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에 대한 예화 모음
영광
돌리기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끈 여자 육상선수가 있었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여자'라고 불리는 그리피스 조이너다.
그녀가 금메달을 따내자 많은 기자들이 몰려 취재경쟁을 벌였다. 그 가운데
미 NBC방송의 한 기자가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나님께 영광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최선을 다함으로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하나님께 영광돌릴 때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영광된 일
미 우주선 패스파인더호의 화성착륙은
"천문학의 승리"였다.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세운 과학자는 요한 케플러(1571∼1630).
그는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단순히 원형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초점으로 타원의 궤도를 그린다는 이론을 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말한다.
"천문학자는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연이라는 책에서
무언가 찾도록 허락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일 뿐입니다"
영광스러운 종말
세상에 비그리스도인의 인생관처럼 허망하고 절망적인 것은 없다. 챨스
다아윈은 그의 삶을 마치면서 솔직히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는 인생의 한 국면에만 관심을 집중시킨
나머지 시를 즐기고 음악을 즐기는 힘을 상실하였다. 심지어 자연 자체를 감상하는 힘을 대부분 상실하였다.” 가련한 다아윈.. 웰스의 종말도 그와 매우 유사하였다. 그처럼 인간의 이지와 인간의 이해력을 강조하고. 기독교의 죄의
교리와 구원의 교리를 조롱하던 사람이 삶을 마치면서 그가 물거품의 인생을 살았다는 고백을 한 것이다. 그의
마지막 저서였던 .극한점에 이른 이성.에서는 불경건한
사람들의 마지막 비참함이 무엇인가 하는 셩경의 가르침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또는 옥스퍼드 대학의
한 단과대학 학장이었던 마렛 박사같은 합리론자는 그의 자서전에서 .내게 있어서 전쟁은 내 인생의
긴 여름을 갑작스레 끝내버렸다. 그 이후부터 나는 쓸쓸한 가을과 더 나아가 차가운 겨울밖에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어찌하든지 마음을 상실당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만 한다.라고 고백했다.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죽음은 무서운 일이다. 그들의 전기를 읽어보라. 그들의 찬란하던 날들이 마지막을 고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 것도
기대할 만한 것이 없다. 그들은 전에 성공하였던 일과 승리하였던 일들을 회상함으로써 자신들을 위로해
보았자 결국은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성경은 어디서나 .그
뒤의 끝.을 생각하라고 강권하고 있다.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하나님을 의뢰하라. 그 하나님의 능력을 의뢰하라. 그리하면
종말이 영광스러울 것이다.
영광을 받으실 분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조셉 하이든은 훌륭한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하이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서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 창조'입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존 밀톤의 '실락원'에
근거해서 그는 이 위대한 '천지 창조'를 작곡했습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하게 되던 날입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날 지휘를 하던 지휘자는 정말 놀랍게 이 음악을 하나님 앞에서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자석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입니다. 저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하이든을 바라보며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이 갑자기 청중들을 중단시키면서 말합니다.
“아니오”그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게서 나의 연약함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백년에 한번 들어볼까 말까한 유명한 흑인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n, 1902-1973)은 노래를 잘부르므로 영광을 한몸에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23개국에서
명예학위를 받았으며 아이젠하워대통령, 케네디 대통령 취임시에 미국 국가를 독창했고 58년에는 아이크가 유엔대표로 지명까지 했으며 63년에는 존슨
대통령으로 부터 최고 훈장인 "대통령자유상패"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40년간 성악활동을 하고 은퇴할
때 하는 말이 "나는 보잘것없는 노예밖에 될수 없는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셨으므로 유명해진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명예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연설하여 미국 모든 시민에게 감명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습니다.
영광의 흔적
19세기경 스코틀랜드의 대학에서는 명예학위 수여자를 야유하는 습관이 있었다. 학생들은 발코니에 걸터앉아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으려는
사람이 원래 광부였다는구먼!"하곤 했다.
언젠가 리빙스턴이 학위을 받기 위해 이 학교에 왔다. 많은 사람들은 학생들의
태도에 관심을 나타내며 지켜보았다. 그러나 리빙스턴의 모습을 본 학생들은 모두 기립하여 그 자리에서
서 있을 뿐이었다.
밀림에서 사자에게 어깨를 찢겨 한 손을 축 늘어뜨린 아주 험한 피부를 한 노선교사가 명예학위의 수여자였기 때문이었다. 봉상의 결과로 상처, 영광을 얻기 위한 손실, 그리스도로 인한 욕됨 등 더 이상 영예로운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옛날 어떤 시인은 영웅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멘'이라는 검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검에는 싸울 때 입은 상처
외에 아무런 명예의 장식이 없었다."
감사치 않은 죄
전에 미시간 호수에 배 한 척이 침몰햇을 때,노스웨스트 대학의
학생 한 명이 물에 뛰어들어가 빠져 죽게 된 사람 23명을 구출해주었습니다. 수십 년 후에 토레이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그 청년의 용기를 칭찬했는데, 마침
그때의 청년 이 백발 노인이 되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면서 "그 사건을 통해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단 한 사람도 고맙단 말을 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옳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형님 밑에서 개만큼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지냈다고 평하니까,"당신은 개만큼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책망했다고 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무례한 사람이라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복도 못 받고 성공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도 영광을 받기 위함이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목박혀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세세토록 찬송과 영광을 받기 위하심입니다. 영광 받으실 때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도 누가
신세를 지거나 은혜를 받았을 때 와서 감사하면서 칭찬해주면 얼마나 기쁩니까? 하나님은 감사를 통하여
영광과 기쁨을 누립니다.
거친 손』이 아름답다
어떤 왕이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보냈다.왕은 이 잔치에서 한명을 뽑아 자신과 왕후 사이에 앉히기로 했다.그날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과연 왕과 왕후 사이에 앉을 『영광의 인물』이 누가 될 것인가 하는데 있었다.초대
받은 사람들이 궁전에 도착했을 때
신하들은 사람들의 손을 조사하기 시작했다.그날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던 영광의 인물은 귀부인이나 고관이 아니라 평생 노동으로
손이 거칠어진 한 노파였다.
톨스토이의 동화 『왕과청소부』의 줄거리다.노동은 아름답다
고난뒤의 영광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23:5)라고 찬양했습니다.
시련과
고난은 우리에게 침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 그 아픔으로 인해 땅을 치고 통곡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바로 그 고난과 상처의 현장에서 진수 성찬을 성도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계‥ 어느 교회보다
능 력있고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된 것은 6·25전쟁이라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 얻은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 난, 그 고통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 없이 부활 과 영원한 영광, 만왕의 왕으로서의 보좌를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련과 고난을 당하거든 원망하거나
불평하며 탄식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수 성찬이 베풀어지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인 두 가다라 사람을 고치심
마 8:28-34
귀신들린 두 [가다라] 사람을 고치심(마8:28-34)마가와 누가는
[가다라]지방이 아니라 [거라사]지방이라고 함[가다라]지방은
갈리리 호숫가 10키로 떨어진 내륙에 있는 마을인데 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동묘지와 목장이 있으므로 이 사건이 일
어난 장소로는 적당하다고 합니다.
[거라사] 지방은 갈릴리 호수 남동쪽 58킬로 떨어진 곳으로 예수님이 거기까지 여행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와같이 어디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 쫓아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지만 우리들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깨달으므로 예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단 두명뿐이라네
평생을 바다에서 인명구조원으로 일하던 사람이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축하를 하러 찾아온 친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인명구조원을 하면서 이때까지 자네가 목숨을 구한 사람은 몇명이나 되지?"
