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랑잎 고은
가랑잎
우리가 감히 가랑잎 하나에도
아무런 가책 없겠는가
분단 권세야
야 이놈아
이제 그만 멎어버려라
산등성이 바람 친다
누이야
네가 있구나
몇천 년의 누이야
시여,날아가라, 실천문학사, 1986
가사메댁 고은
가사메댁
새터 두희봉이 마누라 가사메댁은
울음소리 청승맞기로 으뜸이어요
남원 운봉 지리산 물소리 받아왔다지요
그 울음소리 옆에서는
절구통도 절구공이도 따라 울게 되어요
한규 할아버지의 꼬부랑 자당께서
그 좁쌀여우 뒷호강하더니
여든여섯에 세상 떠났는데
고씨네 사촌 육촌 팔촌 아낙 가운데
울음소리 하나 변변한 것 없어서
한규 할아버지 끌끌 혀를 찼지요
할 수 살 수 없이
가사메댁 보리 한 말 주고 사다가 울었어요
그 울음소리
그 사설 풀어나가는 울음소리 판소리
꼬부랑 자당 한평생을
산등성이 기어 오르다가 내려 오다가
갖은 양념 청승고개 다 떨어 엮어내려가는데
그 울음소리 판소리
큰 초상 난 집 마당 한번 오젓 짭짤하구나
만인보 2, 창작사, 1986
거름 내는 날 고은
거름 내는 날
내 앞에서 자란 자식
벌써 코밑에 잔털 난 자식
쇳내 나는 이놈 데리고
경운기 함께 탄다
아랫뜸 지나
꽤나 먼 길 거름을 낸다
갓난이때 잘도 보채던 놈이
이제는 입이 굼떠
별반 성난 듯이 말도 없다
이놈하고 가다가
상묵이네 논 둔치에서
까딱 엎어질 뻔했다가도
용케 경운기 손잡이 잘 휘어 잡았다
추운 날도 느린 새는 느리게 난다
사뭇 점잖다
우리 짚뭇은 다 들여가고
다른 집 짚벼눌이 더러 논에 있다
올해는 객토 못하는 대신
여름내 만든 퇴비거름
맛있는 거름
논에 내니
논 좀 보아라
논이 헤헤 입 벌리고 좋아한다
남의 논들이야
너무 일직 방정떤다 할지 모르나
우리 논이 좋아하니
나도 내 자식도 함께 좋구나
하늘이야 높아서 소 닭 보듯 하고
다섯 번 거름 실어내면
한나절이 넘어서
거름냄새 퀴퀴 쩐 몸으로
비로소 내 자식 입을 연다
아버지
내년 절충못자리는 내가 할께요
어느덧 덧없구나 내 자식이 자식 아니다
나와 내 자식 이 들판에서 비로소 나란히 형제다
어서 가자 가서 술 한잔 주고받자
전원시편1, 민음사, 1986
걸레 고은
걸레
바람 부는 날
바람에 빨래 펄럭이는 날
나는 걸레가 되고 싶다
비굴하지 않게 걸레가 되고 싶구나
우리나라 오욕과 오염
그 얼마냐고 묻지 않겠다
오로지 걸레가 되어
단 한 군데라도 겸허하게 닦고 싶구나
걸레가 되어 내 감방 닦던 시절
그 시절 잊어버리지 말자
나는 걸레가 되고 싶구나
걸레가 되어
내 더러운 한평생 닦고 싶구나
닦은 뒤 더러운 걸레
몇 번이라도
몇 번이라도
못견디도록 헹구어지고 싶구나
새로운 나라 새로운 걸레로 태어나고 싶구나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곡비 고은
곡비(哭婢)
조선시대 양반 녀석들 딱한 것들
폼잡기로는 따를 자 없었다
그것들 우는 일조차 천한 일로 여겼것다
슬픔조차도 뒤에 감추고 에헴에헴 했것다
그래서 제 애비 죽은 마당에도
아이 아이 곡이나 한두 번 하는둥마는둥
하루내내 슬피 우는 건 그 대신 우는 노비였것다
오늘의 지배층 소위 오적 육적 칠적 역시
슬픔도 뭣도 모르고 살면서 분부를 내리것다
울음 따위는 개에게도 주지 말아라
그런 건 이른바 민중에게나 던져주어라
그 민중이나 울고불고 아이고 대고 할 일이다
그런 천박한 일 귀찮은 일은 내 알 바 아니야
하기야 슬픔이 본질적인 것이 되지 않을 때
울음이 말단이나 노동자에게만 머물 때
그런 것들이 다만 천박한 것으로만 보일 때
시인아 너야말로 그 민중과 함께
민중의 울음을 우는 천한 곡비이거라 곡비이거라
감옥의 무기수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내 인생을 노래해 주시오
그 말씀 잊어버릴 때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 아니다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교상기도 고은
교상기도(橋上祈禱)
오래, 새벽을 거닐어 간다.
안개속에 나오는
다리위를.
잠든 한강(漢江)이 안개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안개처럼 여의도(汝矣島)로 사라져간다.
안개에는 많은 그림자가 들어 있나니,
내가 돌 하나로 던진다.
한 점의 물소리가 나면
이어서 모여드는 고요,
환도(還都) 후
누이가 이곳에서 빠진 소리였다.
세월이 씻기어 적어진 그 소리로야 아
더 흐르면
안남을 그 소리로야
비로소 이곳이었나 보다
졸음을 깨우는 누이의 울음이듯이,
새벽은 말하지 않는다.
드디어 와,
누이는 와서 내 앞에 비맞은 빛같이야
빛나게 그치어 있다.
옛 시절의 약속에 못견디우듯
우는 입술.
그러나 새벽이어
더 뚜렷이도 다가드는
내 누이의 낯선 모습을 아느냐.
오래, 안개에 새인
새벽 등불이 이제 보이면
누이는 또 가버리나,
안개 속에 눈감기는 어둠이 되나.
이제는 어느때인가
다리위에서야
다리 아래의 강위에
솟아 오는 깊음을 보는
내 소름으로
자는 바람은 일어나,
누이는 멀어져 간다.
잠든 한강(漢江)의 안개속에서
떠는 나의 눈은
얼마나 졸음을 새어왔느냐.
다리위에서 나는 이제 쓰러지며
나를 사로잡는 누이여
나의 기도를 너는 다 앗아간다.
새벽은 말하지 않느냐.
피안감성, 청우, 1960
국도 고은
국도(國道)
지나 왔다. 아무도 만난 일이 없다.
이따금 형석(螢石)빛 습기(濕氣) 속으로
젖은 개똥벌레를 만나고
먼 바다에서 십이음(十二音)의 배들이 죽어서 불빛이 된다.
기다리는 것은 미지(未知)의 친척(親戚)들,
그러나 그들을 만난 일이 없다.
차라리 잠든 세상에서 잠들지 않은 절도가 된다.
이 밤 세 시(時)와 네 시(時) 사이를
마시던 술잔은 그대로 놓여 있는 주택(住宅)을 찾는다.
그리고 임자가 바뀔 개량종자(改良種子)의 밭들을 찾는다.
이제 나는 찾았다. 온갖 절교(絶交)의 정적(靜寂)을
그리고 지나왔다. 아무도 만난 일이 없다.
밤 네 시(時)의 국도(國道)에는
여름철의 말 끝들이 남아 있다.
`까' `요' `다' `요'……
어둠 속에서 의문부(疑問符)가 없어지고
전해진 뜻이 없어진 채 남아서 빛나고 있다.
지나왔다. 수레가 지나간 뒤,
말오줌 자국이 적셔진 곳을.
그리하여 가장 취할 진정제(鎭靜劑)를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주어서 던졌다.
어떤 뜻밖의 언덕에 가까스로 명중(命中)했느냐,
바다가 내 흉터를 모조리 빼앗아 갈 때,
아직 새벽은 멀고 말끝들이 남아 있다.
이윽고 바다가 죽은 어부(漁夫)들을 부른다.
새벽이다. `까' `요' `다' `요'
나는 지친 모자를 벗어 간조(干潮)의 머리카락을 뿌린다.
새벽 배는 비어 있을 뿐,
지나왔다. 배들이 죽었다. 나는 말끝처럼 하얗게 죽으리라.
신. 언어 최후의 마을, 민음사, 1967
귀성 고은
귀성(歸省)
고향길이야 순하디 순하게 굽어서
누가 그냥 끌러둔 말없는 광목띠와도 같지요
산천초목을 마구 뚫고 난 사차선 저쪽으로
요샛사람 지방도로 느린 버스로 가며 철들고
고속도로 달리며 저마다 급한 사람 되지요
고향길이야 이곳저곳 지나는 데마다 정들어
또 더러는 빈 논 한 배미에 밀리기도 하고
또 더러는 파릇파릇 겨울 배추 밭두렁을 비껴서
서로 오손도손 나눠 먹고 사양하기도 하며 굽이치지요
삼천리 강산 고생보다는 너무 작은 땅에서
오래도록 씨 뿌리고 거두는 대대의 겸허함이여
자투리 땅 한 조각이라도 크나큰 나라로 삼아
겨우 내 몸 하나 경운기길로 털털 감돌아 날 저물지요
어느새 땅거미는 어둑어둑 널리는데
이 나라에서 왜 내 고향만이 고향인가요
재 넘어가는 길에는 실바람 어느 설움에도
불현듯 어버이 계셔야 해요 그리운 내 동생들 달려오지요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그 할머니 고은
그 할머니
몇해 전 겨울이었지요 앞산 골짜기에서
울음소리 훌쩍훌쩍 들렸습니다
다가가서 우는 할머니 달래었습니다
남의 집 식모살이라 울 데도 없어
여기 나와서 혼자 우는 것이었지요
바로 어제가 세상 떠난 그 양반 제삿날이라
메 한 사발 올리지 못하고 밤을 새워서
오늘 아침 울음으로나 잠깐 제사 지내는 것이지요
나야 별소리로 더 달랠 수 있다지만
우는 할머니 따라 내 설움으로 함께 울었습니다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길 고은
길&
길이 없다!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숨막히며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 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길이 없다
그리하여
길을 만들며 간다
길이 있다
길이 있다
수많은 내일이
완벽하게 오고 있는 길이 있다
내일의 노래, 창작과비평사, 1992
깽매기 소리 고은
깽매기 소리
가을걷이 끝나고도
삼동네 풍장 칠 일 없어요
반장 고갑룡이는
제 집 뒷방에 둔
깽매기 징 장고 들이 궁금해서
그것들 꺼내다 늘어놓고
먼지도 털어주고
잿물 찍어 쇠 닦아주기도 하다가
어디 한 번 소리 내봐라 하고
오래오래 소리 못낸 깽매기 냅다 쳐보니
그 소리 동네에 다 들려
아닌 밤중에 이 무슨 깽매기 소린가
도깨비 양반 장난인가
죽은 칠성이 혼백 돌아와 신명나는가
그렇지 젊어서 죽은 칠성이
깽매기 자진모리 한 번 눈 지그시 감고 신들렸지
얼쑤 어깨죽지 뛰놀았지
무논갈이 소 모가지 고단하듯 고단한 세월 신들렸지
만인보 2, 창작사, 1986
꽃 고은
꽃&
봄이 왔다 해도
봄이 와서 갔다 해도
욧골이나 황골 산시골에는
꽃 하나 없네
그 흔해빠진 목련도 벚꽃도 없네
다행이야 남새밭에 노란 장다리꽃 있네
이 얼마나 넘치는 기쁨이냐
산모퉁이 돌자
아 거기에 산싸리꽃 무더기 피어 있네
그러고 보니 밭 묵은 데
눈꼽 같은 냉이꽃 자욱하게 피어 있네
암 피어 있네 피어 있네
우리 산시골 꽃 구경이야 이로써 족하구말구
꽃도 쓸 만한 건 다 뽑혀 갔네
서울로 서울로
이 나라 산천에서 뽑혀 갔네
어디 꽃뿐인가
여자뿐인가
면사무소 마당 큰 나무 몇 그루
그놈들도
88올림픽에 어디에 뽑혀 가려고
밑둥 돌려 놓았다네
봄이 와서 갔다 해도
허허 꽃 하나 없네
텔레비젼만 있네
텔레비젼만 있네
전원시편1, 민음사, 1986
나무의 앞 고은
나무의 앞
보아라 사람의 뒷모습
신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저것이 신의 모습인가
나무 한 그루에도
저렇게 앞과 뒤 있다
반드시 햇빛 때문이 아니라
반드시 남쪽과 북쪽 때문이 아니라
그 앞모습으로 나무를 만나고
그 뒷모습으로 헤어져
나무 한 그루 그리워하노라면
말 한마디 못하는 나무일지라도
사랑한다는 말 들으면
바람에 잎새 더 흔들어대고
내년의 잎새
더욱 눈부시게 푸르러라
그리하여 이 세상의 여름 다하여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단풍
사람과 사람 사이
어떤 절교로도
아무도 끊어버릴 수 없는 단풍
거기 있어라
내일의 노래, 창작과비평사, 1992
나의 추억 고은
나의 추억
나는 세 살 때부터 늙었다
어떤 놈은 피리를 불고 다녔다
어떤 놈은 북을 쳤다
어떤 놈은 노래를 불렀다
노래하는 동안
밤 강물이 흘렀다
나는 열 살 때도 늙어버렸다
오두막에도 평화가 없는 시절
가을벌레들아
가을벌레들아
밤새도록 나는 네 동무였다
항상 젊은 영혼을 꿈꾸며 노예를 꿈꾸며
눈물을 위하여, 풀빛, 1990
낙조 고은
낙조
벗이여 나는 영웅을 원하지 않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영웅적인 세계 그것이네
지금 그 세계가 우리들의 손을 떠나서 이루어지고 있네
벗이여 이제는 술조차 필요치 않네
눈물을 위하여, 풀빛, 1990
난초 앞에서 고은
난초 앞에서
무지가 난초처럼 조용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무지는 반드시 행위로 나타난다
이윽고 오늘 아침 난초꽃이 피어났다
괜히
밖에서 백합꽃도 피었다
긴 장마 동안
아무런 꽃도 필 수 없다가
오 무지여 암흑의 행위여 가거라
이 꽃들에게
할 말이 없을 때가
얼마나 영광인가
눈물을 위하여, 풀빛, 1990
내 아내의 농업 고은
내 아내의 농업(農業)
이미 날이 저문다. 시장기 든 해거름의 일꾼들이
돌아온다. 어떤 장님도 눈을 뜨게 한다. 풀밭에서 몰고
온 이웃집 목우(牧牛)는 긴 입 안이 가득하게 헛새김질을
한다. 제 주인의 잘못을 오래오래 걱정할 때도 있다.
