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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희생 (Sacrifice)
01 옥문을 여는 위로
◈ 위로하시는 하나님
2001년 5월 11일, 남편과 오 부총장의 구속 사건 이후 충격에 싸인 한동대 교수와 학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발적으로 채플실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회는 아침7시, 오전11시, 오후5시, 저녁10시 하루 네 차례씩 열렸다. 교수와 전국 학부형들의 릴레이 금식 기도가 이어졌다. 한동대 홈페이지, 호산나넷, 갓피플 등 기독 웹사이트에 격려의 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미국 친구들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 격려 편지와 신문에 실린 칼럼, 이 모든 것들이 남편과 내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흑암과 어둠이 우리를 뒤덮어 하나님의 밝음이 가려진 가운데서도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하나님이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
사랑하는 김 박사님 내외분께
하나님께서는 한동대를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어쩌면 김 박사님께 이 길을 오래 전에 지정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0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저희에겐 김 박사님 가족들이 나사에 계실 때의 그 모습으로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김 박사님 가족이 뉴욕으로 이사 가시던 날, 이우범 박사 댁에서 송별 모임을 하면서 함께 껴안고 울며 헤어지던 때가 아직도 기억 속에 선합니다. 마치 바울을 떠나 보내던 사도들처럼.... 오늘, 이곳 클리블랜드 교민들들과 테네시 주 내쉬빌 교민들의 탄원 서명서를 정리해서 내일 한국으로 부칩니다. 대통령 각하께 올리는 탄원서입니다.
이근웅 박사, 최인식, 손영헌 집사, 이상준 한인회 회장과 최영옥 한글학교 교장도 적극적으로 힘써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탄원서도 놓칠세라 먼 길을 달려가는 우종규 박사를 보면서 김 박사님을 향한 눈물겨운 우정을 보았습니다. 오늘 총장님을 면회 가시면 꼭 이 찬송을 들려주십시오. 우리가 함께 부르던 그 찬송이 아닙니까!“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오하이오에서 우명순 드림.
스승의 날
남편이 구속된 지 나흘째 되던 날이 스승의 날이었다. 그날 아침9시, 한 손에 카네이션을 든 학생들이 학교 채플로 모여들었다.
“총장님, 사랑합니다”“부총장님, 사랑합니다”라고 쓴 현수막을 두른 1호차, 2호차를 선두로 학생들을 가득 태운 29대의 버스가 그 뒤를 따랐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가면 면회도 안 될 텐데....’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수업이 없는 학생들만 가리라는 예상과 달리, 학생들이 하나같이 함께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총학생회에서는 10대에서 15대로, 다시 20대에서 29대로 늘어나는 차량을 준비하랴, 경주 관할 경찰서에 집회 신고하랴, 스승의 날 행사 절차를 학생들에게 알리랴, 학부형들의 문의를 받아가면서 준비하랴 밤잠을 설쳤다고 했다. 이날 참석하려고 여수에서 지난밤에 도착한 학부형도 있었다. 서울 학부형들이 타고 온 버스까지 모두 30대. 학생1,500여 명, 교수와 학부형 300여 명, 침통한 침묵 속에서도 1,800여 명의 한동 식구들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움직였다. 한동 식구들은 움직이는 조용한 기도였다.
교육 역사상 유례없는, 상상을 초월한 행렬이 구치소 앞으로 이어졌다. 경찰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이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구치소 앞에서 학생들은 질서 정연하게 차례로 줄을 섰다. 학생들은 자칫 교도소측을 자극할까 봐 잔잔한 목소리로 <스승의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지네...” 노래는 눈물이 되어 흐르고 끝내 흐느낌이 되었다. 이어서 허밍으로 부른 <어메이징 그레이스>, 그들의 총장님이 가장 사랑하는 찬송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울고 또 울어도 구원의 은혜와 감격을 다 표현할 길 없다는 그 찬송을 학생들은 눈물로 허밍했다. 비록 담장 안 감방이지만 남편이 그토록 사랑하는 학생들의 노래가 그의 가슴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때 두 팔로 내 등을 감싸 안는 사람이 있었다.
“사모님...사모님...사람들이 예수 믿고 망했다고 하겠네요. 저는 아들을 잃었고 총장님은 감옥까지 갔으니...아! 이럴 수가....
그녀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오열하는 그의 고통이 나를 휘감았다. 4년 전, 아들을 잃은 어머니. 복음을 들고 피지로 단기 선교를 갔다가 순교한 권영민 군의 어머니였다. 그녀의 쓰라린 탄식은 내 영혼을 흔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시금 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오늘 아침 유럽 여행에서 막 도착하자마자 총장님 소식을 듣고 택시를 타고 총알처럼 달려왔어요.”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 울었다. 그녀가 말했다.
“사모님, 지금 하나님께서 총장님을 보시며 미안해하실 거예요. 분명히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을 겁니다. 지금은 천길 낭떠러지 절벽 아래로 떨어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이루실 거예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참 이상하네. 피지에도 두 명이, 감옥도 두 명이 갔네.” 그때 옆에서 누군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파송한 곳에는 두 명씩 갑니다. 하지만 마귀가 파송한 가룟 유다는 혼자 갔지요. 이 안에서도 총장님과 부총장님이 하실 일이 있을 겁니다.” 학생 대표들이 두 분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일제히 두 팔을 벌려 담 안을 향해 <축복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면회하러 들어갔던 대표 학생들이 돌아왔다. 총학생회 회장 최유강 군이 학생들 앞에 서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들의 총장님, 부총장님은 건강하십니다. 총장님이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학생들은 결코 동요하지 말고 공부에 전념할 것과 이번 결정을 내린 사법부에 노여움을 가지거나 상대방의 처사에 분노하지 말라. 그리고 이번 기회를 자책할 것을 돌이켜보는 회개의 기회로 삼고 있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잔뜩 긴장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던 경찰들도 학생들의 성숙한 태도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날의 모든 행사를 마치고 역대 총학생회자인 민준호, 이충실 군은 학생들이 떠나간 자리를 돌아보며 교도관들과 경찰관들에게 일일이 인사했다.
“저희 행사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제야 모든 긴장과 서러움을 토해 내듯 주차장 뒤쪽 땅바닥에 주저앉아 서로 붙들고 통곡했다.
인생 여정에는 때로 우리가 예기치 못한 풍랑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밷전 2:19)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애매한 고난의 시간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그분의 신묘한 손길이 일하시는 시간임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 어둠과 곤고한 아픔의 장막을 벗는 날, 우리는 정금보다 더 아픔답게 빚어질 김 총장님과 한동인의 눈부신 영광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광은 내일 비전의 태어남을 위해, 오늘이 잉태한 시련의 아픔을 경건한 기도로 스스로를 낮추고 가꾸는 돌아봄과 기다림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함께 달려가 기도의 무릎을 꿇고픈 애절한 사랑을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스승의 날 구치소 앞에 스승에게 드려진 학생들의 꽃 더미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조국의 미래가 되살아나는 환상을 저는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외롭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한국 교회의 기다림입니다. 조금만 참으면 새벽이 열려 올 것입니다.
워싱턴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지구촌교회 이동원목사.
◈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며칠 뒤 남편과 오성연 부총장의 법정 구속의 부당함에 대한 신문 사설과 기고문들이 중앙언론지에 실리기 시작했다. <<조선일보>> 2001년 5월 20일자 사설에는 “통상 학교 경영자가 교비 유용 등의 혐의로 구속되거나 유죄 판결을 받을 때 나타나는 반응과는 대조적”이라면서 “해외 출장으로 인한 불가피한 궐석 등 ‘재판 과정에서의 불성실한 태도’를 증거 인멸의 우려로 연결시켜 법정 구속이 불가피했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논리의 비약으로 비칠 수도 있으며, 학교와 학생들이 특히 이 부분을 문제 삼는 것도 그때문인 것 같다”는 기사가 실렸다.
쇠고랑 카네이션
1995년에 신입생을 뽑은 한동대는 1996-1998년 3년에 걸쳐 교육부가 선정하는 교육 개혁 최우수 대학교로 뽑혀 특별 보조금을 받았다. 그러나 학교 재정이 어려운 터라, 그 중 15억 원을 체불 중인 교직원 인건비와 공사비로 충당하고 보름 뒤에 원상 회복한 것이 문제였다. 이것이 앞의 법 제22조 위반(최고 3년 징역)이라는 것이었다. 비슷한 예로, 불법 기채중에는 대학의 이영덕 이사장이 보다 못해 은행에서 빌려 준 돈도 들어 있다. 분명한 것은 문제가 된 횡령, 전용액 중 김 총장 개인 차지는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이다.
여하간 한동대는 1995년 이래 1만 5천 명의 후원자를 확보하여 450억 원의 기부금을 모으고, 7천 평의 교육 시설을 1만8천 평으로 늘리는 등 학교 자산 700억 원 순증을 기록하고 있다. 학생 증원도 400명에서 2,400명으로 늘었고, 영어와 컴퓨터 중점 교육으로 명성을 얻어 외국IT기업의 제휴와 구인 희망이 밀릴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 일취월장의 선도자는 지금 쇠고랑을 찼다. 교도소 담 위를 걷는 사학 운영의 실례가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교육 열정과 실정법은 별개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죄질’과 교육 실적을 비교해 보면 어떤가. 총장과 부총장의 동시 법정 구속이 불가피했을까. 검찰도 걱정하지 않던 도주의 우려가 왜 갑자기 생겼을까. 법은 어떻든, 대학 총장의 직책과 권위, 교육자로서의 명망 따위는 한 푼 고려의 가치도 없는 것일까. 그 흔한 정상론은 다 어디 갔을까. 혹시 우리 법이 너무 촘촘한 것은 아닌가. 그 운영이 너무 경직된 것은 아닐까. 혹시 오만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이 사건에는 더 명석한 배심원이 있다. ... 송이 송이 쌓이는 붉은 꽃송이로 학생들의 배심 평결은 끝났다. 이제 우리는 쇠고랑과 카네이션을 함께 보고 있다. 슬픈 스승의 날을 보내고 나서 ‘교육의 참뜻’을 다시 생각한다.
칼럼리스트 김창열, <한국일보> 2001년 5월 22일자.
한국 교회와 한동대
40여 년 전, 제가 교육에 관한 일을 처음 시작했을 당시, 한국의 각 기독교 대학들을 대표하는 기독교 교육자들이 모인 학술회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곳에 참석한 교수님들께 강의식에서 가르치실 때 어떻게 신앙과 학문을 연결시키시는지에 관해 물어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세 번째로 그 질문을 했을 때, 연세가 많고 아주 유명한 한 분이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젊은이, 나는 교실에 들어갈 때. 내 신앙은 복도에 두고 간다네.” 그분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듣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에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어떤 주제라도 기독교적이고 성격적인 시각에서 가르치는 대학이 생기기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어떠한 주제도 그분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일같이 그런 기독교 대학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김영길 박사님이 한국과학기술원의 교수가 되셨을 때 저는 그만큼 헌신된 기독인을 그런 위치에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분은 신실한 교회의 일꾼일 뿐만 아니라 신학자와 과학자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기독교 대학에 대한 제 기도의 응답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
김 총장님과 오 부총장님이 세상적인 집단인 반대하는 세력들과 계속해서 직면하고 계신 것에 대해 저는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우리를 반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김 총장님과 오 부총장님, 그리고 한동대에 이적을 행하시기를 한국의 모든 크리스천이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이 증거되길 소망합니다.
대천덕(예수원 신부), <국민일보>2001년 5월 30일자.
사필귀정을 확인하면서
지난 5월에 김 총장의 법정 구속은 분명히 무리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삼십육계 줄행랑이 제일’ 이라는 속담도 있지만, 사실 도망쳐 화를 면한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 번 생각해 봐도 김 총장이 도망칠 사람 같지는 않다. 그의 사회적 명망이나 공의를 존중하는 그의 인격을 감안할 때 100명의 피의자 중에서 다 도망쳐도 도망치지 않고 법원의 명령대로 그 자리에 있을 사람이 김영길 총장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김 총장이 쇠고랑을 차게 된 엄청난 사실에 대해 만세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시장 바닥에서 장사하던 사람 하나가 유치장이나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사람들이 ‘거 참 안됐다’고 하는 게 보통이다 더욱이 대학의 총장이 철장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데 ‘거 참 잘됐다’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은 결코 보통 사람들은 아니다. 지난 23일에 그런 성명을 낸 사람들(만나 본 적은 없지만), 바로 그런 성명을 발표한 단체들이다. 그런데 그 단체들이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인지 그것이 알고 싶다. 그리고 세계적인 대학이 되려고 발돋움하는 대학에 대해서 그 단체들이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인지 나는 그걸 모르겠다. 세계적인 대학이 되려고 하지 말고 지역 사회의 구미에 맞는 대학으로 만족하라는 것인지, 나는 그 동기를 모른다. 이 단체의 위원들이나 회원들이 지성인 김영길의 구속이 왜 꼭 필요하다고 믿고 있는지, 그 동기를 헤아릴 수 없다.
아직도 1심을 거친 것에 불과한 이 사건을 가지고 마치 재판이 다 끝난 것처럼 승전가를 부른 것은 시기상조일 뿐 아니라 도의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김 총장을 고발한 검찰과 그를 범정 구속한 법원의 고민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두 번째 재판을 포항과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대구로 옮겨 온 동기도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다. 나는 대한민국을 믿고 대한민국의 법을 믿는다. 정의와 공의의 도시 대구에서는 반드시 올바른 판결이 내려질 것을 확신한다.
김동길(전 연세대 교수), <영남일보> 2001년6월1일자.
부러운 김영길 선배님! 어처구니없이 감옥에 계신 김영길 선배님. 당신이 감옥에서 고초를 받고 계신 것조차 부러워 이렇게 부러운 마음을 전합니다. 제가 한국과학기술원에서 교수라고 왔을 때 재료공학과의 김영길 교수님은 한국을 대표할 세계적인 학자라고들 합디다. 학자로서 부러웠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찾아 헤맬 때 창조과학회의 충성됨은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 증거에 앞장선 당신의 부러웠습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낙인임을 기쁨으로 증거하며 외치는 그 모습은 나의 삶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게 하는 나침반이셨습니다. 과학의 삭막한 캠퍼스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던 당신이 느닷없이 한동대로 가야만 한다던 그 모습 그 길은 선교사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제가 알지 않습니까? 당신은 복 받은 학자이자 연구자이지 행정가는 아니라고요. 그 아끼던 발자국을 돌아보지도 않고 본토 아비 집을 떠난 아브라함같이 떠나시던 그 모습도 그 기도, 그 순종이 부럽습니다. 그렇게 불러 주시는 분 계셔서 부럽습니다. 노상 돈 때문에 찌들리는 대학을 맡아서도 늘 희죽희죽 웃으시니 보는 제가 오히려 걱정됩니다만 그런데도 한동대는 우뚝 서는 것을 보니 김영길 총장님의 역할은 스스로 연약함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게 하는 십자가였습니다.
학교와 학생을 사랑하신 대가로 치르는 고초가 당신을 얼마나 값지게 할지, 당신의 죄로 말미암지 않는 고초이기에 그 억울함을 부러워합니다. 그 고난은 당신을 영원히 아름답게 빚을 것이므로.... 당신의 신앙의 시작이 된 가정, 그리고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김영애 권사님, 그분의 피눈물 나는 기도가 당신의 고통보다 더 아프게 계속되기에.... 당신의 고초의 나날을 그냥 지켜보시는 듯하신 하나님. 그러나 가장 아름답게 이 시련을 매듭하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당신을 먼저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으로 위로받기에 충분하시지만, 그러나 저의 사랑과 위로도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는 후배가 홍콩에서 올립니다. 카이스트 이재규 교수.
6월 4일, 총장 부총장이 구속된 지 23일 째 되던 날. 전국의 한동대 학부모와 졸업생 그리고 재학생들이 오후 1시에 포항 시민회관 앞에서 ‘한동대학교 바로 알리기’ 궐기 대회를 가졌다. 전국에서 학부모들을 태운 버스들도 연이어 도착했다. 700명의 학부모들과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질서 정연하게 긴 행렬을 이루었다.
“총장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모든 학부모에게 존경받는 총장님을 학생들 곁으로!” “정상 운영되고 있는 한동대 정상화가 웬 말이야?”
눈물겨운 충정으로 만들어진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한동의 가족은, 총장과 부총장의 구석의 부당함과 석방을 요구했다. 아침부터 내리쬐던 태양은 정오가 되자 자취를 감추고 어느 사이엔가 구름이 하늘을 덮어 뜨거운 열기도 기시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행진할 때, 구름 기둥이 그들을 지켜 준 것처럼.... 피켓을 들고 묵묵히 행진하는 학생들의 모습, 눈물겨운 장면이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발을 멈추었다.
하루 해가 저물어 가는 무렵, 1.5킬로미터 가두 행진을 조용하게 마친 학부모들은 학교 뜰을 밟고 기도하고 가겠다며 효암채플에 또다시 모였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내게 집중된 안타까움과 서러움,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격려와 위로의 눈글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 학부모님들, 참으로 감사합니다. 총장님, 부총장님이 구속될 정도로 시련이 그칠 날이 없는 한동대에 귀한 자녀들을 믿음으로 보내 주신 학부모님들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귀한 자녀들을 한동대에 보내신 것은 믿음의 학부모님을 중보자로 세우시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며칠 전, 저를 위로하러 온 총장님의 카이스트 제자들이 말하더군요. ‘사모님이 이렇게 잘 지내시는 것을 보니, 총장님과 사모님, 두 분의 사이가 좋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가 봐요.’ 그들의 말처럼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평강으로 잘 견디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사건이 우리에게 어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번 사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내인 저는 감히 총장님과 부총장님이 감옥에 잘 가셨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겪어 온 환난과 모든 서러운 사건들이 이제야 끝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일석이조’가 아닌 ‘일석십조’를 하실 것입니다.
