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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 (1) - 이동국
해방 직후 종로1가 보신각 건너편에
"마로니에"다방이란 곳이 있었다.
아주 가끔씩 아다리가 되면 유성기 음악을 들을 수 있던곳.
농삿일이 지겨워서 엄마 몰래 형님 장가밑천을 훔쳐 야반도주한 나는
서울역앞 양동시장에서 야바위한테 다 털리고
일주일만에 거지신세가 되었는데.
막상 어디 갈곳이 없어 동가숙 서가식하며 배고픔을 달래다가
우여곡절끝에 일제 스피카 수리점 점원이었던 "권" 아무게를 만나
청소도 해주며 비새는 지붕도 고쳐주며
꽤나 오랫토록 친하게 지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때 가끔씩 그 친구가 주인 몰래 야매로 스피카 고쳐주고 받은 돈으로
그 마로니에 다방을 함께 갔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열 여덟살의 "춘자"라는 레지 아가씨가 얼마나 예뻣던지
급기야 권 아무게하고 삼파전이 벌어져서 피튀기는 싸움까지 했었다.
나는 집수리공으로 아직도 이모양 이꼴이지만
그는 스피카 수리에서 TV도 만지더니
컴퓨터 내장에 무슨 도깨비 집어넣는 기술까지 배워
아예 직원을 많이 두고 큰 회사를 차려서 아주 재미가 좋은 모양이다.
근데 최근에는 그때 "춘자"한테서 배운 실력으로 모 까페 DJ까지 겸하고 있다니
참 대단한 놈이다.
그래도 친구라고 그가 뮤직박스에 있을때 몰래 한번씩 가면
마담이 따라주는 국화차는 참 일품이었다.
더 기가 막힌것은 그 마담이 어쩌면 그렇게 그때 그 "춘자"를 빼어 닮았는지ㅉㅉ..
그녀를 볼 때면 나도 몰래 가슴이 콩닥거린다.
하지만 어쩌랴, "권" 아무게 땜시 눈치만 봐야하니.(그때처럼 또 쌈할 수는 없고..)
어제는 큰맘먹고 갔었는데 마담은 안보이고
귀떼기 새파란 레지하나가 껌을 딱딱 씹으며
커피를 그냥 턱 던지는 꼬락서니가 눈에 거슬렸지만
돼레 나이많은 설움에 가슴이 철렁했다.
"춘자" 생각은 간절한데 "함" 뭐시라는 마담은 간데없고
오늘도 그냥 찻값만 날렸구나.
애구 누가 소식 아는사람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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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 (2) - 권순모
사람 살아가는게 우여곡절의 연속이던가.
벌써 20년도 훨씬 지난 시절의 이야기인것을 다시금 그 아픈 추억을 끄집어 내는
이 아무개가 한없이 미워진다.
꽤재재한 모습의 이 아무개가 날 찾아온 겨울날.
약간의 돈을 부모몰래 뚱쳐 야간도주, 일확천금의 꿈이 야바위꾼의 손장난에 물보라로 변하고
며칠을 추위에 떨고 굶주린 후 겨우 내 거처를 수소문에 찾아왔을때 그 초최한 몰골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했다.
그래도 고향친구라고 찾아온 이 아무개를 외면할 수 없어
눈치밥 먹고 있는 신세지만 내가 눈치를 먹고 밥은 이 아무개를 먹여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고 엉덩이가 툭 튀어나와 걸음거리가 천상 오리인 스피커가게 주인 아저씨
변씨에게 사정사정하여 겨우 같이 기거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었다.
그 괘팍한 성격의 변씨 아저씨가 별 실리도 없는 친구를 받아들여 준것은 그동안 객지에서
어떻해서든 성공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해 온 나를 신뢰했기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여전히 숙식제공에 스피커 수리기술 전수라는 미명아래 급여 한푼없이 사람을 부리고
있었고 난 그런 악덕 주인의 비위를 맞출수 밖에 없는 한심한 처지였다.
한창시절이었기에 숫가락도 녹일만큼 식욕은 왕성했고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고
어쩌다 방귀라도 끼면 공갈빵에 바람 빠지듯 허기를 느껴 좀처럼 일을 할 수 없을 지경
이었는데 그 꼴꼴난 밥공기를 친구와 나눠먹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1주일만 굶기면 성인군자도 양산군자가 된다고 했던가.
오로지 친구와 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끼니해결을 위해 죽기보다 싫었던 알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어느새 난 주인 실력을 뛰어넘을 만큼 손재주가 늘어있었고 누구나가 착실한 권군이라
칭찬이 자자했으니 어느 누구도 내가 주인몰래 스피커 고쳐준 돈을 딴주머니에 넣는 것을 알지
못했다.
뭐든 처음 한번이 어려웠지 두번 세번은 일도 아니었고 난 어느듯 죄책감도 못느끼고
주인돈을 내 주머니에 넣고 있었고 그 돈은 점점 단위가 커가고 있었다.
이 아무개도 천성이 착한 친구라 신세지는것은 몹시 꺼려하여 집안에 도울일이 있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타고난 손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비가 와서 천정이 새면 어느새 지붕위에 올라가 망치질 몇번에 깜쪽같이 고쳐놓았고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나무조각을 집어다가 의자도 만들고 책상도 만들고 옆에서 보고
있으면 마치 마술을 부린다고 생각할 만큼 그 손재주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운명의 장난처럼 우리의 우정에 금이가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박건의 마로니에 공원 노래를 들을때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그 다방
그 길에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보신각 건너편의 마로니에 다방.....
아! 갑자기 춘자의 그 해맑은 웃음이 생각난다......
<오늘은 급한 일이 생겨 마무리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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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 (3) - 권순모
우유빛 피부에 초롱초롱한 눈망울, 반달 눈썹, 앵두같은 입술.
나와 이아무개가 그 다방을 출입한 것은 매 끼니 배불리 밥먹을 수 있고 주머니에 돈이 좀 쌓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커피맛이나 다방안의 분위기에 대한 긍금증이 아닌 오로지 춘자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이 아무개와 난 약속이나 한듯이 마로니에 다방을 찾았다.
컴컴한 분위기 어두컴컴한 조명, 한쪽 모퉁이에 전면이 유리로 만들어진 작은방. 안락의자.
다소 생소한 분위기의 다방에 들어선 우리는 이내 주눅이 들어 어리둥절하고 있을때 저쪽에서 아가씬지
아줌만지 구별이 어려운 여자가 다가와 자리를 권하고 우린 거역할 수 없는 중압감에 어정쩡한
모양새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시작한 춘자와의 만남, 처음엔 셋이서 만났지만 머지않아 나와 춘자가 만나고
이 아무개도 춘자를 따로 만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변씨 아저씨 몰래 수입금이 생기면 춘자 주머니에 찔러주기 바뻤고 이 아무개 또한
그당시 구두닦이통과 아이스케키통을 만들어 짭짭할 수입이 생길때면 어김없이 내 눈치를
보면서 춘자를 만났고 적지 않은 돈이 춘자에게 건내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삼각관계가 서너달 이어졌다. 아니 그때까지는 그게 삼각관계인줄 알았었다.
시간적으로 나보다 여유로웠던 이 아무개는 수시로 마로니에 다방을 들락거렸고 그러던
어느날 아침 예외없이 다방을 다녀온 친구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다방안에 유리로 만든 작은방은 뮤직박스였고 그 상자안에는 기생오래비 같이 생긴 최군이
몇시간씩 들어가 있었고 까만 원판처럼 생긴 것을 수시로 바꿔가며 그때 마다 느끼한 목소리로
마이크에 대고 주절거리는 소리를 들은적이 있었는데 간밤에 그 최군과 춘자가 도망을
간 것이었다.
그런줄도 모르고 나와 이 아무개는 돈이 생기면 춘자를 내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경쟁하듯
춘자에게 갖다 바쳤고 춘자를 통해 그 돈은 최군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나와 마주할때도 항상 최군이 있는 곳을 바라볼수 있는 자리에 춘자가 앉았던 이유도...
처절한 배신감, 하늘이 노랗다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고 ...
그 참담하고 암담한 기분을 친구도 같이 느꼈을 것이다.
이내 난 변씨 아저씨 가게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주는 돈이 없는데 다방을 들락거리고 춘자에게 돈을 쓰는 것이 곧 변씨 아저씨 귀에 들어가
모든 것이 들통나 버렸다.
이 아무개가 춘자를 찾아 떠난다고 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난 배운게 도둑질이라 조금 남아있던 돈으로 스피커 수리점을 차렸고 물론 행여나 춘자가
돌아올까 하는 기대감에 마로니에 다방에서 머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에게 기회가 세번 온다고 했던가? 어느날 우연히 TV에서 끈없는 브라 선전을 보면서
그래 바로 이거다! 그날 부터 난 끈없는 스피커 만들기에 전념했고 우여곡절끝에 탄생한
무선 스피커가 대박을 터뜨리는 바람에 적지 않은 돈을 만들 수 있었다.
전해 들은 바로는 이 아무개도 타고난 손재주를 십분 발휘해서 나무로 만들던 아이스케끼통을 양철로
만들더니 갑자기 우후죽순처럼 중국집이 들어설 때 철가방을 만들어 때돈을 벌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은 건설업 간판을 걸고 꽤 큰 규모의 도로공사, 토목공사를 맡아 재미를 보고 있다는
얘기도....
춘자를 만났다는 얘기도, 춘자가 최군과 이미 갈라선 사이였다는 얘기도, 이 아무개가 춘자를
거두어 주었다는 얘기까지 전해 들었었다.