청과물(靑果物) 장에 짐을 부리고 온 내 만혼(晩婚)의 처음, 아직 아내는
들에서 오지 않았다. 나는 미농(美濃)무우로 담은 깍두기와
찬 밥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홍차(紅茶)를 마실 것이다.
첫딸의 이름은 아내의 허리에 달아 두려 한다.
러시아의 부칭(父稱)을 넣지 않으련다. 이제 바다는 만조(滿潮)일 것이다.
아내의 수건 벗은 새벽머리로부터 이 세계는 어두워
온다. 이윽고 그네가 먼 들길을 건너올 때, 우리 나라의
별똥이 그 위에 흐른다. 나는 아무 뜻도 없는 소망(所望)을
뒤늦게 표현한다. 아내의 손발이 얼마나 텄을까. 오늘
장에서 신(神) 같은 크리임을 사 왔다. 이제 내가 찾을 아내
의 가슴은 죄송한 내실(內室)에 있다. 오직 입을 다물고
해산(解産)을 기다릴 뿐, 아내의 농업(農業)은 어디로 떠날 수
없도록 교목(喬木)을 섬긴다. 저 멀리 미혼(未婚)의
기적(汽笛)소리가 들린다. 이제 내 아내는 한쪽 귀를 떨며
작은 문을 연다. 그네의 모습은 내가 끝없이 반기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이제 바다는 만조(滿潮)일 것이다.
해변의 운문집, 신구문화사, 1964
눈물 -1- 고은
눈물 -1-
숲 가까이 혼자 가서 우는 소녀여
네 눈물은 강하다
네 눈물은 지금 악을 죽이고 있다
네 눈물 때문에 조국이 있다
세계 도처의 양심이
비에 젖으며
새로운 풍경으로 태어나고 있다
네 눈물 때문에
눈물을 위하여, 풀빛, 1990
눈물 -2- 고은
눈물 -2-&
□ 서(序)
아 그렇게도 따라가며 눈물 나니
한 줄기의 냇가를 더러는 디려다 보면
나와 거슬러 오르는 잔 고깃떼도 만나보리오
그저 뜨는 마름풀 잎새도 우연히도 되리오
내 늙으면 냇가에서 지난날도 다시 거슬러 오르며
눈물 난 마음 만나보리
그러면 나는 눈물나리
피안감성, 청우, 1960
다시 오늘 고은
다시 오늘
어제를 반성하기보다
오늘을 반성해야 할 때가 있다
어제는 죽음일 따름
아 짐승들은 자유롭구나
반성 없는 그들의 하루하루와 함께
우리는
오늘을 반성해야 할 때가 있다
오늘 나는 무엇인가
나는 짐승보다도 못하구나
반성이 없는 것과
반성이 있는 것 사이
그 질곡의 배회에 맴도는
나는 무엇인가
벌써 아침해의 찬란한 빛은 낡아
얼어붙은 것을 다 녹이지 못하고
다시 얼기 시작하는 저녁이
저쪽에서 다가온다
그러나 나는 이런 오늘을 때려 죽이리라
나는 무엇인가
내가 몽둥이이기 전에
내가 벼락이기 전에
내일을 잉태한 몸으로
꽝 꽝 언 땅을 걸어간다
찬 별빛이 나로 하여금 반짝반짝 빛난다
아 그동안 오늘이 너무 컸다
내일의 노래, 창작과비평사, 1992
대보름날 고은
대보름날
정월 대보름날 단단히 추운 날
식전부터 바쁜 아낙네
밥손님 올 줄 알고
미리 오곡밥
질경이나물 한 가지
사립짝 언저리 확 위에 내다 놓는다
이윽고 환갑 거지 회오리처럼 나타나
한바탕 타령 늘어놓으려 하다가
오곡밥 넣어가지고 그냥 간다
삼백예순 날 오늘만 하여라 동냥자루 불룩하구나
한바퀴 썩 돌고 동구 밖 나가는 판에
다른 거지 만나니
그네들끼리 무던히도 반갑구나
이 동네 갈 것 없네 다 돌았네
자 우리도 개보름 쇠세 하더니
마른 삭정이 꺾어다 불 놓고
그 불에 몸 녹이며
이 집 저 집 밥덩어리 꺼내 먹으며
두 거지 밥 한 입 가득히 웃다가 목메인다
어느새 까치 동무들 알고 와서 그 부근 얼쩡댄다
만인보 1, 창작과비평사, 1986
대보름 뒤 고은
대보름 뒤
고향에는 밤이 있다
한없이 환한 대보름 뒤의 달밤이 있다
잠 깨어 뒷간에 간다
벌써 요강 넘쳐서
바깥으로 나가 뒷간에 간다
자지러지게 환한 밤
건너마을 수동이네 헛간 위
지붕 못 걷히게 얹어둔 헌 쟁기까지 보이는 밤
참수리가 공중에서 먼 데까지 보듯이
병아리 보듯이
멀리 멀리 바위배기 상여집까지 보이는 밤
보름 쇠고 치던 징소리
아직도 귀에 쟁쟁
가슴 설레어 천리길 나서고 싶다
과부 자식 아니랄까
소문난 건달 창섭이 오줌 싸고 진저리치며
그 길로 휘영청 나서고 싶다
곰아 곰아 너 숨었거든
발바닥만 핥지 말고 너도 나와 성큼 나서 보아라
환한 달밤 아쉬워 어찌 잠자누 잠만 처자누
만인보 2, 창작사, 1986
대장경 고은
대장경(大藏經)
한반도야 한 이삼백년만 가라앉아라
바다 밖에 없도록
아무리 찾아보아도
푸른 바다 밖에 없도록
그리하여 이 강산을
대장경 원목으로 소금에 절였다가
한 이삼백년 뒤에 떠오르게 하라
하늘의 일월성진이야
그대로 지긋지긋하게 두고
한반도의 온갖 힘을 죽여서
빈 땅으로 떠오르게 하라
거기에 새로 나라를 세우고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말하게 하라
삭지 않은 대장경을 남기게 하라
한반도야. 그냥 이대로는 안되겠구나
그냥 이대로는
풀 한 포기조차 나지 않겠구나
한반도야 한반도야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온갖 것 제대로 제대로 살게 하라
입산, 민음사, 1977
동고티 무덤 고은
동고티 무덤
입춘 무렵 보리밭 하나는 신명나 푸르지만
중뜸 아이들 쇠정지 아이들 대여섯이
어디 갈 데 있나
걸핏하면 동고티 큰 무덤
매련퉁이 무덤에 가서
자치기도 하고 개씨름도 하다가
한두 놈은 끝내 울기 십상이지 십상이구말구
그런지라 그 무덤 배겨나지 못해서
이제는 잔디밥 다 벗겨져 벌거숭이 되고 말았지
갈뫼 조송덕이 영감네
할아버지라나 증조할아버지라나
그 할아버지 금슬 좋게 합장한 무덤인데
송덕이 영감 간도로 떠나버리자
누구 하나 돌보지 않는
길가에 나앉은 상팔자 되었네
아이들이야 뭘 아나
그저 하루하루 닳아빠지는 무덤에서 까불어댈밖에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그 무덤 속에서 하얀 수염 할아버지 할머니 일어나서
이놈들아
우리가 고단하다 다른 데 가 놀아라
산 사람하고 죽은 사람하고 너무 가까워도 안 좋느니라
이 꿈 꾼 봉식이가 글쎄 그 뒤로 시름시름 앓다가
그냥 약탕관 두고 숨 꼴칵 거두고 말았지 산 무덤이었나?
만인보 1, 창작과비평사, 1986
두만강으로 부치는 편지 고은
두만강(豆滿江)으로 부치는 편지
누이여, 버들같은 누이여.
회령(會寧) 남양(南陽)의 강기슭이여
떠도는 얼음 덩어리 풀렸는가.
땅이야 한가지도 사재(私載)하는 바 없이 봄은 오고
아이들은 잘있으며 강물은 얼마나 깊어졌는가.
누이여 그대 얼마나 땅으로 늙었는가.
말과 마음이 같아도
여기서는 아득아득한지라
그대 얼마나 늙었는가.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는
이런 인사도 헛되거니와
회령(會寧) 남양(南陽)의 저문 강 기슭에
서러운 버드나무들은 잘 있는가.
누이여 버들같은 누이여.
내가 누이라고 하면 백번 누이인 누이여.
문의마을에 가서, 민음사, 1974
들꽃 고은
들꽃
들에 가 들꽃 보면 영락없지요
우리 겨레 은은한 품성 영락없지요
들꽃 몇천 가지 다 은은히 단색이지요
망초꽃 이 세상꽃
이것으로 한반도 꾸며놓고 살고지고요
금낭초 앵초꽃
해 질 무렵 원추리꽃
산들바람 가을에는 구절초 피지요
저 멀리 들국화 피어나지요
이런 꽃 피고지고 복이지요
이런 꽃 피고지고 우리 겨레 복이지요
들에 나가 들꽃 보면 영락없지요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딸그마니네 고은
딸그마니네
갈뫼 딸그마니네집
딸 셋 낳고
덕순이
복순이
길순이 셋 낳고
이번에도 숯덩이만 달린 딸이라
이놈 이름은 딸그마니가 되었구나
딸그마니 아버지 홧술 먹고 와서
딸만 낳는 년 내쫓아야 한다고
산후 조리도 못한 마누라 머리 끄덩이 휘어잡고 나가다가
삭은 울바자 따 쓰러뜨리고 나서야
엉엉엉 우는구나 장관이구나
그러나 딸그마니네 집 고추장맛 하나
어찌 그리 기막히게 단지
남원 순창에서도 고추장 담는 법 배우러 온다지
그 집 알뜰살뜰 장독대
고추장독 뚜껑에
늦가을 하늘 채우던 고추잠자리
그 중의 두서너 마리 따로 와서 앉아 있네
그 집 고추장은 고추잠자리하고
딸그마니 어머니하고 함께 담는다고
동네 아낙들 물 길러 와서 입맛 다시며 주고받네
그러던 어느 날 뒤안 대밭으로 순철이 어머니 몰래 들어가
그 집 고추장 한 대접 떠가다가
목물하는 그 집 딸 덕순이 육덕에 탄복하여
아이고 순철아 너 동네장가로 덕순이 데려다 살아라
세상에는 그런 년 흐벅진 년 처음 보았구나
만인보 1, 창작과비평사, 1986
땀 고은
땀
땀 흘리지 않은 자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하물며 방금 벤 풀냄새의 진리이랴
사랑하는 그대가 말했지
땀을 흘리고 나면
실컷 울고 난 것보다 더 새롭다고
이 세상이 새롭다고
눈물을 위하여, 풀빛, 1990
만월 고은
만월
섣달 보름달 떴다 뜨겁다
허어 이놈
너하고
하룻밤 사무치자
시여,날아가라, 실천문학사, 1986
모 심는 날 고은
모 심는 날
못자리 하고 본잎 나왔을 때 비닐 걷고 모판 바람 쏘일 때
모 쪄다가 모내기할 때 그 모 무럭무럭 자라나는 한더위 때
이윽고 황금물결 이루어 가을걷이 다가올 때 나락 벨 때
이 논농사로 먹은 것 없고 입은 것 없고 누릴 것 없이도
농사꾼은 능히 하늘에 있고 땅속 깊이 스며서 에렐루 상사디야
온갖 걱정 두고도 이토록 아비 어미 된 기쁨 어디 가랴
볍씨 담가 이렛동안 불려서 조심조심 방 아랫목에 싹 틔우며
이것이 어찌 태어나 쌀 되랴 했건만 보온못자리 잎새 나왔다
5월 들어 비닐 걷으니 파란 모 바깥 세상에 나왔다
이 기쁨으로 지내다가 마정리 중터 삼모네와 삼모네 큰집
치욱이네와 용술이 처가집해서 네 집이나 같은 날 모 심는 날이구나
모 심는 날이래야 이제는 사람 열 여섯 열 아홉 놉 얻지 않고
그저 이앙기 한 대가 모 모가지까지 꽂으면 되는 세상
그것도 한나절이면 웬만한 논배미야 진작 모내기 끝나 버린다
중터 사람들의 논도 버드실들이고 가죽우물골의 논도
내리 부암리 삼암리 논도 다 버드실들을 이루고 있구나
엣따 버드실들 넓은 들 한천의 물이 갈라서 두 개로구나
이쪽 저쪽 대번에 모 심은 논으로 바꾸어서 살아났구나
긴 겨울 내내 흙 바닥으로 잘도 견디어 내고
이제 모 심고 모 자라야 제 할 일 하는 나라가 아니냐
송화가루 날리는데 영농자금 뒤늦게 찔끔 나와 보아야
서로 급하니 누구 하나 한몫으로 가져가도 성에 안 찬다
재산세 5천 원 되어야 일반자금 타낼 수 있는데
당최 농협이란 데가 병같이 쓰고 약같이 쓴 데가 돼 놓아서
농촌이 차 타고 바라보면 아무 일 없이 잘 되는 듯 하건만
정작 아무개야 단 하루 세끼 살아 보아라 석탄 백탄 다 탄단다
삼암리 진태는 군대 가서 배운 운전기술로 트럭 타니
진태 하나 보고 몇십 년 수절한 진태 어머니 땡감 같은 어머니
어느덧 흰 머리 양귀비 물들여서 뻔지르 검지만
몸은 옛 몸 아니라 거동도 수월할 때가 드물고말고
논 닷 마지기 모 심으니 마침 밥 때라 밥 이어 나르고 있다
삼대 며느리 잘 들어앉아야지 오사바사한 년 아니고 말이지
삼대는 고사하고 진태가 돌아와 어서 장가나 들어야 할텐데
장가 가던 머리로 떡두꺼비 같은 손자놈 하나 얼뚱아기 하나
평생 허전했던 품에 안고 두둥실 두둥실 떠나가 봐야 할텐데
전원시편1, 민음사, 1986
목포행 고은
목포행
그렇다 이리역에서 멈췄다가
김제 외애밋들 지평선을 지나는 비둘기호를 타고
찐 달걀 두어 개
소금 발라
하나쯤 옆 자리 아이에게 주고나서
내다보는 초겨울 들이여
빈 들 가득히 입 다문 사람의 숨결이여
아무리 모진 때 살아왔건만
순된장이여 진흙이여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따뜻한 사람의 숨결이여
시여,날아가라, 실천문학사, 1986
묘지송 고은
묘지송(墓地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데 그대 자손은 차례차례로 오리라.