한동대는 예사로운 대학이 아닙니다. 한동은 하나님의 은혜로 운영되는 대학이며, 하나님의 주권하에 강권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대학’ 이라는 증거들을 저는 그 기적의 최전선에서 수없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지워진 짐이 있습니다. 학부형으로서의 짐, 교수와 직원으로서의 짐, 학생으로서의 짐, 그리고 총장과 부총장으로서 지고 가야 할 짐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기꺼이 이 짐을 나누어질 때, 그리스도의 법이 이 땅에 성취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도 알 수 없는 담대한 사자후를 내 입에 넣어 주셨다. 나도 학부모들도 새로운 힘이 생겼다. 학부형 대표가 큰 대바구니를 내게 건내주었다.
“사모님, 총장님께 드리는 저희들의 격려 편지들입니다.”아름다운 석양으로 물들어 가는 캠퍼스에 학부형들의 기도 소리가 간절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줄 이른 탄원서들
각계각층의 탄원서들이 관계 기관에 전달되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사립대학총장협의회, 경북 지역 총장단 등의 탄원서들이 연이어 사법부로 전달되었다.
대구 고등법원장 귀하
참된 교육에 전념하던 김영길 총장이 업무상 횡령과 사립학교법 위반 등의 혐의로 법정 구속된 데 대해 우리 대학교육협의회에서는 커다란 충격과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사상 초유의 현직 대학 총장 구속이라는 법정 결정이 자칫 사학 발전에 타격을 주거나, 교육계에 상처를 주지 않는가 하는 안타까움이 앞섭니다....
스승의 권위와 존경심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우리 나라 교육의 현장에서 희망을 보여주는 한동대 학생들의 스승의 날 행사와 같은 미담은 김 총장의 교육 철학과 인격을 잘 보여 주었다고 생각하며, 저희 대교협에서도 주목하며 긍지를 갖는 부분입니다.
김 총장이 지방 신설 사립대학을 운영하며 겪는 재정난으로 인해 불가피하거나 행정 미숙으로 생긴 것이지, 결코 사리사욕이나 개인 착복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셔서, 고등 법원에서 정상을 참작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한동대가 지속적으로 발전 할 수 있도록 김 총장의 보석을 허가하여 주시기를 탄원합니다2001년5월31일,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서울대 총장 이기준 외 임원단 3명.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미주 교포 사회에서도 한국의 대학가 소식을 접할 때, 돌과 화염병과 각목 등 수많은 폭력 시위를 보아온바 한동대 학생들은 얼마나 성숙하고 아름다운 모습인지 가슴 뭉클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희 미주 교포들의 입장에서 볼 때, 김 총장의 교육은 성공한 교육이라 생각되며 학생과 사회의 배심 판결은 이미 내려졌다고 생각됩니다. 미국은 배심원 평결을 대단히 중요시 여기는바, 한동대의 교육은 ‘교육의 참뜻’을 이룬 대학이며 대한민국의 소망이라 생각됩니다.
김영길 박사가 1970년 이곳 클리블랜드 미 항공우주국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할 때, 저희들과 매우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당시 그는 가장 촉망받는 과학자였고, 이곳 교민들에게 존경받던 분이었습니다. 저희들은 김 박사님과 동고동락을 하였기에 김 박사님의 인품을 잘 알고 있습니다. 김 박사님은 한동대를 하나님과 조국이 자기에게 맡긴 사명으로 알고, 어떠한 고난과 수모에도 훌륭한 인재를 길러 내는 오직 한 가지 이념으로 눈물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저희들은 조국을 위해 헌신하며 한동대를 7년의 짧은 기간 동안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시킨 분을 파렴치범으로 취급하여 구속한 일에 대해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각하께 탄원을 드리오니 각하의 선처를 진심으로 간구합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밀워키 지역 한인 동포 일동 드림.
로스앤젤레스, 워싱턴, 시카고, 태국의 방콕 등을 위시하여 해외 곳곳에서 교포들의 탄원서들이 속속 관계 기관에 전달되었다. 또한 학부모들의 탄원서와 포항시 기독교교회 연합회, 포항지역 단체장, 안동 지역단체장의 탄원서들도 사법부와 청와대로 잇달라 보내졌다.
조찬 기도회
우리의 소식을 듣고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무척 애를 타우던 아들 호민의 대학(미국 노스우스턴 대학) 친구 문병기 군의 어머니 문인순(한국 글로리아 진스 대표) 여사가 전화를 했다.
“김 총장님을 사랑하는 분들을 모시고 조찬 기도회를 하십시다. 저희가 모든 비용을 대겠습니다.” 그래서 6월8일 아침 7시, 김 총장과 오 부총장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의 조찬 기도회가 열렸다. 조용기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 목사님들과 이시영 전 UN 대사, 강영부 박사(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비롯하여 교계의 여러 선배 장로님들, 그리고 기독교계, 학계, 법조계, 기업계의 인사 200여 분이 오셔서 예약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 모두들 한결같은 사랑과 신뢰로 위로를 아끼지 않으셨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기도의 자리였다.
홍정길 목사님(남서울은혜교회)이 사회를 보셨다. 정근모 호서대 총장님은 “오늘 기도회는 두 분의 석방과 무죄함을 간청하는 기도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기도회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며 먼저 말문을 여셨다.
“김 총장님과 한동대가 걸어온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은혜와 기적의 연속이었기에, 이제까지 여러 한동대 문제들을 통해서 교직원들의 믿음을 뜨겁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결정적으로 풀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뒤이어 옥한흠 목사님이 기도하셨다.
“오직 주님만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학교를 시작하게 하시고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없는 것 가운데서도 있게 하신 주님, 쓰러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한동대를 다시 일으켜 주신 주님, 기적의 연속을 통해서 짧은 기간 안에 한국에 새로운 소망을 불러 주신 주님이시여! 이제 한동대가 처한 모든 상황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절대로 부끄러움을 당치 않은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번 이 사건을 통해서 요셉이 감옥에 들어감으로써, 그에게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게 하셨듯이,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들어감으로써,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나흘 동안 갇혀 있음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적을 창출하는 계기가 된 것처럼, 귀한 종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도록 이 모든 일들은 주관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준군 목사님(한국 대학생 선교회 총재)도 단 위에 올라서셨다.
“저하고 김영길 박사에 읽힌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1980년 CCC 주최로 창조과학 세미나를 열기로 했을 때 제가 존경하는 생물학자인 세 분 장로님들은 차례로 찾아가서 창조론 강사가 되어 주십사고 부탁했습니다. 모두 ‘하긴 해야겠는데... 저는 안 되겠습니다. 아직 한국은 안 됩니다. 진화론의 허구를 반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때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는 겁니다. 그때 마침 미국에서 카이스트로 막 부임한 김영길 박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는 ‘저는 생물이나 생명공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저라도 순종하겠습니다’ 했습니다. 그가 한동대에 갈 때도 아마 그런 산앙으로 그렇게 결단했을 겁니다. 이런 분이 시험받으실 땐 분명히 한동대에 큰 발전과 하나님의 계획과 축복이 있을 겁니다. 이번 사건으로 한국 교회에도 주시는 메시지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은 한동대가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기독교 대학의 모델이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김영길 박사가 속히 출감하도록 기독교 인구 1,200만 명과 교회들이 각계각층의 기독교 양심과 신앙과 기도를 모아야 겠습니다.
이 자리에는 각계각층에서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는 귀한 신앙인들이 모였습니다. 한국 교계가 힘을 결집하면 세계적인 기독교 리더 국가가 될 수 있으며, 엄청난 에네르기가 창출될 수 있습니다. 한동대가 세계 제일의 기독교 대학이 되도록 한국 교회 전체가 힘을 합쳐 재정적인 뒷받침을 해 주어야 합니다. 세계 각처에서 배워 가는 모델 대학이 되도록 한동대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금의 이 시련은 이를 위한 하나의 필수 코스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은 분명 신앙과 양심과 의로움에 대한 하나의 핍박이요 순교적인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여기 모인 것입니다.“ 뒤따라 김진홍 목사님(두레교회)이 단 위에 서셨다.
“저는 이번 일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몇 가지 이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한동대는 개교 이래 송사를 너무 오래 끌어서 방어하기도 참 힘들었는데, 본인들이 좀 힘들게 값을 치르고 있지만, 이번 일로 모든 송사 사건이 완전히 종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둘째, 이번 일로 한동대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한동대가 참 좋은 대학이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셋째, 이 사건으로 기독교계에 한동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앞으로 좋은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갈대상자’는 참으로 좋은 후원 운동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이번 기회에 한동대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한동대 안에 있는 사람들이나 밖에 있는 우리 후원자들이 성경적 가치관을 가르치며 실천하는 대학이라는 한동대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면 전화위복이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일본 게이오 대학 총장이 고등 교육에 대한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 일본, 한국 등 선진 산업 사회가 대학 교육에 실패하는 이유 세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이것이 시정되지 않으면 선진 산업 국가의 장래가 염려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고등 교육 기관들이 젊은이들에게 삶의 의미(Meaning)를 심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육의 목적이 취직이나 잡다한 처세술 교육이 아닌, 삶의 의미를 심어 주는 교육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둘째로, 대학 교육이 학생들로 하여금 조국관에 대한 사명(Mission Mind)을 심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젊은이가 서당에 들어가면 어떻게 자기를 수신(修身)하고 제가()해서 천하(天下)를 경영할 것인가를 주입시켜서 최고의 도덕성과 경륜이 있는 엘리트를 길러 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육은 이것을 실패했습니다. 부모 시대에 겪는 고난을 몸으로 익히지 못한 세대는 지난날 고난의 역사를 되풀이한다는 것이 역사가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한동대를 가능성 있는 대학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식보다 먼저 학생들에게 분명한 성경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확고한 삶의 방향과 의미를 심어 주는 대학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동대에 꼭 바라는 것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양보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큰 대학이 되려고 하지 말고, 작지만 알찬 대학이 되었으면 합니다. 졸업생들이 취직 많이 되었다는 것도 굉장한 자랑거리지만, 졸업생들이 취업을 해서 그 직장에서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탁월한 도덕성을 가리고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동대에 가서 집회를 했을 때,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교수님들이나 학생들이 지역 사회를 정성껏 섬기려는 모습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이 피서객이 떠난 해변의 쓰레기를 줍고 마을 봉사를 하고 지역 사회를 섬기려는 뜨거운 마음을 보았습니다. 학생 시절부터 그렇게 섬기는 정신을 체득하면 그런 삶의 태도는 평생 갈 것입니다. 이런 시련 과정을 통해 한동대는 바람직한 대학, 세계 속의 대학, 한국 교회 모두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미래의 대학을 이루어 가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친구 대표로 김인수 고려대 박사(2003년 소천하셨다)가 나섰다.
“김영길 총장님은 그의 학문적 업적에 비해 권위나 교만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소박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바울과 실라가 마게도냐로 갔을 때 그들을 기다렸던 것은 모진 매와 착고와 감옥이었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의 부름이라고 확신하고 따라갔던 한동대 총장의 길은 7년여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재정 압박과 수십 차례에 걸친 소송 사건이 이어지는 매와 감옥이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종종 그가 만약 보통 사람이었다면 1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길이 험함을 미리 아시고 단순하고, 낙천적이고, 대범하고, 성실하며 열정적인 성품을 가진 그 분을 뽑아서 그 일을 맡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경험이 부족해서 여러 가지 서툰 결정을 했으리라고 충분이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그분이 거기에 갔기에 오늘의 한동대가 있게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경영학 중에서도 조직이론이 전공입니다. 제가 전공하고 연구하고 있는 분야가 조직문화입니다. 조직이론에 따르면 조직문화가 정착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CEO, 즉 가장 위에 잇는 책임자와 비전과 철학 정립이요, 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의 지도자의 솔선수범이라고 합니다. 한동대에 아름다운 조직문화가 세워져 가는 것은 김 총장의 비전과 철학, 무엇보다 그의 솔선수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이 사회에서는 요령이 있어야 살아남고 출세한다고 하는데, 이때야말로 바보스러울 만큼 우직스럽게 기본을 지키며 올바르게 사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용기 목사님(여의도순복음교회)과 정진경 목사님(신촌성결교회) 두 분의 기도로 그날의 모임을 마쳤다. 어느 분이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을 사랑하는 분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교파를 초월해 각계각층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렇게 모인 자리는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분으로 인해 우리 기독교계가 하나 되게 하십시다.”
◈ ‘나의 매임’을 신뢰하므로
2001년 4월, 한국의 몇 개 대학을 방문하는 길에 한동대를 찾아온 칼빈 대학 바이크 총장은 미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두 대학 간의 자매결연을 추진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벤더라이 교수를 한동대로 보냈다. 바이크 총장은 무엇보다 한동대 학생들이 그의 설교를 알아듣는 것과 학교의 신선한 분위기에 크게 감동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벤더라이 교수가 한동대에 도착한 날이 공교롭게도 남편과 부총장이 구치소에 수감된 날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에 벤더라이 교수는 어쩔 줄 몰라했다. 총장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하필이면 자매결연을 하려는 대학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그녀는 총장이 구속된 대학과 자매결연을 추천해도 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고, 나중에 그 당시 심정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학교에 일주일 동안 머무르면서 교수들과 학생들이 옥에 갇힌 총장, 부총장을 위해 하루 몇 차례씩 채플에 모여 눈물로 기도드리는 광경에 감동을 받았으며, 차츰 사건의 전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바이크 총장에게 보고 느낀 그대로 장문의 보고서를 보냈다.
칼빈 대학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했는데, 그 자리에서 “한동대의 법정 문제가 해결되고 총장과 부총장이 감옥에서 나온 후에 자매결혼을 추진해도 좋을 것 같다”는 몇몇 교수들의 의견에 바이크 총장은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바울과 요셉이 죄가 있어서 감옥에 갔습니까? 이 시대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대학은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한동대의 지체하지 않고 동역해야 합니다.” 그래서 칼빈 대학은 자매 대학의 총장이 감옥에 있는 중에, 한동대와 협약을 맺게 된 것이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 1:12) 그해 가을, 1년 동안의 안식년을 칼빈 대학에서 보내게 된 한동대 한윤식 교수 부부가 말했다.
“총장님, 총장님이 겪으신 고난 때문에 저희가 이곳에서 너무나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교정에서 마주치는 칼빈대 교수들은 저희를 보면 다가와서 우리 학교의 소식과 총장님의 안부를 물으며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줍니다. 또 월급을 제때 받지 못했던 대학의 교수라고 저희에게 가구까지 구비된 새로 단장한 아담한 주택을 무료로 제공해 주었지요. 이런 대우는 칼빈대에서 안식년을 보낸 어떤 교수들도 받아 보지 못한 예외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이듬해 우리 부부가 그랜드 레피즈(미시건)의 칼빈 대학을 방문했을 때, 바이크 총장은 교무직원 부부들과 함께 베풀어 준 만찬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잊지 않았다.
“프리지던트 김, 한동대를 보면 오늘날도 한동대에서 성령 행전이 쓰여지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런 대학과 자매 결연을 맺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후 칼빈 대학은 한동을 잘 이해하며 활발하게 교류하는 자매 대학이 되었다.
◈ 돈 걱정에서 놓여나서
2001년 봄, 학교를 사랑하는 어느 목사님이 남편에게 물었다.
“한동대에 가장 시급한 돈이 얼마쯤 있으면 됩니까?” 뭔가 좋은 일이 있을 듯 보였다.
“학교 부채 100억여 원과 생활관, 도서관, 체육관, 그리고 또... 서울에 국제법률대학원 건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선 급한 대로 약 300억 원만 있으면....” 우리는 마음껏 청구서를 작성하듯 신이 나서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총장 부총장의 법정 구속 사건이 일어났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고 디모데를 보냈듯이, 그 목사님은 포항으로 사람을 내려 보냈다. 그분은 오 부총장 부인과 나를 따로 보자고 하시더니 은밀히 말했다.
“권사님, 돈 300억 원이 6월 말쯤에 학교로 들어올 것입니다. 전에 말씀 드렸듯이, 미국에 있는 어느 기업가가 한동대에 기부금을 내겠다고 합니다.” 학교에 돈이 없어서 이 지경이 되었는데, 돈 문제만 해결된다면 어떤 억울함이나 수모도 얼마든지 참아 낼 수 있었다. 비록 두 사람은 감옥에 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멋지게 보상해 주시는구나! 이제 우리의 서러움도 끝나는구나! 나는 너무도 감격해서 남편이 감옥에 있다는 사실도 잊을 지경이었다. 그 말을 듣던 오 부총장 부인은 코피를 쭈르르 흘렸다. 우리는 함께 울었다. 이튿날 면회를 가서,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학교 돈 걱정은 이제 하지 마세요. 다 잘될 거예요. 당신은 그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데이트만 하시다가 나오세요.” 은밀한 기쁨을 가진 나는 남편을 만나러 가는 면회길이 더 이상 억울하거나 서럽지 않았다. 씩씩하게 기대에 차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덧 6월이 다 갔지만, 아직 미국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느긋했다. 어느 날, 대구 교도소에서 면회를 마치고 포항으로 오는 차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 목사님이었다.
