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동이(東 夷)의 뿌리
 
 
 
카페 게시글
통합 게시판 스크랩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래
대지 추천 0 조회 26 15.01.28 14: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본 블로그의 /정치,외교/면에 있는 [몽골지도부에서 한국-몽골 국가연합, 한국에 제시]를 참고하세요. 

~~~~~~~~~~~~~~~~~~~~~~~~~~~~~~~~~~~~~~~~~~~~~~~~~~~~~~~~~~~~~~~~~~~~~~~~~~

 

 

 

<<유럽 초기 인류, 아시아인 특성이 우세 클릭참조>>

 

<<지구환경변화와 역사 -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클릭참조>>

 

 

<<농사와 언어의 전파를 통해 알아본 인류의 역사 클릭참조>>

 

<<수학과 역사 클릭참조>>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래 (출처 : 烈帝의 21세기 한국역사)

아메리카 인디언은 어디서 왔나? 인류(人類)는 언제부터 이 지구 위에서 살게 되었나? 이런 의문은 누구나 한 번쯤 생각 해볼만한 문제다. 종래의 학설에 의하면 「인류는 약 2백만년 전에 동부 아프리카에서 진화되어 1백만년 전에는 유럽과 아시아로 펴졌으며 1만 2천년 전에 이들이 베링해협을 거쳐 북미대륙으로 건너갔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종래의 주장에 대하여 근래 소련의 고고(考古)학자 유리 모차노프는 새로운 학설을 내세워 주장하기를 「시베리아에서 발견된 돌로 된 도구들이 영국의 고고학자 메어리리키가 케냐에서 발견한 2백만년 전에 "호모 하빌리스"가 사용하던 것과 매우 흡사(恰似)하며 또 그 도구들이 발견된 토양이 지리학적으로 1백 80만년 전에 생성된 것임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도구들을 사용하던 최초의 인류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같은 시기에 생겨났거나 또는 어쩌면 아시아에서 최초의 인류가 나타났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유네스코 프리"라는 잡지에서는 소련의 고고학자 비탈리 라리체프의 글 "시베리아의 구석기 문화"를 게재하면서 흔히 시베리아를 얼어 붙은 불모(不毛)의 땅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러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 까닭인즉 이 시베리아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적들이 잇달아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유적지가 바로 시베리아의 "말라이아쉬" 유적이다.

1975년부터 고고학들이 발굴하기 시작한 이 유적지는 중부 시베리아의 "벨리라우스" 강과, "노비스비르크" 산과, "아비칸" 산을 가로지르는 산맥(山脈)에 위치한 계곡 지방으로서,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방사선 탄소 연대 측정으로 조사해 본 결과, 약 3만 5천년 전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이 주거지에서 생활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인류가 생활하는데 가장 적합한 조건들을 고루 갖추고 있는 이 "말라이아쉬" 지방에서 발굴된 뼈를 살펴보면 산양, 야생마, 순록, 영양, 산토끼, 사슴, 들소, 코뿔소, 여우 등 많은 종류의 야생 동물들이 무수히 서식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수천미터에 이르는 촌락(村落)을 형성하여 진보된 복합 문화를 발달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 "말라이아쉬" 유적지에서는 붉은색, 노란색, 검은색, 초록색, 진홍색, 보라색 등 온갖 색깔로 그려진 정교한 그림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모두가 뛰어난 솜씨로서 그들의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나타내고 있다. 종래구석기 유물이라면 매우 무디고 조잡한 것으로 여겨 왔는데 이곳의 유물 중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맷돌과 독수리와 거북 등이 새겨진 석기 조각품도 있어 그들에게 고유한 토착예술의 뿌리가 존재했음이 분명해졌다.

이와 같이 새롭게 발견되는 시베리아의 구석기 유물들은 인류의 문명이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통설을 뒤엎고 아시아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1920년 대에 고고학의 권위자들이 회합하여 인류문명의 발상지가 어디 인가에 대한 집중적인 토론이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류문명의 요람지가 아시아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며, 아시아에서 중·근동아시아 일대로 이동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런 물음에 대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일 먼저 아메리카 땅에 건너 온 종족은 인디언인데 이들이 아시아로부터 베링 해협을 건너서 왔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인디언들이 어디에서 언제쯤 건너 왔느냐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다. "처음의 미국인"이라는 책을 저술한 G. H. S. 부쉬넬의 견해는 아래와 같다.

「신세계로 인간이 이주하는 데는 지리와 기후 등의 조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들이 신대륙에 올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베링 해협이었다. 배가 발명되기 전의 인디언들은 마른 땅을 건너지 않을 수 없었다. 대략 B.C. 25,000년에서 9,000년 사이에는 동북아시아와 알래스카가 넓은 평원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위스콘신" 이라고 불려지는 제4 빙하기에는 지금보다 해면이 훨씬 낮았고 물은 얼음에 잠겨 있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캐나다와 미국의 북부 지방은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지 않고 넓은 평원으로서 아시아 대륙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때가 대략 B.C. 25,000년경이고 그 당시의 사람들은 쉽게 알래스카를 정복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B.C. 18,000년경부터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막혀 버렸는데 그것이 약 8,000년 동안 계속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다가 B.C. 8,000~5,000년 그 이후부터는 기후가 따뜻해져서 빙하기가 끝났다고 본다.

추운 날씨가 지나가고 B.C. 5,000~2,000년 사이에는 현재보다 훨씬 따뜻한 날씨가 계속 되었을 것으로 본다. B.C. 8,000~5,000년 사이에 기후가 따뜻해져 대양이 물로 가득 채워짐에 따라 이제는 육지로 건너오지 못하고 배를 타고 건너왔다. 베링 해협 지금도 얼음 위로 걸어서 건널 수 있는데 배를 언제부터 사용해서 베링 해협을 횡단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B.C. 7,000년 경에 이미 북유럽에서 배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인디언들은 훨씬 그 이전부터 사용했던 것 같다.  

 

<<한국 배(선박)의 역사 클릭참조>>

위와 같은 주장은 그 밖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도 많이 주장되어 왔는데 그러면 지금도 그곳 미주대륙에 거주하고 있는 인디언들의 선조들은 어디에서 건너 온 어떤 종족이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아시아의 요람지에서 살던 인간들이 베링 해협을 통하여 그곳으로 건너 갔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 하면서도 그들의 건너간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그 견해의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중 몇 가지의 견해를 예를 들면 지리학자인 G. F. 카터 박사는 약 10만년 전에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주의 샌디에이고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고고학자인 J. B. 그리핀 박사는 2만년 내지 3만년 전에 인간들이 신세계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인디언들은 어디에서 왔나?

그런데 북미 대륙의 원주민들은 순수한 아시아 사람들이었느냐? 아니면 동북 아시아에서 잠시 머물었다가 건너온 유럽사람들이 아닐까? 또 그 이주는 계속적으로 이루어졌을까? 간헐적으로 이루어졌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세 대학에서 모인 세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그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스탠포드 대학의 조세, H. 그린버그 교수와, 애리조나 대학의 스티븐 제구라 교수, 그리고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크리스티 G. 터너 교수팀이 신세계의 선사역사에 대한 명확한 연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내놓았다.

이 세 대학의 세 사람의 학자들은 언어, 혈액형, 현존하는 고대 인디언들의 치아(齒牙)형태 등을 연구한 결과, 세 개의 추측을 이루는 이주자들이 아시아에서 신세계로 이주해 들어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들 세 이주 무리들을 열거하면 그 첫 번째는 1만 5천년 전에 현재의 시베리아 레나 강 계곡의 "아메린드" 혹은 "알곤컨"이 이주하였고, 둘째는 6천년 전에 현재의 시베리아 알단 강 유역의 "아타바스칸" 혹은 "나-데네"가 이주하였으며, 셋째는 4천년 전에 소련과 중국 사이에 있는 지역에 걸터 앉아 있는 "아무르" 강 분지의 "에스티모 알륫"이 이주하였다고 말하였다. 이 세 무리들은 차례대로 이주했기 때문에 먼저 건너간 사람들은 남미(南美)까지 내려 가게 되었고 늦게 온 무리들은 북쪽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상으로 남·북미의 인디언들이 베링 해협을 통하여 이주해 간 경위를 살펴 보자. 그들은 인디언이라고 호칭하게 된 유래(由來)는 "콜롬부스"가 인도를 향해 서쪽으로 항해한 지 70일 만에 쿠바 북쪽 바하마 군도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고국인 스페인에 돌아가서 "나는 인도에 갔다"고 선언하면서 거기 사는 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인디언의 뿌리를 탐구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언어(言語)를 연구한 그린버그 교수는 2백 개가 넘는 그들의 언어들을 세 가지의 부류로 분류하였다. 그 중 "아메린드"가 가장 큰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넓은 지역에 펴져 있었고 또 가장 오래된 언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타바스칸" 혹은 "나-데네"는 캐나다와 북캘리포니아 지역에 국한 되어 있었으며 "아파치"나 "나바호"도 이 "나-데네"를 사용해 왔다. 그 다음의 에스키모-알륫어는 북아시아 언어와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하였다.

