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일반적으로 건축관련학과가 공과대학에 속하여 있고 건축하면 으례히 공사현장을 상상함으로 건축은 터프하고 힘든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 여성들의 진출이 많은 것처럼 최근 건축관련분야에도 여성들의 활동이 많아지고 있고 관련학과에도 여학생들의 비중이 날로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 실제로 건축은 섬세하고 미적감각이 요구됨으로 오히려 여성들의 꼼꼼함이나 자상한 성격은 오히려 남성보다 더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특히, 설계나 인테리어분야에서는 더욱 여성이 유리한 점이 많고 세계적으로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여성건축가들이 훌륭히 활동하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인데 이러한 경향은 날로 더 증가할 것입니다
또 보수적인 면이나 장래성 면에서도 다른 직종에 비하여 여성으로서 가지는 대우나 위치가 높은 것이 현실인데 다만 지나치게 소극적이거나 자신감이 결여된 여성의 경우에 현장근무 등은 어려운 점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전문가적인 기질이나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경우 과감히 도전해 볼만하다고 추천합니다
대림산업 건축기사 이은정(28) 대리는 굵은 힘줄의 남성들만 있을 듯한 안양석수아파트 현장을 4년째 누비고 있다.. 1900가구가 넘는 대단지의 시공과 품질을 관리하는게 이 대리의 업무.. 도면대로 공사가 진행되는지,레미콘 시멘트 철근 같은 재료들은 제대로 사용되는지를 감독한다. 하도 꼼꼼해 관련 업체와 근로자들에게 얻은 별명이 '백두산 호랑이'.
건축공학과 졸업생의 두 진로인 설계와 시공 중 여성들은 '책상' 쪽을 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홍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이 대리에게 "왜 이 길로 왔느냐"고 묻자 그녀는 "설계가 '종이에 그리는 이상(理想)에 그친다면, 시공에는 '이상의 현실화'를 목격하는 매력이 있다."고 답했다.. 이 대리는 "건축현장에는 의외로 여성의 섬세함과 치밀함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며 "입주자들로부터 '이은정이를 거친 아파트는 정말 괜찮다'는 평을 듣는게 목표"라고 말했다..
일을 마친후 '호랑이 회투'도 함께 벗는 그녀는 피아노와 더블베이스를 능숙하게 다루고, 사내 동아리 '향토문화 연구회' 일원으로 주말마다 사진기를 어깨에 메고 사라진 우리 문화를 찾아 훌쩍 떠난다..
<문숙경 씨>
(주)예문건축사 사무소 소장
1970∼1974 영남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1986∼1988 한양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 공학 석사 학위 취득
1977∼1984 (주) 이 건축 근무
1984∼1992 정 건축 종합건축사 사무소 소장
1992∼현재 종합건축사 사무소 예문 대표
설계 실적
국립강원 정신병원 신축공사, 목포 교도소 신축공사, 삼진 주상복합빌딩 신축공사, 도곡리 쌍용아파트 신축공사, 오금동 최정형외과 신축공사 외 다수
활동상황
대한건축사 협회 여성건축사 위원장 / 서울특별시 기술심의 위원
서울지하철 기술심의 위원 / 국방부 특별 기술심의 위원
강원도 지방건설 기술심의 위원 / 조달청 설계자문 위원
PROLOGUE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여성 건축가들은 사회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또한 가정에서는 어떤 존재들인가?
슈퍼우먼을 요구하고, 또 여성들 스스로가 슈퍼우먼을 자처하면서,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콤플렉스를 안고 산다.
남성들의 기득권이 팽배한 건축계에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만으로도 전쟁이다. 싸워서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전쟁. 이겼다고 해서 알아주지도 않는 전쟁.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상적인 건축을 꿈꾸어야 하고, 건축의 테두리에서 살며, 부대껴야한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건축을 꿈꾸자”라는 어느 책 제목처럼 우리, 여자로 태어났으니 이제 건축을 꿈꾸어 보는 것이 어떨까?
건축을 하게 된 동기
수많은 건축가들이 건축에 발을 들여놓고 건축을 업으로 살아오기까지 그 동기에 있어 ‘어떤 훌륭한 건축물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의 한 분야임과 동시에 인간의 생활과 직결되는 공간을 창조한다는 매력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내 경우엔 건축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그런 드라마틱하고 운명적인 이끌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사회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어서 수많은 분야에 세분화된 직업을 요구하지만 60년대 말 그 시절에는 선택할 수 있는 전공이란 게 그리 많지 않았다.
건축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어렴풋이 ‘집을 짓는 것’라는 정도가 내 건축에 대한 이해의 전부였지만 막연히 남들과는 다른 전문직을 갖고 싶었고, 건축이 그 당시 상황으로서는 무한한 잠재력을 갖는 일 중에 하나였기에 건축과를 택한 것이 건축가로서의 첫 출발이었다.
영향을 받은 건축가
Emilio Ambasz의 공간에 자연을 끌여 들이는 발상과 시도가 좋다.
기하학적인 도형들로 이루어진 모뉴멘트와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자연의 요소들은 마치 꿈속에서나 볼 듯한 천상의 공간으로 승화된다.