“권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포항으로 곧 내려가겠습니다.”예감이 이상했다.
“목사님, 무슨 좋지 않은 소식입니까?”
“...그렇습니다.”
“...혹시 그 기부금이 안 된다는 뜻입니까?”
“...네.”
그의 목소리도 기운이 없었다. 갑자기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간 나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저, 그 말씀 듣지 않은 걸로 하고 싶어요.....”
“권사님, 저도 아직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겠는데, 미국에 있는 그 사람의 기업에 문제가 생겼다는군요.”
“아! 하나님... 저희를 어찌하시려고....”
하지만 감옥에 갇힌 남편에게는 당분간 이 소식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그 안에서나마 돈 걱정을 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 사랑의 종소리
오규훈 교목실장과 면회를 갔을 때 남편이 목사님에게 말했다.
“목사님, 야베스의 기도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드리고 있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한동대에 복에 복을 더하사 한동대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한동대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그리고 요즘 <사랑의 종소리>를 즐겨 부르는데, 이 찬송은 부를수록 우리 한동대를 위한 노랫말 같아서 제가 우리 학교에 맞도록 개사해 보았어요. 언젠가 제가 출소하는 날, 우리 한동인들과 함께 부르고 싶습니다.”
주께 두 손 모아 비나니 크신 은총 베푸사
세계로 한동의 지경을 넓혀 주시옵소서
오- 주 우리 모든 허물을 보혈의 피로 씻기어
하나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서로 믿음 안에서 서로 소망 가운데 서로 사랑 안에서 손잡고 가는 길주께 두 손 모아 비나니 크신 은총 베푸사
주가 예비하신 한동대 크게 사용하소서
오- 주 우리 맘에 새 빛이 어두움 밝게 하시어
하나님 말씀 안에서 늘 순종하게 하소서
서로 참아 주면서 서로 감싸 주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주께로 가는 길
오- 주 사랑의 종소리가 사랑의 종소리가
우리 한동인 모두를 감싸게 하여 주소서
그날에 ‘한동의 종소리’를 함께 부를 총장님께
존경하고 사랑하는 김영길 총장님! 그 안에서 <사랑의 종소리>를 다시 쓰셨군요. 출소하는 날 한동인들과 함께 부르고 싶다는 글을 읽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저도 그날, 그곳으로 달려가겠습니다. 그날이 속히 오도록 기도하겠습니다.
98학번 김주헌 학부모 김석균(<사랑의 종소리> 작사, 작곡가) 올림.
오늘 오시려나 내일 오시려나...
요즘 저는 집을 떠난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입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엔 정말 잠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초해질 때가 많지만, 면회를 다녀오신 분들은 통해 총장님, 부총장님 소식을 들으면 안도의 한숨을 쉬곤 합니다.
평소에 싫은 말씀 잘하시지 않는 두 분이시기에 잘 지내고 있다는 말씀만 하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지내신다고 해도 어찌 그것이 잘 지내는 것이겠습니까? 두 분의 성품을 알기에 그 말씀을 하실 때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표현은 하지 않으시지만 아랫사람을 늘 배려해 주시는 총장님의 순수한 마음과, 한사람 한사람을 자식같이 여기시는 부총장님의 마음...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기에 감히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작은 일 하나에도 직접 자신의 지갑을 여시던 총장님... 옆에서 직접 본 저로서는 도저히 ‘횡령’이라는 단어와 총장님을 연결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부총장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편하게 쓴 편지가 아님을 알기에 참 감사했습니다. 많은 분들의 격려 편지를 통해 큰 힘을 얻고 계신하고 하셨습니다. 아마 총장님도 같은 마음이실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실 것입니다. 총장님과 부총장님께 힘을 드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두 분의 건강을 위해,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총장님과 부총장님의 매일의 삶 속에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밖에는....
비서실 박남주 올림.
화원교도소
매일 아침, 포항을 떠나 길을 달려, 남편이 있는 대구의 화원교도소를 가는 것이 내 일과가 되었다. 내게는 포항과 대구 사이가 한 뻠쯤밖에 안 돼 보였다. 화원이라는 이름 그대로 교도소 안은 향기로운 꽃들의 정원이 있는가.
교직원들은 면회 스케줄을 짜서 차례차례 면회를 왔다. 5분 동안의 짧은 면회를 위해 모두들 먼 길을 달려오는 것이다. 대구에 있는 학부형들은 매일 총장을 면회하러 오는 분들을 접대하기 위해 화원교도소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감옥)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나님께서는 감옥도 화원과 같은 천국으로 만드셨다.
서울에서도 미국에서도 면회하러 오시는 분들이 줄을 이었다. 전에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들도 많았다. 그들은 책과 영치금을 넣어 주시기도 했다. 그 수많은 감동스런 만남들을 어찌 글로 다 쓸 수 있으랴! 두 분이 구속됨으로써 수십 차례나 되는 고소 사태, 끈질긴 훼방과 음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한동대 사건들의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었다.
더위를 유난히 타는 남편이 그 안에서 대구의 여름 더위를 겪을 것을 생각하면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보석 결정이 언제 날지 알 수 없었으나, 그 안에서 남편의 영혼 안에 하늘나라의 화원이 펼쳐지고 온갖 향기로운 은혜의 꽃들이 활짝 피기를 나는 기도했다.
◈ 위로에 위로를 더하시고
학교로 들어오는 수많은 이메일은 온통 총장과 부총장께 드리는 사랑의 메시지들....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의 글귀들이었다. 세계 각처에서 전화와 이메일이 넘쳐 흘러오고 있었다.
“사모님, 뉴질랜드에 있는, 문영준의 아버지입니다.” 문봉주 뉴질랜드 대사(현 본부 대사)였다.
“뉴스를 듣고 너무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사모님,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듣고 주님께서는 이틀을 더 계시다가 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를 기다리는 가족들에겐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의도가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던 것이지요. 사모님, 억울하고 고통스럽지만 조금만 참으십시오. 총장님을 감옥에 가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번 일로 한동대의 고난이 세상에 알려지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멀리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작은 후원금을 보냅니다. 총장님의 재판 비용으로 보태시기 바랍니다.” 문 대사 부부는 맏딸의 결혼 자금으로 모아 둔 만 달러를 학교로 보내왔다. 며칠 뒤,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한동대 총장님 사모님이시죠? 저는 김포에 사는 맹 권사라고 합니다. 홍콩에서 스튜디어스로 근무하는 제 딸이 총장님의 신문 기사를 읽고 너무나 가슴 아파하면서, 총장님의 보석금에 보태라고 돈을 부쳐 왔습니다.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몰라서, 사모님의 전화번호를 겨우 알아내 이렇게 전화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어떤 분이신지, 꼭 만나 보고 싶군요. 따님이 귀국하시는 기회가 있으면 학교를 방문해 주세요. 그 귀한 후원금을 그때 받으면 좋겠습니다.” 6월 중순 인자한 맹 권사님과 그의 예쁜 딸이 학교를 찾아왔다.
“사모님, 대학 시절 제가 가르치던 학생이 한동대를 지원해서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 저는 한동대를 위해 늘 기도하고 있어요. 그때와 지금의 한동대는 놀랄 만큼 변했어요. 저는 지금 하나님께서 한동대와 함께하시는 증거를 보고 있습니다.” 맹 권사님의 딸은 두 개의 봉투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사모님 제가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여비를 절약하며 모아 온 돈이랍니다. 앞으로 한동대가 세계 속으로 뻗어 나가는 대학이 되어서 총장님의 한동대의 비전을 들고 이 나라들을 방문하신다면 제겐 더없이 큰 영광이겠습니다.”그녀가 바로 홍콩 캐세이퍼시픽 항공의 스튜어드시 김정래 자매이다.
6월말 경 대구 화원교도소로 가는 차 안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사모님, 저는 김정화(현 엔테일러 한국 지사장)라고 합니다. 저희 회사 직원들과 저는 총장님과 한동대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얼마 안 되는 후원금이지만 작은 위로로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며칠 지나서 나는 그녀를 서울에서 만났다.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제 질녀가 3년 전에 한동대와 E대에 동시에 합격했어요. 무남독녀라 먼 곳에 보낼 수 없다는 언니 내외분의 만류로, 지금 E대에 다니고 있지요. 하지만 제 질녀는 자기 학교보다 한동대를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작년에 캐나다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을 갈대상자로 보내기도 했어요. 그때 총장님이 친히 답장을 보내 주셔서 제 질녀는 무척 감격했답니다. 사모님, 사실은 제 고향이 포항입니다. 한동대를 어렵게 하는 몇몇 사람들을 대신해서 제가 사과드립니다. 그들이 하나님 살아 계심을 모르고 하는 일들이니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적지 않은 후원금을 주며 나를 위로했다.
“하나님께서 총장님에게 학교 재정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하시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도 하시지만, 이 연단을 통해 한동대는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재정 문제도 풀릴 날이 올 것입니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서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 66:9-12) 남편의 카이스트 제자들이 재판 비용 성금을 거두어 면회를 왔었다. 그들에게 나는 물어보았다.
“교수님이 이렇게 세상에 떠들썩한 뉴스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던가요?” “사모님, 우린 교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변함없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겁니다.”
◈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석사, 박사 과정 5년 반 동안 가르침을 받으면서. 제가 본 교수로서의 김영길 박사님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생각나는 것만 적어 봅니다.
-사소한 학용품이라도 연구에 사용되는 것은 제자들 개인들이 지불하지 않도록 하신 교수님.
-제자의 연애가 잘 되지 않아 연구에 지장이 있으면 여자 친구를 직접 만나서 제자를 칭찬해 주신 교수님.
-의료보험이 안 되는 기혼 학생의 출산이 다가오면 전전긍긍 좌충우돌하시며 장학금 받아 주신 교수님!
저는 교수님이 가장 사랑한 제가가 저인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이번 일로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섭섭(?)했습니다. 검찰의 기소 요지를 보면서 저는 교수님에 대한 신뢰가 더 커졌습니다. 역시 교수님이시구나... 이번 일은 한동대에는 더 큰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고 교수님은 역사에 길이 남는 교육자로서 우뚝 서실 것입니다. 사모님, 걱정하지 마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제가 한재광 올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저는 김 총장님이 한국에 귀국하셔서 카이스트 교수로 계실 때 첫 번째 제자였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총장님을 옆에서 지켜보았고 또한 제가 현재 카이스트 교수로 있기까지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제가 아는 김 총장님은 특이하신 분입니다. 지극히 순수하시고 진리를 찾고 행하시는 데 고집스러운 분이십니다. 결코 자신의 이익이나 불의와 타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일이 있습니다. 한동대를 맡고 한창 어려워하실 때 김 총장님은 만약의 경우 다시 복직할 수도 있었던 카이스트 교수직을 본인의 의사로 사임하시면서 사직의 절차를 빨리 밟아 달라고 제가 행정적인 일을 부탁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한동대 교직원들의 월급을 지불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김 총장님은 본인의 퇴직금을 교직원의 월급으로 사용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거의 20년을 봉직하셨던 직장의 퇴직금이었습니다. 노후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김 총장님의 한동대 사랑과 교직원과 학생들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셨습니다.
비록 현재의 상황은 어두운 고난의 길이지만, 진리가 승리할 것입니다.
백경욱(카이스트 재료공학과 교수)
그 어디나 하늘나라
지난 6월 5일, 회사에 하루 휴가를 내고 아내와 함께 대구 교도소에 계신 김 총장님을 뵈러 다녀왔습니다. 단 5분의 짧은 면회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 시간이었습니다. 카이스트 교수로 계실 때 보여 주셨던 학문적 권위에 우러러 보이던 스승의 모습이 아니라, 고무신에 황색 수의를 입고 계신 남루한 모습이셨습니다. 순간, 놀라움으로 숨이 턱 막혀 왔습니다. 아내와 함께 뵈러 갔지만, 아내를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총장님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존경하는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모님의 심정은 오죽 하시겠습니까? 오직 주님께서 그 아픈 마음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학문적 업적과 보장된 명예와 경제적 안정을 마다하고, 신앙으로 한동대로 자리를 옮기신 이후부터 겪어 오신 지금까지의 어려움은 덮어 두더라도 현재 총장님이 처하신 환경과 처지가 분명 시련과 고난 그 자체일 텐데, 오히려 평안과 기쁨이 넘치시는 모습이셨고 여전히 온화하고 자상한 모습이셨습니다. 아무리 우리 삶의 여건이 힘들고 고달프다 할지라도 진정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총장님, 존경합니다. 어려운 시련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드러낼 수 잇는 귀한 열매 맺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정훈(박사, 두산 중공업)
조국을 사랑한다면 한동대를 배워야 합니다
조국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 지났고, 뉴욕의 호프스트라 대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지 14년이 됩니다. 한국의 기업들을 자문하기 위해 1년 4개월을 한국에서 보내며 조국의 앞날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 우리는 언제나 세계적인 한국이 될 것인가? 삶과 인격을 길러 주는 교육은 불가능한 것일까?’이런 안타까움은 작년 한동대를 방문하고 김영길 총장님과 잊을 수 없는 신선한 하루를 보내고 난 후 사라지고 있습니다. 한동대를 거닐며, ‘하나님의 대학’임을 드러내며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많은 대학들을 방문했던 나는 한동대와 총장님을 떠나오며, 자꾸 되돌아보았습니다.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한동대가 우리 조국의 미래를 살릴 것이다.”어려움은 어디에나 있고 아픔은 항상 있습니다. 김영길 총장님의 구속 소식은 도리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계시는 구나’ 하고 받아들여졌습니다. 조국의 앞날에도 빛이 있습니다. 포항에서 시작된 빛이 이 나라를 덮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하나님 사랑과 애국의 발걸음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이근석(뉴욕 호프스트라 대학 교수)
총장님과 식사를
어제는 방학이라 한산한 학교 식당에서 교목실과 생활관의 몇 분들과 함께 점심을 했어요. 그런데 문득 제 앞에 보이는 벽에 누군가 크게 그려 놓은 캐리커처 형식의 총장님 초상화가 걸려 있었어요. 그 귀엽고(버릇없다고 야단치실지 모르지만) 따뜻한 웃음을 머금으시고 오른손을 흔드시며 바라보시는 총장님의 모습이요.... 누군가가 총장님께서 빨리 돌아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려 놓은 것 같았아요. “어, 총장님이네, 잘 그렸다” 하고 말했지만, 어제부터 계속 총장님의 웃음이 어른거립니다. 저보다 엄마가 오히려 더 슬퍼하시고, 저에게 왜 이리 무덤덤하냐고 나무라시죠. 하지만 제 마음은 그렇지 않거든요. 총장님...!어제는 총장님의 그림을 마주하고 식사를 했지만, 곧 총장님의 생생한 웃음을 마주할 날이 속히 오기를 마음속 깊이 바라고 있답니다. 총장님, 붐비는 식당에 나타나셔서 갑자기 머리를 어루만지시던 일, 등을 두드리시던 일.... 졸업을 한 후에도 총장님의 그런 모습을 만나게 되면 어떤 신입생보다도 더 들떴던 저랍니다. 어떤 분은 총장남을 너무 우상화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시자만, 그건 저희의 마음을 잘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총장님은 저희 영원한 아빠 같은, 사랑하는 분이시거든요. 아버지를 사랑하고 마음을 표현하고, 그런 분을 위해 아픈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게 결코 ‘우상화’는 아니잖아요. 총장님, 금요일에 다시 법정에 서시죠? 왜 이리 제 마음이 떨릴까요? 기도하겠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더운 여름날, 한동대 교목실에서 박성애 드립니다.
총장님! 필리핀 말썽쟁이 준우예요. 기억나세요?
저 처음에 학교 왔을 때 머리를 야자수처럼 깎고 다녔잖아요. 근데 사모님이 머리 단정하게 하라고 그러셔서 머리 꽁지를 잘랐잖아요. 근데 나중에 총장님이 지나가시디가 저를 보더니 막 뛰어오셔서 ‘와락’ 안아 주셨잖아요. 그러면서 총장님이 너무 좋아하셨어요. “준우가 한동대 와서 사람됐다구...” 히히 그리고 손님들 오실 때마다 저보시면 소개시켜 주시면서 “얘가 준운데, 필리핀에서 왔는데, 한동대 와서 사람 됐어요... 너무 모범생이에요.” 그런 말씀하실 때마다 너무 창피하기두 하구 감사하기구 하구 황송하기두 하구요.
저는 총장님이 안아 주실 때 너무 기분 좋아요. 오늘 10시 기도회에서 이런 말씀을 봤어요. 요한복음 14장 18절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이 말씀이 마음에 팍 와서 꽂혔어요. 이 말씀을 보고 너무 감사했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신다는 거, 너무 든든하고 감사한 말씀이었어요.