기다리던 춘자는 오지않고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지라 난 어느날 사모다방을 오픈하고
그럴듯한 뮤직박스도 만들어 옛 추억을 되살리며 나이에 맞지않는 DJ를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에도 한 20년은 젊어진 춘자를 만나게 되고 자세한 내용도 모른 채
우리 다방의 마담으로 채용을 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왜 그 여자 아니 춘자딸이 왜 최씨도
이씨도 아닌 함씨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 아무개는 그 사연을 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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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 (4) - 이동국
세상엔 비밀이란게 없다.
오랜 세월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건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그때의 기억으로
온몸이 확 달아오를 때면 나도 별수 없이 입이라도 열어야 속이 좀 가라앉기 때문이다.
춘자가 사라지고 맥이 탁 풀려 탁베기 두 사발을 단숨에 들이킨 내가 달려간 곳은
최 아무게가 살았던 마포 전차종점 부근이었으나 그곳에서도 그놈을 만날 수 없었고
며칠을 수소문하여 영등포 장작시장 어디까지 쫒아갔으나 역시 허사였다.
나는 거기서 생을 접어야 할것 같은 괴로움에 정말 처절하게 울며 여러날을 보낸 끝에
마음을 다잡고 잊으려 했었던 기억이 아직도 머리에 진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세월이란 참 좋은 것이었다.
곧 죽을것 같았던 그 그리움도 삭여지고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당할자 없다고
제법 그럴싸한 현장들이 아다리(선택)가 되서 돈버는 재미에 빠져들어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당시 서울에서 제법 큼직한 하꼬방들은 내가 짖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고
마포에서 창덕궁까지, 동대문에서 답십리까지의 신작로공사는 정말 내게 결정적으로
꿈을 이루게 해준 큰 공사였다.
그러나 재미난 생활이란 오래가지 못했다.
마포종점 철거공사가 한창이었던 어느날 현장 점검을 나갔던 나의 시야에
기막힌 모습을 한 사나이가 들어왔던 것이었다.
얼른 봐서도 그가 최아무게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피가 꺼꾸로 흐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를 불러세웠고 다짜고짜 뺨을 한대 때린 다음 에야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나의 이런 행동에 어리둥절했던 그는 나를 알아보았고
내가 이 공사장의 오야지(주인)란 사실에 더욱 놀라워했다.
그는 춘자와 살고 있지 않았다.
살림을 차린지 꼭 7개월만에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설상가상으로 갖고 있던 돈을 투전에서 날리는 바람에 앞길이 막막해지자
애는 서대문 보육원에 맡겼고 춘자는 그 잘난 몸매와 얼굴을 무기로
고속버스 승무원에 취직하여 돈벌이에 나섰는데,
처음 몇개월 동안은 집에도 잘 들어오더니 이틀씩 사흘씩 외박이 길어지고
급기야는 영영 돌아오지 않더란 거였다.
알아보니 비행기를 조종하는 파이픈가 파이롯인가 하는 사람하고 눈이 맞아
아주 영영 서울을 떠나버렸다는 거였다.
다 잊은줄 알았던 춘자 생각도 잠시뿐 이 허탈감은 또 무었인가.
차마 말하진 않았어도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 꼭 춘자를 찾아야겠다는
또다른 꿈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혼자서 살고 있으니 아이도 찾을 길이 없고 당장은 살아야겠고
그래서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겠기에 이렇게 나왔다는 것이다.
분통이 터진것은 잠시 뿐, 어쩔수 없이 그래도 아는 낯에 그럴 수 없어서
나는 최를 데리고 다니면서 건축일을 가르쳤는데 제법 가진 솜씨가 있어서 척척 해냈다.
무엇보다 최는 예술적인 안목이 탁월해서 상가건물이나 다방, 공연장같은 걸 맡기면
새로운 아이디어로 멋지게 공사를 마감해주곤 했다.
얼마 가지않아 그는 독립을 했고 지금도 그일 하나로 세상을 재밌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특히 마로니에 다방에서 배운 그 실력으로 요즘 인터넷까페를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뭔가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모르긴 몰라도 고전음악감상실 같은걸 차린다는 소문도 있다.
나는 지난 유월에 그를 종로 인사동 어디에서 우연히 만났었는데
그가 내쏟은 여러가지 정보에 너무나 놀랐었다.
그 옛날 보육원에 맡겨진 딸은 당시에 춘자가 맡기면서
함아무게로 이름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고
생업에 바빠서 그것을 바로 잡지도 못하고 살아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춘자가 1년에 한번씩 몰래와서 보고 갔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30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 딸을 보기위해 서울에 한번씩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춘자의 사는곳을 물었더니 자기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고
딸아이가 알기는 하는데 좀처럼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욱 기가막힌 것은 춘자가 사는 미국 시카고 어디에를 또다른 한국남자가 다녀간 적이 있다는
것이었고 아마도 그것이 권아무게가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세상에 나만 모르고 이것들이 정말 무엇을 하는건지.
그러고 보면 사모다방 그 마담을 소개 시켜준 것이 춘자였단 말인가.
그리고 춘자를 빼어닮은 함마담이 춘자의 진짜 딸이었더란 말인가.
진작에 모든걸 포기하고 살려 했었지만 이건 정말 해도해도 너무한다.
아아! 하지만 어쩌랴.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고 모든걸 다 포기하는 수 밖에....
그나마 매일 함마담을 보는것으로 낙을 삼아야지.
함마담이 그래도 저 어미와 성질이 달라서 여간 싹싹하지 않아.
손님이 뜸할 때 특별히 챙겨주는 밀실에서의 안마는 정말 잊을 수가 없어.
아암, 못잊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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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 (5) - 권순모
함양이 내가 차린 카페에 처음 모습을 들어내었을때 난 심장이 멎는 줄만 알았다.
비에 젖은 그녀의 모습은 천상 춘자였고 체형 또한 너무나 똑 같았기에 처음 춘자를 본
그 모습과 오버랩 되면서 내 나이 먹은 것은 망각한채 바로 그녀가 춘자인 줄만 알았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것 저것 물어보았으나 좀처럼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살아온 지난날을 짐작할 만한 옷차림, 밝지 않은 표정, 정에 굶주린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외로움 정도를 느끼고 더 이상 물을 수도 없었다.
명색이 마담이지 워낙 나이도 어렸기에 새끼마담 역활과 레지역활을 겸하고 간간히 배달도
다니며 일인 삼역의 역활을 나름대로 잘 해나가면서 점차 얼굴 표정도 밝아졌다.
신청곡을 간간히 틀어주면서 차를 서빙하고 돌아가는 함양을 보면서 몇번씩이나 착각을
할만큼 함양을 춘자를 빼다 놓은 듯 닮았었다.
특이한 점은 매달 셋째주 수요일은 만날 사람이 있다면서 나갔다가 3시간쯤 후에 아무일
없었다는듯한 얼굴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흐른 후 궁금증이 발동하여 하루는
외출하는 함양을 몰래 미행했고 함양은 나름대로 경계를 하긴 했지만 결국 나를 발견하지
못한채 덕수궁을 돌아 후미진 골목길에 있는 가은찻집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난 10여분을 기다린 후 중절모를 깊이 눌러쓰고 선그라스까지 낀채 찻집으로 들어갔고
함양을 찾아 멀찌감치 두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내 나이또래의 중년의 남자. 약간 머리가 벗겨지고 덤직한 체구에 점버차림의 남자는
어디선가 분명 많이 본듯한 모습이었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가 누군지 알수 없었다.
두사람의 얘기는 한시간이나 진행됐고 마침내 중년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설 때 쯤 함양도
손수건으로 눈을 훔치며 따라 일어섰다. 내 쪽으로 돌아서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너무나도 변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분명 마로니에 DJ 최군이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아구창을 날리고 싶은 욕구와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
하는 함양의 울먹이는 모습이 일순간 투영되면서 한동안 온몸에 경련이 일만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나를 엄습했다.
그제서야 함양이 최군의 딸 아니 꿈에도 그리던 춘자의 딸이라는 사실과 함양이 우리 카페에
들어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직감하며 나의 무딘 감각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춘자는 어디가고 춘자의 딸이 나와 함께 한 울타리에서
생활하게 되었단 말인가? 저 최군을 무얼하며 춘자는 정녕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한편 무선스피커의 대박으로 제법 큰돈이 들어온 다음 난 다른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80년도 초반이었던가 컴퓨터가 무슨 음식인지 모르던 시절 파이팅이라는 가명을 쓰는 친구가
찾아와 대박을 터뜨릴 아이템이 있으며 난 그저 돈만 대면 3년안에 열곱 스무곱의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제안을 했고 그 친구의 진지함에 확신을 가지고 컴퓨터 공장을 차리게 되었다.
미국의 애플컴퓨터라는 회사에서 만든 것을 당시 청계천( 그당시만 해도 청계천에서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나올만큼)에는 국내 기술자란 기술자는 모두 모여있었고 그들의 손기술은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었다.
당연히 도면하나 없는 애플컴퓨터를 그들은 불과 1년도 안되어 고스란히 복사를 해 놓았다.
당시 500만원(지금 가치로 적어도 5천만원) 하던 오리지날 애플컴퓨터와 동일한 기계를 60만원에
만들어 냈고 외형은 깡통을 펴서 만든 상태로 조악하기 그지없었지만 성능 만큼은 나무랄데가 없었다.
