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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 The Turn of the Screw, 1898>,
양병탁 역, 정음사, 1974.
(원문 텍스트는
http://www.inform.umd.edu/EdRes/ReadingRoom/Fiction/James/TurnofScrew
에서 읽어볼 수 있다)
이 소설을 두고 거칠게 촌평하자면 '귀신 이야기'가 될 것이다. 늦은 밤 도깨비들이 출몰하여 사람을 괴롭힌다는 그런 괴기담은 아니지만, 사람을 '타락'하게 만든다는 악령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줄거리 요약 따위는 원체 구미에 맞지 않지만, 소설의 복잡한 내용을 뜯어보려면 어느 정도 불가피할 듯 하다.
이야기는 어느 중년 남자가 읽어주는 가정교사의 수기로부터 출발한다. 20대 초의 가난한 여성인 화자는 세상살이의 첫 경험을 대부호의 가정교사로 시작하게 된다. 그녀를 고용한 남자는 무뚝뚝하고 근엄하였지만 꽤 매력적이라 여겨졌으며, 그녀의 학생들은 고용주의 조카 둘―10살 남짓한 남아(마일즈)와 두어 살 아래의 여아(플로라)였다. 그러나 그들은 한적한 시골―블라이에 보내져 양육되었으며, 그녀는 아이들을 맡되, 여하한 경우에도 절대 고용주를 귀찮게 만들지 말아달라는 엄명을 받는다. 망설이기도 한 그녀는 결국 이 '신뢰'에 부응하고자 블라이로 내려가게 되는데, 한편으로 아이들의 사랑스러움에 감동받고 자기 사명을 다지지만, 다른 한편으론 마일즈가 모종의 이유로 인해 퇴학당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다른데 있다. 평화롭고 한적하기만 한 시골집에 숨겨진 비밀들이 하나씩 밝혀지는데, 이전의 가정교사 제셀과 집안의 하인 퀸트의 망령이 출몰하여 아이들의 영혼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모 그로스 부인에 의하면, 제셀과 퀸트는 생전 악행을 일삼았으며 아이들을 타락시키려 들었다.(그러나 구체적이고 분명한 행위들은 묘사되지 않는다) 이에 화자는 고용주의 신뢰와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지키고자, 자신의 용기와 옳음을 입증하고자 악령들에 필사적으로 대항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아이들이 악령들과 협잡하여 오히려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점이며, 그로스 부인은 '상상력의 빈곤'으로 말미암아 사태를 전혀 능동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악령들을 직접 목격한 이는 오직 화자 하나 뿐이고, 아이들은 악령의 존재를 모르는 척 자신을 속인다는 심증만 깊어간다. 그외 집안 식구들은 그 누구도 악령의 존재에 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으나(혹은 모르고 있으나) 아이들과 화자 사이엔 미묘한 갈등의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마침내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호수가로 혼자 떠난 플로라를 찾기 위해 나선 화자는 제셀의 망령을 마주치게 되지만, 함께 있던 플로라와 그로스 부인은 악령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 플로라는 깊은 병을 얻어 그로스 부인과 함께 집을 떠나게 되고, 화자는 마일즈를 구원하고자 그와 대면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마일즈가 악령과 교우하였다는 '죄의 고백'을 받아내며 화자는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지만, 마일즈는 숨을 거둔 뒤다.
토도로프가 지적하듯이, 이 소설을 지배하는 주된 분위기는 "모호함"(ambiguity)이다.(<서사의 비밀>) 그러나 그 모호함은 공포의 주체도 대상도 아닌, '공포의 지각'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악령은 과연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곧 화자인 가정교사는 정상인가 아닌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여러 차례 그녀 스스로도 인정했듯, 그녀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앳된 처녀이고, 끊임없이 스스로의 정상성을 되묻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설 곳곳에 걸쳐 우리는 그녀가 고용주 남자에 대해 은밀한 연정을 품고 있으며, 아이들에 대한 애정 이면에는 타자성에 대한 깊은 부정과 혐오를 갖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즉, 그녀는 고용주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며, 아이들이 온전히 자기 통제에 들지 않는 한(그들이 타자인 한), 의심과 심문의 수레바퀴를 멈추지 않는다. 여기서 악령의 실존은 그녀의 도덕성과 사랑에 대한 가장 확실한 표징이 되며, 그녀의 정상 여부에 대한 척도가 될 터이다. 만일 악령이 실재하여 아이들을 타락시킨다면, 그녀는 선하며 정의로운 존재임이 확인되지만, 그 반대일 경우라면 ― 이 수기의 모든 내용은 오직 광기가 낳은 비극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모호함"이다. 