그린버그 교수는 시베리아의 원시 언어를 연구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인디언의 언어의 유사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그는 언어의 유사성을 통해서 인종학적인 유사성을 탐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인디언들은 그 이주 연대가 서로 달라도 많은 점에 있어서 상호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그들의 뿌리가 하나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유래와 그들의 신세계 이주에 관하여, 언어 인류학자인 그린버그 교수와 인종학자인 제구라 교수 및 인류학자인 터너 교수는 서로 연구결과를 놓고 종합 토론을 전개한 결과, 인디언의 언어가 종래 생각했던 것처럼 2백 혹은 3백 개가 아니고 단지 세 개의 언어군으로 축소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린버그 교수는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가장 넓게 사용한 언어가 알고퀸이고, 그 다음이 아타바스칸과 나-데네이며, 세 번째가 에스키모-알륫이라고 말했다

제구라 교수는 인디언의 혈액형을 A, O, B, Rh형으로 나누어서 분류하여 발표하였는데, 그도 역시 인디언을 크게 나누면 세 부족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그린버그가 나눈 세 부족에 자기의 혈액형 연구결과도 맞추어서 배정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매우 놀라운 발견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는 또한 언어의 분포에 있어서도 역시 위의 세 지역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강의가 끝난 다음에, 제구라 교수는 그린버그 교수와 의견이 일치함을 말하였는데, 이것은 같은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측면에서 연구한 결과가 같은 결론에 도달 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또 터너 교수는 치아 형태를 분석하여 인디언의 유래를 추적하였는데 그들의 어금니 수를 먼저 검토하였다. 예를 들면 유럽인들은 어금니의 뿌리가 두 대이고 어금니의 뿌리가 세 개이면 아시아인 아니면 인디언들의 이이다. 그래서 치아의 형태는 인종의 유래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터너 교수는 직접 시베리아와 중국에 다녀왔는데, 그는 거기에서 8,000년 내지 2,000년이 되는 인간의 이빨들을 조사하였다. 이 이빨들은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이러한 터너 교수의 치아 형태에 의한 분류는 제구라의 혈액형에 의한 분류와 일치하였고, 그린버그의 언어에 대한 분류와도 일치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들 세 학자들은 인디언의 유래에 대한 공통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인디언들의 세 부족이 동시에 이주한 것이 아니고 제 일차로 1만 5천년 전에 제2차로는 6천년 전에 그리고 제3차에는 4천년 전에 각각 이주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인디언의 종교와 무속(巫俗)

인디언의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동네 어구에서 있는 우리의 장승 같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인디언 족들의 이런 장승들은 그들의 토템 숭배에서 연유한 것인데 거기에 등장하는 동물로는 곰, 까마귀, 여우, 독수리, 비버, 산양, 상어, 고래 같은 것들이다. 그들은 동이족(東夷族)에서와 같이 까마귀를 대단한 영물로 취급하는데 태초(太初)에 까마귀가 인간과 만물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태고 때에 아직도 세계가 혼돈 속에 있을 당시 이 까마귀가 혼동에서 우주를 창조한 것으로 신앙하고 있다.

알래스카 웨일즈 섬에는 여러 대의 장승 기둥이 서 있는데 그 중에는 곰 장승이 머리에 고래를 이고 있는 것도 있고, 사람의 어깨 위에다 까마귀를 얹고 있는 것도 있다.

인디언 토템 가운데서도 가장 흔한 것이 곰인데 트링기트 인디언들은 곰을 가장 숭배하며 절대로 곰을 잡아먹지 않는다. 그 까닭인즉 곰이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다(Haida) 인디언들은 지금도 그들이 곰 어머니로부터 내려온 후손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또 알래스카 연해의 인디언들은 회색 곰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신봉하고 있으며 곰 어머니에 관한 재미있는 신화(神話)를 가지고 있다. 이런 곰 숭배사상은 우리의 단군설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디언들의 창조신앙 속에 가장 많은 신화소(神話素)는 물과 어머니 신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푸에풀로" 인디언들의 최고 신인 주니 신은 남녀의 양성(兩性)을 모두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신이란 남녀의 양성을 다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그들의 신앙 때문이다. 케레스 인디언들은 "생각하는 여인" 이라는 "수시수티나코" 여신을 창조신으로 모시는데, 이 여신을 지하에서 살고 있다. 또 호피 인디언들은 "단단한 존재의 여인" 후루잉 우티를 창조신으로 모시는데, 이 여신은 땅 자체이고 해나 별과 같이 살고 있으며 그의 아들이 바로 땅의 곡식의 신이라고 믿고 있다. 오랜 옛날에 이 세상에는 물 밖에 없었는데 후루잉 우티는 매우 작은 땅 탈라쇼모라는 산 봉우리에서 살았다. 그 여신은 달, 별과 석탄, 조개구슬 같은 단단한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라파호 인디언의 창조신화에 있어서도「태초에는 이 땅이 온통 물에 덮여 있었는데 큰 신령님이 거북에게 명하여 바다 밑으로 내려가서 진흙을 가져오라고 한다. 그러나 거북은 바다 밑까지 도달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는 비버(海狸)에게 명하여 진흙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비버는 성공적으로 진흙을 가져올 수 있었다. 큰 신령님은 이 진흙을 사방에 던져 흐트렸는데 이것이 바로 우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이 인디언들의 창조신화들인데 인디언의 부족 가운데 는 또 최고신을 신봉하는 부족들도 있다.

조지아 해협 부근에 살고 있는 콰티크트, 누트카, 벨라, 쿠라 같은 부족들은 `칼스'라는 신을 최고의 주재신으로 신봉하는데 이 칼스라는 말은 `위에 계신 분'이란 뜻이다.

이보다 좀 낮은 지위에 있는 신들은 이 킬스 신에게 종속되어 그에게 봉사한다는 단일 신관(神觀)이다. 이러한 신관은 중국, 한국, 일본 등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조셉 H. 훼리는 그의 저서에서 지적하고 있다.

또 나바호 인디언들의 우주관은 모든 사물이 인격화되어 있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그들은 모든 사물에 인격성이 부여되어져 있다고 믿는다. 나바호 언어에서 자동사를 써서 표현하는 것보다는 타동사를 쓰기를 더 좋아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인디언들의 신앙 가운데서도 가장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것이 샤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인디언들은 인간이 정령들과 직접 교접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교접은 자식들에게 대대로 전승되어 내려간다고 믿었다. 즉, 어떤 부모가 병을 고치는 샤먼을 행했다면 그 샤먼이 그 부모의 자식들에게 까지 대대로 그대로 전해진다는 말이다.

어떤 샤먼은 질병뿐만 아니라 전쟁과 평화 같은 중요한 사건들도 결정한다. 그리고 샤먼들은 '이크투샤'란 말을 할 때마다 부들부들 몸을 떤다. 이러한 입신정령(入神精靈) 숭배사상은 앞에서 설명한 나바호의 언어와 문법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언어를 분석해 보면 사물(事物)의 영(靈)은 나보다 높은 것이지만 사물 그 자체는 사람보다 낮다는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랜 옛날에, 사냥꾼들이 신령한 산양(山羊)들을 죽였기 때문에 살해당하고 말았는데, 그 때에 살아 남은 사냥꾼들이 스키나 강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잇는데. 큰 회색 곰이 나타나 어부의 통나무 뗏목을 모두 부숴 버렸는데 그 곰은 창에 맞아 죽는다. 어부는 이 동물이 곰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 곰은 사람의 얼굴과 사람의 머리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어리석게도 그 어부는 곰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린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물의 신들은 크게 노하여 땅과 산까지 물로 채워 홍수를 일으킨다. 이 때부터 인디언들은 곰과 고래를 함께 토템으로 숭배하게 되었다.」

인디언의 신화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곰과 함께 고래도 그들의 숭배 대상으로 등장하는 내용이다. 인디언들의 곰 숭배신앙은 아시아 일대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여겨진다. 곰과 고래가 함께 등장하는 신앙은 아시아 대륙의 곰 숭배신앙이 베링 해협 근처에 있는 바다의 고래 신앙과 접합되는 과정에서 생겨 난 형상이라고 생각된다.