시판이 되고 가격을 200만원이라 책정했지만 컴퓨터는 날개 돋힌듯 팔려나가 파이팅의 말대로
3년만에 무려 30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 회사를 당시 춘자와 관련된 사건이 없었다면
아직 내가 운영 하고 있을을테고 지금쯤은 소위 국내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서 회사를 인수한 이 아무개는 승승장구하여 지금 삼보XXX란 이름으로
그룹으로 성장하였다.
이아무개에게 비밀로 한채 시카고에 살던 춘자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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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 (6) - 제니퍼
벌써 강산이 세번 변하고도 가슴밑바닥에서 응어리져 꿈틀거리곤 하던 그 옛날에
그 기억을 되짚어볼때마다 난 두손을 불끈쥐고 쥐어짜는 듯한 가슴을 움켜잡아야했다.
그때 내 나이 꽃다운 20세때,
경상도 깊은산골 완행열차도 마지막인 종착역에서 태어나 오직 돈을 벌어보겠다고
야반도주 보따리 하나만 달랑 가슴에 안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해 어렵게 얻은 첫 직장인
'마로니에'에서 시작한 마담시절,
음악다방을 꽉 메운 손님들에게 겉으로는 친절하게 십분 직업의식을 발휘하면서도
속으로는 모두가 늑대다! 도둑놈이다! 내 스스로 최면을 걸었건만 늘 그 자리에 잊지않고
찾아주는 어수룩한 두 사내에게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던건 사실이었다.
이마가 빤질빤질 기름기가 번드르르한 사내들틈에서 얼굴은 천사표같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어눌한 경상도 말씨하며 첫눈에도 이들이 나와 같은 고향쪽 어디에서 무조건 돈벌러 상경한
촌놈들 출신이란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동병상련의 아픔과 말씨로봐서 같은 동향출신이라는 이유로
나는 어느날부터 주인몰래 주문하지도 않은 계란후라이까지 살짝 넣어주곤 했었다.
사람의 정이라는게 세월이 지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아야하는건가?
두 사람사이를 방황하며 잠을 설치던 불면의 괴로운 밤은 이어지고 아침이면 잊기위해
간밤에 마신술로 방바닥을 네발로 엉금엉금 기면서 돌아다녀야 했으니...
권 아무개를 선택하자니 이 아무개가 눈에 밟혀 미치겠고 이 아무개를 선택하자니
권 아무개가 불쌍해 미치겠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슴을 쥐어뜯어야 하는
선택에 기로에 서서 땅속으로 꺼져버릴까? 아니면 하늘로 솟아버릴까? 궁리하던중
몇달전부터 게슴츠레한 눈으로 유리박스안에서 D.J로 일하던 최 아무개의 시선이
너무 부답스럽다고 느끼고 있던 중 어느날 영업을 끝내고 술한잔 하자고 하기에
그래 어차피 나도 술을 한잔 마셔야 잠을 청할 수 있는지라 단 둘이 대포집에 가서
두툼한 돼지고기 몇 점놓고 막걸리 몇 사발을 둘이서 들이켰다.
두 사람중에 한사람도 선택할 수 없는 기구한 운명이라면 차라리 최 아무개하고
결혼해버리자. 비록 몸은 떠나지만 마음만은 진정으로 너무 사랑하기때문에 떠난다는
사실만은 알아다오.
여자는 버들잎같아서 어느나무에든 꽂아놓는대로 움트고 산다고 하지않던가?
나도 한동안은 모든것을 잊고 현모양처로 현실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다보니 최 아무개의 머리가 훌러덩 벗겨지고 없는게 아닌가?
더듬 더듬 촛불을 켜고 다시한번 보고 또 보고 확인했건만 아 글쎄 D.J하느라 유리박스
안에서 폼재며 쓸어올리던 긴 장발은 바로 가발이었던것이다.
그러나 한번 맺은 인연을 반 벗거 머리라는 이유로 쉽게 헤어질 수가 있는가?
그래 내가 이해하고 살자. 그것도 음악다방에 오는 손님들 팬관리 잘해서 처자식 먹여
살릴려고 저러는게 아니겠는가? 반 벗거 머리라도 좋다. 돈이나 많이 벌어와다오...
이래저래 반 벗거머리와 산지도 몇달이 흘렀는데 어느 날부터 퇴근이 늦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떤날은 숫제 외박을 하는날이 하루 이틀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아이를 들쳐업고 미행을 하기 시작했다.
바람도 초장에 잡아야지 중독되면 약도 없다싶어 살금살금 뒤따라 갔더니 두 사람이
다정하게 어깨를 두손으로 감싸안고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했더니
옛날에 마담시절 내가 잠깐 데리고 일하던 귀때기 새파랗던 레지 박양이 아니던가?
저 여우같은 박양이 비가오면 외롭다고 눈이오면 쓸쓸하다고 온갖 아양을 떨며 반 벗거인줄도
모르고 살살 녹였나본데 난 기가막혀 허탈한 발걸음을 그냥 돌릴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말이지만 난 뭐 반 벗거머리가 좋아서 살았는 줄 아나?
갈테면 가라지. 나도 이 세상이 다 싫고 어디론가 정처없이 가 버릴란다.
그 다음 후편은 계속 이어집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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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 (7) - 권순모
가을이 끝나갈 무렵 셋째주 수요일 그날도 어김없이 외출에서 돌아온 함양이 꼬리가 길다는
것을 느겼고 그 꼬리의 끝자락에 매달려 온 남자를 보고 다시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최군 아니 함양의 아버지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우두커니 문앞에 서 있었고 함양은 내 눈치를
보면서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카페 문을 일찍 닫고 최군과 마주한 나는 소주를 물마시듯 마셔대는 최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죄없는 냉수만 축내고 있었다. 그렇게 두병의 두꺼비를 순식간에 해치운 최군은 뭔가 각오를
한듯 미워할 수 없는 해맑은 눈빛을 나에게 던지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춘자와 살림을 차린지 처음 겪었던 사건은 머리때문이었다. 하지만 춘자는 현명한 여자였기에
이미 엎질러진 물에 더이상 연연해 하지 않았고 최군은 그런 춘자가 한없이 고마워 더욱
열심히 돈을 벌었다. 마로니에 뿐만아니라 시간을 쪼개어 두곳 세곳의 DJ를 맡아하며 그시절
종로바닥의 젊은 여인들의 우상으로 군림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살콤한 신혼살림과 행복한 미래를 위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던 최군에게
어느날 종로 화신백화점 1층에 위치한 화신다방의 레지로 일하던 박양이 최군에게 작업을
걸어왔다.
빼어난 미모에 늘씬한 몸매, 누가봐도 호감이 가는 모습에 가정을 지켜야한다는 최군의 확고한
결심도 봄햇살에 얼음녹아내리듯 서서히 풀려가고 급기야 두사람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한집살림도 어려운 처지에 두집살림이 어디 쉬우랴. 게다가 박양은 다니던 다방도 집어치우고
아주 구둘장을 끌어안고 들어앉았고 독서, 음악감상, 수예등등의 우아한 생활을 고집하게되고
결국 모든 생활비는 최군의 몫으로 돌려져 버렸다.
어느듯 춘자의 배도 남산을 닮아가고 산달이 가까워 오면서 최군은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지금처럼 로또가 있어 인생역전을 꿈꿀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주위에 돈을 빌릴만한 친척도
없었기에 유일한 희망은 작은돈 놓고 큰돈먹는 도박판 뿐이었다.
그동안 나와 이아무개가 갖다바친 돈을 춘자는 나름대로 비축해 두었는데 최군이 이돈을 들고
하우스에 들어간 것은 5살짜리 꼬마가 300만 화소짜리 최신형 핸드폰을 들고 동네 양아치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가는 것만큼이나 결과가 뻔한 일이었다.
이후 최군의 생활은 말그대로 막가는 나날이었다. 매일 술에 쩔어지냈고 그나마 열심히 하던
DJ 일도 소홀해졌으며 몰골은 초최해지고 결국 춘자와 잦은 부부싸움으로 이어졌다.
아이가 태어나고 살림이 점점 힘들어지자 춘자는 더이상 앉아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고속버스 안내양으로 취직을 하고 최군과 박양과의 관계까지 알게된 다음 더이상 최군에게
바랄것이 없다는 결론과 함께 최군이 술에 골아떨어져 자고있는 틈을 타 집을 나오게 된다.
당시 고속버스 안내양은 지금의 스튜어디스 만큼이나 인기직종이었고 웬만한 뽀다구로는
감히 근접할 엄두도 내지 못했었지만 춘자에게는 쉬운일이었다.
합숙을 전제로 취업이 된터라 아이를 기를 수 없게 되었고 수소문끝에 당시 서대문에 있던
작천보육원에 맡기고 겨우 한달에 한번정도 아이를 볼 수 있었다.
빼어난 미모의 춘자는 고속버스 안내양 중에서도 금방 눈에 띄어 한진고속의 또다른 이아무개
의 눈에 들게되고 사무직으로 옮긴다음 이아무개와 재혼을 하게되고 그가 해외지사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 해외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간간히 필리핀에 산다, 독일에 산다 정도의 간단한
연락이 있었지만 시카고로 갔다는 얘기를 들은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했다.
최군은 백방으로 딸의 행방을 찾았지만 춘자는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2년전쯤 춘자에게서 전화가 왔고 딸이 어디에 있다는 얘기를 해주었고 그래서 함양을 만나게
되었다는 얘기를 끝으로 최군의 이야기는 끝이났다.
작천보육원에 있던 아이가 20여년 동안 어디서 어떻게 자랐는지는 춘자만 알고 있다고 했다.