복잡하고 현란한 것보다는 단순하고 절제된 형태가 자연과 어우러지면서 나타내는 아름다움이 더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 것 같다.
건축에 대한 나의 생각
그렇게 뚜렷한 명분도 목적의식도 없이 시작했던 건축을 업으로 살아온 지 어느덧 23년째다. 수많은 대지 위에 나의 에너지를 녹여 내여 공간을 불어넣었고, 그러는 동안 수많을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다. 제각기 다른 모습과 표정으로 다가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설레임과 흥분으로 애정을 쏟아보지만 현실에 맞닥뜨리고 보면 늘 아쉬움과 상처를 남기게 된다.
강한 규제와 지나친 제한은 건축가의 창의성을 위축시켜 비개성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 건축주의 건축에 대한 의식결여 또한 때로 건축을 가지 말아야 할 길로 이끌기도 한다.
건축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작업이면서 또한 객관적이고 대중적인 작업이 되어야 한다.
지역성을 무시한 건물은 기괴한 조형물일 뿐이며 그를 살아갈 인간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건물은 그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다양하고 복잡한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작가의 예술 혼을 불어넣을 수 있을 때 건축은 그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다. 작품이냐 상품이냐를 가로막는 부자유스러운 담을 현명하게 넘나들며 건축을 이해하고 건축가를 신뢰하는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다.
오랜동안 건축가의 길을 살아가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져들거나 자아도취나 오만함으로 자가당착에 젖어 도태되기 쉽다. 대부분의 건축가들이 그렇듯 나 또한 나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완성된 건물을 보면서 지나쳐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놓쳐버린 것들에 대한 후회를 하곤 하는데 나를 돌아보고 깨달음을 얻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좋은 건축가로 한 걸음쯤 다가가고 있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 열정을 갖고 건축에 임해야 한다. 그래야 삶의 터전, 문화의 바탕으로서 건축이 이 사회에서 바람직한 위치를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건축가로 살아가기
건축과를 다니던 여학생이 희귀했던 70년대 초반에는 여성으로서 건축가의 길을 가고자 해도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여건이 매우 열악했다. 결혼과 육아, 가사 때문에 건축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취업의 길도 설계사무실과 관공서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다.
나의 경우에도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했고, 결혼 후 몇 년을 쉬다가 문득 이러다간 건축을 포기해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먼지 수북한 책을 꺼내 공부를 시작했고, 그것을 계기로 다시 건축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때마침 그 당시엔 중동지역의 호황으로 건축계는 인력난이 심하였을 때라 다행스럽게도 취업의 문은 넓었다.
때마침 그 당시엔 중동지역의 호황으로 건축계는 인력난이 심하였을 때라 다행스럽게도 취업의 문은 넓었다. 직원들의 잦은 직장 옮겨다니기와 그 여파가 임금상승을 낳았지만 그러한 분위기에서도 묵묵히 성실하게 제 몫을 하는 여성건축가에게 당연히 높은 점수가 주어졌고 그것은 또한 후배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마련하는 데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현장에서, 직장에서 받는 부당한 대접이 있었다면 그것과 당당히 맞서고 스스로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벗기 위해 계속되는 야근과 철야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각 학교에 여학생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고, 정책적으로도 여성 참여 비율을 확대시킴으로 각종 심의나 심사에서 여성의 위상이 높아져 이 사회에 만연한 편견과 부당한 대우에서 조금씩 해방되고 있다.
여성이 새 천년 인류의 키워드가 되고 있는 이러한 때에 설계사무실은 물론 대학, 건설회사, 조경, 인테리어, 구조사무실 등등 여러 분야에 걸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당당한 여성건축가들. 우리 모두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이재림 씨>
1960 서울생
1983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
1986~1991 현대산업개발 계획설계부 근무
1983~1986 현대종합목재 기술
개발실, 해외설계실 근무
1991~1993 ㈜Emerald Resort Development 건축본부팀장 (도시계획시설 및 단지설계)
1993 지담 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
수상 경력
1989 분당신도시 시범단지 현상설계안 당선(최우수상)
1992 가평시 호명산 종합개발 기본 계획안(최종안으로 채택)
1996 요진산업 고잔지구 공동주택 1차 지명 현상당선 / 경기도 도시경관위원회 경관기준 안으로 채택
1999 요진산업 고잔지구 공동주택 2차 지명현상 당선
1999 현대산업개발 분당 공동주택 단지계획안 지명현상 당선
어느 직업이나 만찬가지이지만 아직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하기엔 너무도 역부족일뿐더러 벅차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여성으로서 직업을 가지려면 누군가에겐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하고, 누군가(시부모님, 친정어머니 등등)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이곳까지 올 수 없었다고 토로를 하곤 한다.
또는 남편의 배려가 없었다면... 이렇듯 정말 어려운 여건 속에서 우리들은 생활하고 있다. 여성건축인들을 만나 보면 정말 힘들고 어렵게 이곳까지 왔다 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중견 건축인이나 경영을 도맡아 하는 건축인이라면 더 할 것이다. 누구나, 어떤 오너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믿고 따르는 직원들을 위해서 책임 있는 경영, 책임 있는 건축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IMF이후 우리의 건축은 너무나 실추되었다.