지난 밤 모든 벌레 울음 뒤에 하나만 남고 얼마나 밤을 어둡게 하였던가.
가을 아침, 재보(財寶)인 이슬을 말리며 그대들은 잔다.
햇빛이 더 멀리서 내려와 잔디 끝은 희게 바래고
올 이른 봄의 할미꽃 자리 가까이 며칠만의 산국화가 모여 피어 있구나.
그대들이 지켰던 것은 비슷비슷하게 사라지고 몇 군데의 묘비(墓碑)는 놀라면서 산다.
그대들이 살았던 이 세상에는 그대의 뼈가 까마귀 깃처럼 운다 하더라도
이 가을 진정한 슬픈 일은 아니리라.
오직 살아 있는 남자(男子)에게만
가을은 집없는 산길을 헤매이게 한다.
그대들은 이 세상을 마치고 작은 제일(祭日) 하나를 남겼을 뿐
옛날은 이 세상에 없고 그대들이 옛날을 이루고 있다.
어쩌다, 잘못인지 노랑나비가 낮게 날아가며
이 가을 한 무덤 위에서 자꾸만 저 하늘에 뒤가 있다고 일러 준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데 그대들은 이 무덤에 있을 뿐 그대 자손은 곧 오리라.
해변의 운문집, 신구문화사, 1964
문의마을에 가서 고은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문의 마을에 가서, 민음사, 1974
벼를 털며 고은
벼를 털며
이 세상은 절대로 꿈이 아니다 허깨비가 아니다
지은 가을 곡식 엄숙함이여
벼 눕혀 말리면 안 된다 해도
쌀에 싸라기 있고
밥맛이 가신다 해도
아서라 볏단 세우기에 어디 일손 남아 돌더냐
이 세상은 절대로 꿈이 아니다
논두렁에는
콩도 팥도 심지만 피가 성했다
때마침 찬바람에 벼 잘 말라
한 번 뒤집어 둔 다음
일찌감치 벼 타작하니
쉴 데 없는 마음 하나가 논 하나가 된다
탈곡기 먼지 속에서
늙어가는 안식구 일손 좋아
오직 두 눈만 뻥 뚫려 있다
고등학교 졸업반 큰놈도
거드는 솜씨 제법 건실하여서
하루해 질 무렵까지는
어둑발에 방아달 논 한 배미 다 털겠다
이 세상은 무슨 일로도 다른 세상 아니다
벌써 저녁 바람 찬 기운이 사납다
이 세상은 우리 세상 우리 자식이 아니더냐
된 일에 된 몸 쉬는 것도
건너마을 어른 지나는 참이라
벌써 다 터는가
우선 한 배미지요
쌀 좋겠네
편히 건너가시지요
이 세상은 절대로 꿈이 아니다
아무리 나이 먹어도
말 한마디에는 언제나 오늘이 어린아이같다
옛날 옛적 타작에는 개상 탯돌이다가
옛날에는 홑태질로
하루내내 훑어내다가
이제는 탈곡기에 벼 털어
벼 한 가마 한 가마 곳간에 부리니
곳간 문 열면 웃음 울음 가득하다
며칠 지나 모진 공판장에 내볼지라도
오늘 흐뭇흐뭇한 바 어이할 줄 모른다
이 세상은 절대로 꿈이 아니다 허깨비가 아니다
전원시편1, 민음사, 1986
부활 고은
부활(復活)&
동해(東海) 창망(蒼茫)하라.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들은 잠자라.
우리 동해(東海) 기슭의 몇 군데에
서로 부서지면서 모인 게껍질들아
지난 밤에는 흰 구름의 울음을 울더니
오늘 아침 해돋이 붉은 햇빛으로
저마다 뼈 속의 살과
두어 개의 눈을 얻어서,
모든 외로운 거품을 내보내고
동해(東海) 기슭을 일제히 기어 나가라.
게들아 게들아 기어 나가라.
그리하여 동해(東海) 깊은 바다 밑바닥에 들어가서
가장 무서운 암초(暗礁)들을 물어 뜯어라.
또한 그리하여 아픈 바다는
빛나는 아픔의 물결, 진노(震怒)하는 물결과
서로 조각조각 사랑하는 물결로 물결쳐라.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들도 깨어나서
모든 뼈에 살이 싸이고
떠난 넋들아 몸에 돌아오라.
가을에 어린 것들과 늙은 것이 돌아가듯 돌아오라.
동해(東海) 기슭 삼척(三陟) 주문진(注文津) 낙산사(洛山寺)에 널린 오징어들아
다시 눈부신 물오징어로 헤엄쳐서
너희들의 자유와 슬기의 관능으로
울릉도(鬱陵島) 독도(獨島) 근해(近海) 해조음(海潮音)의 햇빛을 받아라.
이 나라의 죽은 것들아
죽어서 집 없는 무주고혼(無主孤魂)들아
저마다 가엾게 살아나서
동해(東海) 기슭을 달밤의 모래알들로 사랑하고
너희들은 백의민족(白衣民族) 인산인해(人山人海)의 춤으로 춤추어라.
동해(東海) 창망(蒼茫)하라. 북과 쇠북아 울어라.
입산, 민음사, 1977
북극을 위하여 고은
북극을 위하여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으로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북극으로 가라
대학도 왕도 없는 북극으로 가라
영하 40의 추위로부터 그대 사상을 이루어라
눈물을 위하여, 풀빛, 1990
북악호랑이타령 고은
북악호랑이타령
백 년 전까지는요
북악 인왕에 호랑이가 불쑥 나타났지요
대궐의 가여운 상궁아씨들도
호랑이 울음소리 들었다지요
아이구 무서워라 호랑이었지요
보아요 북악 바위바위 얼마나 뛰어나요
거기에 와 앞발 내디디면
멋지고 멋진 호랑이었지요
우리나라 통 큰 시악시 쩍 반했지요
예부터 허튼 수작 관상에는 호식상이 있었지요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상이 그것이지요
한양 4대문 밖 변방에서
걸핏하면 어린아이 물어가는
그런 고얀 놈 없지 않았지요
쯔쯔 더러는 인수봉 스님도 하나 물어갔지요
시여,날아가라, 실천문학사, 1986
뼈 이야기 고은
뼈 이야기
산등성이마다 언덕마다 부랴사랴 밭머리마다
땅 가물에도 원두 부쳐먹던 사람들 죽어 묻혔구나
하루내내 뻐꾸기 소리 듣는 구멍 하나 뚫리지 않았건만
순하디 순한 무덤들이여 살던 곳에서 죽은 복이여
허나 어찌 이런 복으로만 이 땅이 저승이겠는가
돌아보건대 너와 나 소나기같이 살아온 세월이었다
왜놈들 총칼 게다짝 버리고 떠나간 뒤에 대고
당장 새 세상 좋은 세상 열어 장고 치려 하였건만
어언 40년 바람 잘 날 없이 우리 무엇을 하였는가
하나로도 모자란 땅덩이 두 놈으로 딱 갈라서서
서로 때려 죽이고 쏴 죽이고 가시철망 울 치고
그 따위만 백 번 옳다고 무섭게도 헛되었구나
이 막된 미움 가지고는 천 년인들 열리는 문 없음이여
산 것들 지나새나 이 골이니 무덤인들 오죽하였겠느냐
이제 우리에게 숙연히 머리 들어 할 일인즉
남과 북쪽 오로지 원수였던 젊은이들 무덤을
따로따로 섬길 것 아니라 내 편이 아니라
저 팔월의 휴전선 비무장지대 풀밭에 합장하여
그 위에 마음껏 해와 달 별들 다니게 하고
산 사람 죽은 사람이 온 겨레로 뭉쳐 애끊이어라
아직도 이 땅에는 제대로 거두지 못한 뼈 있고
풋나기 인민군의 뼈 학도병의 뼈 버려져 있다면
어디 그뿐인가 온갖 사연으로 죽어간 목숨들이여
그것 하나하나 캐어다 그들도 함께 묻어서
보아라 이제 이 커다란 만인총이 비로소 하나이겠구나
이 하나 이 한 세상 이룩하기 얼마만인가
또한 어디 이뿐인가 해방 이래 40년 가 버리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동포 끌려간 동포
만주땅 중국땅 버마 자바땅 비율빈 충승열도
왜놈의 구주탄광 아오모리탄광 또 어디어디
그런 곳 풀더미 속에 땅 속에 묻힌 뼈 한 도막인들
단 한도막도 남기지 않고 샅샅이 찾아다가
우리 7천만 품안에 모시고 실컷 깨쳐야 하리라
내 어버이 무덤 한 쌍 소중하기 그지 없거니와
이 겨례로 태어나 이 겨례 치욕으로 죽은 바
원통하고 절통하였던 동포들의 삶과 죽음이
어찌 내 아버지 아니던가 어머니 아니던가
이날 이때 우리 무엇을 하였던가 말았던가
겨례의 엄한 뼈 타국땅 구석에 그냥 버려두고
우리가 어디에 겨례인가 만 번 거짓 아닌가
보아라 산 사람이여 너와 나 살아 있음이 여기로구나
먼저 비명으로는 명으로든 죽은 겨례붙이 마음삼고
그들의 뼈를 이 땅의 정든 산천초목으로 더불어서
온 겨례 하나로 일어선 그날이 아기같이 오너라
그날이 씩씩한 총각같이 오너라 시악시같이 오너라
삼천리 강산 번쩍 들어올려 우리 바이없는 자자손손 오너라
시여,날아가라, 실천문학사, 1986
사과 한 알 고은
사과 한 알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서너 달이고
사과 한 알을 그려본 적이 있다
그는
그 사과 썩어버려
말라버려
사관지 뭔지 모를 때까지
그것을 그려본 적이 있다
그래서 그 그림들은 끝내
사과가 아니었다
사과 그림이 아니었다
끝내 그 그림들은 쭈그러진 것
아무 쓸모 없는 것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살아 있는 세상을 알 만한 힘이 생겼다
그가 그릴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있다는 것도 알 만한 힘이 생겼다
그는 붓을 탁! 던져버렸다
그가 그린 그림들을 마구 밟아버릴
어둠이 오고 있다
그는 붓을 다시 들어
그 어둠에 대고 마구 그리기 시작했다
이미 사과 한 알은 없으나
사과로부터
사과가 아닌 상태까지의 그림이 있다
내일의 노래, 창작과비평사, 1992
사랑 고은
사랑
불 끄고
옷 벗고
우리 내외 알몸으로 일어서서
살이란 살 다 내리도록
껴안은 뼈 두 자루!
분단 휴전선의 밤 밝힌 뼈 두 자루!
새벽길, 창작과비평사, 1978
사랑방 고은
사랑방
사랑방에는 전설이 있다
전설이 살아 있다
죽은 사람도 살아나 오늘이다
사랑방에는 옛과 오늘이 한 또래이다
택시에는 유언비어가 있다
그러므로 택시에는 진실이 있다
사랑방에는 역사가 있다
고려사절요 따위
이조실록 따위보다
훨씬 자유로운 역사가 있다
사랑방에는 영웅이 있다
택시에는 장영자 무슨자 있다
사랑방에는 지배자가 아니라
백성의 꿈이 있다
사랑방에는 내일이 있다
전하고 전해져서
이윽고 일제히 일어나는
울창한 숲이 있다
선방에는 노승이 있다
노승과 노승의 부재가 하나이다
룸살롱에는 요지경이 돈다
영동에는 과연 육체가 있다
영동에는 강북의 수표가 있다
사랑방에는 호롱불이 있다
발고랑내 땀내 찌들고
돼지기름 먹은 목침이 있고
빈대자국 요란하지만
거기에는 기나긴 인내가 있다
우리가 고려 조선
역대로 견디어 온 된장이 있다
사랑방에는 백성의
이런저런 하잘나위 얘기가 있다
별난 뻥이 아니라
이웃마을 물쌈 얘기가 있다
내일 고된 일 앞두고
밤새는 줄 모르는 얘기가 있다
감방에는 도둑놈 있다
독방에는 내가 있다
소장도 얼씬 않고 내가 있다
사랑방에는 이른바 대화가 있다
명상이란 사상을 죽이는 악이다
사랑방에는 모여서
그 방에서
부리부리한 사상의 새끼가 태어난다
어둑한 방 가득히
우리네 기쁨이 가슴에도 가득히
사랑방에는 진리가 있다
불이 꺼지면 더듬어서
서로 손잡는 진리가 있다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사치 고은
사치(奢侈)
어린 시절, 고향 바닷가에서 자주 초록빛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빨랫줄은 너무 무거웠고 빨래가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오랜 병(病)은
착한 우단 저고리의 누님께 옮겨갔습니다.