함양을 만난 반가움도 같이 할 수 없다는 현실 때문에 최군의 또다른 고민거리가 되고
이 아무개와 나에 대한 얘기는 춘자에게 들어 잘 알고 있던 터였고 내가 새로이 카페를 열었다
는 소문을 듣고 함양을 나에게 보낸 것이었다.
(애구구 오늘도 시카고를 못가네 담에 가야쥐~~~
시카고 갈 여비 마련할 동안 이 아무개는 권모 여인과의 사랑스토리나 공개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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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 (8) - 이동국
특급 태풍 메기가 막 지나간 들녂을 바라보고 섰노라면 지나온 50여년의 발자취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그중에서도 영영 끊어지지 않는 몇 가닥 인연의 끈을 발견해내곤 도무지 생이란 무엇이며
"나"라는 인간은 또 무엇인가를 되뇌이지 않을 수 없게된다.
첫사랑 춘자와의 하룻밤 인연이 부질없는 물거품으로 끝나버린 후 여자에 대한 애착도 미련도 모두
팽게쳐버리고 오로지 나의 길만 꿋꿋이 가겠다고 다짐하며 살아온 나인데.
세월은 그렇게 호락호락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청계천 복개공사가 한창이던 그해 여름 얼마나 더웠던지, 서빙고에
얼음이 동날 지경이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광나루로 뚝섬으로 멱감으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하얀 양철통에 아이스케키 장사가 한 여름철 나기는 최고였던 시절이었고 함부로 몸을
드러낼 수 없던 시절이라 여자의 몸을 구경할라치면 광나루 백사장이 최고였던 때였다.
나도 별 수 없이 더위도 식힐겸 구경도 할겸 해서 뚝섬엘 갔었다.
정말로 인연이란것은 묘한것이었다.
내가 시발차를 끌고 간 탓일까,주위에 차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그때에 내차의 출현은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검은 안경을 끼고 웃통을 벗어던진체 팬티바람으로 물속에 몇번 들어갔더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대충 목욕은 그렇게 끝이 났는데 아까부터 유난히 내게로 눈길을 주던 늘씬한 아가씨 세명이 어느새
내차 옆에 와 있는게 아닌가.
종로 명월관에서 왔다는데 차좀 태워 달라는 거였다.
권이라고 밝힌 아가씨는 정말 한눈에 반할정도로 예뻣고 그 중에서도 아마 왕초 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사장에서 보았던 그의 몸매는 춘자이래 최고로 느껴질 만큼 늘씬해서 갑자기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는데 그 아가씨가 은근히 미소를 지으며 부탁을 하는통에 나는 물불을 가릴것 없이
그들을 태워주었다. 송 뭣이라고 밝힌 아가씨는 덜컹거리는 차안에서도 연신 내 어깨를 주물러줘서
나는 정말 흡족한 피서를 즐긴셈이었다.
나의 사무실은 화신백화점 뒷편에 스무평 남짓한 블록조였는데 오후에 촐촐할 때면 권양이 주전버리할
수 있는 강냉이와 부친게, 때로는 삶은 달걀을 가져오기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권양은 거기서 새끼마담을 하고 있었는데 휘하에 10여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당시 잘나가는 주먹파들하고도 꽤 통하는 사이였었다.
그녀는 나의 순수한 감정에 매료되어 매우 심각한 갈등에 놓여 있다고 실토할 정도로 나에대한 애착이
강했다. 물론 나 역시 그녀의 활달한 성격과 늘씬한 몸매에 이미 마음이 넘어간 상태여서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으나 문제는 다른데에서 불거져 나왔다.
사업이 날로 커지다 보니 돈이 많이 벌리기도 했지만 더 큰 공사를 따내고 처리 할려니 막상 나의
재력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까닭에 돈많키로 소문난 종로전파사 주인 변아무게한테 변통을 할수 밖에
없었는데, 그놈이 권마담을 잔뜩 눈독들이고 있었던 거였다.
그렇다고 내가 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왠지 모르게 돈을 포기하는 것은 춘자를 슬프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이미 사라진 약속이었지만
나는 그걸 꼭 지켜야 한다는 일념이 가슴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어정쩡한 상태에서 권마담과의 불꽃놀이는 일년 이상 지속되고 있었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사람장사 속터져서 못하겠다고, 모처럼 돈많은 영감을 맞춰 놓으면 잘생긴 봉자란
애가 무슨 홍장군이 백마를 타고 왔다는둥 하며 빵구를 내서 할수 없이 자기가 시중들어야 했다는둥,
말 잘듣던 송뭣이가 요즘 삐쳐 지낸다는 둥, 새로 온 금인지 은인지 하는 애가 인기는 있는데 돈은
생각않고 젊은 놈만 좋아한다는 둥,저번 백사장에 같이 갔었던 예린지 하는 애는 주먹들만 좋아해서
힘들다는 둥... 내가 무슨 저의 인생상담자처럼 이러고 덤벼들때는 탁베기로 온몸을 녹여야만
했다.
그래도 인연이 인연인지라 나는 그녀의 뒷바라지를 소홀히 할 수는 없어서 기성금 탈때마다 몇십만원씩
찔러주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마침 유신정부가 들어 서고 사회 정화운동이 벌어지게 되어 제일 큰
타격을 받은 화류업계가 일차로 정리되는 수난을 겪게 되었는데 그 권마담은 이때가 기회다고 독립을
선언했고 시흥 넘어 안양 어디에다 새로운 주점을 열게 되었다. 그 주점을 차릴때 최가에게
연락해서 내장을 손봐주라 했었는데 최신식으로 꾸며서 그 당시 안양 일대에는 그런 집이 전무한
상태여서 아주 짭짤한 재미를 볼 수 있었다.
그 일로 인하여 변사장과의 관계가 다소 소원해진게 사실이었으나 다행히 회사 운영자금에 큰 타격은
없이 흘러갔고 나와 권마담은 다시금 안정적인 관계를 누릴 수가 있게 되었다.
내가 이러한 권마담과의 관계를 소상히 밝히는 이유는 요즘도 아직 쓸만하게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를 함부로 껄떡대는 자가 있다는 정보를 불식시키고 보기는 아주 얌전해도 왕년의 주먹들과 대치할
정도의 여왕벌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키어 망신 당하는자가 없도록하기 위함은 물론이다.
그녀는 의리도 있어서 나의 첫사랑 춘자에 대한 같은 여자로써의 처지를 내게 역설할 정도였고 되레
춘자의 인생에 배울 점이 많다며 관련되었던 사람들을 자기 주점으로 불러내서 인생강의를 하기도 하는
정말 통큰 여자였다.그 때문에 그의 주점에 권아무게도,최가도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변사장까지 다녀 갔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녀의 여왕벌 기질은 여전해서 주위에 늙은 중년부터 귀때기 새파란 아이들까지 발걸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는 것인데 그 때문에 나는 나이도 나이인만큼 예전처럼 자주 가기가 거북한것 또한
사실이다.
아!
그나저나 그 첫사랑 춘자는 만날길 없고 인생은 저만치서 꾸벅대고 있는데.
도무지 한평생을 한을 삼고 살아가야하는 이 기구한 운명을 그누가 알아주리요.
오늘도 미쳐버린 이 발길은 오로지 춘자를 그리며 또다시 함마담에게로 흘러가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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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 (9) - 권순모
최군에게서 춘자의 마지막 연락처를 전해받은 나는 한동안 허탈감에 일손을 놓아야 했다.
이미 다 지난일에 미련을 털어내지 못하고 남의 아내가 되어있는 춘자를 향한
끊임없는 한가닥의 사랑 나부래기가 나를 한없이 깜깜한 막장속으로 밀어넣는 듯 했다.
파이팅과 시작한 사업은 탄탄대로를 달렸지만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는 법.
당시 전두환 정권 초기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의 위세에 어는 누구도 사업을 하는 한
정부의 무리한 정치헌금에서 빗겨갈 수 없었다.
반월에 위치한 제2공장도 풀가동할만큼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제3, 제4 공장을
짓기위해 은행에 대출서류를 제출했는데 그게 청와대의 그물에 걸려들고 말았다.
황폐한 바닷가 어귀의 불모지를 개간하고 그곳에 공장을 짓는 것은 지역발전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 주민의 일자리 창출과 그들에 의해 씌여지는 돈으로 주위 상권이 발달하며
전체적으로 한단계 발전한 도시로 발돋움하는데 생산공장만큼 좋은 사업체도 드물다.
그런데 공장허가를 내어주는 조건으로 20억의 뒷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이고 나라의 위정자들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지금도 윗것들을 불신하는 불씨는 그때부터 타고 있었다.
그당시 20억 지금으로 200억의 가치가 있는 돈을 이제 막 정상괘도를 달리기 시작한
회사에는 엄청난 부담이었지만 파란기왓장 밑에서 놀던 놈들한테는 나의 구구절절한
설명은 그저 귀대기 새파란 다방레지 아가씨의 말보다도 말발이 서지 않았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도 할겸 춘자도 만날겸 주섬주섬 몇가지 옷가지만
가방에 쑤셔넣은채 미국을 향해 출발한 것이 큰 실수였다.
미국 거래처의 레이건 사장의 도움으로 춘자의 집주소 한장 달랑들고 무턱대고
시카고 공항을 밟았지만 청와대 사람들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치자금에 혈안이 되어있던 그들은 나의 출국을 알고 부랴부랴 나를 범죄자로 몰아 미국
이민국에 통보하였고 난 미국땅도 밟지 못한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밖에 없었다.