총장님. 힘내세요. 주님께서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총장님께로, 부총장님께로 오신대요. 아시죠? 말 안 해두. 그래두 말해야겠죠. 총장님, 사랑해요! 필리핀 말썽쟁이 준우 올림.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자
큼언니들은 다 그런 법인지 우리끼리만 살다가 96학번이 들어왔을 때 그 설렘이 얼마나 컸는지 아마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오랫동안 동생 낳아 달라고 조르던 맏자식의 심정이었지요. 정말이지 우리는 96학번을 위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때 처음 학교에 소요가 일어났었지요 95학번들은 행여 동생들이 다칠까 마음 졸이며 참 많은 것을 포기했었습니다. 겨울에 물이 끊긴 적도, 전기가 끊겨 냉방에서 자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95학번들은 모여서 이야기했습니다. 조금만 참자. 우리가 견디자. 우리 후배들은 이런 거 모르도록 힘든 건다 우리 몫이라고 생각하자. 그것이 그 소요 속에서 우리를 견디게 해 준 힘이었습니다.
한동대는 그렇습니다. 한동대는 하나님의 대학이니까요. 처음 우리가 입학해서 맞본 그 감격을 10년, 50년 후배들에게 그대로 전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것은, 힘든 것은 우리가 다 가져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온 게 늘 마음에 걸립니다. 이번 이로 마음 아파할 후배들을 생각하니 학교가 눈에 밟힙니다. 아마 이번 일도 5년쯤 흐른다면 하나님의 일임을, 합해서 선을 이루시는 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안합니다. 이 일까지 우리가 다 겪고 학교를 나왔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미안합니다.
95학번 학생
◈ 찬란한 수의
2001년 6월 29일, 구속된 상태에서 고등법원의 첫 재판이 열렸다. 전날 밤 이종순 변호사가 전화를 주었다.
“확정 판결 전에는 양복을 입고 법정에 나갈 수 있으니, 오늘 면회 갈 때 총장님의 양복을 준비해서 가세요. 총장님이 죄수복을 입고 법정에 서신 모습을 보는 학생들, 교수들, 그리고 학부형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교도서의 신우회 회원들이 조심스레 조언해 주었다.
“사모님, 양복을 입어도 포승줄을 묶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개인 비리가 아니고 학교를 위해 맡기는 사명을 감당하다가 여기까지 오신 총장님이 입으신 관복(수의)은 오히려 자랑스럽고 찬란한 수의(囚衣)입니다. 저희가 출정에 대비해 옷을 깨끗하게 빨아서 준비해 두었습니다.”
우리는 두 번 일어섰습니다.
29일! 아침 일곱 시를 기다려 대구로 향하는 차 안에서는 그 누구도 아무 말 없이 그저 무표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함께 차를 타신 교수님들께서도 조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머리 속으로는 복잡한 사연들을 되뇌고 계신 듯 보였습니다.
‘오늘 굉장한 사람의 재판이 있나?’ 다급히 밀려들어 오는 우리들-전국에서 오신 학부모님, 교수님, 학생들 아마 300여 명은 될 겁니다-을 본 사람들의 놀란 표정을 뒤로한 채, 41호 법정으로 올라온 우리들은 그때부터 입을 다물었습니다. 행여나 우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재판에 악영향을 줄까 하여 전전긍긍했음이 옳은 표현일 겁니다. 좁은 법정에 차곡차곡 한 명이라도 더 밀고 들어가 우리는 마음을 졸이고 숨을 죽였습니다. 10시 판사들이 들어오자 일어서라는 구령에 따라 우리는 모두 일어섰습니다.
부총장님께서 들어오시고 잠시 후, 총장님께서 법정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다리가 불편하신 부총장님이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습니다. 총장님께서는 약간 야위셨으나 단정하신 머리 모습에, 조금은 시원해 보이는 수의에 그래도 약간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실 때마다 속이 상하고 억울했습니다. 왜 저 자리서 저렇게 긴장하셔야 하나? 주먹이 쥐어졌습니다.
“주여, 사랑해 주시옵소서, 지혜 주시옵소서.”
요점을 파고드는 변호인단의 변호를 위로 삼으며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습니다. 검찰 측에서 심문할 사항이 없다 하여 더욱 안심이 되었습니다.
총장님과 부총장님께서 일어나셔서 돌아서시는 순간, 몸에 전율이 왔습니다. 순식간에 모두 기립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누가 먼저 일어나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구령을 부른 것은 더더욱 아니었지요.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 모습! 지금도 눈물이 핑 돕니다. 다음 열릴 재판을 위해 조용히 나가 달라는 안내가 무색하도록 모두들 조용히 조용히 법정을 빠져나오자, 오히려 멍한 표정을 짓던 재판부와 법원 직원들의 그 모습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도무지 안에 보이지 않는 호송 차량이 지나가는 길에 일렬로 늘어서서 총장님과 부총장님 뒤에는 하나님 외에, 우리도 이렇게 버티고 있음을 알리려고 무조건 손을 흔들었습니다.
총장님, 부총장님! 마른 장마인지 덥기는 이루 말할 수 없고, 비는 아직 오지 않습니다. 교도소 안은 얼마나 더울까요.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01학번 손지현 학부모 김혜옥
고난 속의 잔치
대구동신교회(권성수 목사)의 고마운 배려로 재판이 열릴 때마다 법원에서 10분 거리인 그곳에 학부모와 교수와 학생들이 모였다. 재판에 참석한 수백여 명 분의 점심 준비는 언제나 대구 학부모들의 몫이었다. 그날 교회 식당은 잔칫집 같았다. 앞치마를 두른 대구 학부모들이 푸짐한 음식을 부지런히 나르고, 서울에서 새벽부터 길을 떠난 분들을 대접하느라 신이 났다.
“감옥에서 고앳하시는 총장님, 부총장님에 비하면, 이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제 두 분이 나오셔서 재판을 받으시면, 춤이라도 출 듯 음식을 장만할 겁니다.” 그 자리에서 이종순 변호사가 말했다.
“한동대는 참으로 이상한 학교입니다. 김 총장님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인 그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또 국무총리까지 지내신 이영덕 박사님이 고난과 역경이 있는 한동대 이사장이 되신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또 하용조 목사님 역시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늘 변함없이 학교를 돕고 계시니 이상한 일입니다. 서울에서 20여 년 동안 변호사로 바쁘게 지내던 제가 포항 한동대의 변호사가 된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더욱 이해가 가지 않은 분들은 학부모님들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분들이 여기 다 모인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에 학부형회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유치원 학부모도 아닌데, 전국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대구까지 오셔서 이렇게 재판정을 메우니,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상식 밖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저도 함께 있는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한동대 재판 과정을 보면 처음 시작한 재판장이 재판을 끝낸 적이 없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재판장이 바뀔 때마다 공정한 재판장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친히 재판장이 되실 것입니다. 여러 학부형들께서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시니 저는 큰 걱정을 안 합니다. 계속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가운데도 학부모들은 즐거운 이야기들로 웃음꽃을 피웠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서울에서 대구로 떠나는 아내를 새벽에 집합 장소까지 운전해 주던 한 아버지는 “당신이 새벽같이 일어나 이렇게 가지 않으면 한동대에서 당신 아들 졸업 안 시킨답니까?”라고 말했다거나, “우리가 늙어서 치매에 걸리면 각자 출신 대학은 잊어버리고 ‘우리 한동대 몇 회 졸업생이지? 우리 팀 교수는 누구더라? 아, 참 머리가 하얀 김영길 교수였지’ 하겠어요” 해서 모두들 웃었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시146:6-7)
서울에서 대구까지 왕복 10시간! 하지만 그 시간은 뜨거운 간증 시간이었다. 자녀를 한동대에 보내게 된 이야기며 한동대에 온 이후 자녀들의 변화된 모습들을 서루 다투어서 말하려는 통에, 5분을 넘으면 벌금(만 원)을 물기로 했다. 그랬지만 결국 차에 탄 분들 모두가 벌금을 내는 바람에 학부모 기금이 많아졌다고 즐거워들했다.
◈ 한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디딤돌
6월 6일, 다섯 분의 교수님들과 함께 대구 교도소를 향해 출발했다. 교도소 앞에서 한동대 첫 순교자인 강경식 군과 권영민 군의 부모님들을 만났다. 영민 군의 어머님은 매일 교도소로 출근하고 있었다. 두 분 사모님들이 혹 점심을 못 드실까 챙겨 드리기 위해서였다.
잠시 부총장님의 모습을 뵐 수 있었다. 그는 밝은 모습으로 두꺼운 플라스틱 판에 손을 마주치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같이 간 교수님의 표현처럼 입고 계신 갈색 수의는 오히려 영광의 옷처럼 보였다. 드디어 총장님 면회 시간이 되었다. 검은 플라스틱 안경을 쓰신 총장님의 어린아이 같은 얼굴은 안경 너머로 빛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총장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총장님이 같이 온 강경식 군의 부모님을 보시고는 얼마나 반가워하시는지! 그들의 아름다운 순교가 오늘 한동의 영적인 기초를 세우는 첫 디딤돌이 되었다면, 총장님의 이번 일은 한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또 하나의 디딤돌이 되리라! 그들 두 디딤돌과 같은 분들이 오늘 교도소에서 만나 것이다. 많은 대화는 없었지만 눈빛으로 나누는 감동을 옆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밝은 발걸음으로 들어가시는 총장님의 두시모습을 뵙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 동안의 이야기에 한동안 눈시울을 붉히시는 박을용 교수님! 순교와 고난의 아픔을 통해 세워지는 한동대! 하나님의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주님께 찬양드린다.
제양규(한동대 기계제어시스템공학부 교수)
세상에 이런 대학이 또 있을까
오늘 저녁, 학생들이 준비한 총장님, 부총장님 석방을 위한 아름다운 모금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한동대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대학이고, 그 증거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총장님이 구치소에 계시지만,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습니다.”사모님의 말씀에, 한동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하나하나 이루어지고 있다는 두려움과 기쁨이 저를 뒤덮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캠퍼스에서 학생들과 어울려 지내는 저 자신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구치소로 면회 갔을 때, 음식도 좋고 몸도 건강하다시면서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시는 총장님이 보이신 그 미소, 누구도 원망하시지 않으시고 상대방의 잘못을 증명하시기보다, 우리의 입장을 해명하는 방향으로 재판을 해야 한다는 당부의 말씀. 그리고 부총장님의 겸손하심을 보았습니다. 매일같이 구치소로 출근해서 사모님과 한동 식구들에게 정성껏 식사 대접을 하시는 영민 군의 어머니도 만났습니다. 6년 전 피지에서의 순교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 저는 천국에 있다는 환상에 젖었습니다.
총장님, 한동에서의 제 생활은 늘 그렇게 감사함으로 다가옵니다. 오늘도 한동대 웹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격려 편지를 읽으며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다가, 찾아 오신 손님으로 곤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총장님, 부총장님의 구속이 저희에게 은혜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를 내세우며 불평하고, 총장님, 부총장님의 고생하심을 몰라라 했던 성숙하지 못한 저희들이었습니다. 자격이 없는 부족한 사람이지만 늘 과분하게 대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교수님들도 한동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감사함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자문해 봅니다. ‘세상에 이런 대학이 또 있을까?’ 총장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배건웅(한동대 기계제어시스템공학부 교수)
◈ 옥문이 열리던 날
초여름 더위가 시작되면 7월 4일, 수감된 지 54일 만에 남편과 오 부총장님은 보석으로 풀려 났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서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시 17:13-16) 보석으로 석방이 결정된다는 통보를 받고 남편이 입을 양복을 챙기는 나의 손이 한없이 떨렸다. 어제까지의 면회 갈 때와는 사뭇 달랐다. 싱그러운 초여름의 산천이 그제야 총천연색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대구 화원교도소 앞은 모처럼 기쁜 얼굴들로 가득했다. 학부모와 교수와 학생들이 환영 현수막을 들고 마중 나와서 목을 늘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두 사람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 순간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두 사람은 일일이 마중 나오신 분들께 인사를 드리는 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던 교도관 몇 사람이 눈가에 손수건을 가져갔다. 그리고 감회 어린 얼굴로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냈다.
“사모님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이 안에서 총장님과 부총장님 모시고 참으로 소중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교도관 생활 십수 년 만에 우리 나라에도 이런 분들이 계셨구나... 소망을 가질 수 있었어요.”
◈ 옥문이 열리던 감동의 순간
2002년 7월 3일 오전 11시쯤,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총장님과 부청장님이 보석으로 나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몇몇 교수님들과 대구 교도소로 향했습니다. 몇 시에 나오실지 아무도 몰랐지만 무작정 버스에 올랐습니다.
학부모님, 교수님들과 함께 두 분이 걸어 나오실 정문을 바라보며 기다릴 때, 처음 구속되실 때부터 어려웠던 일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참 힘드셨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후 3시쯤 총장님, 부총장님이 곧 나오신다는 전갈과 함께 멀리 교도소 정문이 열리고 걸어 나오는 두 분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왠지 멍해지더군요. 총장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검을 뿔테 안경에 양복을 입으신 총장님께서는 만감이 교차하시는 표정으로 맨 앞에 계신 선린병원 김종원 협동 원장님(88세)을 껴안고 흐느껴 우셨습니다. 뒤에 서 있는 교수님, 학부모님, 학생들도 눈시울이 붉어지며 총장님과 부총장님을 맞았습니다. 생각보다 건강하신 것 같아 보였고 아무 말씀 없이 거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모두 껴안으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이처럼 울컥 울음을 터뜨리시는 몇몇 교수님들도 계셨구요, 교도관과 그곳의 책임자도 총장님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다며 울먹이셨습니다. 두 분은 건강 진단을 받으로 포항 선린병원으로 떠나셨습니다.
차 안에서 예전처럼,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시며 손을 흔드시는 총장님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어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었습니다. 갑작스레 가게 된 자리였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2심 판결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총장님과 부총장님이 건강을 회복하시고 평한하게 다시 학교 일을 보실 수 있도록 다같이 기도합시다.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김성민(국제어문학부 00학번)
담장 안에서 본 총장님, 부총장님
지금까지 짧은 생을 살면서 ‘한동대 사건’은 저의 상상을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구속의 부당성이나 즉시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신문 기고문 등이 발표되니 저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김영길 총장님은 하나님을 믿는 분으로,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석학이시고 좋은 자리 마다하시고 포항의 한동대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육성하시는 분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던 저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총장님에 대해 알고 싶어서 관련 책도 구해 보고 한동대 홈페이지도 방문해 보았으면 인터넷 검색도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놀랐습니다. 특히 홈페이지에 올라온 수많은 글들이 저의 생각을 짓누르고 말았습니다. 그 글들은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도저히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교도소 안에서 생활하시면서도 오히려 저희 교도관들이 고생하는 것을 걱정하시고 나라와 민족 그리고 법원 밖에서 자신들 때문에 고생하시는 모든 분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총장님께서 한동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한동의 종소리>를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부총님께서는 연로하신데도 드리어 소년수 감방에 자원하여 함께 생화하며 어린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정신 교육을 시키며 하나님을 전파하셨습니다. 면회 오시는 분들에게 컴퓨터 자격증 책 등 많은 책들을 넣어 달라고 해서 그들에게 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도 모든 학생, 교직원들에게 열심히 주님을 섬기듯 하셨기에 그들이 총장, 부총장님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었나 봅니다.
총장님, 보석으로 출소하시면서 갖고 계시던 돈 전부를 교도소 신우회인 ‘밀알회’에 헌금하고 가신 것, 출소 후에 듣고 날랐습니다. 그 많은 돈을 헌금 하시면서 불우한 수영자들에게 영리금으로 사용해 주실 것을 부탁하고 떠나섰죠. 허락 없이 이곳에 밝히는 것을 용서해 주시오.
마지막으로 총장님이 출소하실 때 정문까지 한재준 화장님의 우리 신우회원들 안내로 나오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 분이 출소하기를 기다리며 눈물을 부둥켜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총장님께서 안경 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시는 모습에 저도 울었습니다. 앞으로 재판의 모든 과정도 모든 분들이 주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는 대로 잘 이루어질 것울 믿습니다.
장덕현(대구 화원교도소)
그해 7월 입시생 수시 모집은 학교의 어려운 상황에도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마흔 넷, 남자의 눈물
눈물 하나, 한동대 수시 모집 시험을 며칠 앞두고 딸아이는 휴대폰으로 연이어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아빠의 뜻에 다르게 한동대 수시 모집에 응시하게 된 것을 용서하시고 기도해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참뜻은 한동대의 꿈과 비전을 모르는 아빠에게 서운함을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한동대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서 눈이 적셔지고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한동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눈물 둘, 수시 시험 날, 정문에 걸려 있는 “총장님, 부총장님, ”사랑합니다”라는 현수막은 별천지로 안도하는 안내문 같았습니다. 10여 명의 예비 학부모들이 모였는데도 파워 플랜, 기도실을 시작으로 생활관 안내까지 해 주었던 학생의 순수함과 성실함에 매료되었습니다. “생활관도 한 동, 강의동도 한 동밖에 없어서 ‘한 동 대학교’라 했는데, 지금은 ‘여러 동 대학교’로 바뀌었다”는 한동인의 재치에 상큼함을 느꼈습니다.
눈물 셋, 6월 29일 총장님의 재판 때문에 수백 명의 한동 신구들이 대구에 모였을 때 동신교회에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시던 학부모님이 아내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학돈대 학부모가 아니라 ‘한동 유치원’ 학부모랍니다. 이렇게 학부모가 자주 모이는 데는 유치원밖에 없으니까요.” 대학에 가서는 그동안 소홀했던 건강을 다지라고 헬스 복을 골라 주는 저도 딸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심정입니다.