왜 모호한가? 입수자에 의한 서론을 제외하곤 전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진 이 수기는 오로지 화자 자신의 심리만이 전적으로 투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술은 다만 자기 자신의 심리 현상에 대한 반영으로서 읽혀질 뿐 객관 세계와의 연접점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에겐 심리가 곧 현실이요, 심리 밖의 세계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사실. 토도로프의 지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심리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실체(reality)란 없다." 눈먼 현실. 제임스가 제시하는 기법의 妙는 소설 장르와 함께 발전하여 19세기 리얼리즘에 이르러 완성을 본, '객관적 현실을 묘사하는 시점'과도 한참 다른 것이다. 전통적인 리얼리즘 소설에서 1인칭 시점이 전작을 통해 주요하게 묘사될 경우, 그 시점의 배면에는 전지적 시점이 부수적으로 뒤따르게 된다.("narrator-character") 이 1인칭 시점을 수반하며 보조하는 전지적 시점은 1인칭 시점이 미쳐 이르지 못하는 삶의 이면을 구석구석 독자에게 비추어 주며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구성해 주는 것이다. 만일 그 전지적 시선이 결여된다면 우리는 무슨 수로 소설의 총체성을 말할 것인가. 그러나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총체성은 말 그대로의 허구(fiction)에 불과하다. 1인칭 시점과 전지적 시점의 교묘한 혼합과 배열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총체성의 환상에 동조하게 만든다. 그것이 리얼리즘의 환상이다. 그러나 제임스의 심리주의는 그런 전지적 시점을 철저히 배격한다. <나사의 회전>에서 화자는 오로지 자신의 시점에만 갇혀 있을 뿐, 핍진성의 환상을 창조해내는 전지적 시점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독자는 그녀의 시선에 동반하여 세계를 바라볼 뿐, 그 시선 바깥의 세계-객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요컨대 모호함의 근원은 바로 시선의 일면성과 일방성에 있다는 것. 진술의 그러한 폐쇄성은 독자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화자의 심리 세계라는 제한된 울타리 안에서 세계를 조망할 것을 요구한다.
모호함을 유발하는 원인은 비단 형식으로부터만 연유하지 않는다. 블라이는 고딕 소설에 나올 법한 괴기스러움과는 정반대로 평화롭고 따뜻한 古家이지만, 악령이 출몰하는 부정적 공간으로서 화자의 자기 긍정에 대립되고 있다. 온전히 화자의 시선으로 모든 것이 묘사되는 블라이의 상황은 이 대립성에 기초해 있다. 아이들의 내면은 철저히 봉쇄되어 화자의 추측과 직감에 의해서만 조명되며(플로라의 경우는 대화조차 거의 없다), 그로스 부인마저도 화자의 주관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다.("나의 논리는 언제나 아주머니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것이었다") 가정교사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있어서나 도덕적 성품에 있어서나 모든 것을 확신하고 있으며("요컨대 나 자신은 매우 훌륭한 젊은 여자라고 자부하였고, 언젠가는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이라는 신념에 자위했다"), 그렇기에 그녀가 진술하는 현실은 그녀에게 실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균열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이지적인 추론은 객관 현실로부터 취한 자료들로부터 종합되는 것이 아니라, 심증―내면의 심리적 판단으로부터 연유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독자는 그녀의 의식 밖의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검증도 행할 수 없다. 그녀에 따르면 그녀는 분명 악령을 목격하였다. 그녀는 악령이 나타난 이유를 단번에 알아챈다. 어떻게? 그녀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에 의하여. 즉, 심리의 연역에 의하여. 그러나 그 악령의 정체를 확인하는 과정은 도리어 귀납적이다. 그러나 이 귀납의 과정은 연역된 심리의 완전성에 기여하기 위하여 강제로 왜곡되고, 그 왜곡이 도리어 사실로 되고 만다. 바로 이 결절점에서 독자는 그녀의 판단과 세계 사이의 일치를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모호함이 발생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로 신사는 아니었어요."(never―no, never! ― a gentleman.)
내가 이야기를 계속함에 따라 그로스 아주머니의 얼굴은 파랗게 창백해져 갔다. 둥그런 두 눈은 껌벅거리고, 부드러운 입은 벌린 채였다.
"신사라고?" 아주머니는 놀라,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그자가 신사라고?"(a gentleman HE?)