사무소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 실직을 하고, 학창시절 가졌던 건축가로서의 첫발을 절망이나 아픔으로 대신 해야만 했다.
주먹구구식의 경영이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상황들을 그려냈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이를 계기로 자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경영인으로서 건축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건축은 힘들고 어렵다. 경영은 건축인이 하기에 더욱 힘들고 어렵다. 건축과 경영은 여성건축인에게 더더욱 힘들고 어렵다.
이에 건축에 이미 몸담고 있는 건축인들이나 건축을 준비하는 예비건축인들, 특히 여성건축인들, 막연하게 매스컴에서 보여지는 화려한 면만 보고 건축을 생각하진 말자 라는 것이다.
어엿하고 한목 하는 건축인이 되려면 이제 책임을 가지고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건축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직업 선택의 동기 및 직업관
어린 시절 누구나 그렇듯 나도 미래를 동경하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꿈 많은 소녀였다. 예쁜 옷과 장신구 그리고 아름다운 집.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독서에 한참 열을 올리던 중학교 시절 읽은 책 속의 건축가란 늘 멋진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고 그 후로도 건축가란 어쩐지 근사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상념으로 내 마음에 자리 메김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는 좀 더 현실적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의 권유도 있었고 나 자신도 아무 저항감 없이 의과 대학을 선택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공대에 가게 되었고 건축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학교 때 가졌던 그 상념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속에서 점점 자라서 일련의 상황들을 수용하고 현재의 내 모습으로 발전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건축에 대한 나의 생각
건축은 건축 자체로는 정말 아름답고 순수하며 인간의 삶을 기본 전제로 하는 매력적인 학문임에 틀림없다. 미를 추구하는 형식과 관념, 기능이라고 명명되기도 하는 생활양식을 해석하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건축이 지니고 있는 매력은 로마시대나 High-Technology로 상징되는 현재에 있어서나 변함이 없을 것이라 믿고 있다.
자신의 열정을 바치고 미래를 투자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쉬운 것이란 없으며 막연한 환상은 금물이라는 것을 알아야겠다.
더구나 건축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건축가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하게 되어 있다. 주변 사람들과의 협력은 절대적인 것이며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산업의 구성 요소로서 경제적 논리의 틀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건축에 있어서 경제적 논리는 인간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사회적 욕구와 맞물려 건축의 생성과 그 흐름을 주도하는 양대 요인 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다분히 변증법적인 논리에 기초되어 있다. 자신의 원칙을 지키고 싶지만 타인의 생각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되며, 건축이 추구하는 본질에 최대한 접근해야 하지만 건축물의 존재 이유에 앞서 소요 비용 등 경제적 타당성이 우선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고, 그 흐름의 한 가운데에 서 있어야 한다. Form을 만들고 그것에 디자인을 부여하는 작업은 개인적인 능력의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어느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 이미 보편적 작업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
아주 특출한 천재의 작업이 아니라면 일정 수준 이상의 Design Quality가 가능하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선택의 폭이 다양한 자재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신공법, 다양함과 개성을 추구하는 사회풍토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건축가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자기자신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건축의 본질을 현실과 접목시켜 좀 더 풍성한 삶의 방향을 제시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향을 받은 건축가와 작품
학교에 다닐 때나 사회 생활을 시작 할 무렵에는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을 별다른 감흥 없이 의무감에서 공부했고 그 디자인을 흉내내고자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작품이 왜 유명해졌는지에 대한 원인이 좀 더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형태에 따른 해석의 차이로 인해 겉모양이 서로 다르기는 해도 그 속에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건축에의 열정이 담겨져 있다. 나는 I.M.Pei의 작품을 특히 좋아한다. 서양 일변도의 건축양식에 동양적 접근을 늘 시도하는 그의 발상이 좋고, 그것을 조화롭게 완성해내는 그의 천재성이 좋다.
또 건축을 도시로서 이해하고 건축인들이 가져야하는 역사와 문화의식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시한 김석철 선생의 천년의 도시 천년의 건축도 여러 차례 읽었다.
여성 건축가로 살아가기
여성으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것은 특별한 자랑거리가 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의기소침해 할 필요는 없으며 자신감을 상실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물론 결혼과 출산 육아의 과정이 남성들보다 불편한 것은 사실이고 사회적인 불이익이 존재하는 것도 또한 분명하지만 수퍼우먼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아니라면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하고 남들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켜 도움을 청한다면 충분히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고 할 일을 부여받은 여성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명확한 인식을 갖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차원 높은 삶의 형태를 추구하는 당당한 생활인이 되어야만 하겠다.
우리가 이미 알고있는 사실이지만 사회생활이란 핑크빛의 낭만만은 아니다. 여학생들은 특히 졸업과 취업이라는 문제에 직면하면 한 번쯤은 커다란 상실감과 분노로 마음고생을 경험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 운이 좋아서인지 주변 분들을 잘 만나서인지 그런 상황들을 대체로 비껴 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여학생들은 자신의 진로 선택과정이나 사회 생활 초기에 이런 황당한 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이럴 때일수록 억울하다는 생각, 타인에게 들 수 있는 공격적인 생각을 떨치고 긍정적인 사고로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상황을 공정하게 판단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신을 가지고 미래를 준비해도 부족한 것이 시간이며 또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 찬 곳에는 희망과 행운이 모여들지 않는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어떤 사람의 최대의 장점은 그 사람의 최대의 약점이 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의 약점은 그것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최대 장점도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언급하는 이유는 여성이라는 것이 사람에 따라 핸디캡이 될 수도, 강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점은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장점을 찾으려는 노력과 그것을 현실로 접목시키려는 노력만이 자신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말자.