눈물 넷,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시84:10) 한동대가 한국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가슴이 뛰고 다시 이십대가 된 느낌입니다. 한동대 의과 대학이 서는 날, 현재의 의과 대학 주임 교수라는 조그만 직책도 던져 버리고, 문지기로 봉사할 수 있는 그날을 꿈꾸며 흐르는 눈물을 닦습니다.
02학번 김한나 아버지(교수, 계명대 의과대학)
02 내가 단정코 나를 구원할 것인즉
◈ 예수의 흔적
석방되던 날, 남편과 오 부총장은 건강 진단을 받기 위해 선린병원에 곧바로 입원했다. “어, 이 방 창문에는 철장이 없네” 하고 병실을 들어서며 농담을 건네던 남편은 피부과 의사들이 병실에 들어오자 내게 말했다.
“당신 좀 나가 있어요.”
무슨 일인가 궁금했지만, 나는 병실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궁금해서 방문을 슬며시 열어 보았다. 그 순간, 엉망으로 짓물러 있는 그의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새빨간 자두빛으로 짓무른 살이 엉겨 붙어 있었고, 살점이 드러나 있었다. 의사가 치료를 해 주고 나간 뒤에 방으로 들어간 나는 놀라서 물었다.
“여보 왜 이렇게 되었어요?”
“못 보게 하려고 나가 있으라 했는데... 별것 아니오. 감방에서는 언제나 반듯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데 하는 것이 그곳 규칙이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땀띠가 난 곳에 곰팡이 균이 번진 것이라오.”“세상에! 이렇게 되도록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니.... 독방에 있으면서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좀 다리도 뻗고 앉아도 보고, 옆으로 앉아 있을 수도 있었잖아요?” 내가 원망스럽게 말하자, 남편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안 돼! 그렇게 하면 안 돼지! 똑바로 앉아 있으라 하면 그대로 해야 해! 감방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어찌한단 말이오? 사람은 못 봐도 하나님께서는 지켜 보고 계신다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7:17)
◈ 수감 번호 433의 수감 일기
병원을 나온 후, 남편은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학교로 달려가 그동안 쌓여 있던 학교 일을 처리하기에 바빴다. 나는 오랜만에 집에서 홀로 엎드려 울었다. 모든 일이 넘치도록 감사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오묘하신 사랑과 역사하심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남편은 재판정에서 법정 구속되어 구치소로 들어가던 날과 감옥에서의 일들을 들려주었다.
벽을 항해 돌아앉으시오
재판장이 판결문 낭독을 마치고 내게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한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소. 나는 판사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소. 판결문의 뜻을 미처 파악할 겨를도 없이 뭐가 뭔지 정신이 멍했소. 횡령이니라...,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니..., 법정 출석을 이유 없이 기피했다니.... 그 순간도 잠시, 교도관들이 들어와 부총장과 나를 재판정 뒷문으로 데리고 나갔소. 문을 나서자 곧 나의 팔목에 수갑이 채워졌소. 차가운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 그제야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오더군.
일부러 법정 출석을 기피했다는데, 그 이유를 뒤늦게야 생각해 보았다오. 처음 선고 재판일로 잡힌 4월 27일은 공교롭게도 1년 전부터 준비해 온 ‘힌동대 주최 국제 법률 학술 대회’ 개최일과 같은 날이었소. 서울 힐튼호텔에서 외국의 저명한 법조인과 교수들이 대거 참여하는 한동대 개교 이래 최대의 학술 대회였으니까 이미 공고된 국제 학회를 연기할 수 없어서 우리 변호사를 통해 정식으로 재판 연기 신청을 할 수밖에 없었소.
결구 교도소로 가는 한 시간 동안 잠시 눈을 감고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이 상황, 막막하고 황망한 이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오. 명료하지 않는 내 의식과 머릿속에 자리 잡은 것은 사랑하는 학생들, 그리고 교수와 학부모들이 받을 충격이었지.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했소. 5월의 하늘이 저렇게 눈부신데, 낯익은 이 길이 어지럽기만 했소. 주님께 무엇을 어떻게 간구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소.
경구 구치소 사무실에서 수감 소속이 끝나자 교도관을 따라 신입자 입소실로 안내되었소. 나는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자루에 담고는, 쌓여 있는 누런 황토색 미결수 옷더미 속에서 하나를 집었소. 손에 잡힌 바지가 하도 헐렁해서 허리에 맞을 만한 것을 찾으려고 했더니 교도관이 말했소.
“아무거나 그냥 입으시오! 다 마찬가지니 고를 게 뭐가 있겠소.” 발 앞에 놓여진 흰색 고무신을 감각도 없이 발에 꿰었소.
“안경을 벗으시오! 금속 테 안경은 이 안에선 규정상 허락이 안 되오. 안경 도수를 알고 있으면 가족 면회 때 플라스틱 안경을 맞추어 오라고 하시오.” 그리고 나는 수감번호 433이 적힌 판을 들고 벽 앞에서 앞과 옆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었소. 범죄자 기록을 위한 것이라오, 누가 입던 옷인지도 모를 허름하고 낡은 죄수옷을 걸친 나는 생각도 의식도 감각도 없었소. 안경을 회수당하고 나니 갑자기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였소. 교도관이 준 플라스틱 숟가락 하나와 밥그릇 두 개를 받아 들고 방을 배치하는 교도관을 따라갔소.
감방 안으로 들어가자 방에 가득 찬 사람들의 얼굴이 뿌연 안개 속처럼 나의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소. 그 순간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소.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소. 그때 누구인가 엄하게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소.
“벽을 향해 돌아앉으시오!”
나는 무슨 영문이지도 모르고 벽을 향해 한참이나 돌아 앉아 있었소.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이 소위 신입 신고식이었소.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한참 흐르자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렸소.
“이제 바로 앉으시오. 그리고 여기 종이에 적힌 대로 육하(六何) 원칙에 따라서 이름, 주소, 직업, 죄명(罪名), 전과 사실을 차례로 말하시오.” 이윽고 나는 돌아앉아 방 식구들에게 큰 소리로 “안녕하십니까”라고 신입 인사를 한 후, 순서대로 내 죄명에 대해 말했소. 내 이야기를 듣던 그들이 앞다투어 말했소.
“뭐 그 정도로는 법정 구속될 사건이 아닌데, 뭐가 좀 잘못된 것 아냐?”“확정 판결도 나기 전에 현직 대학 총장을 법정 구속하다니, 거 너무 심한데?” 내 죄명에 대해 방 안 사람들은 제각기 해석과 의견이 분분했소. 그때 또 한 목소리가 그들의 말을 세차게 반박했소.
“거 한동대 문제 있는 대학이야!”
그들은 변호사 못지않게 법적 지식과 상식이 많아 보였소. 그때 방에서 제일 높은 듯한 사람이 말했소.
“총장, 점심은 했소?”
그제야 나는 끼니를 걸렀다는 사실을 알았소. 이미 오후 4시가 넘은 듯했소.
“어이, 거기 있는 빵 갖다 줘!”
나는 거기까지 듣고 남편의 말을 가로막고 물었다.
“그 빵을 잡수셨어요? 그 상황에 빵이 목에 넘어갑디까?”
“그럼, 맛있게 먹었지.”
남편은 빙긋이 웃었다. 그 정황 중에도 빵을 먹은 여유에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남편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들은 적낳이 내게 마음을 써 주었소. 그 방에는 작은 상이 두 개 있었는데, 식사 시간이 되자 방장은 상 위에 내 밥그릇을 얹어 주는 배려와 함께 방 청소와 설거지도 면제해 주었소. 아홉 시, 취침 시간이 되자 이렇게 좁은 감방에서 이 사람들이 어떻데 다 누울 수 있을지 나는 참으로 궁금했소. 그러자 각자 담요를 말아서 베개를 만들고, 35명의 사람들이 눕는 순서를 배치했소. 한 사람씩 머리 쪽과 발 부분을 서로 어긋나게 눕게 해서 서로 발이 코에 닿을 정도로 어깨를 모로 세워 소위 칼잠을 자야 했서.
“여기 여덟 번째 누우시오! 입소한 순서대로라면 뺑끼통(변소) 옆에 누워야 하는데, 대단히 승진한 줄 아시오.” 교도소 규칙상 밤새 방에 불을 켜 놓은 채 자야 했소. 대낮같이 밝은 밤에 모두들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는 듯했소. 줄줄이 멀뚱멀뚱 누워 있자니 무료해서인지 방장이 말했소.
“오늘 밤에도 우리 모두 사회에서 겪은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합시다.” 모드들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걸, 저렇게 했으면 여기 들어오지 않고 잘 넘어 갔을 텐데 하는 후회의 말들이었소.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소.
“저는 그런 일은 별로 기억에 없고 대신 노래 하나 부르면 안 될까요? 내 고향은 안동 지례라는 곳인데 지금은 임하댐으로 수몰 지역이 되고 말았지요. 말하자면 나도 실향민입니다. 그래서 나는 <고향의 봄>을 즐겨 부릅니다.”
“노래를 한다고요? 한번 불러 보시오.”
나는 누워서 나직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소.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던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그들도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소. 노래를 마치자 누군가 말했소.
“거, 총장 노래도 잘하네요.”
금방 분위기가 달라졌소. 그 노래는 교도소에서의 첫날 밤을 방 식구들과 가깝도록 묶어 주는 우정의 띠가 되었소. 갇혀 있다는 갑갑함과 우울함을 그들도 잠시 잊는 것 같았소. 나는 눈을 감고 고향 산천을 그려 보았소. 갑자기 슬픔이 치밀어 가슴속에서 통곡이 터지려 했소. ‘이제 내 나이 반백을 넘어 예순둘. 어찌하여 나는 이곳에 와서 이렇게 누워 있는가!’ 하지만 실정법을 어기고 최종 판경을 기다리는 죄인으로서의 나를 깊이 돌아다보았소.
35명이 옆으로 포개어져 누워 있는 그 터질 듯한 방에서 나는 아무것도 걸친 것 없는 벌거벗은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섰소. 좁은 방 안에 겹겹이 누운 사람들, 옷과 옷이 겹치고 살과 살이 쓸리고 숨결과 숨결이 섞여 네 숨인지 내 숨인지 모를 탁한 공기에서 나는 자신과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았소.
◈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솔직히 말해서 한 이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소. 꿈에서도 구경한 일이 없었던 감옥.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믿고 있었지만, 숨이 차도록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신 주님께서 왜 나와 오 부총장을 감옥으로 끌어 오셔야 했는지, 그분의 뜻을 또다시 깊이 묵상해 보았소.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고 하셨으니까.
감옥 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이었소 견딜 만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소. 이 안에 들어와 있는 한 사람 한 사람도 생명의 존귀함을 안고 태어난 사람들이며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만이 알고 잇는 사연과 눈물과 한숨과 슬픔을 견디며 희망을 찾고 잇는 사람들이었소.
감옥에 수감된 지 사흘째 되던 날, 그러니까 스승의 날 아침에 교도관이 귀띔을 해 주었소.
“총장님, 혹 무슨 소식 못 들었습니까?”
“6척 담 안에 갇혀 잇는 제가 무슨 바깥소식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스승의 날이라고 한동대 학생 수백 명이 이곳엘 온다는군요. 교도소 당국에서도 특별 경비를 서둘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좀 걱정이군요.”
“...별일 없을 겁니다. 우리 학생들은 사리 분별을 하는 성숙한 학생들입니다.” 그날 오후, 그 교도관이 상기된 표정으로 찾아왔소.
“총장님, 정말이지 제자들을 잘 교육하셨습니다. 학생들이 질서 정연하게 행사를 마치고 돌아간 자리에 종이 하나 떨어져 있지 않더군요. 우리 나라 시위 문화가 이렇기만 한다면야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교도관 생활 20년 만에 이런 감동은 또 처음입니다.” 그때 나는 학생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오. 구속된 지 일주일 만에 나는 35영에서 7명 있는 방으로 옮겨졌소. 그 방은 모두 새로 배치된 사람들이라 신입 신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소. 그제야 나는 방 식구 개개인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그들에게 각각 써 주며, 식사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자고 제안했소. 이상하게도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지.
나는 재판을 받으러 법원에 가는(출정이라고 한다) 사람들을 붙들고 기도해 주었소. 그렇게 착잡한 마음을 다스리며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었소.
7년 동안 하루같이, 숨통을 조여 오던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성경 말씀을 어느 때보다 깊이 묵상할 수 있어서 좋았소. 그동안 못 읽던 책도 맘껏 읽고, 기도하는 찬송 부르는 일 외엔 다른 할 일이 없으니, 지금까지 내가 너무 바쁘게 사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특별 휴가를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나는 그곳에서 학교를 위해 야베스의 기도를 매일 드렸소. 원컨대 주님께서 내(한동)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한동)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한동)를 도우사 나(한동)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대상 4:10) 나는 나중에 그날의 고백을 수첩에 이렇게 적어 놓았소. ‘나의 영혼은 떨림으로 주님 앞에 지금 서 있다. 일찍이 이렇게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주님 앞에 선 적이 없었다. 나의 이름, 명예, 지위, 자존심, 그리고 모든 고통과 애태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린 참 자유를 나는 느끼고 있다. 지금까지 앞만 바라보고 질주해 온 나를 주님께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이런 기이한 장소에서 이런 방법으로 나를 자유케 하시며 나와 독대(獨對)하고 계신다. 이곳은 나의 기도 처소요, 주님과 만나는 골방이다.’
◈ 그분의 낮아지심
경주 구치소에서 18일째인 5월 28일, 교도관이 외서 슬쩍 귀띔을 해 주었소.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내일 대구 교도소로 이감합니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시고 준비하십시오.” 내일 떠날 생각을 하니 그 동안 정든 방 식구들 생각에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소. 하루 스물네 시간, 같은 공간에서 숨결을 같이하며 함께 살았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었소. 대구로 이감하는 날 아침, 나는 방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했소. 나도 모르게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소.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이곳은 감옥이라는 험한 곳이지만 그동안 하나님께서 저희들과 함께 계셔서, 이곳도 평화롭고 감사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각자 연유가 있어 이곳에 들어왔지만. 이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 땅에서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가진 자 되게 하시옵소서. 주님께서 이들을 눈동자처럼 지켜 주옵소서. 이들의 가족을 지켜 주옵소서. 이곳에 잇어야 할 기간이 얼마가 되건 인내로 새 삶을 배우게 하시고, 믿음을 다져 가는 나날 되게 하시옵소서....” 모두들 눈물로 작별했소. 짐 보따리를 들고 밖으로 나오자, 대구 교도소로 이감될 사람들이 굴비처럼 줄줄이 한 줄에 묵인 채 줄 서 있었소. 내 손목에는 수갑 두 대가 채워지고 굵은 포승줄로 어깨에서부터 허리를 둘러 앞과, 뒤까지 단단히 동여맸소. 수갑이 팔목을 주여서 움직이기 힘들었소 등 뒤에 묶인 굵은 매듭으로 의자에 기대앉을 수도 없었소.“ 그때 교도관이 다가와 말했소.
“총장님 이해해 주십시오. 어느 죄수가 탈출한 이후로, 이렇게 수갑을 두 개씩 채우는 것이 규정이 되었습니다.” 차는 경주교도소를 떠나 대구를 향해 경부 고속도로를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소. 신록으로 물든 산과 들, 오랜만에 보는 차창 밖의 낯익은 풍경, 수없이 다니던 길이었지만 내게는 새롭게 느껴졌소. 만 가지 감회에 젖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소. 만 가지 감회에 젖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소. 나 어찌 수치심과 억울함과 비애가 없겠소만, 그 때문에 흘린 눈물이 아니었소. 이렇게 내가 수갑을 겹겹으로 차고 포승줄을 묶여 보니,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소. 그가 쓰신 가시 면류관과 채찍, 침 뱉음과 수모! 주님의 외로움, 슬픔, 억울함과 서러움, 그가 느끼셨을 수치심과 배신감이 예리한 아픔이 되어 내 가슴을 파고들었소.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을 겸손과 낮아짐의 극치였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기에 죽으심이라(빌 2:5-8)
그분의 낮아지심을 생각하면 내가 겪는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소.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죄 용서의 유일한 길! 그 희생의 대가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나를 위해 독생자를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심장과 몸에 절절하게 느껴졌소. 그렇게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길이 되어 주셨고, 진리가 되셨으며 생명이 되셨던 것을!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합이니라(막 10:45) 아! 나는 그런 사랑과 희생을 받은 존재구나! 그런데 죄인인 나는 이렇게 편안히 버스에 앉아서 가는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나는 감사하녀 울었고 죄스러워서 울었소.
대구 교도서에 도착하자, 오 부총장은 미결수 쪽으로, 나는 기결수 독방에 각각 수감되었소. 내가 관구실(초소) 앞을 지나는데 교도관 몇 명이 신문을 달고 있다가 깜짝 놀라며 알아보았소.
“한동대 김영길 총장님, 창조과학회 회장이셨던 장로님이시죠? 저희가 막 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밀알회라는 신우회 회원들로 마침 한자리에서 한동대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으며 만약 하세요. 총장님이 잘못했다면 학교에서 먼저 들고 일어날 텐데 이상한 일이라고 서로 이야기하는 중이었다고 했소.
대구 교도소에 이감된 지 한 달 가까이 되었을 때, 대구 교도서 밀알회 회원들이 말했소.
“아무래도 총장님은 빨리 나가실 것 같으니 오늘 저녁 저희가 특별한 행사를 갖기로 했습니다. 꼭 참석해 주셔서 저희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빌립보서 2장 5-11 잘 말씀을 전했소. 그들은 내 어깨에 얹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소.