"단 두 명 뿐이라네."
친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물었습니다.
"삼 십 년을 넘게 일한 자네가 단 두 명 밖에 못 구했다구? 농담하지 말게나."인명구조원은 친구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물론 구해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지. 하지만 그 후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날 찾아온 사람은 단 두 사람 뿐이었네.
난 그 두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누가복음 17:17)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들 열명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는데 그 중 예수님께 다시 나아온 사람은 단 한사람, 그것도 유대인들이 무시하던 이방사람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은혜를 입고도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명구조원이 두 사람 밖에 구하지 못했다는 것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제구실을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지금의 우리들은 안 그런지
반성해 봐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까지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셨는데 그 크신 은혜를 잊고 지내지는
않았습니까?
진정으로 감사함을 느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적이 있었습니까?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국가를 위대하게 만드나?1
성경본문:다니엘서 4:28-37
찬 송:74장 오 만세 반석이신
요 절:"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는 나라는 복이 있도다."
(시편 33:12)
위클립, 낙스, 데이비드 리빙스톤, 허드슨 테일러, 챨스 헤돈 스펄젼, 지 캠블 몰간, 얼마나 훌륭한 영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명단인가! 그들은 핵심이 되는 교회와 출판사와 그리고
선교단체들을 설립하였습니다. 이런 훌륭한 유산에도
불구하고 타임지에 실린 최근 기사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영국사회 태도 조사] 단체의 조사단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영국은 서방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로 되어 가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더 이상 저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이루어 놓은 것들을 통해 신 들을 만들어
냅니다.
일반 백성인 우리들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스스로 겸손해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라가 위대하게 되며 계속 유지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무의식적인 도적질
신 5:19; 벧전 2:18,19; 마 5:33,34
사람들은 이웃의 물건은 물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경우도 있다.
고용인의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은 도적이다. 마땅히 해야 할 칭찬을
하지 않는 사람은 도적이다. 동료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사 람은
도적이다. 서원을 하고 지키지 않는 사람은 도적이다. (파커)
보람
1.앉은뱅이 꽃의 노래
괴테의 시에 [앉은뱅이 꽃의 노래]가
있다.
그 내용은 들에 핀 한떨기의 조그마한 앉은뱅이 꽃이 양의 젖을 짜는 순박하고 아름다운 시골처녀의 발에 짓밟혀서 그만
시들고 만다.
그러나 앉은뱅이꽃은 그것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다.악하고 추한 손에 의해 무참하게 꺾이지 않고 맑고 깨끗한 처녀에게 밟혔기 때문에 꽃으로 태어났던 보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보람된 인생을 살고자 한다. 들에핀 들꽃 한
송이도 그러할찐데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써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면, 내 목숨까지도 잃고 만다해도 그것은 결코 인간으로서의 보람이 꺾이는 것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최고의 보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시되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지으셨기 대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잃는 다면 그것이야
몰로 기독교인으로서 최고의 보람이 아니겠는가?
2. 값진 희생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간호원 한 분이 있다. 후로렌스 나이팅게일이다. 그 분은이탈리아의 부유하고 문화적인
교육을 받은 가정에서 자라났다. 부모는 그 딸에게 좋은 가정을 갖도록 행복한 결혼을 권유했지만
나이팅게일은 다 거부했다. 그는 31세 때 허무감에 젖어
일기애.“살아갈 의욕이 없다. 텅 빈 공허감,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라고 썼다.“삶의 가능성이 무엇인가."
공허 속에 살던 그는 31세 때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31세에 간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부모의 만류도 뿌리치고 이 젊은 여인은 전쟁터를 찾아갔다. 피 흘리며 쓰러지는 전상자들을 붕대로 싸매어주고 닦아주고 붙들어주고 사랑으로
돌보아주며 3년 동안을 도왔다. 외로운 군인들은 나이팅게일만 지나가게 되면 마치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처럼 인사하
고 경배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희생을 거쳐서 그는 현대 간호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후 병원마다 간호원이 없어서는 안되도록 제도화시켰다.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에 그의 시체를 영국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모시려 하자 나이팅게일은 그런
자격이 없으니 가족묘에 묻어달라고 했다. 31세 때 더 나갈 수 없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죽음을 생각
하였던 나이팅게일은 새로운 가능성과 삶의 의미를 찾고야 말았다. 위대한 삶을 사는사람은
값을 지불해야 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참고 견디어 우리의 인생 경주장에서 승리를 하여야겠다.
부러진 날개
--- 챨스. R. 스윈들 ---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과거]라는 유령과 싸우고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밀실 둘레에 접착용 테이프를 붙여 두거나 문 앞에 책상을 옮겨다 놓아도 덜거덕거리는 뼈다귀들의 소리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 설마 누가 알랴? " 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 언제나 나는 그랬지‥‥ 일은 다 끝난거야‥‥ ". 당신이라는 배에서 내려뜨린 닻은 배를
바닥에서 잡아당겨 붙들어 둡니다. 죄의식과 근심이 그 배에 승선하여 거대하고 시커먼 난파선으로 만듭니다. 죄의식과 근심은 당신이라는
배에 [염려]라는 구멍을 멋대로 뚫어 놓아 가라앉게 만듭니다. 선창 아래에서는 죄의식과 근심이 늘 써먹는, 오래된 거짓말이
합창으로 들려 옵니다. "깃털이 부러진 새는 다시는 하늘 높이 오를 수 없다." 이처럼 파괴적이고 부당한 고발자 들과는 반대의 경우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당황하게 될 일들을 해보았거나 경험한 일이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사실일
것입니다. 당신으로서는 원인을 알아낼 수 없는 무겁고 비극적인
죄를 범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 순간으로서는 개인적인 정보에 속하는 죄의 기록이나,
도덕적으로 고발 당한 일이나, 또는
가정의 갈등 같은 문제를 지닐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쇠약해져서 금이 가고 상처투성인
데다가 "머리가 돈 사람", 또는 "신경쇠약"이라는 딱지마저 붙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염려가 한가지 더 늘게 됩니다. 당
신은 시간이라는 모래에 덮여진 기억들,
이를테면 불륜의 관계, 재정적인 실패, 지독한
개인적인 습관, 또는 이혼, 물의를 일으킨 일들을 기억 속에 가지고 살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 중의 어느 하나라도 만일 끈적끈적한 말꾼들의 식탁에 오르내리며 추잡한 부분이 들추어진다면 당신의 명성을 망쳐 놓거나
절름발이로 만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요. 당신의
경우는 가망이 없다고 포기하기에 앞서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자유의 증거]들을 상고합시다.
저들의 [과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남자들과 여자들을 정직한
마음으로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의 창시자요 "하나님의 벗"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브라함은 전에는 우상 숭배자 였습니다.