캘리포니아의 인디언 가운데는 곰 의사가 있었는데 그들은 수호신으로서 곰을 숭배하는 의사들이었다. 이 곰 의사들은 북과 방울을 사용했는데 정령(精靈)을 부를 때에는 북을 치고 방울을 흔든다. (우리나라의 무당과 비교 바랍니다.)

북미주의 인디언들은 주로 북을 사용하고 방울은 남북 미주 인디언들이 모두 사용한다. 곰 숭배 예배의식은 어느 지역에서나 유사성이 있고, 매우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것이다.

곰의 정령을 받게 되면 남자는 활을 잘 쏘아서 사냥에 능해지며 여자인 경우는 좋은 어머니가 되어 음식을 맛있게 요리하며 부지런해 진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인디언들의 놀이

인디언 족들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하는 놀이 가운데는 "실뜨기, 고누, 윷놀이" 등이 있는데 이것들이 그 형태나 방법에 있어서 우리들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맥팔랜 같은 학자들은 이런 놀이가 중국에서 건너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모든 서양 학자들이 한국의 것을 중국의 것이라고 혼돈하고 있듯이 그들 또한 이것을 혼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더구나 윷놀이, 싱뜨기, 고누 같은 놀이는 우리나라 어느 지방에 가도 흔히 있는 놀이이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놀이를 즐겨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한국에서 유래하였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다. 흔히들 인간을 놀이의 동물이라고 하고 이 놀이에서 출발하여 문명을 창조해 왔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의 연장(延長)이 바로 인류의 문명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도 실뜨기 놀이는 실을 양 손에 걸고 이리저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뜨는 것인데 이것은 일본,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 등 세계 전역에 널리 펴져 있는 놀이이다. 인디언들의 이 실뜨기 놀이는 백인들이 미국 땅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그들은 이 놀이에는 어떤 마술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또 이 실뜨기 놀이를 손으로 뿐만 아니라 발가락, 이빨 입술 등을 이용하여 상대방 없이 혼자서 하기도 하는데 한국인들이 하는 것과 꼭 같다는 것이 놀랍다.

그 다음은 인디언들의 윷놀이에 대하여 살펴 보면 그들은 이것을 경마 놀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놀이에서 그들은 우리의 윷판 같은 둥근 판을 만들어 놓고 윷 길이만한 막대기를 던져서 그 엎어지고 잦혀지는 모양에 따라서 윷말을 쓰는데 막대기 수는 세 개로써 우리의 네 개와 다르다. 그러나 윷판 위에 말이 가는 방법과 상대방의 말과 겹쳐질 때 잡을 수 있는 등 우리의 그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밖에도 우리 나라의 각 지방에 널리 퍼져있는 "고누"(꼬누 혹은 꼰)등 많은 놀이들이 우리와 너무나 비슷하다. 맥팔랜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150여 가지의 인디언 놀이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들 중에는 한국의 민속과 비슷한 것이 허다하여 그들과 우리가 한 뿌리 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또 미주에 산재해 있는 "아파치"족들의 생활과 풍습 그리고 그 모습들이 우리와 매우 흡사할 뿐 아니라, 아파치라는 호칭 그 자체가 우리의 '아버지'라는 말이다. 그리고 저 찬란했던 잉카문명, 멕시코 문명 등도 그 근원이 아시아의 동방에서 건너간 것이니 이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기대된다.  

 

<<'윷놀이' 하는 멕시코 사람들(펌글) 클릭참조>>

 



인디언들의 윷놀이


북미 인디언들에게도 우리처럼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윷이 있다.

작은 윷을 바구니에 담아 흔들다가 던지는 것도 우리와 같다.
둥근꼴이나 네모꼴의 윷판(밭 수는 우리보다 많다)이 4구역으로 나뉘는 것과, 상대방 말에 자리를 빼앗기면 죽은 말이 되어 처음 출발점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나, 두 사람 또는 네 사람이 노는 것도 우리와 같다.

그러나 종족에 따라 5 ~ 6개의 윷 가락을 쓰고, 윷판 또한 매우 복잡한 점 등은 우리와 다소 다르다.


 

팽이와 투호, 굴렁쇠

 

팽이의 형태나 노는 방법도 우리의 것 그대로이다.
채로 쳐서 팽이를 돌리고 서로 부딪치면 늦게까지 도는 쪽이 이긴다.

또 채를 쓰지않고 몸통 가운데 박힌 기둥을 손가락으로 힘껏 비벼서 돌리는 방법도 우리와 같다.
팽이를 만드는 재료를 나무뿐 아니라 뿔이나 돌 그리고 진흙으로 빚어 만들고, 위나 옆 면에 색칠을 하는 것도 우리와 같다.

이 밖에도 그들은 투호, 자치기, 고누, 실뜨기, 그림자 놀이, 굴렁쇠 따위의 놀이도 했으며,
또한 우리처럼 불이나 연기가 잡귀를 물리친다는 귀신관념도 있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두 지역의 문화가 이처럼 닮은 꼴을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역 간의 문화를 비교할 때,가장 유력한 단서가 되는 것은 물질문화(物質文化)이다.

인류학에 있어 물질문화는 고고학자가 발굴한 유물 못지 않은 중요성과 객관성을 가진다. 
 

독일의 고고학자 A.홈볼트가
"아메리카의 많은 신화, 기념물, 우주 발생에 관한 사고는 동아시아의 것과 놀랄 만큼 흡사하다.  이것은 태고 시대에는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음을 말 해 준다."

 라고 하여, 홍산·요하문명의 배달한겨레 일부가 미주로 건너 갔을 수도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 또 프랑스의 고생물학자이며 지질학자인 P.티얄 드 샬던도
"몽골. 만주. 시베리아, 중원북부와 동부,왜열도,조선반도 그리고 알래스카에 이르는 지대는 단일문화권이 존재했다."

 라고 하여 한층 더 이러한 사실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인디언 관련 사진 모음










 

 


몽골리안 루트와 한국인

십수년 전인가 미국의 한 박물관에서 에스키모 가족의 흑백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의 모습이 우리 100년 전 할아버지·할머니 모습과 너무나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쳤다. 이후 미국의 원주민(Native American) 인디언 박물관에서 접한 인디언들의 생활모습에서도 까닭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구전(口傳)된 민속노래(folk song)가, 어렸을 적 우리 시골에서 접한 노동요나 제례요(祭禮謠)와 너무나 흡사했다는 점이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어~어 어~어’로 시작되는 노래는 우리 농촌에서 죽은 사람의 상여를 메고 나갈 때나 입관식을 할 때 부르는 제례요와 100% 같았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미국 대륙을 더 내려가 만난 멕시코인을 비롯 중·남미인 중에도 찢어진 눈매를 비롯한 얼굴 생김새, 표정, 동작, 체격이 영락없는 ‘한국인’이 적지 않았다. 이는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에 이민간 동포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한 아르헨티나 동포는 “고산지대에 갔더니 우리와 똑같은 생김새에 생활습속도 비슷한 원주민들을 만났는데 놀랍게도 성이 김씨더라”고 전했다.

의문은 몇년 후 풀렸다. 한국인의 원류(源流)인 북방몽골계가 수만년 전 시베리아~베링해협(과거에는 육지)~알래스카~북미~중·남미로 이동하면서 지금 에스키모, 인디언, 인디오들의 조상이 됐다는 연구 자료들을 접하면서였다. 결국 우리 모두는 수만년 전, 지금 바이칼호 부근 어느 곳에서 함께 살았던 조상들의 ‘한 뿌리’ 자손들이라는 점이다. 물론 수많은 세월과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 오면서 많은 변화가 이뤄졌지만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해 비교적 단일혈통과 습속을 유지할 수 있었듯이 미대륙 혹한지대나 고산지대에서 동화를 거부하고 전통적 삶을 고수한 원주민들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기자가 에스키모나 인디언에게서 느낀 동질감은 수만년 전 ‘한뿌리’였다는 동류(同類)의식을 본능적으로 포착한 것이자, 그 장구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수만년 전 조상들의 생활 습속과 유전인자가 지금껏 완강하게 후손들에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다.

문화 인류학적으로 몽골지역에서 시베리아 미국으로 뻗어가는 ‘몽골리안 루트’에 관해선 많은 연구가 돼있다. 그러나 지구촌 다른 곳 즉 몽골에서 남진해 티베트 고원을 거쳐 히말라야 산맥을 주변으로 펼쳐지고 궁극적으로는 인도양·태평양으로까지 확산되는 또다른 ‘몽골리안 루트’에 관해선 아직 연구가 초보단계에 불과하다.