오자마자 남산 뒤쪽 후암동 근처에 있는 으슥한 곳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다 당하고
3일을 꼬박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한다음 비몽사몽간에 강압에 못이겨 하얀 종이에
지문을 찍은 기억이 나지만 그것으로 회사가 고스란히 남의 손에 넘어갈 줄은 몰랐다.
그날 이후 나의 사업파트너였던 파이팅도 만나볼 수 없었다.
그 또한 파란 기와집 애들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갔다는 얘기만 들었을뿐.....
화무십일홍이라 그 많던 재산, 그 잘나가던 사업체는 남의 손의 넘어가 버렸고
난 그저 사모다방의 뮤직박스를 지키는 신세로 전락했다.
유일한 낙이라면 함양의 모습에서 춘자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는 시간들...
그것마저도 언제부턴가 발길을 들여놓기 시작한 이아무개위 게슴치레한 눈초리와
내 눈초리가 동일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점점 그친구 오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기구한 운명의 장난인가?
춘자를 놓고 줄달이기 했던 지난날.....
20여년이나 지난 후에 다시금 춘자의 딸을 놓고 비슷한 생각에 빠져드는 우리....
다른면이라면 난 이미 쫄딱 망한상태이고 이아무개는 잘 나가는 건설업체 대표라는 사실.
간간히 다른 카페에서 DJ 일을 하는 최군이 가끔 나이든 사람이 찾는다며 오래된 LP판을
빌리서 잠시 잠시 들렸다 가고 부녀간의 간단한 포옹이 눈에 자주 밟혔다.
특이한 점은 번쩍이던 최군의 머리가 언제부터인가 다른 모습을 변하고 있었는데
처음엔 그저 새로 산 가발을 썼나보다 생각했지만 이내 중국에서 밀수한 101을 바르고
놀랍게도 머리가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집에 있는 박양의 권유로....
지난해 10월쯤인가.
춘자와 한동네 살았다는 손 뭐라는 여자에게서 전화를 받은것이.....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손모씨를 만난건 그 다음날이었다.
아담한 체격에 예쁜얼굴의 아 아줌씨는 신랑 잘만나서 사랑을 듬뿍 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만큼 행복해 보였다.
어찌나 말을 말갈스럽게 하는지 재잘거리는 입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그러나 춘자에 대한 얘기는 조만간 한국에 들어온다는 얘기와 미국의 레이건이란
사람한테서 내가 춘자를 찾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래서 이번에 나오면 한번
날 꼭 만나고 싶어한다는.... 그게 다였다.
꿈에도 그리던 춘자가 한국에 왔다. 나와 만날 약속도 일정에 넣고....
늦은 가을로 줄달음쳐 가는 시절이라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았다.
날 알아보기나 할까?
어떻게 변했을까?
처음 만나면 무슨 얘기부터 해야하나?
(춘자 살아온 얘기, 함양이 자라온 환경에 대한 얘기를 먼저 듣고 다음얘기 계속....
어짜피 춘자는 낼 아침이나 나올테고 만번이 오늘중 달성될 모양이니 그쪽이나
신경쓰야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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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10) - 제니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마음잡고 살아볼려고 했던
최 아무개의 배신에 치를떨며 또 한번의 좌절앞에 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남자를 떨쳐내버리고 혼자 있고 싶을 정도로 황량한게 비록 오늘뿐이겠는가?
온몸을 숨기고싶을 정도로 심한 정신적 탈수에 시달린 다리는 휘청거렸고
등에 매달린 아이와 함께 한강에 뛰어들까 하고 생각을 했지만 아무죄없이 태어난
핏덩이가 무슨 죄가 있으랴 싶어 마음을 다시 돌려먹고 터벅터벅 걸으며
다시한번 이를 악물고 살아보자고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한진XXX그룹에 어렵게 얻은 취직자리는 순전히 처녀행세를 한 결과였고 내 과거를
철저히 비밀에 붙였기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이를 박양과 바람이 난 최아무개에게 아버지라고 믿고 맡길 수도 없었고 할 수 없이
작천보육원에 맡기고 한달에 한번씩 살짜기 들여다보고 돌아올 땐 눈물콧물 찍어내며
어느정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가고 있을때 늘씬한 키에 핸섬한 또 다른 이 아무개라는
사람이 수시로 내 책상에 사탕을 한 아름씩 놓고 가곤 했다.
그는 무슨 아이들 장난감 비행기 조종을 하는지 어쨋든 열흘씩 일주일씩 한번씩
비행을 다녀올때마다 그때만 해도 귀하디 귀한 외국산 화장품을 하나씩 사다주었다.
나중에야 알게되었지만 값비싼 양주라던가 사탕들은 VIP손님들 주고 남은 찌꺼기를
쓸어담아와서 내게 주곤 하던것인데 운명의 신이 장난을 친건지 나도모르게 던져준
사탕이 입안에 살살 녹듯이 그에게 살살 녹아들어 가는 자신을 거부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당당하게 어깨펴고 한번 살아보자 결심하고 또 다른 이 아무개와 결혼을해서
내가 원하던대로 이땅을 떠나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 타국에 가서 모든 과거를
묻어버리고 춘자의 삶이 아닌 다시 태어나는제2의 인생을 설계하기로 결심했다.
외국에서의 생활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것같아 아침에 자고일어나면 꿈이 아닌것에
감사해하며 행복이 바로 이런것이구나 하고 구름위에 떠 있는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로렐라이 언덕에서 배를타고 행복에 겨워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내 등뒤에 낮술을 마시고 술냄새를 풍기며 다가선 한 남자.
" 혹시 춘자~~ 맞~~쥐 ? "
" 헉! " 아니 내가 춘자와 무슨상관있다고 이렇게 놀라는가?
문득 고개를들고 쳐다본 순간, 빨갛게 충혈되고 연민이 잔뜩 어린 사슴의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남자는 분명히 그 옛날에 마로니에를 찾아오던 사랑했던
이 아무개가 아니던가?
순간 지금껏 지켜온 행복을 지켜야 하나 ? 아니면 첫사랑의 남자를 붙들고 한많은
넋두리를 털어놓으며 통곡을 해야할까? 망설였지만 난 전자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분명히 춘자가 맞다고 무릎을 꿇고 재차 확인을 하듯이 나의 손목을 움켜잡았지만
난 매몰차게 뿌리치며 외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만에 내가 찾은 행복인데 그걸 쉽게 깨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일이 있던 이후 나는 또 내 과거가 들통날까봐 노심초사 하던중 다행이 남편이
시카고로 발령을 받게되자 하늘을 날 듯이 기뻤다.
미국으로 이주해오면서 난 아예 내 이름이 본명도 아닌 예명인 춘자도 아닌 미국이름
Jennifer로 바꾸버렸다.
이젠 Jennifer인 나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가끔 남편친구들과 부부동반모임이 있을때마다 그 옛날 마로니에를 찾았던 손님중에
혹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마음을 조리기는 했었지만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가끔 한국을 갈때마다 작천보육원에 있는 딸 아이를 한번씩 만나곤 했는데 이것이 어째
커가면서 제 어미가 마담노릇한 전직을 빼다닮았는지 걸음을 걸을때마다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걷는게 내눈에도 끼가 다분해보이는게 심상찮았다.
최 아무개인 지 아버지를 닮았으면 엉덩이를 흔드는 춤도 만만찮게 출것도 같았다.
잠잠하게 잘 살던 어느 날 EDPS의 대가라고 불리우는 레이건 사장이라는 사람에게
연락이왔는데 한국에 있는 지사에 권 아무개가 나를 찾는다는 것이다.
순전히 길거리에 널려있는 깡통을 고물상들에게 수집해서 컴퓨터를 만들어서 일약
재벌에 대열에 올라 성공을 했다는 소문은 바람결에 풍문으로 듣고는 있었지만
며칠후면 나를 찾아 미국땅을 밟을것이란 소식에 또 불면의 밤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20여년이 지난 세월인데 한번쯤 보고싶은 마음이 한쪽으로 고개를 쳐들고 있는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공항에 입국수속을 밟다가 FBI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을
다름아닌 남편한테서 들을 수 있었다.
레이건이란 사장이 그렇게 힘이 없었단 말인가?
몇년후면 자기가 대통령이 될거라고 큰소리 탕탕 치더니 자기 파트너 회사 콘트롤도
제대로 못하면서 순전히 얼굴 잘 생겨 영화배우 했다는 이유로 여성표를 끌어모았는지
좌우지간 그 후에 레이건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긴 들었다.
다음을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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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11) - 이동국
내가 춘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거의 병적이란 점엔 지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도무지 잊는다 잊는다 하면서도 그 질긴 인연의 고리는 내 평생을 짖누르고 있었고 때로는 내가
살아있는 존재의 이유를 그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집요하게 나를 옥죄고 있었다.
미친듯이 내가 사모까페를 찾아 춘자의 탈을 쓴 함마담의 모습을 보지 않으면 하루를 살기가 힘들게
된 그 이유를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도 한동안 잊고 살아온 그때가 차라리 나았었던 것 같았다.
참으로 집착이란 묘한것이었다.
지난번 최군을 만난 이후 춘자에 대한 소식과 그의 딸 함마담의 출생에 대한 비밀이 나를 사정없이
괴롭혀왔고 더디어 만사를 제쳐놓고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일손을 놓게했다.
왜, 그 춘자의 딸이 "함"이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녀가 그것을 아직도 굳게 함구하고 있어야 할
또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이런것들을 알아내지 않고는 하루도 살수 없을것 같은 초조감이 나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찾아 나선 곳은 그 옛날 춘자가 함마담을 맡겼다는 서대문 작천보육원이었지만 그곳은
오래전에 폐쇄되었고 알아본즉 이전을 해서 불광동 소년원과 합쳐졌다는 거였다.