마지막으로 여성에게 적합한 건축의 업무 범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겠다. 주택설계만이, 유치원만이, 상업건물의 Facade Decoration만이 여성에 어울리는 설계범위가 결코 아니다. 주택단지, 학교시설, 백화점 설계를 비롯해 휴머니즘을 부여한 산업시설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디자인하고 종합 할 수 있는 설계의 분야는 폭 넓게 존재한다.
이는 작은 규모의 것을 소홀히 해도 좋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상적인 경계를 설정함을 거절하는 것이며 건축의 업무 영역을 연장시켜 한 차원 발전시키고자 하는 취지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뿐만 아니라 설계의 영역만이 여성에 적합한 것도 물론 아니다. 구조설계 공사 관련CM, 요즘 각광받고 있는 Curtainwall 설계에 이르기까지, 해야만 하고 다루어져야하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후배 건축인에게
건축이란 그 자체가 인간의 삶을 전제로 하고있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설계를 하고 시공을 하지만 자신이 설계하고 시공한 곳에서 생활 할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하다.
이는 건축이란 우리 자신이 아는 바대로 설계하고 지은 집에서 남의 생활을 규정 짓도록 하는 특수성을 갖는다는 뜻이 되며 이에 따른 공인으로의 역할과 책임이 주어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진지한 건축인의 자세는 남을 향해 항상 열려 있는 겸손된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알고, 주변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현실을 읽어 내려는 훈련을 통하여 자신의 원칙을 만들어 가는 그러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건축이란 단순히 설계라는 협의의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겠다. 기술이 조합되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건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건축 디자인은 물론 건축 기술의 축적과 발전에도 깊은 관심과 배려가 주어져야 한다.
건축에 있어서 디자이너라는 긍지와 자부심은 필요한 것이지만 설계를 하는 것만이, 그것도 자신만의 해법을 고집하며 가난해야만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이고 나머지는 조금은 열등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아직 존재한다면 이는 정말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지혜로운 생활 방식을 터득하도록 노력하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많은 우리의 후배들이 건축이 좋고 그 속에서 삶의 행복을 추구 해 나갈 수 있는 진정한 건축인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해 본다.
<우 성숙씨>
왜 건축을 하게 되었을까?
작년에 회사에서 10년 근속상을 받았다.
1984년 서울건축에서 건축실무를 시작하여 현재 동우건축에서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나의 직업(일)이 좋다. 건축이 신나고 재미있다.
사람만나는 일이 흥미롭고 (때론 만나기 싫은 사람도 있지만) 현상 설계하면서 느끼는 긴장감과 고통(?)도 나에겐 활력을 주고 설계한 건물이 지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남들에게 피력할 만큼 나의 건축관이 정립된 단계는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건축이라는 것, 즉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 신난다.
내가 건축을 하게 된 동기는 조금은 특이한 상황일 것 같다. 확실하진 않지만 막연하게 멋있는 직업일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살고 싶은 집(처음으로 생각한 건축)을 설계한다는 것이 대단한 작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교시절 대학의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에 우연히 신문을 통해 건축과를 소개한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지금 기억으로 형이상학적인 내용이었던 것 같다.
시기적으로 건설경기가 좋았던 사회적 분위기가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건축가란 직업이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마술사’ 같이 생각되었고, 나도 멋진 마술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나의 건축에 대한 꿈은 그리 쉽사리 이루어지질 못했다.
대학입학시 건축과가 아닌 다른 전공을 택하게 되었고, 그 학문도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했다.
원하지 않았던 전공이었지만 어느 정도 흥미를 느끼던 3학년 무렵에는 부전공제도가 생겼고 건축에 대한 꿈이 되살아났다. 2학년 수업에서 처음 설계과제인 주택을 설계하면서 항상 꿈꿔왔던 나의 집을 만들었는데 밤을 꼬박 세워가며 모형만들고, 도면그리고, 그렇게 ‘나의 건축’은 시작되었다.
대학졸업 후에는 건축공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계속적인 학업에 뜻이 있었던 게 아니라 사실은 오랜 실무에 접했으면서도 상당한 기간 열등감으로 작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건축사 취득 후 다소 해소된 듯 하다.
지금도 건축이 매력 있는 직업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건축이 돈벌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직업이 아니라 나에게 천직이라는 의식을 갖고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건축에 대한 나의 생각
건축에 입문한지 15년이 되었지만 자신감보다는 더욱더 창작능력에 대한 한계를 느낀다.
작업을 하다보면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실체로 나타나야 하는 작업은 고통과 희열을 동시에 맛볼 수 있으므로 남들보다 일하는 즐거움을 더욱 오래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건축은 다른 예술과는 달리 자신의 만족을 위함이 아니며, 취향에 따른 선택사양일 수 없다.