요셉은 전과 기록을 가지고 있었으나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살인자였으나 후에는 그의 민족을 바로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해 내는 위대한 사명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입다는 하나님께서 그의 개인적인 대리자가 되도록 선택하시기 전에는
불량한 청년들 한 떼를 데리고 다니는 불륜의 사생자였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거리에 살던
창녀였으나 후에는 위대하게 사용되어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조상중의 한
분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확신이 가지 않습니까? 더 있습니다. 엘리와
사무엘은 둘다 가난하고 변덕스러운 아버지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강건한 사람들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요나와 마가 요한은 비겁자처럼
난국을 피하여 달아났던 전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그토록 유익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공개적으로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비열한 배신자였으나 세워진지 얼마 안되는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가장 손꼽히는 설교자가 되
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애초기에
너무나 괴퍅하고 버릇이 나빴으므로 제자들은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다시피 하나님은 그를 위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전진해 갈 수가 있습니다. 천국의 생명책에는 구속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회심한 배신자들과
반역자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은혜는 정말로 장엄하며, 죄는
정말로 해로운 것입니다! 약속은 정말로 달콤하고, 과거란 정말로 시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로 귀하고 넓으며, 인간의 제한성은 참으로 가련하고도 좁습니다! 주께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새로움이 되시나 율법주의자들은 그렇게 고리타분한 것입니다.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고 교회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성도는 없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머지 모든 사람의 잘못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분명히 말해서 영국식 표현이지만 우리는 모두 똥더미에서
건져냄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찬송을 크게 부르거나 기도를 경건하고 멋있게 하거나 인사를 달콤하게 하는
사람들도 모두 육신의 음탕한 생각과 똑같은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분명히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용서하실 때는 그 일을 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그릇이든 기꺼이 사용하실 뿐 아니라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금이 가거나 이가 빠진 그릇이라도 [오늘 깨끗하게 한다면] 어떤 그릇이라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닳아 빠졌을 수도 있고 전에 사용된 일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과거는 일초 전에 끝났다. 이 순간부터 앞으로는 깨끗할 수 있으며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신발 가공도 주님 위해! (골3:23)
해리 아이언싸이드 박사는 소년 시절에는 양화점의 직공이었다. 쇠가죽을 구두 본에 맞추어 재단하고 물에 담궈 흠뻑 적셔서 가죽이 단단해지고 건조해 질 때 가지 계속 두드린 후에 구두창에 못을 박는 일이 매일의 그의 일이었다.
한번은 거리에 나갔다가 다른 양화점에 들린일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일하는 직공은 구두창을 두드리지도 않고 곧 바로
물에서 꺼내어 못을 박고 있었다. 호기심이 당겨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쇠가죽을 단단해지도록 두드리지 않아도 품질 좋은 구두가 되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 빠른 시간에 많이 만들어 내야지 두드릴 시간이 어디 있어" 해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자기네 주인에게 달려와서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주인은 성경 책을 열어 골3:23을
읽어 주며
"나는 돈을 벌기위해 구두를 만드는게 아니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나는 심판 날에 주님 앞에서 "너 참으로 비열한 짓을
했어 최선을 다하했어"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 주님께서 웃으시면서 "참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싶어."
사람이란 자기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때 행복한 법이다.
- G.D.제임스 -
신자의 영광스런 미래-본향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쾌락과 고통, 기쁨과
슬픔의 혼합물이다. 우리는 기쁨이 충만한 때에라도 내일이 되면 그 나름의 염려와 근심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을 알고 불안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완전하고도 순전한 행복을 고대하며 살 수 있다. 영광의
나라, 참된 본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본향에서 우리가 누릴 분깃은 무엇일까?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내부의 죄와 외부의 악에 의하여
고통받는다. 그러나 하늘 저편에서 우리는 죄의 성품과 악한 환경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타락한 품성은, 거듭난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속에 남아서 우리로 하여금 이기적인 태도, 시기하는 정신, 때로
명백한 악행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죄없고 순결한 본성을 지닐 것이다. 또한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증가하고,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완전하게 되며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봉사가
완전히 받으실 만하게 됨으로써 지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완전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갖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은 왜곡이 많고, 헌신의 동기도 순수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곳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배가 흠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또다른 영광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즐거움을 영원히 누리리라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들과 날들의 압박을
받지 않을 것이고 미처 끝나지 못한 일 때문에 당황하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본향인 천국은 이렇게도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들처럼 (히11:13-22) 참으로 고대하고 고대할 만한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영광스럽게 여기자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처음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이 섞인 호칭이었다.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신문을 받는 중
그 기회를 이용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아그립바 왕은 깜짝 놀라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바울을 책망하고 있다.왕은 자신에게 그리스도인이란 라벨이 붙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침을 뱉듯이 외면해버렸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가르키는 별명이다.원래 이 이름은 그리 명예스러운 내용으로 불리운 이름은
결코 아니었다.그러나 안디옥 신자들은 그들에게 붙여진 부끄러운 별명을 받아 오히려 놀라운 신앙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인이라는 빛나고 존귀한 이름이
되도록 우리에게 좋은 영적 유산을 전해줬다.그 결과 마침내 주후 313년에는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정하게 됐다.오늘 우리는 크리스천이라는 빛나는 이름을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여겨야 한다.
영광의 면류관
성 구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 4:1)
링컨이 대통령 후보로 전국을 누비며 선거 유세를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소녀가
어머니와 산책을 하다 연설하고 있는 링컨 후보를 봤습니다. 엄마가 노예 해방을 외치는 훌륭한 대통령
후보라고 말하자, 소녀는 링컨이 큰 일을 하기에는 너무 말랐다는 생각이 들어 링컨 후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링컨 선생님, 선생님의 얼굴은 무척 말라보여요. 턱수염을 기르시는게 어떨까요?” 링컨은 이 편지에 짤막한 감사의
답장을 잊지 않았고, 그가 당선되어 워싱턴에 연설을 하러 갔습니다.
기차역에 내려서 인사하는데, 그 작은 소녀가 손을 내밀며 “축하합니다. 링컨 선생님” 하자
링컨은 “고마워요. 모두 아가씨 덕분이야” 하고 뽀뽀를 해주었습니다. 수염 때문에 따가웠지만 소녀는 기뻤습니다. 그 수염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외치는 자유의 인간 링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또 한 통의 편지는 링컨이 남북 전쟁 때 한 전투를 마치고 장군에게 총공격을
명령할 때 씌었습니다. “미드 장군,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의 공이오. 실패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 만약
작전이 실패하면 장군은 링컨의 명령이었다고 말하시오. 그리고 이 편지를 공개하시오.” 크고 작은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소중히 여긴 링컨 대통령은 사후에 더욱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지도력이 있는 지도자는 사람을 소중히 여길 줄 압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능력을 부각시켜 주며 사기를 북돋워 주며 신뢰하며 일을 맡깁니다.
당신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습니까?
금메달의영광(황영조마라톤)
지난번 오림픽 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땃다.
그날의 전 셰계 인류앞에 태극기는 유난히 자랑스럽게 휘날렸다.
해외 고포들은 눈시울이 뜨거웠다고 한다.
서울의 하늘 아래서도 이날의 감격은 모든 국민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진줄 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목이 터지도록 부른 8.15의 감격후 46년만에 쾌거이었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군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오직 어머니를 기억하며 달렸다는 말이다.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바다에서 숨을 멈추어가며 전복과 미역을 따내는 것을 생각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뛰었단다.
그처럼 초인적 힘이 어머니의 사랑에서 왔다면, 우리들도 주님의 사랑을 경험만 했다면
누구나 이 세상을 이길수 있다고 본다.
괴로울때 주님의 얼굴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시리.....
참으로 괴롭고 힘들 때, 황영조는 어머님 얼굴을 바라보면서 뛰었다.
우리는 얼마나 힘들고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뛰고 있는가?
하나님께 이 영광을”
기독선수 최용진·김형주 ‘金’
14회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기독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기독교 선교가 탄력을 받고 있다.