<...>
그날 밤 늦게, 온 집안이 죽은 듯이 고요히 잠자고 있을 때 우리들은 다시 내 방에 모여서 갖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이다. 그때야 아주머니는 내가 봤던 것은 모두가 다 의심할 여지없는 바로 그대로였다고 분명히 인정했던 것이다. 이처럼 위급한 경우 아주머니를 완전히 다져 놓을 양으로 나는 만일 그것이 꾸며낸 이야기라면 어떻게 그 사람들의 자세한 점에서 특징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그려낼 수 있을 것이며, 또 내가 그려 보여준 초상에서 아주머니는 냉큼 알아채고 그 사람들의 이름까지 대지 않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어째서 가정교사에게는 자신의 논리가 모든 것이라 여겨지는 것일까. 왜 그녀는 모든 의혹을 의혹으로 삼지 않고 분명하게 분석할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일까. 그로스 부인의 물음에 대한 그녀의 답변: "전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에요."(Because I'm clear) 그녀의 내면에는 모호함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불투명함―해명되지 않음―"모호함". 그것은 그녀에게 지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치명적인 파탄을 초래할 위험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호함이란 그녀에게 不在이지 存在가 될 수 없다. 그녀에게 부재란 단지 앎의 유예이지 존재가 아닌 것. 그렇지만 그녀의 앎이 커질수록 함께 증폭되는 것은 또한 모호함이 아닌가. 그래서 그녀의 당찬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공포는 가중되는 것이다: "캐면 캘수록 더 많은 것을 알게되고,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더 무서워지는군요."(The more I go overit, the more I see in it, and the more I see in it, the more I fear) 앙드레 지드가 이 소설을 두고 "스스로에 대해 눈이 먼 그리고 끔찍한 무의식을 지닌" 화자가 순진무구한 아이들에 대해 자신의 열정과 공포가 복합된 환상을 투영하여 벌어지는 "프로이드적" 이야기라고 논평한 것은 그런 근거에서이다.(모리스 블랑쇼, <나사의 회전>) 일종의 심리적 강박과 노이로제.
그러나 이 소설에는 단순한 심리극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것은 예의 "모호함"이다. 이 모호함은 소설의 아우라를 형성하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오히려 주인공으로서 떠오른다. 지드가 언급한 "프로이드적 이야기"에서는 이드, 자아, 초자아의 위계가 설명되고 공포는 분석된다.(노이로제) 그렇지만, 그렇듯 분석되어버린 공포는 이미 공포가 아니다. 곧, 모호함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가. 공포는 명료하게(clear) 밝혀졌는가? 이제 우리는 파국의 다음 국면에서 또다른 결절점에 부딪히고 만다.
나를 들여다보는 아주머니의 눈초리를 보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벌떡 일어섰다.
"어제부터, 아주머니도 보셨다는 말씀이죠?"
(You mean that, since yesterday, you HAVE seen―?)
아주머니는 위엄있게 고개를 가로 흔들어 보였다.
"난 들었수!"(I've HEARD―!)
"들으셨다고요?"
"아가씨한테 들었수 ― 끔찍스런 얘길요."
<...>
나는 나대로 "아이, 고마워!"하고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일어서며, 눈물을 훔치면서 신음하는 것이었다. "고맙다니요?"
"제가 옳다는 것이 되거든요."(It so justifies me!)
"정말 그렇구료, 선생님."
그로스 부인은 도대체 무엇을 들었다는 말일까. 그것은 가정교사가 고대하던 악령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정교사는 이 결투에서 승자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과거 제셀 부인의 악행에 대한 이야기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교사는 그로스 부인의 말을 전혀 엉뚱하게 받아들이고 오해의 심연으로 빠져들어가는 셈이겠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 어디에서도 그녀가 대체 무엇을 들었다는 말인지 분명해지진 않는다. 이 대화들로부터 남겨지는 것은 다만 모호함뿐이다. 그리고 그 모호함은 악령의 존재를 끝끝내 의문부호에 결박해 놓는다. 바로 그 의문부호야말로 악령의 기표가 될 것이다. 다시금 남겨지는 모호함. 어쩌면 그 악령의 진정한 이름은 그 세 글자, "모"/"호"/"함"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작 그녀가 뒤쫓고 있는 악령이란 기실 不在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부재를 위하여 현존하는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있다. 그녀는 끊임없이 그 부재를 찾아 나서고 실재화시키려 든다. 그러나 그녀가 가까이 가면 갈수록, 움켜쥐려 들면 들수록 실재화되는 것은 부재 자체가 아니라 그 부재의 '흔적'이다. 부재는 결코 포착되지 않고 채워지지도 않는다. 존재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가 벌이는 악령과의 싸움은 기실 선과 악의 전통적인 대결이 아니라, 부재와 존재 사이의 형이상학적 놀이에 가깝다. 그녀에게 공포의 진정한 진원지는 도덕적 패배가 아니라 부재의 확인에 있을 터이다. 부재의 확인은 끝없이 연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부재가 확인되는 순간, 존재의 진공이 시커멓게 자신을 보여주는 그 순간―만약 그 순간이 소설 속에 도래하였을 경우 화자 역시 파열하였을 것이고, 그녀의 수기는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이 수기가 전해져 읽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여전히 그 '모호함'의 한가운데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플로라의 중병과 마일즈의 죽음은 악령의 존재를 확인시켜준게 아니라 그 부재만을 보여주었을 따름이다. 그들에게 실제로 악령이 존재하였는지는 여전히 모호함 가운데 남겨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