까! 그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아마 그날 종일 길바닥에서 고생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학교 사전 답사는 끝났다.
전동휠체어가 있어도 말도 안 듣고, 고치는 것만 해도 12만원이나
들고, 거기에 속도도 안 나고, 깜박이도 없고, 수업이 끝나고 돌아올 때면 오밤중인데... 그 밤에 그것을 탄다는 것은 무리였다. 학교 근방은
허허벌판에 버스 타는 데도 없고, 택시도 서지 않는 곳이다. 걸어서 한참 나가야 택시나 버스를 탈 수 있다. 내 걸음으로는 하루가 걸릴
거리이다. 고민 끝에 교통수단을 정했다. 갈 때는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선택 했고, 올 때는 엄마가 수동휠체어로 학교까지 마중을 오시기로 했다.
그렇게 두려움과 걱정을 많이 하면서 야학 생활은 시작되었다.
처음엔 정말 누구에게 감히 도움 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못했고, 안
하고, 도움청할 엄두도 못냈다. 엄마가 두 번 마중 오시고, 세 번째 되던 그날도 수동휠체어를 끌고 마중을 오셨다. 휠체어를 타고 학교를 빠져
나오는데 어떤 아저씨가 “태워 줄테니 타라”고 하셨다(한 달 전까지 활동보조 해주셨던 분). 우리는 “휠체어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그러니
“휠체어는 실으면 되니까 타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날은 힘들지 않게 올수 있었다.
다음다음날 수업이 끝날 갈 때 쯤 교장선생님이 오셨다. 수업이 끝나자
앞으로 나오시더니 교장선생님 왈, “여러분 공부 잘 되요? 재미있어요? 열심히 한번 해보세요. 아셨죠? ^^ 참, 그리고 여러분! 차 가지고
계시는 분 계세요? 손 한번 들어보세요? 차 갖고 다니시는 분들께선 수업이 끝나고 나면 너무 늦고 차타기도 너무 힘드니깐 같은 방향인 분들이랑
말씀 나누셔서 같이 태워 가시고, 2학년 분들도 차 없는 분들이 많으니깐 같이 타고 가세요~ 아셨죠?” ㅎㅎ 이렇게 기쁜 소식이~!
그러나, 교장 선생님의 훈시는 그저 훈시일 뿐, ‘누가 날
태워주겠노!? 끝나면 자기 가기 바쁜데! 택시를 타기 위해 부지런히 교실을 나왔다. 엄마가 계속 너무 힘드시는 것 같아서... 택시를 타고
갈려고 엄마께 오시지 말라고 미리 말씀을 드려 놓았다. 요즘 팔이 너무 아프셔서 조금만 무리만 하면 밤새 끙끙 앓으시고 약 없이는 안 되신다.
부지런히 학교를 빠져나오고 있는데 며칠 전 태워 주셨던 아저씨가
태워주신다고 했다. 그래서 “택시 타는 곳 까지만 태워주세요...” 하니깐 고맙게도 집까지 태워주신다고 했다. 나를 차에 태우고 교장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셨다. 물론 나도 교장선생님과 인사를 했다. 집에 오는 길에 아저씨가 “이제 갈 때 시간되면 태워다 줄게” 하셨다. 그렇게 해서 그
아저씨 차를 계속 타게 되었다.
처음에는 너무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엄마 고생 안 시켜도 되고...
엄마도 처음에는 엄마가 해야 될 일을 아저씨가 해주시니까, 정말 가슴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꼬박꼬박 인사드리러 3층에서 1층 현관까지 까지
내려 오셨다. 그게 도리라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아저씨는 은근히 그 시간에 꼭 인사받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엄마가 미리 안 나와 계시면 그때
마다 꼭 “안 내려 오셨네...”, “안 보이시네...”, “ 안 내려 오셨나...?”, “이쪽으로 온지 모르시나?”, “아직 올 시간인 줄
모르시나?” 하시면서 얼굴빛이 싹 변하신다. 왜 인사하러 안 내려와 있느냐는 얼굴빛으로.