아주 그 오동(梧桐)꽃의 폐장(肺臟)에 묻혀 버리게 되었습니다.
누님은 이름 부를 남자가 없었고
오직 `하느님!' `하느님!'만을 불렀습니다.
저는 파리한 채, 누님의 혈맥(血脈)은 갈대밭의 애내로 울렸습니다.
이듬해 봄이 뒤뜰에서 살다 떠나면
어쩌다 늦게 피는 꽃에 봄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여름 한동안 저는 흙을 파먹고 울었습니다.
비가 몹시 내렸고 마을 뒤 넓은 간석농지(干潟農地)는 홍수에 잠겼습니다.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왔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찬 세면(洗面) 물에 제 푸른 이마 주름이 떠오르고
그 수량(水量)을 피해 가을에는 하늘이 서서 우는 듯했습니다.
멀리 기적(汽笛)소리는 확실하고 그 뒤에 가을은 깊었습니다.
모조리 벗은 나무에 몇 잎새만 붙어 있을 때,
누님은 그 잎새들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맑은 뜰 그 땅 밑에서 뿌리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더 푸르기 때문에 제 눈 빠는 버릇이 자고
그러나 어디선가 제 행선지(行先地)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누님께서 기침을 시작한 뒤 저는 급격하게 적막하였습니다.
차라리 제 턱을 치켜들어 보아도
다만 제 발등은 노쇠(老衰)로 복수(復讐)받았습니다.
마침내 제가 참을 수 없게 누님은 피를 쏟았습니다.
한 아름의 치마폭으로 고히는 그것을 껴안았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보았습니다, 누님의 깊은 부끄러움을.
그리고 그 동정(童貞) 안에 내숙(內宿)한 조석(潮汐)을.
그 뒤로 저의 잠은 누님의 잠이었습니다.
누님의 내실(內室)에는 어떤 고막(鼓膜)이 가득 찼고
저는 문 밖에서 순한 밤을 한 발자국씩 쓸었습니다.
누님께서 우단 저고리를 갈아입던 날,
저는 누님의 황홀한 시간을 더해서
겨울 바닷가를 헤매이다가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봄의 음력(陰曆), 안개 묻은 빨랫줄을 가리키며
누님의 흰 손은 떨어지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울지 않고 그의 흰 도자(陶磁) 베개 가까이 누워
얼마만큼 그의 혼을 따라가다 왔습니다.
해변의 운문집, 신구문화사, 1964
산길 고은
산길
이상하다. 언제나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그렇게도 익숙하건만……
늙은 떡깔나무는 외면한 채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듯하고
길은 부유(腐乳) 냄새가
이제까지 모여 있다가 흩어지는구나.
이상하다.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걸어가면
내 발등은 먼저 간 자취로 떨리는구나.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가면
외딴 곽새가 V자(字) 가지에서 날라 가 버릴 뿐이다.
어느날 일몰(日沒)이 늦었다. 나의 산길에는
그때까지 아침 이슬이 마르지 않고 있다.
자꾸 둘레를 돌아다보면서
이윽고 부락암호(部落暗號)로 불러 보았다.
저 앞에서 누가 반말로 대꾸한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줄 어떻게 알겠느냐.
이상하다. 언제나 나의 산길에는
누가 조금 전에 간 자취가 있다.
이 산길은 간조(干潮) 바다까지 보다 멀고
먼 예리고* 고개까지도 닿아 있다.
비록 다른 길이 있을지라도
나는 이 산길을 버릴 수 없구나.
왜냐하면, 여기서 누구인가 낯선 면모(面貌)를 만날테니까……
* 예리고: 요단강(江)에서 오(五)마일이 떨어진 땅. 어의(語義)는 향기를 뜻함
신. 언어 최후의 마을, 민음사, 1967
살생 고은
살생(殺生)
어버이도 아들도 벗도 베허라.
만나는 것들
어둠 속의 칼날도 베허 버려라.
다음날 아침
천지(天地)는 죽은 것으로 쌓여서
내가 할 일은 그것들을 묻는 일.
문의 마을에 가서, 민음사, 1974
삼만이 할머니 고은
삼만이 할머니
중뜸 간지랑나무 목백일홍 나무에
느지감치 분홍꽃 덩어리 피어난 여름
첫물 모기에 어린 살 물리며 듣던 이야기
옛날옛적 이야기
옛날옛적 한 마을에 늙은 홀어머니 모시고
단둘이 사는 노총각이 있었는데
철종 때인지 고종 때인지 어느 때일 까닭도 없이
어느 이야기나 다 옛날옛적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두리넓적 얼금뱅이 삼만이 할머니
눈 펑펑 내리는 날
한없는 날
화롯불 삭아서 방안이 썰렁해도
옛날옛적 노총각 이야기
그 이야기에 이어서 이번에는 명주실꾸리 이야기
옛날옛적 한 마을에 한 아이가 살고 있는데
그만 강도들에게 제 누나가 업혀갔는데
그 겨를에도 명주실꾸리에 실 매고 간 누나 찾아
명주실 따라 산 넘고 물 건너 갔더니
이윽고 어느 우물 열 길 드리워져서
그 우물 밑으로 내려가 바윗장 들추었더니
아 그곳은 별천지라
이 세상은 엄동설한인데 그곳에는 복사꽃 핀 별천지라
내일이면 청사초롱 초례청 차려
강도 우두머리의 마누라 될 누나 찾아서
에그머니나 어서 돌아가야지
누나 업고 산 넘고 물 건너 돌아와
누나는 이웃마을 총각한테 시집 가고
아우는 건넛마을 달덩이 같은 큰애기한테 장가 들어
잘 먹고 잘 살아서 백여든다섯 살까지 갔다는 이야기
어찌도 그리 쩍쩍 늘어붙는 입담인지
우리들 어린아이들
산머루 눈동자에 온갖 세상 다 보여주고는 걷어갔지
그 할머니 죽을 때도 이야기하려고 그랬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죽었다지
아무리 입 닫아드려도 도로 벌어졌다지
만인보 1, 창작과비평사, 1986
삼사경 고은
삼사경(三四更)
천 번 만 번 어두운 밤중
저 혼자 울부짖어서
꽃 한 송이는 핍니다.
그 옆에서
붉은 꽃 한 송이도 벙어리로 핍니다.
문의 마을에 가서, 민음사, 1974
새벽길 고은
새벽길
어머니
푸성귀 잉꼬리 장수로 데친 비름나물 몇 줌이나
콩밭김치거리 열무 몇 단 팔아서
어머니의 아들 새벽길 이슬차며 떠날 때
서울 가서 으리으리 잘되라고
주먹밥 노잣돈 주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의 아들 떠난 뒤
천년이나 영검없이 빤짝거리는
북두칠성 흰 머리에 이고
찬물 한 그릇에 정들도록 빌고 빈 어머니
어머니의 아들은 술주정뱅이가 되었습니다
일제 삼십육년의 서울
또다시 쪽바리 이십년의 한강 끝에
썩은 호박 해가 집니다
아니 양코쟁이 삼십여년에 하우스뽀이 늙고 병들었습니다
술 마시면 수많은 전생 세상 가지고
언제나 새로 태어난 가슴
다음날은 그 가슴에 구멍 뚫려
뚫린 구멍에 지난날 새벽길 환히 보입니다
어머니
언제까지나 서낭당 마루에 서서
떠나는 아들 바라보시는 어머니 환히 보입니다
이제 그만 눈물 같은 집으로 들어가세요
이제 그만 어머니의 아들
해로써 달로써 손꼽아 기다리지 마세요
눈보라뿐이었습니다
비바람뿐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아들은 술주정뱅이입니다
천 사람의 권리 몽땅 먹은 권세
만 사람의 돈벌이 다 삼킨 부자
단추 하나 누르면
누구요 하는 열두대문집 아니어요
어머니의 아들은
밤마다 발길로 채이는 술주정뱅이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한 마리 이백만원하는 금붕어 없더라도
바깥 경치 돌고도는 응접실 없더라도
문둥이 눈썹 다 빠지더라도
어머니의 아들 마흔살 되어
어느날 술잔 꽉 쥐어 깨어버리고
새 세상 같은 붉은 피 흘렸습니다
가슴팍도 이마빡도 들이받아 피흘렸습니다
더 이상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술주정뱅이로 기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천년을 기다려 온 그날
긴긴 세월 오백년으로 오십년으로
아니 남과 북 허리 잘려
총구멍 맞댄 세월
이놈도 저놈도 앞잡이 세월에
그날이 오리라고
꼭 오리라고 기다려 온 그날 다 지워버렸습니다
어머니
한 핏줄 서로 부둥켜 안을 그날
가슴마다 가슴마다 해 뜨는 그날이
언제냐고 묻지 마세요
어머니
술주정뱅이 어머니의 아들 이제야 싸움터로 떠납니다
싸워서 죽을 싸움터로 떠납니다
새벽길 찬 바람 속에
두 주먹 불끈 쥐어 어머니의 주먹밥 만들었어요
가슴에 원한 서려
어머니의 노잣돈 가득합니다
오늘 하루가 어머니의 오랜 세월입니다
먼동 찢어 새벽길 떠나며
날선 칼로 몸뚱이 되어
싸워서 그날을 등에 지고 오렵니다
피묻은 깃발 날리며
찢어진 깃발 날리며
다친 다리 싸매고 그날을 지고 오렵니다
그날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날이 모든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어머니 아닙니다
젊은 날 보리방아 찧을 적마다
쭉정이 젖통 출렁거리던 설움
어머니의 아들 죽어서
그 젖 달라고 울부짖으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아들 늙은 아들 싸움으로 죽어서
오천년 역사의 그날 꼭 이루렵니다.
새벽길, 창작과비평사, 1978
새벽 밀회 고은
새벽 밀회(密會)
또다시 나는 새벽마다 무덤에 가야 한다.
나와 함께 삼나무 묘판(苗板)을 만들고
내 세수하는 물과 마실 물을 떠다 주고
기꺼이 먼 심부름도 해 준 애의 무덤에 가야 한다.
무덤은 질투(嫉妬)의 바다가 일어나는 언덕에 있고
어제 다친 발을 나는 거기 가서 벗어야 한다.
내 약속과 돌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새벽 돌길은 매우 험하다.
그 무덤 가에서 벌써 연인(戀人)은 기다린다.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는냥
새벽 바다에서 온 바람을 치마에 받고 있다.
오오 그렇게도 단정한 연인(戀人)아.
새벽마다 만나도 항상 바다는 그대 앞에 깨어 있고,
그렇게도 단정하게 자고 난 연인(戀人)아.
그대가 무덤 가에서 미안한듯 내 품 안을 밀고
어디선가 첫 숫꿩 울음소리가 무덤을 깨우며 지나간다.
그러나 무덤은 나더러 아직 길이 멀다고
오래 있다가 오라고 부탁한다.
오오 새벽에 만나는 바다와
나의 심부름꾼 무덤과
나의 잉태한 연인(戀人)아.
이제 마지막 별들이 찔끔찔끔 서두르고 있을 때
나는 바다로부터 솟아난 비(碑)가 되고
차라리 연인(戀人)은 무덤에게 맡겨야 한다.
곧 말들이 모여 바쁜 꼬리로 나올 것이다.
새벽 연인(戀人)아, 그대의 마을 일을 오늘 하루만 도울 수 없다.
나는 이사장(理事長)네 배에 몇 백관(百貫)의 햇빛을 실어야 한다.
신. 언어 최후의 마을, 민음사, 1967
새싹 고은
새싹
씨 뿌렸더니
여기
여기
저기 좀 보소
어제는 누가 흙으로 돌아가더니
오늘 아침 이렇게 태어나
이 세상 만년 파릇파릇 새싹이구려
결국 여기서는
나에게까지
나에게까지
급한 물에 떠내려온 나에게까지
곡식 익은 뒤의 추위 가운데
사랑밖에 없다
저기 저기 좀 보소
눈물을 위하여, 풀빛, 1990
서문 밖 한약방 고은
서문 밖 한약방
고개 둘 넘어서
살모사 나오는 숲길 오싹 넘어서
대숲에 싸인 집
푸근한 집
그 집 사랑채 약방 천장에는
온통 한약 봉다리 매달려 있다
약장에는 백출 당귀 지황 감초 갖가지 들어 있다
아랫목 찬 방바닥에
망건 비스름한 영감
제갈공명 같은 영감 앉아 있다
사관 잘 놓아
침 끝에 신내렸다고 자자하여
가근방 어디에도 안 다닌 데 없다
내 머리
쇠스랑으로 찍힌 데도 고약 붙여
근 빼어내고
썩 나아주었다
언제나 갓 쓰고 두루마기 떨쳐입고
마른 미투리 가벼이 신고
급한 병 났을 때는
식전바람 이슬 차며 넘어오던 영감
그 영감 세상 떠났을 때는
아홉 동네 사람들 다 만장 들고 앞섰다
그 영감 대상 때는
아홉 동네 열 동네 사람들 다 와서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곡하였다
서문 밖 의원영감 전봉중이 영감
죽기 1년 전부터
똥그란 안경 쓴 영감
만인보 2, 창작사, 1986
서시 고은
서시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만인보 1, 창작과비평사, 1986
섬진강에서 고은
섬진강에서
저문 강물을 보라. 저문 강물을 보라
내가 부르면 가까운 산들은 내려와서
더 가까운 산으로
강물 위로 떠오르지만
또한 저 노고단(老姑壇) 마루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강물은 저물수록 저 혼자 흐를 따름이다.
저문 강물을 보라.
나는 여기 서서
산이 강물과 함께 저무는 것과
그 보다는 강물이 저 혼자서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 한 채 싣고 흐르는 것을 본다.