2일 벌어진 14회 부산아시안게임 유도경기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선수는
최용신(24·73㎏급·마사회) 김형주(26·66㎏급·마사회). 최용신 선수는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아 감사기도를 드리는 세리머니를 보여 간접선교에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최용신은 지난달 29일 기독교관
개회예배에 참석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경기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고 안수기도를 받았다. 최용신은 평소 많은 부상에 시달려왔다. 자연히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태릉선수촌의 엄한 연습환경 속에서도 매주 수요일 예배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용신은 경기 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다. 기독교관에서 선수들의
신앙생활을 돌보고 있는 윤덕신 전도사는 “최용신 선수가 금메달이 확정된뒤 무릎 꿇고 기도를 드려
부산 구덕실내체육관의 관중과 다른 나라 선수들,특히 북한 선수들과 응원단에게 기독인의 자세를 알려줄
수 있었다”며 “좀더 많은 기독 선수들이 메달을 따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기독교관은 기독 선수들이 경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성도들의 기도를 부탁했다. 3일
경기에는 강은라(사격) 장성호(유도) 강건욱(하키) 김무교 이은실 석은미(탁구) 등
기독선수가 출전했다. 탁구 선수들은 “우리에게 믿음과
평안을 주시고 주의 도우심을 경험했으면 좋겠다”며 “최선을
다해 결승 토너먼트에 나가겠다”고 밝혔다.
14회 부산아시안게임 참가국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가장 많았다. 24개국이 이슬람교로
나타났고 불교 10개국,힌두교 2개국,무속 3개국이었다
거리에서 영광을
어느날 아침 읽고 고개를 끄덕인 이야기가 있다. 어떤 곳에 아름다운 색유리로 창문을 만들고 그 위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Glory to God in the Highest) 이라고 새겼다.
그런데 어느날 동네 아이들의 돌판매로 유리 한 쪽이 깨지면서 영어 글자 `e`가 떨어져나가 `Glory to God in the High st.`( 큰 길에서 하나님께 영광)가 되어 버렸다. 그 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갸우뚱 거렸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그
리스도인들에게는 어딘지 납득이 가는 내용이 된 것 같다. 즉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어수선하고 욕설이 나며 심지어 불신과 불평이 넘치는 큰 거리와 골목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이 절실히 필요한 때인 것이다. 분별력이 없이 세파 속에 뒤섞여서 아무런 구별이나 특징도 없이 휘몰리며 죄를 즐기는 `속물의 생활`도 추하지만 거룩함과 경건을 잘못 이해하여 발에
흙 묻히기를 거절하고 스스로 정결하다고 자만하면서
어려운 삶의 현장에는 장님이 되는 `수도원적인 신앙`도
별로 쓸모가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남다른 특권이 주어졌지만 그것은 곧 남다른 책임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곧 값없이 죄 용서받고 `살아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므로 `죽어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빚이 있다는 것이다 (롬1:14).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위해, 내 나라를 위해
눈물을 쏟는자들을 찾고 계신다. 그리고 큰 거리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다운 신앙인도 찾고
계신다.
영광은 고난의 언덕 너머
이 세상에 영광을 싫어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광이 고난의 언덕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에 영광은 모든 사람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망의 자유와 희망의 자유, 이 두 가지 자유는 사람이면
누구나 향유하는 자유입니다. 긍정할 자유와 부정할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 자유와 그 선택 다음에 오는 결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절망과 부정의 자유는 전락이며, 희망과 긍정의 자유는 발전으로 통합니다. 그것은 신앙과 불신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구원과 죽음에로 통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는 밝은 곳도 있고, 어두운 곳도 있습니다. 어느
곳을 향하여, 어느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날 바다에 거센 풍랑이 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도 해녀는 바다에 뛰어들어 해물을 캐어내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물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바람이 거센 날도 바다에 들어갑니까?” 해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풍랑이 바다에 있지, 바다 속에도 있나요?” 이렇듯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면 삶의 껍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나 문제들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난의 언덕 너머에 있을 영광을 믿고 바라는 사람들은 오늘의 풍랑과 시련을 견디어낼 수
있습니다. 절망만 보면 절망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음악 작품을 남긴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생애는 그의 작품처럼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를 키워준 형이 있었지만, 그는 자기가 먹여 살려야만 되는 동생을 몹시 미워하였습니다. 그후
어른이 되어서도 생활은 마찬가지로 어려웠습니다. 결혼한 지 13년
되던 해 부인이 죽었습니다. 또다시 결혼하게 된 그는 모두 스무 명의 자녀를 갖게 되었는데, 그중 열 명은 어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른 한 명은 스무 살
즈음 되어 죽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정신 박약아 였습니다. 나이가
많아지자 이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계속 작곡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들이었습니다.
도대체 이토록 비참하게 살았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 세계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그가 이처럼 심오한 믿음과 찬양의 세계를 알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가 인생의 고난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깊이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항상 S.D.G. 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Soli Deo Gloria!) 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첫 번째 글자들입니다. 올갠을 위한 합창 전주곡들은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께' (The most High God!) 바치는 곡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갠 반주만을 위한 작품들의 첫 부분에는 I.N.J. 즉 '예수
이름으로' (In Nomine Jesus ; In the name of Jesus) 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바하는 물론 유명한 올갠 연주자였으며 훌륭한 작곡가였습니다. 무시무시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일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바하의 삶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시련 없는 영광은 없다
시드니 올림픽 여자 다이빙에서 우승한 미국의 로라 윌킨슨.그녀가 오른쪽 다리 골절상을 당한 것은 지난 3월.코치는 윌킨슨을 향해 ‘올림픽 출전불가’를 선언했다.그러나 그녀는 하루에 수십번씩 한 성경구절을 묵상하며
힘과 용기를 얻었다.그리고 마침내 올림픽에서 아무도 예상못한 금메달을 획득했다.윌킨슨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성구는 빌립보서 4장 13절이었다.“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희망적인 성구 하나가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운동선수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육상 여자 800m 금메달 수상자인 모잠비크의 무톨라.그녀는
포연이 걷히지 않는 전장에서 성장했다.그녀는 마땅한 놀이가 없어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그녀는 굶주림과 고독을 재료로 삼아 세계 최고의 육상선수로 우뚝 섰다.
시련없는 영광은 없다.고난은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최상의 재료다.
가장 수치스러운 연단의 자리에서 만난 가장 영광스런 예수님
"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 (베드로전서 1 : 7)
윤형주(53, 온누리교회),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하기 시작해서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장로 가수이다. 그런데 그에게도
연단의 시절이 있었다.
1975년 12월 2일, 연예인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영광이 계속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그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고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어느 날 감방 안에서 햇살 속에 놓여 있는 성경을 바라보게 되었고 성경을 읽어나갈 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셨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세상이 보기에는 구치소가 저주의
자리였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축복의 자리였다.
"비록 밧줄에 묶이고 수갑에 채워져, 법정에 나가야 하는 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법이나를 해방시켜 주었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 선포가 내게 임하였습니다. 주님은 나의 죄 사슬을 끊으시고, 내 목소리의 주인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아픈 만큼이나 은혜의 감격도 컸던 것이다. 그 이후에 그는 완전히 바뀌었다.