티베트 역시 우리 북방 몽골계로 언어, 체격, 습속 여러 면에서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이곳은 지역적으로 서역·동남아시아를 향한 ‘관문’ 구실을 하는 바람에 여러 종족·문화와 많은 교류가 있었다. 티베트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접하는 네팔의 경우 왕족은 무사계급으로 역시 몽골계다. 네팔 몽골계 중 날래고 산을 잘 타 한국 등반대의 가이드 역할을 하는 세르파족의 경우 단일혈통을 유지한 덕분에 한국인과 매우 비슷한 점을 갖고 있다.

역시 국경을 접한 미얀마는 물론, 동진(東進)해 접하는 베트남·라오스·태국 치앙마이 등 인도차이나 반도에 사는 고산족들 중에서도 ‘코리안’과 비슷한 몽골족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몽골 반점을 지니고 있고 한복 비슷한 차림에 막걸리를 만들어 마신다. 그들이 말하는 방언에서도 우리 언어와 많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남부 아시아 지역에서 지금 한국인과 가장 비슷한 종족은 부탄 사람들일 것이다. 이곳은 사면이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자 오지(奧地)로, 다른 곳에 사는 몽골계보다 훨씬 주위 환경에 덜 동화된 채 북부 몽골계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탄과 미얀마 사이 인도 동북부 산악지대에 사는 나가(Naga)족들 역시 우리와 같은 몽골계로 앞으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이같은 북방몽골계 연구가 의미를 지니는 것은 몽골인들이 워낙 강인하고 생명력이 질겨 칭기즈칸 시대, 중국의 청나라 시대 등 인류사에 굵직한 족적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그 몽골계 중에서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이들이 바로 한국인이다. 서양인들의 시각이 아니라 바로 한국인의 주체적 시각으로 몽골계에 대한 연구가 이뤄진다면 그만큼 우리가 누구냐는 데 대한 정체성·주체성 연구에 한걸음 다가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최근 우리 민족이 기원전 베링해를 건너 중남미의 아즈텍문명과 잉카문명을 건설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서 열린 국어학회 겨울학술대회에서 ‘중남미 고대어에 나타난 우리말 흔적―아즈텍 문명과 잉카 문명은 우리 조상의 것이었다’는 논문을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그 증거로 문장구조, 조사, 개별단어 등 여러 측면에서 나와틀(Nahuatl)어와 케추아(Quechua)어에 우리말의 흔적이 매우 많이 남아있다고 밝혔다. 나와틀어는 아즈텍문명을 건설한 부족의 언어로 지금도 멕시코 등 중미지역에서 약 200만명이 사용하고 있다. 케추아어는 잉카제국을 건설한 부족의 언어로 남미에서 약 700만명이 사용 중이다.

 논문에 따르면, 문장구조의 경우 ‘주어+목적어+동사’로 어순이 일치하며 주어의 생략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이, 의, 을/를, 에서, 와/과, 로, 로부터, 끼리’ 등의 조사를 사용하며 그 종류와 쓰임새도 우리말과 일치하고 있다. 우리말이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여럿 있다. ‘나와틀’이라는 말 자체가 나와(나)+틀(복수형어미 ‘들’) 즉, ‘우리’가 지금도 남아있는 예라는 것이다. 아즈텍(Aztec) 역시 스페인어 발음으로는 ‘아스떽’이며, 이는 곧 ‘아사달’이라고 했다. 날(nal), 오다(wala), 가다(ga), 여기(ye), 누구나(noo’yuna), 어제(izi’i) 등도 우리말과 일치한다.

 

특히 지금까지 그 뜻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아리랑에서 ‘아라리가’의 뜻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alariga’(아라리가)란 말이 나와틀어에서는 ‘이렇게해서(영어의 thus)’의 뜻이라는 것. 그는 “따라서 ‘아라리가 났네’는 ‘그렇게해서 이겼네’의 뜻이며, 아리랑은 친선경기나 전쟁에서 이겼을 때 부르는 승리가 또는 승전가”라고 주장했다.

 “직접적인 관련 없이 이처럼 공통점이 많기란 불가능하다”며 “세계 문화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깜짝 놀랄만한 큰 발견”이라고 주장했다.

 “인류가 베링해협을 건너 미주 대륙으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구체적인 증거가 없었다”며 “언어적 관점에서 그 증거를 찾아낸 셈”이라고 말했다. 또 “2008년 5월 이를 미국의 세계언어인류학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며 앞으로 연구팀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연구하겠다”고 덧붙였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우리와 같은 핏줄인가>

연합뉴스 ㅣ 기사입력 2008-06-09 10:35 |최종수정2008-06-09 15:19

배재대 손성태교수

배재대 손성태 교수 학술세미나서 주장

(대전=연합뉴스) 윤석이 기자 =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언, 인디오가 우리 민족과 같은 핏줄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배재대 스페인.중남미학과 손성태 교수는 9일 배재대에서 열린 학술 세미나에서 `아메리카로 건너간 우리 민족의 언어적 증거'라는 논문을 통해 "아메리카 원주민의 고어인 `나와들어(語)'와 우리말의 `고어(古語)' 사이에 어순과 발음, 문장의 구조적, 형태론적인 면 등이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손 교수는 실례로 "우리 고어의 순경음인 `비음이응(ㅸ)'이나 복수형 어미인 `~들, ~께', 땅을 의미하는 `달' 등의 단어와 15세기까지의 억양 등이 나와들어에 그대로 쓰이고 있으며 `내 지이(내 집)=ne chii', `내 곳(내 꽃)=ne kotz'i'j' 등 구(句) 역시 유사했다"고 소개했다.

또 "'나 나아 트홋타(나와들어)=ni naa tihota', `야히 있다(약이 있다)= nahi-ta' 등 문장에서도 큰 유사성을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지금까지 정확한 뜻이 밝혀지지 않은 아리랑의 후렴구 `아리 아리랑 아리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의 뜻을 나와들어로 풀어본 결과, '지금 그렇게 해서 지금 그렇게 해서 이겼네'로 해석된다"고 주장했다.

즉 "`아리=ari'는 `지금'이라는 뜻으로, `아리랑=alariga'는 `그렇게 해서'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데, 민요 아리랑은 고대 우리 민족이 어떤 축제나 전쟁 등에서 이겼을 때 불렀던 `승전가'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손 교수는 아울러 "멕시코 아스텍인의 역사서에 조상들이 `사막 근처인 아스달란과 두 개의 나라에서 왔다'라는 기록도 우리 선조들인 부여와 고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고조선의 첫 도읍이 `아사달'이었고 고조선의 위치가 중국 요하강 서북쪽인 고비사막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다는 중국 문헌을 그 증거로 들었다.

손성태 교수는 "아스텍인들과 언어, 역사, 풍습이 일치하는 것은 우리 민족이 직접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갔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라며 "신라시대의 유물로 발견된 토우 가운데 중남미에서만 서식하고 있는 개미핥기가 있는 것도 우리 선조들이 베링해협을 건너 멕시코까지 왕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울러 "우리 민족의 이동 시기는 기원 전후 또는 초기 삼국시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seokyee@yna.co.kr

(끝)

주소창에 '속보'치고 연합뉴스 속보 바로 확인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아메리카 인디언, 인디오는 韓民族"…고대 아즈텍어 우리 고어와 일치

뉴시스 ㅣ 기사입력 2008-06-09 11:04

 

【대전=뉴시스】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과 인디오는 우리와 한 핏줄인 한민족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제기돼 주목받고 있다.

아스텍인들이 사용한 고어 '나와들어(語)'가 우리말의 고어와 어순·문장의 구조적·형태론적인 면이 정확히 일치하며, 발음까지 같은 것이 많다는 주장이다.

배재대 스페인·중남미학과 손성태 교수는 9일 배재대 21세기관에서 열린 세미나를 통해 논문 '민족의 이동:아메리카로 건너간 우리 민족의 언어적 증거'를 발표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언어에서 오늘날 한반도에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와 구, 심지어는 문장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손 교수는 "실제로 1689년 미국 LA에서 발간된 아스텍인들의 '나와들어'에 대한 연구문헌인 'Arte de la lengua mexicana'를 보면, 15세기 혹은 그 이전 우리말 고어의 특징에 대해 말한다고 할 정도로 정확하게 우리말과 일치하는 많은 설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며 "그 내용도 매우 체계적으로 우리말 고어를 설명하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손 교수는 "예를 들어 순경음 비읍(ᄫ), 15세기까지 우리말에 존재했던 세 가지 억양, 현재까지도 쓰이는 우리말 복수형 어미(~들, ~떼), 우리 고어로 땅을 의미하는 '달' 등이 나와들어에서 그대로 사용됐다"며 "단어뿐만이 아니라 '내 지이 /ne chii/ =내 집' '내 곶이 /ne kotz'i'j/ = 내 꽃(이) /my flower/' 등과 같이 단어 및 구가 같다"고 설명했다.