나는 뭔가 잘 풀릴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행히도 불광동 소년원장은 내가 계약 문제로 매우 어려울때 마다 도움을 주곤 했던 박박사가
아니던가.
내가 공사입찰 과정에서 생겨나는 송사때마다 명쾌하게 일을 풀어줘서 사업을 하는데 여간 공이 큰
사람이 아닌데..
그는 젊을 때부터 일생을 약자편에 서서 살아왔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것을 천직으로 아는 사람이었다.
일찌기부터 사회사업에 관심을 두고 육이오전쟁이 끝날 무렵 수많은 고아들을 모아서 스스로 고아원을
짓고 마치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릴정도로 빈민계층과 버려진 아이를 돌보는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해온
사람이었다.
내 사업의 이익금 일부도 그가 운영하는 육영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지출되고 있슴은 물론이었다.
박박사에게 부탁을 한지 꼭 보름만에 나는 그 유명한 인사동의 갈밭찻집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 그는 춘자에 대한 나의 집요한 애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애절한 부탁인만큼
최선을 다해 조사를 했노라고 했다.
그 당시의 작천 보육원 원장은 오래전에 작고한 상태였고 그때에 보육사로 일하던 채현도란 여자가
부천 어디에 살고 있는데 마침 그당시 춘자가 아이를 맡긴 사연을 잘 알고 있더란 거였다. 도민증도
없이 아이를 들쳐업고 와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며 그 사연을 소상히 밝히고 처절하게 우는 바람에
그녀도 함께 울었었다고 했다.
아! 이 일을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내가 알아서 안될 일은 아니었지만 그 파란만장한 춘자의 일대기를 짐작하니 내가 반평생을 가슴에
묻어두고 지내온 사랑이란 것은 한낱 휘날리는 휴지조각만도 못한 것이란걸 알게 되어 너무나도 자신이
부끄러웠다.
춘자가 나이 열여덟에 문경골짜기를 떠나올때 그는 일생을 약속한 "함대풍"이란자와 함께 왔었다.
그때만 해도 연애로 결혼을 한다는것은 그 고고한 문경 촌에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었고 결혼이란 것은
부모가 정해준대로 그냥 합쳐서 가정 이루고 살면 되는 것일 뿐이었었다.
결혼 적령기였던 그녀에게 부모는 혼사를 거론하기 시작했고 순천김씨 아무게와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오랜 소꼽친구였던 대풍이가 이 사실을 눈치챘고 둘이는 몰래 달걀 팔아 모은 돈 600원을 들고
경성으로 야반도주를 결행했던 것이었다.
운좋게 춘자는 숙식까지 제공되는 마로니에다방에 취직을 하였지만 대풍이는 막상 갈곳이 없어
남대문시장에 지게품팔이도 하고 인력거 운전도 하고 있다가 그 유명한 종로파의 이정재에게 발탁되어
톡톡히 몸값을 하게 되었다. 그 길이 바른길이 아님을 서로가 잘 알았지만 워낙 가진게 없고
배고픔을 이기기 힘들었던 때라 당분간 있으리라 맘먹고 그런 조직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래도 얼마씩에 한번 편안히 만날 수 있어서 둘은 좋았다.
그러나 어쩌랴. 운명이란 장난의 불꽃이었던가, 불꽃의 장난이었던가.
막 사랑의 절정을 맡는가 했던 그 때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은 터지고 말았으니.
동대문 우시장 상권을 놓고 종로파와 영등포파가 치열하게 맞붙었던 그해 유월 보름날의 혈투에서
대풍이는 칼을 맞고 아까운 일생을 접어야만 했던 것이었다.
춘자의 몸에 그의 작은 씨앗은 이미 싹트고 있었는데.
춘자는 어느누구에게도 이일을 발설한적이 없다.
그가 최가와 합방을 차린 이후에도 그리고 그 아이를 낳고. 보육원에 맡기고 그리고 이날까지
사는동안에도...
다만 그녀는 멀리 떠나 있지만 돌아오기 싫은 고국을 매년 찾는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가 망우리에
있는 "함대풍"의 묘를 둘러보고 딸을 만나 함 대풍의 모습을 추억하기 위함이라는거였다.
나의 사랑은 물론 그에 비해서 낮다고 할 수는 없다.
15년 전 유럽여행을 갔을때에 내가 독일의 무슨 강변에서 춘자와 흡사한 사람을 만나 실수를 한것도
, 지금은 이나라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권마담이 주선한 술자리에 영국에서 온 아무게의
친구라고 소개받아 하마터면 얼싸안을 뻔했던 기억도 모두가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기때문에 나온
우발적인 사건들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한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사람이란 저마다 이 세상 어느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아픔을 혼자 삭이며 살아가는 독특한 동물이란
것을 새삼 느끼면서 천년의 사랑을 잃지않고 살아가는 그녀가 더 없이 고고해보였다.
비록 현실적인 삶을 위해 그렇게 떠나버렸지만 그에게는 영영 뛰어 넘지못할 영혼의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는것을.
그리고 그것은 나도 아니요 최도 아니요, 권아무개도 아닌 오직 그만이 감당해야할 영혼의 사랑이라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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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12) - 권순모
그날따라 아침나절에 한줄기 가을비가 내린터라 제법 쌀쌀했다.
마치 첫선을 보러가는 농촌총각처럼 설레이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안보던 거울을
쳐다보고 또 보고 한동안 잊고 살았던 물방울무늬 넥타이를 꺼내 매듭을 지려 했지만
당췌 손이 떨려 매어지지가 않았다. 여러번의 시도끝에 겨우 봐줄만한 모양새가 되었다.
첫사랑의 흔적은 지우려 애를 쓸수록 덧나는 것인지 수없이 많은 시간 춘자를 머리속에서
지우려 했건만 그때 마다 더큰 상처만을 남길 뿐이었다.
약속시간은 11시였지만 10시도 되지않아 난 이미 약속장소를 서성이고 있었다.
춘자를 만난다는 설레임과 함께 이 사실을 이 아무개에게 알려야 하는 건 아닌지...
머리속은 실타래 엉키듯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이미 다 지난 일인데 그가 춘자를 만나고저 그렇게 백방으로 뛰어다닌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당연히 알려야 함이 옳은 일인줄 뻔히 알면서 꼴꼴난 자존심이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잘 나가던 사업체 도둑맞고 조그만 카페 주인인 나에 비해 이 아무개는 너무나도
잘나가는 사업체의 사장이었기에 그 앞에 작아지는 날 춘자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10여분을 남기고 약속장소인 미누리카페에 들어가 입구쪽을 향해 의자에 엉덩이를 막
부치려 할때 문이 열리며 두 여인이 들어왔고 난 직감적으로 그중 한명이 춘자임을 알았다.
늘씬한 키, 청자켓에 청치마를 입고 목에는 꽃무늬 스카프를 두르고 썬그라스를 낀 그녀는
멀리서 보면 서양여자로 보일만큼 세련되어 있었다.
난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를 맞았고 한번 봤다고 손모 여인이 날 먼저 알아보고 춘자의 손을
잡고 자리에 앉았다. 5분여의 시간이 고요한 적막속에 흘렀고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머리속은 비행이 프로펠라 돌아가듯 윙윙소리를 내고 있을 때 고맙게도 귀때기 새파란
레지가 껌을 짹짹 씹으면 차 주문을 받으러 왔고 어색한 분위기의 돌파구 역활을 해 주었다.
"잘 지냈어?" "아침은 먹었고?" "좋아 보여...."
무슨 말을 한 것 같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때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20여년의 세월속에 마음 깊숙이 넣어두고 그리울 때 마다 꺼내보던 춘자가 바로 그
춘자가 내 눈앞에 있는데....
큰물에 노는 고기는 때깔부터 다른법이던가. 춘자는 역시 나와는 달랐다.
그동안 살아온 얘기, 함양에 대한 얘기, 이번에 나온 얘기를 군더더기 없이 액기스만 뽑아
간단 간단하게 토해냈다.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함대풍이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서 함양에 대한
궁금증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결국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은 나도 이도 최도 아닌 그였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배신감보다는 오히려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을 사랑하며 함대풍 아니 춘자의 첫사랑에 대한 향수 때문에
그동안도 몇차례 다녀갔고 그때마다 함양을 만나고 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로렐라이 언덕에서 이아무개를 잠시 만났고 외면할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총기가 남다른 이아무개가 그럴리가 없을거라는 의문도 술에 쩔어 있었다는 말로
덮어질 수 있었다.
정치적인 발언이라 생각되면서도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않게 옛날 얘기도 살짝 비췄는데
나와 이아무개 사이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줄다리기 할때가 재미있었다고 했다.
지금와 생각해 보니 그때는 모두를 사랑했노라고... .(제기랄.....)
떠나기 전 함양을 만나러 우리 카페에 오겠다는 얘기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언뜻 튀어나온
대구에 사는 이후영 이란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머리에 박혀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고속버스 안내양 시절 서울 대구를 오가는 버스를 탔고 야간시간에 배정되면 대구에서
잠을 자기도 했는데 그 당시 서울과 대구에서 도로실안경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큰규모로 안경공장을 하는 이사장이 가끔 서울과 대구를 오갔고 빼어난 외모의 춘자를
흠모하여 결국 쪽지까지 건내 만나게 되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여자의 생애에는 몇사람의 남자가 얽혀있는건지.....