한번은 기어이 데리고 왔다고 집까지 올라 오신적도 있었다. 물론
우리에게 활동 보조의 역할을 해주시는 것보다 더 감사한 것이 어디 있겠냐마는 사람이 피곤해서 못 내려 올 수도 있는 건데! 그건 좀 너무한다
싶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 아저씨의 차를 탈 동안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항상 차가 집 가까이 갈 때 쯤 되면 어김없이 엄마에게
전화벨로 신호를 보내 엄마를 내려오시게 해야만 했다. 엄마가 그렇게라도 하자고 하셨다. 아저씨 차를 타는 이상 아저씨가 그걸 원하시니까. 간혹
기다리시다가 깜빡 잠이 드신 적도 있다. 그런데 그러실 때도 전화볠 소리에 깨어 바쁘게 내려오시곤 했다. 그럴 때 마다 꼭 이렇게 까지 해야
되는가 싶다!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연신 고개를 숙이고 또 숙이곤 하셨다.
아저씨 차를 보름정도 탔을 때 아저씨가 엄마 이름과 내 이름을
물으셨다. 그 다음에는 돌아오는 길에 “교회에 다니냐?”고 물었다. “안 다닌다”고 했다. “엄마도 다니냐?”고 물으셨다. “안 다닌다”고
했더니, “엄마한테 가서 교회에 가자고 아저씨가 말하라고 그랬다고. 했다. 집에 와서 엄마께 말씀을 드렸다. 칠색팔색을 하셨다. 처음부터 엄마랑
나는 사실은 이유 없이 도와주는 거는 아니라고 조금은 생각을 했었다. 엄마는 가기 싫다며 괴로워 하셨다. 나도 솔직히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다음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가신다고 하셨냐”고 물으셨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게 밖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가 내 신호를 받고 내려와 계셨다. 아저씨는 엄마를 보시더니
“교회에 가자”고 하셨다. 엄마는 “맘의 여유도 없고, 시간도 없다”하시면서 싫다고 하셨다. 아저씨는 “가보시면 틀릴 거다”고 하시고는 이내
돌아가셨다.
다음날 집에 오는 길에 “교회가기에 엄마는 몇 시가 좋으시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오전 11시가 좋으니까, 그때 가시자고 그래. 그러면 내가 집까지 모시러 온다고 그래라.” 이런 대화가 오가는 도중 집에
도착했고, 엄마는 여느 때처럼 마중 나와 있었다. 아저씨는 엄마께 “일요일 오전 8시 반에 오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한번 가게 되면 계속
가야 되고...” 하시면서 완강히 거절을 하셨다. 그런데 그런 대화가 오간 후, 우리는 몇날 며칠을 끙끙 대면서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머리를 싸 메고 걱정을 했다. 그놈의 차를 얻어 탔다는 것 때문에...
하지만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인사치레로라도 한번만 갔다 오기로 했다. 그것도 내가 억지로 가자고 해서... 엄마는 정말로 가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가기 싫은데 니 때문에
억지로 간다!” 하시며 짜증을 내셨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그 날도 엄마는 정말로 내켜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일찍부터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시간에 맞춰 집앞에 나가 있었다. 연락도 없이 40분이나 시간이 흘렀다.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한 통화 와 있긴 했다. 그래도 최소한 자기보다 연장자와 약속을 했으면 미안한 마음에 두 번 정도는 전화를 걸어봐 줘야 되는 게
아닌가?
원래 만만한 사람의 시간은 똥이라고 생각한건지, 우리 같은 사람에겐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라고 생각한건지!? 안 그래도 가기 싫어했던 엄마는 화가 많이 나셨다.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다고 하시면서 볼일 보러
가신다고 “니 혼자 갔다 온나” 하시면서 가셨다. 그리고 조금 있다 아저씨가 도착해서 “엄마는?”하고 물으셨다. “아까 까지 계시다가 볼일 보러
가셨어요.” 아저씨는 “교회에 볼일이 있어서 늦었다”고 하시면서 방금 내가 한 말을 무시하고 안 믿는 것처럼 혼잣말로 “집에 계시나?” 하셨다.
충분히 혼자 걸을 수 있는데 굳이 휠체어를 가져가자고 하셔서 실고
갔다. 차를 탄 후 “화 많이 나셨나 보네” 그러시면서 동네를 두리번거리시면서 연이어 두 바퀴나 돌았다. “어디 계실 텐데.,.”하면서.
그리고는 출발하셨다. 정말 집요했다. 그렇게 까지 할 줄은 몰랐다. 같이 안 가면 가기 싫은가 보다 하면 될 텐데,..