나름대로 설계를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손끝에서 나오는 건축이 아닌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담을 수 있는 건축을 하려고 한다. 건축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인간과 환경의 조화라고 생각하며 또한 인간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건축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후배건축가들에게 한마디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건축은 특히 일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이 필요하다.
자신의 능력을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만큼 실력을 쌓아야 할 것이고 건축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또한 아직은 우리사회에서 건축가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지만 건축가라는 전문가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풍토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여성건축가로 살아가기
실무를 접하면서 여성이라서 불이익(?)을 받은 경험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처음 일을 시작했던 회사는 그 당시 최대규모의 설계사무소였던 서울건축에 입사했다. 그 때는 특별히 국내 건축가 중 누구를 선호하거나 동경대상이 되던 사무실이 없었던 터라 아뜨리에형 소규모 사무실보다는 큰 규모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 많은 일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서울건축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입사한 사무실은 설계사무소라기 보다는 대형건설회사에 소속된 조직체라서 엄격한 분위기 마저 흐르는 회사였다. 3년을 조금 넘게 일하는 동안, 재료와 재료의 접합문제, 재료의 비례감, 건축과 구조의 연관관계 등 건축의 실무적인 감각을 키웠다. 대규모 사무실답게 많은 프로젝트와 많은 참고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고, 아직은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던 시기라 홀더와 플라스틱 펜을 사용하여 그린 도면작업, 상당기간 동안 참여했던 해외프로젝트는 디테일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사무실에서의 실무경험은 나의 건축작업에 틀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대기업의 조직에 흡사한 그 사무실은 임금과 승진과정에서 성차별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기 전에 그곳을 떠났다.
소장님을 포함하여 모두 9명이었던 지금의 사무실은 소장님과 실장님을 비롯해 동문이 여럿인 탓도 있었지만 낯설지 않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건축의 유행보다는 정직한 보수성을 지향하셨고, 설혹 현재의 세계적인 추세에 부합되지 못하더라도 건축적인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최근의 시류를 타는 초현대적 설계작업 이전에 그 뿌리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야 하며, 그 과정을 계속 복습하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현 근무지에서는 완전한 능력위주의 조직분위기라서 내가 여성이라는 게 전혀 걸림돌이 되질 않았다. 나의 경우에는(내 생각에는) 오히려 장점이 되었고, 또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선 일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수단이 아니어서 자유스러웠고 (돈에 대해) 남자가 숫자적으로 우세한 건축계에서 희소가치(?)덕분에 기회가 빨리 주어질 수 있고 건축주에게는 여성건축가가 아직도 생소하고 특별한 직업인지라 강한 이미지를 줄 수 있었다.
물론 육아와 가사에 대한 부담은 어쩔 수 없는 숙명적 과제이지만 스스로 수퍼우먼을 자처하지 않았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고 한다.
절대로 잘하려고 욕심 내지 않는다.
여성들 스스로가 수퍼우먼을 자처하면서 스스로의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하지만 나에겐 가족(특히 시어머님)의 내조(?)가 있는 행운이 있었다. 만약 가족의 도움이 없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악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모두는 (아들까지도) 나의 직업을, 내가 여성건축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약력
1959년 서울 출생으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 졸업하여 서울건축(김 종성)에서 3여 년을 근무하고 2년의 공백기간을 거처 지금의 동우건축에서 현재 10년을 넘게 근무하고 있다. 대표 참여 작품으로는 연세대학교 노천극장 (1997)/ 서울대학교 중부연습림 자연자원 연구소(1996) / 담배인삼공사 청주사옥 계획안 (1997)/ 연세대 원주캠퍼스 학생복지타운(1999 )등 다수가 있다.
<박 헬렌 주현>
'다른 전공을 배운 후에 건축을 다시 공부하려 했을 때 두려움이 앞섰다.
먼저2년을 더 배운 학생들에 비해 과연 따라갈 수 있을까? 비 전공자로서 건축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라고.
박 헬렌 주현이라는 한 여성 건축인을 처음 접했을 때도 그때의 그 느낌이라고나 할까?
'학부 때 전공을 하지 않아도 가능한 것이구나.'
화려한 이력이었다. 하버드에서 물리학으로 학사를 취득하고 Havard Graduate School of Design에서 건축으로 석사 2개(조경학, 건축학)를 동시에 취득했다.
그러나 그 어떤 화려한 이력도 그녀에게서 묻어나는 소박함 앞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느끼는 것들은 그랬다. 학교 다닐 때부터 '시집가면 시집살이하면서 살아야지'라고 생각했을 만큼 지극히 소박한 여성이었다.
헬렌 박에게서 어릴 적 살았던 기와집에 대한 기억들과 도시 속에 묻혀 있는 작은 상과 강은 항상 가슴속에서 자리잡고 있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또한 커 가면서 미국에서 보았던 잘 지어진 건축물과 도시의 환경, 녹지 공간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느껴지는 그 시절에 대한 아득한 기억들이 건축 활동에서 하나의 건축 언어로 표현될 수만 있다면...
그 언어들이 정형화된 틀이 아닌 보이진 않지만 어떤 분명한 무형의 틀로 그녀만의 건축언어를 형성하길 바라며...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의 고민, 그리고 결정할 것들
한사람이 살면서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해야 하는 것' 중에서도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어느 선에서는 '꼭 해야 되는 것'으로 분류가 되면서 '왜 해야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없어지는 것 같다.