또 "'나 나아 트홋타(발음) /nɨ’ naa tɨhota.(나와들어) /나 나를 다쳤다(우리말)/ I REFL hurt / I hurt myself (영어해석)'라든가, '야히있다(발음)/ ɳahɨ-’ta (나와들어)/ 약이 있다(우리말)/ have medicine (영어 해석)'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문장도 같은 것이 많다"는 것.

그는 이와 함께 "더구나 우리 민족의 노래인 '아리랑' 후렴구인 '아리 아리랑 아리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의 뜻이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 우리말이 한자어로 대체되면서 순수 우리말이 대부분 상실됐기 때문"이라면서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나와들어에서 아리랑의 가사에 사용된 말을 미국학자가 해석한 바에 따르면 'alarigá(아라리가)'는 'thus(그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로 풀이됐다"고 밝혔다.

또 "'ari(아리)'는 'now(지금)'으로 풀이 됐으며, '났네'는 '이겼다'를 의미하는데, 명절날 윷놀이와 같은 전통 놀이에서 이겼을 때 '났다'라고 환호하는 것을 볼 때, 아리랑 가사의 뜻은 '지금 아리랑 지금 아리랑 그렇게 해서 이겼네'라고 해석됐다"면서 "밝혀진 가사의 의미로 판단해 볼 때, 우리 민족의 노래 아리랑은 고대 우리 민족이 어떤 축제나, 이웃 부족과의 친선 경기 또는 전쟁에서 이겼을 때 불렀던 '승리가, 승전가'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손 교수는 "멕시코 역사서에서 '아스텍인들은 사막 근처인 아스달란에서 왔으며, 두 개의 나라에서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우리 선조들인 부여와 고조선을 의미한다"고 확신했다.

손 교수는 그 이유로 "고조선의 첫 도읍인 '아스달'과 일치하는 것은 물론, 고조선의 위치가 중국 요하강 서북쪽 즉 고비사막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다는 중국 문헌의 기록과도 일치한다"며 "우리 선조들이 흰색을 좋아해 흰옷을 즐겨 입었는데, 아스텍제국의 모든 사원들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순장이라는 문화도 같다"고 설명했다.

손 교수는 또 "아스텍인들과 우리 한민족은 언어적으로, 역사적 기록에서도, 풍습도 일치하는 면을 고려할 때, 지금까지 알려진 몇 만 년전의 고아시아인만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갔다는 기존 학설로는 설명될 수 없다"며 "우리 민족이 직접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갔음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임에 틀림없으며, 그 시기는 기원 전후 또는 초기 삼국시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강조했다.

손 교수는 이에 대한 증거로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신라시대의 유물 중에 많은 동물 형상들의 토우가 있는데, 그 동물 중에 중남미에서만 서식하고 있는 '개미핥기'도 있다"며 "우리 학계에서는 이것을 아직까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베링해협을 건너 멕시코까지 왕래했던 또 하나의 증거"라고 밝혔다.

손 교수는 "지금까지 알려진 세계사와 세계 문화사는 다시 써야하며 과거 화려했던 아스텍제국의 문명은 곧 위대한 우리 문명"이라고 말했다.

최정현기자 ily7102@newsis.com

<저작권자ⓒ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중국 요서에서 '임둔(臨屯)' 봉니 출토

연합뉴스|기사입력 2002-04-11 08:30 |최종수정2002-04-11 08:30

 

한사군(漢四郡) 위치 재검토 필요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설치했다는 낙랑.임둔.현도.진번의 이른바 한사군(漢四郡) 가운데 '臨屯(임둔)'이라는 글자가 적힌 봉니(封泥) 유물이 중국 요서 지역에서 출토됐다.

이는 한사군이 설치됐던 장소, 즉 위만조선의 통치강역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한반도 북부 및 만주 요동지역 일부이며 이 중에서도 임둔군은 한반도 북부에 자리잡았다는 학계 통설을 전면 재검토하게 하고 있다.

중국 지린대(吉林大)에서 중국 요서지역 청동기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복기대 단국대박물관 연구원은 최근 발간된 학술지 「백산학보」 61집에 기고한 논문<'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에서 문제의 봉니 출토사실을 소개했다.

봉니란 고대 중국이나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로, 예외없이 직인이 찍혀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임둔태수장'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된 봉니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의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 성곽에서 지난 93-94년 지린대박물관과 랴오닝성 고고문물연구소 조사팀에 의해 발굴됐다.

해안에서 30㎞ 남짓 내륙으로 들어간 곳에 자리잡은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20세기까지 올라가는 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를 비롯해 후대의 요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4개로 구분되는 문화층이 확인됐다.

이 중 '임둔태수장' 봉니(3 x 3㎝)는 중심 연대가 서한(西漢)인 제3문화층에서'丞'(승)이라는 글씨가 적힌 또 다른 봉니 등과 함께 출토됐다.

'임둔' 봉니는 문헌이나 다른 지역 출토 봉니 연구성과를 검토할 때 규격과 서체, 문장 등이 서한의 규정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한나라) 중앙에서 임둔군 태수(군 우두머리)에게 보낸 것이 확실하다고 논문은 말했다.

따라서 이 봉니가 발견된 곳이 한사군 중에서도 임둔군에 속했을 가능성이 매우커졌다고 복기대씨는 평가했다.

한국상고사 최대 논쟁거리였던 한사군 위치 문제는 단재 신채호와 위당 정인보로 대표되는 만주설과 제국주의시대 일본 학계 및 해방 이후 남한.일본학계의 평양중심설이 팽팽히 맞서다가 최근에는 적어도 강단사학계만큼은 평양 중심설로 완전히굳어진 형국이었다.

이런 흐름과 함께 학계 일부에서는 한사군 중에서도 낙랑군과 현도군을 제외한임둔군과 진번군의 경우 존속 시기가 대단히 짧고 그 흔적이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물로도 뚜렷이 확인되지 않는 점을 근거로 '가상의 군(郡)'이라는 주장까지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임둔' 봉니 출토로 적어도 임둔군이 실재하지 않았다는 학설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됐으며, 임둔을 비롯한 한사군의 위치 문제 또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논문은 덧붙였다.

임둔군은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등 기록에 따르면 한 무제 건봉(建封) 4년(기원전 108)에 설치됐다가 20여년만인 기원전 85년에 폐지됐다. <사진및 그래픽 있음>taeshik@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요서지역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성곽에서 출토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와 <승>(丞) 자 봉니.

 

 

 

 

#김종서씨 “고조선-한사군 대륙 깊숙한 곳에 위치”

 

고대 한반도 북부에 존재한 것으로 알려진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중국 허베이() 성 동쪽에서 랴오허() 서쪽으로 길게 자리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종서(51·중앙대 강사) 씨는 최근 중앙대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으로 통과된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 비정 연구’에서 문헌 고증과 수학적 위치 고증방법을 통해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가 중국 대륙 깊숙한 곳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 논문에서 적용한 수학적 위치 고증방법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거리를 현재의 지도에 적용해 그 위치를 역추적하는 방법.

중국 한대의 역사서인 ‘후한서()’의 군국지()에는 당시 한의 수도였던 뤄양(·허난 성 서쪽의 도시) 동북쪽으로 5000리에 낙랑군이, 4000리에 현도군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한서()’의 무릉서()에는 장안(뤄양보다 더 서쪽에 있는 현재의 시안·西)에서 6138리에 임둔군이, 7640리에 진번군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1리는 당대() 이후 0.393km로 고정된다. 그러나 한나라 시절, 1리가 얼마인가에는 논란이 있다. 김 씨는 위나라 기록에 등장하는 뤄양 및 장안과 현재까지 남아 있는 도시들의 거리를 비교해 한대의 1리가 현재 거리의 75% 미만일 것으로 추정했다. 또 한대의 기록과 현재 지도상의 거리 비교를 통해 한사군의 위치를 추정했다.

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평양지역으로 추정돼 온 낙랑군의 경우 중간에 산악지대가 하나도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랴오닝 성 서부 진저우()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또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고 알려진 현도군은 허베이 성 동쪽과 랴오닝 성 서부를, 황해도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진번군은 압록강 서북쪽을 넘어설 수 없다.

