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이다. 내 대신 공과금도 내주고, 집안 청소도 해주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도 해 놓고, 내가 늦게 들어가도 잠 안자고 내가 올 때까지 불 환하게 켜 놓고 기다리는 아내가, 나도 있었으면 좋겠다.
만약 [아내]가 갖고 있는 여성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그것을 [어떤 사람]으로 바꾼다면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아내]를 원할 것이다. 특히 일하는 여성이라면, 정말 집에서 모든 일을 처리해 놓고 사랑스런 마음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를 간절히 원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전도연이 천연덕스럽게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 이해가 된다. 제목은 그 영화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이 주는 따뜻한 분위기를 당신이 이해했다면, 이제부터 충분히 영화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현재 우리 영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여배우는 전도연과 심은하지만, 심은하는 지난해 변혁 감독의 데뷔작 [인터뷰] 이후 개인적인 문제로 스크린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전도연은 99년말 [해피엔드] 이후 지난해에는 단 한 편도 출연작이 없었다. [접속]으로 데뷔한 이후 출연하는 작품마다 흥행을 시키며 흥행공주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는 전도연이 [해피엔드]의 과감한 노출씬과 섬세한 연기로 관객들의시선을 사로잡은 후, 처음으로 선택한 영화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이다.
전도연은 [접속]에서 한석규, [약속]에서 박신양, [내 마음의 풍금]에서 이병헌, [해피엔드]에서 최민식 등 당대 최고 배우를 파트너로 맞이하면서 인기력을 키워왔다. 이번에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그녀의 파트너로 낙점된 사람은 바로 설경구. [박하사탕]과 [단적비연수]로 우리 영화 남자배우의 기대주로 떠오른 설경구와 흥행공주 전도연의 만남, 조금 심상치 않은 냄새가 풍긴다.
서른 세 살의 노총각이며 평범한 은행원인 봉수(설경구 분). 학교 다닐 때부터 직장생활 하는 지금까지 23년 동안, 단 한 번도 지각하지 않은 성실한 남자이다. 그가 근무하는 은행의 맞은 편 2층에는 보습학원이 있고 스물 일곱 살의 원주(전도연 분)는 그곳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다.
현금지급기가 카드를 삼키고 나오지 않는다고 귀찮게 하고, 밤늦은 시간 형광등이 깜박거린다고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원주는, 그저 봉수에게 귀찮은 고객일 뿐이다. 원주는 봉수 주변을 오랫동안 맴돈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어느 날 그녀는 은행에 가서 돈을 청구하는 용지에 금액 대신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적어 슬쩍 창구에 밀어 넣는다. 원주의 얼굴을 한 번 슬쩍 본 봉수는, 그러나 장난하지 말라고 찍어서 다시 돌려준다. 원주는 깊은 시름에 빠진다.
자, 이미 우리는 이런 영화에 익숙해져 있다. 결말이 뻔히 보인다. 평범한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 마지막은 해피엔드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로 우리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이 영화의 미덕은 평범한 일상의 구체적 모습을 너무나 사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는데 있다. 과장하지 않고 우리 주변의 구체적 사물이나 인물의 내면 심리에 꼼꼼하게 접근하고 있는 서사구조는, 그것이 진부하다는 느낌을 줄 여유도 없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가장 큰 미덕은 일상적 리얼리티의 창출이고 그것을 관객들에게 전달해내는 설경구, 전도연 두 남녀 주연배우의 뛰어난 연기력이다. 하지만 영화적 내러티브는 너무나 평범해서, 늘 어긋나는 두 남녀가 연애를 시작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말뿐이다. 특히 두 남녀가 서로의 속마음을 알고 연애를 시작한 후반부 이야기는 사족처럼 보인다. 사소한 일상의 모습 속에서 잔잔한 감동을 찾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 영화는 충분히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관객들은 저렇게 사소한 이야기를 보기 위해 극장 표를 끊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뛰어난 극적 반전이나 시각적 볼거리를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일상적 삶의 구체적 재현에 대한 탐구가 뛰어나게 이루어진 영화로는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를 들 수 있다. 한국 영화는 그 이후 비로소 사소한 에피소드들이 씨줄 날줄로 얽어지면서 극적 감동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됐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러나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갖고 있는 비극적 울림이 없다. 남자 주인공 한석규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 부재의 공간이, 혼자 남아있는 여주인공 심은하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마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8월의 크리스마스]에 비해,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는 그 정도 울림을 줄 수 있는 극적 장치가 없다는 것이 치명적 결함이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영화 속에서 전도연이 하는 대사이다. 즉 아내라는 단어는 단순히 한 남자의 부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해해주고 포용해주고 뒷받침해주는 어떤 든든한 힘, 이라는 뜻으로 이해가 된다.
이 영화로 데뷔하는 박흥식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 조감독을 했는데, 깔끔한 화면과 군더더기 없는 연출 솜씨를 보여주었지만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이 효과적으로 연결되어 감동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다면 훨씬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설경구가 미래의 아내를 위해 비디오 카메라에 자신의 일상을 녹화하거나, 무료할 때 펼쳐 보이는 마술, 즉 찢어진 신문지가 아무 상처 없는 원 상태로 회복되거나, 천 원 지폐를 접어 연필로 가운데를 뚫어 놓고 다시 천연덕스럽게 흔적도 없이 복원시키는 그런 장면들은, 사소한 재미를 주지만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쪽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모았어야만 했다.
전도연의 에피소드 역시, 현금지급기가 설치된 은행 365일 코너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보며 봉수에 대한 감정을 펼쳐 보이거나, 덤벙대면서 은행에서 잃어버린 500원 동전 3개의 향방 같은 것들이 이야기 전개에 효과적으로 기여했어야만 했다.
바로 그 차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죽음이라는 절대적 위력을 갖고 있으며, 그런 극적 장치 없이 일상에서 더 큰 감동을 찾기 원했다면, 사소한 에피소드들이 씨줄 날줄로 얽힐 수 있는 방법론을 찾아봤어야만 했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우리 일상적 삶의 구체적 현현이라는 뛰어난 미덕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이 영화를 지지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것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