저문 강물을 보라.
강물 위에 절을 지어서
그 곳에 죽은 것들도 돌아와
함께 저무는 강물을 보라
강물은 흐르면서 깊어진다.
나는 여기 서서
강물이 산을 버리고
또한 강물을 쉬지 않고 볼 따름이다.
이제 산 것과 죽은 것이 같아서
강물은 구례(求禮) 곡성(谷城) 여자들의 소리를 낸다.
그리하여 강 기슭의 어둠을 깨우거나
제자리로 돌아가서
멀리 있는 노고단(老姑壇) 마루도 깨운다.
깨어있는 것은
이렇게 저무는구나.
보라. 만겁(萬劫) 번뇌(煩惱) 있거든 저 강물을 보라.
문의마을에 가서, 민음사, 1974
소와 함께 고은
소와 함께
며칠 동안 건너마을 객토 품 파느라고 너를 돌보지 못했다
바람도 불던 바람이 내 피붙이 같아서 덜 춥고
여물도 주던 사람이 주어야 네가 편하지
내가 말린 꼴 수북히 주고 더운 뜨물 퍼주니
너는 더없이 흡족해서 꼬리깨나 휘두르는구나
이랴 띨띨 밥 먹은 뒤 바깥 말뚝에 매어 두니
소가 웃는다더니 바로 네가 좋아하는 것 알겠다
외양간 쳐내어 쇠똥무더기 검불에 섞었다
네 집 뒤쪽은 샛바람 막게 두툼두툼 떼적 치고
남쪽으로는 비닐창 달아내어 볕조각 들게 했다
따뜻한 날이라 송아지 두 놈 까불대며 다니며
무우말랭이 널어 둔 멍석 밟고 마구 논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잠자리 깨끗하면 얼마나 좋은가
그동안 네 엉덩이 누룽지깨나 덕지덕지로구나
마른 똥 긁어 떼어내니 이놈 봐라 곧게 서 있다
송아지 두 놈 논 쪽으로 먼저 나간 김에
에따 너도 나도 개천 둔덕으로 놀러 나가자
외양간에만 죽치고 서서 새김질 거듭하다가
이렇게 마음 탁 터놓고 나오니 너 좋고 나도 좋다
바람에 한 번 멋지게 감긴다 무슨 회오리바람이냐
나와 너 단짝 동무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뜬다
얼씨구 양지쪽으로 조금씩 돋은 풀도 반갑다
이런 풀은 뜯지 말아라 네 새끼 송아지들 장난질한다
나도 너도 흐뭇한 것 하나도 하나가 아니다
햇볕 실컷 쪼여라 바람 쏘여라 바깥도 집안 아니냐
내 너를 두고 말한다 소만한 덕 어디 있느냐
견디기로는 사람 중에 백범이다 못 견디기로는 임꺽정이다
가자 오랫만에 나온 바깥 기쁨 몽땅 가지고 돌아가자
전원시편1, 민음사, 1986
속 눈길 고은
속(續) 눈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은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편력(遍歷)하고 와,
여기 있는 꿈나라를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고요한 눈 쌓이는 소리,
세상은 지금 기도(祈禱)의 끝이노라.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平和)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신(神)의 모습들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오는 하늘은 오랜 믿음이 차고
내리는 눈 사이로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 귀를 뜨노라.
나는 기도하지 않노라.
나의 마음은 이 끝나는 기도(祈禱)를
지키고 있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전세계(全世界)를 돌아다니고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으로서
쌓이는 미래(未來)의 이 눈빛 앞에
나의 마음을 어둠으로 덮노라.
피안감성, 청우, 1960
썰매 고은
썰매
칼바람 분다 저 건너 땅이 운다 달려가자
얼어붙은 얼음놈들아
아직 물로 돌아갈 때가 아니다
네가 물이 되면
우리는 아울러 빠져죽는다
봄이 온단다
저 건너 땅이 운다 달려가자
칼바람 불어닥쳐도
건너가면 한잔술 볼바심할 데 있다
굳은 손 욱신욱신 녹여줄 봄이 온단다
어느 연놈 우리가 빠져죽기 원하느냐
어느 연놈 늘어붙어
우리가 다 얼어붙기를 원하느냐
저 건너 가면 있다
기다리는 순이가 있다
일송정 노래 부르는 아내가 있다
털벙거지 동만주 독립군의 넋이 있다
네가 낳을 누렁이 새끼 있다
봄이 온단다
두 팔 벌려서 해 뜨는 자유가 있다
봄이 온단다
달려가자
주저앉으면 얼어붙는다
봄이 오면 그냥 가라앉는다
칼바람 분다 달려가자
칼바람 채찍 맞으며
죽도록 달려가자
이 강을 건너가면 봄이 온단다
새벽길, 창작과비평사, 1978
아리랑 영감 고은
아리랑 영감
박판술 영감이 지나가면
우리는 육자배기가 지나간다고 했지
그가 논두렁에 잠들어 있을 때
우리는 육자배기가 뻗어 있다고 했지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에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그 동지섣달이 뻗어 있다고 했지
육자배기하고
동지섣달하고 그렇게도 잘 부르더니
그 늙은 홀아비 판술 영감은
죽기 이틀 전에도
병든 몸 끌고 토방에 나와
한바탕 진도아리랑 불러댔지
죽 한 사발 끓여줄 사람도 없어서
혼자 기어나와 죽 끓여먹고 간장 먹고 앓은 영감
그러던 그 영감 토방에 나왔으니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저 영감 살아날라나보다 힘차다 했는데
다음 다음날로
그만 힘차게 이 세상 후딱 떠나버렸지
동네사람들 새로 짠 가마니 두어 장 내다가
둘둘 말아
남생이언덕 바람 속에
홀아비 송장 묻으며
이구동성으로 날 좀 보소 불러주었지
그 뒤 괜히 바람 치는 밤이면
남생이언덕 평토장한 무덤에서
그 영감 육자배기도 진도아리랑도 들린다 했지
생전보다 더 기막히게 부르는 진도아리랑 들린다 했지
만인보 1, 창작과비평사, 1986
애마 `한쓰'와 함께 고은
애마(愛馬) `한쓰'와 함께
오늘 새벽, 수수잎새 같은 옷을 걸치고
나는 사세마(四歲馬) `한쓰'를 타자 마구 달렸다.
처음 곡식을 거둔 빈 밭에는 채일 것이 없다.
내가 달릴 때 말이 먼저 요왕교부(敎父)네 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내 귀는 말의 귀에 대고 어렴풋이 들었다.
아직 주홍(朱紅)꽃신을 제품에 안고 내 외동딸은 쌕쌕거리겠지,
내가 돌아오면 네가 처녀가 되어 있으면, 첫째 `한쓰'가 놀라리라.
어느덧 우리는 하얀 길을 달리는구나.
말 고삐를 나꿔채지 않아도
`한쓰'는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
새벽 길은 남은 가을 끝이 여기저기 잠들었고
침착한 대기(大氣)뿐, 캐비지밭을 끼고 밤은 지새었구나.
모처럼 외동딸을 피해, 어린 시절의 마을 장님 노래와
대만(臺灣)까지는 이틀이면 갈 바다와 박쥐들과……
내 `한쓰'는 그런 것을 내게 주면서 달린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내 두 다리는 말의 옆구리에 맡길 뿐이다.
그러면 `한쓰'는 새벽꿈이 주인 때문에 끊겼다고 투덜대다가 비는구나.
몇 십년(十年) 동안 농부는 밭에 있으나, 아직 새벽 밭은 비어 있고,
지난 여름 하늘의 곰별자리 밑께로 `한쓰'는 멈춘다.
내가 앞으로 가슴이 밀리다가 내리고 안장은 따뜻한 채 기다리리라.
그러나 파리가 뜯어먹은 흉터장이 `한쓰'야, 우리는 어서 돌아가자
이제 신 한 짝이 품에서 내려지고 외동딸이 깨일 아침이구나.
해변의 운문집, 신구문화사, 1964
어둠과 더불어 고은
어둠과 더불어
만권(萬卷) 책이 눈을 감았다.
술 취한 새벽 세시!
내 방의 어둠만으로 살 수 없다.
문을 열자
문을 열자
모든 어둠놈들이 들어와서
어떤 먹 그믐밤 개구리 운다.
문을 열자
문을 열자
모든 어둠놈들이 들어와서
벙어리귀신 가슴앓이.
새벽 세시 몇분!
내 방의 어둠만으로 살 수 없다.
관음보살(觀音菩薩), 나에게 천수천안(千手千眼) 어둠 놈들을 보내다오.
입산, 민음사, 1977
어린 잠 고은
어린 잠
가만
가만
귀 기울여 보세요
어느 놈의 천하장사도 못당할 힘으로
우리 어린것들 잠자는 숨소리에
큰 벼랑 무너지는 괌소리 들려요
아가
아가
네가 옳아요
어린것들 깨어나면
임진강 스무나루 이쪽저쪽 오가는 배에
고려 뱃노래 물도 울려 온몸에 들려요
새벽길, 창작과비평사, 1978
어머니 고은
어머니
하루내내 뼈도 없고 뉘도 없는 만경강 갯벌에 가서
그 아득한 따라지 갯벌 나문재 찾아 발목 빠지다가 오니
북두칠성 푹 가라앉은 신새벽이구나 단내 나는구나
곤한 몸 누일 데 없이 보리쌀 아시 방아 찧어야지
도굿대 솟아 캄캄한 허공 치고 내려 찧어 땅 뚫는구나
비오는 땀방울 보리쌀에 뚝뚝 떨어져 간 맞추니
에라 만수 그 밥맛에 어린것 쑥 자라나겠구나
여기말고 어디메 복받치는 목숨 따로 부지하겠는가
이 땅의 한 아낙의 목숨이 어찌 만 목숨 살리지 않겠는가
충청도 장항에서 흐린 물 느린 물 건너
삐그덕 가마 타고 시집 온 이래 그 고생길 이래
된장 간장 한 단지 갖추지 못한 시집살이에 몸 담아
첫 아들 낳은 뒤 이틀 만에 그놈의 보리방아 찧어
두벌 김매는 논에 광주리 밥 해서 이고 나가니
산후 피 펑펑 쏟아 말 못할 속곳 다섯 벌 빨아야 했다
그러나 바지랑대 걸음걸이 한번 씨원씨원해서
보라 동부새바람 따위 일으켜 벌써 저만큼 가고 있구나
갖가지 일에 노래 하나 부르지 못하고 보리고개 봄 다 가고
여름 밭 그대로 두면 범의 새끼 열 마리 기르는 폭 아닌가
우거진 풀 가운데서 가난 가운데서 그놈의 일 가운데서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찌 나의 어머니인가
만인보 1, 창작과비평사, 1986
연장 무덤 고은
연장 무덤
만경강 염전에 해일 나서
그 천지개벽에
염전 일 하러 갔던
수길이 아저씨
설장고 잘 치던 아저씨
그만 해일에 떠내려가
몸뚱이는 커녕
신발 한 짝 찾지 못했다
수길이 아저씨네 형제들
시집간 자매들
의논키를
빈 무덤이라도 써
거기에
수길이 아저씨 쓰던 연장
괭이 뿔괭이 삽 쇠스랑
나무자루 빼고 넣어서
수길이 아저씨네 종중산에 묻었다
연장 무덤이었다
마을 아이들 어쩐지 그 무덤에는 가지 않았다
어쩐지 그 헛무덤이 무서웠다
그런데 3년 뒤
이게 웬일인가 수길이 아저씨 살아 돌아왔다
형제들 처음에는 등골이 오싹하여 물러났다
수길이 귀신이었기 때문이다
나 귀신 아니다 아니다 하고
살아 온 수길이 아저씨 한참 외치고 나서야
서로 얼싸안고
이게 꿈이여 생시여 하고 울고불었다
해일에 떠내려가다가
한정없이 떠내려가다가
웬 나무토막 만나
그놈에 목숨 부지
칠산바다로 떠내려가다가
거기서 배 만나
뱃놈이 말하기를
목숨 구해준 값으로 일 좀 해주고 가라 해서
3년이나 배 안에서 밥 짓는 일 해주다가
법성포에서 도망쳐 왔다 살아 돌아왔다
수길이 아저씨 무덤 파서
연장 꺼내어
거기에 새 자루 맞춰 끼워
흙 한 번 찍어보더니
너도 살고 나도 살아 일복 또 터졌구나
만인보 2, 창작사, 1986
열매 몇 개 고은
열매 몇 개
지난 여름내
땡볕 불볕 놀아 밤에는 어둠 놀아
여기 새빨간 찔레 열매 몇 개 이룩함이여.
옳거니! 새벽까지 시린 귀뚜라미 울음소리
들으며 여물었나니.
아침이슬, 1980
오늘의 썰물 고은
오늘의 썰물
우리는 기억하리라
이 세상을 폭풍우로 두들겨패야 할 때가 있다
이 세상을 성난 해일로 덮쳐야 할 때가 있다
비록 흰 거품 물고 물러서지만
오늘의 썰물로 오늘을 버리지 말자
오늘이야말로 과거와 미래의 엄연한 실재 아니냐
우리는 기억하리라
기억해 자식에게 전하리라
오 끝없는 파도의 민족이여
그러나 이 세상을 한밤중 우는 아이로 달랠 때가 있다
역사가 아버지가 아니라 내 자식일 때가 있다
오늘을 내 자식으로
멀어져 가는 썰물의 파도소리로 잠재우건만
그뿐 아니라 이 세상을 온몸으로 참회할 때가 있다
참회란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한 일을 끝내 해내는 데 있지 않느냐
지금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
우리는 파도치면서 젊은 밀물로 돌아오리라
우리들의 생존 몇천 년이 오늘이 되어
바다 전체로 온 누리로
우리들의 밤을 하나하나 드높은 별빛으로 기억하리라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우물 고은
우물
그 집 안에는 우물이 있어요
열 길도 넘는 우물이 있어요
그윽한 분례네 집
분례 어머니 박꽃처럼 환한 분례 어머니하고
어린 분례하고 옥잠화하고
단 두 식구 살고 있어요
젊은 과수댁이라
말 한 마디도 삼가고
한여름 등물도 한 적 없어요
그 분례 어머니가
열 길 우물에 묵직한 두레박 내려뜨려
길어 올린 검푸른 물
그 물의 고요와 그 무서움
심부름 가서
한 모금 마시고 나면 온몸 떨려요 두근두근대어요
만인보 2, 창작사, 1986
을파소 고은
을파소(乙巴素)
밤이 깊어서 길은 깨어 있다.