김 씨는 여기에 한대의 도로 굴곡지수를 감안할 경우 한반도에서 가장 멀었던 현도군은 현재 베이징() 동북쪽 지역,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웠던 진번군은 랴오닝 성 서부 다링허() 유역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1990년대 초반 랴오닝 성 진저우에서 ‘임둔태수장()’이라는 직인이 찍힌 봉니(·공문서 등을 봉할 때 사용한 진흙덩이)가 발굴된 고고학적 발굴 결과와 일치한다.

이 논문은 랴오허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초기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지 않아 고조선의 실재를 뒷받침할 수 없다는 ‘물증 부족’의 비판에 대한 새로운 반론이다. 또 흥륭와, 홍산, 하가점 등 랴오허강 유역의 고대 신석기·청동기 문명과 고조선의 연관관계를 뒷받침하게 된다.

 

 

 

 

 

 

 

 

 

 

봉니(封泥) : 다른 곳에 보내는 문건을 넣은 나무함을 도중에 열어보지 못하도록 노끈 같은 것으로 가로세로 매여가지고, 그 매듭에 진흙덩이를 붙이고, 거기에 군현 책임자의 도장을 찍은 것.

일종의 "발송관".

 

중국 요서에서 출토된 '임둔(臨屯)' 봉니

 

 

 

 

 

 

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6.12.18 04:26 입력 / 2006.12.18 07:00 수정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허구의 종족 짱골라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2007년 02월 16일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중국사료에 나타난 동이 고조선의 실체

 

동방문화의 뿌리는 漢族이 아니라 韓族  최초 확인(신동아.2004.2)


● 우리의 조상 동이는 개벽이래 중국에 살았다.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동양문화의 주역이다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이다.

사고전서’에서 단군과 동이족의    

실체를 확인한 심백강 원장 ▼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여러 ‘고기(古記)’ 등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적지 않은 역사서적들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일제 36년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런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위시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하지 않고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 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중의 동이사료’ 등 4 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은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로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淸)나라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가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사고전서’ 중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해당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의 길이 열리는 것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 보기로 한다.

 


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게 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냥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嵎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등이 그것이다. 이자(夷字)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러한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융적(戎狄)이 존재한 것이 그 유래가 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어서 이들 이적(夷狄)들은 사실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개벽(開闢)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또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전 중국에 걸쳐 사방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兗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이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로부터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사고전서-사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柢)이다(夷者柢也).”

 

여기서 이(夷)를 저(柢)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柢)란 과연 무엇인가. 저(柢)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柢)’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柢),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柢)의 의미를 다시 저지(柢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柢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그 뿌리를 두고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柢地)의 저(柢)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柢)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 동안 알아 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뿌리 이자, 즉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 이자로 변질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고전서’에는,

“맹자가 추나라 사람으로,
추나라는 춘추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동이국가”라고 기록돼 있다

 


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고 하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보이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 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지인(東夷之人)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의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라 하였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맹자가 말했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에 의해 건립된 은은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까지도 모두 동이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 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지게 된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 ‘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嵎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다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도군(玄?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嵎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도,낙낭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도,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무제가 설치한 현도,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우리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가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일로서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러나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밝힌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하는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 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 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나라 ‘구이’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이 자료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은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 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한 분으로 자칭 군자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을 통해서 본다면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고구려,부여,삼한의 기원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馯=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말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이들이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 이전 우리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16)에 건국된 것으로 기술하여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서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가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널리 섭렵할 수 없다보니 어쩔 수 없는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이상 잘못 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다 보니,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인양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한 동이이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동이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도,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인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문헌상 최초의 동이인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었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모두 동이족 출신이었다.

 

넷째, 부여(夫餘)의 뿌리가 부유(鳧臾)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鳧山)이 발원지이며, 고구려가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고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출발점이 없는 한국사

오늘날 중국에는 몽고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 양대민족으로부터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황제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황(炎黃)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 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모습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두파 세파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역사의 단절로 인한 민족 얼의 상실에 있다.


국사교과서 새로써야

우리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되어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우리의 실제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도(東京) 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고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이후 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앞으로 만일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심백강 沈伯綱


1956년 경기 파주 출생
국립대만사대 및 중국연변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연구직 전문위원,중국연변대 객원교수
월간 ‘한배달’ 편집인
저서: ‘사고전서중의 동이사료’ ‘조선왕조실록중의 단군사료’

        ‘조선왕조실록중의 기자사료’ ‘이이 왕안석 경제개혁사상 비교연구’ 등

 

 

 

 

 

민족의 역사와 뿌리
  

누가 단군조선을 신화라 말하는가
심백강 박사, 중국 ‘사고전서’에 기록된 역사 밝혀내 … 역사학계 능력부족으로 실체규명 외면

”요(堯) 임금 때인 무진년(B.C. 2333년)에 신인(神人·성인보다 한 단계 위의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조선인(朝鮮人)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단군(檀君)이라 칭했다. 이것이 조선이 나라를 세운 시초다.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략’(通志 )에 이르기를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했는데, 한(漢) 시기의 낙랑군이 그곳이다. 모씨(茅氏)의 ‘상서록’(象胥錄)에 의하면 단군과 아울러 기자(箕子)도 왕양(王壤)에 도읍을 정했다. 역사에서는 위만도 왕험에 도읍을 정했는데, 곧 평양이다. (하략)”

단군의 실존에 관한 중국측 역사 기록 중 한 대목이다. 굴 속에서 21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어 여인으로 변신한 곰과 사람(환웅) 사이에서 단군이 태어났다는 식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것도 청나라 때의 유명한 역사학자 오임신(吳任臣)이 지은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라는 정통 사서에 등장하는 글이다. 중국 진(晋)나라 학자 곽박이 지은 ‘산해경주’를 바탕으로, 오임신이 그 주석을 널리 보완하는 형식을 취하며 지은 ‘산해경광주’. 현재 전체 18권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돼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과연 ‘사고전서’란 어떤 책인가. 중국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총서로, 선진(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만9000여권. 연인원 3000여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단군역사 언급 9종류 확인

 

바로 그 ‘사고전서’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인 학자가 있다.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그 주인공.

“사고전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된 체제입니다. 이중 단군의 역사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자부에 3개, 사부에 4개, 집부에 2개 등 모두 9종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이 외면하는 단군 역사를 중국 정통 역사서가 뒷받침해 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최근 심박사는 중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찾아낸 것들을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민족문화연구원 학술총서 제7집)라는 자료집으로 엮어냈다. 원서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은 대중서라기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자료 성격이 짙은데, 단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대목을 네모꼴 모양으로 굵게 표시해 두었다. 그중 한 대목을 찾아 띄엄띄엄 읽어보니 매우 충격적이다. “전부(錢溥)가 지은 ‘조선국지’에 의하면 세 종류의 조선이 있다. 하나는 단군조선이요, 또 하나는 기자조선이요, 나머지 하나는 위만조선이다….”(‘산해경광주’ 18권)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가 단군이 B.C. 2333년에 조선(고조선)을 세웠다는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과는 달리, 이 중국측 기록은 고조선이 하나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의 역사를 밟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심박사는 더 흥미로운 사실도 지적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인정받던 단군의 실체가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은폐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던 명나라도 단군 역사를 교묘하게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고전서 집부(集部) 편에 역대의 부(賦)를 모은 ‘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청나라 때 편찬됨)라는 책이 있어요. 이중 단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이 조선부(朝鮮賦)라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명나라 효종 때의 동월(董越)이라는 사람인데,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또 관련 자료를 참고해 조선부를 지었다고 하지요. 아마 중국인의 입으로 단군조선을 직접 언급한 현존 자료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기록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고전서 사부(史部) 편에도 똑같이 실린 원래의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쏙 빠져 있어요.”