교회에 도착했다. 아저씨가 휠체어 타고 들어가자고 해서 타고
들어갔다. 충분히 혼자 걸을 수 있는데... 부목사님과 전도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가 “이 사람입니다” 라고 하니깐, “어서 와요,
할렐루야~! (그 아저씨를 보며)집사님 하시는 일이 잘 되실 꺼예요. 복 받으실 거예요” 하시며 기도를 하잰다. 나는 기도하기 싫어 눈은
말똥말똥 뜬 채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기도가 끝나자, 전도사가 “자주 나와요~”인사했다. 본 예배를 드리러 예배당에 들어갔다. 예배시간에
각 지역마다 사람들이 얼마나 나왔는지 CCTV를 통해 보여주었다. 안산이 나오자, 아저씨는 휠체어 탄 내가 잘 보이도록 CCTV 앞에 나를 밀고
나갔다가 안산이 지나가자 나를 제자리에 데려다 놓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지루한 예배시간이 끝났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저씨는 “데리러 올테니깐, 교회에 또 가자”고
했다. 이럴 수가... 차마 싫다는 말은 대놓고 못하고... 분명히 한번만 간다고 말을 했는데... 집에 도착해서 아저씨에게 돈봉투를 드렸다.
며칠 전부터 드리려고 했는데, 기회를 놓쳤었다. 기름이라도 넣으라고 말하면서 드렸는데, 아저씨는 끝내 안 받으셨다. 그 돈이라도 받으면, 우리가
맘이 좀 편할텐데...
교회에 다녀온 후, 아저씨의 태도가 왠지 조금 변한 거 같았다. 말로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얼굴빛이 나를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아저씨의 변한 태도는 며칠동안 나를 고민하게 했다. 고민 끝에 아저씨에게 우리의
생각을 말씀드렸다. “저희는 교회에 다니고 싶은 맘이 없습니다. 저는 그 시간에 글 한자라도 더 보는 게 급하고, 엄마는 몸이 아파서 그 시간에
쉬고 싶어 하십니다.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안 나가는데 아저씨 차타는 거 죄송합니다.” 그러자 아저씨는 “교회에 가자고
너를 태워준 건 아니다. 계속 태워 줄게” 참, 그럼 내가 교회에 억지로 가게 되었던 건 뭐지? 계속 태워준다고는 했지만, 썩 맘에 내키지
않았고, 정말로 그러길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 며칠 동안 타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했다. 그렇게 몇날 며칠을 고민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 끝에 우리 둘이 끙끙 앓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교장 선생님이 한 말이 생각났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저에게 얘기하세요.” 그래서 바로 다음날 전화를 드렸다. “차를 태워주시는 분이
계시는데, 제가 교회까지 갔다 왔고, 좋은 뜻으로 그러시는 줄은 알지만... 어쩌구저쩌구...” 있었던 일들을 말씀 드렸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은 좋은 뜻으로 그러는 거라며 내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으셨다. 교장선생님도 교인이라서 그러시는 건지...그래서 나는 교회 갈려고 학교에
다니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그제서야 내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그분이 계속 태워 준다고 했어요?, 그럼 일단은 타고, 안 태워 주겠다고
하면 나한테 얘기해요, 내가 다른 사람 알아 봐줄 테니까, 알았죠?“ 다른 분 알아봐 달라고 전화한 게 아니었는데... 어쨌든 이렇게 라고 얘길
하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해졌다.
요즘은 시험대비 특강 때문에 토요일, 일요일에도 수업이 있다.
아저씨가 요즘은 포도 농사 때문에 토요일 집에 올 때만 차를 태워주신다. 나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복자야, 니는 공부 왜하나? 영어 공부는
집에서 팝송 테잎이나 듣지!?” 황당하고 기분 나빴지만, “그래도 들어야 알죠!”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장애인이 공부해서 뭐하냐는 말처럼
들렸다. 그놈의 차 좀 태워준다고...
한 달 전부터 평일에는 다른 분이 나를 태워주신다. 다행히 그 아저씨
집이 우리 집을 지나쳐 간다. 처음엔 안 그러시더니 요즘에 서서히 “하늘과 땅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만들었고, 일요일도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둥,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 이야기를 꺼내신다. 아직 교회에 가자고 노골적으로 이야길 하지 않아, 차를 얻어 타고 다니고 있긴 하지만, 곧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싫니 좋니 말은 못하고 그저 표정관리에 신경 쓰면서 듣고 있다. 종교는 필요한 사람이 선택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전도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귀찮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냥 스스로 판단하게 하면 안 되나?