우리를 위하여 멀리까지 깨어 있다.
다친 조랑말 을파소(乙巴素)야
서둘지 말고 가자.
우리는 후회한 다음 태어나서
후회할 일도 없다.
하늘에는 캄캄하게 거미줄이 자라나고
때때로 별빛이 걸려 내려온다.
아무리 큰소리로 불러도
별을 부를 수도 없고
우리는 흔들리는 수레에 실은
빈 그릇에 밤을 담았을 뿐이다.
길은 몇갑절이나 친하여
네 부지런한 흉년의 방울소리는
지나는 길에서 잠들 때도 있다.
서둘지 말고 가자.
마음이 바쁘지 않으면
어둠은 차례차례 비켜나서
우리가 온 뒤를 따라온다.
이제 바람 자는 풀밭길을 지나서
불 꺼진 외딴 마을과
중국 과부네 넓은 야채밭길도 지나왔다.
죽어가는 노인은 죽음을 서둘지 않고
우리도 서둘지 말고 가자.
먼동이 틀 때 까지는 도달한다.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기다리다가
추운 집이 달려오리라.
서둘지 말고 가자.
내 가난은 언제나 네 가난이고
아무것도 받지 않으려고
이 세상에 네가 왔지만
길은 잠든 것들이 버린
어둠에 깨어 있다.
왜 이렇게 죽음에 익숙한지,
너는 내 마음을 잘 알아서
잠든 술집을 지나갈 때는
뒤를 돌아보며 늦추는구나.
그러나 지나가 버리자.
밤이 깊으면 술보다 밤이 좋구나.
내가 죽음을 생각하면
또한 너도 생각한다.
서둘지 말고 가자
가서 네 마굿간에서 함께 쉬자.
을파소(乙巴素)야 이제 절반을 넘어
네 쉰 꼬리가 한번 영(嶺)을 치는구나.
문의마을에 가서, 민음사, 1974
이 만조에 노래하다 고은
이 만조(滿潮)에 노래하다
제주 만조(濟州滿潮)여, 그대는 떠나는 배를
조금만 늦게 떠나게 하고
어제 밤 배들을 돌아오게 한다.
어떻게 지킬 약속을 실어오는지,
한 척의 거룻배도 삐걱거리며 돌아오게 한다.
그러나 만조(滿潮)여, 그대는 한 물새가 조상(弔喪)할 것을 조상(弔喪)하게 한다.
돛받이에 다친 어부는 키 잡은 손을 풀고
온갖 그물코에 별들을 걸어야 한다.
잠깐이다. 다른 세상에서 다른 여인이 낳을 것이다.
오늘까지 살아온 자는 그대 앞에 있고,
언젠가 오랜 땅보다도 오랜 바다를 소망하리라.
만조(滿潮)여, 누군들 그대 앞에 한낱 어린 길손이리라.
그러나 만조(滿潮)여,
그대가 이 마을을 가득하게 할 때
산지포(山地浦) 노인의 지는 숨은 빨리 지고
새 갓난애와 별똥이 탄생한다.
이 세상을 떠나는 자도 오는 자도
그대가 이 마을을 가득하게 할 때인지라
먼 곳으로부터 썰물 때는 서두를 수 없으리라.
저 북쪽 바다에는 동정녀(童貞女)의 어화(漁火)를 수놓게 하고
한 물결만큼 바람을 쉬게 해도 물결은 찬란한 살로 일렁인다.
만조(滿潮)여, 고기떼는 좀 남아서 자지 않을 것이고,
여러 물새들은 제 날개를 재워야 한다.
제주 만조(濟州滿潮)여, 이제 그대가 이 마을을 떠나려 할 때,
저 어둔 바다는 새끼아지와 소라를 키우지 않고
잠시 신(神)을 키우지 않으리라.
이미 돌아온 배는 비어 있으나
어느 작은 갑판 위에 인기척이 남고
마지막 배가 죄없이 돌아온다.
만조(滿潮)여, 저들 어부(漁夫)에게 목 축일 술을 허락하라.
그리하여 이 마을은 조심스럽게 썰물을 기다리게 하라.
모든 것은 가득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떠오른다.
밤은 깊다. 그러나 만조(滿潮)여,
오늘 이 마을 일은 다 끝났다.
저 북쪽 바다는 더 넓어질 것이고
그러나 제주만조(濟州滿潮)여, 오늘밤 꼭 떠나갈 배를 내일 떠나게 하라.
해변의 운문집, 신구문화사, 1964
인당수 고은
인당수
흰구름 달려가는 북소리 울려라
몽구미나루 세찬 물결
너와바윗장 뜯어내어라
이팔청춘 아가씨야
인당수 짙푸르더라
아비 눈 뜨는 공양미 삼백석
그런 놈의 공양미 아니어라
목구멍 거미줄 걷어내고
하얀 이밥 한 그릇의 꿈이어라
매야 매야
성날수록 네 발톱 감추어라
아리따운 아가씨야
쌀 삼백석에 몸 던진 아가씨야
네 몸이 저승이어라
네 몸이 용궁이어라
네 몸이 바다 위 연꽃이어라
네 몸이 매 떠오른 하늘이어라
네 몸이 아비의 눈이어라
새 세상 가득찬 새 눈이어라
싸우는 아가씨야
몸 하나로 죽어서
쌀과 임금과 싸우는 아가씨야
치마폭 쓰고 해진 바다에
네 몸 던져
네 몸이 뭉구미나루 북소리여라
소용돌이치는 싸낙배기 물결이어라
그 물결 속의 끝없는 조기떼여라
온 백성 연장 들고 달려가는 싸움터여라
매야 매야
이팔청춘 물귀신 된 아가씨야
수령방백 모가지 할퀴는 아가씨야
새벽길, 창작과비평사, 1978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고은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 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어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남의 어린 외동으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했다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재철이 어머니 고은
재철이 어머니
재철이 어머니는
죽산서 시집 와서
뜬 20년
아수룩아수룩
아들 셋 쪼르르 나서
내년이면 큰놈이 공주사대에 갈지도 모르니
치통도 좀 수그러져야지
20년 동안
땡볕에 농사짓느라
낭떠러지 자식 짓느라
열 바가지가 플라스틱 바가지 되어
기껏해야 60리 길 친정 한번도 못간 세월
사발농사 안 지으려고
평택장은 고사하고
친정 한번 못간 세월
이내 발밑 꿩 날으듯이
친정 아버지 어머니
세상이나 떠나야 그때나 부랴부랴
20년 전 새색시로 흰 머리 풀고 울며 가야지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저녁 논길 고은
저녁 논길
벌써 별 하나 떠 이 세상이 우주이구나
마른 풀냄새 한철인 마을에도
아껴 쓰는 전등불빛 여기저기 돋아난다
나는 돌아가는 저녁 논길을 외오 걸으면서
달겨드는 밤 물것 이따금 쫓고
한편으로는 엊그제 흙에 묻힌 남동이 영감을 생각한다
죽음이 산 사람의 마음을 깊게 하는지
나도 그 영감 생시보다는 손톱만치 달라져야겠구나
어둠에 더욱 정든 논 두루 돌아다 보아라
지난 해보다 도열병 성해서 얼마나 품도 애도 더 먹었는지
여든 여덟 번이나 손이 가는 농사가 1년농사 아니냐
아무리 쌀 농사 헛되고 빚지는 가을이건만
가을은 가을답게 부지깽이도 덤벙대도록 바쁘다
진정코 여기서 떠날 줄 모르고 놀 줄 몰랐다
살아 보면 세월은 사람에게 큰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가장 작은 것이다
돌아가는 길 저녁 논길이 오늘따라 으리으리하게 조용하구나
가물에도 뒷장마에도 병충해에도 실컷 커서
말없이 이삭 팬 벼가 우리에게 어른이 아니고 무어냐
어서 가자 가서 매흙냄새 나는 이 몸으로
내 새끼 한 번 겨드랑 받쳐 번쩍 어둠 속에
들어올렸다 넉넉잡고 한 나라로 내려놓자꾸나
전원시편1, 민음사, 1986
저녁 숲길에서 고은
저녁 숲길에서
어느날보다도 일찍 미자르 별*이 뜨고 나는 일을 마쳤다.
내 말이 방풍지대(防風地帶) 너머로 달려 가서
해산(解散)하는 메밀밭을 버려 놓았기 때문에
나는 말을 끌고 사과하러 가야 한다.
그러나, 한두 번 잘못하는 일은 아름다움일까.
내가 가는 것은 뜻밖의 슬픔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밭 주인네 집은 숲 저쪽의 오지(奧地)에 있다.
버린 메밀밭은 저문 뒤에 더욱 역력하구나.
나는 따라 오는 말더러 핀잔을 주지 않고
오직 숲길로 접어 들자 말했을 뿐이다.
`이제 다 왔다. 네가 좀더 겸손해지면
나도 또한 겸손해지리라.'
우리가 숲으로 들어가자 누가 뒤에서 일어서는 것 같다.
자꾸 돌아다보아도 말 꼬리에 채이는 것은 어둠이다.
저녁 숲길은 밭 주인의 자취가 가득하고
나는 탄주(彈奏)하는 주인에게 할 말을 연거푸 연습해 본다.
`잘못했습니다. 제 말은 운 뒤 몹시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화를 낼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밭 주인의 막내딸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상하구나, 내 사과하는 손길이 굳어진다.
아무래도 그 애의 혀에 이끼가 끼고 곧 죽으리라.
나는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집을 하직(下直)하였다.
그 숲 속의 집에서 너무나 멀리까지 야채(野菜) 썩은 냄새가 따라온다.
내 걸음은 훨씬 더디고 말 얼굴이 슬픔을 뿌리친다.
어서 나는 바시해협(海峽)* 쪽으로 늙은 말과 돌아가야 한다.
오던 길이 아니었다. 내 눈은 오던 길을 사납게 찾는다.
그러나 낯선 길에서 마음이 쭈뼛쭈뼛 모지는구나.
말도 유가족(遺家族) 오여사(吳女史) 흉내를 내며 따라 온다.
어디선가, 개울물 소리가 혼자 중얼거리고
단 한 번 죽을 까치가 별빛처럼 운다.
`이제 다 왔다. 밭 주인 딸은 곧 죽으리라.'
내가 겨우 들리도록 말하자 말은 엉덩이를 낮춘다.
이 세상 일은 죽음과 닿아 있고
우리들이 사과하고 오는 길에도 닿아 있다.
저녁 숲 속은 어둠이 바다 흑조(黑潮)로부터 돌아온다.
또한 그애의 죽음이 몇 번인가 숨바꼭질도 하는구나.
어느날보다 일찍 일을 마치고 나는 잘못을 사과하였다.
우리가 돌아오는 길은 밭주인네 집에서 멀어지고
이상하구나, 내일 일들이 많은 지류(支流)가 되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갑자기 영전(靈前)에 선 것 같이 말은 느끼고
오늘밤에 제 마굿간에서 함께 자기를 바란다.
어서 가자. 집에서 누가 손을 씻는 소리가 나고 그 위에서 미자르 별이 기다린다.
* 미자르별: 북두칠성(北斗七星) 중의 한 별
** 바시해협(海峽): 대만(臺灣)과 필리핀 사이의 바다
신. 언어 최후의 마을, 민음사, 1967
제암리 고은
제암리
발안장터 술 먹고
국밥 사먹고
손톱 발톱이 젖혀지도록 일도 못한 사람아
이 세상에서는 일 안하는 놈이 가장 나쁘다
손에 보따리 하나 안들고
노는 놈은
놀면서 으시대는 놈은
나쁜 일 하는 놈보다 더 나쁘다
내가 바로 그런 놈이다
딸국질이나 동무삼아
제암리 가서
살아남은 여든아홉
전동례 할머니
눈발 날리는 날
할머니 할머니
불타 죽고 총맞아 죽고
다 죽고
할머니 하나 남아서
한평생 놀아본 일 없이
3․1절 65주년도 추운 보리밭에 계신데
나는 쪽발이 앞잡이보다 나쁜 놈이다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때문이라고
과민성 대장염 중증이라고
나는 펑펑 쏟아지게 놀고만 있구나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제주의 D단조 고은
제주(濟州)의 D단조(短調)
당신을 표현하기에는 언제나 형용사(形容詞)밖에는 없다.
바하로부터 바하까지 돌아온
G선상(線上)의 여수(旅愁)와 같다.
싱그러운 눈의 외로움
등뒤에서 비오는 소리
또한 햇무리 흐르는 계단(階段)의 정적(靜寂)
어떤 기쁨에라도 슬픔이 섞인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여자를 잉태한 젊은 어머니의 해변(海邊)
오늘, 저 하마유꽃이라도 지는 흐린 날,
어제의 빈 몸으로 떠나는구나.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바람이 분다.