“서머나 교회 교인 김영길 장로님을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내 손등과 어깨에 그들의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소.
“총장님 세상에 나가서도 우리 서머나 교회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남편은 지금도 내게 종종 말한다.
“나는 서머나 교회에서 세상으로 파송받은 선교사야.”
◈ 룸메이트 총장님!
안녕하세요. 저는 5월 한 달 동안 내남(경주 구치소)에서 총장님과 한 방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제가 눈으로 보고 직접 겪은 총장님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한 달 동안 총장님과 함께 보낸 시간은 정말이지 제에게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미일 아침 기도로 시작하셔서 기도로 하루를 마감하시는 총장님! 대학교 총장님이라기 보단 선하고 이웃 아저씨 같은 분이였습니다. 힘든 수감 생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시고 혼자서 기도하시며 생활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 또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비서실에서 매일 보내 주는 그 수많은 편지들을 늦은 시간까지 잠을 줄여 가시며 하나하나 읽으셨습니다.
전 아직도 기억합니다. 대구로 이감 가시던 그날 아침, 총장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눈물로 슬퍼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자기 자신보다 한동대를 위해 기도하셨으며, 모든 학생들 위해 기도하시며 우셨습니다. 전 사건의 전부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런 분이시라면 죄를 짓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렇게 수감 생활을 하시면서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한동대 여러분! 격려 편지를 많이 써서 총장님께 작은 희망이라도 드렸으면 합니다. 김영길 총장님이 계신 한동대를 다시니는 여러분은 행복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막대기를 잡고 있는 손
대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6월 초순, 전국 장로회 연합회 회장 이흥순 장로님이 면회를 오셨다. 날카롭지만 온화한 인상의 장로님은 영어의 몸으로 있는 남편에게 뜻밖의 초청을 했다.
“총장님, 다음달, 7월 24일 경구 현대호텔에서 열리는 전국 장로회 수련회에 강사로 모시고 싶습니다.”
“장로님, 저는 지금 감옥에 있고, 언제 나갈지도 모릅니다....”
“그 이전에 김 총장님께서 석방되실 것을 저희는 확신합니다. 전국에 있는 저희 장로님들이 한동대와 김 총장님, 오 부총장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때까지 나가게되면...순종하겠습니다.”
면회를 마치고 나오면서 장로님은 내게도 자상한 당부를 했다.
“사모님, 이번 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니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총장님을 지목해서 불러내 낮추셨으니 그분께서 또한 높이실 것입니다. 고난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한국 교계가 아끼는 평신도 과학자요, 교육자인 총장 장로님의 핍박을 받고 감옥에 간 사건으로 인해 전국의 12만 장로님들이 한마음으로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번 일이 잘못되면 한국 교회가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묵묵히 참고 또 참으십시다. 총장님을 감옥가게 하신 분들은 총장님을 연단시키시는 하나님의 막대기입니다. 막대기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막대기를 잡고 있는 손끝을 보십시오. 그 손은 누구 손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뵙지 못한 초면의 장로님을 당신의 전령으로 삼으시고. 그를 통해 위로와 함께 사명도 새롭게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장로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남편을 석방시켜 주셨다. 그날, ‘장로님 수련회’ 의 강연을 위해 경주로 가는 차 안에서 남편은 시종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나직이 찬송을 불렀다.
나의 영원하신 예수(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거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모든 명예 버리고
험한 길을 가는 동안 나와 동행하소서
어둔 골짝 지나가며 험한 바다 건너서
천국 문에 이르도록 나돠 동행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대회장인 경주 현대호텔은 전국에서 오신 장로님들로 현관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흥순 장로님이 개회사를 했다.
“제27회 이번 전국장로수련회에 김영길 장로님의 특강에 차질이 생길 뻔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생생한 간증을 듣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남편은 감옥에서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338장)을 부르고 간증을 마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요 6:37)고 끝까지 사랑(요13:1)하셌다고 하셨기 때문에,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라는 찬송 가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못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옥에서 즐겨 불렀던 이 찬송을 가사를 고쳐서 부르겠습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사랑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독생자 예수 주께서 영 죽을 영혼을 보혈로 구해 주시니 그 사랑 한없네
나 성령 의지하므로 큰 권능 받아서 주 앞에 구한 모든 것 늘 얻겠습니다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2,500여 명의 장로님들도 두 손을 들고 눈물과 감동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 기도의 골방
4개월 전 남편이 대구에 영어의 몸으로 있을 때 일이다. 대구 교도소로 면회를 오셨던 하용조 목사님이 말했다.
“총장님이 계시는 대구 교도소에 저희가 무엇을 도와 드리면 좋을까요?”“목사님께 그렇지 않아도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안의 수감자들이 양질의 서적들을 읽을 수 있도록 교도소 방마다 책장을 설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의 밝은 쪽에서만 살아온 제가 이 안에서 어두움에 갇혀 사는 사람들을 만나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이곳이야말로 또 하나의 땅 끝 선교지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 범죄를 저지르고 상습적으로 교도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양질의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책들은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도소 안의 도서 시설은 너무 열악하더군요.” 그의 부탁을 받은 하 목사님은 이 일을 곧 주선했다. 그리하여 (주)알로에 마임(유영섭 사장)에서 대구 교도소 350여 개의 방마다 책장을 설치하도록 후원해 주셨다. 또한 옥한흠(사랑의교회) 목사님이 자신의 저서 6천여 권을 기증해 주셨고, 두란노서원과 김충기 목사님(강남 중앙침례교회)도 많은 책들을 구입해 기증해 주셨다. 면회 온 이흥선(두루넷) 사장은 대구 화원교도소의 면회객들을 위한 벤치도 설치해 주셨다.
이 일로 그해 가늘 우리는 대구 교도소장에서 특별 초청을 받았다. 대구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옆에 앉아 남편을 쳐다보며 만감이 교차되었다. 몇 달 전의 이 길은 온통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캄캄한 길이었다. 그 길이 지금은 아름다운 영상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덧 시골집 담 너머 감나무는 노랗게 익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은행잎은 가을빛으로 곱게 물들어 있었다. 4개월 전과 오늘의 호의를 생각하며 나는 다시 한 번 감회에 젖었다.
남편은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반장(모범수)을 복도에서 만나 반가움으로 얼싸 안기도 했다. 그가 기거했던 독방은 마침 비어 있었다. 수감 번호 ‘433’ 이 찍힌 그의 찬송가 페이지마다 눈물자국으로 얼룩져 있는 것을 보면, 그가 그곳에서 얼마나 눈물과 통곡으로 주님을 가까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쇠창살이 있는 작은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솔바람, 파란 하늘과 구름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오.”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사오며 나의 사랑하는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나의 사랑하는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 119:45-50)
◈ 한동대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방콕에도
2002년 1월, 방콕을 방문했을 때다. 한동대 학생인 윤지원, 병욱 남매의 학부모님(TARGET 아시아 지사장)이 이름난 방콕의 한 식당으로 초대해 주셨다. 막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병욱 군 아버님이 입구 쪽을 보며 놀라움에 차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 저분은 총장님께서 꼭 만나고 가셔야 할 분인데, 지금 저기 들어오시고 있군요!” 그는 대여섯 명의 일행들과 함께 들어오는 한 여성을 가리켰다.
“저 분은 총장님이 구속되셨을 때, 방콕에 있는 한인 교회를 찾아다니며 총장님의 석방 탄원서 서명서를 받아 내신 분입니다.” 훤칠한 키의 아름다운 중년 부인이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냐는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인터넷과 신문에서만 보면 총장님을 지금 제 눈앞에서 직접 뵙다니요!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20여 년 동안 방콕에 살면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한동대에 관심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조국의 우울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한동대야말로 조국의 미래에 희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총장님의 법정 구속 소식을 접한 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것은 아닐 텐데, 무언가 잘못되었겠지’ 하며 한동대 홈페이지를 열었습니다. 그때부터 퇴근하면 컴퓨터로 달려가는 것이 제 일과가 되었습니다. 역시 저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어요. 학교와 총장님에 대한 한결같은 신뢰와 호의적인 언론의 보도들, 그리고 수많은 격려 편지들을 읽으면 저는 매일 책상 앞에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곳 교포들의 탄원서를 받아 관계 기관에 제출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녀가 바로 오명례(삼성 현지 상사) 씨였다. 한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에도 있다니! 그 넓은 방콕의 수많은 식당 가운데 하필이면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그녀를 만나다니...! 마치 하나님께서 세계 지도를 펴시고 그 위에 자속을 움직이시며 지구촌 곳곳에서 한동의 중보자를 찾고 계시는 것 같았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의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시 119:63) 2년 뒤 그녀의 아들도 태국에서 한동대로 유학을 왔다.
◈ 총장님, 부총장님 하루 몸값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재판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음악 동아리 두나미스, 걸즈 아카펠라, 챔버와 마드리갈 팀들은 재판 비용에 보태기 위한 ‘자선 음악회’를 열었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렘 20:13) 미술 대전 건축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학생들(유송희, 유숭애 팀, 건설 도시환경학부)은 수상금 전액을 가져왔다.
“미술대전 공무 광고를 보았을 때부터 꼭 상금을 받아 구속되신 총장님과 부총장님을 위한 성금에 보태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하면서 작품을 구상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출품했어요.”
이 땅의 푸른 영혼들을 위한 한동, 너무 귀합니다!
저는 20년째 이 땅의 푸른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군목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캠퍼스 문화에 빠져 있는 영혼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한동대가 너무나 귀하게 여겨집니다.
오늘도 저는 한동대를 위하여 엎드려 기도하던 중, 절제할 수 없는 눈물을 주님 앞에 쏟았습니다. 한동이 겪고 있는 오늘의 고난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정금같이 단련(욥 23:10)하시는 주님의 위대하신 뜻 때문이었습니다. 헌신된 교수, 직원들을 통해 영글어 가는 한동인들의 그 귀한 젊은 영혼들을 바라볼 때, 감격과 희열과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분명 한동인 그들은 이 땅의 소망입니다. 21세기의 다니엘이요, 느헤미야와 오셉입니다. 동봉한 것은 십일조를 제외한 저의 6월 월급 전액입니다. 저의 기도와 사랑의 증표로 드립니다. 존경하는 김 총장님과 부총장님의 귀하신 사역과 옥중에서의 영성, 건강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하겠습니다.
신용백(목사, 육군 본부교회) 올림.
이상숙 부회장을 비롯한 한국기독실업인회 회원들의 헌금 등 두 사람이 수간 되었던 53일 동안 들어온 한동대 후원금은 모두 약 46억 원이었다. 어느 교수가 익살스럽게 말했다. “계산해 보니 두 분의 하루 몸값이 8천만 원입니다. 두 분께선 고생스러우셨지만 학교를 생각하면 그 안에 좀 더 계셨으면 좋았을 것을!”
◈ 왼손이 한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만은 사람들이 성금을 보내 주셔서 재판 비용 성금도 쌓여 갔다. 전국 각처, 세계 곳곳에서 성원과 후원, 사랑 넘치는 응원이 잇달아 쏟아졌다. 우리가 이런 과분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우리가 어찌 감히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남편은 처음도 마지막도 복 많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아내인 나는 남편보다 항상 한 걸음 뒤쳐져서 숨차게 따라가고 있지만, 그래서 이따금 낙담도 하고 두려워 떨기도 했지만. 그의 순수한 신앙 열정에 때로는 감동하면서 고난 중의 행복을 맛보기도 했다.
“사모님, 혹시 이지희 씨라고 아세요?”
“이분이 1억 7천만 원을 후원했어요. 이 정도의 큰돈을 아무 연락 없이 보낸 분이 누구신지 무척 궁금합니다.” 이평수 경리과정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수수깨끼를 풀지 못해 고심하는 사람같았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총장님께 물어보셨나요?”
남편도 생소한 이름이라고 했다.
“오늘 은행을 통해 입금자 전화번호를 알아내 겨우 통화했소. 내가 한번 만나자고 했더니 한사코 사양하더군.” 이번에는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저도 총장님과 같은 교회에 다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돈을 한동대에 보내라고 하셔서 저는 심부름한 것뿐입니다.”
“이런 큰돈을 나누신 데는 분명히 저희와 함께 나누어야 할 간증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거예요. 부디 만나 주세요.” 나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는 마지못해 알겠다고 했다. 우리는 다음 주일 교회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주일 예배 후, 우리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그는 우리를 알아보고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반갑게 인사하는 여러 교인들을 보며, 혹시 이 사람인가 저 사람인가 하며 얼굴들을 살피는데, 키가 크고 단정한 자매가 다가왔다.
“혹시 이지희 집사님이세요?”
“네, 접니다.”
그렇게 우리는 반갑게 만났다.
“집사님, 오늘 맛있는 점심을 대접하겠습니다.
“저는 비싼 음식은 못 먹습니다. 국수 한 그릇이면 족해요.” 교회 앞 식당에서 우리는 마주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목적 없이 방황하던 대학 2학년(성균관대 약학과) 때,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 이후 제 인생의 색깔이 어두움에서 환하고 밝게 바뀌었지요. 결혼은 주님께서 아직 허락지 않으셔서 독신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50대 초반이 채 될까, 영적 기품이 배어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개신교의 수녀처럼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전 가진 것은 없어요. 다만 제 모든 재산이었던 작은 약국이 하나 있었는데 마침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쓰기로 오래 전에 작정했던 것이었어요. 하나님께서 뜻밖에도 그뿐만 아니라 제게 있는 적금까지 한동대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당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뿐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알려진 것을 못내 조심스러워하면서 말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왼손이 한 것을 오른손이 모를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은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는 뜻일 뿐만 아니라, 자신조차도 모르게 하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기억에서도 완전히 잊어버리라는 뜻이지요. 그러니 제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마세요. 그 명령을 제게 하신 주님께 감사하시면 됩니다.” 그때의 감동이 은은한 꽃내음처럼 내 기억 속에 늘 남아 있다. 그 향기의 발원지가 그녀 안에 보배로 간직된 예수 그리스도이신 사실도!
◈ 보아스 플랜
갈대상자 후원자들을 통해 한동의 재정 젖줄을 공급받아 왔다면, 한동 보아스 가족 플랜으로 한동대의 채무를 갚고 국제화를 위한 제2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세우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어떤 분이 권사님을 뵙고 싶어 하는데 시간 좀 내 주세요.” 어느 권사님의 소개로 한 여성 기업가를 만났다.
“저는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몇 년 동안 돈의 고통을 겪었기에 그 고통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총장님의 법정 구속을 신문에서 보고, 저는 밤새 잠을 설쳤습니다. 총장으로서 학사 일만 해도 벅찬데, 돈 고생을 이처럼 당하시다니, 한편 사람들이 혹시나 총장님에 대해 오해할까 봐 걱정도 되었습니다.
이튿날 저를 본 분이 얼굴이 왜 그러느냐고 묻길래, 제가 잠을 못 잔 이유를 말했더니, 김 총장님이 재정이 어려운 학교의 살림을 살다가 불가피하게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권사님, 저도 돈에 대한 훈련을 오랫동안 수없이 받아 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고난 대신 축복의 문을 여tu서, 저희 회사는 번성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저를 따라만 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고통받던 나날들을 돌이켜 보면서 저는 총장님을 위해서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사업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는데, 이번 사건을 통해 한동대를 알고 되면서 제가 사업을 계속해야 할 목적과 이유를 새삼 발견했습니다. 한동대 때문에 저는 더 열심히 사업을 해야겠습니다. 미약하나마 저도 앞장서서 한동대를 돕겠습니다.
그녀는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녀는 얼마 후 두 번째 후원금을 전달하는 자리에서 말했다.
“권사님, 한동대에 필요한 100억 원을 마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생각이 있어요. 총장님 구속 사건으로 한동대의 재정 형편이 어렵다는 것은 세상에 다 알려졌고, 한동대의 좋은 이미지도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학교를 돕고 싶으나 어떻게 도울지 구체적인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동을 아끼는 사람 만 명을 찾읍시다. 그들이 100만 원씩 후원하면 100억 원이 됩니다. 몇몇 분들에게 저의 생각을 말했더니 기꺼이 돕겠다고 하셨어요.” 그녀의 격려에 힘입어 우리는 ‘한동 보아스 가족 플랜’을 세웠고 김은희, 김종한 변호사(홍콩 거주) 부부를 시작으로 국내외에서 많은 보아스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2001년 12월 28일, 대구 고등법원 제41호 법정에서 오전 10시에 항소심이 열릴 예정이었다. 이른 봄에 시작한 재판이 찌는 듯한 여름도 넘기고 겨울에서야 끝이 나는 것이다. 재판 결과를 알기 위해 또다시 전국에서 달려온 한동대 학부모와 학생과 교직원 들뿐 아니라, 지역 언론 등이 미리 바깥에서 진을 치며 재판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마음 졸이며 긴장된 모습들이었다. 화창한 날씨였지만 그동안의 역경과 고난을 모두 몰아가 버릴 기세로 법원 마당에는 그날따라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남편이 수없이 법정에 섰지만 나는 한 번도 법정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재판이 열리는 동안 주차장의 차 안에서, 때로는 법원 마당에서 서성이며 하늘의 아버지께 숨죽여 기도했다. 그날도 나는 법정 마당에 서서 세찬 바람을 맞으며 재판이 끝나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내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붙이우지 아니하리라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되리니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9:17-18)
얼마쯤 지났을까. 재판정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안도의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사건 변호가 거명된 뒤 곧바로 재판장은 5분여에 걸쳐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고 했다. 5가지의 죄명에 대해 재판장은 핵심 공소 대부분을 무죄 판결을 내렸고, 사건 일부에 대해서는 김영길 총장, 오성연 부총장에게 벌금형를 부과했다.