 

 

“고조선은 하나 아닌 3단계 역사”

 

그러니까 명나라 때 처음 씌어진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빠져 있는 대신, 그 후인 청나라 때 편집한 ‘어정역대부휘’ 안의 조선부에서는 똑같은 저자의 이름으로 단군조선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객관성과 권위를 따져볼 때 어정역대부휘가 단연 앞섬은 두말할 나위 없다. 심박사는 이를 두고 “명나라에서 우리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려 했던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는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동이족보다 그 역사가 짧은 한족(漢族)이 주도적으로 세운 명나라는 대국의 자존심상 동이의 후손인 조선을 깎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단군과 고조선 관련 사료는 명나라의 직접적 간섭을 받던 조선조 때 많이 인멸됐고, 이후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의 말살됐다는 게 심박사의 해석. 그러다 보니 강단 사학계 일각에서는 단군 역사를 실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신화로 취급하거나, 심지어는 고려 때 항몽전쟁이나 일제 때 항일민족주의 감정의 소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는 중국의 문헌을 근거로 단군의 실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심박사는 이 자료집 외에도 16∼17세기 문헌인 ‘조선세기’(朝鮮世紀)를 처음으로 발견한 학자로 유명하다.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가 지은 이 책은 조선 영조 때 편찬됐다가 고종 때 중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역대서적’조에 제목만 전해져 오던 것이다. 지어진 지 4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본 ‘조선세기’는 특히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 삼조선의 역사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는데, 위만조선부터 다룬 사마천의 ‘사기’나 기자조선 이후만 인정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서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또 단군왕조의 시작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신화적 내용 대신 “가화합(假化合)을 이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우리나라 학자들은 광복 5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고전 문헌에 산재한 단군 및 고조선 사료를 왜 찾아보지 못했을까. 심박사의 해석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는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자주적 사관이 없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한문 해독능력 문제를 꼽을 수 있을 거예요. 중국 원전을 해석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이렇게 단언하는 심박사는 한학자 집안에서 자라 5세 때 천자문을 독파하고 16세 이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수재. 19세 나이에는 당대의 유명한 학승 탄허 스님을 만나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는 등 뛰어난 한학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1983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연구하다가 10년 만에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현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사학자들의 단군 및 고조선 연구를 돕기 위해 주로 중국측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고 있다.   


< 안영배 기자 > ojong@donga.com
발행일 : 2002 년 08 월 29 일 (349 호)
쪽수 : 66 ~ 67 쪽

 

 

 

 

 

‘역사왜곡 바로잡기’ 또 하나의 밑거름 [중앙일보]

 

 

동북공정·임나일본부 등 동북아시아의 ‘뜨거운 감자’인 ‘역사 전쟁’을 풀기 위한 한국 측 관계자들의 노력이 잇따라 결실을 거두고 있다. 중국과 일본 측이 입맛에 따라 내놓는 ‘일방적’ 주장에 맞서기 위해 우리 쪽에선 사료적 근거를 찾는 데 집중해 왔다. 역사서에 남은 기록보다 더 객관적인 자료는 없기 때문이다.

올 초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유영렬)가 펴낸 『한국고대사료집성-중국편』(전7권)과 2003년 민족문화연구원(원장 심백강)이 펴낸 『사고전서(四庫全書) 중의 동이(東夷) 사료』(전4권) 등은 그 같은 노력의 일환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동아삼국관계사료전집(東亞三國關係史料全輯)』(전5권·이하 『사료전집』)이 중국 옌볜(延邊)대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중국의 정사(正史)인 『이십육사(二十六史)』와 『명실록(明實錄)』 『청실록(淸實錄)』 등에 실린 한·중·일 3국 관련 사료를 발췌해 수록했다. 무엇보다 기존 자료집보다 수록된 자료가 방대하다.

이번 『사료전집』이 다루는 시기는 기록이 남아 있는 요순시대부터 1912년까지다. 옌볜대·지린대·랴오닝대 등 9개 단체의 중국측 전문가 60여 명이 참여했다. 1999년 시작해 올해까지 8년이 걸렸다. 총 7500쪽 분량이며, CD롬으로도 제작했다. 남겨진 숙제는 역주(譯注) 작업이다. 중국 학자들이 중국 역사책을 저본으로 옌볜대출판사에서 출간했지만, 제작 전 과정을 한국 관계자들이 책임졌다. 후암미래연구소장이자 한국불교신문 사장인 차길진(60·사진)씨가 기획·출간 등을 총괄했다. 제작비 5억여원은 이재욱 한국노키아 명예회장이 후원했다.

중국 역사서에서 한·중·일 3국 관련 사료를 발췌해 만든 『동아삼국관계사료전집 』이 최근 출간됐다. 우리 역사의 숨겨진 부분을 새롭게 밝혀낼지 주목된다. 사진은 당나라 시대의 수도였던 시안의 대상(실크로드를 오가던 낙타 상인 집단) 조각. 고구려 후예인 고선지 장군도 시안 일대에서 활약했다.[중앙포토]
차 소장은 “더 많은 인력과 비용을 들인다 해도 앞으론 이런 일을 해내기 힘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북공정 여파로 최근 중국 측의 견제가 심해져 사료를 수집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570여 만여 자의 한자를 CD로 만드는 작업도 어려웠다고 한다. 잘 쓰지 않는 한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차 소장은 “이번 『사료전집』의 목차를 후암미래연구소 홈페이지(www.hooam.com)를 통해 공개해, 원하는 이들에게 복사비만 받고 내용을 제공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민덕식 교육연구관은 “학자 개개인이 엄청난 규모의 사료를 혼자서 다 찾아볼 수는 없기 때문에, 필요한 자료를 바로 선택해 볼 수 있게 한 이 같은 사료집의 편찬은 중요한 작업”이라며 “지금까지 학계에서 확인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이들 사료집을 통해 새롭게 밝혀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배영대 기자

2007.07.31 05:08 입력 / 2007.07.31 05:56 수정

 

 

 

 

 

본 블로그의 /역사/면에 있는 [기획특집,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 ~ (2)], [기획특집,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3) ~ (4)],

[기획특집,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5) ~ (6)], [기획특집,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7) ~ (8)],

[기획특집,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9) ~ (10)], [기획특집,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1) ~ (12)],

[기획특집,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3) ~ (14)], [기획특집,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5) ~ (16)],  

[기획특집,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17) ~ (18)], [지구환경변화와 역사 -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MBC 2부작, '곡옥의 비밀'], ["닫힌 반도사관으론 동북공정 못 막는다"], [요하문명 단군조선국의 영토],  

[배달겨레의 유산, 한의학 역사에 대해], [동북공정은 서막에 불과하다.], ["홍산문화와 요하문명, 주인공은 우리 겨레였다&...], 

[동북공정, 이대로는 안 된다!], [단군조선의 금속기술], [베일 속에 가려진 나라, 부여], [제국 졸본부여(고구려)의 실체],  

[한국 배(선박)의 역사], [역사스페셜 - 고구려 천하의 중심을 선포하다, 광개토...], [역사스페셜 - 고구려 고분벽화, 세계를 그리다],