해변의 운문집, 신구문화사, 1964
진천장에서 고은
진천장에서
40년 동안 내 고향을 등졌다
나의 생애
초근목피의 조국아 너는 알겠지
무슨 짓이라도 용서해 주는
조상의 무덤이 싫었다
봄이 와도
진달래가 피지 않았다
진달래 뿌리 다 캐어다
겨울내내 떼어버렸다
어린 시절의 모교 국민학교가 싫었다
몇십 년 동안
K-8 최신예 전투기들이
내 고향의 하늘을 차지했다
고향 떠나 준엄한 삶으로 살지 못한
나 자신의 수많은 이유들이 싫었다
날마다
날마다
오늘을 빈 몸으로 등져버렸다
진천 장날
새로이 나는 갈데올데 없구나
나는 이제 사람이 아니라 고적한 핵에 불과하다
나의 사회
여기서는 너무 멀구나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참 고은
참
요즘이야 들에 메나리 한 가닥 없네그려
그저 허튼 소리 몇 마디로 일하다 반벙어리 되네
참 때 되니 그때에야 참 먹세하고 물에서 나와
내 마누라 볼기짝 같은 논두렁에 궁둥이 두고
술참 다음 샛밥 먹세그려 본논 일 시작이 반일세그려
멀지도 않지 저 장호원 길 칠장사 길에는
그놈의 관광버스만 줄 대어 놓고 달려가네그려
이 바쁘나 바쁜 판에 들판에
서울사람들 노는 것 하나는 어느 놈한테 질세라
참 먹세 참 먹세 우리에게는 참이 금강산 아닌가
아침 한 참 일하고 나와 엉거주춤하게도
아홉시에 막걸리로 목 축이고 꺼진 배 불리고
한 참 일하고 나와
열시 반 국수나 뭐나 샛밥으로 요기하네그려
또 한 참 일하고 나와
낮 한시 앗 뜨거운 햇볕 무릅쓰고
눈부시네그려 풋고추 갈치도막에 점심 먹고
제기랄 논두렁 잠 한 소금에다가
에라 일하세 일하세 놀러 왔던가
세시에는 라면 후루룩 넘기고 나서
또 한 참 일하고 나와
한 번 쉬어 담배맛에 기대었다가
뉘엿뉘엿 여섯시 막걸리로 허기 몰고
자 하루 일 다했네 다했어
이렇게 세월 가노라면
고된 일에 참 안 먹고 어이 배겨내던가
이렇게 저렇게 세월 가노라면
번쩍 마흔살이 호강하는 사람들 일흔이네 일흔 두엇이네그려
전원시편1, 민음사, 1986
천은사운 고은
천은사운(泉隱寺韻)
그이들끼리
살데.
골짜구니 아래도 그 위에도
그들의 얼얼이 떠서
바람으로 들리데.
그이들은
밤 솔바람소리,
바위보아
비인 산 허리.
가을이 오데.
바위를 골라
나앉아 우는 추녀 끝
뜰에 떨어지는 풍경소리에,
그이들끼리
살데.
그이들은 늙데.
돌아와 한번 잊은제
도로 가고 싶은 그이들의 얼 바람 진
산 허리.
그이들은
살데.
피안감성, 청우, 1960
초추 고은
초추(初秋)
아우여 서쪽으로 울을 치지 말라.
내가 가야 할 곳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쪽이다.
돌아온 아우여
살아가면서 아는 얼굴은
몇 잔의 술로 취하여
가을이 오면 가을 뿐인 것 같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서쪽
나무가지 사이로 서쪽이 멀어서
가을 저녁을 기다린다.
가을이 저물 무렵은
이 세상의 나도
이 세상의 아름다움도 저문다.
아우여 네가 돌아와
쓰러지도록 울을 치고
다시 살아가려는 아우여,
이제 세상을
너에게 맡기고
오늘처럼 떠나려고
저문 서쪽으로 길을 찾는다.
문의마을에 가서, 민음사, 1974
추수 이후 고은
추수 이후(秋收 以後)
삼가 재(齋)를 올린다.
어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다 불러들일 수 있겠느냐.
이 나라의 내 어린 여행(旅行)의 길,
추수(秋收) 뒤의 빈 들에
한꺼번에 모여드는 어둠일지라도
길 가의 여러 곳에는
어디에도 태어나지 못한 넋들이 나타난다.
이 나라의 마른 상수리나무 잎새로
저문 십년송(十年松) 잎새로
모든 풀이 잠든 산 기슭에 떠도는 집 없는 넋들이
그 어둠 가운데서 희끗희끗 나타난다.
삼가 재(齋)를 올린다.
빈 들이 빈 마음을 만들지라도
그 마음으로 불러서,
집 없는 넋들아
이 나라가 아무리 떠돌게 할지라도
그리하여 그대들이 곧 이 나라일지라도
빈 들이 저무는 것을 보라.
또는 다 모인 어둠 속에
내 어린 소리로 불러서
그대들의 넋이 된다.
삼가 재(齋)를 올린다.
삼가 재(齋)를 올린다.
부르면 대답 없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추수(秋收) 뒤의 빈 들이 어둠 속에서 달려온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도 개자(芥子) 씨앗이므로
삼가 재(齋)를 올리면서
이 씨앗을 심는다.
이 나라와 이 나라의 집 없는 넋들아
내 어린 울음소리로 재(齋)를 올린다.
문의 마을에 가서, 민음사, 1974
큰집 고모 고은
큰집 고모
우리 집안 아낙네와 가시내들과
가운데오촌네 집 뒷방에 모였다
가마니틀 아래
큰집 고모 오복녀 데려다가
모시개떡 해서 나눠 먹었다
간도가 어디인가
간도로 가는 오복녀
모시떡은 고사하고 언제까지나 울음바다 이루어서
집안 가시내들도 울음바다 이루어서
동네가 떠나가는데
누가 나서서 말리지도 못했다
간도가 어디인가
그렇게 울고 나서
다음날 새벽 보따리 하나 들고
큰집 막내오촌 따라 간도로 가버린 뒤
거기는 오줌 싸면
오줌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얼어서
활이 되어 걸리는 추운 곳이라지
거기 가서 어찌 사나
그 어여쁜 오복녀 고모
웃으면 오목하니 볼우물 쌍으로 열리는 고모
자주고름 접은 가슴 오복녀 고모
이 땅에서 가지고 갈 것이 무엇이랴
가장 많은 눈물 가지고 간 고모
만인보 1, 창작과비평사, 1986
투망 고은
투망(投網)
최근 나에게 비극(悲劇)이 없었다.
어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새벽마다
동해(東海) 전체(全體)에 그물을 던졌다.
처음 몇 번은 소위(所謂) 허무(虛無)를 낚아올렸을 뿐,
내 그물에서 새벽 물방울들이 발전(發電)했다.
캄캄한 휘파람소리,
내 손이 타고 내 온몸이 탔다.
그러나 새벽마다 그물을 던졌다.
이윽고 동해(東海) 전체(全體)를 낚아 올려서
동해안(東海岸)의 긴 줄에 오징어로 널어 두었다.
한반도(韓半島)여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내 오징어를 팔지 말라.
문의 마을에 가서, 민음사, 1974
편지 고은
편지
지금 나는 넓은 후면(後面)을 돌아다 본다.
길들이 재회(再會)한다. 하나의 길이 굽이친다.
누가 저 길로 반짝이며 올 것인가,
새가 잘못 날을 때 죽음이 여기저기서 메아리 친다.
가장 멀리까지 들릴 새 소리 밑으로 나는 가야 한다.
그리하여 상회(上廻)하는 하늘에서 편지를 받는다.
받은 편지는 한 번 죽는다. 그리고 태어난다.
어떤 여자가 첫 인사의 길을 묻고
함께 가다가 어의(語意) 때문에 헤어진다.
새가 나 대신 떨어져 죽는다.
다 마친 일 속에 남은 일이 있다.
마침내 반짝이는 편지 속에 새가 운다.
지금 나는 밭에서 흙 묻은 손과 이야기한다.
편지의 구절들이 살아서 내 말이 된다.
저만큼 남은 처녀지(處女地)까지 가기 전에
귀빈(貴賓)인가, 먼 곳에서 지진(地震)이 지나간다.
그러나 내 앞으로 올 날들이 서두르고
하늘은 무엇인가를 자꾸 시키면서 높아진다.
편지는 저 너머의 것을 이 땅에 가지고 온다.
새가 죽은 뒤의 극약(劇藥) 묻은 가지에서
언젠가 날으고 잊어 버린 우뢰 아래서
곧 무너질 근조(謹弔)의 언덕에서
편지는 비처럼 내 일들을 적신다.
여기까지 얼마나 많은 뜻으로 비가 왔는가.
신. 언어 최후의 마을, 민음사, 1967
폐결핵 고은
폐결핵(肺結核)
□ 1
누님이 와서 이마맡에 앉고,
외로운 파-스․하이드라짓드 병(甁) 속에
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
뜨락의 목련(木蓮)이 쪼개어지고 있다.
한 번의 기인 호흡이 창의 하늘로 삭아 가 버린다.
오늘 하루의 이 오후(午後)
늑골(肋骨)에서 두근거리는 체온의 되풀이
머나먼 곳으로 간다.
지금은 틀거울에 담은 기도(祈禱)와
아래 얼굴,
모든 것은 이렇게 두려웁고나.
기침은 누님의 간음(姦淫),
언제나 실크빛 연애(戀愛)나
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日曜日)을
누님이 보고 있다.
누님이 치마끝을 매만지며
화장(化粧)얼굴의 땀을 닦아 내린다.
□ 2
형수는 형의 말씀을 해준다.
형수의 묵은 젖을 빨으며
고향의 병풍(屛風)아래로 유혹된다.
그분보다도 이미 아는 형의 반생애(半生涯),
나는 모르는 척하고 눈 감아 버린다.
영웅(英雄)이 떠오르며
영웅을 잠 재우는 미인(美人),
형수에게 드넓은 우리 농지(農地)를 물어보려 한다.
쓸쓸히, 고개에 녹아가는
눈 허리의 명암(明暗)을 씻고 그분은 나를 본다.
혓바닥 작은 카나리아 핏방울을 구을리며
자고 싶도록 밤이 간다.
형의 사후(死後)를 잊는다.
형수는 밤의 부엌 램프를
나에게 맡기고 간다.
피안감성, 청우, 1960
풀을 베며 고은
풀을 베며
풀을 베다가 담배 한 대로 양성 쌍봉솔밭을 바라본다
바라보면 으레 바라보는 그곳이 얼마나 거룩한가
니기다소나무 숲 윗도리는 스스로 진한 그늘져서
마치 김장철 배추포기에 양념 차듯이
그늘이 소나무 가지마다 꼬옥꼬옥 채워졌다
해설피 오늘 낮일도 한 참밖에 남지 않았으니
땡볕 비껴났다고 누가 제멋대로 쉬라 하더냐
담배맛에서 문득 마른 풀냄새 아득하다
아 이 세상이 온통 풀인데 담배조차도 풀이었구나
베자 베자 어서 베허 풀과 함께 집으로 가자
오늘까지 베면 퇴비풀 스무짐째인가
어찌 풀 한 짐이 쌀 한 섬 아니라더냐
우거진 냇둑풀 추석 무렵 이발하듯 말끔히 베허
이것 한 짐 경운기에 싣고 돌아가면
경운기 소리에 하늘 아래 몸뻬 입은 내 아내가
새 사람처럼 울 밖으로 내다보리라
그렇다 내일 아침 푸짐한 이슬 내려앉기 뭣하리라
퇴비풀 베고 난 데 지나서 이번에는 쇠꼴을 베허야지
풀이 억셀 때는 영양가 없으니
이삭 나오기 전에 젊은 풀 베허 말려야지
올 가을걷이 마치면 빈 들 너그러이 건너
오랜만의 처가 늙은 처남에게 내 늙은 얼굴
기꺼이 기꺼이 마주하리라 도다녀오리라
전원시편1, 민음사, 1986
하계학교 고은
하계학교(夏季學校)
십칠년전(一七年前) 오교실(五敎室)의 그 영원한 복도.
아베교장(校長)의 사나운 슬리퍼 소리.
창마다 넓은 마당이 펼쳐 있었다.
한 구석에
내가 몰래 묻은
개구리와 생일(生日)떡의 송장도 있으리라.
그리고 내 동무가 자귀로 끊은 도막 손가락도 있으리라.
이제 쇠털 공을 빼앗긴 슬픔은 갔다.
동무는 죽었고 나는 비를 맞으며 살아 있다.
십칠년전(一七年前) 하얀 이년생(二年生).
여름이 제일 두려웠다.
병후(病後)의 어머니 털을 보았다.
보리가 거둬지면
문둥이는 떠난다.
빈 밭으로 울면서 달아났다.
화재(火災) 속에서 무너지는 우리 집.
트래흠의 여름.
내 고치가 차일을 치고 팬티를 세 개나 입었다.
여름이 제일 두려웠다.
새 집의 담을 넘은 도둑놈.
한낮의 텅 빈 뜰에 퍼붓는 소나기.
나자레노․예스스.
그 뒤의 성난 매미소리들.
건넌 마을 모깃불,
아아 일조(一條)의 수직(垂直)의 어둠.
나의 첫 내면(內面)은 학교(學校)였다.
`학교(學校)는 어쨌을까?'
`학교(學校)는 어쨌을까?'
저녁때 비가 왔다. 뱀이 자꾸 들킨다.
옥수수 가루 포대를 쓰고
빈 방학(放學)의 학교(學校)로 갔다.
바야흐로 울창한 진드기풀이 마당을 덮었다.
내 교실(敎室)의 구슬픈 거미줄.
문은 삐걱삐걱하며 겨우 열렸다.
낯선 공간(空間).
습자시간(習字時間)의 대표작(代表作)들.
내 동무의 공동묘지 그림.
그리고 붉은 해의 미개(未開)의 얼굴.
군가(軍歌)를 불렀던 원족지(遠足地) 가사메 바다의 그림.
하얗게 늙은 먼지속의 교탁(敎卓).
내 벌(罰) 받는 걸상.