언론은 이 놀랄 만한 뉴스를 일제히 보도했다. “1심에서 현직 대학 총장, 부총장이 한꺼번에 법정 구속됐다가 석방되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한동대 김영길 총장, 오성연 부총장의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1심을 뒤엎은 판결이 내려져 다시 한 번 세인들의 관심을 모았다”고 보도했다.
한 인터뷰에서 최택범 학부모 회장은 말했다.
“너무 기쁩니다. 김 총장님이 총장직을 수행하시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판결이 나오도록 우리 모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행정직으로 잘못된 것은 앞으로 고쳐 나갈 것입니다.” 이종순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민사 사건을 형사 사건화하고 묵은 문제를 공방하는 것이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잘못된 형사 판결로 전국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학생들의 마음에도 상처를 입히고, 누구 하나 이득 본 사람이 없습니다. 법조계에서 제일 터부시하는 것이 민사 사건을 형사 사건화하는 것입니다. 김 총장은 수십여 차례 검찰에 소환당했습니다. 이번 항소심 판결은 학교 경영에 사소한 실수를 고소로 문제삼는 이런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않습니까?”
◈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병기
2003년 그해 10월 16일, 총장과 부총장에 대한 형사 고발 소승 또한 대법원에서 종결되었다.
이종순 변호사는 이 판결이 학교 측의 120퍼센트 승리라고 설명해 주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가 교만하지 않도록 끝까지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루신 대역전 드라마였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시 11:1-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불의의 병기도 사용하신다고 <세 왕 이야기>에서는 말한다.
“순종과 깨어짐을 배우는 학교에 왜 학생들이 적을까요? 그것은 이 학교에 있는 모든 학생들이 겪어야 할 많은 고통 때문입니다. 종종 고통을 안겨 주는 깨어지지 않은 지도자들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깨어지지 않은 권위입니다.” 한동대가 기독교 대학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그들 또한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또 하나의 병기였다.
◈ 변호사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
2003년 4월 채플 시간, 이종순 변호사는 자신이 일평생 모아온 장서 천여 권을 학교에 기증했다. 학생들 앞에서 그는 말했다.
“그동안 한동대 재판을 맡으면서 힘든 때도 많았지만, 생각해 보면 저만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모태 신앙인 저는 교회를 옮긴 후 그저 손님처럼 예배만 드리고 가곤 했었지요. 왜냐하면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교인들의 법률 상담 전화에 무척 시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옮긴 것이 제 고난의 시작이었지요. 어느 날, 당시 한동대 이사장이시던 하 목사님과 김영길 총장님이 사립학교법 위반으로 고발당했다는 말을 듣자,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두 분이 피의자로 조사받을 것이 걱정스러워서, 제가 자청해서 두 분을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하나님 눈을 피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두 분은 검사가 묻지도 않은 말까지 불리한지 유리한지도 모른 채, 너무나 소상히 설명을 하더군요. 검사도 동석한 저를 보며 어이없이 웃더군요.
곧 이어 학교는 선린병원과의 합병 무효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엔 크게 어려운 사건 같지도 않고, 또 학교에 돈도 없다고 해서. 또 제가 자청해서 무료 변호를 맡았지요. 대여섯 번 정도 포항에 다녀오면 끝나겠지. 그 당시 비행기 삯이 10만 원이었는데, 50만 원을 교회에 헌금하는 셈치고 생색이나 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가볍게 시작했는데 열 번이 넘으니까 이제는 괴로워지게 시작했습니다.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던 재판은 한동대의 존립을 좌우할 심각한 재판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만약 패소하면 이사장은 물론 총장과 이사들 모두 퇴진해야 하는, 한동대의 미래가 달린 큰 재판이 되었습니다. 무려 40번 이상 서울과 포항을 비행기로 오가며 2003년 1월, 7년 만에 재판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소송 사건을 담당하면서 응답이 더디신 하나님을 때로 원망하기도 했고, 변호사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가 다르다는 것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응답이 더딜 때 원망하지 마시고, 오래 참으십시오.
이 민사 소송은 형사 사건으로 전개되면서 총장임이 구속되는 상황으로까지 몰고 갔습니다. 총장님이 구속될 때 한동대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한동 식구들과 교계 여러 목사님들, 그리고 2만여 명의 한동 후원자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지금의 한동은 없었을 것입니다. 총장님의 석방을 위해 서울에서 열렸던 조찬 기도회에서 김진흥 목사님이 바울이나 요셉, 남아공의 만델라 같은 위대한 사람도 모두 감옥 출신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출감 후 더욱 성령 충만하신 총장님을 뵈면서 그 말씀이 사실이라고 느꼈습니다.
어제 저는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학교와 갈등을 빚었던 분들과 화해를 모색해 왔는데, 어제 7년 만에 그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재판에 이긴 것도 승리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입니다.
저는 올해까지 37년 동안 법조인으로 있으면서. 그동안 모아온 천여 권을 판례집을 한동대 법률대에 기증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 나이 이제 예순 여섯, 남은 생애를 북한 선교를 위해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북한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 세기를 독재 정권 아래 신음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북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어찌 세계 선교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계실 자리에 김일성 부자가 앉아 있고, 핵무기로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북한, 황해도 평산이 제 고향입니다. 북한 선교에 여러분들도 많은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한동대의 역경은 이제 더 이상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모든 고난이 만 천하에 공개되고 있는 것이다. 헨리 나우웬은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시 30:11)는 춤추시는 하나님을 노래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빚으신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분과 함께 춤을 추도록 첫 스텝을 내딛게 하시는 곳이었다.
이 춤은 저절로 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스텝을 내딛으려면 고통을 통한 연습이 필요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가며 그 연습을 통해 우리는 고통의 한복판으로 우아하게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었다. 위기 없는 성장이 없듯이 영광 또한 고난과 고통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고통 가운데서 그분 자신이 오직 우리의 방패요 상급이신 것을(창 15:1) 깨닫게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건 속에서 슬픔과 기쁨을 한데 엮어서 기쁨의 찬미 스텝을 내딛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서도 내 삶을 지휘하고 계실 것을 믿으며, 이 고통과 상처를 통해 내가 치유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 깨달음을 통해 춤추며 나아갈 때 우리의 스텝을 내딛는 지평이 은혜로 열리고 있었다.
고난의 자리는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슬픔에 머무리지 않고 그분의 손을 잡고 더 큰 춤의 자리로 들어가게 하는 곳이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통과 격리된 보호 구역으로 데려가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고통과 상실을 통해 하나님의 더 큰 목적과 계획 속으로 나를 준비시키는 방편으로 삼으셨다. 왜냐하면 우리는 슬픔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03 네 장막터를 넓히라
◈ 꿈을 잉태하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고, 나같이 부족한 자도 부르셔서 준비시키신다”고 남편은 종종 말했다. 그는 또 하나의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동 국제법률대학원을 세우는 꿈이었다. 남편은 그 꿈을 사람들에게 역설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OECD에 가입한 후 법률 시장 개방과 더불어 치열한 세계화의 조류 속에서 국제 무역 관계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우리 나라도 국제적으로 전문화된 법률 서비스와 정보 서비스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 있는 국제 법률 전문가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우리 나라도 미국식 로스쿨(Law school) 3년 과정의 국제법률대학원을 세워서, 국제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국제 변호사를 배출해야 합니다.” 잉태된 꿈은 때가 차면 출산되는 법. 2000년 한동 국제법률대학원은 교육인적자원부(문용린 장관) 인가를 받았다. 아직 타대학에서 시도하지 못한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 꿈을 잉태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남편은 고백했다. 네 장막터를 넒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펴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사 54:2-3)
◈ 경력의 십일조를
1998년 2월, 로스앤젤레스 사랑의교회 집회를 마쳤을 때, 30대 초반의 젊은 부부가 남편을 찾아왔다.
“저는 스티브 최(명석) 변호사입니다. 어제 총장님의 간증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혹시 한동대에 계절 학기가 있다면, 제가 여름에 잠시 귀국하여 국제법을 영어로 강의할 수 있겠습니다.” 여덟 살에 미국으로 이민 온 그는 한국말이 서툴렀다. 하버드 대학과 버클리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그는 로스앤젤레스 카운디의 검사로 있었지만 사람들의 죄를 구형하고 감옥으로 보내는 자신의 일에 회의를 느껴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작년에 저는 연변 과학기술대학으로 단기 선교를 갔습니다. 그곳 남평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한동대 학생들을 만났는데, 그들의 모습이 제게 퍽 인상적으로 남아 있답니다. 어느 찌는 듯한 밤이었어요.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우리는 두만강으로 목욕을 하러 갔어요. 무산에서 흘러나오는 황토 물이었지만 샴푸와 비누로 몸을 씻고 있는데, 한동대 학생들은 물로 씻기만 했어요. 그래서 제가 ‘샴푸가 없으면 내 것을 써요’ 했더니 ‘감사합니다만 강에 샴푸를 풀면 비누보다 4배나 더 강물을 오염시킨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환경을 저희는 오염시키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더군요. 그 학생의 말에 저는 충격과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자기 학교를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그들이 다니는 한동대가 어떤 대학인지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로부터 두 달 후, 최 변호사 부부는 잠시 귀국해서 한동대를 방문했다. 짧은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며 그들은 한 통의 편지를 남기고 갔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한동대에 행하신 일들을 감사하며, 교수 기도회에서 총장님께서 3개월째 밀린 월급을 미안해하시면서 흘리시던 눈물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총장님께서 지신 고난의 짐들은 앞으로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없을 것입니다. 이곳을 방문한 후 저희에게 새로운 기도 제목이 생겼습니다.
1998년 5월 3일 주안에서 최 변호사 부부 드림.
얼마 후 그는 두 번째의 편지를 보내왔다.
저희는 그날 한동대에서 천마지를 향해 난 비에 젖은 숲길을 걸으며 문득 모세를 떠올렸습니다. 애굽 왕궁에서 최고의 학문을 배운 그는 자기의 조국과 자기의 동포 히브리 민족을 위해 젊음과 학문과 그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미국에서 최고의 학문을 배운 저도 조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저의 작은 지식과 경험이 쓰임을 받을 수 있다면 큰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애 중, 전문직 활동을 50년으로 본다면 그 10의 1을 한동대 학생들을 위해 하나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그는 크리스천 친구들에게 한동대의 비전과 꿈을 이야기하며 몇 년 동안 함께 헌신하자고 권했지만, 그들은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한동대의 연봉 조건을 따졌다고 했다. 또 어떤 친구는 대학 시절의 학비 융자를 못 갚아 미국을 떠날 수 없다고 사양했다. 크게 좌절한 그는 마지막으로 시애틀 주 정보 인권 변호사로 있는 하버드 후배인 박경신 변호사에게 연락해 보았다. 의외로 그는 “선배님, 이런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그의 제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해 10월, 최 변호사는 박 변호사와 함께 학교를 방문했다. 하지만 일은 엉뚱한 데서 벌어졌다. 학교에서 며칠을 지낸 박 변호사가 말했다.
“선배님, 아무래도 저는 안 되겠어요. 신앙이 없는 저는 이곳에 올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난처해진 최 변호사는 그를 총장실로 데리고 왔다. 남편은 그에게 말했다.
“나는 35세에 비로소 크리스천이 되었어요. 박 변호사도 그때 내 나이가 되려면 아직 몇 년 더 남았지요? 앞으로 한동대에 있을 동안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열심히 노력해 보십시다.”“총장님, 그러면 학생들과 교수님들에게 제가 신앙을 갖기 원하는 초보자라는 것을 알려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다른 교수님들처럼 믿음이 좋은 사람인 줄 착각할까 봐 부담스럽습니다.” “좋소. 내 그날은 꼭 하겠소.”
남편은 그를 교수들에게 소개하며 말했다.
“박 변호사는 한동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로 했으니, 옆에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두 사람의 귀국을 계기로 한동 국제법률대학원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얼마 후 <중앙일보>는 국제 변호사가 국내에서 탄생할 수 있을 정도로 교육을 시킬 한동대 미국식 법학부를 소개하며, 재미 교포 2세들이 명문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조국의 후배 양성을 위해 귀국했다는 기사를 실었다.(1998년 11월 9일자.) 그들은 약속대로 한동 국제법률대학의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후 학교를 떠났다.
◈ 국수 한 그릇 때문에
2000년 어느 날 한동대에서 영어 교목으로 있는 에디 변 목사의 외할아버지인 이상기 변호사가 학교를 방문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남편이 그에게 말했다.
“이 변호사님 한동대에 와서 같이 일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로부터 얼마 후, 시카고에서 열린 한동 후원회의 밤에 은발의 이 변호사는 자신을 소개했다.
“2년 전, 저는 총장님이 사 주신 국수 한 그릇 때문에 제 발목이 한동에 묶이고 만 사람입니다. 40여 년 전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고등학교를 마친 저는,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언젠가 조국에 돌아와서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그후, 저는 모토로라의 특허 및 지적 재산 전문 상임 변호사로 30년 동안 활동해 왔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제 마음 한구석에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무거운 빚을 담고 있었습니다. 은퇴를 앞둔 저는 한국에서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한국에서 뇌수술을 받고 한 달 동안 입원해 있을 때 심방 오신 전도사님의 기도 덕분에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완전히 회복된 저는 하나님과 조국을 향한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지요.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외손자를 만나기 위해 한동대를 방문했을 때, 총장님은 제게 국수 한 그릇을 대답하시며 말했습니다.
‘저희 국제법률대학원에 이 변호사님과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그 순간 저는 하나님과 약속을 떠올렸습니다. 가족들과 미국에서 편한 노후를 보내려고 생각하던 제게 심각한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아내는 펄쩍 뛰었습니다.
‘이제부터 교회 봉사도 하며 지내려는데, 당신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중국인인 제 아내 헬렌은 조국에 대한 저의 고민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지요. 하지만 날로 고민이 더해 가는 저를 보다 못한 아내가 마침내 말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세요. 당신을 당신 조국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후부터 이 변호사는 노익장을 자랑하며 몸을 아끼지 않고 정열적으로 국제법률대학원의 산파 역할을 했다. 시카고 존마셜 로스클과의 협약을 추진하며 하루 종일 빡빡한 일정을 마친 우리 일행은 한동 후원회의 밤이 열릴 예정인 시카고 레디슨 호텔 로비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이상기 교수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가 과로로 쓰러질까 염려하던 나는 엉뚱한 곳에서 그를 발견하고 아연 실색하고 말았다. 호텔 로비 한구석 카펫 바닥에서 가방을 베고, 사람들의 이목에도 아랑곳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마치 젊은 시절 하나님께 못다한 헌신을 한꺼번에 하려는 듯, 그는 자신의 모든 열정을 한동에 쏟아 부었다.
이듬해, 김장환 목사님의 소개로 캠블 대학교(노스캐롤라이나)의 버저드(Lynn Buzzard) 교수가 한동 국제법률대학원 초대 원장으로 부임해 왔다. 변호사요 목사인 그는 미국뿐만 아니라 구 공산권과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헌법을 자문해주며, 미국에서 기독법조인협회(Chiristian Legal Society)를 조직하여 미국 법조계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분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아시아에 기독 법조인을 배출하는 법률대학이 세워지기를 18년 동안 기도해 왔다는 것이었다. 한동 국제법률대학원은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던 것이다.
◈ 뜻밖에도
2001년 4월, 한동 국제법률대학원 설립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한동대와 정보통신부, 미국의 존먀셜 로스쿨, 그리고 한국과학기술원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지적 재산권에 관한 국제 컨퍼런스’를 준비하던 때의 일이다.
이 행사의 참가자는 시카고의 존마셜 로스쿨의 존스턴 총장 일행을 비롯하여 부시 대통령 정보통신 자문관인 조엘 신 변호사, 자이페이 장 중국 대법관, 매튜 커넬리 일리노이 주 연방 재판관 등 열일곱 명의 국내외의 저명한 법조인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하지만 이 일에도 몇 차례의 난관이 있었다. 1억 원에 가까운 소요 경비를 후원하기로 약속한 모 기관에서 갑자기 후원을 최소하는 바람에 행사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해외 강사들의 비행기 항공권 구매도 이미 끝난 상태여서, 이제 와서 최소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일이 기도 없이는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을 이미 경험한 우리들은 무조건 기도만 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모두들 낙담해 있던 중, 이 행사를 뒤늦게 알게 된 특허청에서 참여할 뜻을 알려 왔다. 또한 때마침 미국에서 방문한 남편의 친구 강삼석 박사(휴스턴 텍사스)의 도움으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가 주선되었다. 뒤늦게 홍보할 기회도 생긴 우리는 다시 용기를 얻게 되었다. 꺼진 불꽃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남편은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법학도들이여, 6법 전서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국제화 사이버 시대에 국제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국제 법률 전문가로서의 비전을 가지십시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경비 문제로 고심했다. 만만찮은 만찬회 비용을 후원할 분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그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아시오? 오늘 포항으로 오는 비행기 내 옆 자리에 풍산금속 유진 회장이 앉게 되었소! 국제법률대학원의 이야기를 들은 유 회장이 만찬 비용을 기꺼이 후원해 주기로 했소.” 남편은 한동대로 오기 전까지, 14년 동안 풍산금속의 기술 고문으로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오랜만에 반가운 해후를 했던 것이다.