사실 '해야 되는 것'을 결정 또는 의식할 때는 한사람의 모든 것이 총 동원된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 여자라는 사실, 이제까지 보고, 듣고, 야단맞고, 칭찬 듣고, 실수하고... 그 모든 것이 토대가 되니 어떤 면에서는 신기하고도 힘이 든다.
한사람의 '인생'은 이렇게 철저히 본인의 결정 위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그때 이렇게 했었더라면' 이라는 생각은 사실 가장 모순되고 자신에 대한 불신만이 된다.
이러한 자신감은 무엇을 잘한다거나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자기 자신을 알고 다시 말해 한계를 파악해서 그 안에서의 결정 또한 믿는 것이다. 항상 그 한계를 도전하는 태도로 이해하는 것이 기하학적으로 늘어나는 '결정할 것들'의 늪에서 방향을 잡는 마지막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하고 싶은 것' 그것은 '건축'
고등학교까지는 그래도 별 생각 없이 학교는 꼭 가야 되고, 대학교는 특히 꼭 가야 되는 줄 알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진학하였다. 사실 대학 3학년까지는 나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안에서 나는 물리학이 가장 좋았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러나 대학3년이 그 동안 내가 가지고 있는 선택의 폭을 너무도 많이 넓혀 주었고, 그때 나는 "왜" 라는 질문과 "하고 싶은 것"에 대한질문을 하게 되었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선택 과목의 폭이 방대했고 그 중에 순수한 호기심으로 들은 과목이 E.. Sekler 교수님이 가르치신 18~19세기 건축사 과목이었다. Le Corbuisier가 설계한 Carpenter Center지하 강당에서의 강의였다.
물론 그 당시에는 잘 모르지만 그저 '멋있는' 건물에서 '와--'하는 공간을 보며 강의실로 들어서곤 했지만, 그러한 경험의 축척이 나의 결정의 토대가 되었다고 믿는다.
Sekler교수님의 열정의 강의는 두 번째 강의부터 '나는 건축을 공부해야지'라는 다짐을 은연중에 하게 되는 '이유, 장소, 시간'이 되었다.
그 분이 가진 건축에 대한 애정은 그분 자체와 그분의 작업, 그리고 작업의 대상을 모두 존경스럽게 만들었고, 그분이 '하고 싶은 것'을 철저하게 함으로써 '해야 되는 것'과의 Balance가 너무나도 '즐겁게' 또는 '보람되게'보였다.
그 강의 후 건축가로 성장하고 있는 지금까지 나에게 영향을 주는 선생님과 건축가는, 그 분들이 지니신 본인 직업에 대한 열정과 철저함으로 이루는 인생 그 자체가 가장 큰 용기와 본보기가 되었다.
사실 대학교에서 대학원으로 '하고 싶은 '것 즉, 건축을 공부하기 위하여 진학하고 졸업할 때까지는 온실 속에서 철저히 '하고 싶은 것'을 찾으며 지낸 시간 같다.
그래서 '학생'이라는 위치가 그 만큼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건축가로서 '해야 하는 것'
사회에서의 건축가는 학생시절과는 달리 '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아지는 것을 모두 느낀다. 건축주를 대하면서 모든 과정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인간관계 또한 많은 고민과 보람을 자아낸다.
여기서 '직업관'이라고 할까? 느끼는 점은, 건축은 건축주와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건축주에 대한 이해와 Team-재가가 필수적이다.
건축주에게 건축 분야에서의 여러 가지를 알려 드리지만, 강요된 경정을 하지 않는다. 주어진 범위 안에서 좁으면 좁을수록 좋은 결과가 예상되지 않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지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지형과 이루는 한옥의 조화 역시, 나에게는 한옥에서 자라난 기억이 많은 결정의 토대가 됐다고 믿는다.
하버드 대학원에서 분야별로 나뉘어진 건축과 조경, 도시 "왜"라는 질문을 하였고, 이해하고 싶은 충동에 할 수 없이 두 과에 따로따로 소속되어 공부를 하였다.
그후 나의 모든 작업은 대지와 건물의 공진을 이루려는 작업으로 진전되었다.
그 자리에 왜 있는지가 대답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이제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나는 대학원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나는 대학원학생은 작가라고 인정하고 작가처럼 대한다. 나는 그 작업을 비평하는 Critic이다.
그 이유는 학생 또한 본인이 작가라는 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작업의 치밀함을 이루어야 하고, 나 또한 그들의 작업을 존중하고, 그 과정이 철저하게 될 수 있게 반응하여 주는 상대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생각하는 힘과 표현하는 실력이 쌓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많은 학생을 접하면서 느낀 점은 혼자 읽고 보고 작업하는 시간에 비해 토론하는 고민하는 시간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중요하지만 지금은 개인의 작업이 우선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되는 것'의 설정과 고민은 조용히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민선주>
내가 본 민선주씨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한사람의 아내였다.
그녀의 어떤 화려한 이력도 한가정의 어머니라는 이름 앞에서는 퇴색되는 것만 같았다. 한 가정이 있고, 한 사회가 있고, 한 국가가 존재하듯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그녀가 먼저 존재하고, 건축인으로서의 다른 그녀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건축을 생활이라 말들 한다.