요즘은 도와준다고 해도 도움받기가 두렵다. ‘또 무슨 목적으로
접근하나...?’하는 경계심이 앞선다. 사람들은 도움을 받는 사람은 참 편하고 행복하고 좋기만 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복자씨는 인권센터 회원입니다. 비장애인
중심의 세상에 장애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매달 풀어 놓습니다. 요즘엔 8월 3일에 있을 검정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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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에 살기 위하여] " 내가 철들어 간다는 것이"
내가 철들어 간다는 것이 제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적당히 길드는
거라면 내 결코 철들지 않겠다
오직 사랑과 믿음만으로 굳게 닫힌 가슴 열어내고 벗들을 위하며
서로를 빛내며 끝까지 함께 하리라
모진 시련의 세월들이 깊은 상처로 흘러가도 변치 않으리 우리들의
빛나는 청춘의 기상
우리 가는 이 길의 한생을 누구 하나 안 알아주어도 언제나 묵묵히
신명을 다 바쳐 제자리 지켜 내면서
진짜 의리라는 게 무언지 참된 청춘의 삶이 무언지 몇마디 말 아닌
우리의 삶으로 기꺼이 보여 주리라
민중가요 노래패 ‘조국과 청춘’의 ‘새 세대 청춘 송가’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인권센터 웹진 ‘노동인권’에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어떤 내용으로 글을 쓸까?’ 생각하다. 오랜만에 본 친구를 보고 나서 든
생각과 위에 노래가사 내용이 비슷하게 글 서두에 적어보았다.
사회의 모순을 알게 되면서 운동을 시작한지 벌써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뭐 89년 처음 시작은 그저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을 학교에서 자른다고 해서 명동으로 종로로 뛰어 다녔던 것이 전부였지만, 그러했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서 나의 진로 선택에 큰 도움이 되었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했던 밑 걸음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대학교 입학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로 생각했던 고등학교 시절은
사회모순에 눈을 뜨는 속도에 따라서 저 멀리 사라지고 대학생이 되는 것 보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력부대라고 명명된 노동자로 살고자 다짐하고
91년 학교 졸업이후 구로공단에 취업하게 되었다.
뭐 이러한 삶을 선택했던 사람이 그 당시 나뿐만 아닌 당시 고등학교
때 운동을 접했던 친구들 거의 대부분이 선택했던 삶이었다.
처음 공장에 입사 후 적응하기 참으로 많이 힘들었다. 책을 통해서
키워왔던 위대한 노동자계급의 모습은 공장안에 없었다.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내 옆자리에서 일하고만 있었을 뿐, 세상을 확 뒤집어
엎어버릴 열정에 불타는 노동자계급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픽~!” 하고 쓴 웃음을 띨만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는
참으로 심각했다.
쌩 초짜 자충우돌의 노동자 시절이 흘러 이제 기름밥을 먹은 지도
14년이 지났다. 14년의 시간 속에 많은 것들이 변해 갔고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수많은 노동자의 피의 대가로 건설되었다는 노동자의 나라가
민중들의 손에 의해서 해체되었고, 영원하리라 믿었던 군사정권은 92년 김영삼을 필두로 노무현까지 민간정부가 들어선 대한민국. 이런 변화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더 이상 투쟁은 필요 없다” 하면서 많은 이들이 떠나갔다.
그렇게 떠나갔던 이들 중 한사람을 최근에 만나게 되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연락되어 반가운 마음에 술 약속을 잡게 되었고, 그 술자리에서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현재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거의 다 나왔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노동문제, 농산물 수입개방, 의료시장 개방, 교육시장 개방 등등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싸움들은 다 나왔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래도 한 시대를 치열하게 싸웠던 친구이기에 이야기가 통한다는 생각에
살아온 이야기가 끝난 후 이야기 주제로 잡았는데 결과는 영 아니었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던가? 친구는 자신이 현재 처해진
조건 속에 모든 현상을 파악하고 자신만의 해답을 내놓았고 한때 운동을 했다는 경험으로 나에게 점잖게 충고를 하는 게 아니겠는가?
“이 땅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며,
일일이 이들의 삶을 의식적으로 재단할 수 없다. 강제적으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재단하려 든다면 이것 또한 또 하나의 독재이며 행포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약간(!)은 나쁜 사람들도 존재하고 이들이 있기에 세상은 발전 한다. 그러니 그들을 너무 미워하지 말고 함께 공존하면서 살아가자! 너도
이젠 철 좀 들고 너무 세상을 삐딱하게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면서 살아가길 바란다” 하면서 그날의 자리를 마쳤다.