[졸본부여(고구려) 음악 대탐사], [남북한, 러시아 학자들의 ‘동북아 고대국가의 역사’ 국...], [왜국의 역사조작 실태], 

[주몽은 한나라를 몰랐을 수도 있다], [요동,요서,한사군 등 고대 지명 자료를 통한 '고구려 ...], [배달한겨레 복식 역사],  

[신완순 "중국은 애초부터 실체가 없었다!"], [잊혀진 땅 백제 22담로의 비밀 (동영상)], [대진국(발해)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옥저·발해 온돌 발견], [한민족사의 일부 '대진국(발해)' >>> 동영상...], [졸본부여(고구려)의 후예 '대진국(발해)'],

[발해 화폐로 추정되는 금화 첫 공개],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1~5],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6 ~ 9],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10 ~ 12],

['대조영의 땅' 아무르江 유역에서 발해유물 발견], [한반도는 공룡의 ‘에덴동산’], [공룡들의 무덤, 몽골의 고비사막],

[한국공룡, 천년부경룡(Pukyongosaurus)], [한국의 공룡, 울트라사우루스(Ultrasaurus)],

[한국의 공룡, 코리아나사우루스(Koreanosaurus)], [한국의 공룡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먼저 농사를 지은 한국],

[세계최초의 신석기가 한국에서 발견], [한국 전곡리 유적 30만∼35만년 전 것 - 네안데르탈인보...],

[한반도-만주 8천년 전에도 동일문화권 입증], [빙하기 바이칼에 한민족이 살았나], [세계 最古목선 발견],

[英 BBC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사냥 기원”], [최소 2600년전 '절구공이'와 '농사용 인공 저수지' 발...], [중세고려는 어떤 나라인가?],

[우리 나라 지도의 역사 그리고 김정호], [4대 발명품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이 모두 쥐나 짱...], [쥐나(중화)사상과 쥐나족(한족)],

[“동북아시아 호령한 고구려는 중국도 인정한 흉노의 왕...], [주변국들이 인식했던 제국 졸본부여(고구려)],  

["요, 금, 원, 청은 중국사 아니다. 여진(만주)족...], [동양과 서양에 걸친 역사, 또다른 배달겨레의 후예 터...], 

[배달 흉노계 돌궐족의 역사], [우리의 형제 터키(펌글)], [만주쥬신(삼전도의 진실)], [왜열도쥬신], [홍윤기의 역사기행], [몽골쥬신],

[고구려,발해의 또다른 후예 '금나라'], [삼별초가 日류큐왕국 기초 세웠다], [배달민족의 한 갈래 훈족(서흉노)], 

[배달겨레 흉노계 몽골의 후예, 티무르 - 초원의 마지막 ...], [또다른 배달겨레 몽(묘)족의 아픔], 

[역사기행 - 신비의 산악왕국, 남조(南詔)], [김운회 교수의 '역사 바로 보기']를

 

/유물,유적,문화재/면에 있는 [토종 공룡화석 '천년부경룡' 드디어 일어섰다], [1억년 전 한국은 '벨로시랩터'의 사냥 무대였다],

[EBS 하나뿐인 지구 - 시간이 열리는 섬, 사도(공룡화석...], [함평에서 공룡시대 곤충화석 등 다량 발견],

[‘공룡의 무덤’ 몽골서 희귀 화석 쏟아졌다], [‘티라노’ 조상 공룡 이빨화석 국내 발견], [세계 고고학史 바꾼 한탄강변 '주먹도끼'],

[평창 쌍굴유적서 구석기 유물 출토],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배달겨레 발해문명들 ! ! !],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첨단 측정기술 이용,中에 앞선 유리제조술 밝혀], [백제의 탁월한 유리문명 보고서], [나주 조개무지서 유리 工房 흔적], 

[북한 문화유산 시리즈4 - 고인돌 왕국 고조선], [BC 7세기 철기유물 강원 홍천서 출토], [한반도 철기문화 새 유입통로 발견], 

[국내 最古 ‘7000년 전’ 토우 발굴], [“제천행사 무천은 고조선 풍속"], [세계 제패의 원동력, 한국류 순장바둑], 

[명도전은 고조선의 화폐인가], [KBS 수요기획 - 알타이의 제왕 베르쿠치, 독수리 사냥...], [매사냥의 기원과 현황],

[무용총, 고구려가 살아난다], ["연해주 동해안에 고구려ㆍ발해계 성곽 집중&quo...], [우리의 '한지'가 오래 보존되는 이유], 

[어거지 쥐나 짱골라들, 도 넘은 한국 과학유물 왜곡], [팔만대장경은 발해대장경 계승한 것!], [팔만대장경과 해인사 장경각],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고인돌에 새겨진 천문도],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경주 첨성대 (慶州 瞻星臺)]를

 

/정치,외교/면에 있는 ['짱골라들의 티벳에 관한 소수민족 정책'], [아직도 살아있는 군국주의 망령 - 쥐나의 티벳침략],

[국교단절 당시 한국과 대만], [몽골지도부에서 한국-몽골 국가연합, 한국에 제시], [그레이트 코리아]를

 

/음모,테러/면에 있는 [“후진타오가 동북공정 지시·승인”], [대륙붕을 지켜라], [쥐나인민군, 北체제 붕괴시 북한에 파병 추진],  

[쥐나의 흑심 '이어도' (SBS뉴스추적 요약)], [짱골라들, 있지도 않은 암초 이어도해역에 표시], [티벳 독립운동과 쥐나의 압제],  

['동북공정', 북한 붕괴후 흡수통합 전략], [동북공정 역사왜곡 현장에 가다.], [MBC 다큐, 극우파 행동대장 후쿠모토의 약속]을

  

/인물/면에 있는 [신채호....안타까운 현실],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 [최태영 박사],  

[주은래(周恩來:1898-1976) - 전 쥐나공산국 총리], [성삼제 교육부 지방교육재정담당관], [광개토태왕 & 연개소문],  

[최고 전성기를 이룬 장수태왕(長壽太王)], ["양태진 “간도-녹둔도 영유권 포기해선 안 된다”...],

[연개소문 - 내용 보강 (2007.08.08 에 올린 연개소문 ...], [고구려 후예 재상 '왕모중'], [동양의 한니발 '고선지' ],

[졸본부여(고구려)의 후예 '이정기 (본명 : 이회옥)'], [대진국(발해) 3대 제왕 '대흠무'], [시대를 앞선 ‘아시아 경영자’ 장보고],

[근세고려시대 비운의 왕 '충선왕'], [화약무기의 아버지 '최무선'], [미스 고려 기황후, 대원제국을 장악하다!], 

['세종'과 '정조' 리더쉽 스타일 비교], [이징옥, 사대의 나라에서 황제를 꿈꾸다!], [역사스페셜 - 이 순 신 장군],

[다시 조명한다. 임금 광해군], [몽골인들이 기억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태준]을 

 

/촌철살인/면에 있는 [왜놈과 짱골라의 만행], [일제사진, 그 비밀과 거짓말], [순수한 漢族은 없다],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에서도 대규모 시위], ["소련처럼 망할 수도"... 극심한 '해체 공포...],

[‘한국 순혈주의’ 에 대한 서양의 오만과 무지], [이씨조선 금서목록], [모스크바서 고구려/독도 문제 관련 국제세미나 개최],

[배달겨레의 사상과 철학], ["태극기는 천손민족의 표시..중국보다 앞서"...], [서울대 소광섭교수팀 “氣실체 주장한 ‘봉한학설’ 입증...], 

[우리가 배운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니었다], [삼국지정사(역사서)로 바라본 삼국지연의(소설)의 허구...],

[TV사극 역사 오류·왜곡 심하다”]를

 

/지식창고(과학&생물 등)/면에 있는 [경락의 실체 ‘봉한계’ 그 비밀을 벗긴다], [24절기 및 10간과 12지], [MBC특집 다큐, 곰팡이],  

[위대한 발명품 '지게'와 '온돌'], [지구의 생성과 변천사 해부], [동양인들은 유전적으로 작은 키를 가졌는가?], 

[중세초기 인류의 키는 현재와 비슷해], [빙하기와 온난화], [소빙하기의 영향], [소행성 지구 충돌 시뮬레이션], [수학과 역사],

[한국 설날, 중국 설날 다른 해도 있다], [해상제국 백제(남부여) - '코끼리는 어디서 왔을까?'], [조선시대에도 UFO가 출현했다?],  

[조선시대, 최신식 어류백과사전이 있었다], [진주MBC, 약초전쟁]을

 

/우리말,국어/면에 있는 [KBS스페셜, 위대한 여정 한국어 3부작], [언어사적 측면에서 본 고구려어의 뿌리],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 ‘백제어’를 찾아서], [발해문자 해독 첫 시도], [“발해는 고구려語 썼던 황제국”], [한자는 우리 글이다],

[훈민정음에서 말하는 '중국'], [위대한 한글], [日王, 한국말로 신라神 모신다], [일본어의 비밀]을

 

/자주국방다물, 밀리터리/면에 있는 [단군조선과 졸본부여(고구려)의 '무기'와 '성'], [고구려 군대의 편성체제],  

[근세고려시대 우리는 로켓을 쏘았다], [영상복원 - 해상왕국 고려의 군함], [거북선 실물을 그린것으로 추정 - 美서 첫공개],

[거북선에 대해(펌글)], [세계 4대 해전과 이순신 장군], [한국의 核주권 “비핵화선언은 파기됐다, 우리도 농축하...],

[시대별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전력비교], [조선시대 환도 패용법], [배달겨레의 종가인 부여계 국가들이 동아시아를 제패했...],

[조선시대에도 비행기가 있었다?]를

 

/종교/면에 있는 [거짓으로 시작된 기독교의 한계], [크리스마스의 비밀과 동지], [이순신은 사탄...], [중세의 잔혹한 고문과 그 도구들]을

 

/나의 이야기/면에 있는 [대한제국 왕실복원??]을

 

/엽기,황당/면에 있는 [쥐나, '짝퉁' 들고 나섰다가 국제전시회서 망신], [中 광산.건설업자들, 고대 배달겨레문명 발상 유적지 ...],

[쥐나의 잔혹하고도 엽기적인 형벌]을

 

보다 자세한 것은 [몇 가지 추려본 간략한 게시물 목록들], [역사와 관련해 몇 마디 논평해본다....]를 참조하세요.  

 

이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문화재나 유적들에 관한 자료들이 많으니 직접 본 블로그의 게시물들을 둘러보면서 찾아 읽어보세요

기타 궁금한 것은 위에 언급하지 않은 자료들 중에 있으니 찾아보면 그 궁금증 대부분이 풀릴 것입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