아마도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그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녀의 생활 속에는 항상 건축이 있었다. 어릴 적 부모님이 그랬고, 결혼해서는 남편과 시집가족 또한 그랬다. 이제는 아이들, 남편과 함께 시간 나면 건물 구경을 다니곤 한다고 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좁다면 좁은 건축계에서 활동하는 소수 여성 건축인으로서 그녀의 입지가 굳어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주목받는 여성 건축인으로, 특히 1998년도에 가장 빛났던 건축인 11명 건축 드림팀에 그녀가 선정된 것은 그녀의 건축이 갖는 소박함과 긍정적인 사고와 또한 모든 프로젝트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임하는 순수한 열정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민선주, 그녀는 건축인으로서 건축을, 건축업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보다 그에 앞서, 가족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가슴이 따뜻한 여성이다.
나, 민 선주는...
부모와 조상에 대해서 자랑을 하고자 한다.
내 이름은 베풀 선자와 그루 주자이다. 대부분 못 알아듣기 때문에 선언할 때 '선'자와 주식회사 '주'자라 하면 잘 알아듣는다.
원래 언니, 오빠, 동생들은 모두 돌림자를 가지고 있는데 나만 돌림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 어려서는 돌림자가 부러웠지만, 나무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뜻인 내 이름이 지금은 좋다.
스스로 해석하기를 아마 목조 건물을 많이 지으란 뜻이라 생각한다.
한옥과 양옥의 건축을 보고 자라나신 아버지께서는 경영학을 전공하셨지만 어머니와 평생 건축 설계, 시공을 해오셨고 그 옆에서 나의 처음 그렸던 그림들이 주로 평면이라서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엄마와 같이 일하겠다는 둘째에 대해 기대도 해본다.
시간 나면 건물 구경하러 다니셨던 부모님들처럼, 우리 부부도 아이들까지도 같이 나누는 가장 재미있는 대화가 보이는 건물들에 대한 것이다.
건축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오히려 건축보다는 건축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 그중 내 학생들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가장 중요한 동료들로 커 가고 있다.
나의 건축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음 세대를 위한 좀 더 좋은 건축 환경을 만드는 일이라 하겠다. 물론 그것은 우리 세대가 우리들의 일에 충실하면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나만을 너무 내세우리 보다 전체를 앞세우면 인생을 마칠 때, 무척 행복할 것 같다.
말만 너무 근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우리 나라 어머니들의 근본 정신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을 겪어서 느낄 수 있는 여자고 태어난 것에 감사한다.
건축은 최고의 예술이다.
그것이 단순한 예술 작품이란 뜻이 아니다. 건축은 건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 나가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관계된 모든 요소들이 건축과 관계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많은 요소들을 정리하여 나가는 과정이 디자인이다. 그 안에는 많은 사람들과 그들과 관계된 경제, 문화, 정치, 도시적인 상황들이 엮어져 있다. 이 복합적인 과정을 거치면 조율되고 완성되는 건축은 가히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건축을 둘러싸고 있는 이 주변 환경은 무한한 보고와 같다.
그 모든 것이 건축의 결과물을 유추해 낼 수 있는 근본이 되고, 결국 완성된 건축이 소속되는 바탕이 된다. 그 환경을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보고 반응하는 것이 건축의 근본이다.
건축가라는 전문직은 인간이 만들어 낸 분류에 불과하다.
원시시대부터 남들보다 보금자리를 좀 더 잘 만드는 사람을 건축이 이라 불렀다. 잘 만드는 이가 더 많이 하다 보니 현대에 화서는 분업화되어 건축만 하게 되고, 이제는 도시와 조경 인테리어와도 분리가 되었다.
앞으로는 더욱 더 세분화되어 갈 것이다. 결국 건축을 원시시대처럼 혼자 책임지게 되는 경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인간생활에서 협력 작업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건축은 타인이 없이는 아무 것도 완성이 안 되는 분야이고, 따라서 협력을 잘 하는 이들 또는 시스템이 요구된다. '같이 잘 놀고 사이 좋은 것'과 '같이 작업을 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아직 우리 문화는 20세기 전반부의 억압과 재난으로부터 회복하는 단계에서 개인적인 사고가 활발한 단계에 있다고 느껴진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무조건 남의 의견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각자의 사고가 명확해서 의사 표현이 정확하고, 각자의 의견에 자신감을 가져야 남의 의견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활발한 토론이 진행될 수 있어야 더 바람직한 팀 작업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문화가 서서히 만들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가장 큰 영향을 준 한 사람을 꼽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동안 나에게 영향을 준 건축가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내가 배웠던 선생님들, 학부의 로버트 스턴(현 예일대 학장), 수잔나 토레스(전 크랜브룩대 학장), 헨리 스미스 밀러, 대학원의 알프레드 코터(전 예일대 학장), 라파엘 모네오(전 하바드대 과장), 헨리 콥(전 하바드대 과장), 마크 안젤릴(스위스 연방공대-ETH 디렉터), 다께야마 미노루, 다니구치 요시오, 이분들이 준 영향이 조금씩 나의 부분으로 남아 있다.