(지금의 남편과 이후영사장과의 삼각관계는 당사자가 아는 내용일테니 알아서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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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과 관련하여 - 권순모
마산에 살고 있는 이아무개가 상어고기라면 건내준 것을 멋모르고 덥석 물었다가
완전히 낚시줄에 걸린 꼴뚜기가 되었습니다. 꺼이~~ 꺼이~~~
동국이와 제니퍼는 워낙 글솜씨가 뛰어나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글을 쓰는 듯 합니다만
지는 죽을 맛이구만유~~
그래도 재미있다는 말씀을 해 주시니 죽을똥 살똥 지금까지 달려 왔습니다만 솔직히 앞이
캄캄합니다. 뭔가 줄거리를 정해놓고 하는 것도 아니고 세명이 번갈아 가면서 얘기를 엮어가다
보니 앞뒤가 안맞는 문제도 있고 그걸 뒤에서 어렵게 풀어나가고(이것도 또한 재미입니다만)
일주일에 하나 정도씩 올리면 되겠지 했던것이 이미 12편까지 올라왔습니다.
재미 없는 글을 재미있게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록 적은 재미지만 중간글을 읽지 않으시면 그나마 있는 적은 재미가 또 반감됩니다.
어제 같은 경우 만번 이벤트 때문에 무려 120여개의 글이 올라온 탓에 어제 올린 9, 10번이
중간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통상 이전글들은 80여분이 보셨는데 40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미가 없어졌을수도 있고 약발이 다 한탓도 있겠지만 행여 많은 글들속에 파묻혀 못 찾으시는
분이 계실것 같아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게시판 아래에 보시면 작은 박스가 있고 옆에 목록이라고 되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목록 왼쪽 박스에 "그리운 그 마담" 이라고 입력하신 후 Search 를 누르시면 12개의
글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하신 다음 앞에서 부터 순차적으로 읽으시면 됩니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도 가지고 글 등록갯수가 80여개가 되면 다시 계속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글쓰는라 고생하시는 이동국씨와 제니퍼도 한말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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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13) - 이동국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성장 과정에 대하여 말할 때 비교적 남들보다 순탄치 못했음을 강조하는 면이
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좀더 진솔하게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는 꼭히 잊혀졌던 과거사를 지금에 와서 모 정권처럼 들춰내어 누굴 부관참시코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이왕 말을 꺼낸 마당에, 또한 함마담이 춘자의 딸이었슴이 명백히 들어난
마당에 그녀의 성장과정을 나 몰라라 할 수 는 없고 더구나 춘자의 딸은 곧 내 딸이기도 한지라
내가 직접 챙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기에 며칠을 고민하던 중 작천 보육원 보육사였던 채현도
여사를 찾아 자초지종을 들어보기로 했다.
채여사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매우 젊은 모습이었다.
젊은 시절을 어린 아이들과 보냈고 나이 들어 늦게 결혼한 후에도 남편이 외국으로 줄곧
다녔었기때문에 항시 자신은 이름하여 자유부인으로 살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인데도 대뜸 술판을 벌려서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녀와 난 정종을 다섯 도꾸리나
비우며 밤이 이슥토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었다.
사연 많은 아이들만 골라서 키우다 보니 자신의 한평생은 정말이지 무슨 연극같은 인생살이를 살아온
것처럼 느껴진다며 이젠 늙어막에 소설이라도 한편 써야 할까보다고 지나온 파란만장했던 과거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슴을 토로했다.
아이들을 모두 내 자식이라 생각하고 키워왔기에 아직도 수많은 아이들이 장성한 후에도 찾아와서 마냥
황혼이 즐겁다며 자랑이 분분했다.
그녀가 함순애를 맡아서 키운 것은 아마도 함양에게 있어선 커다란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보육원의 원생으로서가 아니라 친딸처럼 키워서 말이 고아이지 어느듯 그들은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침 춘자가 가르쳐 준 함양의 아버지 함대풍의 고향인 문경골 황새벌이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살던
동네여서 순애가 초등학교 다닐 때 자연스럽게 한번씩 시골로 보내줄 수 있었고 순애는 그곳에서 여름
한철을 나며 꽤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고 했다.
(소문에 의하면 함순애의 할아버지는 대풍이가 떠난 후 광업소 일을 하다가 낙반사고로 세상을
하직하였고 할머니는 오랜 지병으로 근근히 생활하고 있는 처지였었다고 했다.)
함순애는 특히 조숙한 탓에 그 애를 따르는 남자 아이들도 많았었다고 했는데 그때 문영호란 아이를
만나게 되었고 순애에게 있어서 첫사랑이기도 한 그 사내아이는 원체 노래를 잘 해서 서울대학
성악과를 졸업한 후 국내 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빠리에 가고 없다고 했다.
지기도 그 총각은 뭔지 모르게 사나이답게 생긴데다 마음씨도 넓고 착해서 마음에 끌렸는데 순애
고것이 아주 한번 잡으면 놓아주지 않는 성질이 있어 오랫동안 끈질기게도 연을 맺고 있다고 했다.
밑도 끝도 없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나는 얼근히 취한 까닭에 다음날이 되어서야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순애는 저 어미를 닮아 무척 총명했다고 한다.
학교때 전교 1등은 맡아놓고 했고 백일장이니 무슨 웅변대회니 하는 행사만 있으면 어레껏 대상은
그녀의 것이었다고 했다. 학교 내의 대회뿐만 아니라 전국 대회에서도 곧잘 상을 타곤 했는데 그
바람에 보육원 출신으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대학까지 제가 벌어서 다닐 수 있었다고
했다.(물론 춘자의 뒷바라지도 있긴 했지만)
순애는 저의 출생 과정에 대해 자연히 철이 들면서 알게 되었으나 워낙 명랑한 성격에다 사교성이
뛰어나서인지 그런 것은 별로 개의치 않고 자랐다고 했다.
정말 아무 문제없이 자란 아이들처럼 승승장구 하던 그 아이한테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 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그런 심각한 문제가 될줄은 알지 못했고 사실 이성적인 판단이
설 수 있는 나이였기에 초기 단속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고 했다.
진명여고 삼학년에 재학중이던 여름날 보육원으로 경찰 두명이 찾아왔었는데 자초지종 순애의 행방을
묻더라는 거였다. 내용인즉 순애가 청개 피복노조원들과 함께 반 국가단체 결성에 가담하였다는것이었고
이후 순애는 꽤 여러날을 숨어서 지냈었다고 했다.
채여사는 이런 사실을 원장인 박박사에게 알렸고 긴급히 손을 쓴 까닭에 순애는 무혐의로
수배정지처분을 받았었다는 것이었다.
이때 순애는 독립하여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며 아현동 고갯마루에서 홀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모든 연락처는 보육원(소년원)으로 되어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그 애가 Y대 신방과에 수석으로 합격을 했는데 학교 입학 후에는 툭하면 써클 활동입네 하며
외박이 잦았고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직업삼아 했었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들이 사람을 찾아내라고 와서 윽박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급기야는 신문에 얼굴이
나오더니 얼마후 체포되었다고 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학생 신분을 감추기 위해 당시 서울대
성악과에 다니고 있던 문영호란 자와 동거중이었었는데 문영호는 자리를 피해서 위기를 모면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순애가 시작한 첫 관문에 지나지 않았었더란 것이었다. 그 예쁘고 가냘픈 몸매에
어디서 그런 담력이 솟아 나는지 자기가 정치인이라도 되는 양 온갖 사건에 연루되어 툭하면 남산
지하방에 끌려가 취조를 당하기 일쑤였다고 했다.
그중 제일 큰 사건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청량리 오팔팔 알몸여성 해방운동이었는데 이때 그곳의
직업여성들과 160여명이 동시에 알몸으로 시위에 나서 포주들의 인력 착취는 물론 관련 경찰들의
공공연한 비리까지 모두 폭로하는 바람에 당시 내무장관, 서울시장, 등이 날아갔고 다음해
여성인권법이 제정되는 엄청난 파장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문영호는 국내 성악활동 중에 많은 여성들의 인기를 얻어 당시 인기 배우였덩 "최춘희", "전숙자"
등과도 열애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그것을 눈뜨고 볼 수 없다며 벼르던 순애가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는데 78년 최춘희 한강 투신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는 것이었다.
문영호가 일단 사건의 책임을 지고 외국으로 도피하였고 순애는 지하로 잠적하여 저렇게 오랜 세월을
마담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순애는 최춘희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문영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그 늘씬하고 예쁜 함마담이 왜 그리 거인처럼 느껴지는지 나는 그저
말문이 막힐 따름이었다.
(마지막회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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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 (14-終) - 이동국
세월은 일이 있으나 없으나 쉬지 않고 제갈 길로 흘러간다.
채여사에게 들은 함마담의 과거사를 나는 어느덧 까마득히 잊어가고 있었다.
가끔씩 함마담을 만나면 서로가 아무런 내색없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떼우기가 일쑤였지만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춘자에 대한 열의때문에
나는 늘 설레이는 맘으로 그녀를 대하곤 할 따름이었다.
그녀를 통해 들은 주변의 소식은 권아무개의 사업이 매우 번창해서
이제는 세상 어디를 내놓아도 뒤지지않는 탄탄한 회사로 변모되고 있다는 것과
컴퓨터 내장을 조종하는 기술은 세계 굴지의 회사들이 따라 올 수 없을만큼 우수해서
그 값어치가 천정부지로 솟고 있다는 것이었다.
참 대단한 놈이었다.
그러면서 태연하게 DJ나 보고 있는척 하다니..