부활의 영광
미국 보스톤 교외에는 골든 코넬 신학대학원이 있다. 이 코넬 신학대학원은 시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럿셀코넬이라는 지휘관이 있었는데 전쟁에서 후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지휘관이 그만 자신의 지휘도를 버리고 오게 되었다. 수치스럽게 되었다. 그래서 코넬 대령은 링이라는 소년을 시켜서 그 칼을 가져오도록 했다. 이
소년은 목숨을 걸고 적진속에
들어가 칼을 갖고 오기는 했으나 그만 총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천막에 들어와서 칼을
바치고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나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홀로 지켜본 무신론자였고 회의주의자였던 코넬은 시체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오! 주여, 이 어린이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읍니까? 주여 이 어린이가 찾는 하나님을 위해서 제가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결단했다. 나중에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서 세운 것이 골든 코넬 신학원이다. 아울러 Temple University를 세워서 수많은 지도자를 양성했다. 링의
죽음은 불행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코넬 대령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No cross, No crown -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의 면류관도 있을 수 없다.`
승리영광
진실된 변화를 가지라.
생각의 변화를
결단으로 이루어진 삶의 변화를
승리로운 영광의 역사란?
참된 변화의 역사를 이룬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이 영광을 얻고자 하는 자마다
변화의 삶을 추구하며
진리의 말씀 속에서
흐트러짐이 없는 변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오늘의 고통스러움은 내일의 큰 영광을 이룸이니
잠시의 세상 락에 유혹되지 말라.
승리의 영광은 값지나 땀과 노력의 결정
달콤한 순간의 쾌락은 매혹적인 것
순간의 선택은 내일을 결정하니
어디로 갈거나?
순간의 즐거움은
영원한 고통과 후회를 이루고
오늘의 고통스러움은
영원한 영광의 풍요로움을 이룬다.
교회에 봉사하는 영광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복음주의 신학자인 토니 캠폴로가 95세 이상을 살아온 노인 50명에게 “당신이 인생을 다시 산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라고 설문조사를
했다. 제일 많이 나온 대답은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인생을
좀더 진지하게 살겠다”였고 또 하나는 “죽음 이후에도
계속될 일을 위해 내 인생을 투자하겠다”였다.
그들은 95세 이상을 살았지만 돌이켜볼 때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너무나 낭비만
해왔음을 느낀 것 같다. 또 그토록 장수를 하였지만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니 인생이 너무나 짧고 허무하며
죽음 이후의 내세가 몹시 불안했던 것 같다. 아마도 이 두가지의 대답은 모든 인류의 고백이기도 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 사라지며 지나가는 것들이고 찰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땅에서 영원한 것이 있다. 그것은 세가지인데 주님(히 1:11-12)과 말씀(벧전 1:24-25)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성도(요일 2:17)이다. 그런데 이 영원한 세가지를 몽땅 농축해 놓은 집합체가
바로 영광스런 그리스도의 교회이다.교회란 주 예수께서 그 머리가 되시고 그분의 말씀이 생의 원리가
되며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더구나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진행되는 것을
행하고 있는 곳이 교회이다. 즉 교회생활은 저 영원한 천국의 영광스런 삶을 미리 준비하고 연습하고
리허설을 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우리는 이 땅에서 두가지가 결정된 채 살아간다. 첫째는 “어디에서 영원을 보낼 것인가”이다.이것이 확실하게 결정된 사람,천국에서 영원을 보내기로 결정한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둘째는 “어떻게 영원을 보낼 것인가, 겨우 턱걸이로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영광 위에
영광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이다.
교회에 봉사하는 것은 “어떻게 영원을 보낼 것인가”를
위한 숙제를 하는 것이다. 하늘 상급을 쌓는 것이요, 천국에서
영광 위에 영광의 삶을 살기 위한 저축과 투자를 하는 것이다. 벌써 우리 인생은 많은 세월을 보냈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이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다.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하고 영광스럽다. 이걸 아는 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리라.
영광의 길
언제나 자기 맡은 일에 성실하고 근면했던 한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일해서 세계 최대의 재벌로 부상했다.
록펠러 (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부자라는 이미지만 지니고 있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그의 자선사업이다.
그는 이를 위하여 록펠러 재단을 세웠고, 5억 3천만
불 이상에 달하는 엄청난 돈을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쾌척(PhOx)한 사람이다.
이만하면 록펠러는 분명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후손에 의하여 더욱 빛나고 있다.
우선 그의 사업을 이어받은 록펠러 2세를 살펴보자. 그는
브라운 대학을 졸업한 수재로서 아버지의 사업을 더욱 빛내고 자기들 기업 이미지를 아름답게 가꾼 사람이다.
원래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창업에 못지않게 수성 또한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어려운 수성을 멋지게 성공시켰던 것이다.
그 다음 세대를 보자.
록펠러의 손자들은 하나같이 아이비 리그를 졸업한 수재들이다.
이들은 세상에 나와 은행장, 뉴욕주 지사, 자선
사업가, 아칸사스주 지사, 미 연방정부의 재무장관, 대통령 특별보좌관, 부통령 등을 역임하면서 더 더욱 그들 가문을
빛내 주고 있다.
록펠러 가문에 이런 영광을 가져다 준 비결은 무엇일까 ?
그것은 각자 0자기 일0에 최선을 다하는
가풍(@ QG)에 있다.
그들은 이 가풍을 영속시키기 위하여 지금도 자녀들이 만 7세만 되면, 누구나 자기 잡비는 스스로 벌어 쓰도록 조처하고 있다......
영광을 돌리는 감사
눅 17:11-19/찬송 489장
중국 고사에서는 보은조라 하여 까마귀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이는
새끼 까마귀가 자신을 낳고 기른 어미 까마귀를 봉양한다하여 생긴 말이다. 미물인 새도 어미의 은혜에
감사하며 봉양하는데 사람들은 좀처럼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간다.
본문으로 들어가면 병 고침을 받은 열 명 중 한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께 돌아와 엎드려 사례했다고
밝히고 있다(16절). 발 아래 엎드린다함은 진실된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의 행위였다. 예수님께서는 감사한 사람에게 육신의 질병만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의 큰 은총을 내리셨다(19절). 아홉
명과 이 한 명의 차이점은 감사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물으신다.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
(화) 성숙한 감사
합 3:17-19/찬송 495장
'주님께 감사'라는 복음성가가 있는데 가사를 보면
"날 구원하신 주 감사/모든 것 주심 감사/향기로운
봄철에 감사/외로운 가을날 감사/응답하신 기도 감사/거절하신 것 감사/아픔과 기쁨도 감사"라고 노래한다. 이것은 모든 것에 감사하겠다는 고백의
찬양이다.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아무 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라는 고백을 한다. 특히 본문 17절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식을 의미하는데 이런 양식들 즉 일용할 양식이 없다고 할지라도 여호와를 향한 구원의 소망만은 버리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얻거나 받을 때만이 감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구원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만으로도
감사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수) 나눔의 감사
신 26:1-11/찬송 307장
몇년 전 어느 신문에 50대의 한 노숙자가 노숙자 쉼터에서 생활하다 공공근로에 참여하면서
모은 돈으로 자신을 추위와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 준 노숙자 쉼터에 "제가 반환하는 돈으로
또 다른 실직 노숙자가 구제 받을 수 있다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라는 감사의 편지와 함께
약간의 돈을 보내었던 글이 소개된 적이 있었다. 본문은 나눔이 있는 감사예배를 보여준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이웃과
함께 나눔으로 즐거워했다(11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날마다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는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목) 범사에 감사
살전 5:18/찬송 460장
어느 시골 동네에 가난하고 늙은 한 집사가 살았다. 주일 아침에 헌금 대신 동태 다섯
마리를 드리려고 머리에 이고 가는 도중에 강도에게 각목으로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믿지 않는 자녀들이
병원으로 달려와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며칠 후 그 어머니는 깨어나자마자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려고 가져갔던
동태 다섯 마리가 제 대신 각목을 맞아 주었기에 제 머리가 부서지지 않았습니다"라고 기도했다. '범사에'라는 말은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조건이 있음을
말한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 그것이 이미 또 하나의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금) 변화시키는 감사
눅 19:1-10/찬송 507장
아동문학가 방정환 선생님 집에 어느 날 강도가 들어와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여보시오
돈을 가져가면서 고맙다는 말이나 하고 가져가야 하지 않소"하면서 순순히 돈을 내주었다. 강도는 "그래 고맙다"고
하면서 가버렸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강도가 붙들려 왔다. 경찰이 "이 사람이 방 선생님 돈을 빼앗았다지요?"하고
묻자 "아니요 나는 이 사람에게 돈을 뺏긴 일이 없어요"하면서
강도에게 "이 사람아! 돈을 받아가면서 고맙다고
하지 않았소?"라고 했다. 경찰로부터 풀려난
강도는 너무나 고맙고 감격하여 그 후 방 선생님 댁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본문 8절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여 자기 집으로 모신 삭개오는 예수께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지만 감사하여 자신의 행위를 회개하고 재산을 포기하는 결단을 했다. 주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의지적인 삶의 결단을 해야한다.