방앗간과 일본(日本)사람이 목을 맨 떡갈나무가 멀리 보인다.
몇 번이고 닦아야 할 흐린 창(窓)으로……
문득 동무들의 작품(作品)이 두려웠다.
그들이 다 죽어서
저 글씨로
저 그림으로
저 바깥 풍경으로 부활(復活)한 것이 두려웠다.
`아악!'하고
문 위에 부딪쳤다.
내 떨리는 발등에 피방울이 떨어진다.
푸르른 피.
그때 나는 모든 것을 새로 탄생시켰다.
당직(當直) 요네여선생(女先生)의 가슴에 나는 박혀 있었다.
그네의 젖 설사똥 제린 냄새.
그네의 하늘 속 두 눈
그네의 왼쪽 눈
그네의 눈, 눈, 눈……
나는 양파 구근(球根)처럼 구을러서 흐느꼈다.
그네의 깊은 가슴 소리의 뭉클한 골짜기.
눈 부신 기쁨.
허리 타는 슬픔.
아아 흙을 파 먹는 외로움
`……요네 선생님!'
빈 학교전체(學校全體)가 퇴학(退學)이었다.
내가 그 품 안에서 죽거나 해일(海溢)에 떠나려 가거나……
신. 언어 최후의 마을, 민음사, 1967
할아버지 고은
할아버지
아무리 인사불성으로 취해서도
입 안의 혓바닥하고
베등거리 등때기에 꽂은 곰방대는
용케 떨어뜨리지 않는 사람
어쩌다가 막걸리 한 말이면 큰 권세이므로
논두렁에 뻗어 곯아떨어지거든
아들 셋이 쪼르르 효자로 달려가
영차 영차 떠메어 와야 하는 사람
집에 와 또 마셔야지 삭은 울바자 쓰러뜨리며
동네방네 대고 헛군데 대고
엊그제 벼락 떨어진 건넛마을
시뻘건 황토밭에 대고
이년아 이년아 이년아 외치다 잠드는 사람
그러나 술 깨이면 숫제 맹물하고 형제 아닌 적 없이
처마 끝 썩은 낙수물 떨어지는데
오래 야단받이로 팔짱끼고 서 있는 사람 고한길
그러다가도 크게 깨달았는지
아가 일본은 우리나라가 아니란다
옛날 충무공이 일본놈들 혼내줬단다 기 죽지 말어라
집안 식구 서너 끼니 어질어질 굶주리면
부엌짝 군불 때어 굴뚝에 연기 낸다
남이 보기에 죽사발이라도 끓여먹는구나 속여야 하므로
맹물 끓이자면 솔가지 때니 연기 한번 죽어라고 자욱하다
삼 년 원수도 술 주면 좋고 그런 술로 하늘과 논 삼아
8월 땡볕에 기운찬 들 바라본다
거기에는 남의 논으로 가득하다 작년 도깨비불도 떠오른다
이 세상 와서 생긴 이름 있으나마나
죽어서도 이름 석 자 새길 돌 하나 없이
오로지 제사 때 지방에는 학생부군이면 된다
실컷 배웠으므로
실컷 배웠으므로
만인보 1, 창작과비평사, 1986
해연풍 고은
해연풍(海軟風)
옛노래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고 노래만 남아 있다.
저녁 풀밭이 말라서 비린 풀 냄새가 일어나고
처음부터 말떼는 조심스럽게 돌아온다.
여러 산들은 제가끔 노을을 받아 혹은 가깝고 혹은 멀다.
또한 마을처녀가 밭에서 숨지는 햇살을 가장 넓은 등에 받고
이 고장에서 자라 이 고장에서 시집갈 일밖에는 생각지 않는다.
아무리 어제의 뭉게구름이 그토록 아름다왔을지라도
그 구름은 오늘 바라볼 수 없으며 벌은 날아가다 죽는다.
이 땅에 묻힌 옛피가 하루하루를 그들에게 가르치며……
아직 밭 일꾼과 귀 작은 소떼와 처녀들이 돌아오지 않은 채
화북(禾北) 마을의 갈치배는 희미꾸레한 돛을 올리고
제 마음에 따라 다른 바다를, 그러나 한마음으로 떠난다.
옛노래는 누가 지었는지 모르고 노래만 남아 있으며,
바다는 좀더 북쪽 별 나타날 곳으로 기울었는지
성산포(城山浦) 우도(牛島)배와 마주친 배들은 나비처럼 떠나간다.
그러나 먼 상하이는 밝을 것이고 서쪽 바다의 지평선엔
가까스로 돌아오는 애월(涯月)배들이 날카롭게 솟아 있고,
지는 해를 등지며 때로 바다는 오늘같이 인자하구나.
저 저녁 바다로 떠나지 않고 밭에서 돌아온 자여, 맞이하라.
비로소 해연풍(海軟風)은 노는 애들과 그대 적막한 가슴 앞을 적시고
이 고장의 질긴 협죽도(夾竹桃)꽃들을 마지막에 적시리라.
어느 돌담 앞에나 옛 노래인양 감태 잎새와 소라 껍데기가 있어도
가장 풍요한 빈 손으로 이 땅을 떠나지 않게 하고
저 깊은 밤 바다 위에서는 이미 별이 빛나기 시작하며
어여쁜 갈치 아씨가 잡혀 하느님처럼 실려 오리라.
밤은 알리라. 더구나 저 바다의 밤은 알고 있으리라.
어제는 사시나무였고 오늘은 마른 살 가죽에서 저물고
비로소 해연풍(海軟風)은 아득한 밤배 불빛을 씻어 오리라.
해변의 운문집, 신구문화사, 1964
햇볕 고은
햇볕
어쩔 줄 모르겠구나
침을 삼키고
불행을 삼키자
9사상 반 평짜리 북창 감방에
고귀한 손님이 오신다
과장 순시가 아니라
저녁 무렵 한동안의 햇볕
접고 접은 딱지만하게 햇볕이 오신다
환장하겠다 첫사랑
거기에 손바닥 놓아본다
수줍은 발벗어 발가락을 쪼인다
그러다가 엎드려
비종교적으로 마른 얼굴 대고 있으면
햇볕 조각은 덧없이 미끄러진다
쇠창살 넘어 손님은 덧없이 떠난 뒤
방안은 몇 곱으로 춥다 어둡다
육군교도소 특감은 암실이다
햇볕 없이 히히 웃었다
하루는 송장 넣은 관이었고
하루는 전혀 바다였다
용하도다 거기서 사람들 몇이 살아난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돛단배 하나 없는 바다이기도 하구나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햇빛사냥 고은
햇빛사냥
집집마다 신부(新婦)가 있다. 얼마나 기다렸느냐.
나는 제 길을 두고 멀리멀리 원주(圓周)를 돌아왔다.
늙은 말이 천둥소리를 미리 알 때
비로소 히뜩히뜩한 번개가 떨어진다.
아아 이 세상은 너무나 오래 되었다.
그리하여 햇빛이 산 너머 하늘에서 오고,
이제 내가 왔다. 이제 마을을 벗어나서
여의주(如意珠) 양파 밭을 넘어가면
그곳이다. 모든 햇빛이 모여 있는 곳은.
아무리 그대와 내가 달음질 쳐도
겨우 이르는 곳은 좀 더 아득하구나.
신부(新婦)여 눈을 감아라. 햇빛이다.
저 멀리까지 그대는 기다리고
내가 멀리멀리 돌아온 길이 사라졌다.
이곳에서 그대가 칠백이만(七百二萬)크샤나*의 순간들을
내 아우성의 일생(一生)에서 빼어 버린다.
어느 나라에도 없다. 이 팽팽한 줄의 햇빛은 없다.
그대는 늙지 않고 나를 버린다.
오랜 이야기들이 다 죽는다.
신부(新婦)여 그대에게 햇빛 뿐이다. 햇빛 뿐이다.
* 칠백이만(七百二萬)크샤나[刹那]: 이십사시간(二十四時間)
신. 언어 최후의 마을, 민음사, 1967
허허벌판 고은
허허벌판
가자.
허허벌판 잠자러 가자.
온 길 삼천리(三千里)
서러운 약수삼천리(弱水三千里)
어느 세상에 꽃 하나 보랴.
뉘엿뉘엿 해 지면
나온 새 까막까치도 돌아간다.
가자.
하늘 아래 억겁(億劫) 그믐이로다.
잠 못 이룬 별들이라면
내 가문 가슴에 재워주마.
피리젓대 무엇하랴
한 마디 가락 아직도 남았다면
부는 바람에 버리고 가자.
가자.
가자.
허허벌판 잠자러 가자.
참다운 이 이 땅의 벙어리로다.
백도라지야 백도라지야
너 어느 세상에 피어있느냐.
만(萬) 원혼(怨魂) 잠든 벌판
허허벌판 잠자러 가자.
입산, 민음사, 1977
호박꽃 고은
호박꽃
그동안 시인 33년 동안
나는 아름다움을 규정해왔다
그때마다 나는 서슴지 않고
이것은 아름다움이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반역이다라고 규정해왔다
몇 개의 미학에 열중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바로 그 미학 속에 있지 않았다
불을 끄지 않은 채
나는 잠들었다
아 내 지난날에 대한 공포여
나는 오늘부터
결코 아름다움을 규정하지 않을 것이다
규정하다니
규정하다니
아름다움을 어떻게 규정한단 말인가
긴 장마 때문에
호박넝쿨에 호박꽃이 피지 않았다
장마 뒤
나무나 늦게 호박꽃이 피어
그 안에 벌이 들어가 떨고 있고
그 밖에서 내가 떨고 있었다
아 삶으로 가득찬 호박꽃이여 아름다움이여
눈물을 위하여, 풀빛, 1990
화양동 서원 고은
화양동 서원
물님 좋구나 골짜기님 바위님 좋구나
화양동 서원
송시열 섬기는 서원이
서른여섯 개나 된다는데
그 가운데서 화양동 서원이
세도 으뜸이었다
심지어는
서원 하인배가 포졸 눈깔 다 빼어
한 놈만 한 쪽 눈알 남겨서
눈깔 빠진 장님 포졸 데리고 가게 했다
나는 새도 잡고
뛰는 짐승도 잡았다
순조 12년
평안도 90만
황해도 50만
강원도 17만
함경도 40만
경기도 7만
그 다음해
전라도 69만
충청도 18만
경상도 92만
이 지경으로 굶주린 백성 널리는데
이 백성의 도탄에 눈 딱 감고
묵패로 백성 잡아다가
족치고
볼기 쳐
온갖 것 다 빼앗아들이니
이 무슨 선비러냐 막된 짐승 아니냐
이런지라
대원군 세도 잡아
서원 7백 개 다 태워 버리고
마흔 일곱 개 남겼으니
대원군 가로되
충청도 사대부만치 나쁜 사대부 없고
평양 기생만치 나쁜 기생 없고
전주 아전만치 나쁜 아전 없다 했는데
이따위 서원 선비들
걸핏하면 헐고 뜯는 상소
복합상소
이거이 무슨 수작인고
이거이 무슨 지랄인고
이거이 무슨 언로이고 심로인고
만인보 2, 창작사, 1986
황사 며칠 고은
황사(黃砂) 며칠
겨우 우리 봄이 개나리꽃 진달래꽃
슬픈 진달래꽃을 피우려 하는데
무엇하러 청도(靑島) 장산(長山) 부황(浮黃)난 바다 건너
우리에게까지 무더기 무더기 몰려오는가.
우리 봄이 어떤 봄인지 아는가. 어떤 봄 어떤 아이들인지 아는가.
한 되 술 차라리 마시지 않고 가슴팍에 퍼부어 울었느니라.
가슴마다 가슴앓이 그믐달 넋을 묻어두고
우리 봄의 애비 에미 바다에 뜬 아지랭이로 울었느니라.
무엇하러 우리에게까지 몰려와
하룻밤 만리장성(萬里長城)으로도 모자랄 봄을 덮어버리는가.
참담하구나. 너희들의 경기(京畿)땅 북경(北京) 천진(天津)이나 황하(黃河)벌판이나 덮어서
석양머리 호적(胡笛)소래 틀어막으면 되었지 무엇하러 몰려오는가.
우리 봄이 어떤 봄인지 아는가. 우리 계집들이 몸을 팔아서
몇 만(萬)의 몸으로 얻어온 봄인 것을 아는가.
우리 여말(麗末) 한말(韓末) 애비들의 철천(徹天)의 한(恨) 땅에 묻고
우리 아이들이 그 땅에 쓰러져서 이룬 봄인 것을
대륙(大陸)아. 너희들은 모르리라. 우리 개나리꽃 진달래꽃을 모르리라.
아아 머리에 인 것은 황사(黃砂) 뿐! 창대비 쏘내기 맞아
이 흉흉한 황사(黃砂)바람 다 씻어버려도
우리 울음 우리 울음의 가슴팍 씻게 못하는 것을.
또 무엇하러 우리에게까지 몰려와서
우리 하늘 우리 땅
우리들이 돌아오는 어둑 어둑한 모퉁이들을 다 덮어버리는가.
입산, 민음사, 1977
황토 고은
황토(黃土)
우리는 유사 이래
하늘보다
황토 위에서 참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역사를
이와 반대로 써 왔습니다
민중이란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날마다 일하는 사람입니다
정든 쇠스랑 박고 바라보면
재 너머로 넘어가는
끝없는 황토길이 우리 절경입니다
저만치서
말없이 살고 있는
아버지 황토무덤이 우리 절경입니다
우리가 먹을 황토 있는 한
상여 떠나
우리가 송두리째 묻힐 황토 있는 한
한 삽으로 가득 뜬 황토 들어올려서
아메리카여 시베리아여
우리는 여기에 진리 있습니다
조국의 별, 창작과비평사, 1984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오샘께서 특별히 선별하신 시편들이니 퍼다가 꼭꼭 씹어먹을게요. 왕창 올려주셔서 감사하므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