그러던 어느날 사흘이나 연거푸 비가 내리는 통에 현장 일도 신통찮고 해서
오랜만에 사모카페를 찾아갔다가 나는 춘자의 소식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모씨와 결혼하여 미국에서 완전히 이름까지 바꿔가며 시민권을 얻어서
그야말로 남 부럽잖게 살고 있던 그녀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고속버스 승무원시절 그녀가 대구를 오가다가 잠시 사귄적이 있던 이 후영이란 사내가
십수년 전까지 항공사 일로 수시로 고국을 더나드는 춘자의 남편에게
춘자를 내놓으라고 쫒아 다니는 통에
춘자의 남편은 직업을 바꾸기로 맘먹었고
평소 관심이 많았던 심리학 공부를 해왔는데
졸업후 시카고 주립병원 신경 정신과에 근무하게 되었었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심장병이 있는 노인 한사람을 맡아 치료를 하던중
그 노인이 입원 전에 사둔 미국식 로또복권 12억불(한화 1조 4400억원)에 당첨되었다고 한다.
워낙 심장이 약한 이 노인에게 사연을 곧바로 알릴 수 없었고
심장 쇼크를 피하기 위한 심장강화 프로그램을 적용하여 1주간이나 훈련시킨 후
엄청난 사실을 알려도 소화할 수 있냐고 다짐을 했더니 걱정말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인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노인은 준비가 충분했는지 태연스레 받아들이더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후에 일어났다.
이렇게 자신의 생명을 위해 노력해 준 의사에게
복권의 금액중 절반을 증여하겠다는 것이었고
난데없는 충격적인 소리에 춘자의 남편은 심장쇼크를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사흘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향수병에 시달려 고생을 해 왔었는데 남편마져 그리 되었고
더구나 엄청난 유산(세금 떼고도 우리돈으로 5700억원)을 안게 되었으니
조만간에 영구 귀국이 있을꺼라고 했다.
나는 도무지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사태에
심장이 멎는것 같아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약 2000억원을 투자하여 서울에다 사모 예술회관을 건립하고
우리 지인들을 모아 한국최고의 IT예술학교를 운영하며
2000억원으로 문경고을에 실버타운을 건립하여
어릴적에 같이 놀았던 친구들을 모아 저렴한 돈으로
인생 말년을 즐겁게 보낼 수 있게 한다는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는 것이었다.
함마담이 더더욱 좋아 날뛰는 것은 옛날 최춘희 투신사건에 연루되어
파리에 가 있는 문영호가 다음달이면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귀국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도 정말이지 가슴이 뛰어서 며칠을 잠을 설쳤고 다가올 춘자와의 재회가
꿈만같이 느껴졌다.
그 얼마나 오랜 세월을 춘자생각에 괴로워했던가.
온갖 시련이 닥쳐와도 오로지 춘자와의 재회만을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아왔던 나인데...
그러나 이제 대적했던 "권"도 "최"도 모두다 나이들어 까마득한 옛 추억으로 흐른 지금
누굴 원망하며 또 누구와 다툼을 벌인단 말인가.
오로지 그녀와 한 나라에서 가끔이라도 얼굴보며 여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어차피 인생은 한번 왔다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을 .
오랜 세월을 사랑의 불장난에 피멍들어 이렇게 살아온 인생이지만
그나마 그립던 얼굴 보며 남은 인생 살아갈 수 있다면 내겐 그것도 남다른 행운이려니.
........
이 파란만장했던 인생의 길목에서 그동안 스쳐지나간 많은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꼬리를 물고 아른거렸다.
춘자, 권아무게, 최군, 함마담, 박양, 변사장, 박박사, 권마담, 송양, 황예리,
봉자, 금이, 파이팅, 채현도여사, 아담한 손여인, 전숙자, 안됐지만 최춘희,
이후영사장, 문영호청년,
그리고 우리 함마담이 운영하는 카페에 자주 놀러와 주신 많은 인생친구분들....
귀하신 분들 이제 우리 춘자가 연출하는 실버시대의 멋있는 황혼길을 기꺼이 함께 가십시다.
나도 이제 사모예술회관 공사와 실버타운 공사를 끝으로
지긋지긋했던 노가다생활 접고 춘자와, 권가와 함께 IT예술학교 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참여하기로 했소.
내년 봄에 함순애와 문영호의 결혼식엔
문경고을의 농협 조합장이신 이만희회장이 주례를 서기로 했으니
그동안 사모카페를 사랑해주신 모든 지인께서는 참석하여 주시기 바라며
그때에 평생을 바쳐 연모의 정을 가슴 가득히 받아왔던
나의 영원한 애인 춘자도 정식으로 소개할까 하오.
고맙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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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마담 (後記) - 이동국, 권순모, 제니퍼
(이 아무개)
우선 이 창을 통해 그동안 관심있게 지켜 봐주신
동료및 선후배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느날 곰팡이냄새 나는 꽤재재한 음악다방이 생각나 농담 한마디 던진것이
그 입담 좋은 권순모씨가 덥썩 받아 요리하는 바람에 시동이 걸렸고
모든게 우리의 이야기라는 즐거움에 꽤나 큰 반향을 불러와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이건 글이라 할 수는 없고 만화같은 우리네 이야기쯤으로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친구들의 이름을 도용하여 마구 올리게 되었슴을 사과드리고
앞으로도 함께 즐거울 수 있는 ITEM이면 어떤 형태로도 좋다고 생각하며
함께 이 공간에서 즐겨 주셨으면 합니다.
미국에 있는 제니퍼친구는 자신을 빗대어 끌고가는 이야기인데도
오히려 함께 동참하여 즐거움을 더해주셨고.
더 많은 친구들이 참여치 못한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모쪼록 끝까지 관심을 가져주신 여러분께 고마움을 표합니다. (1234)
(권 아무개)
귀퉁이에 보일듯 말듯 올려놓는 신청곡 땀시 올려진 글을 빠짐없이 읽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한날 이동국씨가 아리까리한 미끼를 달아놓고 꼬셨지만 신청곡이 아니기에 무시했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미끼를 물라는 35漁는 안물고 후배漁가 물었지만 그냥 놓아주더이다. ??
아마도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그랬나 봅니다.
며칠 있다 이번에는 제법 무시하기에는 너무 구미가 당기는 미끼를 던지더이다.
그래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덥석 물었는데.... 에흐~ 죽다 살았습니다. ㅎㅎ
글이라고는 전문지에 기술적인 내용으로 몇번 끌쩍인 적은 있지만 소설류의 글은
처음이라 그냥 생각나는대로 즉흥적으로 써 내려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좀 더 이 아무개 수준에 맞춰 글을 적었으면 재미있었을텐데 하는 후회가 생깁니다.
어쨌던 한사람이 전체적인 골격을 세우고 의도한대로 중간 과정을 그려가는 기존 소설과는
달리 3명이 전혀 알지못하는 돌출상황에 맞춰 글을 쓴다는 것도 또 다른 재미였습니다.
끝까지 잘 마무리 해준 이동국씨 고생하셨고 춘자의 변을 자청해준 제니퍼와
부족한 글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칭찬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뒤이어 딸 데리고 가시게가 연재되었다가 아쉬움을 남기고 마담 보다 먼저 끝을 맺었고
지금은 우리의 글짱 이영숙씨의 여우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새롭게 연재되는 소설 많이 사랑해 주시고
35방의 또 하나의 재밋거리로 정착될 수 있도록 많은 성원을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춘자의 에필로그)
우리의 인생에서 행운은 세번 우리곁을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 순간을 포착을 하고 못하는것도 그 사람의 운명이고 능력이라고 봅니다.
30년이상을 끌어오며 정리를 못하고 갈등의 연속으로 이어오던 삼각관계가
한사람이 포기하겠다는 선전포고를 빌미로 잽싸게 순간포착을 한 이아무개의
기지로 인해 드디어 ' 그리운 그 마담' 이 끝났습니다.
뒤늦게 돈냄새를 맡고 꺼이~꺼이~ 하며 통곡하는 권아무개가 뒤늦은 후회를 해봤자지만
그래도 연민의 정이라는것도 있는법이니 깡통좋아하는 권영감에겐 대신 로봇침대나
하나 사주고 춘자는 아 아무개를 위해 인간로봇이나 되어야 하겠지요.
밋밋하고 무료한 일상생활의 탈출을 우리는 사모게시판에서 위안을 받는것도 부족해서
어린아이들이 또다른 동화나라를 꿈꾸듯 그 안에 작은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웃고 즐기는
시간을 마련해준 동국이와 순모에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한사람이 만들어가도 쉽지않은 스토리를 사전에 아무런 인포메이션이 없이도
손발 착착 맞춰가며 쓸 수 있었던것은 이것 또한 성장배경이 같고 같은 정서가 가져다 준
우리들만의 백그라운드가 아닌가 하는 자부심이 생깁니다.
동시대를 같이 살았고 동시대를 같이 살아간다는 이 사실하나로 늘 외롭지않고
사는데 큰 버팀목이 되어 준다는 사실에는 의의가 없을것 같습니다.
하물며 제니퍼가 옛날에 마담노릇을 했고 딸이 작천에 산다는 오해를 한 동기가 있을정도로
이 소설은 가장 리얼하게 그려진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 역시 우리모두가 주연과 조연이 적절하게 배치되어서 그 재미를 더 증감시켜주는
역활도 독톡히 해냈고 나이 50에 우리들만이 가꾸어가는 재치들과 매력들이
오래오래 함께 같이 하기를 바랄뿐입니다.
읽어주신 선후배들을 비롯해서 친구들에게도 감사하고 마지막을 근사하게 마무리해 준
동국이에게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