(토) 여호와께 감사
시 136:1-26/찬송 404장
신앙심이 돈독한 어떤 성주가 식사를 하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신하들의 자세를 고치기로 마음먹고 한 거지를 식탁에 초청했다. 거지는 평생 처음 먹어 보는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성주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영광도 누렸지만
식사 후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그냥 나가 버렸다. 이 모습을 본 신하 중의 한 명이 "저런 은혜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구"라고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광경을 본 성주는 "그대들도
역시 날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거저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있잖소"라고 일침을
가했다.
본문은 "여호와께 감사하라"로
시작한다. 감사해야 할 이유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날마다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날마다, 어디서나 여호와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과 영광
한 선교사가 지방 교회를 순회하러 떠났을 때에 신문에 그가 사도와 같이
거룩하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이것을 본 선교사 부인은 매우 기뻐하면서 남편이 돌아오면 보여 주려고
그 신문을 잘 간직하였다. 얼마 후 그 선교사가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오자 그녀는 그를 반가이 맞이하여
그 신문을 내보이면서 '얼마나 기쁜 일이 예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선교사는 오히려 시무룩해져서는 '아니오 나는 사도와
같이 되고 싶은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은 하늘에 가면 있고 이 땅에 서는 주님과 그의 제자들처럼 고난받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거리에서 영광을
어느날 아침 읽고 고개를 끄덕인 이야기가 있다. 어떤 곳에 아름다운 색유리로 창문을 만들고 그 위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Glory to God in the Highest) 이라고 새겼다.
그런데 어느날 동네 아이들의 돌판매로 유리 한 쪽이 깨지면서 영어 글자 `e`가 떨어져나가 `Glory to God in the High st.`(
큰 길에서 하나님께 영광)가 되어 버렸다. 그
곳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갸우뚱 거렸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딘지 납득이 가는 내용이 된 것 같다. 즉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어수선하고 욕설이 나며 심지어 불신과 불평이 넘치는 큰 거리와 골목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이 절실히 필요한 때인 것이다. 분별력이 없이 세파 속에 뒤섞여서 아무런
구별이나 특징도 없이 휘몰리며 죄를 즐기는 `속물의 생활`도
추하지만 거룩함과 경건을 잘못 이해하여 발에 흙 묻히기를 거절하고 스스로 정결하다고 자만하면서 어려운 삶의 현장에는 장님이 되는 `수도원적인 신앙`도 별로 쓸모가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남다른 특권이 주어졌지만 그것은 곧 남다른 책임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곧 값없이 죄 용서받고 `살아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므로 `죽어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빚이 있다는 것이다 (롬1:14). 이 시대에 하나님께
서는 백성을 위해, 내 나라를 위해 눈물을 쏟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그리고 큰 거리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다운 신앙인도 찾고 계신다.
영광을 받으실 분(기도,모든
지식의 근본)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조셉 하이든은 훌륭한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하이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셔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창조]입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존 밀턴의 [실락원]에 근거해서 그는 이 위대한 [천지창조]를작곡했습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하게 되던 날입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 지휘를 하던 지휘자는 정말 놀랍게 이
음악을 하나님 앞에서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의 박수를 중
단 시키면서 뒷자리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입니다. 저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
본문: 에베소서 2장 11~22절
미국 LA 패서디나의 위스트민스터에서 오신 은퇴 선교사님들을 소개합니다. 이 분들은 자신의 젊음을 언어와 풍습이 다른 선교지에서 보내셨습니다. 지금
이 분들의 평균 연령은 80세 정도 됩니다. 이런 분들이
주님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셨기에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애를 사신 분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웨스트민스터 가든에서 그럽 선교사님을
만났을 때 "우리가 선교지에서 일했던 과거를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번 한국 초청에 기뻐하시면서 건강이
좋지 않아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도 선교에 대한 불타는 열정, 헌신,
배우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마음에 큰 감동이 일었습니다. 이런 분들로 인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우리도 이 분들처럼 선교지에 가서
평생을 선교사로 살 때, 그 민족과 역사가 변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온누리교회의 본질과 사명입니다.
■ 인생에서
분기점을 갖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 삶의 특징은 분기점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ㅍ녀가 되었다면 생애에서 놀라운 하나의 분기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BC와 AD로 나누는 분기점이 생겼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예수님을
만나면, 그 시점을 분명하게 나누는 분기점이 생깁니다. 마라톤
경기에서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반환점이 있습니다. 어느 시점까지 가게 되면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믿기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분기점, 반환점, 변화가 없다면 불행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정 하나님을 만났다면
중요한 특징을 나타냅니다. 지나온 과거를 모두 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은 사람은 미래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상처, 아픔, 불행을 끌고 안고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과거를 모두 끌어안고 나아 가려하기 때문에 미래는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현재가 불행한 까닭은 과거를 계속 끌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불행한 과거를 끊는 일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과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내가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 생활입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과거의
우리는 손님이나 외국인처럼 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외인(foreigner)은
외부인, 모르는 사람, 소속되지 않은 사람을 뜻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한국 사람이
미
국에서 시민권을 얻어 살다가도 죽을 때는 한국에 와서 죽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하나님이 없이 사는 것은 외국인처럼 사는 것인데 이제는 더 이상 외국인이 아닙니다. 19절 말씀에서
우리는 변했습니다. 신분도, 위치도 변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변한 것입니다. 신앙이란 발전하는 게 아니라 변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연장이 아니라, 과거를 끊고 새롭게
미래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를 모두 청산하기를 축원합니다. 다시는 과
거를 기억해선 안 됩니다. 슬프고 고통스러우며 불행했던 과거를 묻어 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미래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19절에선 우리의 미래를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정체
첫째, 우리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신분에 변화가 왔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딴 것입니다. 원래 착하고 모범적인 사람에게 시민권을 주는 게 아니라, 그 나라에서 태어나면 시민권을 줍니다. 우
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착하고 훌륭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권속(household)은 쉬운 말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속해 있다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인데, 하나님
나라에 이름을 등록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격려와 관심을 받습니다. 가족은 '상속권'을
갖는다는 게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 대우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이유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셨느니라
셋째,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중요한 것은 '터'와 '기초석'입니다. 건물을 세우려면 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아무데서나 함부로 세워지고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요, 우연의
존재가 아니요, 족보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
들과 선지자들의 순교와 믿음의 터 위에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현주소는 갑자기 생긴
게 아닙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들의 터와 순교의 피 위에 신약 시대 사도들의 믿음의 고백 위에 서
있습니다.