그 날 자리에서 간만에 만난 친구와 얼굴 붉히기가 싫어서 대꾸를 하진
않았는데, 속으론 ‘나도 이 땅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들은 다양하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방식을 축소하여 3가지 부류로
분류한다면 이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첫 번째 부류는 남의 일한 성과를 등쳐먹으면서 부를 누리는 사람들. 두 번째 부류로는 정말 성실히 일하면서
세상이 엿 같다고 한탄만 하고 그저 이 세상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모두가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변화 시켜 첫 번째 부류의 나쁜 놈을 혼내주고 그 혼자만 누린 부를 더불어 나누어 가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그리고 나는 네가 말하는 그렇게 완벽한 삐딱이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삐딱이’가 되기 위해 노력 한다. 그리고 네가 말한 적당히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게 철든 삶이라면 난 그냥 이대로 철부지로 사는 게 내 맘이 편하다.’
비록 그 날 말하진 못했으나 담에 그 친구를 볼 때 이 이야기를 잘
말해주고 ‘조국과 청춘’의 ‘새 세대 청춘 송가’를 들려주어야 되겠다.
가자! 해방공단을 향해서...!
*이번 달 <이 땅에 살기
위하여>는 반월공단의 우창정기에 다니는 노동자 김성태 회원의 글을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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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의 일기장] "미술관
일기"
추운 겨울, 떠나지 못해 숨죽이면서 한숨을 토해내던 k의 창백한
얼굴이 떠나지 않는다. 나에게 기억되는, 어두운 골목길을 서성이는 이들과 새벽의 맑은 기운으로 길을 나서는 이들의 영상은 바로 그의
얼굴이다.
"그때도 겨울이었어. 그 사람이 바람처럼 나섰는데 ‘아, 저 바람을
어떻게 이기려고 나가나...’ 하고 한참 쳐다보고 있었어. 그런데 그 사람, 찬바람을 꼭 빛처럼 따뜻하게 여기는 것 같았어." "저
햇빛처럼?" 내가 경인미술관 마당에 자글자글 쏟아지는 6월 햇빛을 가리키자 j가 자기 뜻을 잘 보여주는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더." "음, 그랬구나." 나는 혼잣말을 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관 까페에 쏟아지는 6월 햇빛에 고마워하는
것처럼.”
돌이켜보면 나는 k가 잎처럼 가벼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길 위의 영혼들은 이끼가 마르지 않는 골목길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다(k의 경우처럼). 좋은 시인 이성복은 가엾은 길 위의 영혼들이
가정에 분란을 만들고 가출한다고 불평하지만, 나는 시인인 그가 어울리지 않게 몇 번에 걸친 가출에 실패한 영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선배인 k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가? 하지만 그가 나를 편애했다는
것은 지금도 잘 느끼고 있다. 그는 존재의 무게를 그림자처럼 가볍게 만들었고, 그의 애인은 그토록 가벼운 실재감을 안고 살아가는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우연하게도 며칠 전 인사아트에서 몇 개의 그림을 걸어놓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스쳤다(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그녀를 잊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닫히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자기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먼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금방, 그녀가 한 시절 만났던 길 위의 영혼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개의 담배를 피우고 그녀가 자리를 떴을 때 나는 그녀의 떨림이 있는 그림들을 훔쳐보았다.
어지러운 마음의 선들이 작렬하듯 흐르고 있는 한 지점에 무리지은 k와
그녀, 그리고 우리를 닮은 이미지들이 무수히 별처럼 떠 있었다. 지향점이 없는 선과 색들의 천지 속에 드러난 k의 얼굴. 나는 그녀의 그림을
통해 이미 지상을 떠나버린 k가 마음에 들었다. 골목길의 영혼들과 k가 사랑한 흔적들이 거울의 표면처럼 명징하게 표현된 선들. 나는 팸플릿으로
얼굴을 가리고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그녀에게 가벼운 목례를 보내고 돌아섰다.
이제는 모두 그녀를 스쳐갔을 존재들의 음영이 새로운 흔적으로 남지
않길 바라면서...
뱀발 : 한 때 그림 그리던 친구들과 어울렸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왠지
당면한 과제와는 먼 이야기인 듯한 느낌이 드네. 톱톱 -.-
*이번 달 <회원의 일기장>은
이승택 회원(=도도네 숲)의 글입니다. 경기서부지역건설노동조합 조합원이시기도 합니다. 아주 유능한 목수랍니다. 요리 솜씨 또한 일품입니다.
요즘엔 노조에서 상담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화이팅~! 사진은 인권센터 봄 야유회 때의 모습. 얼마 전에 긴 머리카락을 컷해서 단발머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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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참! 크게 반응이 없는 듯한 웹진.. 수고했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