이국 교육 이전에 연세대에서 받았던 이경회, 송종석, 박영기 교수님들의 영향은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로도 지금까지도 연결되고 있다.
학교와 사무실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도 경기대와 서울 건축 학교뿐만 아니라 건축 계의 여러 선생님들을 통해 얻고 배운 것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비교가 안되게 소중한 것들이다. 선배들뿐만 아니라 동료, 후배, 학생들에게서 얻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항상 느낀다.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많은 것에 감사하게 된다.
민선주는 무조건 좋게만 보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일년 365일 하루종일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비평을 가한다. 그리고 그런 비평을 가함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무실 내에서나 밖에서나 비평을 서슴지 않다 보니까 나를 무서워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당장은 무서워하더라도 오랜 시간을 지나다 보면 전체를 위한 의견이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가까워 질 것을 희망해본다.
모든 작품이 나의 대표작이다.
왜냐하면 모든 프로젝트를 같은 마음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무실에서 모두 같이 잊지 못할 프로젝트가 "목포 시민 문화 체육센터 현상 설계"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목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현상 설계 공고가 나자마자 프로젝트 팀 전체가 같이 목포 답사를 하였다.
그냥 대지만 보는 것이 아니고, 시정자료도 구하고 며칠간 맛있는 음식도 먹고 유에 답사도 하고 문화시설들, 체육시설들을 다 둘러보고 관리인과 사용자들의 의견도 들어보았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목포에 관한 다양한 문화를 최대한 배우기 위해서 미술, 소설, 시, 음악, 무용, 고고학 등 얻어지는 것은 다 찾았고, 그 내용들을 접하면서 마치 나 자신이 목포 시민인 듯 울분을 느끼기도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3개월간을 다양한 전문가들의 자문도 구하며 팀원 전체가 밤낮없이 고민하고 만들고 토론하고 작업을 하였다.
시공 업자와의 회의도 거치고 대지의 고저 차도 가장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었다. 마치 곧바로 지어질 것처럼... 보고서 분량 제한이 없을지라도 우리들의 꿈, 목포의 정신이 들어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심사 과정을 거처 탈락되는 결과를 얻었을지언정 우리의 마음속에는 당선된 작품과 마찬가지로 남아있다.
이렇듯 설계란 연극과 비슷한데. 그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 환경에 몰입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후배 건축가들에
몇 년 또는 몇십 년이라는 시간차로 후배일지라도 같은 시대를 만들어 가는 동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들이 선배 건축가들보다 더 좋은 환경 속에서 커왔듯이 후배 건축가들 또한 우리보다 더 바람직한 환경 속에서 작업을 할 것이고, 더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이루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바람직한 여건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무엇
인가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이고, 그 부족한 것을 채우리 위해서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여 그 시점에 필요한 걸음을 내딛는 건축가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진실한 건축을 하였으면 한다.
우리의 현 건축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요구하는 사고가 염려된다. 유럽에 여행 갔던 사람이 아프리카에 가서 아프리카는 마치 영원히 뒤쳐진 문화권일 것이라고 단정짓는다면 과연 그것이 논리적으로 성립되는 것인가?
인류의 역사는 무한하다. 그 긴 역사 속에서 어느 지역은 고대에 부흥하고 어느 지역은 중세에 또 어느 지역은 근대에 부흥할 것이다. 그 다음은 중동일 수도 있고, 또 아프리카일 수도 있다. 아프리카가 부흥할 때 유럽은 박물관과 같이 죽은 도시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부흥해서 얼마동안 그 활기를 유지할 것인가를 읽어 내고 준비하며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자신을 통시적, 공시적, 그리고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할뿐만 아니라 자신을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각도 필요하다.
어느 문명 학자는 서양이 부흥하는데 걸린 400년을 마치고 지금부터 쇠퇴기에 들어선다고 한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상승세에 있단다. 그 학자의 2020년 세계10대 강국의 예상 명단에는 일본, 중국과 함께 한국이 포함되어 있다.
IMF로 잠시 미루어지겠지만 말이다. 자신을 윽박지르지 말고 숨겨져 있는 긍정적인 면을 찾아 북돋우어 줄 수 있는 사고가 요구된다.
그 한 예로 몇 년간 진행되어 왔던"--문화의 해"행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건축 문화의 해를 준비하는 기획팀은 비록 모자란 시간일지라도 각 팀 나름대로 어려움 속에서도 건축 문화의 해를 진행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다른 문화의 해를 거치면서 들려 온 평이 각 문화의 해는 그 분야만의 집안 행사였었다는 평이다. 아마 이번 건축 문화의 해도 최악의 여건 속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고 있을지언정 다른 문화 분야와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기에는 어려운 상황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집안 행사였고 준비가 미비했다는 비판이 자연히 쫓아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여건이 아직은 오랜 시간을 들여서 계획을 하거나 예산을 들이기에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은 행사를 치른 모든 이들이 같이 실감하는 사실이다.
또한 지금까지 어느 분야도 힘들어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앞으로 여유가 생기면 점차적으로 서로 다른 분야간에도 교류가 활발해질 것이며, 지금 대중 문화 속에서 그런 시작들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오해의 건축 문화의 해 행사들은 무조건 잘 되었다는 평가를 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