■ 모퉁이
돌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교회를 건물로 친다면 가장 중요한 게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기초를 가리켜 모퉁이돌cornerstone)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돌입니다. 기초석은 세상의 지식이나 명예 등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과 하나님의 집을 짓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모퉁이돌
역할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 건물의 기초를 놓는
것입니다. 모든 건물은 모퉁이돌에서 시작합니다. 그 모퉁이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둘, 모든 건물의 무게는
모퉁이돌에 실려 있습니다. 모퉁이돌이 흔들리면 건물 자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셋, 모퉁이돌은 건물을
지을 때 맨 처음 놓는 것인데, 거기에서 건물의 크기와 방향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모퉁이돌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가 만들어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입니다. 그분이 모퉁
이돌이기 때문에 우리는 벽돌, 창문, 유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집을 만들어 가는 아름다운 역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20절 말씀의 요점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요, 하나님의
가족이요, 하나님의 집을 이루는 '지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는 부속품이 됐다는 겁니다. 세상에 많은 뉴스가 있
지만, 가장 크고 기쁜 뉴스는 우리가 '천국
시민권'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적됐다는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이것은 돈이 생기고 건강이 좋아지고 명예를 얻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것이
교회
입니다.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넷째, 우리는 하나님의 건물이요, 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보통 학교라고 할 때, 건물이나 시설을 말하지 않습니다. 좋은 건물이 있다고 일류 학교라
하지 않습니다. 건물 안에서 어떤 교육이 이뤄지는지에 따라 일류,
이류 학교가 결정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큰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불에 타 없어질 수도 있고, 지진으로
인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진짜
교회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진짜 교회는 우리를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하신 그분이 교회의 기초석입니다.
■ 교회의
본질은 '네트워킹'
오늘 영광스런 주님의 교회가 여기 있습니다. 17전에 몇 가정이 지하실에 모여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3만 명의 성도들이 모이게 됐습니다. 생각하면 거짓말 같은 현상입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21절 말씀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좀더 깊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각자 개인들이 모이면 '모아지는
교회'고, 흩어지면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서로 만나 교제하고 떡을 떼며
사랑을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며 주님께 나아가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교회이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이 있으며 성령이 역사하는 곳이 교회입
니다. 교회는 세상 어두운 곳으로 가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21절에서는 더욱 놀라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건물마다 서로 연결돼
있다"라는 기막힌 말씀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서로 연결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교파나 교단을 만들어서 분리하고 있습니다. 네 교회 내 교회, 네 교파 내 교파로 분리하는 것은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지
상의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 예수님의 교회, 성령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마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집집마다 수도 파이프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집에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화선도 다른 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기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네트워킹'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네트워킹'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들, 성도들이
네트워킹하지 않으면 죽고 맙니
다. 혼자 예수님을 믿으면 죽게 됩니다. 생명은
받아들이고 내보내야 합니다. 자꾸 움직여야 죽은 세포가 사라지고 살아있는 세포가 생겨납니다. 건물, 교회, 교파가
다르지만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 교회에 '배우든지 가르치든지'라는 모토가 있습니다. 또 '오는
교인 막지 말고 가는 교인 막지 말라'는 모토도 있습니다. 갈
때 그냥 가십시오. 누가 뭐라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자꾸 흘러야 합니다. 생명은 흘러야 하고 네트워킹돼야 합니다. 남녀노소, 동서남북이 연결돼 있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큰 힘이 나오게 됩니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영적인 힘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 힘이 교회입니다. 건물과 건물이
서로 연결돼 있는 게 교회입니다. 성령은 흘러야 합니다. 생명은 흘러야 합니다. 말씀은 흘러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새싹이 돋고 꽃이 피며 향기를 발하고 열매를 맺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또 21절에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라고 합니다. 세상에 완성된 존재는 없습니다. 우리는 'being'이 아닌
'becomeing'입니다. 끝난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완성된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미완성인 사람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부족하다는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실수가
있고 부족하며 연약한 것은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변할 수 있는
'미래'가 있기 때문입
니다. 오늘과 내일이 다르고, 내일과 모레가
다르고, 한 달과 두 달이 다르고, 올해가 다음해와 다른
것입니다. 좀 부족하고 실수하고 못난 것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변화하고 성장하고 성숙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한 걸음씩 변해 갑니
다. 여러분에게 변하여 성숙하고 완성되어 가는 축복이 있길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변할 것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움직이며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모퉁이돌 되신 교회에 한 부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연결돼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온누리교회의 비전이요, 모습입니다.
■ 온누리교회의 3가지 한계와 대안저는 요즘 2003년을 계획하면서, 지난 17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부어주신 축복을 생각합니다. 그런 중에 우리 교회가 가진 세 가
지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첫째, 물리적인
한계입니다. 1년에 새신자가 5천여 명이 찾아오는데 담을
그릇이 없습니다. 서빙고와 양재를 합쳐 주일 예배를 열두 번 드립니다. 그것도 부족해 오는 10월
19일부터 토요일에도 예배합니다. 더 이상 건물을 지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온누리교회는 물리적인 한계에 부딪혀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리더십의 한계입니다. 온누리교회에 훌륭한 리더십들이 많이
있는데,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20% 미만입니다. 나머지 70~80%는 수동적이거나 소극적입니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분들의 리더십이 확대되지 않고 있습니다.
셋째, 소프트웨어의
한계입니다. 온누리교회에 굉장히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는데, 어느
정도에 이르면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며 더 이상 넘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입니다. 저희는 기도하면서 대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빙고와 양재에
있는 공간으론 더 이상 앉을 자리를 마련할 수 없습니다. 온누리교회에 30개 지역 공동체가 있는데, 전부 교회로 만들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지역 공동체가 1천명에서
3천명씩 모일 수 있다면 30개면 10만
명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됩니다. 그래서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온누리교회에 1만 명의 순원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1년 안에 순장으로 변할 수 있다면 리더십은 극대화되고 영향력은 대단하게 될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되면 1만 개의 순이 생기고, 1만 명의 리더십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소프트웨어의
한계는 온누리인터넷방송과 사이버 교회를 통해 전 세계 어디에서 온누리교회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롭게 지어져 세상 전역에 넝쿨이 되고, '하나님의
전위대'가 되어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곧 21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런 영적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마지막으로, 성경 본문은 우리가 더 이상 외국인, 손님, 방관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 하나님 가족의 일원, 하나님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날마다 새롭게
변화·성숙·완성해 가는 존재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이 거하는 집입니다. 성령이 거하는 집입니다.