한편 학회 준비로 여념이 없던 이상기 교수가 말했다.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초대되는 만찬회의 사회자를 찾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시다시피 한국의 인사들을 잘 몰라서....” 그때 나는 백지연 씨(전 MBC 아나운서)를 떠올렸다. 며칠 전, 이촌동의 건널목에 서 있는 내게 “권사님!”하고 누가 큰소리로 불렀다. 오랫동안 못 만났던 백지연 씨가 차 운전석에서 교통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나를 본 것이다. 반가움에 나도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동안 어찌 그리 소식이 없었어요?”
“권사님, 제 전화번호가 바뀌었어요. 연락 좀 주세요!” 나는 급히 수첩을 꺼내 그녀의 전화번호를 적었다. 곧 신호들이 바뀌고 그녀는 떠나갔다. 순간적인 만남이었다. 나는 뜻밖에 우연의 장소에서 그녀를 만났던 것을 기억해 냈다. 나의 부탁에 그녀가 흔쾌히 말했다.
“한동대 일이고, 더구나 총장님의 부탁인데 제가 아무리 바빠도 도와야지요. 이런 기회를 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그녀의 밝고 재치 있는 사회는 만찬회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03년 9월, 국회의사당에서 두 번째 국제법률대학원 컨퍼런스가 열렸다. 국회에서 대학 컨퍼런스를 연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2004년 한동대 개교 이래로 가장 큰 국제 세미나가 한동 캠퍼스에서 열렸다. 교육인적자원부와 교육개발원(KEDI)이 주관하고 월드뱅크와 OECD와 한동대가 후원하는 이 세미나는 관계자들에게 큰 관심과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월드 뱅크 교육부장인 자밀 살미(Jamil Salmi) 박사는, 9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진 한동대의 눈부신 발전은 세계에서 대학 발전의 새로운 모델로 소개되어야 한다며 격찬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동대를 세계 곳곳에 홍보하겠노라고 말했다.
2004년 제3회 한동 국제법률대학원 입학식에는 허버드(Hubbard) 주한 미국 대사가 참석해 자리를 빛내기도 했다. 그만큼 한동 국제법률대학원은 교육계와 국제 사회 속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 하나님께서 친히 돌보시는 선교자 자녀들
2000년 2월, 이영덕 이사장님 내외분과 함께 한동 후원회를 위해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을 때였다. 누군가 우리에게 말했다.
“하나님의 일에 후원을 많이 하고 계시는 장도원 사장(Forever 21)을 한번 만나 보시죠.” 우리는 단번에 가까워졌다.
“어제, 우연히 어느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통해서 한동대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한동대 이사장님과 총장님, 내외분들께서 저를 만나자고 하셔서 무척 신기했습니다. 이 일이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10만 달러를 흔쾌히 기부해 주었다. 얼마 후, 그가 학교를 방문한 날은 마침 졸업식날이었다. 그는 짧은 방문을 마치고 떠나면서 말했다.
“오늘 졸업식은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졸업식을 치루는 학교와 학생들이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해 8월 우리 부부가 다시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을 때, 장도원 장로, 옥창호 집사 부부를 다시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가 물었다.
“총장님, 한동대에 혹시 중고등학교를 세울 생각은 없으십니까?” “아직 우리 학교의 형편이 어려워 거기까진 여력이 없지요. 그러나 현재 몇몇 교수들의 자녀를 위해 시작한 대안 학교인 ‘한동국제학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언젠간 한동대 안에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기독교 정신으로 교육하는 부속 학교가 세워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말을 마치자, 그들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총장님, 저희는 선교사 자녀를 위한 학교를 세우기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 왔습니다. 작년 한국의 IMF 경제 위기 때, 본국으로부터 선교비가 중단된 선교지 100여 곳에 저희 ‘또 감사 기도회(Do Thanksgiving)에서 선교 후원금을 보내고 있습니다. 몇 군데 선교지를 돌아보던 저희는, 선교사님 자녀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이후로 저희들은 선교사 자녀(MK:Missionary Kids)를 위한 학교가 세워질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으로 이민 와서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데 선교자 자녀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으니....” ‘또 감사 기도회’의 회원들은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젊은 기업인들로, 선교의 뜨거운 열정을 가진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는 의미로 ‘또 감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고급 옷 한 벌, 비싼 음식 한 그릇도 사양하는 그들의 삶은 검소했다. 그해 겨울, 10여 명의 ‘또 감사 가족들’이 한동대를 방문했다. 땅거미 지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운동장에 빙 둘러서서 서로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의 기도를 드렸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시 2:8) 그들이 돌아간 후, 곧 MK를 위한 생활관과 국제학교 건축이 시작되었다. 2001년 5월 28일, 서럽도록 아름다운 날, 오지(奧地) 선교사의 자녀들을 맡아 키우고 가르칠 국제학교 건물과 생활관이 단단하고 우아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루셨고 또한 이루어 가실 미래의 일들을 바라보며 가슴 벅차하던 국제학교 개교식, 그러나 총장과 부총장은 함께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경주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오늘을 마음껏 찬양했으련만.... 그로부터 1년 후, 국제학교 1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는 자리였다. 국제학교의 한 학생이 소감을 발표했다.
“저는 저의 아빠가 선교사가 된 것을 마음속으로 늘 불평해 왔어요. 다른 아빠들처럼 멋진 새 양복도 못 입으시고 고생만 하시거든요. 아빠의 양복은 너무 낡아서 소매 끝이 다 닳았어요. 바지도 번들번들하구요. 그래서 저는 아빠에게 말했어요. ‘아빠, 새 양복을 사셔야겠어요.’ ‘아직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 저는 그런 아빠가 싫었어요. 그래서 저는 장차 크면 선교사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런데 한동 국제학교에 온 이후에 제 생각이 달라졌어요. 우리 아빠가 선교사가 아니었으면, 이런 좋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이곳에서 선생님들에게 사랑받으면서 친구들과 함께 하루를 즐겁게 지냅니다. 이제 크면 저도 아빠처럼 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하나님께 기도드려요.“ 뒤이어 단 위에 선 장 장로님이 감회 어린 모습으로 말했다.
“저희들이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제가 즐겨 부르는 이 찬송은 저희들 모두의 마음을 대신합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찬송을 불렀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 제 아이를 대학에 맡깁니다.
저희 남편은 목사로서 필리핀에서 현지인을 위한 개척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제 아들은 지난 7년 동안 서양 아이들 속에서 성장기를 보냈기에 겉사람은 한국 아이지만 서양 아이나 다름없습니다. 부모된 저희는 아이 장례를 생각할 때, 늘 안타까웠습니다. 아이가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 되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한국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대학 문화나 환경의 차이로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동대는 저희가 넘기엔 너무 커다란 산과 같았습니다. 미국으로 보내려고 거의 결정을 내렸는데, <빛과 소금>잡지와 함께 사모님의 간증 테이프를 만났습니다.
온 식구가 이 테이프를 들었습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준우를 한동대에 보내라는 신호로 느껴졌습니다. 이를 위해 온 식구가 40일 작정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입학 원서가 접수되었고, ‘한동대 합격’이라는 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한동대에 들어가다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저희는 압니다. 한동대 입학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 아이가 입학을 허락받은 것은 부족한 ‘이방 나그네’인 저희들에게 하나님의 한없는 위로와 사랑과 은총인 것을! 한동대는 선교사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위로, 그 자체입니다. 국적 불명의 선교사 자녀로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아이가 한동대에 머물며 공부하는 동안 총장님과 교수님들의 가르침으로 신앙으로 인격이 영글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회복할 것을 믿습니다.
제가 김영길 총장님을 알게 된 것은 창조과학회를 통해서입니다. 약 18년 전쯤, 유관순 기념관에서 세계적인 창조론의 귄위자 핸리 모리스 박사님, 기쉬 박사님을 모시고 창조론을 강의한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두 어른 아들들은 데리고 조금 늦게 그곳에 참석했습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둘째가 유치원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어린 아들들의 기억 속에 ‘엄마와 함께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들으러 갔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랄 것을 기도했습니다. 그날 강연장을 갈 때 카메라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강연이 끝난 후, “김 박사님! 우리 아이들과 사진 한 장을 찍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때 사진 찍기를 부탁하지 못한 일이 지금 후회됩니다. 지금 그 사진이 있다면 제 아이에게 얼마나 기념이 되었을까 싶습니다. 그후부터 저는 제 아들들이 김 총장님처럼 사람들 앞에 존귀한 분이지만,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족한 어린 아들을 하나님의 대학에 맡깁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땀과 눈물을 아끼지 않는 총장님과 모든 교수님들께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1999년 2월 27일, 아이를 보내는 아침, 필리피에서 서준우 어머니 드림.
제 발자국도 찍혀 있음에
한동대를 생각하면 항상 가슴이 뜨겁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젊음을 바치는 친구들과 선후배들, 제자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교수님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모임들, 제가 처음 입학했을 때 총장님께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기억, 친구들이 군대에서 휴가 나오면 길에서라도 기도를 해 주시던 모습, 그런 추억들이 아직 저에게 살아 있어서 지금 힘이 됩니다.
저는 한동을 졸업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곳 우즈베키스탄 세계외교 경제대학에 왔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상위권 학교인 이곳에서 저는 70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생들 중 상당수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영어로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교수님들이 컴퓨터에 대한 신기술을 배울 기회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저는 열 분의 전산과 교수님에게도 컴퓨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학교를 위해 기도하라고 저를 이곳에 보내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학교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많이 없을 것 같거든요. 제가 이곳으로 오기 전 제 손을 잡고 야베스의 기도를 해 주신 총장님을 기억합니다. 제가 총장님의 제자인 것이, 제게 시도하는 스승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2003년 3월 4일에 우즈베키스탄에서, 사랑하는 제자 이한준 드림.
이 땅에 주의 보혈을 찍게 하소서
이곳 스리랑카에서의 신앙 생활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잘 지냈으나. 지금 제게는 은혜가 고갈되고, 밥맛도 없고,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고..., 저는 지금 주님께 묻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그러던 중 의료 사역 팀과 함께 북쪽 타밀 지역으로 전도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곳이더군요. 먹을 게 없어서 모래를 먹는 아이들도 있다면 그 마을의 상황을 이해하실는지요. 전쟁이 심했던 지역은 병원이 없어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진료를 받아 보는 것이 20년 만이라고 하더군요. 자리를 잡고 의료 사역이 시작되면 멀리서도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일손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끝도 없이 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잠시도 쉴 수 없었지요.
잠시 쉬는 시간에 마당에서 처방에 따른 약을 조재하고 열심히 약봉지를 접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단순 노동에도 불평하지 않고 기쁨으로 감당하시는 그들을 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우리 나라에도 처음에 외국인들이 이렇게 의료 선교를 했겠지. 시골 촌구석에 들어가서 이토록 못살았던 우리 조상들을 위해 약을 지어 주고 눈물로 기도해 주었겠지. 우리 조상들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말도 못 알아듣고, 그냥 나눠 주는 무언가를 받아 돌아갔겠지. 그때의 의료 선교팀도 아마 아무 변화도 못 느끼고 돌아갔겠지. 그렇지만 그들이 사람을 보고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온 것이었기에 비록 당장은 아무 변화를 볼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을 끊지 않았던 거였겠죠! 그랬던 우리 나라에 결코 이토록 복음이 확산되어서 이젠 우리들이 약봉지를 들고 평생 상상해 보지도 못한 이런 오지에서 감사하며 사약을 감당하는구나....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제 문제를 보게 되었습니다. 영혼에 대한 마음이 무뎌진 것은, 제 안에 기대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저는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구나.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세밀하게 일하고 계시는구나. 이런 오지까지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의 발자국으로 이 땅에 주의 보혈을 찍게 하시다니.... 스리랑카를 구원하시기 위해 필요한 기도 분량 중 제 기도가 들어 있음이, 그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끊이지 않는 발검음 중간에, 제 발자국도 찍혀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마음껏 이 땅을 중보하기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수많은 중보자들을 통해 스리랑카의 구원을 이뤄 나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스리랑카에서 박혜진 올림.
이 편지는 백 년 전 한국 땅을 밟고 복음을 전했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편지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뵈지 않은 조선의 마음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했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잇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몽골, 우즈베키스탄, 미얀마, 피지, 중국, 러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한동대로 유학 오는 학생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또한 세계 열방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한동인을 보며, 하나님께서는 한동대를 통해 전 세계로 복음의 문을 활짝 여실 것을 바라본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 순수성의 회복
2004년 올해로 여섯 번째 맞는 졸업식. 나는 매년 졸업식을 치를 때마다 10년 전 개교하던 해, 광야 대학의 첫 입학식 때 느꼈던 두려움을 떠올리곤 한다. 그 때 축하 화분들이 세찬 바닷바람에 차례로 쓰러지던 광경을 기억한다. 광야 대학 입학생이었던 나는 그 나무와 같았다. 10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께서는 한동대를 이제 어떤 광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로 뿌리 내리며 여기까지 자라게 하셨다. 두려움의 광야 대학을 믿음과 축복의 자리로 바꿔 주셨다. 그래서 한동의 졸업식은 이 세상 어느 대학에서도 볼 수 없는 눈물과 감동과 감사가, 서로를 향한 축복이 넘쳐 난다. 졸업장을 받기 전 사각모를 벗고 단상을 향해 넙죽 큰절을 하는 학생, 몸짓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사랑을 표현하는 여학생들, 학부 졸업생들이 모두 한 줄로 서서 교수님들과 부모님들에게 큰절을 올리는 모습, 한동의 졸업식에는 서로를 향한 감사의 사랑의 표현들이 넘쳐 난다.
주로 산업체 근로자들과 지역 직장인들에게 대학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개설된 산업교육학부를 졸업하는 문말애(영어과) 씨의 답사. 형편상 대학 진학을 포기했으나 한동대에서 공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만난 감격을 말하던 그녀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답사를 읽어 내려가지 못했다. 그녀에게 학생들의 우레와 같은 격려의 박수가 쏟아졌다. 그래도 좀처럼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그녀에게 김영섭 교무처장이 단상의 내빈에게서 건네받은 손수건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냐는 손수건에 얼굴을 감싼 채 울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교무처장이 그녀를 대신해서 답사를 읽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의 목소리도 떨리더니 그 역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번에는 학생이 교무처장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손수건과 답사 원고가 교수와 학생 사이를 번갈아 오가며 겨우 끝난, 눈물만큼이나 아름다운 감동을 우리 모두에게 안겨 주었다.
곧 우리 나라 모든 대학 졸업식이 한동대와 같이 한가족처럼 진심으로 축복하고 격려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김아라미 군(생물식품학부)의 답사가 이어졌다. 아람 군은 먼저 귀한 삶과 교훈을 나누어 주셨던 은사님에 대한 감사와 함께, 고마운 분들을 한 분 한 분씩 소개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던 아들(김찬 96학번)을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음에도 학교의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아들이 저축한 돌을 모두 학교에 기탁하신 부모님, 한동대 개교 첫 입학생으로 1997년 여름 피지 섬에 복음을 전하러 간 아들들을 잃었지만 끊임없이 학교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두 명의 부모님, 다 해어진 횐 와이셔츠에 너무 오래되어 옷깃이 반들거리는 카키색 트랜치코트가 멋져 보였던, 학교가 가장 어려울 때부터 정년을 앞두고 췌장암으로 사선을 넘나드는 투병 가운데에도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던 분 박을용 교수님,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친구들을 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지난 6년 동안 1,700여 명의 학우들이 배불리 먹고 일곱 광주리가 남을 많은 감동을 주었던 오병이어 운동을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평생의 자산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분을 더 소개했다.
“지금 여러분 뒤에 한 분이 계십니다. 밤늦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온 몸에 땀이 흠뻑 젖으신 분께서 오셨는데, 오셔서 떠나는 저희들을 바라보시며 감격해하시며 서 계시는 그분을 제가 분명히 보았는데, 여러분은 보셨습니까. 한동대가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이 학교를 계획하시고 저희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분, 한 반도 부족함 없이 우리를 입히시고 먹이신 분, 저분은 저희들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난 10년 동안 한동대의 역사는 눈물의 역사였습니다. 한동대는 젖이 떨어진 아이와 같았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한동대가 하나님 앞에서 사회 가운데 이만큼 자리매김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은총의 손길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이분을 가장 마지막에 소개하는 이유는 이 졸업식이 끝날 때 이분이 가장 오래 기억되었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한동대에서 배운 것, 진정 유능하고 탁월한 사람은 어디서나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 정직한 사람임을 오늘날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부족한 저희들이지만, 결코 그 꿈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세월 기적 같은 방법으로 이 광야 학교를 이끄시며,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래서 우리는 한동대를 서슴없이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부른다. 때로 아픔도 컸지만 큰 선물도 안겨 주셨다. 그 기쁜 선물은 바로 다름 아닌 사각모를 쓴 늠름한 우리 한동의 학생들이었다. 앞으로 이들이 사회에 나가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것인지, 지도자로서 그들이 보여 줄 본이 되는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하루빨리 듣고 싶어 가슴이 설렌다. 그들의 가능성이 바로 우리가 이 광야 대학에서 누리는 보람이요 기쁨이다. 21세기에 사도행전 29장의 역사가 계속되는 곳이 바로 한동대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