■ 예수님의
자화상 '교회'
심방을 가보면 성도님이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맞이합니다. 향수를 뿌리고 꽃으로 장식합니다. 혹시 연락하지 않고 그냥 가면
더욱 야단입니다. 제가 가도 그 정도인데 하나님께서 오신다면 상상이 안 될 정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하고 기적을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자화상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보면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요, 성령님의 집입니다. 우리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한
곳에 모여 안주하고 있으면 절대 안 됩니다. 우리가 교제하며 떡을 떼고 사랑을 나누며, 예배하고 힘을 얻은 후에는 가정으로, 세상으로 나가 변화시켜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첫걸음은 교회를 나서면서 쓰레기부터 줍는 일입니다.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쓰레기도 줍고 먼지도 닦고 부서진 곳을 고치는 것입니다. 천국은 얼굴에 밝은 미소를 짓고 사랑을 나누며 서로 격려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창립 17주년을 맞은 온누리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비전을 가지십시오. 가정을 변화시킨다는
꿈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온 세상에 예수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성숙케 되어 변화하는 기적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영광을 받으실 분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조셉 하이든은 훌륭한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하이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셔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창조]입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존 밀턴의 [실락원]에 근거해서 그는 이 위대한 [천지창조]를 작곡했습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하게 되던 날입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 지휘를 하던 지휘자는 정말 놀랍게 이
음악을 하나님 앞에서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자리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입니다. 저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하이든을 바라보며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이
갑자기 청중들을 중단시키면서 말합니다. "아니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하나님의 영광 감사
1946년 6월 공산주의자들은 일제하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주 영진 전도사를 잡아갔다.
이때 주 목사님의 부인되시는 오정모 여사는 다음과 같은 감사 기도를 드렸다.`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제물로 받으시더니 또 그 아들까지
받으시려 합니까? 한없는 영광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린 종에게 담대한 마음을 주시사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감사였다. 감사란 세상에 것만 아니라 신령한 것 하늘의 것임을 보여준다.
영원한 영광을 위한 준비
영국의 한 석탄광에서 광이 무너지면서
150여 명이 넘는 광부들이 구출되지 못한 채 결국 사망했던 일이 있었다.
후에 시체 발굴 작업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져 있는 판자를 발견했다. `주님은
우리와 같이 하십니다. 우리는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여, 축복하소서. 우리는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영원한 영광을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4선의
영광
아브라함 링컨은 스물 세 살에 주의회 의원으로 입후보하였을 때, 선거용 전단에다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나는 젊고 또
내가 누군지 아는 분도 많지 못합니다. 나는 삶의 가장 미천한 곳에서 태어나 여지껏 거기 머물러
있습니다. 나를 천거해 줄만한 부유하거나 명망있는 친척도 없습니다.
뽑아주신 다면, 여러분은 저에게 커다란 호의를 베푸시는 셈이고, 나는 그 호의에 보답코저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착하신 어른들께서 지혜롭게 판단하시어 나를 뒷전에 그냥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신다 하여도 상심하지
않을것입니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실망을 겪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이 선거에서 그는 낙선의 쓴잔을 마시기는 하였지만, 23세의
젊은 나이에 이미 이런 도량과 포부와 용기를 가지고 정치에 임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결국 그는 2년후인 1834 년에
드디어 일리노이주 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 후에 줄곧 당선되어 4선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영광을 받으실 분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조셉 하이든은 훌륭한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하이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서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 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창조>를 작곡했습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하게 되던 날입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 지휘를 하던 지휘자는 정말 놀랍게 이 음악을 하나님 앞에서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 자석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입니다. 저 분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하이든을 바라보며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이 갑자기 청중들을 중단시키면서 말합니다. `아니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찬란한주의영광(헨델메시아)
오라토리오 <메시야>를 쓴 죠지 프레드릭 헨델은 많은 오페라를 작곡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몇 편의 가극이 실패하고 그의 라이벌 보눈치니의 쉴새없는 공격으로 거
의 파산지경에 봉착했을 때 `헨델은 이제 끝났다`는
소문이 런던에 파다하게 돌고 있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작곡한 것이 <메시야>이다. 그는
불과 23일간 기도하다
가 작곡하고 작고하다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그의 행운이
쇠퇴한 때요, 소생의 가망이 없다고 하던 때에 그는 영력의 호스를 하늘에 꽂고 계속 능
력을 공급해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가 합창곡 제 44번 <할렐루야>의 작곡을 완료했을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고 `내 앞에 천국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위대하신 하
나님을 보았다. 오 주여, 주여-`라고 외쳤다. 그리고 모든 악보를 완성한 후 `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구나`라고 함
영광의 상처들
메흐디 디바즈라는 이란 그리스도인 지도자는 고문을 받고 약 1평방미터 크기의 독방에
감금되어 결국에는 1993년 12월에 사형
언도를 받았다. 모슬렘으로 자라난 그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배교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배교에 대한 벌은 사형이었다. 그는 감옥에서도 "나의 구원자 되신 분을 따르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라는 글을 남겼다. 그를
염려하던 전 세계 사람들의 탄원 덕분에 그는 잠시 옥에서 풀려났지만 결국 1994년 7월에 피살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가혹한 판결을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지를 재어 보시는 하나님의 시험'으로
생각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사람들은 -
그 정도에 상관없이 - 몸에 입은 상처건 감정에 입은 상처건 자기를 둘러싼 환경에 입은
상처건 이 모든 것이 영광의 상처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위로를 받았다. 우리는 장애물을 만나면 항상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지?'라고 질문합니다. 우리의 성향은 모든 역경을 방해물로 생각하면서 이 모든 어려움이 끝나고 소위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늘 소망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반드시 역경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영광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 궁창은 그의 솜씨를 보여 주도다 여러
해전 아이작 뉴톤 경이 태양계의 축소판 모델을 만든 적이 있었다.
복판에 있는 태양은 금색을 칠한 큰공을 만들어 달아놓고 그 주위에 막대기를 연결해서 수성, 화성, 지구, 목성 등을 달고 톱니바퀴와 벨트로 태양 주위로 정확하게
회전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하루는 뉴톤이 그 모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성경의 창조설을 믿지 않는 친구가 마침 방문했다. 그
친구가 뉴톤에게 물었다. “뉴톤, 이것 참 정교하게 만들었네요! 누가 만들었소?” 뉴톤은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도 만든 사람이 없소!” “아니, 만든 사람이 없다구요?”
“그럼요, 제가 만든 사람이 없다고 했잖아요. 공처럼
생긴 모든 위성들, 톱니바퀴, 혁대들, 또 정확한 시간에 정해진 궤도를 도는 것 등 전부가 저절로 우연히 생겼습니다. 믿어지세
요?” 친구는 드디어 창조주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 궁창은 그의 솜씨를 보여주도다’(시편 19:1).
찬란한 주의 영광
오라토리오 <메시야>를 쓴 죠지 프레드릭 헨델은 많은 오페라를 작곡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몇 편의 가극이 실패하고 그의 라이벌 보눈치니의 쉴새없는 공격으로 거
의 파산지경에 봉착했을 때 "헨델은 이제 끝났다"는 소문이 런던에 파다하게 돌고 있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작곡한 것이 <메시야>이다. 그는 불과 23일간 기도하다
가 작곡하고 작곡하다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그의 행운이
쇠퇴한 때요, 소생의 가망이 없다고 하던 때에 그는 영력의 호스를 하늘에 꽂고 계속 능
력을 공급해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가 합창곡 제 44번 <할렐루야>의 작곡을 완료했을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고 "내 앞에 천국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위대하신 하
나님을 보았다. 오 주여, 주여-"라고 외쳤다. 그리고 모든 악보를 완성한 후 "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구나"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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